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악바르는 겨우 열세 살에 황제가 되었어요. 아버지가 돌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갑자기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래서 믿음직한 장군 바이람 칸이 소년 황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나라 일을 도왔어요.
악바르는 글을 잘 읽지 못했어요. 그래도 책을 무척 좋아했답니다! 날마다 신하들이 책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고, 악바르는 들은 내용을 놀라울 만큼 잘 기억했어요. 여러 언어로 된 손으로 쓴 책 수천 권을 모아 큰 도서관도 만들었지요.
악바르의 나라에는 여러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살았어요.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자이나교도, 시크교도, 조로아스터교도, 그리스도교도, 유대교도까지요. 악바르는 특별한 건물을 짓고 여러 종교의 선생님들을 불러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예의 바르게 토론하게 했어요. 종교마다 좋은 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거든요.
악바르는 붉은 사암으로 새 수도를 짓기도 했어요. 이름은 파테푸르 시크리, ‘승리의 도시’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지은 지 15년쯤 뒤에 떠나 버렸지만, 성문과 마당과 궁전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악바르는 전쟁도 많이 치른 정복자였고, 어떤 전쟁은 아주 잔인했어요. 그래서 역사가들은 여러 목소리에 귀 기울인 호기심 많은 황제의 모습과, 힘으로 제국을 넓힌 정복자의 모습을 함께 기억해요.
한눈에 보기
- 이름
- 아불파트 잘랄웃딘 무함마드 악바르. ‘악바르 대제’로도 불림
- 출생
- 1542년 10월 15일, 아마르코트(우메르코트) 요새(지금의 파키스탄 신드주)
- 사망
- 1605년 10월, 아그라. 아그라 근교 시칸드라의 묘에 안장
- 재위
- 1556~1605년. 바부르, 후마윤에 이은 무굴 제국 제3대 황제
- 수도
- 아그라 → 파테푸르 시크리(1569~71년 무렵 건설 시작) → 라호르(1585~98) → 다시 아그라
- 주요 정책
- 만사브다르 제도, 다흐살라 지세 제도, 라지푸트 왕가와의 동맹, 비무슬림 인두세(지즈야) 폐지, ‘모두와의 평화(술흐이 쿨)’ 이념
- 주요 사료
- 아불 파즐의 『악바르나마』와 『아인이 악바리』, 바다우니의 비판적 역사서, 예수회 선교사의 편지와 보고서
- 후계자
- 아들 살림(자한기르 황제)
쉬움
악바르는 누구인가
악바르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인도 아대륙의 넓은 지역을 다스린 무굴 왕조의 세 번째 군주다. 무굴 왕가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집안으로, 할아버지 바부르가 1526년 북인도에 무굴 지배를 세웠다. 그러나 아버지 후마윤은 아프간계 군주 셰르 샤 수르에게 나라를 잃고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1556년 악바르가 즉위했을 때 무굴 왕조가 쥔 땅은 델리·아그라·펀자브 일대의 좁고 불안한 영역뿐이었다.
약 50년 뒤 악바르가 세상을 떠날 무렵 무굴 제국은 북서쪽의 카불과 칸다하르에서 동쪽 벵골까지, 북쪽 카슈미르에서 남쪽 데칸 고원 북부까지 뻗어 있었다. 그는 정복 왕조를 관등·속주·조세 제도를 갖춘 지속적인 국가로 바꾸었고, 후계자들은 이 틀을 한 세기 넘게 유지했다.
악바르는 종교와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도 기억된다. 여러 신앙의 대표들이 벌인 토론을 열었고, 산스크리트 고전을 페르시아어로 옮기게 했으며, 특정 종교 공동체 위에 서려는 왕권의 모습을 만들어 갔다. 그래서 근대 인도에서 관용의 상징이 되었지만, 역사가들은 그의 잔혹한 정복 전쟁과 정책 뒤의 정치적 계산도 함께 강조한다.
