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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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230여 년 전 런던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라는 작가가 아주 긴 이름의 책을 썼어요. 『여성의 권리 옹호』예요. ‘옹호’는 공격받는 것을 편들어 지켜 준다는 뜻이에요. 그는 여성을 편들어 주었어요.
그때는 많은 사람이 여자아이는 원래 어리석고 약하며 예쁘게 보이는 것만 잘한다고 믿었어요. 울스턴크래프트는 틀렸다고 말했어요. 여자아이들이 그렇게 보이는 건 아기 때부터 예뻐 보이고 남자를 기쁘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배우고, 진지한 공부는 못 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는 이런 여자아이들을 너무 기름진 흙에 심은 꽃에 비유했어요. 한동안은 예쁘지만 약하게 자라서 일찍 시들어 버리지요. 여자아이도 생각하는 법을 배우면 남자아이처럼 튼튼하고 분별 있고 착하게 자랄 수 있다고 했어요.
그의 큰 생각은 간단했어요. 착하고 지혜로운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니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여성도 의사가 되거나 가게나 농장을 꾸릴 수 있어야 하며, 남편과 아내는 대등한 친구여야 한다고 했어요.
어떤 독자들은 처음부터 이 책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그의 사생활이 알려져 사람들이 깜짝 놀라자 많은 이가 그를 공격했어요. 그래도 그가 세상을 떠나고 50년쯤 지나 미국과 유럽에서 권리를 위해 싸우던 여성들이 이 책을 다시 찾아냈고, 지금은 온 세계에서 읽히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성격
-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 논쟁에 응답해 쓴, 여성의 교육·도덕적 평등·자립을 주장하는 단행본 분량의 논증
- 저자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 잉글랜드의 작가·철학자
- 출간
- 1792년 1월 런던, 급진파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 같은 해 2판, 미국(보스턴) 판, 프랑스어 번역본이 나옴
- 헌정
- ‘전 오툉 주교’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그가 1791년 프랑스 의회에 낸 공교육 보고서는 여자아이에게 가정 중심의 교육을 제안했다
- 구성
- 헌사, 짧은 ‘광고’, 서론, 13개 장
- 집필 기간
- 남편 윌리엄 고드윈에 따르면 약 6주
- 미완의 계획
- 더 큰 저작의 첫 부분으로 예고되었으나, 여성의 법적 지위를 다룰 둘째 권은 쓰이지 않았다
- 언어
- 영어
쉬움
『여성의 권리 옹호』는 어떤 책인가
『여성의 권리 옹호』는 잉글랜드의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책으로, 1792년 1월 런던에서 출판업자이자 친구인 조지프 존슨이 펴냈다. 원제에는 ‘정치적·도덕적 주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쉽게 말해 이 책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생각하는 존재이며, 머리를 쓰도록 교육받고,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어야 하며, 장식품이 아니라 동반자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긴 논증이다.
‘옹호(vindication)’는 공격받는 것을 변호한다는 뜻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90년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를 반박한 『인간의 권리 옹호』에서 이미 이 말을 썼다. 같은 말을 되풀이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프랑스의 혁명가들과 영국의 급진파가 ‘인간(남성)의 권리’를 외치고 있을 때, 그는 그 권리가 인류의 나머지 절반에게는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었다.
차분한 교과서 같은 책은 아니다. 1797년 그와 결혼한 윌리엄 고드윈은 훗날 이 책이 6주도 안 되는 기간에 시작되고 끝났다고 썼고, “방법과 배열이 몹시 부족하다”고 인정했다. 문장은 뜨겁고, 군데군데 되풀이가 많으며, 반박 대상인 저자들의 인용으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고드윈은 영어가 존재하는 한 이 책이 읽힐 것이라고 내다보았고, 오늘날 이 책은 페미니즘 사상의 출발점이 된 고전으로 꼽힌다. 다만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그의 생전에는 아직 없었다.
쉬움
책 둘러보기
책은 프랑스 정치가 탈레랑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로 시작하고, 독자에게 드리는 짧은 알림(‘광고’)과 서론이 뒤따른다. 이어 13개 장이 나온다. 앞의 세 장은 원리를 세운다. 모든 인간이 함께 지닌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가, 그리고 여성에게 정말 남을 기쁘게 하는 데만 알맞은 별도의 ‘성적 성격’, 곧 다른 본성이 있는가를 묻는다. 4장은 여성이 양육 방식 때문에 어떻게 ‘타락’하는지 묘사하고, 가장 긴 5장은 여성 교육을 논한 저자들을 하나씩, 무엇보다 장자크 루소를 공격한다.
