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엄청난 군대를 바다 건너 조선으로 보냈어요. 땅 위의 조선군은 금세 밀려났고, 적은 서울까지 쳐들어왔어요.
그런데 바다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어요.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에서 작은 수군을 이끌었어요. 밀물과 썰물, 섬 사이의 좁은 물길, 적의 버릇까지 꼼꼼히 살폈고, 튼튼한 나무 배에 실은 큰 대포로 멀리서 공격해서 적군이 배에 뛰어오르지 못하게 했어요.
이순신 하면 거북선이 떠오르지요. 지붕이 덮여 있고 그 위에 뾰족한 쇠못이 박혀 있으며, 앞에는 용머리가 달린 배예요. 거북선이라는 배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이순신은 더 좋게 고쳐 만들어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하게 했어요.
장군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그를 시기한 신하들이 명령을 어겼다고 모함해서 붙잡혀 벌을 받았거든요. 하지만 그가 없는 사이 수군이 거의 무너지자 임금은 다시 그를 불렀어요. 장군은 배 13척으로 물살이 거센 좁은 바다에서 훨씬 많은 적을 물리쳤어요.
장군은 전쟁 동안 거의 날마다 일기를 썼어요. 전투와 날씨, 어머니와 병사들에 대한 걱정, 아들이 죽었을 때의 슬픔까지 적었지요. 1598년 마지막 전투에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어요.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그의 일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 생몰
- 1545년 3월 8일(음력) – 1598년 11월 19일(음력). 양력으로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 출생
- 한성 건천동(지금의 서울 중구). 충청도 아산에서 자람
- 관직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1591, 여수), 삼도수군통제사(1593–1597, 1597년 재임명)
- 주요 해전
- 옥포·사천·한산도(1592), 명량(1597), 노량(1598, 전사)
- 저술
- 『난중일기』, 『임진장초』(조정에 올린 장계), 시조 몇 편
- 시호
- 충무공(忠武公)
- 유산
-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국보, 『난중일기』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쉬움
이순신은 누구인가
이순신(1545–1598)은 조선의 무관으로, 1592–1598년 일본의 침략, 곧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수군을 지휘했다. 그는 일본 수군과 싸워 잇달아 이겼고, 이로써 남해와 서해를 따라 이어지던 침략군의 보급로를 끊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순신은 서울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내지 못했고, 그는 문과 대신 무관의 길을 택했다. 서른두 살이던 1576년에야 무과에 급제했고, 전쟁으로 이름을 떨치기 전까지 북방 변경과 지방의 낮은 벼슬을 오래 거쳤다.
오늘날 이순신은 남북한 모두에서 존경받는다. 서울 한복판에 동상이 서 있고, 시호 ‘충무’는 도시와 훈장의 이름이 되었으며, 그의 전쟁 일기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전쟁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1차 기록으로 소중히 여겨진다.
쉬움
어린 시절과 벼슬길
이순신은 어린 시절 일부를 서울에서 보냈는데, 이웃에 훗날 영의정이 되어 조정에서 그를 가장 든든하게 밀어준 유성룡이 살았다. 어린 이순신은 가족과 함께 서울 남쪽 아산으로 옮겼고, 그곳은 훗날 아내가 될 방씨 집안이 사는 곳이었다.
첫 무과 시험에서는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 급제한 그는 여진족의 침입을 막는 북방 변경과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 일했다. 1587년 녹둔도에서 여진의 습격을 받은 뒤 책임을 뒤집어쓰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앞으로 겪을 정치적 위험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1591년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파격적으로 승진해 남해안 여수에 본영을 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많은 신하가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 여겼지만, 그는 전쟁 전 몇 달 동안 진영을 점검하고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비축하며 거북선을 비롯한 전선을 만들었다.
