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미국 독립선언서

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 (1776년 7월 4일)

1776년 · 필라델피아, 영국령 북아메리카

한 문장으로

미국 독립선언서는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채택된 문서로,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13곳이 영국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선언하며 그 이유를 밝히고 어떤 정부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독립선언서
이미지: original: w:Second Continental Congress; reproduction: William Stone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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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250년 전, 북아메리카 동쪽 바닷가에는 대서양 건너편 나라 영국이 다스리는 식민지 13곳이 있었어요. 많은 식민지 사람들은 화가 났어요. 영국이 정한 세금을 내야 했지만, 법을 만드는 영국 의회에는 자기들 대표가 한 명도 없었거든요.

말다툼은 1775년 전쟁으로 번졌어요. 이듬해 여름, 13개 식민지의 지도자들이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에 모였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했지요. “우리는 이제 식민지가 아니다.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다!”

버지니아 출신의 젊은 토머스 제퍼슨이 첫 초안을 썼어요. 존 애덤스와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지도자들이 고치는 것을 도왔지요.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라는 모임이 이 글을 승인했어요.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축하해요.

가장 유명한 문장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가 있다는 말이에요. 크고 멋진 말이지요. 그런데 그때 식민지에는 노예가 된 흑인이 수십만 명이나 있었고, 여성은 투표할 수 없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어요.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여럿도 노예를 부리고 있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약속에서 빠졌던 사람들이 바로 이 문장들을 들고 공정함을 요구했어요. 투표권을 원한 여성들, 노예제에 맞서 싸운 사람들, 그리고 독립을 바란 다른 나라 사람들이요. 그래서 독립선언서는 뒷세대가 계속해서 이루어 내려고 애쓴 약속이 되었답니다.

한눈에 보기

채택
1776년 7월 4일(독립 결의는 1776년 7월 2일)
장소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주의회 의사당(현재 독립기념관)
채택 기관
13개 식민지를 대표한 제2차 대륙회의
주 기초자
토머스 제퍼슨(5인 위원회: 애덤스, 프랭클린, 제퍼슨, 리빙스턴, 셔먼)
서명자
56명. 대부분 1776년 8월 2일 정서본 양피지에 서명
구성
서문, 전문(前文), 조지 3세에 대한 고발 목록, 영국 국민에 대한 비판, 독립 선언
원본
워싱턴 D.C.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소장 정서본
배경
미국 독립전쟁(1775–1783)

쉬움

독립선언서란 무엇인가

미국 독립선언서는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13곳의 대표들이 1776년 7월 4일, 이제 식민지들은 영국 왕실에 속하지 않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들”이라고 선언한 한 장짜리 문서다. 이 선언은 영국과 식민지 주민만이 아니라, 첫 문장의 표현대로 “인류의 여론”을 향한 것이었다. 곧 분리의 이유를 온 세계에 설명한 것이다.

독립선언서가 정부나 헌법을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미국 독립전쟁은 이미 1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선언의 당장의 목적은 실용적이었다. 영국과의 결별을 공식화하고, 식민지들을 하나로 묶고, 프랑스 같은 외국 세력에게 동맹과 원조를 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둘째 문단 덕분에, 이 문서는 외교 통지문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 되었다. 이후 250년 가까이 노예제 폐지론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 민권 운동가, 독립운동가들이 이 문서를 인용했다. 많은 경우 현실이 그 말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2][1][3]

쉬움

배경: 영국 신민에서 반란자로

1763년 영국은 프랑스와의 7년 전쟁에서 이겨 북아메리카에서 광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빚을 졌다. 제국 방위 비용을 마련하려고 의회는 식민지에 직접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설탕법(1764), 인지세법(1765), 타운센드 관세(1767)가 그것이다. 많은 식민지 주민은 자신들은 스스로 뽑은 식민지 의회만이 세금을 매길 수 있으며, 대표를 보내지 않은 영국 의회는 그럴 수 없다고 항의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구호다.

