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Idus Martiae (3월 15일, 이두스)

기원전 44년 · 로마 폼페이우스 쿠리아

한 문장으로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원로원 회의장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들은 공화정을 지키려 했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새 내전을 부르고 로마가 황제의 나라가 되는 길을 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미지: Vincenzo Camuccini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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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옛날 로마는 공화국이었어요. 왕을 두지 않고, 지도자를 1년씩 뽑았으며, 원로원이라는 중요한 사람들의 모임이 조언을 했지요. 로마 사람들은 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수백 년 전에 마지막 왕을 쫓아낸 기억 때문에 '왕'이라는 말만 들어도 화를 냈어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대부분)를 정복하고, 다른 로마 지도자들과의 내전에서도 이긴 뛰어난 장군이었어요. 그 뒤 특별한 권한을 가진 지도자인 독재관이 되었지요. 원래 독재관은 몇 달만 일하는 자리였는데, 카이사르는 평생 독재관이 되었어요. 가난한 사람들과 병사들을 도와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가 왕이 되려 한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원로원 의원 60명쯤이 비밀 계획을 세웠어요. 로마 사람들이 '3월의 이두스'라 부르던 3월 15일,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에 왔어요. 음모자들은 부탁이 있는 척 그를 둘러싸더니 옷 속에 숨긴 단검을 꺼냈어요. 카이사르는 스물세 번 찔려, 옛 경쟁자 폼페이우스의 조각상 발치에 쓰러져 죽었어요.

음모자 가운데에는 카이사르가 용서하고 믿었던 브루투스도 있었어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연극에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훨씬 뒤에 지어낸 거예요. 한 고대 작가는, 카이사르가 그리스어로 '아들아, 너도냐?'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고 전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적었어요.

음모자들은 모두가 로마를 해방했다며 고마워하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많은 평범한 로마인은 크게 분노했어요. 새 전쟁이 터졌고, 음모자들은 패배했으며,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어요. 공화정을 구하려던 계획이 결국 공화정을 끝내 버린 거예요.

한눈에 보기

날짜
기원전 44년 3월 15일, 3월의 이두스
장소
로마 캄푸스 마르티우스, 폼페이우스 극장 단지에 딸린 회의장인 폼페이우스 쿠리아(오늘날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 부근)
피해자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55세
음모자
60명이 넘는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주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약 20명
상처
스물세 군데 자상. 의사 안티스티우스에 따르면 치명상은 하나뿐
목표
왕에 가까운 카이사르의 권력을 끝내고 전통 공화정을 회복하는 것
결과
새 내전, 필리피에서 음모자들 패배(기원전 42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등장과 로마 제정
주요 사료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 플루타르코스, 수에토니우스, 아피아노스, 카시우스 디오. 키케로의 편지와 연설

쉬움

무슨 일이 있었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아침, 로마 원로원은 폼페이우스 쿠리아라는 회의장에서 모였다. 원래의 원로원 의사당은 기원전 52년에 불탔고, 카이사르가 짓고 있던 새 의사당은 아직 완공되지 않아, 카이사르의 옛 경쟁자 폼페이우스가 지은 거대한 극장 단지에 딸린 이 회의장에서 회의가 열렸다.

카이사르는 늦게 도착했다. 아내 칼푸르니아가 전날 밤 무서운 꿈을 꾸고 집에 있으라고 애원했고, 사제들의 제사에서도 불길한 징조가 나왔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믿던 음모자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집으로 찾아와 원로원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설득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가는 길에 아르테미도로스라는 그리스어 교사가 음모를 경고하는 쪽지를 건넸지만 카이사르는 읽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자리에 앉자 한 무리의 의원들이 그를 둘러쌌다.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된 형제를 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척하다가 카이사르의 토가를 어깨에서 끌어내렸다. 신호였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가 첫 칼을 찔렀다. 다른 이들이 가세했고, 혼란 속에 서로를 찌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스물세 군데 상처를 입고 폼페이우스 조각상의 받침대 아래 쓰러졌다.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의원들은 겁에 질려 달아났다. 음모자들은 단검을 치켜들고 자유를 외치며 밖으로 행진했다. 카이사르의 시신은 텅 빈 회의장에 놓여 있다가, 노예 세 사람이 가마에 싣고 집으로 옮겼다. 한쪽 팔이 가마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고 한다.