쉬움
전쟁의 시작: 1592년 바다의 승리
1592년 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계획의 첫 단계로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약 3주 만에 서울에 이르렀고, 선조는 북쪽 의주로 피란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음력 5월 동쪽으로 나아가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옥포에서 일본 배들을 격파했다. 그의 첫 해전이었다. 이어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사천 해전에서 이겼는데, 이때 이순신은 적의 조총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 당포와 당항포에서도 승리가 이어졌다.
1592년의 가장 유명한 승리는 여름에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두었다. 이순신은 배 몇 척으로 일본 함대를 좁은 견내량에서 넓은 바다로 끌어낸 뒤, 학의 날개처럼 펼친 학익진으로 에워싸고 대포를 퍼부었다. 일본 배 대부분이 부서지거나 사로잡혔다. 이 패배 뒤 일본군 지휘부는 바다에서의 정면 대결을 대체로 피했고, 서해를 따라 군량을 실어 나르려던 계획도 어그러졌다.
1593년 이순신은 전라·경상·충청 세 도의 수군을 모두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본영을 두었다.
쉬움
전선과 대포, 그리고 거북선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고 크고 튼튼한 나무 배로, 높은 갑판 위에 무거운 대포를 싣고 그 아래 노꾼들을 보호했다. 일본 전선은 대체로 가볍고, 가까이 붙어 조총과 칼을 든 병사들이 배에 올라타 싸우는 방식에 의존했다. 이순신의 전술은 적을 멀리 떼어 놓고 조선의 화포로 싸우는 것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바탕으로 지붕을 덮고 그 위에 쇠못을 꽂아 적이 올라타지 못하게 하고, 사방에 포문을 내고 뱃머리에 용머리를 단 배였다. 거북선이라는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과 1415년에 ‘귀선(龜船)’이 나온다. 이순신은 개량된 거북선을 만들어 적진을 깨뜨리는 돌격선으로 썼다.
대중서에서는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지만 학계의 의견은 갈린다. 이순신 당대의 조선 기록에는 철판을 덮었다는 말이 없다. 지붕의 쇠못은 분명하지만 철판을 덧댔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거북선은 몇 척에 불과했고, 전투의 대부분은 판옥선이 치렀다.
중급
투옥과 백의종군, 그리고 칠천량의 참패
1593년 이후 전쟁은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이어지는 긴 소강기에 들어섰고, 일본군은 남해안의 왜성에 머물렀다. 협상이 깨지자 히데요시는 1597년 두 번째 침략을 일으켰다. 그 직전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요시라가 가토 기요마사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정보를 조선 측에 흘렸고, 조정은 이순신에게 나가 요격하라고 명했다. 함정을 의심하고 바닷길의 위험을 잘 알던 이순신은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순신에게는 조정에 적이 있었다. 유성룡과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고, 그와 사이가 틀어진 원균도 그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명령을 어겼다고 여겨 크게 노한 선조는 1597년 음력 2월 이순신을 잡아 서울로 압송해 문초했다. 사형을 주장하는 신하도 있었지만 정탁이 구명을 청해 풀려났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았다. 남쪽으로 가는 길에 그는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고, 그 슬픔을 일기에 적었다.
수군은 원균이 넘겨받았다. 1597년 음력 7월 원균의 함대는 거제 칠천량에서 기습을 받아 거의 전멸했고, 원균도 전사했다. 배설이 이끌고 달아난 십여 척만 살아남았다.
중급
명량: 열세 척의 배
조정은 서둘러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그가 거둔 것은 배 12척 남짓과 적은 병력뿐이었다. 조정이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고 하자,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며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적이 서해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전한다. 뒤에 한 척이 더해져 13척이 되었다.
