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850년 전, 몽골의 넓은 초원에서 테무진이라는 아이가 태어났어요. 초원 사람들은 ‘게르’라는 둥근 천막에 살면서, 말과 양과 소에게 먹일 새 풀을 찾아 이곳저곳 옮겨 다녔어요.
테무진이 여덟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적에게 독살당했어요. 남은 가족은 버림받아 아주 가난해졌고, 풀뿌리와 열매, 물고기를 먹으며 버텼어요. 테무진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 강하고 조심성 있게, 그리고 친구와 동맹을 잘 만드는 사람으로 자랐어요.
오랫동안 싸우고 협상한 끝에 초원의 모든 부족이 테무진을 따르게 되었어요. 1206년, 지도자들이 모인 큰 회의에서 그에게 ‘칭기즈 칸’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어요. ‘굳센 임금’ 또는 ‘바다처럼 넓은 임금’이라는 뜻으로 풀이해요.
칭기즈 칸의 군대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데 아주 뛰어났어요. 짐을 적게 지고 빠르게 움직였고, 먼 곳까지 소식을 전할 수 있었지요. 그의 군대는 중국 북부와 중앙아시아의 큰 이슬람 왕국을 정복했어요. 이때 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두려움과 슬픔으로 기억해요.
그가 1227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들과 손자들이 정복을 이어 가서, 몽골 제국은 한반도 근처에서 동유럽까지 뻗었어요. 그 길을 따라 상인과 생각, 발명품, 그리고 병도 오갔어요. 오늘날 몽골에서는 그를 나라를 세운 아버지로 존경하지만,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한눈에 보기
- 본명
- 테무진(Temüjin)
- 출생
- 1162년 무렵(1155년·1167년 설도 있음), 오논강 부근. 오늘날 몽골 북동부 또는 인접한 러시아 지역
- 사망
- 1227년 8월, 서하 원정 도중 오늘날 중국 서북부에서
- 칭호
- 1206년 오논강 가의 쿠릴타이(대집회)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
- 업적
- 초원의 몽골·튀르크계 부족을 통합하고 규율 있는 군대와 국가로 재편, 중국 북부와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정복
- 인명 피해
- 중국에서 이란에 이르기까지 대량 학살, 도시 파괴, 기근, 강제 이주를 낳음
- 후계자
- 셋째 아들 오고타이(우구데이). 1229년 대칸으로 선출
- 주요 사료
- 『몽골비사』(13세기), 주베이니·라시드 앗딘의 페르시아어 역사서, 『원사』 등 중국 사료
쉬움
칭기즈 칸은 누구인가
칭기즈 칸(몽골어로 친기스 칸)은 몽골 제국을 세운 인물이다. 12세기에 테무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집안에서 몽골 초원의 천막 사는 모든 부족을 다스리는 군주로 올라섰다. 1206년 이 부족들의 대집회가 그를 칭기즈 칸으로 추대했다.
그로부터 21년 동안 그의 군대는 탕구트족의 서하, 중국 북부를 다스리던 여진족의 금나라, 그리고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이란을 아우르던 호라즘 제국을 침공했다. 1227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영역은 만주의 태평양 연안에서 카스피해 가까이까지 뻗어 있었다.
후손들은 정복을 더 넓혀 고려, 남송, 러시아, 이란과 이라크까지 손에 넣었다. 13세기 후반 전성기의 몽골 제국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넓은, 하나로 이어진 육상 제국이었다.
칭기즈 칸은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몽골에서는 나라를 세우고 법을 만든 통합자로 존경받는다. 반면 중국, 이란,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에서는 그와 후계자들이 시작한 침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 재앙으로 기억된다. 두 기억 모두 역사의 일부다.
쉬움
초원의 삶
초원(스텝)은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풀밭 띠다. 몽골의 겨울은 혹독하게 춥고 여름은 짧다. 사람들은 대부분 유목민으로 살았다. 말, 양, 염소, 소, 낙타를 치고, 풀과 물을 찾아 한 해에도 몇 번씩 둥근 펠트 천막 게르를 옮겼다.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자마자 말 타기를 배웠다. 남자는 물론 많은 여자도 말 위에서 강한 합성궁을 쏠 줄 알았다. 사냥과 목축, 이동 생활은 큰 무리가 함께 움직이고, 땅을 읽고, 빠르게 이동하는 훈련이 되었다. 이 능력은 그대로 초원 군대의 강점이 되었다.