쉬움
망명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10대 황제
악바르는 1542년 10월 15일 신드 사막의 요새 아마르코트에서 태어났다. 이곳의 힌두 군주가 쫓기던 부모를 받아 준 덕분이었다. 아버지 후마윤은 나라를 잃고 도망 중이었고, 어머니 하미다 바누 베굼은 페르시아계 학자의 딸이었다. 후마윤이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로 피신하는 동안 갓난 악바르는 아프가니스탄의 친척에게 맡겨졌고, 책보다는 군인과 사냥꾼, 말 사이에서 자랐다.
1555년 후마윤은 페르시아의 샤 타흐마스프 1세의 도움으로 델리를 되찾았으나, 몇 달 뒤 서재 계단에서 떨어져 숨졌다. 1556년 2월 14일, 펀자브의 칼라나우르에서 열세 살 악바르가 후견인 바이람 칸에 의해 소박한 벽돌 단 위에서 즉위했다.
어린 황제의 처지는 위태로웠다. 수르 왕조를 섬기던 힌두 장군이자 재상 헤무가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1556년 11월 5일 바이람 칸이 이끄는 무굴군은 델리 북쪽에서 벌어진 제2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헤무를 물리쳤다. 헤무는 부상을 입고 붙잡혀 처형되었고, 이 승리로 무굴 왕조는 권력을 되찾았다.
약 4년 동안 바이람 칸이 악바르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1560년 악바르는 유모 마함 앙가와 그 주변 세력의 부추김 속에 바이람 칸을 해임하고 메카 순례를 떠나게 했는데, 바이람은 가는 길에 살해되었다. 1562년 무렵 악바르는 궁정 파벌의 영향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쉬움
전쟁과 동맹으로 쌓은 제국
악바르는 재위 기간의 상당 부분을 원정으로 보냈다. 말와와 중부 인도의 가르하 왕국을 차지했는데, 가르하의 여왕 라니 두르가와티는 1564년 싸우다 전사했다. 1567~68년에는 메와르의 거대한 라지푸트 요새 치토르가르를 포위했다. 1568년 2월 요새가 함락되자 살아남은 수비병과, 사료에 따르면 약 3만 명의 비전투원이 학살되었다. 곧이어 란탐보르도 함락되었다. 악바르는 치토르 승전 포고문에서 이 전쟁을 불신자에 대한 성전의 언어로 묘사했다.
이후 아라비아해에 항구를 둔 부유한 교역 지대 구자라트(1572~73)와 벵골(1574~76)이 제국에 들어왔다. 이복동생 미르자 무함마드 하킴이 죽은 뒤 1585년 카불이 편입되었고, 1586년 카슈미르, 1590년대에는 신드와 칸다하르가 뒤를 이었다. 말년에는 데칸으로 진출해 1600년 아마드나가르, 1601년 아시르가르 요새를 차지했다.
무력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악바르는 많은 라지푸트 왕들을 무굴의 신하로 끌어들였다. 1562년에는 암베르(아메르)의 라자 바르말의 딸과 혼인했는데, 그녀는 훗날 ‘마리암우즈자마니’라는 칭호를 받고 자한기르 황제의 어머니가 되었다. 복속한 라지푸트 군주들은 본래 영지를 지키면서 제국군의 고위 지휘관이 되었다. 반면 메와르의 라나 프라타프처럼 저항한 이들과는 전쟁을 벌였다. 프라타프는 1576년 할디가티 전투에서 패했지만 산악 지대에서 저항을 이어 갔다.
쉬움
승리의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
악바르는 아그라 근처 시크리 마을에 살던 수피 성자 셰이크 살림 치슈티를 공경했다. 성자는 황제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1569년 실제로 그곳에서 아들 살림이 태어나자 악바르는 시크리 언덕에 성벽을 두른 새 수도를 짓기 시작했다. 구자라트 정복 뒤 이 도시는 ‘승리의 도시’ 파테푸르라는 이름을 얻었고, 파테푸르 시크리로 불리게 되었다.
