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450년 전 일본은 여러 작은 영지로 나뉘어 있었고, 그 영지를 다스리는 무사 우두머리들이 쉴 새 없이 싸웠어요. 이 긴 싸움의 시대를 ‘전국 시대’라고 해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작은 영주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나이에 더 힘센 집안에 인질로 보내졌지요. 인질은 자기 집안이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표시였어요. 그는 집을 떠나 자라면서 참을성 있고 신중한 사람이 되었어요.
어른이 된 그는 일본을 하나로 묶기 시작한 대담한 무장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어요.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았고, 이에야스는 그를 섬기면서도 일본 동쪽에서 조용히 힘을 길렀어요. 그곳에서 에도라는 작은 마을을 근거지로 삼았는데, 에도가 바로 오늘날의 도쿄예요.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라는 곳에서 큰 전투에 이겼어요. 1603년 천황은 그에게 무사들의 최고 지도자인 ‘쇼군’이라는 칭호를 주었어요. 그 뒤 그의 집안이 250년 넘게 일본을 다스렸고, 오랜 평화가 이어졌어요.
일본 사람들은 세 명의 통일 영웅을 울지 않는 새 이야기로 비교해요. 노부나가는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 히데요시는 “울고 싶게 만든다”,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그들이 죽고 한참 뒤에 지어졌지만, 사람들이 이에야스를 기회를 기다린 참을성 있는 사람으로 기억한다는 것을 보여 줘요.
한눈에 보기
- 생몰
- 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
- 출생
- 미카와국 오카자키성(지금의 아이치현). 아명은 마쓰다이라 다케치요
- 사망
- 은거지 슨푸(지금의 시즈오카)
- 지위
- 세이이타이쇼군(1603–1605), 이후 죽을 때까지 오고쇼(大御所)
- 결정적 전투
-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10월 21일(게이초 5년 9월 15일)
- 근거지
- 에도(지금의 도쿄). 1590년부터 근거지, 막부의 소재지
- 유산
- 에도 막부(1603–1867). 사후 도쇼다이곤겐으로 신격화되어 닛코에 모셔짐
쉬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누구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지방의 무장 영주인 다이묘에서 출발해 일본 전체의 지배자가 된 인물이다. 한 세기 넘게 이어진 내전을 끝낸 ‘세 명의 천하인’ 가운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은 세 번째로 꼽힌다. 그가 세운 도쿠가와 막부, 곧 에도 막부는 1603년부터 1867년까지 일본을 다스렸다.
이에야스의 삶은 길고 굴곡이 많았다. 어려서는 인질이었고, 젊어서는 노부나가의 동맹자였으며, 중년에는 히데요시의 경쟁자였다가 신하가 되었고, 오십대 후반에야 일본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신중함과 인내, 가신들을 치밀하게 다루는 능력, 그리고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냉혹해질 수 있는 면모로 알려져 있다.
그가 만든 체제는 에도의 쇼군 정부와 다이묘가 다스리는 200–300개의 번(藩)을 결합한 것이었다. 이 체제 아래 오랜 국내 평화가 이어지며 도시와 상업, 교육, 서민 문화가 꽃피었지만, 막부는 종교와 대외 접촉, 무사 계급의 움직임을 엄격히 통제했다.
쉬움
인질로 보낸 어린 시절
이에야스는 미카와국 오카자키성에서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아들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쪽의 오다 가문과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이라는 두 강자 사이에 낀 작은 영주였다. 젖먹이일 때 어머니는 정치적 이유로 친정으로 돌려보내졌고,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다섯 살 무렵 다케치요는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가던 길에 납치되어 오다 가문에 넘겨졌고, 그곳에서 2년쯤 지냈다. 포로 교환으로 풀려난 뒤에는 이마가와의 본거지 슨푸로 보내져 소년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다. 1549년 아버지가 죽자 마쓰다이라의 영지는 사실상 이마가와의 손에 들어갔다.
