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400년 전, 남아시아의 넓은 땅을 다스리던 샤 자한이라는 황제가 있었어요. 황제가 가장 아끼던 아내 뭄타즈 마할은 먼 전쟁터까지 늘 황제와 함께 다녔지요. 그런데 1631년, 열네 번째 아기를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몹시 슬퍼한 황제는 아내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짓기로 했어요.
이 무덤은 매끈하고 반짝이는 하얀 돌, 대리석으로 만들었어요. 대리석이 하늘빛을 받아서 아침에는 분홍빛, 한낮에는 새하얀빛, 저녁에는 금빛이나 주황빛으로 보이기도 해요. 꼭대기에는 양파를 조금 닮은 커다란 둥근 지붕(돔)이 있고, 네 모서리에는 미너렛이라는 가늘고 높은 탑이 하나씩 서 있어요.
벽을 가까이서 보면 색깔 있는 작은 돌 조각을 퍼즐처럼 대리석에 박아 넣어 만든 꽃무늬가 있어요. 검은 돌로 새긴 아름다운 글씨도 있는데,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의 구절이에요. 그중에는 천국 이야기를 하는 구절도 있답니다.
무덤 앞에는 긴 물길로 네 부분으로 나뉜 큰 정원이 있어요. 이 정원은 천국의 정원을 떠올리게 하려고 만들었어요. 모든 것이 거울에 비춘 것처럼 왼쪽과 오른쪽이 똑같이 짜여 있지요.
돌을 다듬는 사람, 건물을 짓는 사람, 그림과 글씨를 새기는 사람까지 2만 명이 넘는 일꾼이 약 20년 동안 타지마할을 지었다고 해요. 지금은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찾아오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가운데 하나예요.
한눈에 보기
- 건립 시기
- 1632년 착공. 영묘는 1643~1648년 무렵 대체로 완성, 묘역 전체는 1653년 무렵 완공
- 위치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아그라, 야무나강 오른쪽(남쪽) 기슭(당시 무굴 제국)
- 건립자
- 무굴 제국 제5대 황제 샤 자한(재위 1628~1658)
- 주인
- 뭄타즈 마할(본명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 1593~1631). 샤 자한도 1666년 그 곁에 묻힘
- 건축가
- 흔히 우스타드 아흐마드 라하우리로 본다. 많은 설계자·서예가·장인이 함께 참여
- 재료
- 벽돌 심에 라자스탄 마크라나산 흰 대리석을 입힘. 정문·모스크 등은 붉은 사암. 준보석 상감
- 규모
- 묘역 약 17헥타르. 영묘 기단 한 변 약 95m, 전체 높이 약 73m
- 지정
-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도 고고학조사국(ASI)이 관리
쉬움
타지마할은 무엇인가
타지마할은 인도 북부 도시 아그라에 있는 영묘(靈廟), 곧 크고 웅장한 무덤이다. 무굴 왕조의 다섯 번째 황제 샤 자한이 1631년에 세상을 떠난 황후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웠다. 건물 하나가 아니라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역 전체를 가리킨다. 앞마당과 거대한 정문, 물길이 흐르는 넓은 정원이 있고, 가장 안쪽 강가의 높은 단 위에 흰 대리석 영묘가 서 있으며 그 양옆에 붉은 사암 건물 두 채가 있다.
‘타지마할’이라는 이름은 흔히 ‘궁전에서 가장 높은 이’라는 뜻의 칭호 ‘뭄타즈 마할’을 줄인 말로 풀이한다. 그러나 17세기 무굴 궁정의 기록자들은 이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이 건물을 ‘빛나는 무덤’이라는 뜻의 ‘라우자 이 무나와라(rauza-i munawwara)’ 또는 그냥 황후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이름은 나중에 널리 퍼졌다.
타지마할은 흔히 ‘사랑의 기념비’로 불리고, 슬픔에 잠긴 황제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이 건물에 감동하는 큰 이유다. 하지만 이곳은 황제의 권력을 드러내는 건축이자, 꾸란 구절로 가득한 종교 건축이며, 무굴 건축과 장인 기술의 가장 높은 성취이기도 하다. 1983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인도 이슬람 미술의 보석’이라 부르며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쉬움
묘역을 ‘읽는’ 법: 도시 쪽 문에서 강가까지
묘역은 남북으로 뻗은 하나의 중심축을 따라 거의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짜여 있다. 남쪽에서 오는 방문객은 먼저 시장과 대상 숙소가 있는 구역을 지나, 사람들이 모이던 앞마당(질라우카나)에 이른다. 여기서 붉은 사암으로 지은 거대한 정문 ‘다르와자 이 라우자’를 지나면 정원이 펼쳐진다. 정문의 아치 너머로 흰 영묘가 한 폭의 그림처럼 갑자기 나타나도록 설계되었다.