도시는 주로 이 지역의 붉은 사암으로 지어졌다. 거대한 금요 모스크 자마 마스지드, 기념비적 성문 불란드 다르와자, 모스크 안뜰에 있는 셰이크 살림 치슈티의 흰 대리석 묘, 그리고 개인 알현전인 디와니 하스와 5층짜리 개방형 누각 판치 마할 같은 궁전 건물이 있다. 건축은 페르시아·중앙아시아의 형식과 구자라트·라자스탄의 건축 전통을 섞었다.
파테푸르 시크리가 제국의 수도였던 기간은 15년 정도에 불과하다. 1585년 악바르가 북서 변경의 위협에 대응하려고 궁정을 라호르로 옮기면서 도시는 대부분 버려졌다. 흔히 물 부족을 이유로 들지만, 역사가들은 정치·군사적 우선순위의 변화가 적어도 그만큼 중요했다고 본다.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남았기에 오늘날 가장 잘 보존된 무굴 건축군 가운데 하나이며,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중급
제국을 움직인 방법: 관등, 속주, 조세
악바르의 가장 오래 남은 업적은 행정이다. 그는 만사브다르 제도로 귀족층을 재편했다. 고위 관리마다 숫자로 표시된 관등(만사브)을 주었는데, 이 숫자가 지위와 봉급, 그리고 황제를 위해 유지해야 할 기병 수를 정했다. 봉급은 대개 특정 지역의 토지세 수입을 떼어 주는 자기르로 지급했고, 이 할당지를 정기적으로 바꾸어 귀족이 지방에 세력 기반을 쌓지 못하게 했다. 관등을 주고 올리고 내리는 권한은 오직 황제에게 있었다.
이 제도 아래 모인 귀족층은 의도적으로 다양했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 페르시아인, 아프간인, 인도 무슬림, 힌두 라지푸트, 그리고 서기·금융 계층 출신의 힌두 관리들이 함께 있었다. 이런 다양성 덕분에 어느 한 집단이 황제에게 도전하기 어려웠다.
국가 수입의 중심인 토지세는 라자 토다르 말 같은 관리들이 개혁했다. 해마다 세액을 매기는 여러 방식을 시험한 끝에 1580년 무렵 다흐살라(10년제) 또는 자브트라 불리는 제도를 도입했다. 토지를 측량하고, 작물마다 지난 10년간의 평균 수확량과 가격을 바탕으로 세액을 계산해 대체로 현금으로 거두는 방식이다. 제국은 속주(수바)로 나뉘었고, 속주마다 총독과 별도의 재정·사법 관리를 두어 권력이 서로 견제되게 했다.
동시대 연대기와 『아인이 악바리』의 자세한 통계 덕분에 악바르의 제국은 근세 세계에서 가장 기록이 풍부한 국가 가운데 하나다. 이르판 하비브, 존 F. 리처즈 같은 역사가들은 이 기록으로 농업 사회, 물가, 그리고 세금 부담이 농민에게 준 압박을 연구했다.
중급
신앙과 토론, 그리고 ‘모두와의 평화’
악바르는 수니파 무슬림으로 태어났고, 재위 초에는 아지메르에 있는 수피 성자 무이누딘 치슈티의 성묘를 순례하는 등 전형적인 무슬림 군주처럼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일찍부터 비무슬림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1563년 힌두 순례자에게 매기던 세금을 없앴고, 1564년에는 이슬람법이 비무슬림에게 부과하도록 허용한 인두세 지즈야를 폐지했다.
1575년 그는 파테푸르 시크리에 ‘예배의 집’이라는 뜻의 이바다트 하나를 지었다. 처음에는 여러 학파의 무슬림 학자들이 이곳에서 토론했고, 나중에는 힌두교·자이나교·조로아스터교 스승들과, 1580년부터는 포르투갈령 고아에서 온 예수회 신부들도 초청되었다. 토론은 자주 격해졌고 1580년대 초에 중단되었지만, 악바르의 종교적 시야를 크게 넓혔다.
1579년 주요 무슬림 학자들은 흔히 ‘마흐자르’라 불리는 선언문에 서명해, 서로 다른 법 해석 사이에서 황제가 결정할 권한을 인정했다. 일부 울라마와 귀족은 이를 종교 권위에 대한 공격으로 여겼고, 1580년 비하르와 벵골에서 일어난 반란에는 황제를 이단으로 선언하는 판결이 뒤따랐다.
