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먼 옛날, 그리스 말을 쓰는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의 왕들이 바닷가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를 다스렸어요. 왕들은 자기 도시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서, 찾을 수 있는 책을 모조리 모으기로 했지요.
그때 책은 지금 우리 책과 달랐어요. 나일강가에서 자라는 풀로 만든 종이, 파피루스를 길게 이어 붙여 둘둘 만 두루마리였거든요. 긴 책 한 권이 두루마리 여러 개를 차지했고, 도서관은 이 두루마리들을 선반이나 장에 보관했어요.
왕은 학자들에게 월급을 주고 도서관 가까이에서 살게 했어요. 학자들은 공짜로 밥을 먹으며 마음껏 공부했어요. 책 목록을 만들고, 옛 시에 섞인 틀린 글자를 고치고, 지구의 크기를 재고, 별과 사람 몸을 연구했지요.
이런 이야기도 전해져요. 배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들어오면 왕의 부하들이 배에 실린 책을 가져가 베낀 다음, 원본은 도서관에 두고 주인에게는 베낀 책을 돌려주었대요! 조금 부풀려진 이야기일 수 있지만, 왕들이 얼마나 책에 욕심을 냈는지 잘 보여 줘요.
많은 사람이 도서관이 큰불 한 번에 몽땅 타 버렸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번 피해를 입고, 돈과 평화와 학자들이 사라지면서 수백 년에 걸쳐 조금씩 사라졌어요. 지금 알렉산드리아에는 옛 도서관을 기리는 새 도서관,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나가 서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 설립
- 기원전 3세기 초. 프톨레마이오스 2세(재위 기원전 283~246) 때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큼. 1세가 계획했을 수도 있음
- 위치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왕궁 구역(브루케이온), 무세이온의 일부. 정확한 자리는 모름
- 후원자
- 이집트를 다스린 마케도니아계 그리스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소장품
- 파피루스 두루마리. 고대 기록의 숫자는 약 4만~70만 권으로 제각각이며 확인할 수 없음
- 대표 학자
- 제노도토스, 칼리마코스,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에라토스테네스, 비잔티온의 아리스토파네스,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코스
- 분관
-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부터 세라피스 신전(세라페움)에 둔 두 번째 장서
- 소멸
- 서서히 쇠퇴. 기원전 48년 화재 피해, 기원후 270년대 전란 때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큼. 세라페움은 391년 철거
- 유산
- 후대 도서관과 문헌 교정 학문의 본보기. 2002년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나로 상징적으로 부활
쉬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어떤 곳이었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이집트를 다스린 마케도니아계 그리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왕실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이 있던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1년 이집트 지중해 연안에 세운 항구 도시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 도서관은 오늘날의 공공도서관처럼 따로 떨어진 건물이 아니었다. ‘무사 여신들의 전당’이라는 뜻의 무세이온이라는 더 큰 왕립 기관의 일부였다. 무사(뮤즈)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들이며, 영어 museum도 이 말에서 나왔다. 무세이온에는 왕에게서 봉급을 받으며 함께 식사하고 연구하는 학자 공동체가 있었고, 도서관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목표는 당시로서는 놀라울 만큼 컸다. 그리스어로 된 모든 책, 그리고 후대 기록에 따르면 다른 민족의 중요한 저작까지 모으려 했다. 실제로 두루마리가 몇 권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큰 장서였던 것은 분명하며, 이곳 학자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그리스 문학과 과학을 연구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도서관에 대해 확실한 것은 매우 적다. 자세한 고대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고고학자들이 도서관 건물로 확정한 유적도 없으며, 유명한 일화 상당수는 수백 년 뒤에 기록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공부하는 일은 역사학자가 증거와 전설을 가려내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쉬움
