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de Aquino (Tommaso d’Aquino)

1252–1274년 · 파리 (프랑스 왕국)

한 문장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수도사이자 파리 대학의 교수로, 신앙과 이성이 함께 간다는 것을 보이려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방대하고 정교한 책으로 엮어 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미지: Carlo Crivelli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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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토마스 아퀴나스는 약 800년 전 이탈리아 남부의 한 성에서 태어났어요. 집안은 부유한 귀족이었고, 가족은 그가 유명한 수도원의 힘 있는 원장이 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토마스의 생각은 달랐어요.

청년 토마스는 도미니코회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도미니코회는 재산 없이 음식을 얻어먹으며 평생 공부하고 설교하는 새로운 수도회였어요. 가족은 크게 화가 나서, 형들이 토마스를 붙잡아 집에 1년쯤 가두어 두었어요. 그래도 토마스가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풀어 주었어요.

토마스는 몸집이 크고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어요. 친구들은 그를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지요.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언젠가 이 황소가 온 세상이 들을 만큼 크게 울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해요. 그 말대로 토마스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님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어요.

토마스는 질문하기를 좋아했어요. 가장 유명한 책 『신학대전』은 “신은 존재하는가?”, “전쟁이 옳을 때가 있는가?” 같은 수천 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질문마다 먼저 자기 생각에 반대하는 가장 좋은 주장들을 적고, 자기 답을 말한 다음, 반대 주장 하나하나에 대답했어요. 공정하게 생각하는 좋은 방법이지요.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이 모두 신이 준 선물이라서 서로 진짜로 어긋날 수 없다고 믿었어요. 그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이슬람과 유대교 철학자들에게서 많이 배웠어요.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그를 성인이자 ‘교회 학자’로 부르고, 여러 믿음을 가진 철학자들이 지금도 그의 생각을 공부해요.

한눈에 보기

출생
1225년 무렵, 시칠리아 왕국 아퀴노 부근의 가문 성 로카세카(오늘날 이탈리아 라치오주)
사망
1274년 3월 7일, 제2차 리옹 공의회로 가던 길에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수도회
도미니코회(설교자 수도회), 1244년 입회
교육 활동
파리 대학 신학 교수(1256–1259, 1268–1272). 오르비에토, 로마, 나폴리 등 이탈리아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도 가르침
주요 저작
『신학대전』(미완), 『대이교도대전』,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 토론 문제집, 아리스토텔레스와 성경 주석
핵심 사상
신앙과 이성의 조화, 신 존재 증명의 ‘다섯 가지 길’, 본질과 존재의 구별, 자연법, 몸의 형상으로서의 영혼
공인
1323년 시성, 1567년 교회 학자로 선포,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1879) 이후 가톨릭 교육의 본보기
칭호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공통 박사’

쉬움

토마스 아퀴나스는 누구인가

토마스 아퀴나스(1225년 무렵–1274)는 도미니코회 수도사이자 사제, 신학자, 철학자였다. 유럽 신학의 중심이던 파리 대학과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가르쳤다. 겨우 25년 남짓한 활동 기간에 800만 단어가 넘는 글을 썼다.

그의 큰 목표는 인간의 이성과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이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이슬람과 유대교 사상가들의 주석과 함께 막 라틴어로 소개된 참이었다. 일부 그리스도교인은 이 철학이 신앙과 어긋난다고 두려워했다. 토마스는 진리가 진리와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철학을 바르게 쓰면 신앙이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고, 신앙은 이성이 혼자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토마스는 중세 라틴 서방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인이자 교회 학자로 공경받으며, 그의 사상은 가톨릭 철학과 신학의 뼈대가 되었다. 윤리, 법, 인간 본성, 신에 관한 그의 생각은 지금도 여러 전통의 철학자들이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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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가난을 택한 귀족의 아들

토마스는 1225년 무렵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아퀴노 백작 가문의 성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쯤에 큰 베네딕토회 수도원 몬테카시노에 봉헌자로 맡겨졌는데, 가족은 그가 언젠가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되기를 바랐던 듯하다. 1239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 사이의 전쟁이 수도원까지 미치자, 토마스는 새로 세워진 나폴리 대학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처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만났다.

