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그리스 북쪽의 작은 마을 스타게이로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아이가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을 돌보는 의사였지요. 열일곱 살이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큰 도시 아테네로 가서 유명한 선생님 플라톤의 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무려 20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이 궁금했어요. 바닷가에서 문어와 물고기를 관찰하고, 달걀을 하루하루 깨 보며 병아리가 어떻게 자라는지 살피고, 본 것을 꼼꼼히 적었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그는 장난감을 색깔과 크기별로 정리하듯, 온 세상을 차곡차곡 나누어 정리하고 싶어 했어요.
몇 년 동안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쳤어요. 이 소년이 자라서 거대한 제국을 세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되었지요.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자기 학교를 열었어요. 그와 학생들은 지붕 덮인 산책길을 걸으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해서 ‘걷는 사람들(소요학파)’이라는 별명을 얻었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악기 연주나 운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연습할수록 잘하게 되니까요. 용감한 행동을 자꾸 하면 용감한 사람이 되고, 정직하게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정직한 사람이 돼요. 또 좋은 것은 대개 가운데에 있다고 했어요. 용기는 겁쟁이와 무모한 사람 사이에 있다는 거지요.
아리스토텔레스도 틀린 적이 있어요. 나중에 과학자들이 잘못이라고 밝힌 생각도 있었지요. 그래도 그는 차근차근 생각하는 법을 세상에 가르쳐 주었고, 거의 2,000년 동안 유럽과 중동의 학자들은 그를 그냥 ‘철학자’라고 불렀답니다.
한눈에 보기
- 생몰
-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22년
- 출생지
- 칼키디케 반도의 스타게이로스(그리스 북부, 당시 마케도니아 왕국 인근)
- 사망지
- 에우보이아섬의 칼키스
- 언어
- 고대 그리스어
- 스승 / 제자
- 약 20년간 플라톤에게 배움, 어린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침, 동료이자 후계자 테오프라스토스
- 학교
- 아테네의 리케이온(기원전 335년경 설립, 구성원을 소요학파라 부름)
- 현존 저작
- 논리학·자연학·생물학·형이상학·윤리학·정치학·수사학·시학에 걸친 약 30편의 논고(대부분 강의 노트)
- 후대의 호칭
- 중세 라틴 세계의 ‘그 철학자’, 아랍 철학의 ‘제1스승’
쉬움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다. 소크라테스를 따른 플라톤의 제자였으며, 이 세 사람은 흔히 서양 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의 좁은 의미의 철학자에 그치지 않았다. 논리학, 물리학, 천문학, 기상학, 동물학, 영혼론,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시학까지 두루 썼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학문 분야로 정리되었다.
그가 특별했던 까닭은 방법에 있다. 그는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생각과 꼼꼼한 관찰에서 출발해, 그 안에 담긴 난제를 늘어놓고 한 걸음씩 분명한 답을 향해 나아갔다. 사실을 모으는 규모도 대단했다. 수백 종의 동물을 기술했고,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 도시 158곳의 정치 제도를 수집했다.
그의 영향은 놀랄 만큼 오래갔다. 그의 저작은 그리스어·시리아어·아랍어·히브리어·라틴어로 연구되었고, 바그다드·코르도바·파리·옥스퍼드의 학자들은 수백 년 동안 이를 고등 학문의 토대로 삼았다. ‘범주’, ‘에너지’, ‘실체’, ‘논리’ 같은 말도 그의 용어나 그 번역어에서 비롯되었다.
쉬움
생애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칼키디케 반도의 작은 그리스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필리포스 2세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3세의 궁정 의사였다. 부모를 일찍 여읜 그는 프록세노스라는 후견인의 손에서 자랐다.