뒤의 장들은 시야를 넓힌다. 6장은 어릴 때 굳어진 생각의 습관이 성격을 어떻게 만드는지 묻고, 7장은 정숙함이 여성의 장식이 아니라 남녀 모두의 덕이라고 말한다. 8장은 여성이 실제로 선한 것보다 평판을 지키는 데 마음을 쓰도록 배운다고 비판하고, 9장은 성별뿐 아니라 세습 신분과 재산도 사회를 타락시킨다고 지적한다. 10장과 11장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12장은 국민 학교 계획을 다루며, 13장은 무지가 낳는 어리석음의 사례를 들고 “여성 풍속의 혁명”을 촉구하며 끝난다.
서론의 한 이미지가 이 책의 진단을 요약한다. 여성은 너무 기름진 흙에 심긴 꽃과 같아서 “힘과 쓸모가 아름다움에 희생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본래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는 같은 여성들이 자신을 영원한 어린아이처럼 추어올리지 않고 “이성적 존재로” 대하는 것을 너그러이 봐 주기를 바랐다.
중급
왜 1792년인가: 탈레랑, 버크, 루소
직접적인 계기는 프랑스에서 왔다. 1791년 9월 10일, 11일, 19일 탈레랑은 헌법위원회를 대표해 국민제헌의회에 공교육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전국적인 학교 체계를 제안했다. 여자아이도 어린 시절에는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지만, 보고서는 가정생활을 위해 태어난 여성에게는 “아버지의 집이 교육에 더 낫다”고 주장했다. 알맞은 가정이 없는 여자아이를 위해서는 은거 시설과 여성에게 맞는 직업 훈련을 제안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 사람에게 책을 바치며 생각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저는 제 성(性)을 위해 호소합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보고서를 통째로 거부한 것은 아니다. 12장의 각주에서 그는 공립 주간학교 계획을 세우면서 탈레랑의 “매우 분별 있는 소책자”에서 “몇 가지 착상을 빌렸다”고 밝힌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여자아이에게만 둔 예외였다. 새 프랑스가 이성과 권리 위에 세워졌다면 시민의 절반을 가정 안에 가둘 수는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무너뜨렸다고 자부하는 바로 그 폭정과 같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헌사의 배경에는 영국의 ‘혁명 논쟁’이 있었다.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은 전통, 군주제, 세습 신분을 옹호했고, 1790년 11월 처음에는 익명으로 나온 울스턴크래프트의 『인간의 권리 옹호』는 가장 이른 반박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이미 노예무역을 “인류에 대한 끔찍한 모욕”이라 불렀다. 『여성의 권리 옹호』는 이성과 세습 특권에 관한 같은 논리를 가정과 남녀 관계 안으로 가져갔다.
세 번째 표적은 루소였다. 교육론으로 큰 영향을 끼친 『에밀』(1762)에서 소년 에밀은 독립적인 사람으로 길러지지만, 그의 아내가 될 소녀 소피는 그를 기쁘게 하도록 길러진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을 남성처럼 교육할수록 여성이 남성에게 행사하는 힘은 줄어든다는 루소의 경고를 인용하고 이렇게 답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노리는 바다. 나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를 바랄 뿐이다.”
중급
핵심 논증: 이성, 덕, 그리고 ‘감수성’ 비판
논증은 종교적·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이성이며, 신은 인간이 덕을 기르도록 이성을 주었다. 그렇다면 덕에 남성용과 여성용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덕의 기준이 영원히 하나뿐이라면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온순함, 순종, 매력이 남성의 덕이 아니라면 여성의 덕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성도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력과 자제력을 길러야 하고, 남성도 성적 행실을 포함해 여성과 같은 도덕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여기서 ‘감수성(sensibility)’ 비판이 나온다. 감수성은 섬세하고 쉽게 흔들리는 감정을 숭상하던 당시의 풍조로, 유행 소설과 사교 예법은 이것을 여성다움의 본질로 칭송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감정 자체를 나무란 것은 아니다. 그가 비판한 것은 이해력은 내버려 둔 채 감각만 자극하는 교육이었고, 그 결과 여성은 그의 표현대로 “감수성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감각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런 여성은 남에게 휘둘리기 쉽고, 할 일 없이 불행하며, 좋은 어머니도 좋은 시민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5장의 상당 부분은 젊은 여성의 처신을 가르치던 안내서, 곧 처신서(conduct book)를 꼼꼼히 읽고 반박하는 내용이다. 그는 제임스 포다이스의 『젊은 여성을 위한 설교』가 오래도록 젊은 여성의 서가에 꽂혀 왔지만, 분별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제자에게서는 당장 치워 버리겠다고 말한다. 존 그레고리의 『딸들에게 주는 아버지의 유산』은 더 존중하는 태도로 다루지만, 혹시 학식이 있다면 “특히 남자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라”는 그의 충고를 실망스럽게 인용한다. 울스턴크래프트가 보기에 이런 충고는 여성에게 정직이 아니라 잔꾀를 가르쳤다.
