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Libertatum (중세 라틴어, ‘자유의 대헌장’)

1215년 · 러니미드 (잉글랜드 왕국)

한 문장으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는 1215년 6월 잉글랜드의 존 왕이 러니미드에서 반란 귀족들과 합의한 헌장으로, 평화 조약으로서는 실패했지만 재반포를 거치며 ‘자유인은 적법한 판결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약속 덕분에 법의 지배를 상징하는 문서가 되었다.

마그나 카르타
이미지: Original authors were the barons and King John of England. Uploaded by Earthsound.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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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800여 년 전 잉글랜드에 존이라는 왕이 있었어요.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지고, 귀족들에게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공정한 재판 없이 벌했어요. ‘바론’이라 불린 힘센 대지주들이 몹시 화가 났지요.

1215년 바론들은 반란을 일으켜 런던을 차지했어요. 존 왕은 윈저성에서 멀지 않은 템스강 가의 ‘러니미드’라는 풀밭에서 그들을 만나야 했어요.

그곳에서 그들은 양피지에 라틴어로 쓴 긴 약속 목록에 합의했어요. 왕은 이름을 서명하지 않았어요. 대신 밀랍에 눌러 찍는 커다란 도장인 국새를 사본에 달아 동의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어요.

가장 유명한 약속은 ‘어떤 자유인도 공정한 판결이나 나라의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땅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또 왕은 정의를 팔지도, 거절하지도, 미루지도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어요. 몇 달 만에 왕은 교황에게 헌장을 없애 달라고 했고, 다시 전쟁이 터졌어요. 하지만 존이 죽은 뒤 어린 아들의 정부가 헌장을 여러 번 다시 내놓았고, 1217년부터는 ‘큰 헌장’이라는 뜻의 마그나 카르타로 불렸어요.

훨씬 뒤에 영국과 미국, 그리고 많은 나라 사람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통치자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표시로 기억했어요. 1215년 사본 네 장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두 장은 런던의 영국 도서관에, 한 장은 솔즈베리 대성당에, 한 장은 링컨성에 있어요.

한눈에 보기

무엇
라틴어로 양피지에 쓰고 국왕의 국새로 인증한 자유의 헌장
합의
1215년 6월 15일, 윈저와 스테인스 사이 템스강 가의 풀밭 러니미드. 6월 19일부터 사본 반포
당사자
잉글랜드 왕 존과 반란 귀족들.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중재
내용
약 63개 조항(번호는 1759년에 붙음). 교회의 자유, 봉건 부담, 재판, 삼림, 채무, 도시, 25인 귀족 위원회 등
1215년의 운명
1215년 8월 24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무효 선언. 제1차 바론 전쟁으로 이어짐
재반포
1216년, 1217년(처음 ‘마그나 카르타’로 불림), 1225년, 1297년(성문법으로 등재)
현존 1215년 사본
4점. 영국 도서관 2점, 솔즈베리 대성당 1점, 링컨성 1점(링컨 대성당 소유).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현행법
1297년판 가운데 적법 절차 조항을 포함한 세 조항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여전히 유효

쉬움

마그나 카르타란 무엇인가

라틴어로 ‘큰 헌장’을 뜻하는 마그나 카르타는 1215년 6월 15일 윈저 근처 러니미드에서 잉글랜드의 존 왕이 합의한 권리 헌장이다. 인기 없던 왕과 반란 귀족 무리 사이의 평화 협정으로 작성되었다. 교회의 권리를 보호하고, 귀족들을 불법 구금에서 지키며,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고, 왕이 봉건 가신에게서 거둘 수 있는 부담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