기원전 367년 무렵, 열일곱 살쯤 되었을 때 그는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학생으로, 나중에는 연구자이자 교사로 약 20년을 머물렀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자 아테네를 떠나 소아시아의 아소스에서 통치자 헤르미아스의 궁정에 몇 해 머물며 그의 친척 피티아스와 결혼했고, 이어 레스보스섬으로 옮겼다. 여기서 젊은 동료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바다 생물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43년 무렵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열세 살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그에게 맡겼다. 그가 왕자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믿을 만한 기록이 거의 없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된 뒤인 기원전 335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공공 체육장에 자신의 학교를 열고 약 12년간 가르치며 저술했다. 피티아스가 죽은 뒤에는 아들 니코마코스의 어머니인 헤르퓔리스와 함께 살았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아테네에서 반(反)마케도니아 감정이 터져 나왔고, 마케도니아와 가까웠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불경죄로 고발될 위기에 놓였다고 전한다. 그는 어머니 집안의 땅이 있던 에우보이아섬의 칼키스로 물러났고, 이듬해인 기원전 322년 예순둘쯤의 나이로 그곳에서 죽었다. 후대 전기에 전하는 그의 유언장에는 자녀와 동반자를 돌보라는 당부와 함께 일부 노예를 해방하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중급
시대 배경: 폴리스에서 제국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환기를 살았다. 그가 젊었을 때 아테네·스파르타·테바이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는 여전히 독립적으로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 동안 그리스 세계 북쪽 변두리의 왕국 마케도니아가 떠올라 이들을 제압했다.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아테네와 테바이를 꺾었고,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며 이집트·중앙아시아·인더스강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그의 처지에는 묘한 긴장이 있다. 그는 아테네에서 시민권 없는 거류 외국인(메토이코스)이었지만, 그의 정치철학은 스스로 다스리는 도시를 중심에 둔다. 『정치학』은 폴리스가 인간이 온전하게 살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공동체라고 주장하는데, 바로 그때 도시들은 거대한 왕국 앞에서 독립을 잃어 가고 있었다.
지적으로 그는 풍부한 전통을 물려받았다.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물은 초기 자연철학자들, 히포크라테스 계열의 의학 저술가들, 설득술을 가르친 소피스트들, 플라톤 주변의 수학자·천문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론을 깊이 흡수하는 동시에 날카롭게 비판했다.
중급
저작: 살아남은 강의 노트
고대의 목록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매우 많은 저작을 돌린다. 그 가운데 일반 독자를 위해 다듬은 글, 곧 플라톤처럼 쓴 대화편들이 있었고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그 문체를 칭찬했다. 그러나 이 ‘공개 저작’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오늘날 전하는 약 30편은 학교 안에서 쓰인 ‘비공개 저작’으로, 강의 노트나 작업 초고처럼 압축되어 있고 여러 번 고쳐 쓴 흔적과 중복이 있다.
현존 저작은 전통적으로 몇 묶음으로 나뉜다. 훗날 ‘오르가논(도구)’이라 불린 논리학 저작에는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 전서』·『분석론 후서』, 『토피카』, 『소피스트적 논박』이 있다. 자연학 저작에는 『자연학』, 『천체론』, 『생성소멸론』, 『기상학』, 『영혼론』과 함께 『동물지』, 『동물부분론』, 『동물발생론』 같은 생물학 저작이 있다. 그 뒤로 『형이상학』, 윤리학 저작(『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우데모스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시학』이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앎을 셋으로 나누었다. 진리 자체를 추구하는 이론학(자연학·수학·‘제1철학’인 형이상학), 행위에 관한 실천학(윤리학·정치학),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관한 제작학(수사학·시학 등)이다. 논리학은 고유한 대상을 가진 학문이 아니라 모든 학문의 도구로 여겨졌다.
운 좋게 일부가 되살아난 저작도 있다. 리케이온이 모은 158개 국가 제도 가운데 하나인 『아테네인의 국가 체제』는 수백 년 동안 사라졌다가, 대영박물관이 입수한 파피루스 사본이 1891년에 출간되면서 세상에 다시 나왔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썼는지, 그의 지도 아래 제자가 썼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중급
논리학, 네 가지 원인, 그리고 자연 탐구
아리스토텔레스는 흔히 형식 논리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분석론 전서』에서 그는 두 전제에서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논증인 삼단논법을 분석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죽는다. 모든 그리스인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인은 죽는다.’ 그는 어떤 전제의 조합이 타당하고 어떤 조합이 그렇지 않은지를 문자를 변수로 써서 따졌는데, 이는 추상화로 나아간 놀라운 걸음이었다. 그의 체계는 19세기에 현대 수리 논리학이 등장할 때까지 논리학 교육의 중심이었다.