나폴리에서 그는 불과 수십 년 전 성 도미니코가 세운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를 만났다. 이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가난하게 살며 탁발로 생계를 잇고 공부와 설교에 몸을 바쳤다. 1244년 토마스는 여기에 들어갔다. 가족은 격분했다. 북쪽으로 가던 그를 형들이 붙잡아 1년쯤 가문의 성에 가두었다. 후대 이야기에는 형들이 그를 유혹하려고 여자를 들여보냈는데 그가 불붙은 장작으로 쫓아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가 얼마나 굳은 사람으로 기억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1245년 가족은 그를 풀어 주었다.

그 뒤 토마스는 파리에서, 그리고 1248년부터는 쾰른에서 도미니코회 학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배웠다. 과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박학했던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체를 다룬 최초의 라틴 사상가 가운데 하나였다. 토마스는 조용한 성격 때문에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울음소리가 온 세상에 들릴 것이라는 알베르투스의 예언 이야기는 초기 전기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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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파리와 이탈리아의 교수

1252년 토마스는 파리로 파견되어 당시 표준 신학 교과서인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강의했다. 1256년 신학 교수가 되어 1259년까지 도미니코회 교수좌 하나를 맡았다. 갈등의 시기였다. 대학의 일부 재속(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교수들이 탁발 수도사들을 몰아내려 했고, 토마스는 그들을 변호하는 글을 썼다.

1259년부터 1268년까지는 이탈리아에서 일했다. 나폴리, 교황청이 자주 머물던 오르비에토, 그리고 로마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지냈고, 로마 산타 사비나에서는 젊은 수도사들을 위한 학교를 꾸렸다. 이 시기에 『대이교도대전』을 마치고 『신학대전』을 시작했다.

1268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 두 번째로, 그리고 유난히 치열하게 교수 생활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불신하는 보수적 신학자들, 인문학부의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탁발 수도회를 비판하는 이들과 한꺼번에 논쟁했다. 1272년 그는 도미니코회 신학교를 세우러 나폴리로 돌아갔다.

1273년 12월 6일 무렵, 미사를 드리던 토마스는 어떤 체험을 한 뒤 글쓰기를 멈추었다. 시성 조사에서 전해진 동료 레지날두스(피페르노의 레지날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비하면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제2차 리옹 공의회에 부름을 받고 가던 길에 병이 들었고, 1274년 3월 7일 시토회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마흔아홉 살쯤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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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3세기: 대학, 탁발 수도회,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는 유럽 지성사의 전환점을 살았다. 1200년 무렵 파리, 옥스퍼드, 볼로냐 등지에 교수와 학생의 조합으로서 대학이 생겨났다. 수업은 권위 있는 텍스트에 대한 강의와, 한 문제를 양쪽에서 따지는 공식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스콜라 철학이라 불리는 이 방법이 토마스 저술의 구조를 만들었다.

같은 무렵 톨레도와 시칠리아 등지의 번역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모든 저작을, 흔히 아랍어를 거쳐 라틴어로 옮겼고, 아비센나(이븐 시나)와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의 큰 주석, 유대교 철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의 저술도 함께 소개되었다. 토마스와 같은 도미니코회의 뫼르베케의 굴리엘무스는 그리스어에서 직접 새로 번역했는데, 일부는 토마스의 요청에 따른 것일 수 있지만 두 사람이 얼마나 협력했는지는 논쟁 중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영혼, 윤리, 정치에 관한 강력하고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했지만, 세계가 늘 존재해 왔다는 주장처럼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부딪히는 듯한 견해도 있었다. 아베로에스의 해석은 모든 인간이 하나의 지성을 공유한다는 뜻으로 읽혀 개인의 영혼 불멸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13세기 초 파리의 교회 당국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강의를 여러 차례 제한했다. 이 새로운 학문을 어떻게 다룰지가 토마스 세대의 큰 지적 과제였다.