12세기 초원은 몽골,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등 여러 부족과 씨족으로 갈라져 서로 다투었다. 튀르크어를 쓰는 집단도, 몽골어를 쓰는 집단도 있었고, 불교도, 샤머니즘 신앙인, 동방교회(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도도 있었다. 이웃한 정주 국가, 특히 중국 북부의 금나라는 이들이 서로 싸우도록 부추기곤 했다.
쉬움
고난의 어린 시절과 테무진의 성장
『몽골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오논강 가에서 보르지긴 씨족의 수령 예수게이와,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남자에게서 빼앗아 온 후엘룬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기가 손에 핏덩이를 쥐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장차 정복자가 될 징조로 전해진다. 출생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1162년이 가장 널리 쓰이지만 1155년과 1167년 설도 있다.
테무진이 여덟 살쯤 되었을 때, 예수게이는 그를 옹기라트 부족의 소녀 보르테와 약혼시키러 데려갔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게이는 타타르인에게 독살당했다. 부하들은 과부 후엘룬과 아이들을 버리고 떠났고, 가족은 풀을 캐고 물고기를 잡아 살아남았다. 『몽골비사』는 어린 테무진이 먹을 것을 두고 다투다 이복형제 벡테르를 죽였고, 뒤에 경쟁 씨족 타이치우드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했다고도 전한다.
보르테와 혼인한 테무진은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케레이트 부족의 강력한 수령 토그릴(옹 칸)과 손잡았다. 메르키트가 그의 진영을 습격해 보르테를 납치했을 때, 토그릴과 테무진의 어린 시절 의형제(안다) 자무카가 구출을 도왔다. 곧 첫아들 주치가 태어났는데, 그의 친부가 테무진인지를 두고 뒤에 가족 안에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테무진은 주치를 자기 아들로 받아들였다.
이후 20여 년 동안 테무진은 가문보다 충성과 능력을 보상하며 따르는 무리를 키웠다. 그는 자무카와 갈라서 1187년 무렵 그에게 패했고, 뒤에는 토그릴과도 등을 돌렸다. 1203년 케레이트를, 1204년 나이만을 무너뜨렸으며, 붙잡힌 자무카는 처형되었다. 1205년 무렵 몽골 초원에는 더 이상 그에게 맞설 세력이 남지 않았다.
중급
1206년, 새로운 국가를 세우다
1206년 오논강 발원지에서 열린 쿠릴타이가 테무진을 칭기즈 칸으로 추대했다. 칭호의 뜻은 논쟁거리다. ‘바다’를 뜻하는 튀르크어 낱말과 연결해 ‘온 세상의 군주’라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오래 널리 퍼졌고, ‘굳센’ 또는 ‘사나운’ 군주로 읽는 견해도 있다. 이때부터 그가 다스린 사람들은 통틀어 ‘몽골’이라 불렸다.
칭기즈 칸은 사회를 다시 짰다. 옛 씨족과 부족을 해체하고 사람들을 10호, 100호, 1,000호, 10,000호 단위의 십진 조직(천호제)으로 재배치했다. 각 단위는 병사를 내야 했고, 지휘관은 충성과 능력으로 뽑았는데, 그 가운데 많은 이가 평범한 종자 출신이었다. 이로써 옛 부족 의리가 약해지고 모든 사람이 칸에게 직접 묶였다.
그는 약 1만 명의 친위대 케식을 만들었다. 지휘관의 아들들을 뽑아 채운 케식은 칸을 지키고 궁정 살림을 맡으며 장래의 지휘관을 길러 냈고, 동시에 그 아버지들의 충성을 담보하는 인질 구실도 했다. 양아우 시기 쿠투쿠를 최고 재판관으로 삼아 판결을 문자로 기록하게 했다. 몽골인은 위구르 문자를 빌려 몽골어를 적기 시작했는데, 사로잡힌 위구르인 서기 타타퉁가가 칸의 아들들에게 이 문자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후대 저술가들은 칭기즈 칸이 ‘야사’라는 큰 법전을 반포했다고 적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하나의 성문 법전이 실제로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명령과 판결이 쌓인 것을 야사라 불렀는지를 두고 논쟁한다. 말을 갈아탈 역참을 이어 놓은 유명한 역참제(잠치)도 칭기즈 칸 때 싹텄지만, 제도로 정비한 것은 아들 오고타이였다.