무엇이든 설명하려면 네 가지 ‘왜’를 물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를 전통적으로 4원인이라 부른다. 질료인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조각상의 청동), 형상인은 그 구조나 정의(조각상의 모양), 작용인은 무엇이 그것을 만들었는가(조각가), 목적인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신을 기리기 위해)이다. 자연물, 특히 생물에서는 목적(텔로스)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눈은 보기 위해, 뿌리는 양분을 얻기 위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은 실체(우시아) 개념 위에 서 있다. 가장 근본적인 실재는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개별자와 떨어져 있는 이데아가 아니라, 이 말, 이 사람 같은 개별적 사물이다. 각각의 사물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체이며, 이런 견해를 훗날 질료형상론이라 불렀다. 변화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옮겨 가는 것으로 설명된다. 도토리는 가능태로서 참나무다. 그의 우주 꼭대기에는 영원한 ‘부동의 원동자’가 있는데, 이는 순수한 현실태로서 사유하며 모든 운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대상이다.
영혼도 같은 틀로 설명했다. 영혼은 몸속에 따로 깃든 유령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의 형상, 곧 영양·지각·운동·사유의 능력이다. 식물, 동물, 인간은 서로 다른 수준의 영혼을 지닌다. 인간의 지성이 몸과 어떤 관계인지, 특히 『영혼론』에 나오는 난해한 ‘능동 지성’ 구절은 후대 철학에서 가장 많이 논쟁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중급
생물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대략 4분의 1이 동물에 관한 것이다. 그는 코끼리에서 성게까지 500종이 넘는 동물을 기술하고, 피의 유무, 번식 방법, 생활 방식 같은 특징으로 분류하려 했다. 많은 정보는 어부·농부·사냥꾼에게서 얻었고, 일부는 직접 해부해서 얻었다.
어떤 관찰은 너무 정확해서 후대 박물학자들이 의심하다가 나중에야 확인했다. 그는 별상어의 일종이 태반과 비슷한 연결을 통해 새끼에게 양분을 준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19세기 독일 생리학자 요하네스 뮐러가 확인했다. 수컷 문어가 짝짓기에 쓰는 특별한 팔도 기술했다. 달걀을 날마다 하나씩 깨 보며 병아리 배아가 자라는 과정을 추적하기도 했다.
물론 큰 오류도 있었다. 그는 뇌가 아니라 심장이 감각과 사유의 자리라고 보았고, 작은 생물 가운데 일부는 진흙이나 썩은 물질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믿었으며, 여성의 몸에 관한 잘못된 주장으로 당대의 사회적 불평등을 뒷받침했다. 오늘날 과학사가들은 그의 생물학을 그 시대의 맥락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관찰과 원인을 통해 생명을 설명하려 한 최초의 체계적 시도였고, 찰스 다윈도 그의 저작을 번역으로 읽은 뒤 감탄하는 편지를 남겼다고 전한다.
중급
윤리학과 정치학: 함께 잘 사는 법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모든 활동이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는 관찰로 시작해, 인간에게 가장 높은 좋음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에우다이모니아다. 흔히 ‘행복’으로 옮기지만 ‘번영’ 또는 ‘잘 삶’에 더 가깝다. 이는 기분이 아니라 활동, 곧 인간 고유의 능력인 이성을 평생에 걸쳐 탁월하게 발휘하는 삶이다.
성격의 탁월함(아레테, 덕)은 습관으로 얻는다. 집을 지어 봐야 목수가 되고 리라를 연주해 봐야 연주자가 되는 것과 같다. 각각의 덕은 올바르게 느끼고 행동하는 안정된 성향이며, 대개 두 악덕 사이의 중용에 있다. 용기는 비겁과 무모 사이에, 너그러움은 인색과 낭비 사이에 있다. 이 중용은 산술적 한가운데가 아니라,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를 갖춘 사람이 보기에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알맞은 것이다. 그는 우정에 두 권을 통째로 할애할 만큼 우정을 좋은 삶에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학』의 유명한 선언이다. 사람은 생존만이 아니라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본성을 실현한다. 그는 여러 정치 체제를 비교해 한 사람·소수·다수의 지배를 구분하고 각각에 좋은 형태와 타락한 형태를 두었으며, 두터운 중간층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균형을 잡는 혼합 정체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의 정치사상에는 오늘날 마땅히 비판받는 견해도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은 본성상 재산처럼 지배받기에 알맞다는 ‘자연적 노예’론을 옹호했고, 가정에서 여성이 본성상 남성에게 종속된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훗날 실제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1550~51년 스페인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예속을 두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인용된 것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독자들은 이 대목을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철학이 어떻게 불의를 합리화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읽는다.
