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온 세상이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을 막 겪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도시가 폐허가 되었어요. 어디서나 사람들은 물었어요.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1945년 4월,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50개 나라의 대표들이 미국 서쪽 바닷가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모였어요. 두 달 동안 오페라 극장과 여러 건물에서 토론하고 흥정하며 함께 글을 썼어요.
그렇게 쓴 것이 바로 유엔 헌장이에요. 헌장은 모임의 규칙이자 약속 같은 거예요. 나라들은 다툼을 평화롭게 풀고, 서로 공격하지 않고, 굶주림과 병에 함께 맞서고,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어요.
헌장은 “우리 연합국 국민들은”이라는 말로 시작해요. 그리고 전쟁의 끔찍한 슬픔에서 앞으로 올 세대를 구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해요.
1945년 6월 26일 대표들이 헌장에 서명했어요. 그리고 10월 24일 충분히 많은 나라가 헌장을 승인하면서 유엔이 공식적으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10월 24일을 ‘유엔의 날’로 기념해요. 지금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 193개국이 유엔 회원국이에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1945년 4월 25일 – 6월 26일
- 장소
-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로 전쟁기념 오페라 하우스와 재향군인 기념관
- 참가
- 50개국 대표단. 대표 약 850명, 고문·직원을 합쳐 약 3,500명, 언론인·참관인 약 2,500명
- 주최국
- 미국, 영국, 소련, 중국(프랑스는 강대국 협의에 합류)
- 토대
- 덤버턴오크스 제안(1944), 얄타 합의(1945년 2월), 각국 정부의 수정안
- 결과
- 유엔 헌장과 국제사법재판소 규정. 6월 25일 채택, 6월 26일 서명
- 발효
- 1945년 10월 24일.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과 서명국 과반수의 비준 뒤
- 원회원국
- 51개국. 회의에 참석한 50개국과 1945년 10월 15일 서명한 폴란드
쉬움
샌프란시스코 회의란 무엇인가
유엔 국제기구 회의(UNCIO), 흔히 ‘샌프란시스코 회의’라고 부르는 이 회의에서 국제연합(유엔)의 설계가 확정되었다. 1945년 4월 25일 열려 6월 26일 유엔 헌장 서명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까지 열린 국제회의 가운데 손꼽히게 큰 회의였다. 미국과 소련 같은 강대국부터 라틴아메리카, 중동, 유럽의 작은 나라까지 50개국 대표단이 여러 위원회로 나뉘어 초안을 완전한 조약으로 다듬었다. 세계 각국 기자들이 날마다 회의 소식을 전했다.
이렇게 만든 헌장은 지금도 있는 유엔의 주요 기관을 세웠다. 모든 회원국이 한 자리와 한 표를 가진 총회, 평화와 안전을 책임지는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그리고 기구의 직원 조직인 사무국이다.
회의는 백지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강대국들이 이미 합의한 초안이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일의 상당 부분은 그것을 고치고 분명히 하고 보태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은 나라들도 실제 변화를 얻어 냈고, 그 결과 헌장은 원래 계획보다 길고 자세하며 경제·사회·인권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쉬움
세계는 왜 유엔을 원했나
1939년에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 간 전쟁이었다. 수천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전투, 폭격, 기근, 그리고 유대인 600만 명을 살해한 홀로코스트 같은 집단 학살로 죽었다. 바르샤바에서 마닐라까지 도시들이 폐허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뒤 각국은 평화를 지키려고 1920년 국제연맹을 만들었다. 그러나 연맹은 약했다. 미국은 끝내 가입하지 않았고 다른 강대국들도 탈퇴했으며, 중국에 대한 일본, 에티오피아에 대한 이탈리아, 유럽에서의 독일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 많은 지도자는 이번에는 더 강한 기구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새 기구의 첫째 목적은 헌장의 표현대로 “전쟁의 불행으로부터 다음 세대를 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여긴 가난, 보건, 교육 같은 문제에서 협력을 북돋우고 인권 존중을 증진하려 했다.
중급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 1941–1945
구상은 전쟁 중에 모습을 갖추었다. 1941년 8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총리는 전후 세계의 원칙을 담은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1942년 1월 1일에는 추축국과 싸우던 26개국이 워싱턴에서 ‘연합국 선언’에 서명했다. 루스벨트가 제안한 ‘유나이티드 네이션스(United Nations)’라는 이름은 처음에는 전시 동맹을 가리켰을 뿐이다. 1943년 10월 미국·영국·소련·중국의 모스크바 선언은 모든 평화 애호국의 주권 평등에 기초한 일반적 국제기구를 만들자고 했다.
