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0월 혁명

Октябрьская революция

1917년 · 페트로그라드, 러시아

한 문장으로

1917년 10월(오늘날 달력으로는 11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당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러시아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아, 세계 최초로 공산당이 다스리는 국가를 세웠다.

10월 혁명
이미지: Pyotr Novitsky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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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1917년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싸우고 있던 아주 크고 가난한 나라였어요. 수백만 명의 군인이 죽었고, 도시에는 빵이 모자랐어요. 그해 2월, 화가 난 노동자와 군인들이 ‘차르’라고 불리던 황제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어요.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했고 먹을 것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러는 동안 노동자와 군인들은 ‘소비에트’라는 자기들만의 회의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이 정부보다 소비에트의 말을 더 따랐어요.

그중 레닌이라는 사람이 이끈 볼셰비키당은 지친 사람들이 가장 바라던 것을 약속했어요. “평화, 토지, 빵!” 1917년 10월 25일 밤, 볼셰비키 편 군인과 무장한 노동자들이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다리, 전신국, 기차역을 차지하고, 장관들이 모여 있던 겨울궁전에 들어갔어요. 싸움은 거의 없었어요.

볼셰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이 다스리고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는 공평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곧 다른 정당을 금지하고 신문을 닫고 비밀경찰을 만들었어요. 뒤이어 길고 끔찍한 내전이 벌어졌고, 싸움과 굶주림과 병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어요.

이 혁명으로 소련이 생겨났고, 소련은 1991년까지 이어지며 20세기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사람들은 지금도 이 혁명을 두고 논쟁해요. 일하는 사람들을 해방하려던 위대한 시도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잔혹한 독재의 시작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한눈에 보기

일시
1917년 10월 24–26일(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 = 11월 6–8일(그레고리력). 핵심 장악은 10월 25일/11월 7일
장소
당시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이어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에서 전투
주도 세력
볼셰비키당(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그 군사혁명위원회를 이끎)
무너진 정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끈 러시아 임시정부
새 정부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승인한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 의장 레닌
첫 포고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10월 26일/11월 8일)
그 뒤
제헌의회 해산(1918년 1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년 3월), 러시아 내전(1917/18–1922), 소련 수립(1922)
다른 이름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소련 공식 명칭), 볼셰비키 혁명, 볼셰비키 권력 장악

쉬움

10월 혁명이란 무엇인가

10월 혁명은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잡은 사건이다. 옛 러시아 달력으로 1917년 10월 25일(세계 대부분이 쓰는 달력으로는 11월 7일), 무장한 볼셰비키 지지자들이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그해 초 차르가 물러난 뒤 나라를 다스려 온 임시정부를 무너뜨렸다.

11월에 일어났는데 왜 ‘10월’ 혁명일까? 당시 러시아는 아직 율리우스력을 썼는데, 이 달력은 서유럽이 쓰던 그레고리력보다 13일 늦었다. 새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 2월 그레고리력으로 바꾸었고, 그래서 ‘10월’ 혁명 기념일은 해마다 11월 7일에 치러졌다.

이 혁명으로 스스로를 사회주의라 부르며 토지와 공장의 사적 소유가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목표로 한 세계 최초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 결과 참혹한 내전이 벌어졌고,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세워졌으며, 이 정치 체제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세계사를 움직였다.

[1][2][6]

쉬움

왜 일어났나: 전쟁, 굶주림, 차르의 몰락

1914년 러시아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를 상대로 제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 전쟁은 잘 풀리지 않았다. 1917년까지 수백만 명의 러시아 군인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철도는 도시에 식량과 연료를 넉넉히 실어 나르지 못했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사람들은 얼어붙는 겨울에 빵을 사려고 긴 줄을 섰다.

1917년 2월(서양 달력으로 3월) 페트로그라드의 파업과 빵 시위는 군인들이 군중에게 총을 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합류하면서 혁명이 되었다.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나면서 300년 넘게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가 끝났다. 이것이 2월 혁명이다.