중급
리케이온과 소요학파
리케이온은 아테네 성 밖에 있던 공공 숲이자 체육장으로, 아폴론 리케이오스에게 바쳐진 곳이었다. 외국인이라 아테네에서 땅을 가질 수 없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에서 가르쳤다. 학파의 별명 ‘소요학파(페리파토스학파)’는 강의가 열리던 지붕 덮인 회랑(페리파토스)에서 왔다. 그가 걸으면서 강의했다는 후대의 이야기는 이 이름을 풀이하다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리케이온은 일종의 연구 공동체였다. 구성원들은 국가 제도, 경기 우승자 명단, 이전 철학과 의학의 역사, 식물과 동물의 관찰 기록을 모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를 이어 학교를 이끈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학과 인간 ‘성격’에 관한 선구적인 책을 썼다. 연구 도구로서 도서관이라는 발상이 이곳에서 중요했고, 일부 학자는 소요학파 출신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의 도움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세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그 영향이 이어졌다고 본다.
리케이온 유적은 1996년 아테네 도심의 공사 중에 발굴되었고, 지금은 관람객에게 공개되어 있다.
중급
전승: 아테네에서 바그다드, 코르도바, 파리로
지리학자 스트라본과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고는 테오프라스토스를 거쳐 스켑시스의 넬레우스에게 넘어갔고, 그 후손들이 지하실에 숨겨 두었다. 훗날 한 책 수집가가 이를 사들였고, 기원전 86년 로마 장군 술라가 빼앗아 로마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기원전 1세기에 편집본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전하는 저작 체계는 대체로 이 편집을 따른다. 논고들이 정말 두 세기 동안 읽히지 않았는지는 많은 학자가 의심하지만, 안드로니코스 편집본의 중요성은 널리 인정된다.
고대 후기에는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 같은 그리스 주석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깊이 연구했고, 신플라톤주의 학교들은 그의 논리학을 철학 입문 과정으로 삼았다. 6세기 보에티우스는 논리학 일부를 라틴어로 옮겼다. 기독교 학자들은 시리아어로 번역했고, 8세기 말부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치하 바그다드에서는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와 그 아들 이스하크 같은 번역가들이 흔히 시리아어를 거쳐 그의 저작 다수를 아랍어로 옮겼다.
아랍어로 쓴 철학자들은 이 저작들 위에 자기 사상을 세웠다. 알킨디, 알파라비(아리스토텔레스를 ‘제1스승’이라 부른 데 이어 ‘제2스승’으로 불렸다), 이븐 시나(아비센나),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가 풍부한 주석과 독창적 사유의 전통을 만들었다. 코르도바의 이븐 루시드는 주석을 워낙 많이 써서 라틴 세계에서 그냥 ‘주석가’로 불렸다. 마이모니데스 같은 유대 사상가들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깊이 씨름했다.
12~13세기에는 그리스어와 아랍어에서 거의 모든 저작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새로 생긴 대학들의 교과 과정 중심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결합했다. 그의 물리학과 우주론은 과학혁명 때 무너졌고, 근대 초의 사상가들은 흔히 그에 맞서며 자신을 규정했다. 그러나 논리학, 윤리학, 정치 이론, 『시학』의 비극론은 한 번도 연구가 끊긴 적이 없으며, 20세기에는 ‘덕 윤리’가 그의 도덕철학 방식을 되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윤리학과 『시학』은 대학 교양 교육의 고전으로 널리 읽힌다.
심화
학계의 논쟁과 열린 질문
발전인가, 체계인가? 1923년 베르너 예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플라톤주의적 초기 단계에서 경험적·과학적 후기 단계로 발전했고, 논고들에는 서로 다른 시기의 층이 섞여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발전사적’ 접근은 수십 년 동안 학계를 지배했지만 예거가 제시한 구체적 연대 추정은 상당수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논고들이 시간을 두고 고쳐졌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분명한 연대기를 복원할 수 있을지는 의심한다.