항의와 불매 운동과 충돌이 이어졌다. 보스턴 학살(1770)과 보스턴 차 사건(1773)이 대표적이다. 영국은 보스턴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의 자치를 제한하는 강압법(1774)으로 대응했다. 식민지들은 저항을 조율하기 위해 1774년 제1차 대륙회의에 대표를 보냈다.

1775년 4월 매사추세츠의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군대를 만들었지만, 처음에는 여전히 국왕 조지 3세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러나 국왕은 식민지가 반란 상태라고 선포했고, 의회는 식민지의 무역을 끊었으며, 영국은 독일 용병을 고용했다. 1776년 1월 토머스 페인의 소책자 『상식』은 독립과 공화정을 힘차게 주장하며 널리 팔렸다. 봄이 되자 많은 식민지와 마을이 대표들에게 독립을 지지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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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어떻게 쓰였나

1776년 6월 7일 버지니아의 리처드 헨리 리는 “이 연합 식민지들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대륙회의는 망설이는 식민지들에게 시간을 주려고 표결을 미루었지만, 6월 11일 선언문을 준비할 5인 위원회를 임명했다.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로버트 R. 리빙스턴, 로저 셔먼이다.

위원회는 당시 서른세 살이던 제퍼슨에게 초안을 맡겼다. 그는 필라델피아 마켓가와 7번가 모퉁이에 있는 집의 셋방에서 작업했다. 애덤스와 프랭클린이 수정을 제안했고, 위원회는 6월 28일 초안을 대륙회의에 제출했다.

7월 2일 대륙회의는 리의 독립 결의안을 승인했다. 뉴욕 대표들은 지시를 받지 못해 기권했고, 뉴욕은 일주일 뒤 승인했다. 이어 대륙회의는 이틀 동안 초안을 한 줄 한 줄 토론하며 약 4분의 1을 덜어 냈다. 7월 4일 최종 문안이 승인되었다. 그날 저녁 인쇄업자 존 던랩이 낱장 인쇄물(브로드사이드)을 찍어 각 주와 군대로 보냈는데, 이 첫 인쇄본은 약 스물여섯 부가 남아 있다.

나중에 양피지에 손으로 정식으로 옮겨 쓴 ‘정서본’이 준비되었고, 대부분의 대표는 1776년 8월 2일 여기에 서명했다. 일부는 더 뒤에 서명했다. 대륙회의 의장 존 핸콕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서명했다. 영국의 눈으로 보면 서명은 반역이었기 때문에 서명자 명단 전체는 1777년 1월에야 공식 인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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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문서의 내용

독립선언서는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의 정치적 유대를 끊어야 할 때 “인류의 여론에 대한 정당한 존중”에 따라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전문은 정부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사람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 가운데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가 있다. 정부는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세워지며 그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에서 나온다. 정부가 이 목적을 파괴할 때 인민은 정부를 바꾸거나 없앨 권리가 있다.

가장 긴 부분은 조지 3세에 대한 고발로, 대략 27개의 불만 사항을 열거한다(나누는 방식에 따라 숫자는 달라진다). 국왕이 식민지 법률을 가로막고, 의회를 해산하고, 동의 없이 평시에 상비군을 두고, 무역을 끊고, 동의 없이 세금을 매기고, 배심 재판을 빼앗고, 식민지에 전쟁을 벌였다고 비난한다. 눈여겨볼 점은 의회가 아니라 국왕을 향해 말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지도자들은 이미 영국 의회에는 식민지에 대한 권한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부분에서는 식민지의 호소를 외면한 영국 국민을 비판한다. 결론은 식민지들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서 왕실에 대한 모든 충성에서 벗어났으며, 전쟁·강화·동맹·통상의 모든 권한을 가진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서약으로 끝난다.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신성한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1][3]

중급

사상의 뿌리

제퍼슨은 훗날 독창성을 노린 것이 아니라 이 주제에 관한 상식, 곧 “미국인의 정신을 표현한 것”을 썼다고 회고했다. 선언서의 사상은 폭넓은 전통에 기대고 있다. 1688년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을 포함한 영국 헌정사, 정부는 동의에 기초하며 권리를 침해할 때는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 존 로크의 『통치론』 제2논고의 자연권 철학, 그리고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고전적 공화주의 저술가들이다.