인질 생활이 감옥살이는 아니었다. 그는 좋은 가문의 무사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고, 성인식을 치러 어른 이름을 얻었으며, 이마가와 일족의 여성, 훗날의 쓰키야마도노와 혼인했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충성과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지 배웠다.
쉬움
독립과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었다. 당시 모토야스라 불리던 젊은 마쓰다이라 영주는 이 틈을 타 오카자키로 돌아가 이마가와에서 독립했다. 1562년 노부나가와 맺은 동맹은 20년 동안 이어졌다. 그는 곧 이에야스로 이름을 바꾸었고, 1566–1567년에는 유명한 무사 가문 미나모토씨의 후손을 자처하며 성을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1563–1564년 미카와에서 일향종(정토진종) 신도들이 봉기했을 때는 가신 일부까지 반란에 가담해 이를 진압해야 했다. 이어 동쪽 도토미국으로 세력을 넓혀 1570년 하마마쓰로 본거지를 옮겼다. 1570년 아네가와 전투,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싸웠는데, 나가시노에서는 대량의 조총 사격이 다케다군을 무찌르는 데 힘을 보탰다.
패배도 있었다. 1573년 초 명장 다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에서 이에야스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1579년에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일 가운데 하나가 일어났다. 다케다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아내 쓰키야마도노가 죽임을 당하고 맏아들 노부야스가 할복한 것이다. 그 까닭은 아직도 논쟁 중이다. 1582년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자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스루가국을 주었다.
중급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사이: 경쟁자, 신하, 간토의 주인
1582년 6월 노부나가는 교토 혼노지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적은 수행원만 데리고 사카이 일대를 방문 중이던 이에야스는 이가의 산길을 넘는 위험한 여정 끝에 미카와로 돌아왔다. 뒤이은 혼란 속에서 그는 호조씨 등과 옛 다케다 영지를 다투어 가이와 시나노를 얻고 다섯 지방의 영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들 가운데 재빨리 앞선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1584년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쓰를 지원해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맞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두 사람은 싸움을 이어 가는 대신 타협을 택했다. 히데요시가 누이를 이에야스와 혼인시키고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내자, 이에야스는 1586년 정식으로 히데요시에게 신종했다.
1590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의 호조씨를 멸망시킨 뒤, 이에야스는 대대로 다스리던 지방을 떠나 동쪽 간토 평야로 옮겨졌다. 더 넓지만 중앙에서 먼 영지였다. 그는 작은 성시(城市) 에도를 본거지로 골라 개발하기 시작했다. 흔히 그를 중앙에서 떼어 놓으려는 조치로 보는 이 전봉은 오히려 그에게 넓고 단단한 세력 기반을 안겨 주었다.
히데요시가 1592년과 1597년 조선을 침략했을 때 이에야스는 규슈 북부 히젠의 나고야 본영에 머물렀지만 병력을 바다 건너로 보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많은 서일본 다이묘가 입은 막대한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
중급
1600년 세키가하라
1598년 히데요시는 다섯 살 난 아들 히데요리를 남기고 죽었다. 그는 아들이 자랄 때까지 나라를 다스리도록 다섯 명의 대로(五大老)와 다섯 명의 봉행(五奉行)을 정해 두었는데, 대로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이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는 곧 혼인 동맹을 맺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이들은 이를 경계했다.
1600년 이에야스가 동북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치러 나선 사이, 미쓰나리와 그 동맹자들은 ‘서군’을 일으켰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를 싫어하는 다이묘가 많이 포함된 ‘동군’을 이끌고 되돌아왔다. 1600년 10월 21일 두 군대는 미노국의 골짜기 세키가하라에서 맞붙었다. 싸움 도중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비롯한 서군 장수 몇이 편을 바꾸거나 싸움에서 빠졌고, 서군은 하루 만에 무너졌다.
승리한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등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자신에게 맞선 이들의 영지를 몰수하거나 줄였으며, 동맹자와 친족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다시 그린 일본의 지도가 도쿠가와 권력의 토대가 되었다.
