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팔만대장경

高麗大藏經 (고려대장경) · 八萬大藏經 (팔만대장경)

1237–1248년 · 해인사 (보관처)

한 문장으로

팔만대장경은 13세기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치르던 중에 불교 경전 전체를 8만 1천여 장의 나무 인쇄판에 새긴 것으로, 지금도 해인사에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팔만대장경
이미지: Bernard Gagnon · CC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컴퓨터나 활자 인쇄기가 흔하지 않던 옛날, 책을 여러 권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나무판에 글자를 거꾸로 새기고 먹을 발라 종이를 찍어 내는 것이었어요. 커다란 도장과 비슷하지요.

약 780년 전, 고려 사람들은 모을 수 있는 모든 불교 경전을 나무판에 새겼어요. 그 수가 8만 1천 장이 넘어요. 모두 쌓아 올리면 아주 높은 산보다도 높아요. 판마다 앞뒤 양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씨가 어찌나 고른지 한 사람이 모두 쓴 것처럼 보여요.

고려 사람들은 몽골 군대가 쳐들어와 있던 때에 이 일을 했어요. 임금과 조정은 강화도로 피해 있었지요. 부처님께 이 큰 선물을 바치면 나라를 지켜 주실 거라고 믿었고, 고려가 학문과 신앙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뜻도 있었어요.

지금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의 긴 나무 건물 두 채에 보관되어 있어요. 500년도 더 전에 지은 이 건물에는 크기가 서로 다른 창문이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가 차지 않아요. 그래서 나무판이 썩거나 휘지 않았답니다.

팔만대장경은 아주 귀해서, 보관하는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경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에요. 지금도 세계의 학자들이 이 경전을 연구에 써요.

한눈에 보기

무엇인가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 전체(대장경)를 인쇄용 목판에 새긴 것
제작
고려 고종 때. 경판에 새겨진 간행 연도는 1237–1248년. 1230년대 중반에 준비를 시작해 1251년 완성 의식을 올림
제작 기관
강화도의 대장도감과 남해의 분사대장도감. 실제로 어디서 얼마나 새겼는지는 논쟁 중
규모
국가 지정 기준 81,258판(2014년 전수 조사에서는 후대 판을 포함해 81,352판). 약 1,500종 6,500여 권
경판
세로 약 24cm, 가로 약 70cm, 두께 2.6–4cm. 양면에 새기며 한 면에 대개 23행 14자
보관처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1488년 중건). 1398–1399년 무렵부터 해인사에 보관
지정
국보. 장경판전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판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다른 이름
고려대장경, 재조대장경, 해인사 대장경판

쉬움

팔만대장경이란 무엇인가

트리피타카(산스크리트어로 ‘세 개의 바구니’)는 불교 경전 전체를 모은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經), 승려의 계율을 담은 율(律), 경전을 풀이한 논(論)의 세 부분에 주석과 여러 저술이 더해진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문으로 옮긴 이 모음을 대장경(大藏經)이라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고려(918–1392)가 13세기에 만든 대장경이다. 경전을 손으로 베끼는 대신 나무판에 새겨, 같은 경전을 몇 번이고 찍어 낼 수 있게 했다. 8만 1천 장이 넘는 경판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목판으로 된 불교 대장경 가운데 온전히 전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이름은 경판의 수를 가리키는 동시에, 부처가 사람 마음의 8만 4천 가지 번뇌를 치유하려고 8만 4천 가지 법문을 설했다는 불교의 생각을 담고 있다.

팔만대장경은 세 가지 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본문의 정확성, 새김의 아름다움과 한결같음, 그리고 거의 800년 동안 놀랍도록 잘 보존되었다는 점이다.

[1][3][5]

쉬움

목판 인쇄는 어떻게 할까

목판으로 인쇄하려면 먼저 필사자가 얇은 종이에 본문을 정성껏 쓴다. 이 종이를 글씨가 판에 닿도록 뒤집어 매끈한 나무판에 붙이면 글자가 거꾸로 비친다. 새김꾼은 획 둘레의 나무를 깎아 내 글자만 볼록하게 남긴다. 찍을 때는 판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얹어 문지르면 글자가 바른 방향으로 찍혀 나온다.