어느 윤리학인가? 온전한 윤리학 논고가 둘, 곧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이 전하며, 세 권은 두 책에 공통으로 들어 있다. 전통적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원숙한 판본으로 여겼으나, 앤서니 케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들(The Aristotelian Ethics)』(1978)에서 공통 권들이 원래 『에우데모스 윤리학』에 속했다고 주장해 두 책의 관계를 다시 논쟁거리로 만들었다. 『대윤리학(마그나 모랄리아)』의 진위도 여전히 다투어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은 에우다이모니아를 여러 종류의 덕스러운 활동의 삶으로 그리는 듯하지만, 10권은 관조의 삶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찬양한다. 해석자들은 번영이 여러 좋음을 포함한다는 ‘포괄적’ 해석과 관조가 최고의 목적이라는 ‘지성주의적’ 또는 ‘지배적 목적’ 해석으로 나뉜다. J. L. 애크릴의 논문 「에우다이모니아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1974)는 이 문제를 고전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실체와 형상. 『형이상학』의 중심 권들(제타·에타·세타)은 철학사에서 가장 어려운 텍스트에 속한다. 형상이 보편자인지 개별자인지, 실체의 여러 후보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진다. 능동 지성의 의미, 자연에서 목적론의 지위, 그리고 노예제와 여성 종속에 대한 옹호가 그의 윤리학·정치학에 얼마나 본질적인지도 열린 질문이다.
심화
증거: 전기 자료와 텍스트
전기 자료. 고대 전기의 중심은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약 5세기 뒤에 쓰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 5권이다. 여기에는 유언장과 저작 목록 같은 귀중한 자료가 있지만 확인할 수 없는 일화와 악의적인 뒷말도 섞여 있다. 신플라톤주의 학교에서 나온 후대의 여러 ‘전기’는 그를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아테네를 떠나며 ‘아테네가 철학에 두 번 죄짓게 하지 않겠다’(소크라테스의 처형을 가리킴)고 말했는지 같은 세부는 사실이라기보다 전승으로 다루어야 한다.
텍스트 전승. 고대의 필사본은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어 본문은 주로 9세기 이후의 비잔티움 필사본에 기대며, 고대 주석과 중세 아랍어·라틴어 번역이 이를 보완한다. 이 번역들은 때때로 사라진 그리스어 독법을 반영한다. 표준 인용 체계는 이마누엘 베커가 준비해 1831년에 출간한 베를린판에서 왔다. ‘1094a1’ 같은 인용은 이 판의 쪽·단·행을 가리킨다.
논고 읽기. 현존 저작은 대개 작업용 텍스트였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전환, 상호 참조, 중복이 있다. 해석자는 어떤 긴장이 사상의 발전을 반영하는지, 주제가 바뀐 것인지, 후대 편집자가 이어 붙인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또 평판 있는 견해(엔독사)와 거기서 생기는 난제(아포리아)에서 출발하는 그의 방법 때문에 논고 속 모든 진술이 그의 최종 견해인 것은 아니다.
물질적 증거는 드물다. 대리석 흉상은 사라진 그리스 원작을 로마 시대에 복제한 것이며, 그 원작은 흔히 조각가 리시포스 주변에서 만든 청동상으로 추정된다. 발굴된 리케이온 유적이 그의 학교를 이해하는 맥락을 줄 뿐,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지식은 거의 전적으로 텍스트에 기댄다.
핵심 개념
- 삼단논법
- 두 전제에서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논증 형식.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 4원인
- ‘왜?’에 답하는 네 방식.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질료), 어떤 형태인가(형상), 무엇이 만들었는가(작용), 무엇을 위한 것인가(목적).
- 실체와 질료형상론
- 근본 실재는 따로 떨어진 이데아가 아니라 질료와 형상이 결합한 개별 사물이다.
- 가능태와 현실태
- 변화는 능력이 실현되는 것이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는 것처럼.
- 에우다이모니아
- 인간의 번영. 평생에 걸쳐 이성과 덕을 발휘하며 잘 사는 것.
- 중용
- 성격의 덕은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에 있으며, 그 자리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정해진다.
- 정치적 동물
- 인간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 곧 폴리스 안에서만 본성을 실현한다.
- 미메시스와 카타르시스
- 『시학』에서 예술은 모방이며, 비극은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이룬다. 카타르시스의 정확한 뜻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기록
- 기원전 384년 — 칼키디케의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나다.
- 약 기원전 367년 — 열일곱 살 무렵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가다.
- 기원전 347년 — 플라톤이 죽자 아테네를 떠나 아소스, 이어 레스보스로 가다.
- 약 기원전 343년 —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마케도니아에서 어린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다.
- 약 기원전 335년 —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 학교를 세우다.