1597년 음력 9월, 일본의 대함대가 육군의 진격을 돕기 위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이순신은 진도와 육지 사이의 명량 해협을 싸움터로 골랐다. 이곳은 거센 조류가 몇 시간마다 방향을 바꾸고 물길이 좁아 큰 함대가 한꺼번에 펼쳐질 수 없었다. 싸움 전날 그는 장수들에게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말했고, 이 말은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의 일기에 따르면 일본 전선 133척이 공격해 왔고 31척을 깨뜨렸다. 뒤에 대기한 보급선까지 합치면 일본 함대는 훨씬 컸을 수 있다. 조선 수군은 해협을 지켜 냈고 일본군은 물러났다. 일본 측 기록은 이 싸움을 다르게 전하며, 정확한 숫자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이순신이 해협에 쇠사슬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일기에 나오지 않아 후대의 전승으로 본다.
명량 해전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은 바다에서 다시 싸울 힘을 되찾았고 이 싸움은 이순신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되었다. 얼마 뒤 그는 막내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비통함이 일기에 남아 있다.
중급
마지막 싸움, 노량
1598년 음력 8월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 지휘부는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이순신은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함께 일본군이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 했다. 두 지휘관의 관계는 때로 팽팽했지만 둘은 함께 싸웠다.
음력 11월 19일(양력 1598년 12월 16일) 새벽, 조명 연합 함대는 남해도 근처 노량 해협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일본 함대를 공격했다. 달아나는 적을 쫓던 중 이순신은 총탄에 맞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여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게 했고, 조카 이완이 북을 계속 울렸다. 노량 해전은 전쟁의 마지막 큰 싸움이었다.
이순신의 유해는 아산으로 옮겨 묻혔다. 그가 죽은 뒤 조정은 우의정을 추증하고,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하고 덕풍부원군에 봉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1793년 영의정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무공이다.
중급
『난중일기』와 그 밖의 글
『난중일기』는 1592년 1월부터 1598년 전사하기 직전까지, 중간중간 빠진 날도 있지만 거의 날마다 쓴 친필 일기다. 전투와 명령, 군량, 날씨와 조류, 장수들의 행동, 피란민과 백성의 고통, 그리고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병과 불면, 조정에 대한 답답함, 아들을 잃은 슬픔 같은 그 자신의 감정까지 담겨 있다.
‘난중일기’라는 이름은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펴낼 때 편찬자들이 붙인 것이다. 친필 원본은 후손들이 지켜 왔고 지금은 아산 현충사에 있다. 조정에 올린 장계를 베낀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고, 『난중일기』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순신은 시도 몇 편 남겼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하는 시조는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나라를 걱정하는 장수의 외로운 책임감을 담은 노래로 학교에서 널리 가르친다.
중급
더 넓은 전쟁: 모두의 참화
이순신의 승리는 훨씬 큰 전쟁의 한 부분이었다. 육지에서는 지방의 선비와 승려가 이끈 의병이 침략군에 맞섰고, 권율의 행주산성 싸움처럼 관군도 승리를 거두었으며, 명나라는 대군을 보내 1593년 평양을 되찾았다. 전쟁이 끝난 가장 큰 까닭은 어느 한 전투가 아니라 히데요시의 죽음이었다.
침략은 조선 백성에게 크나큰 재앙이었다. 수많은 민간인이 죽고 논밭과 고을이 황폐해졌으며, 기근과 전염병이 뒤따랐다. 수만 명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는데, 그 가운데 도공들의 기술은 일본 도자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교토의 귀무덤(미미즈카)에는 전과를 증명하려고 베어 간 조선인과 명나라 사람들의 코가 묻혀 있다. 일본과 명의 병사들도 많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므로 이순신의 승리를 기억하는 일은 전쟁의 고통을 기억하는 일과 함께 가야 한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비롯한 조선의 기록은 이 전쟁을 대비하지 않음과 당쟁의 위험에 대한 교훈으로 서술했고,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히데요시의 야망에 얽힌 일화로 다루었으며, 중국 기록은 명이 번국을 구원한 전쟁으로 강조했다.
