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350여 년 전, 지금의 멕시코 땅 두 화산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책을 무엇보다 좋아하는 후아나 이네스라는 여자아이가 살았어요. 언니가 공부하러 가는 곳을 몰래 따라가 세 살 무렵에 글을 깨쳤고, 그녀가 훗날 회상한 바로는 할아버지 서재의 책을 정신없이 읽었대요.
그때는 여자가 대학에 다닐 수 없었어요. 후아나 이네스는 큰 도시에서 공부하려고 남자아이 옷을 입혀 보내 달라고 어머니를 조르기까지 했지요.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똑똑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왕을 대신해 멕시코를 다스리던 부왕의 궁전에 들어가 살게 되었어요.
스무 살 무렵 그녀는 수녀가 되었어요. 그녀에게 수녀원은 책과 지도, 악기와 과학 기구로 가득한 방을 두고 마음껏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이었지요. 시와 연극, 교회 축일에 부를 노래를 지었는데, 그중에는 아스테카 사람들의 말인 나우아틀어 구절이 들어간 것도 있고, 멕시코에 살던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과 그 후손의 스페인어 말투를 흉내 내는 인물이 나오는 것도 있어요. 다만 그 흉내에는 당시 연극에서 흔하던 고정관념이 섞이기도 했어요.
힘 있는 성직자 가운데는 수녀가 세상일에 관한 글을 너무 많이 쓴다고 못마땅해한 사람도 있었어요. 소르 후아나는 여성도 공부할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을 담은 긴 편지로 답했지요. 이 편지는 지금도 여자아이의 교육을 앞장서서 변호한 글로 읽혀요.
생애 마지막 무렵 그녀는 글쓰기를 거의 그만두고 책을 내놓았어요. 그리고 1695년 전염병이 돌 때 아픈 수녀들을 돌보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오늘날 그녀의 얼굴은 멕시코 지폐에 실려 있고, 그녀의 시는 온 세계에서 읽히고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 인물
-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시인·극작가·학자, 히에로니무스회 수녀
- 출생
- 멕시코시티 근처 산미겔 네판틀라. 1648년(세례 기록) 또는 1651년(첫 전기 작가 디에고 카예하)
- 사망
- 1695년 4월 17일, 멕시코시티, 전염병 유행 중
- 생활 공간
- 1664년 무렵부터 부왕 궁정(1667년 가르멜회에 잠시 머문 기간 제외), 이후 멕시코시티 산헤로니모 수녀원(1669~1695년)
- 주요 작품
- 『첫 번째 꿈(Primero sueño)』, 레돈디야 「어리석은 남자들이여(Hombres necios)」, 소네트들, 희극 『한 집안의 곤경(Los empeños de una casa)』, 성체극 『신성한 나르키소스(El divino Narciso)』와 그 서막극(로아), 비얀시코 연작, 『소르 필로테아에게 보내는 답신』(1691)
- 첫 작품집
- 『카스탈리아의 범람(Inundación castálida)』, 1689년 파레데스 백작부인을 통해 마드리드에서 간행(그 전에도 몇몇 작품은 멕시코에서 낱권으로 인쇄되었다)
- 언어
- 주로 스페인어. 일부 노래에는 라틴어, 나우아틀어, 아프리카계 스페인어 말투도 썼다
- 기념
- 멕시코 지폐. 가장 최근에는 2020년 발행된 100페소 지폐
쉬움
소르 후아나는 누구인가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는 오늘날 멕시코 대부분을 아우르던 스페인의 부왕령, 누에바에스파냐(신에스파냐)의 작가이자 사상가였다. ‘소르(Sor)’는 ‘수녀’ 앞에 붙이는 호칭이다. 그녀는 생애의 후반부를 멕시코시티 산헤로니모 수녀원에서 수녀로 지냈다. 그곳에서 서정시와 희곡, 교회 축일에 부를 노래의 가사, 신학 논고와 편지를 써서 대서양 양쪽에 이름을 떨쳤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녀를 그리스 신화의 아홉 무사(뮤즈)에 하나를 더한 ‘열 번째 무사’라 불렀고, 1689년 마드리드에서 나온 첫 시집의 속표지는 그녀를 ‘유일한 여류 시인(única poetisa)’이라고 소개했다. 오늘날 비평가들은 그녀를 스페인 바로크 문학의 주요 시인으로 꼽으며, 그녀가 깊이 읽은 스페인 본국의 루이스 데 공고라,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와 나란히 놓는다.
그녀는 주장으로도 기억된다. 1691년의 긴 편지 『소르 필로테아에게 보내는 답신』에서 그녀는 평생 학문을 향한 열정을 변호하고 여성의 배울 권리를 요구했다. 이 편지 덕분에 그녀는 라틴아메리카 페미니즘 사상의 출발점에 서는 인물이 되었다. 한편 종교적 관점의 독자들은 그녀가 신학에 헌신한 가톨릭 수녀로서 논지를 펼쳤다는 점을 강조한다.
쉬움
무엇이든 읽고 싶었던 아이
후아나 이네스는 멕시코시티에서 남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산미겔 네판틀라에서 태어났다. 포포카테페틀과 이스타시와틀 두 화산이 올려다보이는 마을이다. 어머니 이사벨 라미레스 데 산티야나는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여성, 곧 크리오야였고, 아버지 페드로 마누엘 데 아수아헤(아스바헤라고도 쓴다)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부모가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는데, 당시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사회적 앞날을 좁히는 조건이었다.