1944년 8월부터 10월까지 네 나라 관리들이 워싱턴 D.C.의 저택 덤버턴오크스에서 만났다. 소련은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어서 중국과 직접 만나려 하지 않았기에 회담은 두 단계로 나뉘었다. 그 결과인 ‘일반적 국제기구 설립에 관한 제안’이 유엔 구조의 첫 초안이다. 두 가지 핵심 문제가 남았다. 안전보장이사회의 표결 방식, 그리고 소련 16개 공화국 모두를 회원국으로 하자는 소련의 요구였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은 실질 사항에 거부권을 갖고, 소련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벨라루스) 몫으로 두 자리를 더 얻으며, 미국이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헌장을 완성할 회의를 연다는 것이었다. 초청장은 1945년 3월 초까지 독일이나 일본에 선전 포고하고 연합국 선언에 서명한 나라들에 보내졌다.
중급
회의장 안에서
회의는 루스벨트가 1945년 4월 12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지 13일 만에 열렸다. 후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라디오로 개회 연설을 했다. 네 주최국 대표단장이 돌아가며 본회의를 주재했고, 미국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2세는 핵심인 운영위원회와 집행위원회를 이끌었다. 유럽에서는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독일은 회의 도중인 5월 8일 항복했고, 일본과의 전쟁은 이어졌다.
일은 총칙,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사법 기구를 다루는 네 개 분과로 나뉘었고, 그 아래 열두 개의 전문 위원회가 있었다. 위원회의 모든 결정에는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다. 수십 개국 정부의 제안과 수정안이 조항마다 토론되었고, 그사이 강대국들은 따로 비공개 협의를 했다. 여기에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된 프랑스도 참여했다.
완성된 헌장은 6월 25일 오페라 하우스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6월 26일 대표들은 재향군인 기념관에서 서명식을 열었는데, 연합국 가운데 가장 먼저 추축국의 공격을 받은 중국이 첫 번째로 서명했다. 정부 구성을 두고 다툼이 있던 폴란드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서명란을 비워 두었고, 1945년 10월 15일 서명해 51번째 원회원국이 되었다.
중급
큰 논쟁들
거부권. 호주 외무장관 H. V. 에바트 등이 이끈 많은 중소국은 5개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제한하려고 힘껏 싸웠다. 강대국들은 거부권이 없으면 가입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소련 대표단이 안전보장이사회가 분쟁을 논의할지 여부에도 거부권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위기가 닥쳤다. 트루먼은 보좌관 해리 홉킨스를 모스크바에 보냈고, 스탈린은 6월에 의제 채택을 비롯한 절차 사항에는 거부권을 적용하지 않는 데 동의했다. 실질 사항에 대한 거부권은 남았다.
회원국 논쟁. 소련은 전쟁 대부분 동안 중립을 지켰고 군사 정부가 추축국에 우호적이라고 여겨지던 아르헨티나의 가입에 반대했다.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아르헨티나를 지지했다. 결국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 벨로루시가 모두 받아들여졌다. 소련과 서방 연합국 사이의 긴장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 준 폴란드 정부 문제는 회의에서 풀리지 않았다.
지역 협정과 자위권. 1945년 3월 차풀테펙 협정으로 상호 방위에 합의한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이 지역 체제를 마비시킬까 걱정했다. 그 타협이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한 권리”를 안전보장이사회가 조치를 취할 때까지 인정한 제51조다. 이 조항은 뒤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동맹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식민지와 신탁통치. 회의는 식민지와 패전국에서 떼어 낸 영토의 앞날도 논의했다. 그 결과가 비자치 지역에 관한 선언인 제11장과 신탁통치 제도(제12–13장)다. 식민 강대국들은 독립을 약속하는 데 저항했다. 헌장은 ‘자치’를 말하고, 신탁통치 지역에 대해서만 “자치 또는 독립”을 향한 발전을 이야기한다.