[1][7][8]

쉬움

배경: 카이사르는 어떻게 그토록 강해졌나

로마는 수백 년 동안 공화정이었다. 권력은 1년 임기로 선출되는 정무관들, 무엇보다 두 명의 집정관과, 전직 정무관들의 모임인 원로원이 나누어 가졌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509년 무렵 마지막 왕 '오만왕'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냈다고 이야기했고, 그 뒤로 왕을 뜻하는 렉스(rex)라는 말 자체가 미움을 받았다.

기원전 1세기에 이 체제는 무너져 갔다. 로마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어졌고, 충성스러운 군대를 거느린 장군들이 권력을 다투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년생)는 대중의 인기를 얻은 정치가로 떠올랐고, 기원전 58~50년 잔혹한 원정으로 갈리아를 정복했다. 원로원의 정적들이 그의 지휘권을 빼앗으려 하자, 그는 기원전 49년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정부를 상대로 내전을 일으켰다.

카이사르가 이겼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48년 이집트에서 살해되었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까지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에서 남은 폼페이우스파 군대를 물리쳤다. 그는 관용(clementia)으로 유명했다. 패한 적들을 처형하지 않고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를 비롯한 많은 이를 사면하고 관직까지 주었다.

[2][3]

쉬움

음모자들은 왜 그를 죽였나

내전 뒤 카이사르는 이전의 어떤 로마인보다 큰 권력을 쥐었다. 기원전 46년 10년 임기 독재관이 되었고, 기원전 44년 초에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 되었다. 누가 관직을 맡을지도 그가 정했다. 원로원은 그에게 전례 없는 영예를 표결했다. 황금 의자, 옛 왕들의 조각상 사이에 세운 그의 조각상,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동전에 새긴 초상, 그리고 그가 태어난 달 퀸틸리스를 율리우스(7월, July)로 바꾼 것 등이다.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두려움을 키운 사건들도 있었다. 원로원 의원들이 영예를 전하러 왔을 때 그는 앉은 채로 그들을 맞았다. 누군가 그의 조각상에 왕권의 상징인 머리띠(디아데마)를 씌웠다. 기원전 44년 2월 15일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는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공개적으로 그에게 왕관을 바쳤다. 카이사르는 거절했지만, 많은 사람이 여론을 떠보려고 꾸민 장면이라 의심했다.

카이사르는 또 3월 18일 동방의 파르티아 제국을 치러 로마를 떠날 예정이었다. 몇 년 동안 자리를 비우는 사이 그의 지지자들이 관직을 장악할 터였다. 음모자들에게는 이것이 행동할 마지막 기회였다.

동기는 여러 가지였다. 브루투스 같은 이는 공화정과, 왕들을 몰아냈다는 조상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기억에 대한 헌신에서 움직였다. 다른 이들은 카이사르가 자기 경력을 좌우하는 데 분개했거나, 지위를 잃었거나,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상당수는 카이사르가 사면한 옛 폼페이우스파였지만,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처럼 오랫동안 카이사르 밑에서 싸운 장교들도 있었다.

[1][2][7]

중급

음모자들과 계획

수에토니우스는 60명이 넘는 사람이 음모에 가담했다고 전한다. 이름이 남은 사람은 약 20명이다. 지도자는 도시 법무관으로 청렴함을 존경받던 철학자이자 정치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역시 법무관이자 노련한 군인으로 흔히 음모의 추진력으로 여겨지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카이사르가 가장 믿던 장군 가운데 하나이자 기원전 42년 집정관 예정자였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그리고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였다. 그 밖에 카스카 형제, 틸리우스 킴베르, 미누키우스 바실루스, 파르마의 카시우스 등이 있었다.

음모자들은 어디서 칠지 의논했다. '신성한 길(사크라 비아)'에서, 선거 때, 또는 원로원에서. 그들은 원로원 회의를 골랐다. 카이사르 곁에 의원들만 있을 것이고, 원로원 안에서 그를 죽이면 사사로운 살인이 아니라 통치 기구의 공적 행위로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얼마 전 히스파니아인 경호대를 해산한 상태였다.