중급
막부를 열고 도요토미를 끝내다
1603년 고요제이 천황은 이에야스를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했다.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의 무가 정권 우두머리들이 받던 칭호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교토가 아닌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그는 다이묘들에게 인력과 자재를 내게 해 에도성을 대규모로 증축했는데, 이는 막부를 강하게 하는 동시에 잠재적 경쟁자들의 재력을 소모시켰다.
1605년 이에야스는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어, 쇼군직이 도쿠가와 가문에서 대물림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슨푸로 옮겼지만 ‘오고쇼’로서 주요 정책을 계속 쥐었다. 그의 곁에는 관료와 승려, 유학자 하야시 라잔, 거상, 그리고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마지막 걸림돌은 막대한 재산과 권위를 지닌 채 오사카성에 머물던 도요토미 히데요리였다. 1614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만든 절의 범종 명문이 자신을 모욕했다는 구실을 잡아 오사카 겨울 전투를 일으켰다. 강화와 해자 매립을 거쳐 1615년 여름 전투에서 오사카성이 함락되고 히데요리와 그 어머니 요도도노가 죽었다. 도요토미 가문은 끊어졌다.
1615년 막부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천황과 조정 귀족을 규제하는 금중병공가제법도, 한 번에 성을 하나만 두게 한 일국일성령을 내렸다. 이에야스는 1616년 6월 1일 슨푸에서 죽었는데, 위장 질환, 아마도 위암이었을 것으로 본다. 도미 튀김을 먹고 식중독으로 죽었다는 오랜 이야기는 튀김을 먹은 때와 죽은 때가 몇 달이나 떨어져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중급
도쿠가와 체제는 어떻게 움직였나
역사학자들은 이에야스가 세운 체제를 막번 체제(幕藩體制)라 부른다. 막부, 곧 쇼군의 정부와 번, 곧 다이묘의 영지를 합친 말이다. 막부는 넓은 직할령과 교토·오사카·나가사키 같은 주요 도시, 중요한 광산을 직접 다스렸다. 다이묘는 자기 번을 상당히 자율적으로 다스렸지만 에도가 정한 규칙을 따라야 했다.
다이묘는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에 따라 신판(親藩, 친족), 후다이(譜代,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섬긴 가신), 도자마(外樣, 뒤늦게 복속한 바깥 영주)로 나뉘었다. 후다이 다이묘는 요충지에 배치되고 막부의 요직을 맡았으며, 사쓰마의 시마즈나 조슈의 모리 같은 강력한 도자마는 중앙 정치에서 멀리 두었다. 두 세기 뒤 막부를 무너뜨린 움직임을 이끈 것이 바로 이 도자마 번들이었다.
막부는 무사와 다른 신분의 관계도 규제했다. 무사는 성시에 살고, 농민은 농사를 지어 쌀로 세금을 내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막부는 종교 기관을 면밀히 감시했다. 에도에 번갈아 머물게 한 참근교대나 엄격한 대외 접촉 제한처럼 흔히 도쿠가와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제도는 아들과 손자 대에 완성되었지만, 그 바탕은 이에야스가 놓았다.
중급
대외 관계: 조선, 유럽, 그리고 기독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적대 관계가 된 조선과의 관계를 물려받았다. 그는 쓰시마의 소씨를 통한 교역을 위해서도 평화를 되찾으려 했다. 1604–1605년 조선의 승려이자 사신인 사명대사 유정이 일본에 건너가 후시미에서 이에야스를 만나 포로 송환을 이끌어 냈다. 1607년에는 조선 사절단이 에도와 슨푸를 찾았는데, 공식 명칭은 일본의 국서에 답하고 포로를 데려오는 회답겸쇄환사였다. 1609년 쓰시마와 맺은 기유약조로 부산에서의 교역이 다시 열렸다. 뒷날의 조선 통신사는 이 합의에서 비롯되었다.