이 문제와 씨름한 사람은 토마스만이 아니었다.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열렬히 받아들였고, 같은 시기 파리 교수였던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전통과 철학의 한계를 강조하며 더 신중했다. 브라방의 시제루스 같은 인문학부 교수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멀어지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을 끝까지 따라갔다. 토마스는 이 입장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대체로 참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틀렸다고 판단한 곳은 바로잡았다.

[3][5][1]

중급

주요 저작

토마스의 저술은 수십 권을 채운다. 초기의 『명제집 주해』(1252–1256)와 짧은 논고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는 그가 평생 발전시킬 형이상학의 생각을 펼친다. 『진리론』, 『신의 능력론』 같은 토론 문제집은 그가 교수로서 이끈 학술 토론을 기록한 것이다.

『대이교도대전』(1259–1265년 무렵)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호하는 네 권짜리 책이다. 그리스도교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자를 향하므로, 앞의 세 권은 되도록 이성만으로 논증을 편다. 이 책이 선교사를 위한 안내서였는지, 철학적 신학의 일반 저술이었는지는 논쟁 중이다.

1265–1268년 무렵 시작해 미완으로 남은 『신학대전』은 그의 대표작으로, 초심자를 위한 질서 있는 신학 입문서로 기획되었다. 세 부로 이루어지는데, 제1부는 신과 창조, 제2부는 인간의 행위와 덕과 행복(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제3부는 그리스도와 성사를 다룬다. 500개가 넘는 문제가 2,500개 이상의 항으로 나뉜다. 그가 죽은 뒤 제자들이 그의 초기 저술을 가려 뽑아 ‘보충부’로 완성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 욥기·요한 복음서·바오로 서간 같은 성경, 신플라톤주의 문헌 『원인론』, 보에티우스와 위(僞)디오니시우스에 대한 주석도 썼다. 전통적으로 성체 성혈 대축일의 전례문과 지금도 불리는 「팡제 링구아」 같은 찬미가도 그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3][2][9]

중급

『신학대전』의 한 항은 어떻게 짜여 있나

『신학대전』의 모든 항은 대학 토론에서 가져온 같은 틀을 따른다. 먼저 “신은 존재하는가?”처럼 예·아니요로 답할 질문이 나온다. 이어 반론이 나온다. 보통 토마스가 받아들이지 않을 견해를 지지하는 논증 셋 이상을, 흔히 가장 강한 형태로 적는다. 그다음 짧은 ‘그러나 반대로(sed contra)’가 반대편을 지지하는 권위를 인용한다.

항의 핵심은 ‘나는 이렇게 답한다(respondeo)’로, 토마스는 흔히 구별을 지어 가며 자기 입장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반론 하나하나에 차례로 답하며, 그 안의 옳은 점과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보인다.

이 형식은 반대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공정하게 진술하고, 하나하나 답하도록 독자를 훈련한다. 지금도 많은 철학 교사가 이를 엄밀하면서도 너그러운 논증의 본보기로 높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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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핵심 사상: 신앙과 이성, 신, 자연, 법

신앙과 이성. 토마스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처럼 이성이 닿을 수 있는 진리와, 삼위일체처럼 계시로만 알 수 있는 진리를 구별했다. 신학은 계시된 원리에서 추론하는 학문이고, 철학은 자연적으로 알려진 것에서 추론한다. 둘 다 신에게서 오므로 진짜로 충돌할 수 없으며, 겉으로 드러난 충돌은 추론 어딘가에 잘못이 있다는 신호다.