팔만대장경 경판 한 장은 세로 약 24cm, 가로 약 70cm에 무게는 3kg 안팎이다. 양면에 모두 새겼고, 한 면에 대개 23행 14자가 들어간다. 경판 양 끝에는 두꺼운 각목(마구리)을 끼웠는데, 이것은 손잡이 구실을 하고, 쌓아 둘 때 새긴 면끼리 닿지 않게 하며, 판이 휘는 것을 막는다. 네 귀퉁이는 금속 장식으로 고정했고, 경판에는 옻칠을 했다.

1990년대의 과학적 수종 분석에 따르면 경판은 대부분 산벚나무로, 나머지는 돌배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나무를 바닷물에 담갔다가 몇 해 동안 말린 뒤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럴듯하지만 13세기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1][3]

쉬움

경판 한 장을 ‘읽는’ 법

경판 한 장을 들어 본다고 상상해 보자. 묵직하고, 오래된 먹과 옻칠로 거무스름하며, 나무 냄새가 은은하다. 글자는 고무도장처럼 거꾸로 도드라져 있어서, 읽으려면 거울에 비추듯 보거나 이 판으로 찍은 종이를 읽어야 한다.

한 면은 두루마리 한 장처럼 짜여 있다. 본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줄을 따라 이어진다. 한쪽 가장자리에는 작은 글씨로 경전 이름, 권 차례, 장 차례, 그리고 이 경전이 어느 함에 들어가는지를 알려 주는 천자문의 글자 하나가 새겨져 있다. 이 체계 덕분에 승려들은 수만 장 가운데 어느 쪽이든 찾아낼 수 있었다.

각 권 끝의 경판에는 “정유년(1237)에 고려국 대장도감이 왕명을 받들어 새겼다(丁酉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처럼 간지로 새긴 해를 밝힌 정해진 형식의 간기(刊記)가 붙어 있다. 남해에서 만든 판에는 대장도감 대신 분사대장도감이라 적혀 있다. 판의 가장자리나 줄 끝에는 새김꾼의 이름이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글씨체는 전체가 놀랍도록 고르다. 중국 서예가 구양순의 영향을 받은 반듯한 해서로, 후대 사람들은 한 사람이 쓴 것 같다고 감탄했다. 여러 해에 걸쳐 수많은 필사자와 새김꾼이 이룬 이 한결같음은 그 자체로 치밀한 계획과 감독의 증거다.

[1][3]

쉬움

왜 만들었을까: 전쟁 속의 신앙

고려는 전에도 대장경을 만든 적이 있다. 11세기 초 거란(요)이 침입하자 현종이 첫 대장경(초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해 1087년 무렵 완성했다. 사람들은 이 큰 공덕이 침략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었다.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다. 이듬해 무신 집권자 최우가 이끄는 조정은 도읍을 개경에서, 몽골 기병이 쉽게 공격할 수 없는 강화도로 옮겼다. 같은 1232년,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판이 몽골군에게 불탔다.

조정은 대장경을 다시 새기기로 했다. 1237년 문신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은 그 목적을, 옛날 거란을 물리쳤듯 여러 부처와 보살이 몽골을 물리쳐 주기를 비는 것이라고 밝힌다. 역사학자들은 정치적 동기도 본다. 이 사업은 최씨 정권과 조정의 정당성을 보여 주고, 수십 년 전쟁 동안 나라를 공동의 신앙 사업으로 묶는 구실을 했다.

[1][3][8]

중급

어떻게 만들었나: 조직과 교정

사업은 특별 관청인 대장도감이 맡았고, 남쪽 바닷가 남해에 분사대장도감을 두었다. 경판에 새겨진 간행 연도는 1237년부터 1248년까지이며, 『고려사』에 따르면 1251년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 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행차해 분향함으로써 완성을 기념했다.

벌목꾼, 제재공, 필사자, 새김꾼, 인쇄공, 관리 등 수천 명이 참여했을 것이다. 많은 경판의 가장자리에 새김꾼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이 이름을 연구해 작업이 어떻게 나뉘었는지를 복원하기도 한다. 노동력과 목재, 자금은 국가와 최씨 가문, 불교계에서 나왔고, 이미 침략으로 고통받던 백성이 그 부담의 큰 몫을 졌다.