그는 앞서 여성 교육을 주장한 여성 저자들도 칭찬하는데, 가장 따뜻하게 기린 사람은 역사가 캐서린 매콜리다. 그는 매콜리의 문체가 “강하고 명료해서”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책은 이렇게 여성들이 이미 쌓아 온 논쟁의 전통 위에 서면서, 그 전통을 한층 정치적인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중급
구체적 제안: 학교, 일, 결혼, 시민권
12장은 실천 계획을 내놓는다. 정부가 주간학교를 세워 남녀 아이를 함께 가르쳐야 하며, 5세부터 9세까지의 학교는 무료로 “모든 계층에 열려” 있어야 하고, 부모는 태만한 교사를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 부자와 가난한 아이가 나란히 앉고, 허영이 아이들을 가르지 못하도록 같은 옷을 입는다. 읽기, 쓰기, 셈, 자연사, 간단한 실험을 배우되 “야외에서 하는 체조 놀이”를 해쳐서는 안 되며, 종교·역사·정치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로 가르칠 수 있다. 기숙학교나 가정교사가 아니라 주간학교여야 아이들이 집과 가정생활에 정을 붙이면서도 공동의 공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교육은 자립으로 이어져야 했다. 그는 여성이 의학을 공부해 간호사뿐 아니라 의사가 될 수 있고, 조산 일을 하고, 정치를 공부하고, 농장을 꾸리거나 가게를 운영하며 “자기 노동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길이 없으면 훌륭한 여성들이 불만 속에 삶을 허비하거나 생계를 위해서만 결혼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국가 안에서 시민적 존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3장에서 기혼 여성이 형사 사건을 빼고는 시민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지적하니, 날카로운 표현이다.
결혼은 재산이나 아첨, 한때의 육체적 끌림이 아니라 대등한 사람 사이의 우정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성을 쓰도록 교육받은 아내는 더 나은 동반자이자 더 나은 어머니가 되고, 가정은 남편이 다스리는 작은 왕국이기를 멈출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호소에서 그는 남성들에게 “우리의 사슬을 끊고” “노예 같은 복종 대신 이성적인 동료 관계”에 만족해 달라고 요청한다.
정치적 권리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9장에서 그는 이른바 ‘힌트’를 하나 던진다. 여성은 정부의 심의에 아무런 몫도 없이 자의적으로 통치받을 것이 아니라 “대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개혁되지 않은 영국의 선거 제도에서는 대부분의 남성도 제대로 대표되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이것이 여성 참정권 요구인지를 두고 후대 독자들의 의견이 갈리지만, 적어도 그쪽으로 내디딘 첫걸음이기는 하다.
중급
끝내 나오지 않은 둘째 권
1792년 판에는 짧은 ‘광고’가 실려 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처음에 이 책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한 권이면 충분하리라 여겼지만, 쓰다 보니 새로운 예증이 계속 떠올라 첫 부분만 내놓는다고 설명한다. 대충 언급만 한 많은 주제, “특히 여성에 관한 법과 여성 고유의 의무에 대한 고찰”은 “때가 되면 출간될” 둘째 권에서 다루겠다고 했다.
그 책은 나오지 않았다. 1792년 12월 울스턴크래프트는 혁명기 파리로 떠났고, 이후 몇 해 동안 전쟁과 공포정치, 길버트 임레이와의 관계, 첫딸의 출생, 두 차례의 자살 시도, 스칸디나비아 여행이 이어졌다. 1797년 9월 둘째 딸을 낳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을 때, 계획했던 후속편은 단편으로만 남아 있었다.
1798년 고드윈은 그의 유고집 네 권을 펴냈다. 넷째 권에는 ‘힌트’라는 제목의 짧은 메모 묶음이 실렸는데, 고드윈은 이것이 “주로 『여성의 권리 옹호』 제2부에 넣으려던 것”이라고 밝혔다. 내용은 예고했던 법률 연구가 아니라 교육, 상상력, 사랑에 관한 짧은 경구들이다. 같은 유고집에 실린 미완성 소설 『마리아, 또는 여성의 억울함』은 결혼 제도 아래서 무력해진 아내를 그리며, 둘째 권이 다루려던 여성의 ‘억울함’을 소설로 다룬 작품으로서 흔히 『여성의 권리 옹호』와 함께 읽힌다.