태어난 해부터가 불확실하다. 첫 전기 작가인 예수회 신부 디에고 카예하는 1700년에 그녀가 1651년 11월에 태어났다고 썼다. 그런데 1952년, 1648년 12월 날짜가 적힌 치말우아칸 본당의 세례 기록이 공개되었다. ‘교회의 딸’(혼인하지 않은 부모의 아이를 가리키던 관용 표현) 이네스라는 아이의 기록이다. 옥타비오 파스와 안토니오 알라토레를 비롯한 많은 학자는 이 아이를 후아나 이네스로 보지만, 지금도 1651년을 택하는 학자들이 있다. 어느 쪽도 확실히 증명할 수 없기에 신중한 문헌은 ‘1648년 또는 1651년’이라고 적는다.
그녀는 한동안 파노아얀에 있는 외할아버지 페드로 라미레스의 농장에서 자라며 그의 책들을 만났다. 그녀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세 살 때 언니의 수업에 몰래 끼어 글을 깨쳤고, 치즈를 먹으면 머리가 둔해진다는 말을 듣고는 좋아하던 치즈도 끊었다. 멕시코시티에 대학이 있다는 말을 듣자, 남자 옷을 입혀 그곳에 보내 달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결국 그녀는 수도의 친척 집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가정교사에게 라틴어를 배우는 한편 훨씬 많은 것을 혼자 익혔다.
쉬움
부왕의 궁정에서
1664년 무렵, 10대의 후아나 이네스는 새로 부임한 부왕 만세라 후작의 궁정에 들어가 부왕비 레오노르 카레토의 시녀가 되었다. 부왕의 궁전은 누에바에스파냐 궁정 생활의 중심으로, 생일과 축제와 장례를 위한 음악과 연극과 시가 끊이지 않았다. 이 젊은 여성은 곧 시와 학식으로 이름을 얻었다.
이 시절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카예하의 전기에 실려 있다. 그녀의 지식이 진짜인지 시험해 보려고 부왕이 신학자·철학자·수학자·역사가·시인 등 학자 마흔 명가량을 모아 그녀에게 질문하게 했다는 것이다. 카예하가 만세라 후작의 말이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쏟아지는 질문을 “왕실 갤리온선이 덤벼드는 작은 거룻배 몇 척을 물리치듯” 막아 냈다. 수십 년 뒤 그녀를 흠모하던 사람이 전한 이야기이니 세부는 다듬어졌을 수 있지만, 그녀가 이미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잘 보여 준다.
레오노르 카레토는 그녀의 첫 번째 큰 후원자였다. 소르 후아나는 훗날 페트라르카의 연인 이름을 빌린 ‘라우라’라는 시적 이름으로 그녀에게 시를 바쳤다. 1670년대 초 만세라 부부가 스페인으로 돌아가던 길에 부왕비가 베라크루스로 가는 도중 세상을 떠나자, 소르 후아나는 애도의 소네트들을 지었다.
중급
왜 수녀원이었을까: 산헤로니모와 그 유명한 방
1667년 후아나 이네스는 도시에서 가장 엄격한 수도회 가운데 하나인 맨발 가르멜회 수녀원에 들어갔지만, 석 달쯤 지나 그곳을 나왔다. 1669년에는 규율이 그보다 너그러운 히에로니무스회 수녀들의 공동체인 산헤로니모 수녀원에서 서원을 했고, 이후 평생 그곳에 머물렀다.
『답신』에서 그녀는 이 선택을 놀랄 만큼 솔직하게 설명한다. 결혼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고, 구원을 확실히 하는 데는 수녀 생활이 가장 알맞은 길이었다. 다만 “학문의 자유를 방해할 정해진 일거리를 갖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버려야 할까 걱정했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의 큰 수녀원에서는 이런 바람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수녀가 개인 방을 소유하고, 하인을 두고, 수녀원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을 수 있었다.
그녀의 방은 작은 학술원이 되었다. 그녀는 많은 책을 모았는데, 추정치는 수백 권에서 4천 권가량까지 제각각이다. 악기와 수학 기구도 함께 갖추었다. 수녀원 창살 너머에서 그녀는 멕시코와 스페인의 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궁정과도 가까운 관계를 이어 갔다.
1680년 그녀는 새 부왕 라 라구나 후작과 그 부인인 파레데스 백작부인 마리아 루이사 만리케 데 라라 이 곤사가를 맞이하는 우의적(寓意的) 개선문의 설계를 의뢰받았고, 그 도상을 산문 『우의적 넵투누스(Neptuno alegórico)』로 풀어 썼다. 이때부터 부부가 스페인으로 돌아간 1688년까지 백작부인은 그녀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보호자였다. 백작부인은 ‘리시’ 또는 ‘필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소르 후아나의 가장 열정적인 시들에 영감을 주었고, 시인의 원고를 마드리드로 가져간 사람도 바로 그녀였다.