그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죽일지 논의했다. 브루투스는 폭군만 죽어야 이 일이 파벌 숙청이 아니라 정의로 보인다고 고집했다. 그날 트레보니우스(일부 기록에서는 데키무스)가 회의장 밖에서 안토니우스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결정은 음모자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살아남은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파를 이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공화정 정치가인 웅변가 키케로는 음모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음모자들이 그의 배짱을 의심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사건 뒤 키케로는 편지와 연설에서 이 일을 뜨겁게 찬양했고, 안토니우스를 살려 둔 것만을 아쉬워했다.

[1][4][5][7]

중급

3월의 이두스: 징조, 마지막 말, 치명상

고대 작가들은 위인의 죽음에 흔히 그랬듯 이날을 징조로 둘러쌌다. 점술가 스푸린나는 카이사르에게 위험이 3월의 이두스를 넘기지 않고 닥친다고 경고했다. 수에토니우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날 카이사르가 이두스가 왔다고 농담하자 스푸린나는 왔지만 아직 지나가지는 않았다고 대답했다. 유명한 '3월 15일을 조심하라'는 셰익스피어의 표현이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은 불확실하다. 수에토니우스는 그가 첫 칼에 소리를 질렀다가, 사방에서 단검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입을 다물고 토가로 얼굴을 가린 채 옷자락을 가다듬어 단정하게 쓰러지려 했다고 쓴다. 그러면서 어떤 작가들은 브루투스가 덤벼들 때 카이사르가 그리스어로 '카이 쉬, 테크논(kai su, teknon)', 곧 '아들아, 너도냐?'라고 했다고 전한다고 덧붙인다. 플루타르코스는 칼을 뽑아 든 브루투스를 보자 그가 토가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저항을 멈추었다고 쓴다. 라틴어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는 르네상스 연극에서 나온 말로,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1599)로 유명해졌다.

수에토니우스는 의사 안티스티우스가 시신을 살펴본 결과 스물세 군데 상처 가운데 가슴에 입은 두 번째 상처 하나만 치명적이었다고 판단했다고 전한다. 이를 기록에 남은 최초의 검시 보고라 부르기도 하지만, 해부가 아니라 검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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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그 뒤: 사면, 장례, 유언장

음모자들은 자유를 선언하는 것 말고는 다음 계획이 없었다. 그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피신했다. 도시는 충격에 빠졌다. 군대는 집정관 안토니우스와, 도시 근처에서 병력을 지휘하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쥐고 있었다. 3월 17일 원로원이 모여 키케로의 지지 속에 타협안을 내놓았다. 살해자들을 사면하되, 많은 의원이 카이사르 덕분에 자리를 얻었으므로 카이사르의 모든 조치와 임명은 유효하게 둔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그는 로마 시민 한 사람마다 300세스테르티우스를 남기고 티베리스강 건너편 정원을 시민에게 주었으며, 열여덟 살 먹은 누이의 손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아들로 입양해 주 상속자로 삼았다. 포룸에서 열린 공개 장례식에서 안토니우스의 연설과 피 묻은 카이사르의 옷이 군중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장작을 쌓아 포룸 한가운데서 시신을 화장했고, 횃불을 들고 음모자들의 집을 공격하러 달려갔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곧 로마를 떠났다.

기원전 44년 7월, 카이사르를 기리는 경기 대회가 열리는 동안 밝은 혜성이 이레 동안 나타났다. 로마인들은 이를 카이사르의 영혼이 신들에게 올라간 징표로 여겼고, 이 별은 '율리우스의 별(sidus Iulium)'로 불렸다. 이제 스스로를 카이사르라 부르던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능숙하게 활용했다.

[1][7][2]

중급

결과: 새 내전과 공화정의 끝

암살은 공화정을 되살리지 못했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원로원은 처음에 서로 싸웠고, 기원전 43년 11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법으로 인정받은 3인 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정치를 세웠다. 그들은 살생부(프로스크립티오)를 내걸어 수백 명의 정적을 법 밖으로 내몰았다. 이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누구든 보는 대로 죽일 수 있었다. 키케로도 희생되어 기원전 43년 12월 7일 살해되었다.