중급
찬사에서 스캔들로: 첫 독자들
오늘날에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분노를 샀다고 흔히 믿지만, 증거는 반대를 가리킨다. 문학 연구자 R. M. 제인스는 1978년 연구에서 초기 서평 대부분이 호의적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1792년 영국의 『애널리티컬 리뷰』와 『먼슬리 리뷰』, 1793년 미국의 『뉴욕 매거진』 같은 잡지들이 그랬다. 많은 서평자는 이 책을 정치 선언문이라기보다 분별 있는 여성 교육론으로 읽었다. 주된 예외는 『크리티컬 리뷰』로, 남녀의 이해력이 같다는 주장에 반대했다.
책은 빠르게 퍼졌다. 1792년에 런던 2판과 보스턴 판이 나왔고, 1794년에는 필라델피아 판이 뒤따랐다. 프랑스어 번역본 『여성의 권리 변호(Défense des droits des femmes)』는 1792년 파리와 리옹에서 출간되었는데, 여전히 옛 오툉 주교에게 헌정되어 있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저서를 번역한 적이 있는 독일 교육자 크리스티안 고트힐프 잘츠만은 독일어판을 냈다.
전환점은 그의 죽음 뒤에 왔다. 1798년 고드윈은 『여성의 권리 옹호 저자에 대한 회고록』을 펴냈다. 애정 어린 글이었지만 그의 연애, 혼인 밖에서 태어난 딸, 자살 시도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보수파 문필가들이 이를 놓치지 않았다. 같은 해 리처드 폴훨의 시 「성을 잃은 여자들」은 그를 급진적 여성 작가 무리의 맨 앞에 세웠다. “보라, 어떤 예절에도 거리낌 없는 울스턴크래프트를.” 그의 이름은 경고의 대명사가 되었고, 책의 사상은 그의 삶을 통해 재단되었다.
19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영국 개혁가들조차 그의 이름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앤 커소이스가 인용한 역사가 바버라 케인의 말대로, 빅토리아 시대 중기 페미니스트들에게 울스턴크래프트는 알려지지 않았다기보다 “조심스럽고 의식적으로 회피된” 존재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커소이스를 비롯한 여러 서술이 전하듯, 소설가 조지 엘리엇은 1855년 에세이에서 이 책이 “대단히 진지하고 엄격하게 도덕적”이라고 변호했다.
중급
후대의 영향: 세니커폴스에서 현대 페미니즘까지
이 책이 가장 먼저 강하게 되살아난 곳은 미국이었다. 1840년 퀘이커 개혁가 루크리샤 모트는 런던 세계노예제반대대회에 대표로 갔다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을 만났다. 커소이스에 따르면 모트는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한 열광을 드러냈고, 스탠턴도 곧 그 감탄을 함께하게 되었다. 1848년 7월 두 사람은 다른 세 여성과 함께 뉴욕주 세니커폴스에서 여성권리대회를 열었다. 대회의 「소신 선언」은 미국 독립선언문을 고쳐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썼다. 선언문이 울스턴크래프트를 인용하지는 않으므로 영향은 간접적이다. 그러나 스탠턴, 수전 B. 앤서니, 머틸다 조슬린 게이지가 1881년 『여성 참정권의 역사』 첫 권을 펴냈을 때, 헌사에 이름을 올린 여성들 가운데 맨 앞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플로라 트리스탕, 독일의 마틸데 프란치스카 아네케 같은 운동가들에게 닿았다. 케인을 따르는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영국에서 그의 저작은 윌리엄 톰프슨, 애나 휠러, 오언주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마침내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 해방을 주장할 터를 닦았다. 밀의 『여성의 종속』(1869)은 이후 그의 책을 가리게 된다. 출간 100주년 무렵에는 참정권 운동가 밀리센트 개릿 포셋의 서문을 붙인 새 런던 판이 나왔고, 포셋은 울스턴크래프트를 참정권 운동의 선구자로 내세웠다.
그 포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커소이스에 따르면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많은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는데, 이는 여성의 결함을 거침없이 지적한 울스턴크래프트와 정반대였다. 또 투표권에 집중한 운동은 대표권을 지나가듯 언급한 이 책에서 쓸 것을 별로 찾지 못했다. 20세기 독자들은 그의 글만큼이나 삶에서 영감을 얻었다. 무정부주의자 에마 골드먼은 1911년 그를 “근대 여성의 개척자”로 기리는 강연을 했고, 버지니아 울프는 그에 관한 에세이를 써서 1932년 책에 실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근대 이전 남성 지배에 맞선 드문 여성 가운데 하나로 그를 꼽았다.