팔만대장경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교정이었다. 개태사의 승통 수기(守其)가 이끄는 팀은 세 가지 앞선 판본, 곧 초조대장경(남아 있던 인본), 중국 북송의 관판 대장경(983년 완성된 개보장), 거란대장경을 서로 대조했다. 판본끼리 다른 곳이 있으면 가장 좋은 읽기를 골랐고, 그 근거를 30권짜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에 남겼다. 당시로서는 드문 이 비판적 교감 방법이 이 판본을 높이 평가하는 핵심 이유다.

경전은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번호를 매겼다. 동아시아에서 방대한 장서를 정리하는 표준 방식으로, 필요한 경판 함을 빨리 찾을 수 있게 했다.

[1][3][5]

중급

대장경에 담긴 것

대장경에는 약 1,500종의 경전이 들어 있다. 『반야경』 계열,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처럼 동아시아 불교의 중심이 된 대승 경전, 『아함경』 같은 초기 불교 경전, 계율서, 인도 여러 학파의 논서, 중국 불교 학자들의 저술이 포함된다.

가장 큰 단일 경전은 중국 구법승 현장이 번역한 600권짜리 『대반야바라밀다경』으로, 대장경의 맨 앞에 놓인다. 팔만대장경의 경전 가운데에는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사라지고 한역본으로만 전하는 것도 있어, 인도 불교 연구에서도 매우 귀중하다.

해인사에는 국가가 새긴 대장경 말고도,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해인사와 여러 후원자가 새긴 수천 장의 경판이 따로 전한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팔만대장경과 이 ‘제경판(諸經板)’을 함께 다루며, 그 가운데 일부는 세계에 하나뿐인 판본이다.

[1][5][3]

중급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그리고 장경판전

전쟁이 끝난 뒤에도 경판은 강화도에, 아마도 선원사에 남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건국 초인 1398년 경판을 강화에서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고, 곧이어 해인사에 이르렀다. 정확한 경로와 해인사 도착 시기는 여전히 논의 중이다.

가야산의 큰 절 해인사에서 경판은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다. 1488년(홍치 원년)에 해당하는 연호가 새겨진 기와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었거나 크게 고친 것이다. 남쪽의 수다라장과 북쪽의 법보전 두 채가 중심 건물로, 각각 정면 15칸의 길고 소박한 건물이며, 경판은 도서관의 책처럼 선반에 세워 꽂혀 있다.

건물은 자연 환기를 하도록 설계되었다. 앞뒤 벽의 창은 크기가 서로 다르고 높이도 다르게 나 있어, 공기가 들어와 경판 사이를 돌고 빠져나가며 습기를 줄인다. 흙바닥에는 숯, 횟가루, 소금, 찰흙이 섞여 있어 습할 때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내놓는다고 한다. 산비탈에 남서향으로 앉은 자리도 그 지역의 바람과 햇빛을 잘 이용한다.

1995년 장경판전은 한국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유네스코는 이 건물이 보존이라는 실제 문제를 전통 건축이 어떻게 풀었는지를 보여 주는 뛰어난 사례라고 평가한다.

[2][4][6][3]

중급

그 뒤의 역사: 인출, 요청, 보존

경판으로 찍은 대장경은 나라 안팎에 나누어졌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일본 사신들은 일본에서 매우 귀하게 여긴 고려 대장경의 인본을 거듭 요청했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조정은 여러 질을 내주었다. 일본은 경판 자체를 달라고까지 했지만 조선 조정은 거절했다.

경판은 1590년대 임진왜란, 해인사의 여러 차례 화재(장경판전은 화를 면했다), 그리고 한국 전쟁을 견뎌 냈다. 1951년 공군 조종사 김영환이 북한 게릴라가 숨어 있던 해인사 일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아 대장경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한다.

20세기에는 인본과 영인본, 뒤에는 디지털판이 나와 전 세계 학자가 본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한문 대장경 판본인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1924–1934)도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았다. 고려대장경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기관이 디지털판을 만들었다.