이런 경험 속에서 ‘술흐이 쿨’, 곧 ‘모두와의 평화’ 또는 ‘보편적 평화’라는 이념이 자라났다. 황제는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백성을 보호하고 종파 분쟁 위에 선다는 생각이다. 악바르는 또 자신에게 개인적 충성을 맹세한 소수의 제자 집단을 두었다. 후대 저자들은 이를 ‘딘이 일라히(신성한 신앙)’라 부르며 악바르가 만든 새 종교로 오랫동안 설명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역사가는 이것이 수피즘과 철학의 요소를 지닌 궁정 제자 집단이었고, 그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본다.
중급
책, 그림, 음악, 그리고 번역
악바르 자신은 글을 거의 읽지 못했지만 그의 궁정은 당대 최고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방대한 필사본 도서관을 꾸렸고 날마다 책을 낭독하게 했다. 행정과 고급 문화의 언어는 페르시아어였고, 궁정 시인과 역사가도 페르시아어로 글을 썼다.
악바르는 번역 기관을 두어 산스크리트 문헌을 페르시아어로 옮기게 했다. 가장 유명한 결과물은 『마하바라타』의 페르시아어판인 『라즘나마(전쟁의 책)』이며, 『라마야나』 등 다른 문헌도 번역되었다. 할아버지 바부르의 회고록을 비롯한 아랍어·튀르크어 저작도 옮겨졌다. 이 사업은 인도의 전통을 제국 엘리트가 함께 누리는 문화의 일부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황실 화원에는 페르시아의 거장들과 많은 인도 화가가 함께 일했다. 초기의 대사업은 영웅 아미르 함자의 모험을 그린 『함자나마』로, 천에 그린 큰 그림이 약 1,400점에 이르렀다. 이후 『악바르나마』 같은 역사서와 번역된 서사시에도 삽화를 그렸다. 페르시아의 섬세함과 인도의 색채·관찰력을 결합한 이 양식이 무굴 회화의 토대가 되었다.
음악도 꽃피었다. 힌두스탄 음악사에서 가장 이름난 인물 가운데 하나인 가수 탄센이 악바르의 궁정에 들어왔다. 민간 전승은 탄센, 재상 비르발, 아불 파즐과 그의 형인 시인 파이지, 라자 토다르 말 등을 궁정의 ‘아홉 보석(나바라트나)’이라 부른다. 이 목록 자체는 후대의 전승이고, 악바르와 비르발의 재치 있는 이야기도 역사가 아니라 민담이다. 다만 비르발은 실제로 악바르의 벗이었던 신하로, 1586년 전투에서 전사했다.
중급
말년, 죽음, 계승
1585년부터 1598년까지 악바르는 라호르에서 북서 변경과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 군주를 주시하며 통치했다. 1598년 이후 아그라로 돌아와 남쪽 데칸의 술탄국들로 눈을 돌렸다. 말년은 집안 갈등으로 어두웠다. 아들 살림이 반란을 일으켜 알라하바드에 따로 궁정을 차렸고, 1602년에는 살림의 사람들이 황제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이자 역사가인 아불 파즐을 살해했다.
악바르와 살림은 화해했고, 다른 두 아들이 과음과 관련된 병으로 일찍 죽자 살림이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악바르는 1605년 10월 초 이질에 걸려 그달 하순 아그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그라 교외 시칸드라의 묘에 묻혔는데, 이 묘는 악바르가 생전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있고 자한기르가 완성했다. 살림은 자한기르로 즉위해 아버지가 만든 제도 대부분을 유지했다.
악바르의 정책은 후계자 자한기르와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 시대의 제국을 형성했다. 역사가들은 후대 황제들, 특히 아우랑제브가 종교 문제에서 악바르의 방식과 얼마나 달랐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제국 후기의 위기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를 두고 논쟁한다.