중급
정복: 서하, 금, 호라즘
칭기즈 칸은 먼저 오늘날 중국 서북부의 탕구트 왕국 서하로 눈을 돌렸다. 1205년부터 약탈을 시작해 1209년 본격 침공했고, 서하 왕은 1210년 항복하고 조공을 약속했다. 1211년 몽골은 훨씬 큰 나라인 중국 북부의 금나라를 공격했다. 기병은 금의 야전군을 격파하고 농촌을 휩쓸었으며, 1215년 오늘날 베이징 부근의 금 수도 중도를 함락했다. 금 조정은 남쪽 카이펑으로 달아났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장군 무칼리가 이어 갔고, 1234년 오고타이 때에야 끝났다.
서쪽에서는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카라 키타이(서요)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호라즘 제국의 샤 무함마드 2세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1218년 몽골의 보호를 받던 상인 대상이 국경 도시 오트라르에서 학살당했고, 책임을 물으러 간 몽골 사신도 살해되었다. 칭기즈 칸은 1219년 침공으로 응답했다.
호라즘 원정(1219–1221)은 중세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 부하라, 사마르칸트, 우르겐치, 메르브, 니샤푸르를 비롯한 대도시가 함락되었다. 항복한 도시에서는 주민 다수가 목숨을 건졌지만 숙련 장인은 몽골로 끌려갔고, 저항한 도시에서는 주민이 대량 학살당하는 일이 잦았으며, 포로는 인간 방패로 군대 앞에 내몰렸다. 농업을 떠받치던 관개 시설도 파괴되었다. 샤 무함마드는 도망치다 카스피해의 섬에서 죽었고, 아들 잘랄 앗딘은 1221년 인더스강에서 패할 때까지 저항했다.
그사이 장군 제베와 수부타이는 정찰군을 이끌고 카스피해를 돌아 캅카스를 넘어 1223년 칼카강에서 루스 제후와 쿠만(킵차크) 연합군을 격파했다. 몽골로 돌아온 칭기즈 칸은 군사를 보내지 않은 서하를 치러 1226년 마지막 원정에 나섰다. 그는 1227년 8월 서하 수도를 포위하던 중에 죽었고, 도시는 곧 함락되어 서하는 멸망했다.
중급
몽골군의 전쟁 방식과 그 대가
몽골군은 거의 전부 말 탄 궁수였다. 병사마다 말을 여러 마리 거느려 놀라운 속도를 냈다. 정찰, 거짓 후퇴, 포위, 멀리 떨어진 여러 부대의 합동 기동을 능숙하게 썼다. 정보도 그만큼 중요했다. 상인과 투항자에게서 정보를 모았고, 공포를 의도적으로 활용했다. 도시에 항복이냐 파멸이냐를 고르게 해, 다른 도시들이 싸우지 않고 항복하도록 만든 것이다.
처음에 몽골군에게는 공성 무기가 없었지만, 곧 한족·거란·무슬림 기술자를 받아들여 투석기와 여러 공성 기계를 만들었다. 군대는 튀르크, 거란, 여진, 한족, 이란계 병사와 관리가 섞인 다민족 집단이 되었다.
인명 피해는 막대했다. 이슬람 세계의 이븐 알아시르 같은 동시대 저술가와 중국의 연대기 작가들은 학살과 기근, 지역 전체의 인구 감소를 기록했다. 중세 사료에 나오는 숫자, 이를테면 한 도시에서 100만 명 넘게 죽었다는 기록은 거의 틀림없이 과장이고, 몽골 정복 전체의 사망자 수에 대한 현대 추정치도 편차가 매우 크다. 그러나 전쟁이 대량 학살과 노예화, 강제 이주를 낳았고 중국 북부와 호라산 일부 지역이 회복하는 데 여러 세대가 걸렸다는 데에는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희생자에게 이것은 제국 건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재앙의 이야기였다.
중급
죽음과 매장, 그리고 후계자들
칭기즈 칸은 1227년 8월에 죽었다. 사인은 확실하지 않다. 『몽골비사』는 1226–27년 겨울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다친 뒤 병을 얻었다고 전하고, 다른 사료는 병사를 말하며, 후대에는 훨씬 극적인 전설이 많이 지어졌다. 유해는 몽골로 옮겨져 비밀리에 묻혔다. 무덤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는 헨티산맥의 성산 부르칸 칼둔 부근이 거론된다.
