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Sarajevski atentat / Attentat von Sarajevo

1914년 ·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한 문장으로

1914년 6월 28일 열아홉 살 보스니아 세르비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아내 조피를 쏘아 죽였고, 이 사건이 불러온 위기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번졌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이미지: Achille Beltrame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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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백 년 전 유럽의 많은 곳은 황제와 왕이 다스렸어요. 그중 아주 큰 나라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어요. 늙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에게는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있었는데, 그가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이었어요.

1914년 6월,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아내 조피는 보스니아의 도시 사라예보를 찾았어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몇 해 전 보스니아를 자기 땅으로 만들었는데, 그곳의 많은 사람은 그 지배를 원하지 않았어요. 대부분 아직 학생이던 젊은이 몇 명이 권총과 폭탄을 몰래 들고 사라예보에 와서 그를 죽이려 했어요.

아침에 한 젊은이가 대공의 차에 폭탄을 던졌어요. 폭탄은 튕겨 나가 뒤차 밑에서 터졌고, 다른 사람들이 다쳤어요. 나중에 대공의 운전사가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멈췄는데, 바로 옆에 또 다른 젊은이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서 있었어요. 프린치프가 총을 두 번 쏘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모두 숨졌어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젊은이들이 무기를 받은 이웃 나라 세르비아를 탓했어요. 나라들이 서로 친구를 돕겠다고 약속해 두었기 때문에, 다섯 주쯤 지나자 유럽의 강대국 대부분이 전쟁에 뛰어들었어요. 그것이 수많은 사람이 죽은 제1차 세계 대전이에요.

사람들은 지금도 프린치프를 두고 다퉈요. 끔찍한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살인자로 보는 사람도 있고, 제국에 맞선 젊은 독립투사로 보는 사람도 있어요. 역사학자들은 총격 하나가 전쟁 전체를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해요. 그것은 불씨였고, 유럽에는 이미 마른 장작이 잔뜩 쌓여 있었던 거예요.

한눈에 보기

일시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 조금 전(오전 10시 10분께 폭탄 공격 실패)
장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배 아래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중심 도시 사라예보, 라틴 다리 근처
희생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1863년생)과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1868년생)
암살자
청년 보스니아 운동에 속한 보스니아 세르비아인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1894–1918)
음모
사라예보의 공모자 7명. 세르비아 비밀결사 ‘통일 아니면 죽음(흑수단)’의 장교들이 무기와 국경 통과를 도왔다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최후통첩(7월 23일)과 선전포고(7월 28일), 1914년 8월 초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기억
‘세계를 울린 총성’.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보스니아 등 나라마다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쉬움

사라예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아내 조피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중심 도시 사라예보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흔히 ‘사라예보 사건’이라 부르는 이 암살은 1914년 7월의 외교 위기를 불러왔고, 그 위기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위 계승자였다. 이 제국은 독일인, 헝가리인, 체코인, 폴란드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 무슬림, 루마니아인 등 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중부 유럽의 큰 나라였다. 군 총감이던 그는 보스니아에서 열린 군사 기동 훈련을 참관하고 사라예보를 공식 방문하려고 왔다.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열아홉 살의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끝내고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 등 남슬라브인을 한 나라로 묶으려던 젊은 혁명가들의 느슨한 모임, 뒤에 ‘청년 보스니아’라 불린 운동에 속해 있었다. 그와 동료들은 이웃 세르비아 왕국의 비밀 민족주의 결사 단원들에게서 권총과 폭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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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사건의 사람들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다른 이들의 죽음 때문에 계승자가 되었다. 황제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188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아버지도 189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미 급하고 보수적인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제국 안 슬라브 민족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개혁 구상도 품고 있었다. 세르비아와의 전쟁에는 신중했고, 전쟁을 바라던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여러 차례 말렸다.