정원은 ‘네 부분으로 나뉜 정원’이라는 뜻의 차하르바그(charbagh)다. 돋운 길과 물길이 정원을 네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은 다시 잘게 나뉜다. 페르시아·이슬람 전통에서 이런 정원은 꾸란에 묘사된, 강이 흐르는 천국의 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가운데에는 긴 연못이 있어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영묘가 물 위에 비친다.
영묘가 정원 한가운데 있던 이전의 무굴 무덤들과 달리, 타지마할은 정원의 북쪽 끝, 강가의 테라스 위에 서 있다. 양옆에는 똑같이 생긴 붉은 사암 건물이 있는데, 서쪽은 메카를 향한 모스크이고 동쪽은 대칭을 맞추기 위한 ‘자와브(jawab, 대답)’라는 건물이다. 강 건너편에는 같은 축 위에 ‘달빛 정원’이라는 뜻의 마흐타브 바그가 있어, 팔각형 연못에 비친 영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영묘는 한 변이 약 95m인 정사각형 대리석 기단 위에 서 있고, 네 모서리에 미너렛이 하나씩 있다. 미너렛은 바깥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어져 있는데, 혹시 무너지더라도 영묘 반대쪽으로 쓰러지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영묘 건물은 모서리를 깎은 팔각형이고, 각 면에 커다란 아치형 입구(이완)가 있으며, 그 위로 이중 돔과 금박 첨탑 장식이 솟아 있다.
쉬움
영묘 안: 가묘, 투각 칸막이, 빛
가운데 팔각형 방에는 시신이 없는 기념용 무덤, 곧 가묘(假墓) 두 기가 있다. 뭄타즈 마할의 가묘가 정확히 한가운데에 있고, 그 서쪽에 더 큰 샤 자한의 가묘가 있다. 실제 무덤은 이슬람 무덤의 관례대로 바로 아래 지하 묘실에 있다. 무슬림 관습에 따라 시신은 얼굴이 메카를 향하도록 놓였다.
가묘 둘레에는 레이스처럼 섬세하게 뚫어 새긴 팔각형 대리석 칸막이(잘리)가 있다. 빛은 벽 위쪽의 대리석 투각 창을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와 방 안은 부드럽고 어둑하다. 이 방은 소리가 길게 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샤 자한의 가묘는 묘역 전체에서 유일하게 대칭을 깨뜨리는 요소다. 처음 설계에는 없었고, 1666년 황제가 죽은 뒤에야 아내 곁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황제가 자기 무덤을 따로 지으려 했다는 증거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중급
장식: 돌 상감, 부조, 서예
타지마할의 장식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상감이다. 대리석을 꽃·덩굴·기하학 무늬 모양으로 파내고 홍옥수·벽옥·청금석·옥 같은 색깔 있는 돌을 끼워 넣었다. 이탈리아어로 피에트라 두라, 남아시아에서는 파르친 카리라고 부르는 이 기법은 무굴 공방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꽃 한 송이에 수십 개의 작은 돌 조각이 들어가기도 한다.
둘째는 부조다. 벽 아랫부분을 따라 꽃이 핀 식물을 얕게 새긴 판이 이어진다. 튤립·백합·붓꽃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무굴 궁정에 들어온 유럽 식물도감 판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이 꽃들은 ‘정원으로서의 천국’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셋째는 서예다. 우아한 술루스체로 쓴 꾸란 구절이 검은 대리석으로 상감되어 영묘와 정문의 아치를 두른다. 시라즈 출신의 서예가 아마나트 칸은 작품에 자기 이름을 남겼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높은 곳에 있는 글자일수록 크게 써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모두 같은 크기로 보인다. 정문의 명문에는 의로운 영혼에게 건네는 꾸란 제89장의 구절 “오, 평안한 영혼이여, 너의 주님께 돌아가라. 기뻐하고 기쁨을 받으며… 나의 천국으로 들어가라”가 들어 있다.