평화 조약으로서는 몇 주 만에 실패했다. 양쪽 모두 서로를 믿지 않았고, 교황은 헌장을 무효로 선언했으며, 내전이 터졌다. 그러나 헌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존이 죽은 뒤 1216년, 1217년, 1225년에 수정된 형태로 다시 반포되었고, 1297년에는 잉글랜드 성문법에 올랐다. 수백 년에 걸쳐 법과 통치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서의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두 가지 이야기를 구분한다. 하나는 1215년 헌장 그 자체, 곧 봉건 왕국에서 귀족과 자유인의 권리를 다룬 실용적이고 흔히 기술적인 합의다. 다른 하나는 주로 17세기부터 만들어진 마그나 카르타의 ‘신화’ 또는 전설로, 이 헌장을 모든 사람의 자유를 보장한 오래된 문서로 보는 시각이다. 이 헌장이 왜 지금도 기억되는지 이해하려면 두 이야기 모두 중요하다.

[1][4][2]

쉬움

귀족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존 왕은 프랑스에도 넓은 영토를 가진 앙주 왕조의 세 번째 왕이었다. 1204년 그는 노르망디와 프랑스 내 영토 대부분을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잃었다. 이를 되찾으려고 10년 동안 귀족들에게서 무거운 세금과 부담금을 거두었다. 1214년 그의 동맹군이 부빈 전투에서 패하면서 원정은 값비싼 실패로 끝났다.

앙주 왕조의 왕들은 흔히 역사가들이 ‘힘과 의지(vis et voluntas)’라 부르는 방식으로 다스렸다.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때로는 왕이 법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존은 귀족이 땅을 상속하거나 결혼하거나 왕실 법정에서 정의를 구할 때 큰돈을 요구했고, 많은 귀족이 왕실에 깊은 빚을 졌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신뢰받지 못했다.

특히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의 반란 귀족들은 ‘교회와 왕국의 자유를 굳게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약 한 세기 전 헨리 1세가 반포한 ‘자유 헌장’을 존이 확인하라고 요구했다. 1215년 5월 그들은 왕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런던으로 진군해 도시를 차지했다. 존은 협상에 동의했다.

[1][6][3]

쉬움

러니미드의 만남

1215년 6월 10일 존은 템스강 남쪽 기슭의 풀밭 러니미드에서 반란 지도자들을 만났다. 이곳은 전통적인 집회 장소였고, 왕의 요새 윈저성과 반란군 기지 스테인스 사이의 중립 지대였다. 헌장 자체도 장소를 ‘윈저와 스테인스 사이의 러니미드’라고 적고 있다.

반란군은 ‘귀족 조항’이라 불리는 문서로 요구 사항을 내밀었다. 약 열흘 동안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이 요구를 완전한 헌장으로 다듬도록 도왔다. 6월 15일 본문이 합의되었고, 6월 19일 반란군은 존에게 충성 서약을 새로 하고 헌장 사본이 공식 반포되었다.

흔히 그려지는 모습과 달리 존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지 않았고 귀족들도 도장을 찍지 않았다. 왕실 서기들이 양피지에 약어투성이 라틴어로 사본을 썼고, 각 사본은 밀랍에 찍은 국왕의 국새로 인증되었다. 적어도 열세 장의 사본이 왕국 곳곳의 주 장관과 주교에게 보내졌다.

[1][7][3]

중급

헌장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

원문은 문단이나 번호 없이 이어서 쓰여 있으며, 오늘날 쓰는 조항 번호는 1759년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이 붙였다. 헌장의 대부분은 귀족에 대한 왕의 봉건적 권리를 다룬다. 2조와 3조는 상속인이 영지를 물려받을 때 내는 ‘상속 상납금’을 정했다. 12조와 14조는 군역 대납금(스커티지)과 일부 부과금을 주교·수도원장·백작·대귀족이 모인 ‘왕국의 공동 협의’를 거쳐서만 거둘 수 있다고 했다.