[3][7][1]

중급

의의와 유산

팔만대장경은 동아시아 인쇄사의 이정표다. 목판 인쇄는 그보다 여러 세기 전에 동아시아에서 발달했고, 고려는 뒤에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1377)도 찍어 냈다. 팔만대장경은 더 오래된 기술을 최고 수준으로, 거대한 규모에 적용한 결과다.

불교 학문의 기념비이기도 하다. 수기의 치밀한 교정 덕분에 고려대장경은 중국, 일본, 그리고 뒤에는 서양 학자들의 표준 참고본이 되었다. 한문 불교 문헌을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도 지금껏 늘 이 판본과 대조한다.

한국에서 팔만대장경은 민족의 끈기와 신앙의 상징이며, 침략 속에서도 지식을 지키려고 엄청난 자원을 쏟은 기록이다. 동시에 역사학자들은 그 대가도 짚는다. 참혹한 전쟁 중에 백성에게 요구된 노동과 물자, 그리고 기도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침입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이다.

[5][3][1]

심화

학계의 논쟁: 어디서, 어떻게 새겼나

어디서 새겼나? 전통적인 견해는 경판을 강화도의 대장도감에서 새기고 남해는 보조 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간기와 분사대장도감을 연구한 결과, 많은 학자는 목재를 구하기 쉬운 남해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서 상당 부분을 새긴 뒤 배로 강화로 옮겼다고 본다. 두 중심의 비중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누가 새겼나? 판 가장자리의 새김꾼 이름에는 승려, 평민, 관직을 가진 사람이 섞여 있다. 어떤 학자는 이 사업을 국가 동원으로 보고, 다른 학자는 개별 경전을 후원한 불교계와 지방 세력의 참여를 강조한다. 이 이름들은 사회사의 드문 자료지만, 같은 이름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신중한 해석이 필요하다.

앞선 판본과는 어떤 관계인가? 교토 난젠지(南禪寺) 등 일본과 한국에 남아 있는 초조대장경 인본 덕분에 두 판본을 직접 비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수기의 팀이 본문을 어떻게 고치고 재편했는지 드러나며, 사라진 개보장과 거란장을 복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언제 해인사에 왔나? 실록의 1398년 기사가 강화에서 옮긴 핵심 증거지만, 경판이 곧바로 해인사로 갔는지, 일부는 이미 다른 곳에 있었는지, 한꺼번에 옮겼는지를 두고 해석이 갈린다.

[1][3]

심화

보존 과학과 공개

8만 장이 넘는 나무 유물이 800년 가까이 살아남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보존 과학자들은 장경판전의 온도, 습도, 공기 흐름 같은 미기후를 측정해 왔고, 대체로 이 자연 환기 체계가 잘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경판은 뒤틀림이나 벌레 피해가 비교적 적다.

2010년대에 81,352판을 헤아린 전수 조사를 비롯한 여러 조사에서 갈라짐, 손상된 금속 장식, 일부 훼손이 발견되어 감시와 신중한 보수 사업이 이어졌다. 건물이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에, 보존 전문가들은 대체로 최소한의 개입을 선호한다.

공개와 보호의 균형은 계속되는 문제다. 장경판전 내부 출입은 제한되어 있고, 해인사는 제한된 안내 탐방을 시도해 왔다. 나무에 부담을 주는 원판 인출은 이제 매우 드물며, 고해상도 영상과 디지털 본문 덕분에 학자들은 경판을 만지지 않고도 연구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유산 과학의 일반적인 교훈을 보여 준다. 건물과 유물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하나를 지키려면 다른 하나를 이해해야 한다.

[2][4][3]

핵심 개념

대장경
경·율·논을 모두 모은 불교 경전 전체. 동아시아에서는 한문으로 된 모음을 가리킨다.
호국 신앙
초조대장경이 거란을 물리쳤다고 믿었듯, 부처의 가호로 몽골을 물리치기를 빌며 대장경을 새겼다.
비판적 교감
수기가 초조대장경·북송판·거란판을 대조하고 교정 근거를 기록해 본문이 매우 정확하다.
목판 인쇄
한 면 전체를 나무에 거꾸로 새겨 같은 책을 여러 번 찍어 내는 기술.
보존을 위한 건축
장경판전의 창과 바닥과 입지가 기계 없이 경판을 마르고 통풍되게 지킨다.
국가와 사회
조정과 최씨 무신정권이 이끌었지만, 수많은 사람의 노동과 후원에 기대었다.
살아 있는 유산
경판은 지금도 수행 도량인 해인사에 있으며, 현대 한문 대장경 판본의 저본이다.