이에야스는 유럽에 호기심이 많았다. 1600년 네덜란드 배 리프데호가 규슈에 닿았고, 그 배의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는 배와 무역과 외교에 관한 그의 고문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1609년, 영국은 1613년 히라도에 상관을 열었다. 막부는 일본 상인들에게 주인장(朱印狀)을 내주어 동남아시아 곳곳과 무역하게 했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무역을 위해 기독교 선교사들을 묵인했지만 태도는 점점 굳어졌다. 기독교도 관리가 연루된 뇌물 사건 뒤 막부는 1612년 직할령에서, 1613년 말에는 전국에서 기독교를 금지하고, 1614년 선교사를 추방했으며, 다카야마 우콘 같은 이름난 일본인 신자들을 국외로 내쫓았다. 이어진 박해와 1630년대의 제한 조치가 두 세기 동안 일본의 대외 관계를 규정했다.
1609년에는 막부의 허락을 받은 사쓰마의 시마즈씨가 류큐 왕국을 침공했고, 이후 류큐는 중국과 사쓰마 양쪽에 조공하게 되었다.
중급
책과 학문, 그리고 신이 된 창업자
이에야스는 실용적인 학문을 좋아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논어』, 『중용』, 사마천의 『사기』, 중국의 정치 고전 『정관정요』, 가마쿠라 막부의 연대기 『아즈마카가미(吾妻鏡)』를 즐겨 읽었다. 그는 인쇄 사업도 후원했는데, 처음에는 후시미에서 목활자로, 뒤에는 슨푸에서 동활자로 책을 찍었다. 이 시기 일본의 활자 인쇄는 침략 때 조선에서 가져간 활자와 기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는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유학자 하야시 라잔을 등용했다. 세이카의 성리학 공부에는 임진왜란 뒤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 학자 강항과의 교류가 자극이 되었다. 하야시 가문은 뒤에 막부의 관학을 이끌었지만, 이에야스 자신의 신앙 세계에서는 불교와 신토가 여전히 중심이었다.
이에야스는 죽은 뒤 자손을 지키는 신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슨푸 근처 구노잔에 묻혔다가 1617년 ‘동쪽을 비추는 큰 권현’이라는 뜻의 도쇼다이곤겐이라는 신호로 닛코에 모셔졌다. 손자 이에미쓰는 1630년대에 닛코 도쇼구를 화려하게 다시 지었다. 이곳은 주변의 신사·사찰과 함께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심화
이에야스의 여러 얼굴: 신, 음모가, 경영의 모범
도쿠가와 시대에 이에야스는 도쇼다이곤겐으로 숭배되었고, 막부의 공식 역사는 그를 현명한 창업자로 그렸다. 1868년 메이지 유신 뒤, 그의 후손을 무너뜨린 새 정부는 천황 중심의 역사관을 퍼뜨렸고, 막부는 걸림돌로 그려졌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속인 교활하고 계산적인 ‘너구리 영감(狸親父)’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20세기에 그의 이미지는 다시 바뀌었다. 1950년부터 연재된 야마오카 소하치의 장편 소설은 그를 평화를 추구한 인내의 사람으로 그렸고, 전후 일본에서 그는 지도력과 경영의 모범으로 널리 읽혔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지금도 그를 새롭게 해석하며, 때로는 망설이고 불안해하던 젊은이가 지배자로 성장하는 인물로 그린다.
이에야스가 했다는 유명한 말 가운데 몇몇은 후대에 지어낸 것이다. 세 천하인을 두견새에 빗댄 노래는 훨씬 뒤의 글에서 나왔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유훈’은 일본 학계에서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남겼다는 글을 본떠 메이지 시대에 위조한 것으로 본다. 비슷한 내용의 『동조궁어유훈(東照宮御遺訓)』도 진위가 의심스럽다. 이런 말들은 이에야스라는 사람보다 후대가 그를 어떻게 보고 싶어 했는지를 더 잘 보여 준다.
한국에서는 이에야스를 히데요시에 견주어 비교적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도요토미 정권을 끝내고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관리들도 그의 정권을 가마쿠라·무로마치 막부를 잇는 정권으로 이해했다.