어떻게 운영되었나: 두루마리, 서가, 책에 대한 욕심
고대의 책은 파피루스에 손으로 쓴 것이었다. 파피루스는 나일강가에 흔한 갈대 모양 식물의 속을 얇게 켜서 붙여 만든 필기 재료로, 여러 장을 이어 긴 두루마리로 만들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같은 긴 작품은 두루마리 여러 개를 차지했고, 글을 두루마리 하나에 들어가는 ‘권’으로 나누는 일도 사서의 몫이었다. 파피루스의 산지를 쥔 이집트는 책을 모으는 데 크게 유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은 적극적으로 책을 사들였다. 왕의 대리인들이 아테네와 로도스 같은 책 시장을 돌았다고 한다. 2세기의 의사 갈레노스는 왕명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오는 배에서 발견된 책을 가져다 베끼고, 원본은 ‘배에서 온 것’이라는 표시를 붙여 도서관에 두었다고 전한다. 또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아테네 공인본을 담보금 15탈란톤을 걸고 빌린 뒤, 원본은 돌려주지 않고 사본을 보내며 담보금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학자들은 오래된 사본일수록 저자가 쓴 원래 글에 가깝다고 보아 귀하게 여겼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여러 도시에서 온 사본을 모아 출처를 표시해 두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책에서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정리가 필요했다. 기록상 첫 도서관장인 제노도토스는 저자 이름의 첫 글자에 따라 알파벳 순으로 책을 배열한 것으로 보이며, 시인이자 학자인 칼리마코스는 『피나케스』(‘목록표’)를 만들었다. 모두 120권에 이르는 이 목록은 저자를 갈래별로 나누고 짧은 전기와 작품 목록을 붙였으며, 흔히 이런 종류의 최초의 도서관 목록으로 불린다.
쉬움
무세이온의 학자들
기원전 20년 무렵 이곳을 찾은 지리학자 스트라본에 따르면, 무세이온의 학자들은 공동 식당과 거닐며 토론하는 회랑을 갖춘 공동체를 이루었고, 왕이 임명한 사제가 이들을 이끌었다. 학자들은 봉급과 무료 숙식을 받았다. 풍자 시인 플리우스의 티몬은 이들을 ‘무사 여신들의 새장’에서 배불리 먹으며 다투는 책벌레라고 비꼬았다.
도서관장은 왕이 임명한 학자로, 왕세자의 스승을 겸하는 일이 많았다. 전통적인 관장 목록에는 호메로스 교정본을 만든 에페소스의 제노도토스, 서사시 『아르고나우티카』를 쓴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이집트의 두 장소에서 햇빛의 각도를 비교해 지구 둘레를 추산한 키레네의 에라토스테네스, 그리스어 강세 부호와 운문 배열법 발전에 기여한 비잔티온의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고대 최고의 호메로스 연구자로 꼽힌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코스가 들어 있다.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수학자, 천문학자, 의사도 활동했다. 의사 헤로필로스는 해부를 포함한 인체 연구를 했고,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도 전통적으로 이 도시에서 가르쳤다고 전한다. 이들과 도서관의 관계가 늘 분명하지는 않지만, 왕실의 장서와 후원 덕분에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2세기 그리스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중급
설립: 왕, 철학자, 그리고 지식의 정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장군들이 제국을 나누어 가졌다. 라고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차지하고 기원전 305년 스스로 왕(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이 되었다. 다른 헬레니즘 왕들처럼 그도 그리스인이 아닌 주민 다수를 다스리면서 경쟁 왕조들과 위신을 겨루었다. 문화 후원은 왕권의 일부였다. 큰 도서관은 부를 과시하고 인재를 끌어들이며, 왕조가 그리스 문명의 상속자임을 내세우는 수단이었다.
설립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2세기 무렵 유대인이 그리스어로 쓴 것으로 보이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다.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출신의 아테네 정치가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가 왕에게 세상의 모든 책을 모으라고 권했고, 유대 장로 72명이 도서관을 위해 히브리어 율법을 그리스어로 옮겼다고 전한다. 칠십인역(셉투아긴타)의 기원 전설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번역을 영광스럽게 꾸미려고 한참 뒤에 쓰였고 왕들의 재위도 뒤섞여 있어 믿을 만한 역사 기록은 아니다.