직접적인 모델은 더 가까이 있었다. 1776년 6월 12일 채택된 조지 메이슨의 「버지니아 권리장전」은 모든 사람은 본래 똑같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타고난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새 헌법의 전문 초안에서도 국왕에 대한 불만을 열거한 적이 있었다. 불만 목록 자체는 통치자에 대한 공식 항의라는 오랜 영국 전통을 따른 것이다.

로크의 익숙한 삼원칙 “생명, 자유, 재산” 대신 들어간 “행복 추구”라는 표현은 많은 논의를 불렀다. 이것이 인간의 번영에 관한 더 넓은 도덕철학을 반영한 것인지, 사회 전체의 안녕이라는 공적 의미의 행복을 뜻하는지, 아니면 행복과 재산이 긴밀히 연결되던 18세기의 어법일 뿐인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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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누가 빠져 있었나

1776년 13개 식민지 인구의 약 5분의 1은 노예였고, 대부분 아프리카계였다. 제퍼슨 자신도 평생 수백 명을 노예로 부렸고, 다른 서명자 여럿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초안에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조지 3세의 탓으로 돌리는 긴 대목이 있었는데, 대륙회의는 이를 삭제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달래려는 이유도 있었고, 북부의 많은 상인들도 그 무역으로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도 이 모순을 알아챘다.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은 1775년, 어째서 자유를 가장 요란하게 외치는 소리가 노예를 부리는 자들에게서 나오느냐고 물었다.

최종 문안은 국왕이 “우리 사이에 내부 반란을 부추겼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는 애국파 주인에게서 도망쳐 영국군을 위해 싸우는 노예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영국 측의 제안, 예컨대 1775년 11월의 던모어 경 포고를 가리킨다. 전쟁 동안 실제로 수천 명의 노예가 자유를 찾아 영국군 진영으로 넘어갔다.

선언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자비한 인디언 야만인”이라고 부른다. 많은 원주민 부족은 영국이 1763년 제한하려 했던 서부 토지에 대한 식민지 주민들의 욕심을 왕실보다 훨씬 큰 위협으로 여겼고, 상당수가 영국과 손잡았다. 그들에게 새 공화국의 독립은 흔히 토지 상실의 가속을 뜻했다.

여성은 언급되지 않았다. 1776년 3월 애비게일 애덤스는 남편 존에게 새 법을 만들 때 “여성들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그는 이를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영국에 충성을 지킨 식민지 주민인 왕당파(로열리스트), 일부 추산으로는 백인 인구의 5분의 1쯤 되던 이들도 선언서가 말한 “한 민족”에서 배제되었다. 그 가운데 수만 명이 뒤에 캐나다, 영국, 카리브해로 떠났다.

[3][1][8]

중급

그 뒤에 일어난 일

선언서는 마을과 군영에서 낭독되었다. 뉴욕에서는 7월 9일 조지 워싱턴이 병사들 앞에서 이를 읽게 한 뒤, 군중이 금박을 입힌 조지 3세의 납 동상을 끌어내렸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납은 총알로 녹여졌다. 그러나 독립을 선언했다고 독립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7년이나 더 이어졌다.

독립 선언은 외국과의 동맹을 가능하게 했다. 1777년 새러토가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프랑스는 1778년 미국과 동맹 조약을 맺었고, 뒤이어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도 영국과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1781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항복하면서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1783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새로 생긴 주들은 헌법을 만들었고 상당수가 권리 선언을 담았다. 연합규약, 이어 1787년 헌법이 연방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선언서의 평등 원칙은 노예제를 용인한 헌법에 들어가지 않았다. 평등의 언어가 헌법에 들어간 것은 남북전쟁 뒤 수정헌법 제14조에 이르러서였다.