중급
시: 재치 있는 노래에서 『첫 번째 꿈』까지
소르 후아나의 시는 대부분 궁정의 생일, 선물, 죽음 같은 계기에 맞춰, 스페인 바로크 시의 다양한 시형으로 쓰였다. 그녀는 그 관습 안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길렀다.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시는 8음절 4행 연인 레돈디야로 된 작품으로, “Hombres necios que acusáis / a la mujer sin razón”(어리석은 남자들이여, 까닭 없이 / 여자를 탓하는 그대들이여)으로 시작한다. 이 시는 날렵한 논리로 이중 잣대를 드러낸다. 남자들은 여자에게 구애하고서는, 여자가 넘어오면 넘어왔다고, 거절하면 거절했다고 탓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소네트는 사랑과 질투에서 시간과 환상에 대한 성찰까지 폭이 넓다. 자기 초상화를 노래한 소네트 「그대가 보는 이것은, 색칠한 속임수(Este que ves, engaño colorido)」에서 그녀는 그림을 아첨하는 기만이라 부르고, “es cadáver, es polvo, es sombra, es nada”(그것은 시체요, 먼지요, 그림자요, 무(無)이다)라는 행으로 끝맺는다. 이는 “en tierra, en humo, en polvo, en sombra, en nada”로 끝나는 공고라의 소네트 「네 머리칼과 겨루려고(Mientras por competir con tu cabello)」의 마지막 행을 분명히 떠올리게 한다. 소르 후아나는 허영을 경계하는 익숙한 바로크의 주제를 그림 속 자기 모습에 적용해, 그 그림이 받는 찬사를 물리친다. 이 시에서 여성이 외모로 평가받는 방식에 대한 논평을 읽어 내는 독자들도 있다.
가장 야심 찬 작품은 1692년에 간행된 거의 천 행에 이르는 철학시 『첫 번째 꿈(Primero sueño)』이다. 길고 짧은 행을 자유롭게 섞는 실바 형식으로 쓰였고, 제목과 촘촘한 문체는 공고라의 『고독(Soledades)』에 대한 오마주다. 시는 밤이 땅 위로 번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Piramidal, funesta, de la tierra / nacida sombra”(피라미드 모양의 음울한, 땅에서 / 태어난 그림자).
몸이 잠든 사이 영혼은 우주 전체를 단 한 번의 직관으로 붙잡으려다 눈이 부셔 실패하고, 이어 지식의 범주를 한 계단씩 오르려 하다가 다시 실패하며, 마침내 새벽이 잠든 이를 깨운다. 소르 후아나는 이것이 자기 즐거움을 위해 쓴 유일한 작품, “사람들이 『꿈』이라 부르는 짧은 글(papelillo que llaman El Sueño)”이라고 말했다. 독자들은 이 시에서 스콜라 철학적, 신플라톤주의적, 나아가 거의 근대적이고 데카르트적인 정신의 드라마, 곧 앎의 한계에 부딪히는 정신의 모습을 읽어 왔다.
중급
연극, 그리고 여러 목소리를 위한 노래
소르 후아나는 읽히기 위한 글 못지않게 공연을 위한 글을 많이 썼다. 1683년 궁정 축하 행사 때 무대에 오른 희극 『한 집안의 곤경(Los empeños de una casa)』은 사람을 잘못 알아보는 소동, 숨은 연인, 재기 넘치는 여주인공 등 스페인 황금세기 희극의 규칙을 따른다. 그녀의 극작에서 가장 큰 본보기는 칼데론이었다.
파레데스 백작부인의 청으로 지어 1690년 무렵 멕시코에서 따로 인쇄된 『신성한 나르키소스(El divino Narciso)』는 성체(聖體)를 기리는 단막 우의극인 성체극(아우토 사크라멘탈)이다. 여기서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는 ‘인간 본성’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된다. 서막극인 로아는 더욱 특이하다. 아스테카 귀족 차림의 ‘옥시덴테(서방)’와 ‘아메리카’라는 인물이 춤추며 ‘씨앗의 신’을 섬기다가, 스페인 정복을 상징하는 ‘종교’와 ‘열정’에게 제지당한다. 로아는 단순한 굴복으로 끝나지 않고 대화로 논쟁을 펼치며, 신의 형상을 먹는 아스테카 의례와 그리스도교의 영성체를 나란히 놓는다.
소르 후아나는 큰 축일에 멕시코시티·푸에블라·오악사카 대성당의 아침기도(조과)에서 부르던 성가 연작, 비얀시코의 가사도 많이 썼다. 1676년부터의 여러 연작은 식민지 도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준다. 1676년 성모 승천 대축일 비얀시코와 1677년 성 베드로 놀라스코 축일 비얀시코에는 나우아틀어 또는 나우아틀어와 스페인어를 섞은 춤노래 토코틴과, 노예이거나 자유인이던 아프리카인과 그 후손의 스페인어로 부르는 노래가 들어 있다. 나우아틀어는 16세기부터 로마자로 적는 문자 언어였다. 소르 후아나가 이 언어를 얼마나 잘 알았는지는 논쟁거리다. 사라 푸트 에레라는 그녀가 이 언어의 미묘한 표현을 잘 다루었다고 강조하는 반면, 역사가 카밀라 타운센드는 문법 오류를 근거로 그녀가 이 언어를 완전히 구사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이 작품들은 스페인 연극에 흔하던 고정관념에 기대고 있어서, 그것을 얼마나 그대로 흉내 냈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최근 연구는 소르 후아나가 이 목소리들을 빌려 진지한 말도 했다고 본다. 포로를 몸값 내고 구해 내던 메르세드회의 수호성인 성 베드로 놀라스코를 위한 한 비얀시코는, 베드로가 들어가는 곳에서는 아무도 노예로 남지 않는다는 희망을 노래한다.