2월 이후 두 기관이 권위를 주장했다. 옛 의회 의원들이 꾸린 임시정부는 러시아의 앞날을 결정할 제헌의회를 자유선거로 뽑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와 전국 수백 개의 소비에트가 노동자와 군인을 대변했다. 이 상태를 ‘이중 권력’이라 한다.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인만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인구의 절반이 안 되는 사람만 러시아인이었고,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핀란드인, 유대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타타르인, 카자흐인 등이었다. 1917년 차르 국가가 무너지자 핀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캅카스와 중앙아시아까지 자치나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 운동도 일어났다. 1917년의 혁명은 도시 노동자의, 농촌 농민의, 전선 병사의, 제국 변경 민족들의 혁명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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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2월에서 10월까지: 위기의 한 해

임시정부는 동맹국인 영국·프랑스와의 신의를 지키려는 이유 등으로 전쟁을 계속하기로 했고, 토지 개혁과 선거를 미루었다. 몇 달이 지나며 병사들은 탈영했고, 농민들은 직접 지주의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자들은 공장을 장악했다. 7월부터 사회주의 변호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끈 정부는 점점 약해졌다.

1917년 4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스위스 망명에서 돌아왔다. 러시아의 전쟁 수행을 약화시키려던 독일 당국이 마련해 준 열차로 독일을 거쳐 온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서 그는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말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기라고 외쳤다. 그의 강령인 「4월 테제」는 “평화, 토지, 빵”이라는 구호로 요약되었다.

7월 페트로그라드의 무장 시위(7월 사태)는 진압되었다. 정부는 볼셰비키를 독일 첩자라고 비난하며 지도자 일부를 체포했고, 레닌은 핀란드로 숨었다. 그러나 8월 말 군 총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수도로 군대를 움직이는 듯하자, 케렌스키는 소비에트에 도움을 청했고 볼셰비키 적위대를 포함한 무장 노동자들이 그를 막았다. 이후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했고, 9월 레프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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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권력 장악, 1917년 10월 24–26일

10월 10일 몰래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레닌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를 설득해 10 대 2로 무장봉기를 결의하게 했다. 반대한 레프 카메네프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반대 의견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볼셰비키가 주도하고 실질적으로 트로츠키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수도 수비대 대부분의 충성을 얻었다. 봉기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개막에 맞춰졌다.

10월 24일 케렌스키는 볼셰비키 신문을 폐간하고 네바강의 다리를 들어 올리려 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병사, 수병, 적위대를 보내 다리, 기차역, 전신국, 전화국, 발전소를 차지하는 것으로 맞섰다. 대부분 총격이 거의 없이 이루어졌고, 많은 정부군은 그냥 나서지 않았다. 10월 25일 아침 레닌은 임시정부가 무너졌다고 선언했지만, 임시정부는 아직 겨울궁전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10월 25일 저녁 순양함 아브로라호가 신호로 공포탄을 쏘았고,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대포가 궁전을 포격했으나 대부분 빗나갔다. 궁전은 사관생도, 일부 카자크, 여성 대대가 지켰는데 저녁 동안 상당수가 흩어졌다. 10월 26일 새벽 공격대가 들어가 장관들을 체포했다. 케렌스키는 이미 전선에서 병력을 구하려고 차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간 뒤였다. 수도의 사상자는 매우 적었다.

군중이 궁전 문으로 돌진하는 극적인 ‘겨울궁전 습격’ 장면은 대체로 뒤에 만들어진 이미지다. 특히 1920년에 열린 대규모 재연 행사와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의 영화 「10월」(1928)이 이 이미지를 굳혔다.

[2][7][10]

중급

소비에트 대회와 첫 포고들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10월 25일 밤늦게 열렸다. 볼셰비키가 최대 세력이었고 좌파 사회혁명당이 그 동맹이었다. 온건 사회주의 정당인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은 권력 장악을 음모라고 비난하며 퇴장했다. 트로츠키는 그들에게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가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떠나면서 볼셰비키와 동맹 세력이 대회를 장악했다.

10월 26일 대회는 새 정부인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를 승인했다. 의장은 레닌, 외무 인민위원은 트로츠키, 민족 인민위원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대회는 레닌이 기초한 유명한 포고 두 개를 채택했다. 「평화에 관한 포고」는 모든 교전국에 병합과 배상금 없는 ‘정의롭고 민주적인 평화’를 위한 즉각 협상을 요구했다. 「토지에 관한 포고」는 대토지의 사적 소유를 없애고 땅을 농민 위원회에 넘겼는데, 이는 농민들이 이미 하던 일을 상당 부분 인정한 것이었다.

다른 포고도 잇달았다. 공장의 노동자 통제, 은행 국유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신분과 작위 폐지, 러시아 여러 민족의 자결권 선언, 민법상 혼인과 이혼 절차 간소화 등이다. 사회보장 인민위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장관급 직책을 맡은 여성 가운데 하나였다.