중급
인권, 그리고 작은 나라들의 목소리
덤버턴오크스 제안은 인권을 단 한 번 언급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라틴아메리카 나라들, 작은 나라들, 그리고 자문단으로 초청된 미국 비정부기구(NGO) 여럿이 이를 강화하자고 밀어붙였다. 완성된 헌장은 전문과 여러 조항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언급하고, 회원국이 “인종, 성별, 언어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이를 증진하도록 했다. 경제사회이사회에는 인권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이 위원회가 뒤에 세계인권선언(1948)을 기초했다.
여성의 권리도 쟁점이었다. 브라질의 과학자이자 외교관 베르타 루츠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미네르바 베르나르디노 등 라틴아메리카 여성 대표들과 함께 전문에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명시하고, 제8조에서 여성이 유엔의 모든 직위에 오를 자격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미국 대표 버지니아 길더슬리브 등 일부는 그런 문구가 필요 없다고 보았다. 헌장에 서명한 대표 가운데 여성은 네 명뿐이었다.
전문의 첫마디 “우리 연합국 국민들은”은 미국 헌법을 떠올리게 한다. 국제연맹 설계에도 참여한 남아프리카의 얀 스뮈츠가 전문의 초기 초안을 제안했다. 헌장의 인권 언어와 남아프리카에서 인종 분리를 지지한 스뮈츠 자신 사이의 대비는 많은 역사가가 지적해 왔다.
중급
서명에서 현실로
헌장은 각국이 자기 헌법에 따라 비준해야 했다. 1919–1920년 국제연맹을 거부했던 미국 상원은 1945년 7월 28일 89 대 2로 헌장을 승인했다. 미국 여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 주는 표결이었다. 헌장은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과 나머지 서명국 과반수가 비준서를 기탁한 1945년 10월 24일 발효되었다. 이날을 ‘유엔의 날’로 기념한다.
첫 총회는 1946년 1월 런던에서 열렸고, 유엔은 뒤에 뉴욕에 자리 잡았다. 탈식민화로 아시아,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에 수십 개의 새 나라가 생기면서 회원국은 51개국에서 193개국으로 늘었다. 헌장은 몇 차례만 개정되었는데, 예컨대 1965년 안전보장이사회를 11개국에서 15개국으로 늘렸다. 5개 상임이사국과 거부권은 그대로다.
헌장은 유엔을 더 넓은 국제기구 가족의 중심에 두었다. 유엔보다 오래된 것도 있고 새로 만들어진 것도 있는 전문 기구들, 예컨대 식량농업기구(1945), 유네스코(1945), 세계보건기구(1948)가 경제사회이사회를 통해 유엔과 연결되었다. 유니세프는 1946년 총회가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어린이를 돕기 위해 만들었다.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구상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함께 이 기구들은 전후 국제 협력의 틀을 이루었다.
냉전은 곧 안전보장이사회를 묶어 버렸다. 거부권이 자주 쓰였고, 1945년에 그린 집단 안보 체제는 계획대로 작동한 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유엔은 외교, 평화 유지, 인도적 지원, 공중 보건, 난민 보호, 국제법 발전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중급
세계 여러 곳에서 본 1945년
서방 연합국에게 샌프란시스코는 흔히 국제연맹의 실패를 바로잡은 자유주의 국제주의의 승리로 그려진다. 소련에게 이 회의는 새 기구가 자본주의 강대국에 지배될지를 가늠하는 시험이었고, 거부권은 그 안전장치였다. 중국에게 상임이사국 자리는 일본에 맞선 오랜 항전을 인정받은 것이었지만, 곧 국공 내전으로 나라가 갈라져 누가 중국을 대표하느냐는 문제가 생겼다. 유엔에서 이 문제가 정리된 것은 1971년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은 아예 대표되지 못했다. 아프리카 대부분과 아시아의 상당 부분은 아직 식민 지배 아래 있었다. 아프리카의 독립국 가운데서는 이집트, 에티오피아, 라이베리아, 남아프리카 네 나라만 참가했다. 인도와 필리핀은 아직 독립하지 않았는데도 참석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자리가 없었다. 이승만을 비롯한 미국 내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받으려 활동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엔은 뒤에 한국사에 직접 관여했다. 1948년 남한의 선거를 감시했고, 1950년 북한이 남침하자 소련이 불참하던 안전보장이사회가 다국적군 파견을 승인했다. 남북한은 1991년에야 함께 유엔에 가입했고, 한국의 반기문이 2007–2016년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런 역사는 1945년의 의미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심화
역사가들은 유엔 창설을 어떻게 해석하나
초기 서술은 참가자들이 쓴 것이 많았고, 창설을 희망찬 새 출발로 그렸다.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펴낸 루스 B. 러셀의 『유엔 헌장의 역사』(1958)는 미국 기록을 바탕으로 헌장 작성 과정을 자세히 재구성했으며, 지금도 협상에 관한 표준 참고서다.