오늘날 역사학자 대부분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어쩌면 데메트리오스의 조언을 받아 책을 모으고 기관을 구상했을 수는 있지만, 도서관과 무세이온이 실제 기관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재위 기원전 283~246) 때라고 본다. 자체 장서를 갖추고 모든 지식을 체계화하려 한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 학원(리케이온)이 중요한 본보기였을 것이다.
근동에도 앞선 사례가 있었다. 니네베에 있던 아시리아 왕들의 거대한 점토판 문서고가 대표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이 이를 의식적으로 본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이 세상의 지식을 모은다는 발상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새로웠던 것은 그 규모, 그리고 도서관에 딸린 봉급 받는 학자 공동체였다.
중급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생겼을까
도서관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동쪽 항구 가까이의 왕궁 구역인 브루케이온에 있었다. 스트라본은 무세이온에 회랑(페리파토스), 좌석이 있는 반원형 공간(엑세드라), 학자들의 공동 식당이 있는 큰 건물이 있었다고 적었지만, 도서관 자체는 묘사하지 않았다. 후대 작가들은 웅장한 홀을 상상했지만, 설계도를 전하는 고대 기록은 없다.
고대 도서관은 대개 주랑에 면한 방의 벽감이나 나무 장에 두루마리를 보관했고, 독자는 두루마리를 밝은 곳으로 가지고 나가 읽었다. 알렉산드리아도 비슷했으리라고 추정할 수는 있지만, 이는 페르가몬 도서관 같은 다른 유적에서 끌어낸 추론이지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기록은 아니다.
고고학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 고대 왕궁 구역은 현대 도시 아래, 그리고 고대 이후 해안이 가라앉으면서 일부는 바닷속에 있다. 폴란드 조사단이 콤 엘딕카에서 발굴한 후기 고대의 강의실 유적은 알렉산드리아가 오랫동안 교육의 도시였음을 보여 주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도서관보다 수백 년 뒤의 것이다. 세라페움 유적의 일부 방을 분관의 서고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복원도, 그림, 영화는 조심해서 보아야 한다. 모두 근거 있는 추측일 뿐이며, ‘어떻게 생겼나?’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은 ‘모른다’이다.
중급
무엇을, 얼마나 소장했나
장서의 중심은 그리스 문헌이었다. 서사시, 연극, 서정시, 역사, 철학, 의학, 수학, 천문학이 모두 포함되었다. 특히 호메로스, 비극·희극 작가, 서정 시인의 작품을 깊이 연구해 정본을 만들었고, 이 정본이 그리스와 이후 로마 세계 곳곳에서 필사되었다. 오늘날 전하는 그리스 고전의 본문 상당수는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의 교정본과 주석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리스 밖의 저작에도 관심이 있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가 전하는 히브리 성서 번역 외에도, 초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래서 이집트 사제 마네톤이 그리스어로 이집트 역사를 썼고, 셀레우코스 왕조 궁정에서는 바빌로니아 사제 베로소스가 바빌로니아 역사를 썼다. 다만 도서관이 이집트어나 다른 언어의 문헌을 실제로 얼마나 소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숫자는 악명 높은 난제다. 고대와 비잔티움 작가들은 4만에서 70만 권까지 다양한 숫자를 남겼다. 후대 로마 작가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70만 권이 불탔다고 했고, 12세기 비잔티움 학자 요안네스 체체스는 왕궁 도서관과 세라페움 장서의 수를 따로 적었다. 한 작품이 여러 두루마리를 차지했고 이 숫자들이 한참 뒤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 집계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많은 역사학자는 수만에서 수십만 권 정도의 장서라면 그럴듯하다고 본다.