죽기 전 칭기즈 칸은 땅과 백성을 가족에게 나누어 주었다. 보르테가 낳은 아들은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톨루이였다. 주치와 차가타이의 다툼 때문에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정했고, 1229년 쿠릴타이가 그를 대칸으로 추인했다.
오고타이와 그 뒤의 칸들 아래에서 제국은 고려, 러시아와 동유럽, 이란과 이라크(1258년 바그다드 함락), 그리고 마침내 중국 전역으로 넓어졌다. 중국에서는 손자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세웠다. 1260년대에 이르러 제국은 중국의 원, 이란의 일 칸국,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 서부 초원의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이라는 네 개의 큰 칸국으로 나뉘었다.
중급
유산: 연결과 파괴
어떤 역사학자들은 정복이 끝난 뒤 몽골의 지배가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비교적 안전한 이동 공간,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를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상인, 외교관, 선교사, 장인이 중국과 이란과 유럽 사이를 오갔고,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 같은 여행자가 그 뒤를 따랐다. 의학, 천문학, 지도 제작, 인쇄술, 화약에 관한 지식이 이 길을 따라 움직였다. 몽골은 대체로 여러 종교를 용인했고 다양한 출신의 인재를 등용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이 ‘평화’가 정복 위에 세워졌으며 그 혜택이 주로 지배층과 상인에게 돌아갔다고 지적한다. 물건을 나르던 같은 연결망이 질병도 퍼뜨렸다. 많은 학자는 1340년대의 흑사병이 몽골 세계가 만든 교통로를 따라 서쪽으로 번졌다고 보지만, 구체적인 경로는 아직 연구 중이다.
정치적 유산도 오래갔다. 수백 년 동안 중앙아시아와 초원에서는 칭기즈 칸의 후손, 곧 ‘황금 씨족’만이 정당한 칸으로 인정받았다. 티무르 왕조에서 무굴 제국, 크림 칸국의 군주들까지 저마다 방식으로 그와의 연결을 내세웠다. 2003년에 발표되어 널리 인용된 유전학 연구는 아시아의 넓은 지역에서 남성의 약 8퍼센트가 공유하는 Y염색체 계통을 찾아내고 그것이 칭기즈 칸 가계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이는 증명이 아니라 가설이다.
심화
기억과 나라별 시각
몽골: 사회주의 시기(1924–1990)에는 칭기즈 칸을 공개적으로 숭배하는 일이 억눌렸고, 1962년 탄생 800주년 기념 계획은 정치적 숙청으로 이어졌다. 1990년 이후 그는 몽골 민족 정체성의 중심 상징이 되었다. 지폐에 초상이 실리고, 울란바토르의 관문 공항에 그의 이름이 붙었으며, 촌진 볼도그에는 거대한 기마상이 서 있다. 몽골 역사학은 국가 건설과 법, 통합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 중국 왕조 사학은 그를 원나라의 추존 시조 태조로 다루고,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를 중화 민족 전체의 영웅으로 제시하며 내몽골 오르도스에 그와 관련된 유물을 모신 능원을 운영한다. 많은 몽골인은 이 해석에 반대하며 그를 어디까지나 몽골의 영웅으로 본다.
이란·중앙아시아·아랍 세계·러시아: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역사 서술에서 몽골 침입은 이슬람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재난 가운데 하나로 기억된다. 러시아의 역사 기억에서는 그 뒤 루스 공국들이 받은 몽골-타타르 지배(이른바 ‘타타르의 멍에’)가 낙후의 원인으로 여겨져 왔고, 일부 유라시아주의 사상가와 역사학자가 이 견해에 도전했다. 유럽에서는 ‘야만적 정복자’라는 옛 이미지가, 잭 웨더포드의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원제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004) 같은 대중서에서 근대를 연 정치가의 초상으로 바뀌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는 이런 초상이 반대 방향으로 지나쳤다고 본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두 면을 함께 붙들려 한다. 유라시아를 다시 짠 국가를 세운 뛰어난 조직가이자 군사 지도자이면서, 그의 원정이 엄청난 규모의 고통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종종 그 인물 자체만큼이나 평가하는 이들의 국가사를 드러낸다.