뒤의 역사가들은 힘의 역할을 강조했다. 스티븐 슐레진저의 『창조의 행위』(2003)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이 누린 주도권, 특히 미 육군이 다른 대표단의 외교 통신을 가로채 미국 대표단이 협상에 활용한 일을 부각했다. 마크 마조워의 『마법에 걸리지 않은 궁전』(2009)은 유엔의 이념적 뿌리 일부가 스뮈츠 같은 인물의 제국주의적 국제주의에 있으며, 기구가 제국과 강대국의 영향력을 끝내기보다 지키도록 설계된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창설자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식민지 민족들은 곧 헌장의 민족 자결과 인권 언어를 독립 쟁취에 활용했다는 반론도 있다.
세 번째 연구 흐름은 작은 나라와 비국가 행위자의 기여를 되살린다. 인권과 지역 조항을 만든 라틴아메리카 외교관, 호주·캐나다·뉴질랜드 같은 중견국, 루츠 같은 여성 대표, 그리고 경제사회이사회가 비정부기구와 협의할 수 있게 한 제71조를 끌어낸 NGO들이다. 이런 연구는 헌장을 강대국의 설계만이 아닌 실제 흥정의 결과로 본다.
심화
법으로서의 헌장: 핵심 조항과 논쟁
헌장은 19장 111조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중요한 법 규칙은 제2조 4항으로, 회원국은 “어떤 국가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한 무력의 위협이나 행사”를 삼가야 한다. 헌장에 적힌 예외는 제51조의 자위권과 제7장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강제 조치뿐이다. 제2조 7항은 “본질적으로 국내 관할권 안에 있는 사항”을 보호하고, 제103조는 헌장상의 의무가 다른 조약보다 우선한다고 정한다.
이 조항들은 그 뒤로 줄곧 논쟁 대상이었다. 법률가와 정부들은 자위권이 선제적일 수 있는지, 비국가 집단의 공격에도 적용되는지, 안전보장이사회 승인 없는 ‘인도적 개입’이 합법일 수 있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뒤에 나온 ‘보호책임’ 원칙(2005)은 주권과 잔학 행위로부터의 주민 보호를 조화시키려 했다.
거부권은 1945년 체제에서 가장 많이 비판받는 부분이다. 지지자들은 거부권 덕분에 강대국이 기구 안에 머물렀고 유엔이 강대국 하나와 전쟁을 벌이는 일을 막았다고 말한다. 비판자들은 거부권이 여러 위기에서 행동을 가로막았고 오늘의 세계가 아닌 1945년의 힘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안전보장이사회 개혁·확대안은 수십 년 동안 논의되었지만, 개정에는 5개 상임이사국 모두의 승인이 필요해 성공하지 못했다.
핵심 개념
- 집단 안보
- 모든 나라가 침략자에게 함께 맞서, 한 나라에 대한 공격을 모두의 문제로 삼는다는 생각.
- 주권 평등
- 크든 작든 모든 회원국이 법적으로 평등하며 총회에서 한 표씩 가진다.
- 강대국의 책임
- 거부권을 가진 5개 상임이사국에 평화에 대한 특별한 책임을 맡긴, 이상과 힘 사이의 타협.
- 무력 사용 금지
- 제2조 4항은 자위나 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이 아니면 다른 나라에 대한 무력의 위협과 행사를 금지한다.
- 인권
- 처음으로 보편적 조약이 차별 없는 인권 증진을 각국에 약속하게 했다.
- 경제·사회 협력
- 평화를 군사 안보만이 아니라 생활 수준, 보건, 교육의 향상과 연결했다.
- 민족 자결
- 헌장이 언급한 인민의 자결은 뒤에 탈식민화의 강력한 논거가 되었다.
기록
- 1920년 — 제1차 세계 대전 뒤 국제연맹이 창설되다.
- 1941년 —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이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다.
- 1942년 — 1월 1일 26개국이 연합국 선언에 서명하다.
- 1943년 — 모스크바 선언이 일반적 국제기구 창설을 촉구하다.