알렉산드리아에는 경쟁자도 있었다.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왕국 아탈로스 왕조가 기원전 2세기에 큰 도서관을 세웠다.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바로의 말을 빌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파피루스 수출을 막자 페르가몬이 양피지를 개발했다고 전한다(양피지를 뜻하는 영어 parchment가 페르가몬에서 나왔다). 양피지는 그보다 먼저 쓰였으므로 이 이야기는 기껏해야 단순화지만, 왕실 도서관들 사이의 경쟁은 실제로 있었다.
중급
쇠퇴와 파괴: 한 번의 불이 아닌 여러 번의 타격
첫 번째 큰 타격은 정치에서 왔다. 기원전 145년 권력을 잡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반대파를 숙청하자 학자들도 도시를 떠났다. 도서관장 아리스타르코스는 키프로스로 떠났고, 디오니시오스 트락스 같은 제자들은 다른 곳에서 가르쳤다. 이후 도서관장 자리는 때때로 학자가 아닌 측근에게 돌아갔고, 알렉산드리아의 지도적 위상도 약해졌다.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와 그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내전에 끼어들어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항구의 배들에 불을 질렀다. 불은 부두 가까운 건물로 번졌다. 무엇이 탔는지는 후대 작가마다 다르게 전한다. 세네카는 리비우스를 인용해 책 4만 권을, 플루타르코스는 ‘큰 도서관’이 불탔다고 하고, 카시우스 디오는 부두 근처의 곡물 창고와 책 창고를 언급한다. 스트라본이 약 20년 뒤 무세이온을 방문했고 학자들도 계속 활동했으므로, 많은 역사학자는 항구 근처에 보관된 책은 사라졌지만 기관으로서의 도서관은 살아남았다고 본다.
로마 지배 아래서도 무세이온은 이어졌지만, 황제들은 학자가 아닌 사람에게 명예직으로 회원 자격을 주기도 했다. 무세이온 회원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기원후 260년대의 것이다. 272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여왕 제노비아의 군대로부터 알렉산드리아를 되찾는 과정에서 브루케이온이 황폐해졌고, 297~298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포위전으로 더 큰 파괴가 이어졌다. 본관에 남아 있던 것이 무엇이든 이 전쟁들을 넘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부터 분관 장서를 두었던 세라피스 대신전, 세라페움은 더 오래 버텼다. 391년 이교 제사를 금한 황제의 법령과 도시 안 이교도·그리스도교도의 폭력 충돌 끝에, 주교 테오필로스의 주도로 신전이 철거되었다. 그때까지 상당한 장서가 남아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철거를 전하는 기록들은 주로 신전과 신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급
도서관의 최후를 둘러싼 신화
도서관이 잃어버린 모든 지식의 상징이 되면서, 그 최후는 흔히 한 번의 극적인 범죄로 이야기되었고, 시대마다 카이사르, 그리스도교도, 무슬림 등 서로 다른 ‘범인’이 지목되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랍 정복을 탓한다. 알렉산드리아는 641~642년 아므르 이븐 알아스의 군대에 항복했다. 1200년 무렵과 그 뒤의 작가들, 곧 압드 알라티프 알바그다디, 이븐 알키프티, 바르 헤브라이우스 등은 칼리프 우마르가 “책이 쿠란과 일치하면 필요 없고, 어긋나면 해롭다”며 책을 없애라고 명했고, 그 책들이 여섯 달 동안 목욕탕의 땔감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복 당시에 가까운 기록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 18세기 에드워드 기번 이래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이를 전설로 보며, 파티마 왕조의 카이로 궁정 도서관이 해체되어 팔려 나간 아이유브 왕조 시기에 이 이야기가 생겨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하나의 현대 신화는 415년 그리스도교도 폭도에게 살해된 수학자·철학자 히파티아를 도서관과 엮는다. 그녀의 죽음은 실제로 일어난 참혹한 사건이지만, 그녀는 자기 학교에서 가르쳤고, 도서관 사서였다거나 그때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도서관이 남아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연결은 칼 세이건의 텔레비전 시리즈 『코스모스』(1980) 같은 현대 작품을 통해 널리 퍼졌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덜 극적이지만 근거가 탄탄한 설명을 선호한다. 왕실 후원의 상실, 정치적 폭력, 전쟁 피해, 그리고 계속 다시 베끼지 않으면 썩어 버리는 파피루스의 성질 때문에 도서관은 수백 년에 걸쳐 쇠퇴했다. 지식은 불에 타서만이 아니라 방치되어서도 사라졌다.