1960~70년대 여성운동과 여성학이 성장하면서 『여성의 권리 옹호』는 필독서가 되었고, 여성의 종속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것이라는 주장 때문에 읽혔다. 그 뒤로 철학자들은 이 책을 훗날 페미니즘의 선구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지한 도덕·정치철학으로 읽는 경우가 늘었다.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여성의 권리, 노예의 권리
1791~92년에 인간의 권리에 여성이 포함되느냐고 물은 사람은 울스턴크래프트만이 아니었다. 탈레랑 보고서와 같은 달인 1791년 9월, 파리의 극작가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해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조항마다 고쳐 썼다. 제1조는 여성이 자유롭게 태어나 권리에서 남성과 평등하게 산다고 선언하고, 다른 조항은 여성이 처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연단에 오를 권리도 똑같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두 글은 같은 혁명기 논쟁에서 나왔지만, 울스턴크래프트가 구주의 글을 알았다는 흔적은 없다. 『여성의 권리 옹호』는 구주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구주는 1793년 11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같은 몇 해는 노예제를 둘러싼 싸움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1791년 4월 영국 하원은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부결했다. 1791년 8월 프랑스령 카리브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노예로 부려지던 사람들이 봉기했고, 이는 1804년 독립국 아이티를 낳은 혁명의 시작이었다. 1792년 4월 폐지론자들이 다시 의회에 나섰을 때, 역사가 크리스토퍼 L. 브라운에 따르면 약 39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 519건이 이를 뒷받침했지만, 하원은 헨리 던다스가 낸 수정안에 따라 ‘점진적’ 폐지에만 찬성했고, 상원은 그마저 미루었다. 폐지 반대파는 프랑스와 생도맹그의 격변을 들어 시간을 끌었다.
구주도 노예제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1780년대에 코메디프랑세즈에 제출한 그의 노예제 희곡은 1789년 12월에야 「흑인 노예제」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랐고, 노예제 지지자와 반대자가 충돌하는 가운데 세 번 공연하고 막을 내렸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89년 올라우다 에퀴아노의 자서전 서평을 썼고, 문학 연구자 모이라 퍼거슨은 『여성의 권리 옹호』가 바로 이런 사건들 한가운데서 쓰였다고 본다. 퍼거슨은 이 책에서 노예제에 관한 언급을 여든 번 넘게 찾아냈는데, 대부분 여성의 예속을 가리키는 은유다.
한 대목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직접 가리킨다. 여성이 원칙이 아니라 맹목적인 예법에 지배받아야 하느냐고 묻다가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렇게 쓴다. “설탕은 언제까지 생피로 만들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인류의 절반이 “가엾은 아프리카 노예들처럼”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편견 아래 놓여야 하느냐고 묻는다. 1791년 늦여름, 노예노동으로 만든 설탕과 럼을 사지 말자고 영국인들에게 호소한 윌리엄 폭스의 소책자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이 운동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글에 나타나지 않지만, 이 질문은 그가 영국인 식탁의 설탕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심화
여러 관점
급진적인가, 한계가 있는가? 한쪽에서 보면 이 책은 매우 급진적이다. 성별이 도덕적 본성을 정한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계층을 넘는 무상 남녀공학을 제안하며,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결혼 안에서의 시민적 존재를 요구하고, 정치적 대표권까지 시사한다. 고드윈은 일부 독자가 “그토록 이단적이고 불경한 교리의 저자에게 맞서 들고일어났다”고 회고했다. 다른 쪽에서 보면 조심스럽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성이 육체적으로 더 강하다는 것, 그리고 성 전체를 놓고 말하면 남성이 “신의 섭리에 따라 더 높은 덕에 이르도록 지어진 듯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마지막 호소도 남성에게 향하고, 대표권은 힌트로만 언급한다. 두 해석 모두 본문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 논쟁이 이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두 번째 축은 계층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는 듯하므로 중간 계층에 특별히 주목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남성 특권만큼이나 게으른 부자들을 맹렬히 공격한다. 그의 학교 계획은 9세까지는 모든 아이에게 열려 있지만, 그 뒤로는 가사나 기술직으로 갈 아이들을 따로 떼어 여자아이들에게 오후에 바느질과 모자 만들기를 가르치게 한다. 퍼거슨이 인용한 비평가 코라 캐플런은 이 책이 “주로 중간 계층 여성을 향한” 글이며 깊이 계급에 묶여 있음을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세 번째 논쟁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여성에 대한 그의 묘사다. 허영심 많고 잔꾀 부리고 게으른 여성들의 초상은 경멸로 읽힐 수 있다. 퍼거슨은 울스턴크래프트가 중간 계층 여성을 한 덩어리로 다루면서 자신은 그들의 스승이자 감독관으로 따로 세운다고 지적하고, 커소이스는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많은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도덕적 약점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를 거부했다고 전한다. 옹호하는 쪽은 그가 겨눈 것이 그런 결함을 낳는 양육 방식이며, 그는 이 결함을 거듭 본성이 아닌 교육의 산물로 그렸고, 남성의 악덕도 똑같이 날카롭게 꾸짖었다고 답한다.