새 국가의 주민들에게 독립은 일상을 고르지 않게 바꾸었다. 식민지 정부는 선출된 의회로 바뀌었고, 일부 주에서 재산 자격이 완화되면서 더 많은 백인 남성이 투표권을 얻었다. 1777년 버몬트 헌법은 성인 노예제를 금지했고, 1780년 펜실베이니아는 점진적 노예 해방법을 통과시켰으며 다른 북부 주들이 뒤를 따랐다. 반면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확대되었다. 왕당파는 재산과 흔히 삶의 터전을 잃었고, 많은 원주민 부족은 자신들이 참여하지 못한 1783년 강화 이후 토지에 대한 새로운 압박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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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기억과 세계적 영향

독립선언서가 처음부터 신성하게 여겨진 것은 아니다. 1790년대에 제퍼슨의 공화파가 이를 내세우며 정치적 상징이 되었고, 1812년 전쟁 이후에는 국가적 아이콘이 되었다. 채택 50주년인 1826년 7월 4일에 제퍼슨과 애덤스가 함께 세상을 떠나자 그 후광은 더 짙어졌다. 1823년 윌리엄 J. 스톤이 동판 복제본을 만들었고, 빛이 바래 가던 양피지 원본은 1952년 국립문서기록관리청으로 옮겨져 중앙 홀(로툰다)에 전시되어 있다.

배제된 사람들은 선언서의 말을 논거로 바꾸었다. 1848년 세니커폴스 여성 권리 대회가 채택한 「소신 선언(Declaration of Sentiments)」은 이를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로 고쳐 썼다. 1852년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유명한 연설에서 노예에게 7월 4일은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선언서의 평등 원칙을 노예제 반대의 중심에 두었고, 1863년 게티즈버그 연설은 나라의 시작을 1776년으로 헤아리며 시작한다. 1963년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선언서의 약속을 ‘약속어음’이라고 불렀다.

나라 밖에서 이 선언서는 ‘독립선언서’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1804년 아이티의 독립선언, 1810년대부터 이어진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선언, 그리고 20세기의 많은 반식민 선언이 뒤따랐다.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선언을 미국 독립선언서의 평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관한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선언들이 개인의 권리라는 언어 못지않게, 세계 열강 사이에서 국가로서의 지위를 주장하는 형식을 빌렸다는 점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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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여러 시각: 영국, 왕당파, 그리고 다른 목소리

영국에서는 인쇄물로 반박이 나왔다. 전 매사추세츠 총독 토머스 허친슨은 『필라델피아 대륙회의 선언에 대한 비판』(1776)을 냈고, 존 린드는 젊은 제러미 벤담의 짧은 비평을 곁들인 『미국 대륙회의 선언에 대한 답변』(1776)을 썼다. 이들은 불만 사항이 왜곡되었다고 반박하고, 자명한 자연권이라는 주장을 조롱했다. 영국의 많은 역사가는 오랫동안 이 혁명을 두 나라 사이의 투쟁이라기보다 제국 내부의 내전으로 다루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다시 조명된 왕당파의 역사는, 혁명이 식민지 주민들 사이의 내전이기도 했으며 폭력과 재산 몰수와 강제 망명이 따랐음을 강조한다. 왕당파 난민의 입장에서 보면, 캐나다와 영국령 카리브해라는 새로운 사회는 부분적으로 독립선언서를 거부한 사람들이 세운 것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원주민의 시각은 이 사건을 가르치는 방식을 바꾸어 왔다. 역사가들은 전쟁을 기회로 자유를 얻으려 한 노예들, 곧 어느 편에서든 싸우거나 도망친 사람들을 기록했고, 독립이 서부로의 정착민 팽창을 어떻게 강화했는지 밝혔다. 선언서의 보편적 이상과 노예제·토지 박탈의 현실을 어떻게 함께 기억할지를 둘러싼 공적 논쟁은 특히 국가 기념일마다 계속되고 있다.