심화
사료와 그 문제들
『몽골비사』는 몽골인이 스스로 남긴 유일한 주요 기록이다. 13세기 몽골어로 지어졌으나 주로 명나라 때 한자로 소리를 옮기고 한문 풀이를 단 형태로 전한다. 저술 시기는 논쟁 중이다. 끝부분에 쥐해라고 적혀 있어 1228년(칭기즈 칸 사후 곧), 1240년, 1252년, 1264년 등으로 읽히며, 여러 단계에 걸쳐 불어났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칸에게 불리한 이야기까지 담은 생생하고 내밀한 기록이지만 역사와 서사시적 이야기가 뒤섞여 있고 연대가 모호한 곳이 많다. 이고르 드 라케윌츠의 주석 영역본(Brill, 2004)이 표준 학술판으로 꼽힌다.
페르시아어 역사서가 두 번째 기둥이다. 몽골을 섬긴 아타 말리크 주베이니는 1260년 무렵 『세계 정복자의 역사』를 완성했고, 난민으로 델리에서 글을 쓴 주즈자니는 적대적인 시각을 보여 준다. 14세기 초 일 칸국에서 편찬된 라시드 앗딘의 『집사(集史)』는 지금은 사라진 몽골 공식 연대기 『알탄 뎁테르(황금책)』를 바탕으로 했다. 중국 사료로는 『성무친정록』과, 명나라 초 1369–70년에 서둘러 편찬된 『원사』가 있다.
각 전통에는 저마다의 의도가 있다. 몽골 사료는 가문을 영광스럽게 그리고, 페르시아 저술가들은 정복자를 섬기거나 그들을 피해 달아났으며, 중국 정사는 몽골을 왕조 체계 안에 끼워 넣는다. 사료가 10여 개 언어로 쓰였기 때문에 칭기즈 칸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몽골어, 페르시아어, 한문, 아랍어, 튀르크어 등 여러 분야의 문헌학적 협력이 필요하다. 고전적인 현대 연구로는 파울 라츠네프스키의 전기(영역본 Genghis Khan: His Life and Legacy, Blackwell, 1991)가 있다.
새로운 증거도 그림을 바꾸고 있다. 카라코룸을 비롯한 몽골 유적의 고고학, 13세기 초 유난히 습한 해가 이어져 말을 먹일 풀이 풍부했을 수 있다는 환경사 연구, 고대 DNA 연구가 문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새 정보를 더한다. 다만 이 방법들에도 저마다 불확실성이 있고, 칭기즈 칸의 무덤 위치 같은 질문에는 아직 답하지 못한다.
핵심 개념
- 쿠릴타이
- 칸을 선출하고 전쟁을 결정하던 몽골 지도자들의 대집회. 1206년 테무진이 여기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
- 천호제(십진 조직)
- 사람들을 10·100·1,000·10,000 단위로 나누어 옛 부족을 해체하고 모두를 국가에 직접 묶은 제도.
- 가문보다 충성
- 비천한 출신이나 옛 적이라도 충성과 능력이 있으면 지휘관으로 발탁했다.
- 정복과 공포
- 몽골의 원정은 뛰어난 군사 기술에 의도적 학살을 더해 항복을 강요했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
- 황금 씨족
- 수백 년 동안 초원에서는 칭기즈 칸의 후손만이 정당한 칸으로 인정받았다.
- 팍스 몽골리카
- 몽골 지배가 유라시아 횡단 교류를 쉽게 했다는 생각. 실제로 얼마나 평화롭고 이로웠는지는 논쟁 중이다.
- 엇갈린 기억
- 몽골에서는 건국의 아버지, 중국 사학에서는 왕조의 시조, 서아시아·중앙아시아 다수 지역에서는 파괴자로 기억된다.
기록
- 약 1162년 — 오논강 가에서 테무진이 태어난다(1155년·1167년 설도 있음).
- 약 1171년 —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인에게 독살되고 가족이 버림받는다.
- 약 1187년 — 테무진이 옛 의형제 자무카에게 패한다.
- 1203년 — 테무진이 토그릴과 케레이트를 무너뜨린다.
- 1204년 — 나이만을 격파하고, 붙잡힌 자무카가 처형된다.