성과 몸에 대한 현대의 해석은 특히 엇갈린다. 캐플런은 에세이 「거친 밤들(Wild Nights)」(1983)에서 이 책이 여성을 이성적 존재로 세우려고 여성의 성적 쾌락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주장하며, 결혼 뒤에는 열정을 “우정으로 가라앉히라”는 충고 같은 대목을 근거로 들었다. 메리 푸비는 이 책이 여성의 욕망을 불안해한다고 읽으면서도, 주된 표적은 남성의 욕정이라고 보았다. 다른 독자들은 이 책이 몸에 관해 긍정하는 것들에 주목한다. 여자아이의 야외 놀이와 운동과 체력, 건강, 모유 수유, 의사와 조산사로서의 여성, 남성의 방종에 대한 솔직한 비판이 그것이다. 퍼거슨은 ‘생피’ 대목에서 노예 여성이 당한 성적 학대를 넌지시 가리키는 뜻까지 읽어 낸다.
끝으로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은 이 책이 다른 민족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방식을 살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영국 여성을 거듭 ‘하렘(세라글리오)’의 여인들에 견주고, 자신이 ‘마호메트식’이라 부른 생각을 비난하는데, 이는 이슬람이 여성에게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유럽의 고정관념에 기댄 것이다. 문학 연구자 조이스 조나나(1993)는 이를 ‘페미니스트 오리엔탈리즘’이라 불렀다. 커소이스가 정리한 대로 벨 훅스와 디어드리 콜먼을 따르는 이들은 중간 계층 백인 여성과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을 견주는 비유가 실제 고통의 차이를 가릴 수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퍼거슨은 울스턴크래프트를 젠더와 식민지 노예제를 함께 사유한 선구자로 본다. 이 해석들이 서로를 지우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여러 대의를 잇는 이른 다리이면서, 동시에 그 연결이 대등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예일 수 있다.
심화
증거와 방법: 전설이 아니라 본문 읽기
그의 삶이 워낙 유명해진 탓에 이 책은 자주 전기를 통해, 그리고 전기는 고드윈의 『회고록』을 통해 읽혀 왔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19세기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이 독자들의 관심을 사상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지적하고, 커소이스는 20세기 페미니스트 상당수가 사상보다 삶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사료로 돌아가 읽자 몇 가지 통념이 바로잡혔다. 1792년 서평에 대한 제인스의 조사는 출간 즉시 적대적 반응을 받았다는 생각을 뒤집었고, 1792년의 ‘광고’와 1798년의 ‘힌트’는 이 책이 더 큰 계획의 첫 부분일 뿐이었음을 보여 준다. 여성의 법적 지위가 아주 짧게만 다뤄진 이유도 여기서 일부 설명된다.
해석은 여전히 열려 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이 책을 교육론으로, 자유를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의 독립으로 보는 공화주의 전통의 일부로, 평등을 위한 신학적 논증으로, 그리고 상업 사회에 대한 이른 비판으로 읽는 최근 연구들을 소개한다. 권리, 종교, 혁명, 노예제 반대의 언어를 한꺼번에 빌려 쓰는 이 책의 수사는 후대의 그토록 많은 운동이 이 책에서 자신을 발견한 이유이자, 신중한 독자들이 이 책을 그것이 응답하던 책과 사건들 사이에 다시 놓아 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핵심 개념
- 하나뿐인 덕의 기준
- 덕에는 “영원히 하나의 기준”만 있으므로, 이해력·자제력·정직처럼 남성을 선하게 하는 자질이 곧 여성을 선하게 하는 자질이다.
-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 여성이 약하고 허영심 많아 보이는 것은 본성 탓이 아니라 남성을 기쁘게 하도록 겨냥한 교육의 결과다. 교육을 바꾸면 성격도 바뀐다.
- 거짓 감수성 비판
- 이성은 내버려 둔 채 감정만 자극하는 문화는 여성을 의존적이고 불행하게 만든다. 감정은 이성의 인도를 받아야지 이성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 국민 남녀공학
- 어린 시절에는 모든 계층의 남녀 아이가 함께 배우는 무상 공립 주간학교를 세워, 남녀가 동료 시민으로 자라게 한다.
- 자립
- 여성도 의사, 농장 경영자, 상인처럼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어야 하며,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국가 안에서 시민적 존재로 인정받아야 한다.
- 우정으로서의 결혼
- 결혼은 재산이나 아첨, 한때의 열정이 아니라 존중과 우정에 바탕을 둔 대등한 동반자 관계여야 한다.
-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힘
- 목표는 여성에게 남성을 지배할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스스로를 다스릴 힘을 주는 것이다.
기록
- 1762년 — 루소가 『에밀』을 펴내다. 남편을 기쁘게 하도록 교육받는 소피의 모습은 『여성의 권리 옹호』의 주요 표적이 된다.