중급
1690~1691년: 신학 편지와 ‘소르 필로테아’에게 보낸 답신
당대 가장 이름난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애의 상당 부분을 브라질에서 보낸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 안토니우 비에이라는 그리스도의 가장 큰 ‘피네사(fineza)’, 곧 사랑의 최고 증거에 관해 설교한 적이 있다. 비에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견해를 넘어설 수 있다고 자부했다. 이 설교는 전통적으로 1650년 리스본 왕실 예배당에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연대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수십 년 뒤 소르 후아나는 누군가의 청으로 이 설교를 꼼꼼히 비판하는 글을 써서 교부들을 비에이라로부터 변호하고, 끝에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하느님의 가장 큰 호의는 ‘소극적 은혜(beneficios negativos)’, 곧 우리가 잘못 쓸 것을 아시기에 하느님이 주지 않는 은혜일 수 있다는 것이다.
1690년 11월 푸에블라 주교 마누엘 페르난데스 데 산타 크루스는 그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 비판문을 『아테나에 걸맞은 편지(Carta atenagórica)』라는 제목으로 인쇄했다. 그는 지어낸 수녀 ‘소르 필로테아 데 라 크루스’의 이름으로 서명한 편지 형식의 서문을 붙였는데, 그녀의 재능을 칭찬하면서도 그 재능을 세속 학문보다 거룩한 학문에 쓰라고 권하는 내용이었다.
소르 후아나는 1691년 3월 1일 자 『소르 필로테아 데 라 크루스에게 보내는 답신』으로 응답했다. 정중하고 관례적인 겸손으로 가득하지만, 날카로운 자기 변론이기도 하다. 그녀는 배움을 향한 자신의 소명을 이야기하며, 자신은 “쓰기 위해서도, 더욱이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라… 오직 공부하면 덜 무지해질까 하여” 공부한다고 강조하고, 성경과 고대와 자기 시대의 학식 있는 여성들을 열거한다. 신학을 이해하려면 세속 학문이 필요하고, 여성은 학식 있는 나이 든 여성에게 배워야 하며, 생각은 부엌에서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Si Aristóteles hubiera guisado, mucho más hubiera escrito”(아리스토텔레스가 요리를 했더라면 훨씬 더 많이 썼을 것이다).
『답신』은 그녀 생전에 인쇄되지 않았고, 1700년 유고집 『명성과 유작(Fama y obras póstumas)』에 처음 실렸다. 이미 1681년 무렵 고해신부였던 예수회 신부 안토니오 누녜스 데 미란다에게 보낸 편지, 1980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편지에서 그녀는 왜 여성은 공부하면 안 되느냐고,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이성적 영혼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중급
포기, 그리고 죽음
1692년에서 1694년 사이 소르 후아나의 삶은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는 10년쯤 전에 관계를 끊었던 누녜스 데 미란다의 영적 지도를 다시 받아들였고, 1694년 초에는 서원을 갱신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일련의 참회 문서에 서명했다. 그중 하나에는 “yo, la peor de todas”(모든 여자 가운데 가장 못한 나)라는 서명이 있고, 수녀원의 서원 기록부에도 “la peor del mundo”(세상에서 가장 못한 자)라는 비슷한 표현이 남아 있다. 몇몇 문서는 그녀 자신의 피로 서명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신심 표현 방식이었다.
그녀는 장서와 기구도 내놓았다. 그녀의 오랜 벗이던 재속 사제이자 원목 사제(채플린) 호세 데 롬베이다의 유언장을 브라운 대학교의 큐레이터 켄 워드가 멕시코 국립문서보관소(Archivo General de la Nación)에서 찾아냈고, 2011년 공개되었다. 이 유언장에는 그녀가 그에게 책을 팔도록 넘겼고, 그녀가 죽은 뒤에도 그가 대주교 프란시스코 데 아기아르 이 세이하스의 지시로 책을 계속 팔아 그 돈을 대주교에게 건넸다고 적혀 있다. 카예하 같은 초기 기록은 그 돈이 가난한 이들에게 갔다고 전한다. 문학 활동은 거의 멈춘 듯하지만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 포르투갈 수녀들의 모임을 위해 지은 수수께끼 시들이 1968년 리스본에서 발견되었는데, 1695년 날짜의 출판 허가문과 함께 필사본 책으로 엮여 있었다. 다만 그녀가 이 시들을 정확히 언제 지었는지는 논쟁거리다.
1695년 전염병이 멕시코시티와 그녀의 수녀원을 휩쓸었다. 소르 후아나는 병든 동료 수녀들을 간호하다 자신도 병에 걸려 1695년 4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누에바에스파냐 최고의 학자이던 벗 카를로스 데 시궨사 이 공고라가 장례 추도사를 했다.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녀가 왜 침묵했는지는 그녀의 전기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다(아래 ‘여러 관점’ 참고).