중급
기억 속의 악바르와 현대 정치
악바르의 이미지는 시대의 관심에 따라 바뀌어 왔다. 궁정 역사가 아불 파즐은 그를 신성한 빛을 받은, 거의 성스러운 완전한 군주로 그렸다. 역시 궁정에서 일한 역사가 바다우니는 몰래 쓴 글에서 이슬람을 버린 군주로 묘사했다. 유럽 방문자들은 그의 호기심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을 기록했고, 일부 예수회 선교사는 그가 개종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19~20세기에 악바르는 관용적 군주의 본보기가 되었다. 영국 저자들은 그를 유럽 군주들과 견주었고, 자와할랄 네루를 비롯한 인도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여러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영화, 드라마, 교과서가 이 이미지를 널리 퍼뜨렸다.
오늘날 그에 대한 기억은 논쟁적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관용과 힌두 군주들과의 동맹을 강조하고, 다른 이들은 치토르 포위와 주민 학살, 그리고 저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라나 프라타프 같은 라지푸트 군주들과의 전쟁을 강조한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두 면을 함께 보려 한다. 악바르는 포용 정책을 권력의 도구로도 쓴 정복자였고, 그의 종교관은 하나의 계획을 따랐다기보다 평생에 걸쳐 변해 갔다.
심화
사료 읽기: 아불 파즐, 바다우니, 예수회
악바르에 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뚜렷한 관점을 지닌 사료에서 나온다. 중심 사료는 아불 파즐이 페르시아어로 쓴 방대한 공식 역사 『악바르나마』와, 그 제3부로서 제국의 제도·세입·속주·주민을 기술한 『아인이 악바리』다. 아불 파즐은 악바르의 절친한 벗이자 이념가였다. 그는 정통 군주에게 전해지는 신성한 빛(파르이 이자디)이라는 개념으로 황제의 통치를 설명했는데, 여기에는 페르시아 철학 전통, 특히 수흐라와르디의 조명 철학이 바탕에 있다. 그의 저작은 연대와 행정에 관해 없어서는 안 될 자료이지만, 동시에 이상적 군주를 공들여 그린 초상이기도 하다.
압둘 카디르 바다우니의 『문타하브 알타와리흐』는 반대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궁정 번역에 참여한 정통파 학자 바다우니는 이바다트 하나의 토론과, 그가 보기에 이슬람에서 멀어져 간 황제의 행보를 쓰라린 어조로 기록했다. 이 책은 악바르 생전에 비밀로 간직되었다. 아불 파즐이 빠뜨린 귀중한 세부를 전하지만 개인적 원한과 종교적 불안이 짙게 배어 있다. 니자뭇딘 아마드의 『타바카트이 악바리』 같은 다른 연대기는 문학성과 당파성이 덜하다.
1580년 첫 선교단과 함께 온 안토니우 몬세라트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궁정을 묘사한 편지와 기록을 남겼다. 외부인의 시각과 구체적 관찰이 풍부하지만, 악바르의 질문을 개종의 징조로, 그의 거절을 변덕으로 읽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현대 연구는 어느 한 사료를 믿기보다 서로 비교한다. 이르판 하비브, M. 아타르 알리 등 알리가르 학파 역사가들은 악바르 정책의 정치·행정적 논리를 강조하며, 술흐이 쿨이 종교적으로 다양한 귀족층과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했다고 보았다. 다른 학자들은 악바르를 이슬람 신성 왕권이라는 더 넓은 세계 속에 놓고, 이슬람력 1000년(서기 1591~92년) 무렵 천년왕국적·신비주의적 권위를 내세운 사파비·오스만 군주들과 비교한다.
심화
남은 쟁점: 딘이 일라히, 관용, 무굴 권력의 성격
딘이 일라히는 종교였는가? 아불 파즐과 바다우니의 번역본에 기대어 연구한 19세기 영국 역사가들은 이것을 악바르가 강요하려 한 새 신앙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많은 후대 역사가는 경전·성직자·대중 신도를 갖춘 별도의 종교는 없었다고 본다. 아불 파즐은 이 용어를 그런 뜻으로 쓰지 않았고, 알려진 제자도 소수의 궁정 신하뿐이었다. 이 논쟁은 악바르를 종교 개혁가로 볼지, 이단으로 볼지, 아니면 영적 사제 관계로 엘리트를 왕좌에 묶은 군주로 볼지와 연결되어 있다.