다섯 가지 길.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1부 제2문 제3항에서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다섯 가지 짧은 논증을 내놓는다. 운동, 작용인, 우연성, 완전성의 정도, 자연의 질서에서 출발하는 논증이다. 각각 세계의 특징에서 첫째 원인 또는 궁극적 설명으로 나아가며, “이것을 모두가 신이라 부른다”로 끝맺는다. 종교철학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논증 가운데 하나다.

존재와 본질. 토마스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에서 그것이 무엇인가(본질)와 그것이 있다는 것(존재, esse)은 다르다. 오직 신에게서만 본질과 존재가 같다. 신은 자존하는 존재 그 자체다. 피조물은 신에게서 받은 존재에 참여한다. 많은 학자는 이것을 형이상학에 대한 토마스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로 본다.

인간 본성, 윤리, 법.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영혼이 몸의 형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몸과 영혼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다. 인간 삶의 목적은 행복이며, 그 궁극은 신을 아는 데 있다. 현명, 정의, 용기, 절제 같은 덕이 인간 본성을 완성하고, 은총이 그것을 더 높이 완성한다. 자연법은 신의 영원법에 인간 이성이 참여하는 것이며, 그 첫째 원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것이다. 정당한 권위,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를 갖춘 전쟁이 언제 정당한지에 대한 그의 논의는 정당 전쟁론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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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논란, 시성, 그리고 토마스주의

토마스의 견해는 당대에 논란이 되었다. 그가 죽고 3년 뒤인 1277년, 파리 주교 에티엔 탕피에는 주로 인문학부의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겨냥해 219개 명제를 단죄했다. 단죄된 명제 가운데 일부는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처럼 토마스가 주장한 입장과 닮아 있었다. 같은 해 옥스퍼드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킬워드비가 관련 명제를 단죄했다. 프란치스코회 비판자들은 그의 저작에 대한 ‘교정서’를 냈고, 도미니코회는 반박하며 그를 변호했다.

흐름은 곧 바뀌었다. 1323년 교황 요한 22세가 토마스를 시성했고, 1325년 파리의 단죄는 그의 가르침과 관련된 부분에서 철회되었다. 15세기의 요한네스 카프레올루스, 16세기의 카예타누스 추기경 같은 주석가들이 토마스주의라는 전통을 쌓았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의 신학에 크게 기댔고, 1567년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했다.

1879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는 가톨릭 교육에서 토마스 철학의 부흥을 촉구해 신토마스주의 운동을 열었다. 20세기에는 자크 마리탱과 에티엔 질송 같은 사상가가 그의 생각을 정치, 인권, 예술, 역사 같은 현대의 문제에 적용했다. 그의 영향은 『신곡』에서 그를 태양천의 안내자로 등장시킨 단테, 그리고 그의 저작과 비판적으로 씨름한 개신교·세속 사상가들에게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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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비판적 시각

여느 사상가처럼 토마스도 오늘날 널리 거부되는 당대의 전제를 많이 공유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을 따라 생식의 측면에서 여성을 어떤 의미에서 ‘결함 있는’ 남성으로 묘사했지만, 동시에 여성도 신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자연 전체의 의도에서 보면 실패작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페미니즘 학자들은 이 대목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고, 다른 학자들은 그의 핵심 원리를 낡은 과학에서 떼어 내려 했다.

토마스는 교정을 끝내 거부하는 이단자를 세속 권력에 넘겨 처형하는 것이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신학대전』 제2부 제2편 제11문). 이 견해는 중세 종교 재판의 관행을 뒷받침했다. 그는 유대인 아이에게 강제로 세례를 주는 것에 반대하고 유대인에게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지만, 당시 사회에 흔했던 유대인에 대한 법적 제약은 받아들였다. 가톨릭 신학자를 포함한 현대 독자들은 이런 입장을 비판해 왔다.