중급
그 무렵 세계에서는
소르 후아나는 멕시코 분지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작품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문학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녀는 스페인 본국의 시인들을 읽고 본받았다. 무엇보다 『첫 번째 꿈』을 빚어낸 『고독』의 공고라, 그리고 그녀의 성체극에 영향을 준 우의극의 칼데론이다. 그녀의 설교 비판은 리스본에서 설교하고 브라질에서 활동한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에게 답한 글이었고, 인쇄는 푸에블라에서 이루어졌다. 사상과 책과 논쟁은 스페인 왕정과 가톨릭교회의 그물망을 따라 마드리드·리스본·아메리카·로마 사이를 오갔다.
그녀의 명성은 멕시코만큼이나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파레데스 백작부인이 원고를 스페인으로 가져간 뒤, 1689년 마드리드에서 『카스탈리아의 범람』이, 1692년 세비야에서 『제2권(Segundo volumen)』이, 1700년 마드리드에서 유고집 『명성과 유작』이 나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 세 작품집은 1689년부터 1725년까지 마드리드·바르셀로나·세비야·사라고사·발렌시아·리스본에서 판과 쇄를 합쳐 스무 차례가량 찍혔다. 아메리카의 한 수녀가 쓴 바로크 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그녀는 학식 있는 여성들의 연결망에도 속해 있었다. 『답신』에서 그녀는 자기 시대의 학식 있는 여성으로, 1654년 왕위에서 물러나 로마에서 학자들의 후원자로 살던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와, 파레데스 백작부인의 사촌인 학식 있는 포르투갈 귀부인 아베이루 공작부인을 꼽는다. 백작부인은 1682년 이 사촌에게 산헤로니모의 수녀가 “rara mujer”, 곧 비범한 여성이라고 써 보냈고, 같은 인맥을 통해 소르 후아나는 포르투갈 수녀들의 문학 ‘아카데미’에 수수께끼 시를 보냈다.
다른 제국의 사례와 견주어 보면 식민지 여성 작가가 어떻게 인쇄본에 이르렀는지가 보인다. 1650년 매사추세츠의 청교도 정착민 앤 브래드스트리트의 시집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런던에서 『최근 아메리카에 나타난 열 번째 무사(The Tenth Muse Lately Sprung Up in America)』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소르 후아나의 『카스탈리아의 범람』처럼, 이 시집도 다른 사람들 손에 들려 제국의 수도로 건너갔고 신대륙에서 온 ‘열 번째 무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팔렸다. 아메리카에서 나온 학식 있는 여성 시인이 유럽 독자에게 얼마나 낯설고, 또 얼마나 잘 팔리는 존재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중급
잊혔다가, 다시 발견되어, 기려지다
바로크 시의 유행이 지난 18세기 초 이후 소르 후아나는 훨씬 덜 읽혔다. 19세기 말부터 관심이 되살아났고, 20세기에는 멕시코 문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알폰소 멘데스 플란카르테와 알베르토 G. 살세다가 1951~1957년에 펴낸 전집은 수십 년 동안 표준 텍스트 구실을 했다.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는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1982년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또는 신앙의 덫(Sor Juana Inés de la Cruz o las trampas de la fe)』을 펴냈다. 전기와 사회사와 문학비평을 아우르는 이 방대한 에세이에서 그는 그녀를 누에바에스파냐 사회 속에 놓고, 그녀가 적대적인 교회 세계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으로 그녀는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마리아 루이사 벰베르그의 영화 『나, 모든 여자 가운데 가장 못한 자(Yo, la peor de todas)』(1990)도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녀의 모습은 이제 멕시코 공공 생활의 일부다. 1978년 발행된 1,000페소 지폐에 처음 실렸고, 이후 1990년대부터 여러 도안의 200페소 지폐에 초상이 들어갔다. 200페소 지폐는 2019년 다른 인물들을 담은 새 도안으로 바뀌었다. 2020년 11월부터는 붉은색 폴리머 100페소 지폐에 실려 있는데, 멕시코 중앙은행은 이 지폐가 식민지 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인이자 작가를 기린다고 설명한다. 그녀가 살던 수녀원 자리에는 지금 소르 후아나 수도원 대학(Universidad del Claustro de Sor Juana)이 들어서 있고, 고향 마을의 이름은 네판틀라 데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가 되었다.
멕시코 밖에서도 그녀는 스페인어의 주요 시인으로, 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보다 한 세기 앞서 여성의 지적 평등을 글로 주장한 아메리카 최초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읽힌다. 특히 『첫 번째 꿈』과 『답신』을 중심으로, 그녀를 독자적인 사상가로 연구하는 철학자도 늘고 있다.
심화
여러 관점
그녀는 왜 글쓰기를 그만두었을까? 옥타비오 파스가 전개하고 엘리아스 트라불세 같은 역사가가 지지한 영향력 있는 해석은 그녀의 말년을 압력의 결과로 본다. 여성 혐오적인 대주교 아기아르 이 세이하스, 까다로운 고해신부, 궁정 후원자들의 귀국, 그리고 홍수와 식량난과 1692년 폭동으로 흔들리며 교회의 힘이 커진 도시가 그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참회 문서들은 강요된 항복이다. 멘데스 플란카르테로 대표되는 더 오래된 가톨릭적 해석은 같은 사건을 진심 어린 영적 회심, 곧 하느님께 온전히 몸을 바치기로 한 수녀의 선택으로 읽는다.