심화
민족 영웅이 되기까지
이순신의 명성에도 역사가 있다. 조선 시대에 그는 충신으로 기려졌고, 1707년 아산의 사당이 ‘현충(顯忠)’이라는 사액을 받는 등 여러 사당이 세워졌다. 1795년 정조가 펴낸 『이충무공전서』로 그의 글이 널리 읽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순신은 일본에 맞선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1930년대 초 동아일보가 주관한 전국적 모금으로 현충사를 보수하고 종가의 땅을 지켰으며, 작가 이광수는 그를 다룬 소설을 신문에 연재했다. 역설적이게도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해군 장교들도 이순신을 뛰어난 전술가로 칭송했다. 다만 일본 제독들이 그를 찬양했다고 전해지는 인용문 가운데 일부는 믿을 만한 출처를 확인하기 어렵다.
광복 뒤, 특히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 시기에 이순신은 애국적이고 규율 있는 지도자의 모범으로 크게 선양되었다. 현충사는 성역화되어 크게 넓혀졌고, 1968년 서울 광화문에 동상이 섰으며, 그의 모습이 주화와 지폐에 실렸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국가 주도의 선양이 군인 출신 지도자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등 정치적 목적에도 봉사했다고 분석한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은 애국 명장으로 존중받지만, 공식 해석은 그를 봉건 조선의 계급 구조 안에 놓고 본다. 대중문화에서 그는 늘 살아 있다. 명량 해전을 그린 2014년 영화 「명량」은 한국 영화사상 최다 관객을 기록했다.
심화
논쟁과 사료의 신뢰성
이순신의 생애를 전하는 주요 사료는 그 자신의 일기와 장계, 『선조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조카 이분이 쓴 『행록』, 그리고 일본과 명의 기록이다. 이순신 자신의 글은 둘도 없이 귀하지만 당연히 그의 시각을 담고 있고, 후대의 전기는 그를 흠모한 사람들이 썼다. 해전을 재구성하려면 조선 기록과 함께 일본·명의 사료를 반드시 대조해야 한다.
숫자는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순신이 몇 번 싸웠는가(흔히 23전이라 하지만 무엇을 셈에 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말 그대로 한 번도 지지 않았는가, 한산도와 명량에서 양쪽 함대의 규모와 피해는 얼마였는가 등이다. 조선과 일본의 기록은 여기서 엇갈린다. 거북선의 구조와 철갑 여부, 거북선 개발에서 이순신 개인의 몫이 얼마였는지도 논쟁거리다.
원균과의 관계도 논란이 있다. 이순신의 일기와 그 지지자들이 만든 전통적 서술은 원균을 시기심 많고 무능한 인물로 그린다. 일부 현대 연구자는 원균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칠천량의 참패가 조정의 압박 끝에 일어났다는 점을 들어 좀 더 균형 잡힌 평가를 주장한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여전히 1597년 원균의 지휘를 실패로 보지만, 영웅과 악당이라는 단순한 구도는 경계한다.
끝으로 이순신이 전후에 다시 박해받느니 노량에서 일부러 몸을 드러내 죽음을 택했다거나, 심지어 살아서 숨어 지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설은 증거가 아니라 추측에 기대고 있으며, 주류 역사학은 그의 죽음을 전사로 본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2001) 같은 작품은 이런 물음을 역사가 아닌 문학으로 탐구한다.
핵심 개념
- 제해권
- 일본 수군을 무찔러 서해안을 따라 군량을 나르려던 침략군의 계획을 무너뜨렸다.
- 지형의 활용
- 명량처럼 물길이 좁고 조류가 센 곳을 싸움터로 골라 적의 수적 우세를 무력화했다.
- 원거리 포격
- 조선 전선은 무거운 화포를 싣고, 일본군이 강한 근접 등선 전투를 피하려 했다.
- 부당함 속의 충성
- 자기 나라 조정에 투옥·강등당하고도 부름을 받자 다시 지휘에 나선 모습은 충신 이미지의 핵심이 되었다.