- 기원전 323년 —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죽자 아테네에서 반마케도니아 감정이 일어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칼키스로 물러나다.
- 기원전 322년 — 칼키스에서 죽다. 테오프라스토스가 리케이온을 이끌다.
- 약 기원전 60년 —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로마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논고를 편집해 오늘날 저작 체계의 틀을 만들다.
- 약 830년 —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아랍어 번역이 꽃피다.
- 약 1265년 — 토마스 아퀴나스가 새 라틴어 번역을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 신학에 통합하다.
- 1831년 — 이마누엘 베커의 베를린판이 나와 표준 인용 번호의 기준이 되다.
- 1891년 — 『아테네인의 국가 체제』 파피루스가 대영박물관을 통해 출간되다.
용어 풀이
- 아카데메이아
- 아테네에 있던 플라톤의 학교. 아리스토텔레스가 약 20년간 배우고 가르쳤다.
- 리케이온
- 기원전 335년 무렵 아리스토텔레스가 학교를 세운 아테네의 체육장.
- 소요학파(페리파토스학파)
-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리케이온의 지붕 덮인 회랑(페리파토스)에서 이름이 왔다.
- 오르가논
- ‘도구’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묶어 부르는 전통적 이름.
- 텔로스
- 어떤 것이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목적 또는 끝.
- 우시아
- ‘있음’ 또는 ‘실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
- 아레테
- 탁월함 또는 덕. 사물이나 사람이 제 기능을 잘하게 하는 성질.
- 프로네시스
- 실천적 지혜. 구체적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 알아보는 능력.
- 폴리스
- 시민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그리스의 도시국가.
- 베커 번호
- 1831년 베를린판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의 쪽·단·행을 가리키는 표준 인용 번호(예: 1094a1).
묻고 답하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선생님이었나요?
네. 고대 자료들은 필리포스 2세가 기원전 343년 무렵 그를 불러 어린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게 했다는 데 일치합니다. 다만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수업이 훗날의 왕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믿을 만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틀린 적이 있나요?
네. 무거운 물체가 더 빨리 떨어진다거나, 심장이 생각의 자리라거나, 어떤 동물은 저절로 생겨난다고 믿었어요. 그래도 그의 생물 관찰 가운데 상당수는 정확했고, 분류와 추론의 방법은 엄청난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의 책은 왜 이렇게 읽기 어렵나요?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다듬은 책이 아니라 강의 노트와 작업 초고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독자들이 문체를 칭찬한 일반인용 저작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중용이란 무엇인가요?
덕은 두 극단 사이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용기는 비겁과 무모 사이에 있지요. 알맞은 자리는 정해진 공식이 아니라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어떻게 중세 유럽에 전해졌나요?
여러 길이 있었습니다. 보에티우스의 논리학 라틴어 번역, 바그다드와 알안달루스의 아랍어 번역과 주석, 그리고 12~13세기에 그리스어와 아랍어에서 새로 옮긴 라틴어 번역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옹호했나요?
네. 『정치학』에서 어떤 사람은 ‘본성상’ 노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견해는 고대에도 비판받았고 훗날 식민지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쓰였으며 오늘날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의 윤리학 전체와 어떻게 맞물리는지는 학자들이 논쟁합니다.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 인용하나요?
베커 번호를 씁니다. 1831년 이마누엘 베커판의 쪽·단·행을 가리키는 번호로, 예를 들어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1094a1에서 시작합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아리스토텔레스. 위키백과
- Christopher Shields, Aristotl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ristotle’s Ethic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ristotle’s Logic.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ristotle’s Biolog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ristotle.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ristotle. Wikipedia
- Corpus Aristotelicum. Wikipedia
-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그리스어 원문과 영역).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 Diogenes Laertius, Lives of Eminent Philosophers.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함께 보기
- 플라톤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카데메이아의 설립자. 그의 대화편은 서양 철학의 초석으로 남아 있다.
- 소크라테스스스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을 통해 알려졌으며, 기원전 399년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 가우가멜라 전투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물리친 전투다.
- 지혜의 집아바스 왕조 시대 바그다드의 장서와 번역 활동에 연관된 이름이다.
- 이븐 루시드아리스토텔레스 주석으로 알려진 안달루스의 철학자·법학자·의사다.
- 토마스 아퀴나스중세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준 도미니코회 신학자이자 철학자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