아내 조피 호테크는 통치 가문의 공주가 아닌 체코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황실은 1900년 두 사람의 결혼을 ‘귀천상혼(貴賤相婚)’이라는 조건으로만 허락했다. 세 자녀는 제위를 이을 수 없었고, 조피는 공식 의례에서 자주 배제되었다. 그러나 보스니아에서는 군 총감의 아내로서 남편 곁에 나란히 설 수 있었는데, 이것이 그날 부부가 함께 움직인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본다. 방문일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과도 가까웠다.

사라예보에서 기다린 공모자 일곱 명은 젊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 네델코 차브리노비치, 트리프코 그라베시는 베오그라드에서 왔고, 조금 나이 많은 교사 겸 기자 다닐로 일리치가 현지 조직을 맡았다. 여기에는 보스니아 무슬림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와 두 고등학생 바소 추브릴로비치, 츠비예트코 포포비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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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그날의 일을 차례로

부부는 아침에 기차로 도착해 여섯 대의 차량 행렬 가운데 한 대의 무개차를 타고 밀랴츠카강 가의 아펠 강변로를 따라 나아갔다. 공모자들은 길을 따라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비는 허술했고 행차 경로는 신문에 미리 실려 있었다.

오전 10시 10분께 차브리노비치가 대공의 차에 폭탄을 던졌다. 운전사가 속도를 높였고, 폭탄은 접힌 차 지붕에 맞고 튕겨 뒤차 밑에서 터져 탑승자와 구경꾼 등 열여섯에서 스무 명가량이 다쳤다. 차브리노비치는 독약을 삼켰지만 토하기만 했고, 여름이라 물이 아주 얕았던 강에 뛰어들었다가 붙잡혔다. 다른 공모자들은 군중과 혼란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대공은 눈에 띄게 화가 난 채 시청 환영식에 갔다. 행사 뒤 그는 부상자를 병원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바뀐 계획이 운전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라틴 다리에서 앞차들이 원래 계획대로 프란츠 요제프 거리로 우회전했고, 대공의 운전사 레오폴트 로이카도 따라 돌았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어 포티오레크 장군이 길이 틀렸다고 외쳤고, 차는 후진하려고 멈춰 섰다.

마침 프린치프가 모리츠 실러의 식료품점 근처,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서서 작은 벨기에제 FN 권총으로 가까이에서 두 발을 쏘았다. 한 발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에, 다른 한 발은 조피의 배에 맞았다. 두 사람 모두 오전 11시 조금 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졌다. 프린치프는 자신을 쏘고 독약을 먹으려 했지만 군중에게 붙들려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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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배경: 보스니아, 세르비아, 남슬라브 문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곳을 점령·관리할 권리를 얻었고, 1908년 10월 정식으로 병합했다. 이 병합은 세르비아와 러시아를 격분시켜 유럽의 큰 위기를 낳았다. 보스니아 주민은 정교회 세르비아인이 가장 많았고, 무슬림(오늘날의 보스니아크)과 가톨릭 크로아티아인이 함께 살았다.

1878년 독립 왕국이 된 세르비아는 스스로를 장차 세워질 남슬라브 국가의 중심으로 여겼다. 1903년 일단의 장교들이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국왕과 드라가 왕비를 살해하고 더 민족주의적인 새 왕조를 세웠다. 1912–13년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를 상대로 영토를 거의 두 배로 늘렸다. 자국 안에 수백만 남슬라브인을 품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더 크고 자신만만해진 세르비아를 생존의 위협으로 보았다.

가난한 농촌 출신이 많던 보스니아 청년들 사이에는 남슬라브(유고슬라비아) 통합, 세르비아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러시아 혁명가들의 본보기 같은 급진 사상이 빠르게 퍼졌다. 그들은 1910년 보스니아 총독을 쏘려다 실패하고 자결한 보그단 제라이치를 우러러보았다. 그들에게 제국의 고위 인물을 암살하는 것은 영웅적 저항이었다. 재판에서 프린치프는 자신이 모든 남슬라브인을 오스트리아에서 해방하려는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라고 밝혔다.