- 1차 증언
- 『난중일기』는 전투뿐 아니라 일상, 두려움, 병, 슬픔까지 기록한 드문 개인의 전쟁 기록이다.
- 영웅 만들기
- 이순신의 이미지는 조선의 임금부터 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자, 현대 정부까지 후대가 만들어 온 것이기도 하다.
기록
- 1545년 — 한성에서 태어남.
- 1576년 — 무과에 급제.
- 1591년 — 여수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거북선 등 전선을 준비.
- 1592년 — 임진왜란. 옥포, 사천(거북선 첫 출전), 한산도 등에서 승리.
- 1593년 —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본영을 둠.
- 1597년 — 투옥되고 백의종군.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 다시 임명되어 13척으로 명량에서 승리.
- 1598년 — 히데요시 사후 철수하는 일본군과 싸운 노량 해전에서 전사.
- 1604년 — 선무공신 1등에 녹훈.
- 1795년 — 정조의 명으로 일기를 포함한 『이충무공전서』 간행.
- 1968년 — 서울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 건립.
- 2013년 — 『난중일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용어 풀이
- 임진왜란
- 1592–1598년 일본의 조선 침략. 1592년이 60갑자로 임진년이라 붙은 이름이며, 1597년의 재침은 정유재란이라 한다.
- 판옥선
-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 크고 튼튼하며 높은 갑판에 화포와 궁수를 배치했다.
- 거북선
- 지붕을 덮고 쇠못을 박았으며 사방에 포를 단 돌격선.
- 삼도수군통제사
- 1593년 남쪽 세 도의 수군 지휘를 하나로 묶기 위해 이순신에게 처음 맡긴 직책.
- 『난중일기』
-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이순신이 쓴 전쟁 일기.
- 의병
- 지방의 선비와 승려가 일으켜 침략군에 맞선 민간 의용군.
- 충무공
- 이순신의 시호. 충성스럽고 무용이 뛰어나다는 뜻.
- 백의종군
- 벼슬 없이 흰옷 입은 일반 병사의 신분으로 군대를 따라 복무하는 것.
묻고 답하기
거북선은 이순신이 발명했나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귀선’은 이순신보다 훨씬 앞선 1413년 기록에 나옵니다. 이순신은 개량된 거북선을 만들어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썼습니다.
거북선은 철로 만든 배였나요?
지붕에 쇠못을 박은 것은 분명하지만, 이순신 당대 기록에 철판을 덮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철판을 댔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13척으로 어떻게 훨씬 큰 함대를 이겼나요?
조류가 세고 자주 바뀌는 좁은 해협을 골라 적이 수적 우세를 쓰지 못하게 하고, 화포와 잘 훈련된 수군에 기댔습니다. 일본 함대의 정확한 규모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왜 자기 나라 임금에게 붙잡혔나요?
함정을 의심해 일본 장수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조정에 정적도 있었습니다. 선조는 이를 명령 불복으로 보았습니다.
『난중일기』는 다른 사료에 없는 무엇을 알려 주나요?
조류와 날씨, 군량 문제, 군기, 백성의 고통, 지휘관 자신의 감정까지 전쟁을 날마다 지켜본 지휘관의 시각을 전해 줍니다.
정말 한 번도 지지 않았나요?
그가 지휘한 싸움에서는 모두 이겼다고 흔히 평가하지만, 교전 횟수와 세는 방법은 사료마다 다르고 승부가 뚜렷하지 않은 싸움도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순신을 어떻게 보나요?
19세기 말 이후 일부 일본 해군 장교가 그의 전술을 칭송했지만, 일본의 대중적 기억은 히데요시와 그 장수들에게 더 쏠려 있습니다. 일본 제독들의 찬사라고 전하는 인용문 중에는 확인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난중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2013
- Yi Sun-sin. Wikipedia
- 이순신. 위키백과
- Turtle ship. Wikipedia
- Battle of Myeongnyang. Wikipedia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1598). Wikipedia
- Samuel Hawley,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200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