기원전 43년 통과된 페디우스법(lex Pedia)은 카이사르의 살해자들을 단죄했다. 트레보니우스는 기원전 43년 아시아에서 살해되었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도 같은 해 갈리아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 속주에서 군대를 모으고 자신들의 거사를 기리는 동전을 찍었다. 유명한 은화 하나에는 해방 노예의 모자(필레우스)가 두 단검 사이에 있고 EID MAR, 곧 '3월의 이두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기원전 42년 10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두 차례 전투 끝에 그들을 물리쳤고, 두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암살자들 가운데 카이사르보다 3년 넘게 살았거나 제 명에 죽은 이는 거의 없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42년 1월 1일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신, 곧 '신격 율리우스(Divus Iulius)'로 선포했고, 뒤에 그의 시신을 화장한 포룸 자리에 그를 모신 신전이 세워졌다. 폼페이우스 쿠리아는 벽으로 막혔고, 3월의 이두스는 '존속 살해의 날(파리키디움)'로 불려 그날에는 다시는 원로원이 모이지 않았다.

마지막 싸움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벌어졌다.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이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고,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왕이나 독재관이라는 칭호를 조심스럽게 피했지만 영구적인 권력을 쥐었다. 음모자들이 군주정을 막으려고 죽인 사람의 상속자가 로마 제국을 연 것이다.

[1][4][7]

중급

기억: 폭군 살해인가, 살인인가

처음부터 로마인들은 이 암살의 의미를 두고 갈라졌다. 음모자들과 키케로에게 이것은 첫 브루투스의 전통을 잇는 폭군 살해, 곧 정당하고 영광스러운 행위였다. 카이사르의 병사들과 도시 빈민, 그의 상속자들에게는 자신들을 사면해 준 '조국의 아버지'를 죽인 존속 살해였다. 아우구스투스와 후대 황제들 아래에서 공식 입장은 살해자들을 단죄했지만, 1세기의 루카누스 같은 작가는 여전히 공화정의 대의에 대한 존경을 드러낼 수 있었다.

후대는 이 이야기를 계속 다시 썼다. 단테의 『지옥편』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유다와 나란히 사탄의 입에 영원히 씹히는, 주군을 배신한 자들이다. 반면 피렌체의 르네상스 공화주의자들은 브루투스를 우러러보았고, 미켈란젤로는 그의 흉상을 조각했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1599)는 브루투스를 '가장 고결한 로마인'인 비극적 이상주의자로 그렸고, '3월 15일을 조심하라', '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들이여' 같은 말을 세상에 남겼다.

근대에 들어 이 암살은 정치 폭력에 관한 논쟁의 기준점이 되었다. 18~19세기 혁명가들은 브루투스를 자유의 영웅으로 불러냈고, 다른 이들은 그 뒤의 역사를 지도자를 죽여도 목적을 이루기 어렵다는 증거로 들었다. 역사가들은 음모자들이 말한 '자유'가 주로 좁은 원로원 귀족층의 자유였고, 병사와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인기는 실제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건 현장은 로마 시내의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로 확인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발굴된 이 고고학 구역에서는 공화정 시대 신전 유적 뒤로 폼페이우스 쿠리아 일부의 기초를 볼 수 있다. 오늘날 이곳은 길고양이 보호소로도 유명하다.

[1][6][5]

심화

사료와 그 문제점

살해 장면을 직접 본 사람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가장 자세한 기록들은 반세기에서 두 세기 넘게 지난 뒤에 쓰였다. 가장 이른 것은 헤롯 대왕과 아우구스투스를 알았던 그리스 학자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가 쓴 『아우구스투스 전기』로, 기원전 1세기 말이나 기원후 1세기 초에 쓰인 듯하다. 발췌로만 전하지만 음모와 그날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있다. 그다음이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과 『브루투스 전』(100년 무렵), 수에토니우스의 『신격 율리우스 전』(120년 무렵)이다. 아피아노스의 『내전사』(2세기)와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3세기 초)는 이어지는 서술을 제공한다.