[4][5][2]

중급

권력 지키기: 모스크바, 제헌의회, 체카

페트로그라드 밖에서는 장악이 그리 쉽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는 적위대와 사관생도 사이에 도심에 대포까지 동원된 한 주가량의 격전이 벌어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뒤 11월 초 볼셰비키가 이겼다. 카자크 부대를 이끌고 돌아오려던 케렌스키의 시도는 페트로그라드 근처 풀코보에서 꺾였다. 여러 지방 도시에서는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지방 당국과 민족 운동이 저항했다.

오래 약속된 제헌의회 선거는 1917년 11월에 치러졌다. 그때까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자유로운 선거였다. 농민 정당인 사회혁명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얻었고, 볼셰비키는 주로 도시와 군대에서 약 4분의 1을 득표했다. 1918년 1월 제헌의회가 모여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지 않자, 볼셰비키는 단 한 번의 회의 뒤 의회를 해산했고, 의회를 지지하는 시위대에 총격이 가해졌다.

1917년 12월 정부는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이끄는 ‘반혁명과 사보타주 단속 비상위원회’, 곧 체카를 만들었다. 반대파 신문이 폐간되고 자유주의 정당 카데츠(입헌민주당)는 불법화되었다. 잠시 정부에 참여했던 좌파 사회혁명당은 1918년 3월 독일과의 강화 조약에 항의해 정부에서 나갔다. 1918년 중반 러시아는 사실상 일당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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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결과: 강화, 내전, 소비에트 국가

세계 대전에서 빠져나오려고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 3월 독일 및 그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우크라이나, 발트 지역, 핀란드 등 광대한 영토를 내주었다. 같은 달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다. 1918년 7월 전 차르와 가족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볼셰비키에게 총살되었다.

1918년부터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와 여러 적대 세력, 곧 옛 제정 장군들이 이끈 ‘백군’, 경쟁 사회주의 세력, 농민군, 민족 독립 운동, 외국 간섭군 사이에 여러 갈래의 내전이 벌어졌다. 양쪽 모두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했다. 전염병과 1921–22년 대기근까지 겹쳐 내전기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추정치는 대략 700만에서 1,200만 명까지 폭넓게 갈린다.

승리한 볼셰비키는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세웠다. 새 국가는 평등, 문맹 퇴치, 의료, 여성과 소수 민족의 해방을 약속했고 그 가운데 일부에서는 실제 성과를 거두었다. 동시에 일당 독재를 세웠고, 특히 1920년대 말 이후 스탈린 아래에서 강제 집단화, 대기근, 대숙청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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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세계로 퍼진 울림: 동아시아와 한국

혁명은 세계를 고무하는 동시에 두렵게 했다. 1919년 볼셰비키는 해외 혁명을 확산하려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세웠다. 유럽,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공산당이 생겨났다. 많은 반식민 운동가에게 레닌의 민족 자결 약속과 제국주의 비판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자유주의 구상과는 다른 대안으로 보였다.

동아시아에서도 영향은 깊었다. 1921년 코민테른의 도움으로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한국인 사이에서는 1918년 러시아 극동의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 등이 한인사회당을 세웠고, 1919년 3·1 운동 뒤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퍼지며 일제 식민 지배에 맞선 투쟁에 새로운 흐름을 더했다. 한편 일본은 연합국 간섭의 하나로 시베리아에 출병(1918–22)했고, 공산주의를 겨냥한 엄격한 법을 만들었다.

서양에서는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가 수십 년 동안 정치를 좌우했다. 미국의 ‘적색 공포’에서, 스스로를 혁명의 방파제로 내세운 파시즘을 비롯한 반공 운동의 부상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은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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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기억: 국경일에서 논쟁의 과거로

소련에서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국가의 건국 신화였다. 해마다 11월 7일 붉은 광장에서 열병식이 열렸다. 공식 역사는 혁명을 레닌 아래 하나로 뭉친 당이 이끈 대중 봉기로 그렸고, 1930년대부터는 실제로 하지 않은 두드러진 역할을 스탈린에게 부여하는 한편, 트로츠키 등 눈 밖에 난 지도자들을 지웠다.