- 1206년 — 오논강 발원지의 쿠릴타이가 그를 칭기즈 칸으로 추대한다.
- 1209년 — 서하를 본격 침공하고, 서하는 1210년 항복한다.
- 1211년 — 몽골군이 중국 북부의 금나라를 침공한다.
- 1215년 — 금의 수도 중도(오늘날 베이징 부근)가 함락된다.
- 1219년 — 1218년 오트라르 사건 뒤 호라즘 제국 침공이 시작된다(~1221).
- 1223년 — 제베와 수부타이가 칼카강에서 루스·쿠만 연합군을 격파한다.
- 1227년 — 칭기즈 칸이 서하 원정 도중 세상을 떠난다.
용어 풀이
- 초원(스텝)
- 나무가 드문 넓고 건조한 풀밭. 유라시아 초원은 헝가리에서 만주까지 이어진다.
- 게르
- 몽골 유목민이 쓰는 둥글고 옮길 수 있는 펠트 천막(유르트라고도 한다).
- 칸
- 튀르크·몽골 세계의 군주 칭호. 대칸(카안)은 여러 칸 위에 선 군주다.
- 안다
- 맹세로 맺은 의형제. 자무카는 경쟁자가 되기 전 테무진의 안다였다.
- 케식
- 칭기즈 칸의 친위대. 궁정 살림을 맡고 지휘관을 길러 내는 학교 구실도 했다.
- 야사
- 칭기즈 칸이 내렸다는 명령·법. 하나의 성문 법전이었는지는 논쟁 중이다.
- 역참(잠)
-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을 이어 놓아 사신과 관리가 빠르게 오가게 한 몽골의 교통·통신 제도.
- 서하
- 오늘날 중국 서북부에 있던 탕구트족의 나라(1038–1227). 몽골에 멸망했다.
- 금나라
- 여진족이 세워 1115년부터 중국 북부를 다스리다 1234년 몽골에 멸망한 왕조.
- 호라즘 제국
- 중앙아시아와 이란을 다스린 튀르크-페르시아계 제국. 1219–1221년 칭기즈 칸의 침공으로 무너졌다.
묻고 답하기
칭기즈 칸이 진짜 이름인가요?
아니에요. 태어났을 때 이름은 테무진이에요. ‘칭기즈 칸’은 1206년에 받은 칭호예요.
칭기즈 칸은 좋은 사람이었나요, 나쁜 사람이었나요?
역사학자들은 한마디로 답하지 않아요. 초원을 하나로 묶고 새 나라를 세운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그의 전쟁으로 아주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어요. 나라마다 그를 아주 다르게 기억해요.
칭기즈 칸의 무덤은 어디 있나요?
아무도 몰라요. 몽골의 헨티산맥 근처 어딘가에 비밀리에 묻혔다고 여겨지지만, 아직 찾지 못했어요.
그의 제국은 얼마나 컸나요?
그가 죽을 때 만주에서 카스피해까지 닿았어요. 손자들 때에는 한반도 근처부터 동유럽까지 이어진, 역사상 가장 넓은 육상 제국이 되었어요.
몽골 정복으로 몇 명이 죽었나요?
믿을 만한 숫자는 없다. 중세 사료의 거대한 숫자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고 현대 추정치도 편차가 크지만, 중국·중앙아시아·이란의 피해가 막대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몽골비사』는 언제 쓰였나?
끝부분의 ‘쥐해’가 1228년, 1240년, 1252년, 1264년 등으로 해석된다. 칭기즈 칸 사후 곧 쓰이기 시작해 여러 단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칭기즈 칸은 ‘야사’라는 법전을 만들었나?
후대 사료는 그렇게 전하지만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많은 역사학자는 야사를 하나의 성문 법전이라기보다 명령과 판례의 집적으로 본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칭기즈 칸. 위키백과
- 몽골비사. 위키백과
- Genghis Khan. Wikipedia
-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Wikipedia
- Mongol Empire. Wikipedia
- Igor de Rachewiltz (역),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A Mongolian Epic Chronicle of the Thirteenth Century. Brill, 2004
- Paul Ratchnevsky, Genghis Khan: His Life and Legacy. Blackwell, 1991
- Michal Biran, Chinggis Khan. Oneworld, 2007
- Timothy May, The Mongol Conquests in World History. Reaktion Books, 2012
- Jack Weatherford,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Crown, 2004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