중급
유산: 알렉산드리아 학문에서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나까지
도서관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방법이다.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사본들을 비교하고, 의심스러운 행에 비평 부호를 달고, 어려운 낱말과 암시를 풀이하는 주석을 쓰고, 표준 교정본을 만들었다. 이것이 본문 비평과 문헌학의 뿌리이며, 후대 학자들은 이 방법을 성서와 라틴 고전, 그리고 훨씬 뒤에는 여러 언어의 문헌에 적용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연구된 지식의 상당 부분은 다른 곳에서 필사되었기에 살아남았다. 로마와 비잔티움의 도서관, 카이사레아 같은 그리스도교 학문 중심지, 그리고 무엇보다 9세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그리스 과학과 철학을 시리아어와 아랍어로 옮긴 번역 운동이 그 통로였다. 12세기부터 이 저작들 상당수가 라틴 유럽에 전해졌다. 알렉산드리아 장서의 상실은 실제였지만, 고대 학문의 생존은 한 도서관이 아니라 수많은 도서관에 달려 있었다.
근대에 들어 이 도서관은 보편적 지식, 그리고 전쟁과 방치 앞에서 지식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이집트는 유네스코와 여러 나라의 지원을 받아 고대 왕궁 구역으로 추정되는 곳 가까이에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나를 세웠다. 노르웨이 건축사무소 스노헤타가 설계한 이 도서관은 2002년 문을 열었고, 도서관이자 박물관 단지, 연구 센터로 쓰인다.
심화
학계의 논쟁과 열린 질문
누가, 언제 세웠나? 사료는 늦고 편향되어 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와 후대 전승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를 내세우지만, 다른 고대 기록과 현대 역사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강조한다. 데메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즉위하면서 총애를 잃었다고 전하므로, 그가 도서관을 조직했다는 설은 의심받는다. 다만 초기 수집을 도왔을 가능성은 있다. 도서관장들의 연대는 주로 단편적인 파피루스 목록(P.Oxy. 1241)과 비잔티움의 사전류에 기대고 있으며,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얼마나 컸나? 로저 배그널은 높은 숫자들이 기원전 3세기에 존재했던 그리스 저자와 작품의 수로 볼 때 맞지 않으며, 고대의 총계는 자료가 아니라 위대함을 말하는 수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여러 사본과 판본을 포함한 큰 장서라면 수십만 권에 이를 수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하나의 숫자보다 고대 통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있다.
카이사르의 불은 무엇을 태웠나? 세네카(리비우스 인용),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등의 증언은 표현도 필사본도 서로 다르다. 기원전 48년에 본관이 불탔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학자들의 활동이 이어졌고 스트라본이 방문한 점을 들어 항구 근처 창고의 책만 사라졌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로마 시대에 도서관이 복구되었는지, 그 장서가 세라페움이나 황제 숭배 건물에 딸린 다른 도서관과 어떤 관계였는지도 함께 논의된다.
지적 성격은 어떠했나? 학자들이 왕에게 의존했고 추방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왕실 선전과 통제의 도구였음을 강조하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알렉산드리아 과학과 학문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시각도 있다. 최근 연구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 문화와 이집트 문화가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보편’ 도서관이 실제로는 압도적으로 그리스적이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심화
증거와 연구 방법
문헌 사료. 핵심 증거는 흩어진 구절들이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무세이온을 묘사한 스트라본의 『지리지』, 책 수집에 관한 갈레노스의 일화, 파괴에 관한 세네카·플루타르코스·아울루스 겔리우스·카시우스 디오·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 체체스 같은 비잔티움 학자, 그리고 훨씬 뒤의 아랍어 작가들이 있다. 대부분 사건으로부터 수백 년 떨어져 있고 도덕적·수사적 목적으로 쓰였으므로, 각 기록의 시기, 장르, 의도를 따져 읽어야 한다.