[3][9][8]

심화

학문적 논쟁과 자료

역사가들은 선언서의 사상적 원천을 두고 오래 논쟁해 왔다. 칼 베커의 『독립선언서』(1922)는 로크와 자연권 철학을 강조했다. 개리 윌스의 『미국의 발명(Inventing America)』(1978)은 스코틀랜드 도덕감각 철학자들, 특히 프랜시스 허치슨의 영향을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다른 학자들의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폴린 마이어의 『미국의 경전(American Scripture)』(1997)은 제퍼슨 개인의 천재성에서 1776년 봄 각 지역과 주에서 나온 약 90건의 선언으로 관심을 옮겨, 독립선언서가 널리 퍼진 여론을 표현했고 대륙회의가 집단으로 다듬은 문서임을 보여 주었다.

데이비드 아미티지의 『독립선언서: 세계사적 관점』(2007)은 이 문서를 국제법의 역사 속에 놓았다. 그는 선언서의 본래 의의가 상당 부분 국가 지위의 주장, 곧 새 국가들이 세계 열강 사이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는 주장에 있었다고 보고, 이후 세계 곳곳에서 나온 100건이 넘는 독립선언을 추적했다. 선언서가 미국 법에서 법적 효력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다. 법원은 이를 직접 집행 가능한 법으로 다룬 일이 드물지만, 미국 법전에서는 ‘기본법(Organic Laws)’ 맨 앞에 실려 있다.

1차 자료는 유난히 풍부하다. 여러 사람의 수정 흔적이 남은 제퍼슨의 ‘최초 초고’(의회도서관 소장), 대륙회의 의사록, 던랩 인쇄본, 정서본 양피지, 그리고 7월 2일이 위대한 기념일로 축하될 것이라고 내다본 존 애덤스의 편지 같은 참여자들의 서한이 있다. 제퍼슨과 애덤스의 회고를 포함해 수십 년 뒤에 쓰인 기억들은 세부에서 서로 어긋나므로 조심해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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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자연권(양도할 수 없는 권리)
정부가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본래 가진 권리. 생명, 자유, 행복 추구 등.
피치자의 동의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동의에서 나온다.
혁명권
정부가 권리를 계속 침해하면 인민은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고 새 정부를 세울 수 있다.
평등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주장. 1776년에는 실제로 제한적이었지만, 뒤에 배제된 집단의 권리를 요구하는 근거가 되었다.
국가 지위와 주권
선언서는 식민지들이 전쟁·강화·동맹·통상을 할 수 있는 독립 국가의 온전한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불만 목록
통치자에 대한 공식 고발을 열거하는 영국 헌정 전통의 형식으로, 저항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세계 여론에 대한 호소
선언서는 “인류의 여론”을 향해 말하며, 승인과 지지를 얻기 위해 다른 나라들 앞에 식민지의 입장을 제시했다.

기록

  1. 1763년 — 7년 전쟁 종결. 영국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새로운 정책을 펴기 시작.
  2. 1765년 — 인지세법이 식민지 전역에서 항의를 불러일으킴.
  3. 1773년 — 보스턴 차 사건.
  4. 1775년 — 4월 19일 렉싱턴·콩코드 전투로 전쟁 시작. 제2차 대륙회의 소집.
  5. 1776년 — 1월 토머스 페인 『상식』 출간. 6월 7일 리 결의안 제출. 6월 11일 5인 위원회 임명.
  6. 1776년 — 7월 2일 독립 결의 가결. 7월 4일 독립선언서 채택, 던랩 인쇄본 발행.
  7. 1776년 — 8월 2일 대부분의 대표가 정서본 양피지에 서명.
  8. 1778년 — 프랑스가 미국과 동맹을 맺음.
  9. 1783년 — 파리 조약으로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
  10. 1826년 — 채택 50주년인 7월 4일 제퍼슨과 애덤스가 함께 사망.
  11. 1848년 — 세니커폴스 「소신 선언」이 독립선언서를 여성 권리 요구에 맞게 고쳐 씀.
  12. 1952년 — 양피지 원본이 워싱턴 D.C. 국립문서기록관리청으로 이관됨.