기록

  1. 약 1011년 — 거란 침입 중에 현종이 초조대장경 조판을 시작한다(1087년 무렵 완성).
  2. 1231년 — 몽골이 고려를 침입한다.
  3. 1232년 — 조정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부인사의 초조대장경판이 불탄다.
  4. 1237년 — 이규보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짓고, 가장 이른 간기의 경판이 새겨진다.
  5. 1243년 —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이 본격 활동한다(간기 1243–1247).
  6. 1248년 — 목록을 포함한 마지막 간기의 경판이 완성된다.
  7. 1251년 — 고종이 강화의 대장경판당에서 완성 의식을 올린다.
  8. 1398년 — 경판을 강화에서 서울 쪽으로 옮기고, 이어 해인사로 옮긴다.
  9. 1488년 — 장경판전을 중건한다(기와의 연호).
  10. 1962년 — 해인사 대장경판이 국보로 지정된다.
  11. 1995년 — 장경판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12. 2007년 —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다.

용어 풀이

트리피타카(삼장)
산스크리트어로 ‘세 개의 바구니’. 경·율·논으로 이루어진 불교 경전 전체.
경(經)
부처, 대승에서는 여러 부처와 보살의 가르침으로 전하는 경전.
권(卷)
한 경전을 나눈 책이나 두루마리 하나. 긴 경전은 수십, 수백 권으로 나뉜다.
간기(刊記)
책이나 경판 끝에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적은 기록.
대장도감
대장경 조판을 맡은 고려의 임시 관청.
고려
영어 이름 ‘코리아’의 유래가 된 한국의 왕조(918–1392).
최씨 무신정권
1196년부터 1258년까지 고려 조정을 좌우한 무신 가문의 정권.
장경판전
대장경판을 보관하려고 지은 해인사의 건물.
개보장
북송 때 만들어 983년 완성된 최초의 인쇄 한문 대장경.
양각
바탕을 깎아 내 글자나 무늬를 볼록하게 남기는 새김 방식.

묻고 답하기

왜 ‘팔만’대장경이라고 해요?

경판이 8만 장이 넘기도 하고, 불교에서 사람 마음의 8만 4천 가지 괴로움을 고치는 8만 4천 가지 가르침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에요.

새기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경판에 적힌 해는 1237년부터 1248년까지로, 약 12년이에요. 그 전에 준비 기간이 있었고, 1251년에 완성 의식을 했어요.

대장경이 몽골을 막았어요?

아니요. 전쟁은 계속되었고, 고려는 결국 몽골과 강화해 그 영향 아래 들어갔어요. 하지만 대장경은 살아남아 큰 보물이 되었어요.

나무판이 왜 썩지 않았어요?

나무를 잘 손질하고 옻칠을 한 데다, 무엇보다 해인사 장경판전이 바람을 잘 통하게 해서 습도를 일정하게 지켜 주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경판으로 찍을 수 있나?

원판 인출은 나무에 부담을 주어 이제 매우 드물다. 학자들은 예전 인본, 사진, 디지털판을 쓴다.

고려대장경은 왜 그렇게 정확하다고 평가받나?

수기가 초조대장경·북송판·거란판을 대조하고, 그 근거를 30권의 『교정별록』에 남겼기 때문이다.

경판은 정확히 어디서 새겼나?

강화의 대장도감과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이다. 각각에서, 또 남부의 다른 곳에서 얼마나 새겼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팔만대장경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인가?

아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처럼 8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보는 목판 인쇄물이 있다. 팔만대장경은 원판이 온전히 남은 가장 오래된 완질 대장경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박상국,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동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3.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위키백과
  4.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5. Printing woodblocks of the Tripitaka Koreana and miscellaneous Buddhist scriptures.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6. 해인사 장경판전. 위키백과
  7. Haeinsa. Wikipedia
  8. Mongol invasions of Korea.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 지도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