중급
어떻게 지었나
뭄타즈 마할은 1631년 6월 17일, 샤 자한이 원정 중이던 데칸 지방의 부르한푸르에서 숨졌다. 처음에는 그곳의 정원에 임시로 묻혔다가, 같은 해 12월 시신이 아그라로 옮겨져 공사 예정지에 다시 임시로 안장되었다. 무굴 귀족들의 정원이 늘어선 강변의 이 땅은 암베르의 라자 자이 싱의 소유였는데, 황제의 문서에는 그 대가로 도시 안의 다른 저택들을 주었다고 적혀 있다.
공사는 1632년에 시작되었다. 무굴 연대기에 따르면 영묘는 뭄타즈 사망 12주기인 1643년 무렵 대체로 완성되었고 장식 작업은 그 뒤로도 몇 해 이어졌으며, 정문과 부속 건물까지 포함한 묘역 전체는 1653년 무렵 완공되었다. 전체 공사비는 당대와 후대 기록에 따라 약 500만 루피에서 3,000만 루피 이상까지 크게 달라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다.
벽은 벽돌과 잡석으로 심을 쌓고 겉을 대리석과 사암으로 덮었다. 흰 대리석은 300km 넘게 떨어진 라자스탄의 마크라나에서, 붉은 사암은 파테푸르 시크리 부근 채석장에서 가져왔고, 보석류는 아시아 곳곳에서 들여왔다. 흙으로 쌓은 경사로와 소·코끼리·물소 무리가 무거운 돌을 날랐다고 전하며, 강가의 무른 땅에 대비해 잡석을 채운 우물들 위에 기초를 놓았다.
일꾼 수는 전통적으로 약 2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석공, 돌 다듬는 사람, 상감 장인, 조각가, 화가, 서예가가 제국 안팎에서 모였다. 설계는 흔히 우스타드 아흐마드 라하우리의 것으로 보는데, 이는 그의 아들이 쓴 후대 문헌에 근거한다. 실제로는 궁정 관리들이 감독하고 건축에 깊은 관심을 가진 황제의 뜻이 반영된 집단 작업이었다. 황제가 다시는 이만큼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게 일꾼들의 손을 잘랐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중급
무굴 제국과 샤 자한의 시대
무굴 왕조는 1526년,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후손인 중앙아시아의 왕자 바부르가 델리 술탄을 물리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계자들, 특히 악바르(재위 1556~1605) 때 제국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다. 궁정 문화는 페르시아풍이어서 행정과 시의 언어는 페르시아어였지만, 백성의 다수는 힌두교도였고 무슬림·시크교도·자이나교도 등도 많았다.
샤 자한(왕자 시절 이름 쿠람, 1592~1666)은 1628년에 즉위했다. 그의 치세는 흔히 무굴 건축의 절정기로 꼽힌다. 그는 타지마할 말고도 아그라 성의 여러 건물을 흰 대리석으로 새로 짓고, 공작 옥좌를 만들게 했으며, 붉은 성과 자마 마스지드가 있는 새 수도 샤자하나바드(지금의 올드 델리)를 세웠다.
무굴 건축은 높은 드럼 위의 돔, 이완, 차하르바그 정원 같은 티무르·페르시아 전통에 인도의 건축 기술과 형식(차트리라 부르는 돔 정자, 까치발 처마, 현지 석재)을 결합했다. 타지마할은 이전 무굴 무덤들, 특히 1570년 무렵 완공된 델리의 후마윤 묘에서 발전한 것이다. 후마윤 묘는 이미 이중 돔, 팔각형 평면, 차하르바그 배치를 갖추고 있었다.
1657년 샤 자한이 병에 걸리자 아들들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승리한 아우랑제브는 1658년 아버지를 폐위하고 1666년 그가 죽을 때까지 아그라 성에 가두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샤 자한이 자기 방에서 강굽이 너머의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죽은 뒤 뭄타즈 마할 곁에 묻혔다.
중급
사랑, 천국, 권력: 무엇을 뜻하는가
대부분의 방문객에게 타지마할은 무엇보다 사랑과 슬픔의 기념비다. 궁정 기록은 샤 자한의 애도를 전한다. 그는 한동안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나고 음악과 화려한 옷을 멀리했으며, 수염이 하얗게 셌다고 한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비롯해 여러 언어의 시인들이 이 건물을 사랑과 상실의 상징으로 노래했다. 타고르의 시 「샤자한」에는 흔히 ‘시간의 뺨 위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로 옮겨지는 구절이 있다.