용어 풀이

대륙회의
영국에 대한 저항을 조율하고 전쟁 동안 미국을 운영한 식민지 대표자 회의.
리 결의안
1776년 6월 7일 리처드 헨리 리가 제출해 7월 2일 가결된 독립 동의안.
정서본(engrossed copy)
서명을 위해 손으로 정식으로 옮겨 쓴 최종 문서.
브로드사이드
뉴스나 공식 문서를 알리려고 한 면에만 크게 인쇄한 낱장 인쇄물.
왕당파(로열리스트)
혁명 동안 영국 왕실에 충성을 지킨 식민지 주민.
애국파(패트리엇)
영국에 대한 저항과 독립을 지지한 식민지 주민.
양도할 수 없는(unalienable)
빼앗기거나 스스로 내줄 수 없는. 오늘날 철자로는 흔히 inalienable.
파리 조약(1783)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한 강화 조약.

묻고 답하기

모두가 7월 4일에 서명했나요?

아닙니다. 대륙회의는 7월 4일 문안을 채택했지만, 대부분의 대표는 1776년 8월 2일 정서본 양피지에 서명했고 일부는 더 뒤에 서명했습니다. 7월 4일의 서명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여러 사건을 하나로 합친 것입니다.

왜 7월 2일이 아니라 7월 4일이 기념일인가요?

독립 표결은 7월 2일이었고 존 애덤스도 그날이 기념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채택된 문서에는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적혔고, 그 날짜가 전국에 퍼진 인쇄본에 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날이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가 노예제를 끝냈나요?

아닙니다. 1776년에는 13개 주 모두에서 노예제가 합법이었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북부 몇몇 주가 폐지를 시작했지만, 전국적으로는 1865년 수정헌법 제13조로 끝났습니다. 다만 노예제 반대자들은 선언서의 평등 약속을 자주 인용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미국의 법인가요?

헌법이 아니며 그 자체로 집행 가능한 권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미국 법전의 ‘기본법’ 맨 앞에 실려 있고 미국의 이념을 해석할 때 자주 인용되지만, 법원이 이를 직접 구속력 있는 법으로 다룬 일은 드뭅니다.

제퍼슨이 혼자 썼나요?

초안은 제퍼슨이 썼지만 애덤스와 프랭클린이 수정을 제안했고, 대륙회의가 문안의 약 4분의 1을 덜어 내는 등 많이 고쳤습니다. 폴린 마이어 같은 역사가들은 이것이 널리 공유된 생각을 반영한 집단의 문서였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나라들은 이 선언을 어떻게 활용했나요?

독립선언이라는 형식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아이티(1804),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여러 공화국, 그리고 베트남(1945) 같은 20세기 국가들이 선언을 발표했고, 일부는 이를 직접 인용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세계에서 100건이 넘는 독립선언을 헤아립니다.

왜 의회가 아니라 국왕을 비난했나요?

1776년 무렵 많은 식민지 지도자는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 대해 합법적 권한이 전혀 없으며, 영국과의 유일한 연결 고리는 국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국왕과 결별하는 것이 곧 영국과 결별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 Transcription. U.S. National Archives
  2.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 History. U.S. National Archives
  3. 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ikipedia
  4. 미국 독립 선언. 위키백과
  5. Lee Resolution. Wikipedia
  6. Committee of Five. Wikipedia
  7. Declaration of Sentiments. Wikipedia
  8. Pauline Maier, American Scripture: Making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lfred A. Knopf, 1997
  9. David Armitage,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 Global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10. Carl L. Becker,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 Study in the History of Political Ideas. Harcourt, Brace, 1922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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