철학적으로는 프란치스코회 전통(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 근대 초기 철학, 현대 분석철학의 비판자들이 다섯 가지 길과, 신에 대해 말할 때의 유비 이론을 포함한 그의 논증에 도전했다. 옹호자들은 많은 비판이 그의 논증을 아리스토텔레스적 틀에서 떼어 내 잘못 읽은 것이라고 답한다. 이 논쟁은 지금도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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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와 학계의 논쟁

전기 자료. 초기의 주요 전기는 시성을 추진한 굴리엘무스 데 토코의 전기(1318–1323년 무렵), 베르나르 기, 페트루스 칼로의 전기이며, 나폴리(1319)와 포사노바(1321)에서 열린 시성 조사의 증언도 있다. 이 글들은 성인전이라 기적 이야기가 들어 있어 역사학자들은 신중하게 쓴다. 장피에르 토렐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1권: 인물과 저작』(영역본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6; 개정 2005)이 표준 현대 비판적 전기이며, 개별 저작의 연대는 지금도 다듬어지고 있다.

텍스트. 1880년 레오 13세가 세운 레오 위원회는 한 세기가 훨씬 넘도록 토마스 저작의 비판 정본을 내고 있으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의 것으로 여겨진 일부 저작은 이제 위작으로 판정되었고, 『대이교도대전』과 일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같은 저작의 연대는 논쟁 중이다.

해석. 20세기 학자들은 토마스에게서 무엇이 가장 독특한지를 두고 논쟁했다. 질송은 존재(esse)의 우위를 강조하며 토마스 철학을 ‘실존적’이라 불렀고, 코르넬리오 파브로와 루이베르트랑 제제는 신플라톤주의의 참여 개념을 부각했으며, 다른 이들은 그를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읽었다. 철학과 신학의 관계도 논쟁거리다. 그의 신학 저술에서 독자적인 ‘토마스 철학’을 뽑아낼 수 있는지, 아니면 그의 철학은 언제나 신학 안에서 읽어야 하는지의 문제다.

최근에는 엘리자베스 앤스콤과 피터 기치 같은 철학자의 영향을 받아 그의 생각을 현대 심리철학·윤리학과 대화시키는 ‘분석적 토마스주의’, 앨러스데어 매킨타이어가 토마스에 크게 기댄 덕 윤리의 부활, 그리고 성경 주석가로서의 토마스와 그가 이슬람·유대교 철학에 진 빚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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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신앙과 이성의 조화
둘 다 신에게서 오므로 진짜로 충돌할 수 없다. 이성은 신앙을 준비하고, 신앙은 이성을 완성한다.
다섯 가지 길
운동, 인과, 우연성, 정도, 질서라는 세계의 특징에서 첫째 원인인 신으로 나아가는 다섯 논증.
본질과 존재
피조물에서는 무엇인가와 있다는 것이 다르며, 오직 신에게서만 같다.
몸의 형상인 영혼
인간은 몸에 갇힌 영혼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하나로 통일된 실체다.
자연법
신의 영원법에 인간 이성이 참여하는 것. 첫째 원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것이다.
덕과 행복
인간 삶은 행복을 향하며, 덕으로 다가가고 신을 아는 가운데 은총으로 완성된다.
유비
‘선하다’, ‘지혜롭다’ 같은 말은 신과 피조물에게 똑같은 뜻도, 전혀 다른 뜻도 아닌 유비적 뜻으로 쓰인다.

기록

  1. 약 1225년 — 시칠리아 왕국 아퀴노 부근 로카세카에서 태어난다.
  2. 약 1230년 — 베네딕토회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봉헌자로 맡겨진다.
  3. 1239년 —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4. 1244년 — 도미니코회에 들어가고, 가족이 그를 1년쯤 가둔다.
  5. 1252년 — 파리에서 『명제집』 강의를 시작한다.
  6. 1256년 — 파리 대학 신학 교수가 된다(첫 교수 시기, ~1259).
  7. 약 1265년 — 로마에서 도미니코회 학교를 꾸리고 『신학대전』을 시작한다.
  8. 1268년 — 파리에서 두 번째 교수 시기를 시작한다(~1272).
  9. 1274년 — 3월 7일, 포사노바에서 세상을 떠난다.
  10. 1277년 — 파리 주교 탕피에가 219개 명제를 단죄하고, 일부가 토마스의 견해에 닿는다.
  11. 1323년 — 교황 요한 22세가 토마스를 시성한다.
  12. 1879년 —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가 신토마스주의 부흥을 연다.