악바르는 얼마나 관용적이었나? 지즈야 폐지, 예배 장소 보호, 힌두·자이나·조로아스터교 기관에 대한 하사, 자이나교 축제 기간의 도살 금지 등은 실제 포용 정책이었다. 그러나 같은 군주가 치토르에서 성전의 언어를 쓰고 학살을 명했으며 반란자를 가혹하게 처벌했다. 역사가들은 16세기 군주를 근대 자유주의의 관용 개념으로 재지 말라고 경고한다. 술흐이 쿨은 개인의 권리 이론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위에 선 황제의 주권에 관한 원리였다.
세 번째 논쟁은 무굴 국가 자체의 힘에 관한 것이다. 악바르의 개혁이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제국을 만들었다는 예전의 그림은, 이 체제가 지방 토지 보유자(자민다르), 라지푸트 가문, 지역 엘리트와의 협상에 크게 기대고 있었음을 보여 준 연구로 수정되었다. 이 관점에서 악바르의 천재성은 기계를 만든 데보다 왕좌를 중심으로 이해관계의 그물망을 엮은 데 있었다.
끝으로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삽화 필사본에 이르는 물질 문화 자료가 문헌과 함께 점점 더 많이 쓰인다. 미술사가들은 『악바르나마』의 그림이 황제의 이미지를 어떻게 구성했는지, 무굴 화가들이 예수회가 가져온 유럽 판화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정 건축이 왕권의 이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연구한다. 이런 자료는 다양한 제국을 위해 새로운 제국 문화를 의식적으로 만들어 간 궁정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핵심 개념
- 술흐이 쿨
- ‘모두와의 평화’. 황제가 모든 백성을 보호하고 종교 분쟁 위에 선다는 원리로, 악바르 후기 통치의 핵심이다.
- 만사브다르 제도
- 관리마다 숫자로 된 관등을 주어 지위·봉급·기병 제공 의무를 정한 제도. 다양한 귀족층을 황제에게 묶었다.
- 자기르
- 특정 지역의 토지세 수입을 관리에게 봉급으로 할당한 것. 자주 바꾸어 귀족이 지방 영주가 되지 못하게 했다.
- 다흐살라(자브트)
- 1580년 무렵 도입된 지세 제도. 토지를 측량하고 10년간의 수확량과 가격을 평균해 세액을 정했다.
- 이바다트 하나
- 1575년부터 여러 종교 대표들이 토론한 파테푸르 시크리의 ‘예배의 집’.
- 딘이 일라히
- 악바르의 개인 제자 집단에 후대가 붙인 이름. 새로운 종교였는지는 논쟁 중이다.
- 라지푸트 동맹
- 혼인과 봉사 계약으로 힌두 라지푸트 왕들을 제국의 동반자로 끌어들인 정책.
기록
- 1542년 — 후마윤의 망명 중에 신드의 아마르코트에서 악바르 출생.
- 1556년 — 후마윤 사망. 악바르가 칼라나우르에서 즉위(2월 14일). 제2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헤무에게 승리(11월 5일).
- 1560년 — 섭정 바이람 칸을 해임.
- 1562년 — 암베르 왕녀와 혼인하며 라지푸트 동맹 정책 시작.
- 1564년 — 비무슬림 인두세 지즈야 폐지.
- 1568년 — 4개월 포위 끝에 치토르가르 함락, 이어진 학살.
- 1569년 — 시크리에서 왕자 살림 출생. 이 무렵 파테푸르 시크리 건설 시작.
- 1573년 — 구자라트 정복 완료.
- 1575년 — 파테푸르 시크리에 이바다트 하나 건립.
- 1579년 — 마흐자르 선언. 고아의 예수회를 궁정에 초청(1580년 도착).
- 1585년 — 궁정을 라호르로 옮김. 파테푸르 시크리는 대부분 버려짐.