학문을 통한 간접 증거.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의 작업은 주로 간접적으로 남아 있다. 특히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의 중세 필사본 여백에 적힌 주석(스콜리아)이 제노도토스,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타르코스의 독법을 인용한다. 이집트, 특히 옥시링코스에서 나온 파피루스는 이집트의 그리스어 사용 도시들에서 어떤 글이 읽혔는지 보여 주며, 때로는 알렉산드리아식 교정 부호를 담고 있다.
고고학.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지형은 빽빽한 현대 도시 속의 제한된 발굴, 항구의 수중 조사, 스트라본 같은 기록을 통해 재구성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도서관으로 확정된 건물은 아직 없으므로, 그 건축에 관한 주장은 모두 가설이다.
역사 서술사. 르네상스 이래 도서관은 종교, 제국, 문명에 관한 논쟁에서 상징으로 쓰였다. 따라서 도서관의 역사는 도서관이 어떻게 기억되었는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누가 어떤 파괴 이야기를 왜 했는지 살피는 일 자체가 증거의 일부다.
핵심 개념
- 보편 도서관
- 적어도 그리스 문헌 전체, 나아가 세상의 모든 기록을 한곳에 모으려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야망.
- 무세이온
- 도서관이 속한 무사 여신들의 왕립 기관. 왕의 후원을 받는 봉급 학자들의 공동체였다.
- 왕실 후원
- 학문은 왕의 돈과 호의에 달려 있었다. 후원이 끊기거나 적대로 바뀌면 학문도 흔들렸다.
- 본문 비평
- 여러 사본을 비교해 가장 믿을 만한 본문을 확정하는 방법.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발전시켰고 지금도 쓰인다.
- 목록화
- 칼리마코스의 『피나케스』처럼 방대한 장서를 저자, 갈래,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는 일.
- 점진적 쇠퇴
- 도서관은 한 번의 화재가 아니라 숙청, 전쟁 피해, 재정 상실, 파피루스의 부식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 잃어버린 지식의 상징
- 고대부터 도서관은 상징으로 쓰였고, 그 최후는 여러 집단을 비난하는 이야기로 거듭 고쳐 쓰였다.
기록
- 기원전 331년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 해안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운다(기원전 331년).
- 기원전 305년 —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 왕을 칭한다(기원전 305년).
- 약 기원전 295년 —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가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전승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책 수집을 권한다.
- 기원전 283년 —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가 단독 통치를 시작한다(기원전 283년). 도서관과 무세이온은 그의 치세에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 약 기원전 246년 —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 세라페움에 분관이 생기고, 이 무렵 에라토스테네스가 도서관장이 된다.
- 기원전 145년 —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숙청으로 아리스타르코스 등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를 떠난다(기원전 145년).
- 기원전 48년 —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되었을 때 항구에서 번진 불로 책이 불탄다(기원전 48년).
- 약 기원전 20년 — 스트라본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해 무세이온을 기록한다(기원전 20년 무렵).
- 272년 — 아우렐리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되찾는 전투에서 도서관이 있던 왕궁 구역이 황폐해진다.
- 391년 — 주교 테오필로스의 주도로 세라페움이 철거된다.
- 642년 — 아므르 이븐 알아스의 아랍군이 알렉산드리아를 차지한다. 훨씬 뒤의 기록은 칼리프가 책을 태우게 했다고 전한다.
- 2002년 — 현대 알렉산드리아에 비블리오테카 알렉산드리나가 문을 연다.