새 문서들은 논쟁을 되살렸지만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1995년 트라불세는 그녀에 대한 비밀 재판의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했으나, 1999년 그런 문서는 없었으며 추측이었다고 인정했다. 2010년 알레한드로 소리아노 바예스는 헤수스 호엘 페냐 에스피노사가 푸에블라의 팔라폭스 도서관(Biblioteca Palafoxiana)에서 찾아낸 페르난데스 데 산타 크루스 주교의 편지들을 공개했다. 『답신』에 대한 1691년 3월의 따뜻한 회신과 1692년 편지의 발췌가 그것이다. 그는 이 편지들이 박해라는 ‘검은 전설’을 반박하며 주교가 그녀의 학문을 격려했음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호세 파스쿠알 부쇼 같은 비평가들은 그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고, 한 전설을 ‘성녀 소르 후아나’라는 또 다른 전설로 바꾸는 것을 경계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녀가 책을 불태우도록 강요받았다는 믿을 만한 증거는 없으며(남은 문서들은 오히려 책을 팔았다고 기록한다), 수수께끼 시처럼 말년에 쓴 글도 남아 있다. 다만 그녀가 언제까지 글을 썼는지는 논쟁거리다.
페미니즘인가, 신앙인가? 1980년대 이후 소르 후아나는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읽혀 왔고, 철학자들은 『답신』을 남녀의 이성적 평등을 변호한 글로 설명한다. 다른 학자들은 그녀의 논증이 가톨릭 신학과 스콜라 철학의 방법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학문을 하느님을 이해하는 길로 제시하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성녀 파울라를 본보기로 삼는다. 예전 비평가들은 그녀를 신비가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그녀에게서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를 보았으며, 제라드 플린은 그녀의 방법이 스콜라 철학적이라고 반박했다. 최근의 많은 학자는 여기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여성의 지성에 대한 그녀의 요구는 그녀가 쓸 수 있었던 신학의 언어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후원자들은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비평가들은 레오노르 카레토(‘라우라’)와 특히 마리아 루이사(‘리시’, ‘필리스’)에게 바친 시를 어떻게 읽을지를 두고 오래 논쟁했다. 멘데스 플란카르테는 신플라톤주의적 관습으로 표현된 순수한 우정이라 했고, 파스는 그 안에서 진정한 열정의 강렬함을 들었으며, 안토니오 알라토레는 소르 후아나가 마리아 루이사를 사랑했다고 결론지었다. 오늘날에는 이 시들을 여성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이른 시기의 시로 논하는 독자도 있다. 툴레인 대학교에서 발견되어 2015년 오르텐시아 칼보와 베아트리스 콜롬비가 펴낸 백작부인의 자필 편지 두 통은, 후원자 자신의 말로 그녀가 이 수녀와의 교유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처음으로 확인해 준다. 다만 두 여성이 속으로 무엇을 느꼈는지까지 알려 주지는 못한다.
심화
증거와 방법: 문서로 한 삶을 읽기
우리가 아는 것의 상당 부분은 몇 가지 종류의 자료에서 나오며, 자료마다 고유한 관점과 편향이 있다. 가장 이른 전기인 디에고 카예하의 글은 『명성과 유작』(1700)에 실렸는데, 경건한 추도문으로 쓰여 성인전 쪽으로 기운다. 『답신』은 소르 후아나 자신의 기록이지만, 힘 있는 독자를 위해 겸손의 상투어를 가득 담아 공들여 짠 수사학적 작품이다. 치즈를 끊은 아이, 공부가 더디면 벌로 머리카락을 자른 소녀의 모습은 그녀가 스스로 내보이기로 고른 자화상이다.
기록 보관소는 계속 커지고 있고, 거의 모든 발견이 논쟁을 불렀다. 1951~1957년 전집 이후 학자들은 리스본에서 찾은 수수께끼 시(1968), 몬테레이에서 찾은 누녜스 데 미란다에게 보낸 편지(1980), 이른바 『세라피나 데 크리스토의 편지』(1996년 트라불세가 공개, 저자 논란), 『신앙 선언(Protesta de fe)』의 여러 판본, 수녀원의 『서원 기록부(Libro de profesiones)』(2013), 주교의 편지들(2010)을 공개했다. 작품 귀속도 거듭되는 문제다. 아구스틴 데 살라사르 이 토레스의 희곡 『두 번째 셀레스티나(La segunda Celestina)』의 작자 미상 결말 부분이 1990년 그녀의 것으로 제안되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인쇄된 판본들도 증거다. 1689년, 1692년, 1700년의 세 작품집은 스페인에서 시인을 흠모하던 사람들이 엮었고, 서문과 출판 허가문과 작품 머리말이 그녀를 경이로운 존재로, 순수한 영혼으로, 아메리카의 신동으로 읽도록 틀을 짠다. 책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제 누가 이 책들을 엮었는지 따진다. 최근 연구는 『카스탈리아의 범람』을 맡은 사람이 비서 프란시스코 데 라스 에라스가 아니라 파레데스 가문의 일원이던 후안 카마초 가이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중한 서술은 몇 가지를 열어 둔다. 그녀가 태어난 해, 수녀원에 들어간 까닭과 수녀원 안에서 다시 물러난 까닭, 마리아 루이사와의 관계의 성격, 그리고 그녀의 침묵이 어디까지 강요되었고 어디까지 선택이었는지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이룬 업적의 규모, 그리고 여성의 정신도 남성과 같은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글로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그 글 가운데 일부는 생전에, 일부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핵심 개념
- 여성의 배울 권리
- 『답신』과 고해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르 후아나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이성적 영혼이 있으니 공부할 수 있어야 하며, 가능하면 학식 있는 나이 든 여성에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서의 학문
- 그녀는 논리학·수사학·자연학·음악·역사가 ‘학문의 여왕’인 신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계단이므로, 세속 학문은 신앙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 앎의 한계
- 『첫 번째 꿈』은 우주 전체를 먼저 단 한 번의 직관으로, 다음에는 한 단계씩 알려는 정신의 시도와 그 실패를 극화한다. 그 실패는 일종의 영웅적 모험이기도 하다.