날짜도 의미가 있었다. 6월 28일은 세르비아 기억의 중심에 있는 1389년 코소보 전투 기념일, 성 비투스 축일(비도브단)이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그날의 황실 방문은 의도적인 도발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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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흑수단과 세르비아의 책임 문제

무기는 세르비아에서 왔다. 베오그라드에서 프린치프, 차브리노비치, 그라베시는 밀란 치가노비치와 보이슬라브 탄코시치 소령을 통해 권총 네 자루, 폭탄 여섯 개, 청산가리 캡슐을 받았다. 두 사람은 ‘흑수단’으로 더 잘 알려진 세르비아 장교 비밀결사 ‘통일 아니면 죽음’의 단원이었다. 그 우두머리는 세르비아 군 정보 책임자이자 1903년 국왕 시해의 주모자 가운데 하나였던 ‘아피스’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이었다. 세르비아 국경 장교들이 젊은이들과 무기를 보스니아로 몰래 넘겨 주었다.

니콜라 파시치 총리가 이끈 세르비아 정부가 암살을 지시한 것은 아니며, 발칸 전쟁으로 지친 세르비아 정부가 1914년에 전쟁을 원했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정부는 아피스와 흑수단과 갈등하고 있었고, 파시치는 6월 초 무장한 젊은이들이 보스니아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안 것으로 보인다. 세르비아가 빈에 경고를 했는지, 했다면 얼마나 분명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며, 빈 주재 세르비아 공사는 막연한 암시만 준 것으로 보인다.

전쟁 중이던 1917년, 망명 세르비아 정부는 섭정에 대한 음모라는 대체로 날조된 혐의로 테살로니키(살로니카)에서 아피스와 측근들을 재판했다. 처형 전 아피스는 사라예보 공격을 조직한 책임을 인정하는 진술서를 썼다. 이 진술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흑수단 안에서도 계획이 얼마나 알려져 있었는지를 두고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논쟁한다.

[5][2][6]

중급

암살에서 세계 대전으로: 7월 위기

처음에 유럽의 반응은 충격이었지만 큰 경계심은 없었다. 정치적 암살이 드물지 않던 시대였다. 그러나 막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도부, 특히 참모총장 콘라트와 외무장관 베르히톨트 백작은 이 사건을 기회로 세르비아라는 정치적 위협을 꺾기로 했다. 7월 5–6일 독일은 러시아가 개입하더라도 동맹국을 전폭 지지하겠다는 약속, 이른바 ‘백지수표’를 주었다.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48시간 시한을 붙인 열 개 조항의 최후통첩을 세르비아에 보냈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가 세르비아 땅에서의 수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7월 25일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그 조항은 거부했다. 빈은 국교를 끊고, 암살 한 달 뒤인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으며, 이튿날 베오그라드를 포격했다.

그다음은 동맹 체제와 군사 계획이 움직였다. 세르비아와 슬라브인의 보호자를 자처한 러시아가 7월 30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프랑스를 빨리 꺾으려는 계획에 따라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다.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사라예보의 총성 뒤 다섯 주 만에 유럽 강대국들이 전쟁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응징하려 한 세르비아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침공을 막아 냈지만 1915년 말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불가리아군에 점령되었고, 군대와 많은 민간인이 겨울에 알바니아 산악을 넘어 퇴각하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세르비아는 전투, 전염병, 점령으로 거의 어느 교전국보다 큰 인구 비율을 잃었다. 보스니아도 군정 아래 최전선 지역이 되었다.