용어 풀이

탁발 수도사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처럼 가난하게 살며 사람들 속에서 일하는 탁발 수도회의 일원.
도미니코회
1216년 성 도미니코가 세운 설교자 수도회. 공부와 설교에 힘쓴다.
스콜라 철학
권위 있는 텍스트 주석과 공식 토론에 바탕을 둔 중세 대학의 학문 방법.
대전(Summa)
한 분야 전체를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저술.
토론(disputatio)
한 문제를 양쪽에서 따지고 교수가 결론을 내리는 공식 학술 토론.
본질
어떤 것이 무엇인가, 곧 그것의 본성.
에세(esse)
라틴어로 ‘있다’. 토마스에게서는 존재의 활동을 뜻한다.
자연법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두고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도덕 원리.
교회 학자
가르침이 특히 중요하다고 인정된 성인에게 가톨릭교회가 주는 칭호.
토마스주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바탕을 둔 철학·신학 전통.

묻고 답하기

왜 ‘벙어리 황소’라고 불렸어요?

몸집이 크고 말이 없어서 친구들이 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스승 알베르투스는 이 황소가 언젠가 온 세상이 듣도록 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해요.

가족은 왜 토마스를 가두었어요?

귀족 가문이라 토마스가 가난하게 얻어먹는 수도사가 아니라 힘 있는 수도원장이 되기를 바랐거든요. 1년쯤 가두었다가 결국 도미니코회에 들어가게 해 주었어요.

‘대전’은 무슨 뜻이에요?

라틴어 ‘숨마(Summa)’를 옮긴 말로, 한 분야 전체를 빠짐없이 질서 있게 정리한 책이라는 뜻이에요.

『신학대전』은 끝났어요?

아니요. 1273년 12월에 글쓰기를 멈추고 몇 달 뒤 세상을 떠났어요. 제자들이 그의 예전 글을 모아 ‘보충부’를 붙였어요.

다섯 가지 길이란 무엇인가?

운동, 인과, 우연성, 완전성의 정도, 자연의 질서에서 출발해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다섯 짧은 논증이다(『신학대전』 제1부 제2문 제3항).

토마스의 사상은 교회에서 단죄되었나?

1277년 파리 주교가 219개 명제를 단죄했는데, 일부는 토마스의 입장과 닮았다. 1323년 시성 뒤인 1325년, 파리의 단죄는 그의 가르침에 관한 한 철회되었다.

이슬람·유대교 철학자들은 토마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비센나, 아베로에스, 유대교 철학자 마이모니데스와 함께 읽고 자주 인용했다. 그들의 견해를 반박할 때조차 그들에게서 많이 배웠다.

토마스는 왜 말년에 글쓰기를 멈추었나?

1273년 12월 6일 무렵 미사 중에 어떤 체험을 했다. 동료 레지날두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비하면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 같다고 말했다. 신비 체험이었는지, 뇌졸중 같은 병이었는지, 둘 다였는지는 논쟁 중이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토마스 아퀴나스. 위키백과
  2. 신학대전. 위키백과
  3. Thomas Aquina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4. Aquinas’ Moral, Political, and Legal Philosoph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5. Thomas Aquinas.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6. Five Ways (Aquinas). Wikipedia
  7. Condemnations of 1277. Wikipedia
  8. Aeterni Patris. Wikipedia
  9. Jean-Pierre Torrell, Saint Thomas Aquinas, Volume 1: The Person and His Work.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6 (개정 200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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