1991년 소련 붕괴 뒤 러시아인의 태도는 더 갈라졌다. 2005년 11월 7일 휴일은 1612년 모스크바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낸 일을 기리는 11월 4일 ‘국민 통합의 날’로 바뀌었다. 2017년 100주년을 러시아 정부는 조촐하게만 기념했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같은 옛 소련 국가에서는 이 혁명을 주로 소비에트 지배와 탄압의 시작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 밖에서도 혁명은 여전히 상징이다. 어떤 이에게는 배신당한 사회 정의의 희망, 어떤 이에게는 유토피아 정치의 위험, 또 어떤 이에게는 힘으로 밀어붙인 근대화의 성취와 대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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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역사학의 논쟁: 쿠데타인가 민중 혁명인가

1917년 해석은 냉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소련 역사학은 10월을 프롤레타리아의 의지를 대변한 당이 이끈 계급 투쟁의 합법칙적 결과로 보았다. ‘전체주의’ 모델의 영향을 받은 20세기 중반 서방 역사학자들은 반대로, 작고 규율 잡힌 음모 집단이 혼란을 틈타 일으킨 쿠데타가 독재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리처드 파이프스의 『러시아 혁명』(1990)은 이 견해를 대표하는 후기 저작이다.

1960–70년대부터 ‘수정주의’ 사회사가들은 지도자 대신 노동자, 병사, 수병, 농민을 연구했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볼셰비키 권력을 잡다(The Bolsheviks Come to Power)』(1976)는 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당이 비교적 열려 있고 아래의 목소리에 반응했으며, 1917년 가을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의 지지가 실제였음을 보여 주었다. 실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 혁명』(1982)은 10월을 1930년대까지 이어지는 더 긴 혁명 과정 안에 놓았다. 이들은 뒤의 독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10월이 전국적 다수는 아니었더라도 도시에서는 진정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소련 문서고가 열리면서 역사학자들은 당과 경찰 기록에 접근하게 되었다. 올랜도 파이지스의 『민중의 비극(A People’s Tragedy)』(1996) 같은 저작은 사회사와 정치사를 결합해 대중의 급진화와 볼셰비키 지도부의 폭력·권위주의적 선택을 함께 강조했다. 오늘날 연구는 페트로그라드 너머, 제국의 비러시아 민족들, 농촌,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제국들의 더 넓은 위기의 일부로서의 혁명에도 눈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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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 목격자, 포고, 문서고

혁명은 다양한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정당의 신문,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의 회의록, 정부 포고, 수많은 목격자 회고록이 있다. 미국 기자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1919)은 사건 직후 공감 어린 시선으로 쓴 생생한 기록이다. 멘셰비키에 가까운 사회주의자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자세한 『혁명 수기』를 남겼고,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1930–32)는 중요한 서사이자 자기 역할에 대한 당파적 변론이다.

이 모든 자료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회고록은 사후의 시각으로, 흔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쓰였다. 스탈린 시대 소련의 문서 간행물은 공식 서사에 맞게 편집되었다. 패배한 반대파의 망명 회고록에도 나름의 편향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문서고 기록, 선거와 식량 공급 통계, 지역 연구와 비교한다.

평화와 토지에 관해 레닌이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한 보고처럼 새 정권의 핵심 문서는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다(예: 레닌 인터넷 아카이브). 이를 제헌의회 선거 결과, 노동자와 농민의 청원과 함께 읽으면 볼셰비키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러시아 사회의 여러 집단이 무엇을 원했는지를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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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이중 권력
2월 혁명 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권위를 나눠 가진 상태. 어느 쪽도 평화적으로 풀지 못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임시정부가 아니라 노동자·병사 회의가 다스려야 한다는 레닌의 구호.
“평화, 토지, 빵”
전쟁에 지친 병사, 땅을 원한 농민, 굶주린 도시민에게 곧바로 와닿은 볼셰비키의 약속.
전위당
규율 잡힌 직업 혁명가들의 당이 노동계급을 권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레닌의 생각.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동계급의 과도적 통치라는 마르크스주의 개념. 실제로는 공산당의 통치가 되었다.
민족 자결
옛 제국의 민족들이 스스로 앞날을 정할 수 있다는 볼셰비키의 약속. 세계에 영향을 주었지만 실제로는 자주 제한되었다.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10월이 소수의 음모였는지, 폭넓은 민중 혁명의 정점이었는지를 둘러싼 역사학의 핵심 질문.