심화
사료와 논쟁
이에야스에 관해 전하는 이야기의 상당수는 그의 가신이나 막부가 쓴 사료에서 나왔다. 도쿠가와 가신 오쿠보 다다타카가 1620년대에 쓴 회고록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는 생생하지만 한쪽에 치우쳐 있다. 19세기에 편찬된 막부의 공식 역사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는 이전 기록을 바탕으로 했지만 왕조를 찬양하려고 쓴 책이다. 마쓰다이라 가신의 일기 『이에타다 일기』 같은 당대 일기, 편지와 문서, 오다 쪽의 『신장공기(信長公記)』 같은 기록이 중요한 검증 수단이 된다.
주요 사건에 대한 논쟁도 이어진다. 1579년 쓰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의 죽음은 노부나가의 요구 때문이라는 설, 실제로 다케다와 내통했기 때문이라는 설, 오카자키와 하마마쓰 사이 도쿠가와 가문 내부의 갈등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세키가하라에 대한 최근 연구는 이에야스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진지에 총을 쏘아 배신을 재촉했다는 이야기처럼 극적인 세부를 의심하고, 배신이 실제로 언제 일어났는지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초기 막부의 대외 정책도 논쟁거리다. ‘쇄국’이라는 오래된 개념에 대해 로널드 토비 같은 역사학자들은 막부가 조선, 류큐, 아이누, 중국, 네덜란드와 관리된 관계를 유지하며 외교를 자신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데 썼다고 강조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한일 관계 연구는 17세기 초 국교 회복 과정에서 쓰시마의 소씨가 국서를 고쳐 쓴 사실, 그리고 그것이 1630년대에 드러난 사실도 밝혀 왔다.
끝으로 역사학자들은 도쿠가와 질서 가운데 얼마만큼이 이에야스의 설계이고 얼마만큼이 후계자들이 발전시킨 것인지를 따진다. 대부분은 그를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기본 원칙을 정한 창업자로 보며, 완숙한 막부의 제도는 그 뒤 수십 년에 걸쳐 모양을 갖추었다고 본다.
핵심 개념
- 세 명의 천하인
-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차례로 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했다.
- 막부(幕府)
- 천황의 군사 대리인인 쇼군이 이끄는 정부. 도쿠가와 막부는 1603년부터 1867년까지 에도에서 다스렸다.
- 막번 체제
- 쇼군의 정부와 반쯤 자율적인 다이묘의 번 사이의 균형.
- 인내와 계산
- 이에야스의 명성은 기회를 기다리고 동맹을 관리하며 불필요한 손실을 피한 데서 나온다.
- 조선과의 국교 회복
- 히데요시의 침략 뒤 이에야스 정권은 포로를 돌려보내고 조선과의 외교와 교역을 다시 열었다.
- 관리된 대외 접촉
- 유럽 무역에 열려 있던 초기 태도는 기독교 금지와 점점 더 엄격히 관리되는 대외 관계로 바뀌었다.
- 신이 된 창업자
- 이에야스는 죽은 뒤 도쇼다이곤겐으로 숭배되어 왕조에 정치적·종교적 정통성을 더했다.
기록
- 1543년 — 미카와국 오카자키성에서 태어남.
- 1549년 — 오다 가문에서 2년을 보낸 뒤 이마가와의 본거지 슨푸에 인질로 감.
- 1560년 —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전사. 이에야스가 오카자키로 돌아감.
- 1562년 —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
- 1573년 —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패함.
- 1582년 —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음. 이가를 넘어 탈출한 뒤 다섯 지방으로 세력 확대.
- 1590년 — 간토로 전봉되어 에도를 근거지로 삼음.
- 1600년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
- 1603년 — 쇼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엶.
- 1607년 — 조선 사절단이 에도와 슨푸를 방문해 침략 뒤 국교가 회복됨.
- 1615년 — 오사카성 함락으로 도요토미 가문 멸망. 무가제법도 반포.
- 1616년 — 슨푸에서 죽음. 이듬해 도쇼다이곤겐으로 닛코에 모셔짐.