1918년까지 이어진 전쟁으로 약 천만 명의 군인과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러시아, 오스만 네 제국이 무너졌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은 방아쇠였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제국 간 경쟁, 군비 경쟁, 경직된 동맹, 민족주의 운동, 그리고 여러 수도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정 같은 더 깊은 원인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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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보스니아의 여파: 폭동, 재판, 처벌

암살 직후 사라예보와 다른 도시들에서 반(反)세르비아인 폭동이 일어났다. 군중이 세르비아인의 집과 가게와 기관을 공격했고 여러 사람이 죽었다. 당국은 세르비아인 수백 명을 체포했고, 전쟁 동안에는 주로 보스니아 무슬림으로 꾸려진 민병대 ‘슈츠코르프스’가 세르비아 민간인을 겨냥해 동원되었다. 이 일은 지역 밖에서는 자주 잊히는 이야기다.

공모자들과 그들을 도운 많은 사람이 1914년 10월 사라예보에서 재판을 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법은 범행 당시 스무 살이 안 된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프린치프, 차브리노비치, 그라베시는 징역 20년을, 더 어린 바소 추브릴로비치와 츠비예트코 포포비치는 16년과 13년을 선고받았다. 다닐로 일리치와 무기를 숨겨 준 벨리코 추브릴로비치, 미시코 요바노비치는 1915년 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린치프는 지금의 체코에 있는 테레지엔슈타트(테레진) 요새 감옥에 가혹한 조건으로 갇혔다. 결핵에 걸려 한쪽 팔을 잘라 냈고, 1918년 4월 28일, 그가 맞서 싸운 제국이 무너지기 몇 달 전에 숨졌다. 차브리노비치와 그라베시도 옥중에서 죽었다. 바소 추브릴로비치는 살아남아 뒤에 역사학자가 되었고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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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영웅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사건의 기억

사라예보의 기억은 이 지역의 정치와 함께 바뀌었다. 전쟁 중이던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현장에 희생자 기념비를 세웠으나 제국이 무너진 뒤 철거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특히 1945년 이후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에서 프린치프와 청년 보스니아는 남슬라브 국가를 가져오는 데 이바지한 자유의 투사로 기려졌다. 라틴 다리는 ‘프린치프 다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발자국이 새겨졌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고 1992–95년 보스니아 전쟁을 겪은 뒤, 평가는 민족에 따라 갈라졌다. 많은 세르비아인은 여전히 프린치프를 해방의 영웅으로 보며, 2014년 동사라예보와 2015년 베오그라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반면 많은 보스니아크와 크로아티아인은 그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로, 그의 행위가 훗날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고 본다. 사라예보에서 다리는 다시 ‘라틴 다리’로 불리고, 현장 가까이의 작은 박물관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배 시기를 보여 준다.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등에서는 대개 이 암살을 파국의 첫걸음으로, 프린치프를 테러리스트로 이야기한다. 부부가 총에 맞은 자동차와 피 묻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군복은 빈 군사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4년 100주년은 같은 사건이 나라마다 얼마나 다르게 이야기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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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역사학의 논쟁: 1914년의 책임은 누구에게

전쟁 책임 문제는 1914년부터 논쟁거리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책임을 독일과 그 동맹국에 돌렸고, 독일인은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양차 대전 사이 많은 역사학자는 모든 강대국이 전쟁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고 보았다. 1961년 독일 역사학자 프리츠 피셔는 『세계 권력을 향한 움켜쥠(Griff nach der Weltmacht)』에서 독일 문서고 자료를 바탕으로 독일 지도부가 세계 강국이 되려고 대전쟁의 위험을 의도적으로 감수했고 심지어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이 ‘피셔 논쟁’은 독일 역사학을 바꾸어 놓았다.

최근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2012)은 관심을 다시 발칸과 모든 수도의 수많은 결정권자에게로 돌리며, 이들을 자신이 만드는 파국을 보지 못한 몽유병자로 그렸다. 클라크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흑수단을 비중 있게 다루자, 세르비아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일부는 이 책이 세르비아에 지나친 책임을 지운다고 비판했다. 마거릿 맥밀런의 『The War That Ended Peace』(2013), 숀 맥미킨의 『July 1914』(2013) 같은 책들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의 역할을 저마다 다르게 저울질한다.