1조는 잉글랜드 교회가 자유로울 것을 약속했다. 다른 조항들은 과부가 재혼을 강요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런던시와 다른 도시들의 자유를 확인하고, 강의 어살을 없애라고 명하고, 포도주·맥주·옷감의 표준 단위를 정하고, 널리 미움받던 특별법이 적용되는 왕실 삼림의 최근 확장을 되돌리겠다고 약속했다. 10조와 11조는 왕의 특별 보호 아래 있던 유대인 대금업자에게 진 빚을 다루었고, 56조와 57조는 웨일스의 땅과 인질 문제를 다루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39조와 40조다. 39조는 풀어 쓰면, 어떤 자유인도 동등한 신분의 사람들에 의한 적법한 판결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구금되거나 재산을 빼앗기거나 법의 보호 밖에 놓이거나 추방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파멸당하지 않으며, 왕도 그에게 맞서 나서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40조는 “우리는 누구에게도 권리나 정의를 팔지 않고, 누구에게도 거절하거나 미루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1215년에 이는 존의 왕실 사법 남용을 겨냥한 요구였지만, 후대는 이를 적법 절차의 일반 원칙으로 읽었다.

61조, 이른바 ‘보장 조항’은 25인 귀족 위원회를 두었다. 왕이 헌장을 어기고 40일 안에 바로잡지 않으면 위원회는 배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왕의 성과 영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왕을 집단으로 강제하는 이 공식 장치는 새로운 것이었고, 존이 1215년 합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 한 원인이 되었다.

[1][3][9]

중급

실패와 제1차 바론 전쟁

어느 쪽도 평화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위원회에 뽑힌 25인은 모두 반란파였고, 많은 반란자는 군대를 풀지 않았다. 1213년 스스로 교황의 봉신이 되었던 존은 7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헌장이 봉건 주군으로서 교황의 권리를 해친다고 호소했다. 1215년 8월 24일 자 서한에서 교황은 헌장이 ‘수치스럽고 굴욕적이며 불법적이고 부당하다’며 ‘영원히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때는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다. 반란 귀족들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에게 잉글랜드 왕관을 제안했다. 루이는 1216년 잉글랜드에 상륙해 런던에서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고(대관식은 치르지 못했다) 곧 왕국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존은 1216년 10월 병으로 죽고 아홉 살 아들 헨리 3세가 뒤를 이었다.

어린 왕의 섭정 정부는 이름난 기사 윌리엄 마셜과 교황 특사 구알라 비키에리가 이끌었는데, 영리하게도 헌장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1216년 11월 61조 등을 뺀 축소판을 다시 반포해 반란자들을 되돌리려 했다. 1217년 링컨 전투와 샌드위치 앞바다 해전에서 왕당파가 승리하자 루이는 램버스 조약에 동의하고 잉글랜드를 떠났다.

[1][6]

중급

‘대헌장’이 되기까지

1217년 정부는 헌장을 다시 반포하면서 왕실 삼림을 다룬 별도의 ‘삼림 헌장’을 함께 냈다. 둘을 구별하려고 서기들은 큰 쪽을 ‘magna carta libertatum(자유의 큰 헌장)’이라 불렀고, 이것이 곧 마그나 카르타가 되었다. 이 이름은 원래 작은 삼림 헌장과 비교해 ‘큰 헌장’이라는 뜻이었다.

1225년 가스코뉴의 영토를 지킬 돈이 필요했던 헨리 3세는 큰 세금을 받는 대가로 두 헌장을 다시 반포했다. 이번에 왕은 헌장을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의지로’ 준다고 선언했고, 그래서 1225년판은 훨씬 큰 권위를 얻었다. 이것이 확정본이 되었고, 후대 법률가들이 주로 알던 판본도 이것이다. 영국 국립기록원은 이 판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왕들은 흔히 세금을 받는 대가로 헌장을 여러 차례 확인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는 1225년 본문을 다시 반포했고, 이는 법령집에 올라 잉글랜드 법의 일부가 되었다. 같은 해의 ‘헌장 확인서’는 사본을 대성당에 보내 1년에 두 번 백성에게 읽어 주라고 명했다. 에드워드 코크 경에 따르면 헌장은 13세기에서 15세기 사이 32번 재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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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남아 있는 사본