- 1944년 — 덤버턴오크스 회의가 새 기구의 제안을 마련하다(8–10월).
- 1945년 — 2월 얄타 회담이 안전보장이사회 표결 방식에 합의하고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소집하다.
- 1945년 — 4월 25일–6월 26일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헌장을 작성하고 서명하다.
- 1945년 — 10월 24일 헌장이 발효되어 유엔이 출범하다.
- 1946년 — 1월 런던에서 첫 총회가 열리다.
- 1948년 — 총회가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다.
- 1965년 — 헌장 개정으로 안전보장이사회가 11개국에서 15개국으로 늘다.
- 1991년 —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하다.
용어 풀이
- 헌장
- 기구의 목적과 규칙, 구조를 정한 창립 문서.
- 대표
- 회의에서 나라나 단체를 대신하도록 보낸 사람.
- 비준
- 한 나라가 자기 법에 따라 조약을 정식으로 승인하는 일.
- 안전보장이사회
- 국제 평화와 안전을 책임지는 유엔 기관. 5개 상임이사국과 (지금은) 10개 선출 이사국으로 이루어진다.
- 거부권
-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실질 사항의 결정을 막을 수 있는 권한.
- 총회
- 모든 회원국이 한 표씩 가지고 참여하는 유엔 기관.
- 신탁통치
- 자치나 독립을 목표로 특정 영토를 유엔 감독 아래 관리한 제도.
- 집단적 자위
- 공격받은 다른 나라를 함께 방어할 수 있는 국가의 권리.
- 국제연맹
- 1920년 창설된, 유엔 이전의 국제기구.
- 추축국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그 동맹국들.
묻고 답하기
회의는 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나요?
미국이 개최를 제안했고 연합국 지도자들이 얄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정했어요. 알맞은 건물이 있는 큰 도시였고, 아직 계속되던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태평양 쪽에 있었어요.
유엔은 세계 정부인가요?
아니요. 주권 국가들의 기구예요. 사람들에게 직접 법을 만들 수 없고, 회원국이 움직여야 일을 할 수 있어요.
왜 다섯 나라만 거부권을 가졌나요?
1945년의 주요 연합국인 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가 가입 조건으로 요구했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유엔에서 가장 논쟁이 많은 부분이에요.
유엔이 생길 때 한국도 있었나요?
아니요.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어서 자리가 없었어요. 남북한은 1991년에 유엔에 가입했어요.
6월 26일과 10월 24일은 무엇이 다른가요?
헌장은 1945년 6월 26일 서명되었지만, 충분한 나라가 비준한 10월 24일에야 발효되었어요. 10월 24일이 유엔의 날이에요.
유엔은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막았나?
제3차 세계 대전은 없었지만, 핵 억지 같은 다른 요인에 비해 유엔의 공이 얼마나 되는지는 역사가마다 다르다. 1945년 이후에도 많은 전쟁이 있었고 안전보장이사회는 자주 막혔다.
회의 기록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여러 권으로 된 아주 자세한 공식 기록이 출간되었고, 각국 문서고에 대표단 문서가 있다. 역사가들은 회고록과 정보 자료도 활용하는데, 이는 공식 기록에 드러나지 않은 비공개 흥정을 보여 준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1945: The San Francisco Conference. United Nations
- United Nations Charter (full text). United Nations
- The Formation of the United Nations, 1945. Office of the Historian, U.S. Department of State
-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 Wikipedia
-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Wikipedia
- 국제 연합 헌장. 위키백과
- Bertha Lutz. Wikipedia
- Ruth B. Russell, A History of the United Nations Charter: The Role of the United States, 1940–1945. Brookings Institution, 1958
- Stephen C. Schlesinger, Act of Creation: The Founding of the United Nations. Westview Press, 2003
- Mark Mazower, No Enchanted Palace: The End of Empire and the Ideological Origins of the United Natio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함께 보기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아내 조피가 살해된 사건. 뒤이은 외교 위기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번졌다.
- 10월 혁명1917년 10월 볼셰비키 세력이 페트로그라드의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며 혁명과 내전의 새 국면이 열렸다.
- 3·1 운동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시위로 시작해 한반도 곳곳으로 퍼진 한국의 독립운동.
- 게르니카파블로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중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폭격에 반응해 1937년에 그린 대형 회화.
- 미국 독립선언서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가 채택한 문서로, 영국에 대한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