다른 연구 흐름은 암살자들 자체를 본다. 블라디미르 데디예르의 『The Road to Sarajevo』(1966)는 청년 보스니아를 농민의 가난, 오스만과 합스부르크의 지배, 유럽 혁명 사상이라는 맥락에 놓았다. 공모자들이 주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는지, 유고슬라비아 이상주의자였는지, 흑수단의 도구였는지,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훗날 그것이 이용된 방식과 얼마나 떼어 볼 수 있는지를 두고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여전히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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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와 증거

이 암살은 비교적 기록이 잘 남아 있다. 1914년 10월 사라예보 재판에서는 피고인 진술 속기록이 만들어져 여러 판본과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공모자들의 동기를 알려 주는 핵심 사료지만, 그들은 때로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고 진술을 다듬었다. 목격자 증언으로는 차의 발판에 서 있던 프란츠 폰 하라흐 백작과 포티오레크 총독의 진술 등이 있다.

외교 위기에 관해서는 전후 각국 정부가 자국을 변호하려고 흔히 선별적으로 펴낸 방대한 공식 문서집, 개인 일기, 그리고 뒤에 공개된 문서고 자료가 쓰인다. 1914년의 세르비아 문서는 전쟁 중 손실 등으로 상대적으로 덜 온전해, 세르비아 정부가 정확히 무엇을 알았는지에 공백이 남는다.

정확한 총격 시각, 차 안에서 오간 말, 프린치프가 쓴 권총의 정확한 식별, 1917년 아피스 진술의 신빙성 등 일부 세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대중서들은 대공이 조피에게 남긴 마지막 말처럼 한 사람의 증언에서 나온 극적인 세부를 되풀이하곤 한다. 신중한 독자라면 이런 세부를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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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계기와 원인
암살은 7월 위기의 방아쇠였을 뿐, 전쟁은 더 깊은 경쟁과 여러 정부의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다민족 제국 속의 민족주의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남슬라브 민족주의는 통합을 위협했고, 지도부는 세르비아에 물러서면 다른 민족들도 들고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동맹 체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프랑스–영국 사이의 약속이 지역 분쟁을 유럽 전면전으로 키웠다.
정치 폭력과 폭군 살해
청년 보스니아는 제국 관리 암살을 정당한 저항으로 여겼는데, 이는 당시 혁명가들 사이에 흔한 생각이었다.
우연성
잘못 든 길과 멈춘 차가 총격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우연이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학자들은 논쟁한다.
엇갈리는 기억
같은 인물이 어떤 이들에게는 해방자로, 다른 이들에게는 테러리스트로 기억되며, 이는 뒤의 정치 갈등을 비춘다.

기록

  1. 1878년 — 베를린 회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
  2. 1903년 — 아피스 등 세르비아 장교들이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을 살해하고 새 왕조가 들어섬.
  3. 1908년 —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정식 병합해 국제 위기를 낳음.
  4. 1911년 — 세르비아에서 비밀결사 ‘통일 아니면 죽음(흑수단)’ 결성.
  5. 1912년 — 발칸 전쟁(1912–13)으로 세르비아 영토가 크게 늘어남.
  6. 1914년 —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 암살.
  7. 1914년 — 7월 23–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최후통첩과 선전포고. 8월 초 전면전으로 확대.
  8. 1914년 — 10월 사라예보에서 공모자 재판.
  9. 1917년 — 아피스가 테살로니키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됨.
  10. 1918년 — 4월 28일 프린치프가 테레지엔슈타트 감옥에서 사망. 가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붕괴.
  11. 1961년 — 프리츠 피셔의 책이 독일 전쟁 목표를 둘러싼 큰 논쟁을 일으킴.
  12. 2014년 — 100주년. 나라마다 크게 다른 기억이 드러남.