이 작가들은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당대 역사서와 리비우스의 해당 권 등 지금은 사라진 이전 저작에 기댔다. 또한 징조, 극적인 연설, 고결한 브루투스와 원한에 찬 카시우스의 도덕적 대비 같은 문학적 습관을 공유했다. 칼푸르니아의 꿈, 아르테미도로스의 쪽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같은 세부는 전해지면서 불어난 이야기의 일부이므로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진정한 당대 증거는 키케로의 글뿐이다. 특히 이두스 뒤 몇 주 동안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들과, 기원전 44~43년 안토니우스를 공격한 연설 『필리피카』가 있다. 이 글들은 살해 뒤 몇 달의 혼란과 희망과 실망을 드러내지만 한쪽 편에 선 기록이다. 브루투스를 위해 찍은 EID MAR 데나리우스 같은 동전과 폼페이우스 쿠리아의 고고학 유적이 물질 증거를 더한다.

[1][7][8]

심화

역사가들의 논쟁

카이사르는 왕이 되고 싶었나? 어떤 역사가들은 카이사르가 헬레니즘식 공개 군주정을 노렸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그가 미움받는 이름 없이 실권을 주는 독재관 자리에 만족했으며, 왕관 사건들은 지지자나 적들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려 한 일이라고 본다. 고대 사료부터 서로 엇갈리고, 종신 독재가 이미 사실상 군주였으므로 이 질문 자체가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공화정은 이미 죽어 있었나? 로널드 사임(Ronald Syme)의 『로마 혁명(The Roman Revolution)』(1939)은 공화정이 귀족 파벌들의 싸움터가 되었고 군주정이 예정된 결말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시각에서 암살은 누가 지배자가 될지만 바꾸었을 뿐이다. 다른 학자들은 우연성을 강조한다. 음모자들이 안토니우스도 죽였다면, 또는 카이사르가 파르티아로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면 사건은 다르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누가 음모를 이끌었나? 대중의 기억은 브루투스를 중심에 둔다. 배리 스트라우스(Barry Strauss)의 『카이사르의 죽음(The Death of Caesar)』(2015) 같은 최근 연구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카이사르 자신의 옛 장교들의 역할을 부각하며, 음모가 옛 폼페이우스파만이 아니라 실망한 카이사르파까지 묶었음을 보여 준다. 덜 알려진 음모자들의 동기는 대부분 알 수 없다.

카이사르는 이를 예상했나? 수에토니우스는 몸이 좋지 않던 카이사르가 더 오래 사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아 경고를 무시했다는 견해를 전한다. 경호대를 해산한 것을, 새 내전을 막으려면 원로원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자신감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해석은 결국 추측이지만, 사건을 자유의 고귀한 수호로, 근시안적인 귀족의 반동으로, 또는 모든 편이 상황을 잘못 읽은 비극으로 읽는 방식을 좌우한다.

[1][9][10]

핵심 개념

공화정
1년 임기로 선출되는 정무관과 원로원으로 이루어진 로마의 체제. 음모자들은 1인 통치로부터 이를 지키려 했다.
폭군 살해
그리스·로마 사상에서 정당하다고 여긴, 폭군을 죽이는 일. 음모자들은 스스로를 폭군 살해자로 보았다.
관용(clementia)
패한 적을 사면하는 카이사르의 정책. 지지를 얻었지만 옛 적들을 원로원에 남겼고, 그 가운데 일부가 그를 죽였다.
종신 독재관
비상 관직을 영구 권력으로 바꾼 카이사르의 전례 없는 칭호.
의도하지 않은 결과
공화정을 되살리려던 살해가 내전을 부르고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영구 군주정으로 끝났다.
기억과 신화
단테에서 셰익스피어, 근대 혁명가들까지, 이 사건은 충성·자유·폭력에 대한 변하는 생각에 맞춰 거듭 다시 이야기되었다.

기록

  1. 기원전 49년 —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을 상대로 내전을 시작한다(기원전 49년).
  2. 기원전 48년 —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에서 패하고 이집트에서 살해된다(기원전 48년).
  3. 기원전 46년 — 카이사르가 10년 임기 독재관이 된다(기원전 46년).
  4. 기원전 44년 —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되고(기원전 44년 초), 2월 15일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바친다.
  5. 기원전 44년 —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쿠리아에서 암살되고, 3월 17일 원로원이 살해자들을 사면한다.
  6. 기원전 44년 — 기원전 44년 7월, 카이사르를 기리는 경기 중 나타난 혜성이 그의 영혼의 승천으로 받아들여진다.
  7. 기원전 43년 —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하고 살생부 숙청이 시작되며, 키케로가 살해된다(기원전 43년).
  8. 기원전 42년 — 카이사르가 1월 1일 신격 율리우스로 신격화되고, 10월 필리피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패해 죽는다(기원전 42년).
  9. 기원전 31년 —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다(기원전 31년).
  10. 기원전 27년 —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받고 원수정이 시작된다(기원전 27년).
  11. 약 121년 — 수에토니우스가 암살에 관한 핵심 기록인 『신격 율리우스 전』을 쓴다.
  12. 1599년 —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가 런던에서 초연된다.