이 건물은 깊은 종교성도 지닌다. 신중하게 고른 꾸란 구절들은 심판의 날, 신의 자비, 천국에서 신자가 받을 보상을 이야기한다. 정원과 물길, 벽에 새긴 꽃은 모두 천국의 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묘역 전체는 꾸란이 신자에게 약속한 내세의 모습이며, 뭄타즈 마할이 그곳에서 쉬고 있다고 상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타지마할은 무굴 황제의 권력을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거대한 규모, 값비싼 재료, 완벽한 대칭, 막대한 인력은 모두 샤 자한 치세의 부와 질서를 과시했다. 궁정 기록자들은 황제를 이상적인 군주로, 이 건물을 시대의 경이로 그렸다. 묘역 주변의 시장과 대상 숙소에서 나오는 수입은 무덤 관리 비용으로 쓰였다.
중급
이후의 역사: 쇠퇴, 식민지 시기의 수리, 대중 관광
18세기에 무굴의 힘이 약해지자 타지마할도 수난을 겪었다. 1760년대 아그라를 점령한 자트 세력이 값진 설비를 떼어 갔다고 전하며, 귀금속과 일부 상감 보석도 세월이 흐르며 뜯겨 나갔다. 1803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아그라를 장악했을 때 이미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고, 19세기 초에는 영국인 방문객들이 정원에서 소풍이나 연회를 벌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타지마할은 대영제국에게 ‘인도’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고, 인도 총독 커즌 경의 주도로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져 1908년 무렵 끝났다. 이 복원으로 건물은 보수되었지만, 나무와 꽃을 빽빽하게 심은 무굴식 정원은 탁 트인 영국식 잔디밭으로 바뀌었고, 오늘날 방문객이 보는 모습이 대체로 이때의 것이다. 앞선 한 총독이 타지마할을 허물어 대리석을 팔려 했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1947년 인도 독립 이후에는 인도 고고학조사국이 관리하고 있다. 지금은 해마다 수백만 명이 찾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과 1965년·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에는 공습에 대비해 비계나 천으로 건물을 가리기도 했다.
중급
보존: 대기 오염, 강, 인파
오늘날 타지마할이 맞닥뜨린 가장 큰 위협은 대기 오염이다. 공장과 자동차, 가까운 정유 공장에서 나온 배출물 때문에 대리석이 누렇고 갈색으로 변했다. 1996년 인도 대법원은 변호사 M. C. 메타가 제기한 소송에서, 주변 약 1만 4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타지 사다리꼴 구역(Taj Trapezium Zone)’의 오염 산업체에 폐쇄·연료 전환·이전을 명령했다. 지금은 전기차 등 오염을 일으키지 않는 차량만 묘역 가까이 갈 수 있다.
대리석을 닦기 위해 보존 전문가들은 ‘물타니 미티’라는 점토 팩을 바른다. 마르고 나서 씻어 내면 때가 함께 빠져나오는데, 전통 미용법이 기념물에 쓰이는 셈이다. 오염된 야무나강에서 번식한 곤충이 대리석에 초록색 얼룩을 남기는 문제도 있다.
강 자체도 건물에 중요하다. 일부 공학자들은 지하수위가 내려가고 야무나강이 마르면, 젖은 강기슭을 전제로 설계된 기초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다만 고고학조사국은 구조가 안정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간제 입장권과 영묘 내부 입장 제한 등 수백만 명의 방문객을 관리하는 일도 계속되는 과제다.
심화
학계의 논쟁: 상징, 설계, 정원
신의 옥좌인가, 사랑의 무덤인가. 미술사학자 웨인 베글리는 1979년의 영향력 있는 논문에서, 이 묘역이 심판의 날 천국의 정원 위에 놓인 ‘신의 옥좌’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도록 설계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꾸란 구절의 선택, 이븐 아라비의 신비주의 저술에 실린 도해, 영묘가 정원 끝에 놓인 특이한 배치를 들었다. 많은 학자가 천국 이미지가 핵심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신의 옥좌’라는 구체적 해석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설계자들이 그 문헌을 알았다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강변 정원. 묘역을 오랫동안 실측 조사한 에바 코흐는 타지마할을 아그라의 ‘강변 정원’ 유형, 곧 중심 건물이 차하르바그 한가운데가 아니라 강가의 테라스 위에 서는 정원의 가장 웅장한 사례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강 건너 마흐타브 바그가 설계를 완성하며, 타지마할은 야무나강을 따라 늘어선 정원 풍경 전체의 일부다. 코흐는 무굴 단위(가즈) 격자에 바탕을 둔 평면의 정밀한 기하학·비례 체계도 강조한다.