용어 풀이
- 파피루스
- 파피루스 풀의 속을 켜서 붙여 만든 필기 재료. 고대 지중해 세계의 주된 책 재료였다.
- 두루마리
- 길게 말린 형태의 책.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풀어 가며 읽는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기원전 305년부터 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마케도니아계 그리스 왕조. 클레오파트라 7세로 끝났다.
- 헬레니즘
-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뒤 그리스인이 다스린 왕국들의 시대와 문화(기원전 323~31년).
- 무세이온
- 무사 여신들의 전당.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도서관을 포함한 왕립 연구 기관을 가리킨다.
- 세라페움
- 그리스·이집트 혼합 신 세라피스의 알렉산드리아 신전. 도서관의 분관이 있었다.
- 『피나케스』
- 칼리마코스가 만든 120권짜리 그리스 저자·작품 목록. 지금은 단편만 전한다.
- 스콜리아
- 필사본 여백에 적힌 주석. 고대 학자들의 견해를 전하는 경우가 많다.
- 문헌학
- 텍스트와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 본문을 교정하고 뜻을 풀이하는 일을 포함한다.
- 칠십인역
-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히브리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
묻고 답하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큰불 한 번에 다 타 버렸나요?
아니에요. 기원전 48년 화재로 책이 불탔지만 도서관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커요. 수백 년에 걸쳐 쇠퇴했고 기원후 270년대 전쟁 때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세라페움의 분관은 391년 신전이 철거되면서 끝났어요.
책이 몇 권이나 있었나요?
아무도 몰라요. 고대 작가들은 4만에서 70만 권까지 다양한 숫자를 남겼지만, 모두 늦게 기록되어 믿기 어렵고, 한 작품이 두루마리 여러 개를 차지하기도 했어요.
아무나 들어가서 책을 읽을 수 있었나요?
왕의 후원을 받는 학자들을 위한 왕실 도서관이었지, 오늘날 같은 공공도서관은 아니었어요. 외부인이 얼마나 이용할 수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요.
642년 무슬림이 도서관을 파괴했나요?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 이야기는 정복으로부터 500년도 더 지난 1200년 무렵 이후의 작가들에게서 처음 나타나며, 본관은 그보다 훨씬 전에 사라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히파티아가 마지막 사서였나요?
아닙니다. 히파티아는 415년 살해된 존경받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였지만, 도서관에서 일했다는 증거는 없고, 그 무렵 도서관은 이미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고학자들이 도서관 유적을 찾았나요?
확실하게는 아닙니다. 왕궁 구역은 현대 알렉산드리아 아래와 일부 바닷속에 있고, 도서관으로 확정된 건물은 아직 없습니다.
배에서 책을 가져갔다는 일화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역사학자들이 경계하는 이유는?
갈레노스처럼 수백 년 뒤의 작가가 왕들의 열성을 보여 주려고 전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정책을 반영했을 수는 있지만 세부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위키백과
- Library of Alexandria. Wikipedia
- 무세이온. 위키백과
- Letter of Aristeas. Wikipedia
- Pinakes. Wikipedia
- Bibliotheca Alexandrina. Wikipedia
- Lionel Casson, Libraries in the Ancient World. Yale University Press, 2001
- P. M. Fraser, Ptolemaic Alexandria. Clarendon Press, Oxford, 1972
- Roger S. Bagnall, Alexandria: Library of Dreams.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2002
- Roy MacLeod (편), The Library of Alexandria: Centre of Learning in the Ancient World. I. B. Tauris, 2000
함께 보기
-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 리케이온을 세우고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자연학을 두루 저술했다.
- 호메로스그리스 문학의 출발점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가로 전해지는 시인. 한 사람이 두 작품을 모두 지었는지는 논쟁 중이다.
- 지혜의 집아바스 왕조 시대 바그다드의 장서와 번역 활동에 연관된 이름이다.
- 가우가멜라 전투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물리친 전투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한 사건이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