- 1605년 — 악바르가 아그라에서 사망하고 아들 살림이 자한기르로 즉위.
용어 풀이
- 무굴
-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1526년부터 인도 아대륙의 넓은 지역을 다스린 왕조. ‘몽골’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온 이름이다.
- 지즈야
- 이슬람법에서 비무슬림 백성에게 보호의 대가로 거두도록 허용한 인두세.
- 라지푸트
- 북인도·서인도, 특히 라자스탄의 무사 가문과 왕가.
- 울라마
- 이슬람의 종교·법 학자들.
- 수피
- 이슬람 신비주의를 따르는 사람. 무굴 인도에서 수피 성자와 그 성묘는 매우 중요했다.
- 수바
- 무굴 제국의 속주.
- 페르시아어 문화권
- 무굴 인도처럼 페르시아어가 행정·문학·고급 문화의 언어였던 사회.
- 연대기
-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한 역사서. 흔히 군주를 위해 쓰였다.
묻고 답하기
악바르는 몇 살에 황제가 되었나요?
열세 살(만 13세)이었어요. 1560년까지는 후견인 바이람 칸이 대신 나라를 다스렸어요.
악바르는 정말 글을 못 읽었나요?
사료에 따르면 책을 남이 읽어 주게 했고 스스로는 잘 읽고 쓰지 못했어요. 난독증이었다는 추측도 있지만 증명할 수는 없어요. 대신 기억력이 뛰어나 듣는 것만으로 아주 박식했어요.
악바르가 새 종교를 만들었나요?
후대 저자들은 그가 딘이 일라히를 세웠다고 했지만, 많은 역사가는 경전과 신도를 갖춘 별도의 종교가 아니라 소수의 개인 제자 집단이었다고 봐요.
파테푸르 시크리는 왜 버려졌나요?
1585년 악바르가 변경의 위협에 대응하려고 궁정을 라호르로 옮겼기 때문이에요. 물 부족이 자주 거론되지만 정치·군사적 이유도 그만큼 중요했을 거예요.
악바르는 관용적인 군주였나요?
지즈야를 없애고 여러 종교를 후원하며 종교 간 토론을 열었지만, 치토르 포위 같은 잔혹한 전쟁도 벌였어요. 역사가들은 그의 포용 정책을 진심 어린 관심이자 제국 통치의 도구로 함께 봐요.
악바르와 비르발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비르발은 실제로 악바르의 벗이던 신하였지만, 유명한 재치 이야기들은 후대의 민담이에요.
악바르 시대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는 무엇인가?
아불 파즐의 공식 역사 『악바르나마』와 『아인이 악바리』, 바다우니의 비판적 저술 『문타하브 알타와리흐』, 다른 페르시아어 연대기, 예수회 선교사의 보고서다. 저마다 편향이 있어 역사가들은 이를 교차 검토한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Akbar. Wikipedia
- 악바르. 한국어 위키백과
- Din-i Ilahi. Wikipedia
- Akbarnama. Wikipedia
- Fatehpur Sikri. Wikipedia
- Fatehpur Sikri.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John F. Richards, The Mughal Empire (The New Cambridge History of India I.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함께 보기
- 타지마할샤 자한이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우게 한 무굴 시대의 묘역. 대리석 영묘와 정연한 정원으로 이름나 있다.
- 구루 나나크펀자브의 영적 스승이자 시인(1469~1539)으로, 시크교도들은 그를 열 구루 가운데 첫째이자 시크교의 창시자로 공경한다.
- 카비르종교 간 경계와 겉으로 드러나는 의례를 비판한 북인도의 시인이자 성인이다.
- 마하바라타친족 관계에 있는 두 왕가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방대한 산스크리트어 서사시로, 『바가바드 기타』를 포함한다.
- 쉴레이만 대제헝가리에서 이라크까지의 정복, 오스만 법의 정비, 건축과 시의 융성을 이끈 오스만 제국 제10대 술탄(재위 1520~1566).
- 샤나메페르도시가 이란의 전설적 왕들과 역사적 과거를 노래한 페르시아어 서사시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