건축가는 누구인가. 샤 자한 궁정의 페르시아어 기록은 감독관 이름은 전하지만 설계자에 대해서는 말이 거의 없다. 우스타드 아흐마드 라하우리라는 이름은 그의 아들 루트풀라 무한디스가 쓴 후대 문헌에서 나온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장인이 설계했다는 19세기 유럽의 주장은 증거가 없으며, 오늘날에는 식민주의적 편견의 산물로 여겨진다.
전설과 정치. 샤 자한이 강 건너에 검은 대리석으로 똑같은 무덤을 지으려 했다는 ‘검은 타지’ 전설은 마흐타브 바그 발굴 결과 뒷받침되지 않았다. 발굴에서 나온 것은 무덤의 기초가 아니라 정원이었다. 1960년대부터 퍼진, 타지마할이 원래 힌두 사원이었다는 주장은 역사학자들과 인도 고고학조사국이 부정했고 인도 법원도 이에 근거한 청원을 기각했다. 이런 논쟁은 이 건물이 현대 정체성 정치의 대상이기도 함을 보여 준다.
심화
사료와 연구 방법
문헌 사료. 가장 중요한 당대 기록은 샤 자한 치세의 페르시아어 궁정 연대기, 특히 압둘 하미드 라하우리의 『파드샤나마』와 무함마드 살리흐 캄보 등의 저술이다. 이 기록들은 공사 과정과 해마다 열린 기일 의식(우르스)을 전한다. 라자 자이 싱과의 토지 교환에 관한 황제의 칙령(파르만)도 남아 있다. 프랑스 보석상 장바티스트 타베르니에와 의사 프랑수아 베르니에 같은 유럽 여행자들도 기록을 남겼지만, ‘2만 명이 22년 동안 일했다’는 타베르니에의 수치처럼 그들의 숫자는 조심해서 써야 한다.
문서와 번역. 웨인 베글리와 Z. A. 데사이는 타지마할에 관한 주요 무굴 문헌을 모아 번역한 『타지마할: 빛나는 무덤(Taj Mahal: The Illumined Tomb)』(1989)을 펴냈고, 이 책은 지금도 기본 자료집이다.
증거로서의 건물. 건축 실측, 도면 작성, 석공 표식 연구, 재료 분석은 타지마할이 어떻게 계획되고 지어졌는지 많은 것을 밝혀 주었다. 1990년대 마흐타브 바그 발굴은 영묘와 강 건너 정원의 관계를 분명히 했다. 다른 무굴 무덤·정원과 비교하면 타지마할은 홀로 떨어진 기적이 아니라 일련의 건축 실험 끝에 나온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방법상의 주의. 타지마할에는 식민지 시대 관광객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부터 현대의 정치적 주장까지 시대마다 전설이 따라붙었다. 역사학자들은 17세기 문서와 건물 자체가 보여 주는 것과 후대 이야기가 덧붙인 것을 구별하며, 유럽 여행기를 페르시아·인도 사료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나란히 놓고 읽는다.
핵심 개념
- 영묘
- 기념비적인 무덤 건축. 타지마할은 무굴 정원 무덤의 가장 유명한 사례다.
- 차하르바그
- 길과 물길로 네 부분으로 나눈 정원. 이슬람 전통에서 천국의 네 강을 떠올리게 한다.
- 대칭과 중심축
- 묘역 전체가 남북 한 줄의 축을 따라 좌우가 거울처럼 짜여 있다. 샤 자한의 가묘만 이 질서를 깬다.
- 천국의 이미지
- 꾸란 구절, 흐르는 물, 새긴 꽃이 영묘를 천국 정원 속의 거처로 보이게 한다.
- 강변 정원
- 중심 건물이 강가 테라스에 서는 아그라의 정원 유형. 코흐는 타지마할을 그 최고의 사례로 본다.
- 제국의 과시
- 건물의 규모와 비용은 샤 자한 통치의 부와 질서, 정당성을 드러냈다.
- 위협받는 유산
- 대기 오염, 변화하는 강, 대중 관광 때문에 보존은 계속되는 과학적·정치적 과제다.
기록
- 1526년 — 바부르가 파니파트에서 델리 술탄을 물리치고 무굴 제국을 세운다.
- 1612년 — 쿠람 왕자(훗날의 샤 자한)가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뭄타즈 마할)과 결혼한다.
- 1628년 — 샤 자한이 황제로 즉위한다.