용어 풀이

대공(Archduke)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 구성원에게 붙이는 칭호.
추정 계승자
왕위나 제위를 이을 다음 사람. 더 가까운 계승자가 태어나면 바뀔 수 있다.
귀천상혼
왕족과 신분이 낮은 사람의 결혼. 배우자와 자녀는 왕족 칭호와 계승권을 받지 못한다.
병합
한 나라가 다른 지역을 공식적으로 자기 영토로 만드는 일.
청년 보스니아(믈라다 보스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배에 맞선 보스니아 젊은 혁명가들의 느슨한 모임.
흑수단
세르비아인을 한 나라로 통합하려던 세르비아 장교 비밀결사 ‘통일 아니면 죽음’의 별칭.
최후통첩
무력 위협을 등에 업고 시한을 정해 내미는 마지막 요구.
동원
병력을 소집하고 군대를 전쟁에 대비시키는 일.
비도브단
성 비투스 축일(6월 28일). 1389년 코소보 전투 기념일로 세르비아 기억에서 중요한 날.
7월 위기
1914년 암살에서 개전까지 이어진 한 달 동안의 외교와 결정.

묻고 답하기

운전사는 왜 길을 잘못 들었나요?

폭탄 공격 뒤 대공이 부상자를 찾아가도록 계획이 바뀌었는데, 운전사들에게 분명히 알려 주지 않았어요. 앞차들이 원래 길로 가자 대공의 차도 따라간 거예요.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몇 살이었나요?

열아홉 살이었어요. 스무 살이 안 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법으로는 사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징역 20년을 받았고, 1918년 감옥에서 숨졌어요.

세르비아가 암살을 지시했나요?

세르비아 정부 자체는 아니에요. 세르비아 군 안의 비밀결사 흑수단의 장교들이 암살자들에게 무기를 주고 도왔어요. 정부가 미리 얼마나 알았는지는 지금도 논란이에요.

정말 총 한 발이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나요?

사건의 연쇄를 시작한 것은 맞지만, 전쟁은 여러 지도자의 결정과 더 깊은 긴장, 곧 제국들의 경쟁, 동맹, 군비 경쟁, 민족주의에서 나왔어요.

많은 의례에서 배제되던 조피가 왜 함께 있었나요?

귀천상혼 때문에 조피는 빈 궁정 의례에서 자주 제외되었지만, 군 시찰 여행에서는 남편 곁에 공개적으로 설 수 있었어요.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 사람이 함께 방문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봐요.

‘전쟁 책임’ 논쟁은 어떻게 바뀌어 왔나요?

독일에 책임을 지운 베르사유 판정에서, 모든 강대국이 미끄러져 들어갔다는 견해로, 다시 독일의 목표를 강조한 피셔로, 최근에는 공동 책임과 발칸의 맥락을 강조하는 클라크 같은 연구로 바뀌어 왔어요.

그 자동차와 권총은 지금도 볼 수 있나요?

네. 부부가 총에 맞은 무개차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군복, 공모자들과 관련된 권총이 빈 군사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사라예보의 그 길모퉁이에는 표지판과 작은 박물관이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사라예보 사건. 위키백과
  2. Assassination of Archduke Franz Ferdinand. Wikipedia (영어)
  3. July Crisis. Wikipedia (영어)
  4. Young Bosnia. Wikipedia (영어)
  5. Black Hand (Serbia). Wikipedia (영어)
  6. 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몽유병자들』). Allen Lane, 2012
  7. Fritz Fischer, Griff nach der Weltmacht: Die Kriegszielpolitik des kaiserlichen Deutschland 1914/18. Droste, 1961
  8. Vladimir Dedijer, The Road to Sarajevo. Simon and Schuster, 1966
  9. Margaret MacMillan, The War That Ended Peace: The Road to 1914. Random House, 2013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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