용어 풀이
- 다이묘(大名)
- 영지를 다스리고 자기 무사단을 거느린 지방의 무장 영주.
- 쇼군(將軍)
- 세이이타이쇼군의 줄임말로, 천황이 내리는 일본 최고 무가 지배자의 칭호.
- 전국 시대
- 대략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본의 내전 시대.
- 오고쇼(大御所)
- 은퇴한 뒤에도 실권을 쥔 전 쇼군. 1605년 이후 슨푸의 이에야스가 그랬다.
- 후다이와 도자마
- 대대로 도쿠가와를 섬긴 가신 다이묘와, 세키가하라 뒤에 복속한 바깥 다이묘.
- 무가제법도
- 1615년 처음 반포된, 다이묘의 행동을 규제한 무가의 법령.
- 에도
- 쇼군의 수도가 된 성시. 1868년 이후 도쿄로 이름이 바뀌었다.
- 도쇼다이곤겐(東照大權現)
- 이에야스가 죽은 뒤 받은 신호. ‘동쪽을 비추는 큰 권현’이라는 뜻.
- 주인선(朱印船)
- 17세기 초 막부의 허가장을 받아 동남아시아로 무역하러 간 일본 배.
묻고 답하기
이에야스는 일본의 천황이었나요?
아니요. 천황은 교토에 머물며 형식상의 권위를 지녔고, 이에야스는 쇼군이라는 칭호로 천황의 이름 아래 군사·정치 권력을 쥐었습니다.
왜 에도를 골랐나요?
1590년 히데요시가 그를 간토로 옮기자 에도를 본거지로 골랐습니다. 좋은 항구와 넓은 땅이 있었고, 에도는 뒤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이에야스도 조선 침략에 참여했나요?
아니요. 규슈 북부의 일본군 본영에 머물렀지만 병력을 조선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썼습니다.
두견새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대하는 방식으로 노부나가·히데요시·이에야스를 비교한 노래는 훨씬 뒤에 지어졌지만, 세 사람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쇼군이 된 지 2년 만에 왜 물러났나요?
아들 히데타다에게 자리를 물려주어 쇼군직이 도쿠가와 가문에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자신은 오고쇼로서 실권을 계속 쥐었습니다.
이에야스가 일본의 문을 닫았나요?
완전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대외 무역을 장려하고 유럽인 고문을 두었지만 기독교는 금지했습니다. 대외 접촉을 가장 엄격히 제한한 것은 1630년대 손자 대였고, 그때도 일본은 여러 이웃과 관리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에야스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많은 이야기가 그를 찬양하는 경향이 있는 가신이나 막부의 기록, 또는 후대의 소설에서 나왔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일기와 편지, 다른 쪽의 기록과 비교합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Tokugawa Ieyasu. Wikipedia
- 徳川家康. ウィキペディア
- 도쿠가와 이에야스. 위키백과
- Battle of Sekigahara. Wikipedia
- Tokugawa shogunate. Wikipedia
- Joseon missions to Japan. Wikipedia
- Nikkō Tōshō-gū. Wikipedia
- Shrines and Temples of Nikko.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Ronald P. Toby,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fu.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 Conrad Totman, Tokugawa Ieyasu: Shogun. Heian International, 1983
함께 보기
- 이순신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 수군을 거듭 무찌르고 『난중일기』를 남긴 조선의 수군 지휘관이다.
- 메이지 유신1868년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면서 일본의 정부와 사회에 폭넓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 오쿠노 호소미치마쓰오 바쇼가 일본 북부 여행을 바탕으로 산문과 하이쿠를 엮은 기행문. 여행 뒤 여러 해에 걸쳐 원고를 다듬었다.
-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호쿠사이의 목판화. 배들 위로 솟은 거대한 파도와 멀리 작게 보이는 후지산을 담았다.
- 주희성리학의 체계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송나라 철학자다.
- 논어공자와 제자들의 말과 짧은 대화를 공자 사후에 엮은 책으로, 2천 년 동안 동아시아 전역에서 읽혔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