- 이중 잣대
- 레돈디야 「어리석은 남자들이여」는 촘촘한 논리로, 남자들이 스스로 부추긴 바로 그 행동을 두고 여자를 탓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 여러 목소리의 합창
- 그녀의 비얀시코와 로아는 나우아틀어 화자, 아프리카인과 그 후손, 학생, 성당지기에게 대사를 주어 식민지 멕시코시티의 뒤섞인 사회를 비춘다.
- 수사로서의 겸손
- 소르 후아나는 자주 자기를 낮추는 상투어로 글을 썼는데, 이는 방패 구실도 해서 대담한 말을 받아들여질 만한 형식에 담을 수 있게 했다.
기록
- 약 1648년 — 산미겔 네판틀라에서 태어남. 1648년 12월의 세례 기록이 흔히 그녀의 것으로 여겨지며, 전기 작가 카예하는 1651년 11월이라고 적었다.
- 약 1664년 — 만세라 후작부인인 부왕비 레오노르 카레토의 시녀로 부왕 궁정에 들어감.
- 1669년 — 1667년 맨발 가르멜회에 잠시 머문 뒤, 멕시코시티의 히에로니무스회 산헤로니모 수녀원에서 서원함.
- 1683년 — 희극 『한 집안의 곤경』이 궁정 축하 행사에서 공연됨.
- 1689년 — 첫 작품집 『카스탈리아의 범람』이 파레데스 백작부인을 통해 마드리드에서 간행됨.
- 1690년 — 푸에블라 주교가 비에이라 설교에 대한 그녀의 비판을 ‘소르 필로테아’의 편지와 함께 『아테나에 걸맞은 편지』로 인쇄함.
- 1691년 — 『소르 필로테아 데 라 크루스에게 보내는 답신』에 1691년 3월 1일 날짜를 적음.
- 1692년 — 『첫 번째 꿈』이 실린 작품집 『제2권』이 세비야에서 간행됨.
- 1694년 — 서원을 갱신하는 참회 문서들에 서명함. 이 무렵 장서를 팔도록 내놓음.
- 1695년 — 4월 17일, 멕시코시티에 전염병이 도는 가운데 세상을 떠남.
- 1700년 — 카예하의 전기와 『답신』이 실린 『명성과 유작』이 마드리드에서 간행됨.
- 1982년 — 옥타비오 파스가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또는 신앙의 덫』을 펴냄.
용어 풀이
- 누에바에스파냐(신에스파냐)
- 멕시코시티에서 다스린 스페인의 부왕령으로, 오늘날 멕시코 대부분과 그 주변 지역을 아울렀다.
- 부왕 / 부왕비
- 부왕령을 다스린 국왕의 대리인과, 궁정을 주재한 그 부인.
- 크리오요 / 크리오야
-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사람.
- 히에로니무스회
- 성 히에로니무스의 이름을 딴 수도회. 소르 후아나의 산헤로니모 수녀원은 이 수도회의 여성 분원이었다.
- 레돈디야
- 8음절 4행으로 이루어지고 abba로 각운을 맞추는 스페인어 시 연(聯).
- 실바
- 7음절 행과 11음절 행을 섞고 각운을 자유롭게 다는 유연한 시형. 공고라가 썼고 『첫 번째 꿈』도 이 형식이다.
- 성체극(아우토 사크라멘탈)
- 성체를 기리는 단막 우의 종교극으로, 특히 성체 성혈 대축일에 공연되었다.
- 로아
- 본극에 앞서 공연하는 짧은 서막극.
- 비얀시코
- 후렴과 연으로 이루어진 노래. 본래 세속 노래였으나, 소르 후아나 시대에는 교회 축일을 위해 성가 비얀시코를 연작으로 지어 아침기도(조과) 때 불렀다.
- 토코틴
- 나우아 계통의 춤과 노래. 소르 후아나는 나우아틀어 또는 나우아틀어와 스페인어를 섞은 시구로 썼다.
묻고 답하기
소르 후아나는 왜 수녀가 되었나요?
그녀 자신의 말로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수녀원이 구원에 이르는 가장 안전한 길이면서도 공부할 시간을 남겨 주었기 때문이에요. 가르멜회는 너무 엄격해서 산헤로니모를 택했어요.
1648년생인가요, 1651년생인가요?
확실히는 몰라요. 1648년의 세례 기록이 흔히 그녀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첫 전기 작가는 1651년이라고 했고 지금도 그쪽을 택하는 학자들이 있어요.