- 1790년 —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펴내고, 울스턴크래프트가 11월 『인간의 권리 옹호』로 반박하다.
- 1791년 — 4월 영국 하원이 윌버포스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부결하다. 8월 생도맹그에서 노예들이 봉기하다. 9월 탈레랑이 공교육 보고서를 제출하고, 올랭프 드 구주가 「여성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다.
- 1792년 — 1월 런던에서 『여성의 권리 옹호』가 출간되다. 같은 해 2판, 보스턴 판, 프랑스어 번역본이 나오고, 4월 하원은 노예무역의 ‘점진적’ 폐지에만 찬성하다.
- 1797년 — 9월 10일 울스턴크래프트가 딸 메리를 낳고 며칠 만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나다. 예고했던 둘째 권은 쓰이지 않은 채 남다.
- 1798년 — 고드윈이 『회고록』과 제2부를 위한 ‘힌트’가 실린 유고집을 펴내다. 폴훨의 「성을 잃은 여자들」이 그를 공격하다.
- 1848년 — 세니커폴스 대회가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한 「소신 선언」을 채택하다.
- 1869년 —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펴내다. 이 책은 빅토리아 시대 논쟁에서 『여성의 권리 옹호』를 가리게 된다.
- 1881년 — 『여성 참정권의 역사』 첫 권이 나오고, 헌사에서 맨 먼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기리다.
- 약 1891년 — 출간 100주년 무렵, 참정권 운동가 밀리센트 개릿 포셋의 서문을 붙인 런던 판이 나오다.
- 1911년 — 에마 골드먼이 뉴욕에서 울스턴크래프트를 “근대 여성의 개척자”로 기리는 강연을 하다.
용어 풀이
- 옹호(vindication)
- 공격받거나 의심받는 것을 변호하고 정당함을 밝히는 일.
- 비판(strictures)
- 비판적 논평. 부제는 정치적·도덕적 사상에 대한 비판을 예고한다.
- 감수성(sensibility)
- 18세기에 섬세하고 쉽게 흔들리는 감정 능력을 가리킨 말. 유행 소설에서 숭상되었고 흔히 여성다움의 본질로 여겨졌다.
- 처신서(conduct book)
- 특히 젊은 여성에게 바른 행실을 가르치던 안내서. 포다이스의 『젊은 여성을 위한 설교』, 그레고리의 『딸들에게 주는 아버지의 유산』 등.
- 혁명 논쟁
- 버크의 『성찰』과 그에 대한 반박으로 촉발된, 1790년대 영국의 프랑스 혁명 팸플릿 논쟁.
- 남녀공학
-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같은 학교, 같은 교실에서 함께 가르치는 것.
- 시민적 존재
- 재산을 소유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법적 인격으로 인정받는 것. 울스턴크래프트 시대 잉글랜드의 기혼 여성에게는 대체로 없었다.
- 광고(advertisement)
- 옛 책에서 본문 앞에 붙인 독자에게 드리는 짧은 알림. 울스턴크래프트의 광고는 둘째 권 계획을 알린다.
- 페미니스트 오리엔탈리즘
- 하렘처럼 정형화된 동양 이미지를 끌어와 서양의 여성 처우를 비판하는 수사를 가리킨 조이스 조나나의 용어.
묻고 답하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남성보다 낫다고 했나요?
아니요. 여성과 남성은 같은 종류의 정신을 지녔고 같은 선함의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대체로 남성이 몸은 더 튼튼하다고 인정했지만, 여성이 정신과 성품에서 약해 보이는 건 길러진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
왜 프랑스 주교에게 책을 바쳤나요?
전 오툉 주교 탈레랑이 여자아이는 여덟 살까지만 초등학교에 다니고 그 뒤로는 주로 집에서 교육받게 하며, 필요한 아이에게는 직업 훈련을 마련하자는 프랑스 공교육 계획을 냈기 때문이에요. 그는 탈레랑의 생각을 바꾸려고 책을 바쳤고, 남자아이 학교 계획에서는 몇 가지 착상을 빌렸다고 인정하기도 했어요.
이 책은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나요?
아주 짧게만요. 여성도 정부에 대표를 가져야 한다는 ‘힌트’를 던지고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고 했어요. 투표권을 분명히 요구한 것은 후대의 운동이었어요.
책이 나왔을 때 미움을 받았나요?
대체로 아니었어요. 초기 서평은 대부분 호의적이었지만 『크리티컬 리뷰』는 이 책을 공격했어요. 그와 그의 평판에 대한 거센 공격은 1798년 고드윈의 『회고록』이 사생활을 드러낸 뒤에 쏟아졌어요.