기록

  1. 1914년 —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2. 1917년 — 2월(신력 3월): 2월 혁명. 니콜라이 2세 퇴위. 임시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성립.
  3. 1917년 — 4월: 레닌이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4월 테제」 발표.
  4. 1917년 — 7–8월: 페트로그라드 7월 사태. 코르닐로프 사건으로 볼셰비키 세력 강화.
  5. 1917년 —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무장봉기를 결의.
  6. 1917년 — 10월 25–26일(신력 11월 7–8일):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와 겨울궁전 장악. 소비에트 대회가 평화·토지 포고 채택.
  7. 1917년 — 11–12월: 제헌의회 선거. 체카 창설.
  8. 1918년 — 1월 제헌의회 해산, 2월 그레고리력 채택,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모스크바 천도.
  9. 1918년 — 7월: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살해됨. 내전 확산.
  10. 1919년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창립.
  11. 1922년 — 내전이 대체로 끝나고 12월 소련 수립.
  12. 1991년 — 소련 해체.

용어 풀이

볼셰비키
레닌이 이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급진파. 1918년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멘셰비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가운데 온건파.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소비에트
러시아어로 ‘회의’. 노동자·병사·농민이 뽑은 대표 기구.
임시정부
2월 혁명부터 1917년 10월까지 러시아를 다스린 과도 정부.
율리우스력
1918년까지 러시아에서 쓴 옛 달력. 20세기에는 그레고리력보다 13일 늦었다.
소브나르콤
인민위원회의.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세운 정부.
적위대
1917년 볼셰비키를 지지한 공장 노동자들의 무장 부대.
제헌의회
러시아 헌법을 만들기 위해 선출된 기구. 1918년 1월 볼셰비키가 해산했다.
체카
1917년 12월 세워진 소비에트 정치경찰. 뒤의 NKVD·KGB의 전신.
사회혁명당(에스에르)
농민의 지지를 크게 받은 대중 사회주의 정당. 1917년 좌파와 우파로 갈라졌다.

묻고 답하기

11월에 일어났는데 왜 10월 혁명이라고 하나요?

당시 러시아는 13일 늦은 옛 달력을 썼어요. 그 달력으로는 10월 25일이었고, 우리 달력으로는 11월 7일이에요.

겨울궁전에서 정말 큰 전투가 있었나요?

아니요. 지키던 사람들 대부분이 떠났고, 공격대는 새벽에 사상자도 거의 없이 들어갔어요. 유명한 전투 장면은 대부분 1920년의 재연 행사와 1928년 영화에서 나왔어요.

“평화, 토지, 빵”은 무슨 뜻이었나요?

평화는 전쟁을 멈추자는 것, 토지는 농민에게 땅을 주자는 것, 빵은 먹을 것 부족을 끝내자는 것이에요.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이 듣고 싶던 간단한 약속이었어요.

러시아 사람 대부분이 볼셰비키를 뽑았나요?

아니요. 1917년 11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약 4분의 1을 얻었어요. 큰 도시와 군대에서 강했고, 농민 기반의 사회혁명당이 더 많은 표를 얻었어요.

차르는 어떻게 되었나요?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3월(옛 달력 2월) 자리에서 물러났어요. 1918년 7월 볼셰비키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그와 아내, 다섯 자녀, 하인 몇 명을 총살했어요.

10월 혁명은 한국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러시아 극동과 중국의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퍼뜨렸어요.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세워졌고, 1919년 3·1 운동 뒤 이 사상은 반식민 운동의 중요한 흐름이 되었어요.

쿠데타라고 해야 하나요, 혁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갈려요. 권력 장악 자체는 한 정당이 계획했지만, 노동자·병사·농민의 실제 대중 혁명 한가운데서 일어났어요. 요즘은 더 넓은 민중 혁명 속에서 한 정당이 권력을 잡은 사건으로 설명하는 학자가 많아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10월 혁명. 위키백과
  2. October Revolution. Wikipedia (영어)
  3. Russian Revolution. Wikipedia (영어)
  4. V. I. 레닌, Report on Peace, Second All-Russia Congress of Soviets, October 26 (November 8), 1917. Lenin Internet Archive (marxists.org)
  5. V. I. 레닌, Report on Land, Second All-Russia Congress of Soviets, October 26 (November 8), 1917. Lenin Internet Archive (marxists.org)
  6. Sheila Fitzpatrick, The Russian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7. Alexander Rabinowitch, The Bolsheviks Come to Power: The Revolution of 1917 in Petrograd. W. W. Norton, 1976
  8. Richard Pipes, The Russian Revolution. Alfred A. Knopf, 1990
  9. Orlando Figes, A People’s Tragedy: The Russian Revolution 1891–1924. Jonathan Cape, 1996
  10. John Reed, Ten Days That Shook the World (『세계를 뒤흔든 열흘』). Boni & Liveright, 1919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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