정말 나우아틀어로 시를 썼나요?
네. 그녀의 비얀시코 일부와 그 안의 토코틴은 나우아틀어, 또는 나우아틀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쓰였어요. 다만 그녀가 이 언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알았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요.
‘소르 필로테아’는 누구였나요?
가명이에요. ‘소르 필로테아 데 라 크루스’로 서명된 편지는 푸에블라 주교 마누엘 페르난데스 데 산타 크루스가 썼고, 그가 『아테나에 걸맞은 편지』도 인쇄했어요.
글쓰기를 강제로 그만두게 된 건가요?
학자들의 의견이 갈려요. 성직자의 압력을 보는 쪽도 있고, 자발적인 영적 전환을 보는 쪽도 있어요. 2010년 발견된 편지들은 푸에블라 주교가 그녀를 지지했음을 보여 주지만, 1693~1694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결론짓지는 못해요.
교회가 그녀의 책을 불태웠나요?
그렇다는 믿을 만한 증거는 없어요. 한 신부의 유언장에는 그녀가 그에게 책을 팔도록 넘겼다고 적혀 있고, 초기 기록들은 그 돈이 가난한 이들에게 갔다고 전해요.
왜 ‘열 번째 무사’라고 불리나요?
그녀를 시인으로 칭송하려고 그리스 신화의 아홉 무사에 그녀를 더한 거예요. 첫 작품집의 속표지도 그녀를 ‘열 번째 무사(musa décima)’라고 불렀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Sor Juana (1648–1695). Project Vox, Duke University Libraries
- Juana Inés de la Cruz, Sor: Introduction. Feminism in Literature: A Gale Critical Companion (via Encyclopedia.com)
- Juana Inés de la Cruz. Encyclopedia of Science, Technology, and Ethics (via Encyclopedia.com)
- Latin American Philosophy.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Juana Inés de la Cruz. Wikipedia (영어)
- Sor Juana Inés de la Cruz. Wikipedia (스페인어)
- Carla Anabella Fumagalli, Sor Juana Inés de la Cruz: articulaciones entre obra y archivo en los preliminares de sus ediciones originales. Anclajes 22.1 (Universidad Nacional de La Pampa), 2018
- Jorge Gutiérrez Reyna, La Inundación castálida de sor Juana Inés de la Cruz. Historia de un best seller. Anales del Museo de América 30, 2024
- Carla Fumagalli, Hortensia Calvo·Beatriz Colombi 편, 『Cartas de Lysi: la mecenas de sor Juana Inés de la Cruz en correspondencia inédita』(2015) 서평. Orbis Tertius 20.22 (Universidad Nacional de La Plata), 2015
- Sor Juana Inés de la Cruz, Respuesta a sor Filotea de la Cruz (1691), 스페인어 원문. Wikisource
- Sor Juana Inés de la Cruz, Redondillas (“Hombres necios que acusáis”), 스페인어 원문. Wikisource
- Sor Juana Inés de la Cruz, Primero sueño, 스페인어 원문. Wikisource
- Primero sueño. Wikipedia (스페인어)
- El divino Narciso (auto). Wikipedia (스페인어)
- Nicholas R. Jones, Sor Juana’s Black Atlantic: Colonial Blackness and the Poetic Subversions of Habla de negros. Hispanic Review 86.3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8
- Sara Poot Herrera, Sor Juana y sus versos amestizados en una sociedad variopinta. La Lengua de Sor Juana
- Interrogación y argumentación en la Carta atenagórica de sor Juana Inés de la Cruz. Forma y Función (Universidad Nacional de Colombia), 2017
- Alejandro Soriano Vallès, Un género supremo de providencia: sor Juana Inés de la Cruz y la tesis de los beneficios negativos en la Carta atenagórica. Literatura Mexicana 14.1 (UNAM), 2003
- Inéditos sobre Sor Juana reviven la polémica con Octavio Paz. Proceso, 2010
- Biblioteca Palafoxiana resguarda cartas de Sor Juana Inés de la Cruz. Milenio
- Anthony Stanton, Octavio Paz, 『Sor Juana Inés de la Cruz o las trampas de la fe』(1982) 서평. Literatura Mexicana 1.1 (UNAM), 1990
- Billete de 100 pesos de la familia G. Banco de México
- Diego Calleja, Aprobación (vida de sor Juana) en Fama y obras póstumas (1700), transcripción. SILEM, Universidad de Córdoba
- Camilla Townsend, Sor Juana’s Nahuatl. Le Verger, bouquet VIII, 2015
- Alejandro Soriano Vallès, José de Lombeyda (testamento). Revista Imágenes (Instituto de Investigaciones Estéticas, UNAM), 2020
- Sor Juana Inés de la Cruz, A su retrato (“Este que ves, engaño colorido”). Wikisource
- Luis de Góngora, Mientras por competir con tu cabello. Wikisource
- Sor Juana Inés de la Cruz, biografía. Banco de México
- ¿En qué billetes ha aparecido Sor Juana Inés de la Cruz?. Milenio
- Billete de 200 pesos de la familia G (comunicado). Banco de México, 2019
- The Tenth Muse: Lately sprung up in America (1650). Massachusetts Historical Society
- The Tenth Muse Lately Sprung Up in America. Wikipedia (영어)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