둘째 권이 있나요?
없어요. 주로 여성에 관한 법을 다룰 둘째 권을 예고했지만 쓰지 못했어요. 고드윈이 1798년 그것을 위한 메모 ‘힌트’를 펴냈어요.
학자들은 왜 이 책이 급진적인지를 두고 다투나요?
남녀공학, 여성의 직업, 대표권 같은 대담한 제안과 함께 남성의 우월함을 일부 인정하는 대목, 중간 계층 중심의 시각, 성에 대한 불편한 태도가 섞여 있기 때문이에요.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져요.
이 책은 노예제 논쟁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영국의 노예무역 반대 운동이 절정에 이르고 생도맹그 혁명이 시작될 무렵에 쓰였어요. 모이라 퍼거슨은 이 책에서 노예제 언급을 여든 번 넘게 세었는데 상당수가 여성의 처지를 가리키는 은유이고, 울스턴크래프트는 아프리카 노예가 만든 설탕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어요. 그 비유가 문제를 밝혀 주는지 가리는지는 오늘날 비평가들 사이에 논쟁거리예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Sylvana Tomaselli, Mary Wollstonecraft.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5
- Mary Wollstonecraft,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with Strictures on Political and Moral Subjects (London, 1792; scanned copy). J. Johnson / Internet Archive, 1792
- Mary Wollstonecraft,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full text). Project Gutenberg
- Mary Wollstonecraft,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Boston: Peter Edes for Thomas and Andrews, 1792; scanned copy). Internet Archive, 1792
- Mary Wollstonecraft (anonymous French translation), Défense des droits des femmes (Paris: Buisson; Lyon: Bruyset, 1792). Wikisource (French), 1792
- 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Rapport sur l’instruction publique, fait au nom du Comité de Constitution, les 10, 11 et 19 septembre 1791. Project Gutenberg, 1791
- William Godwin, Memoirs of the Author of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Project Gutenberg, 1798
- Mary Wollstonecraft, ed. William Godwin, Posthumous Works of the Author of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vol. 4 (includes “Hints”). J. Johnson / Internet Archive, 1798
- Richard Polwhele, The Unsex’d Females: A Poem. Cadell and Davies / Internet Archive, 1798
- Mary Wollstonecraft; Millicent Garrett Fawcett,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new edition with an introduction by Mrs Henry Fawcett. T. Fisher Unwin / Internet Archive, 1891
- R. M. Janes, On the Reception of Mary Wollstonecraft’s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39, 1978
- Ethan Croitoru, Mary Wollstonecraft (Woman Is Rational project). University of Chicago, 2022
- Ann Curthoys, Mary Wollstonecraft revisited. Humanities Research 16:2, ANU Press, 2010
- Moira Ferguson, Mary Wollstonecraft and the Problematic of Slavery. Feminist Review 42, 1992
-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Wikipedia
- Olympe de Gouges, 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Liberty, Equality, Fraternity: Exploring the French Revolution (Roy Rosenzweig Center for History and New Media)
- Olympe de Gouges. Wikipedia
- L’esclavage des noirs ou l’heureux naufrag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Essentiels
- Christopher L. Brown, Later, Not Now: Histories of Emancipation. London Review of Books 43:14, 2021
- Timothy Whelan, William Fox (fl. 1791–1794). brycchancarey.com
- Lucretia Mott. Women’s Rights National Historical Park, U.S. National Park Service
- Declaration of Sentiments. Women’s Rights National Historical Park, U.S. National Park Service
- Elizabeth Cady Stanton, Susan B. Anthony and Matilda Joslyn Gage (eds.), History of Woman Suffrage, Volume I. Fowler & Wells / Internet Archive, 1881
- Emma Goldman; trans. Nathalie Zimpfer, Mary Wollstonecraft, the Pioneer of Modern Womanhood (1911 lecture), in Mary Wollstonecraft : aux origines du féminisme politique et social en Angleterre. ENS Éditions (OpenEdition Books), 2015
함께 보기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여성의 권리 옹호』(1792)에서 여성이 열등해 보이는 것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영국의 작가·철학자. 페미니즘 사상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 장자크 루소불평등, 정치 권위, 교육에 관한 논의로 유럽 사상에 영향을 준 제네바 출신 작가.
-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요새 겸 감옥을 점령한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 초기의 상징이 되었다.
- 아이티 혁명1791년 생도맹그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의 봉기로 시작해 노예제 폐지와 1804년 아이티 독립으로 이어진 혁명.
- 세네카폴스 대회1848년 7월 이틀 동안 열린, 흔히 미국 최초의 여성 권리 대회로 불리는 모임. 100명이 〈감성선언서〉에 서명했다.
- 미국 독립선언서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가 채택한 문서로, 영국에 대한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