- 1631년 — 6월 17일 뭄타즈 마할이 부르한푸르에서 숨지고, 12월 시신이 아그라로 옮겨진다.
- 1632년 — 라자 자이 싱에게서 얻은 땅에서 묘역 공사가 시작된다.
- 약 1643년 — 뭄타즈 마할 사망 12주기 무렵 영묘가 대체로 완성된다.
- 약 1653년 — 정문과 부속 건물을 포함한 묘역 전체가 완공된다.
- 1658년 — 아우랑제브가 샤 자한을 폐위하고 아그라 성에 가둔다.
- 1666년 — 샤 자한이 죽어 뭄타즈 마할 곁에 묻힌다.
- 약 1908년 — 커즌 총독 주도의 복원이 끝나고 정원이 잔디밭으로 바뀐다.
- 1983년 — 타지마할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 1996년 — 인도 대법원이 타지 사다리꼴 구역의 오염 산업체에 대한 조치를 명령한다.
용어 풀이
- 무굴
- 1526년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남아시아의 넓은 지역을 다스린 왕조.
- 가묘(세노타프)
- 실제 무덤 위나 다른 곳에 두는, 시신이 없는 무덤 모양의 기념물.
- 이완
- 한쪽이 트인 높은 궁륭 홀이나 아치형 입구. 페르시아·이슬람 건축에 흔하다.
- 잘리
- 무늬를 뚫어 새겨 빛과 바람이 통하게 한 돌 칸막이.
- 피에트라 두라(파르친 카리)
- 자르고 간 색색의 돌을 돌 바탕에 박아 그림이나 무늬를 만드는 상감 기법.
- 술루스체
- 기념비 명문에 자주 쓰이는 크고 유려한 아랍 문자 서체.
- 미너렛
- 보통 모스크에 딸린 가늘고 높은 탑.
- 질라우카나
- 무굴 건축 단지에서 정문 앞에 있는 앞마당.
- 마크라나 대리석
- 라자스탄 마크라나에서 나는 고운 흰 대리석. 타지마할에 쓰였다.
- 우르스
- 무덤에서 치르는 기일 의식. 타지마할에서는 해마다 황실 의식이 열렸다.
묻고 답하기
타지마할은 왜 지었나요?
샤 자한이 1631년에 세상을 떠난 아내 뭄타즈 마할의 무덤으로 지었어요. 동시에 제국의 영광을 보여 주고 천국의 모습을 표현하려는 뜻도 있었어요.
타지마할은 궁전인가요?
아니에요. 이름에 ‘마할(궁전)’이 들어 있지만 무덤이에요. 이름은 뭄타즈 마할의 칭호에서 왔어요.
대리석 색이 왜 바뀌어 보이나요?
흰 대리석은 주변 빛의 색을 되비추기 때문에 새벽에는 분홍빛, 한낮에는 흰빛, 해 질 녘에는 금빛, 달밤에는 푸르스름하게 보여요.
샤 자한이 정말 일꾼들의 손을 잘랐나요?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후대의 전설이고 역사적 증거가 없어요.
‘검은 타지’를 지으려 했나요?
아마 아닐 거예요. 강 건너를 발굴해 보니 정원(마흐타브 바그)이 나왔을 뿐, 검은 무덤을 계획한 흔적은 없었어요.
누가 설계했나요?
흔히 우스타드 아흐마드 라하우리로 보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든 작품이고 황제도 설계에 깊이 관여했어요.
학자들은 명문을 어떻게 해석하나요?
꾸란 구절들은 심판, 자비, 천국을 강조합니다. 웨인 베글리는 묘역 전체를 천국 위 신의 옥좌의 상으로 읽었고, 다른 학자들은 천국이라는 주제는 받아들이되 그 구체적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Taj Mahal.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Taj Mahal. Wikipedia
- Mumtaz Mahal. Wikipedia
- Shah Jahan. Wikipedia
- Ustad Ahmad Lahauri. Wikipedia
- Mughal architecture. Wikipedia
- Mehtab Bagh. Wikipedia
- Ebba Koch, The Complete Taj Mahal and the Riverfront Gardens of Agra. Thames & Hudson, 2006
- W. E. Begley and Z. A. Desai, Taj Mahal: The Illumined Tomb. Aga Khan Program for Islamic Architecture /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89
- Wayne E. Begley, The Myth of the Taj Mahal and a New Theory of Its Symbolic Meaning. The Art Bulletin, 1979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