용어 풀이

이두스(Idus)
로마 달력에서 달의 한가운데 날. 3·5·7·10월은 15일, 나머지 달은 13일이다.
원로원
전직 정무관들로 이루어진 로마의 회의체. 정무관에게 조언했고 큰 권위를 지녔다.
독재관
본래 최대 6개월 동안 최고 권한을 갖는 임시 비상 정무관.
쿠리아
원로원이 모이던 건물.
집정관
로마 공화정에서 해마다 두 명씩 뽑는 최고 정무관.
법무관
집정관 아래의 고위 정무관으로 주로 사법을 맡았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법무관이었다.
살생부(프로스크립티오)
법 밖으로 내몬 사람들의 이름을 공개 게시하는 것. 이들의 재산은 몰수되고 누구든 죽일 수 있었다.
삼두정치
세 사람이 권력을 나누는 체제.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레피두스의 제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43년 법으로 세워졌다.
신격화
어떤 사람이 신이 되었다고 공식 선포하는 것. 카이사르는 국가가 신격화한 첫 로마 지도자였다.
해방자들(Liberatores)
음모자들이 스스로를 부른 이름.

묻고 답하기

왜 '3월의 이두스'라고 하나요?

로마인들은 몇몇 달의 한가운데 날을 이두스라고 불렀어요. 3월에는 15일이었고, 바로 카이사르가 죽은 날이에요.

카이사르가 정말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했나요?

그렇게 전하는 고대 사료는 없어요. 수에토니우스는 그가 그리스어로 '아들아, 너도냐?'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말도 있다고 전해요. 라틴어 문구는 셰익스피어 덕분에 유명해졌어요.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나요?

거의 확실히 아니에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와 오랜 연인 관계였던 탓에 뒷소문이 났지만, 브루투스가 태어났을 때 카이사르는 겨우 열다섯 살 무렵이었어요.

몇 명이 카이사르를 죽였나요?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60명이 넘는 원로원 의원이 음모에 가담했고, 여럿이 그를 찔렀어요. 그는 스물세 군데 상처를 입었어요.

암살로 로마 공화정이 살아났나요?

아니요. 더 많은 내전이 일어났고, 음모자들이 패했으며, 첫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로 이어졌어요.

카이사르는 정확히 어디서 살해되었나요?

포룸의 원로원 의사당이 아니라 폼페이우스 극장 단지에 딸린 폼페이우스 쿠리아에서요. 그 유적은 로마의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에 있어요.

징조와 경고 이야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극적인 운명의 징조를 좋아한 1~3세기 작가들에게서 나온 이야기예요. 실제 소문을 반영했을 수도 있지만, 역사가들은 사실이라기보다 문학 전통으로 다뤄요.

키케로도 가담했나요?

아니요. 음모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사건 뒤 열렬히 환영했고, 이후 원로원의 안토니우스 반대를 이끌다 목숨을 잃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Assassination of Julius Caesar. Wikipedia
  2. Julius Caesar. Wikipedia
  3. 율리우스 카이사르. 위키백과
  4. Liberatores. Wikipedia
  5. Marcus Junius Brutus. Wikipedia
  6. Curia of Pompey. Wikipedia
  7. Suetonius, The Lives of the Caesars: Julius (trans. Alexander Thomson).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8. Plutarch, Life of Caesar (Loeb translation by Bernadotte Perrin). LacusCurtius (Bill Thayer), University of Chicago
  9. Ronald Syme, The Roman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9
  10. Barry Strauss, The Death of Caesar: The Story of History’s Most Famous Assassination. Simon & Schuster, 201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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