1215년 헌장 사본 열세 장 이상 가운데 네 장이 모두 잉글랜드에 남아 있다. 영국 도서관이 두 장을 소장한다. 하나는 1629년 한 변호사가 골동 수집가 로버트 코튼 경에게 준 것으로, 재단사 가게에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1630년 도버성에서 발견되었는데, 1731년 코튼 문고 화재와 1830년대의 잘못된 보존 처리로 크게 손상되었다. 녹아 버렸지만 국새가 아직 달려 있는 유일한 1215년 사본이다.

링컨 대성당의 사본은 1215년부터 링컨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안전을 위해 미국 포트녹스에 보관되었다. 지금은 링컨성에서 1217년 삼림 헌장 원본과 나란히 전시된다. 옛 올드 세이럼 대성당에 처음 전달된 솔즈베리 대성당의 사본은 흔히 가장 잘 보존된 사본으로 꼽힌다. 필체가 다른 셋과 달라, 대성당 사람이 쓰고 왕실이 인증한 것으로 보인다.

후대 판본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1216년판은 더럼에 한 장, 1217년판은 옥스퍼드 보들리언 도서관과 헤리퍼드에, 1297년판은 런던의 국립기록원과 길드홀, 캔버라 국회의사당, 그리고 소유자에게서 장기 대여된 워싱턴 D.C.의 미국 국립기록원에 있다. 2009년 유네스코는 1215년 사본 네 장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

[1][5][4]

심화

코크, ‘고래의 헌정’, 그리고 신화의 탄생

15세기 중엽 마그나 카르타는 정치의 중심에서 상당히 밀려났지만, 법률가들은 특히 재산권 보호에 여전히 이 헌장을 썼고, 1508년부터 나온 인쇄본이 본문을 퍼뜨렸다. 초기 인쇄업자들은 1225년판을 바탕으로 해서 헌장을 존이 아니라 헨리 3세의 것으로 잘못 알리기도 했다.

16세기 말부터 골동학자들은 ‘고래의 헌정(ancient constitution)’이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노르만 정복으로 무너진 앵글로색슨의 자유가 1215년에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17세기 초 판사이자 의원인 에드워드 코크 경은 왕권신수설을 내세운 스튜어트 왕들에 맞서 마그나 카르타를 거듭 활용했다. 그와 동료들은 헌장이 배심 재판, 인신 보호 영장, 의회의 권한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1628년 권리 청원은 전문에서 이 헌장을 인용했다. 랠프 터너와 클레어 브레이 같은 현대 역사가는 코크의 해석을 시대착오적이라 비판했고, J. C. 홀트는 코크의 시대에 이미 헌장의 역사가 왜곡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휘그 사관은 마그나 카르타를 잉글랜드 자유의 건국 문서로 만들었다. 1870년대 윌리엄 스텁스의 『잉글랜드 헌정사』가 이 해석의 정점이었다. 1890년대부터 F. W. 메이틀랜드, 그리고 1904년 「마그나 카르타의 신화」라는 논문을 쓴 에드워드 젠크스 등은 헌장을 13세기의 맥락으로 되돌려, 일반 민중의 자유가 아니라 귀족의 권리에 관한 문서로 보았다.

[1][9]

심화

미국과 세계 속의 마그나 카르타

잉글랜드 식민자들은 마그나 카르타의 이념을 대서양 건너로 가져갔다. 대부분 코크가 기초한 1606년 버지니아 특허장은 정착민에게 잉글랜드 태생과 같은 자유를 약속했고, 매사추세츠 자유 법전은 헌장의 적법 절차 조항을 되풀이했다. 1687년 윌리엄 펜은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마그나 카르타를 인쇄해 펴냈다. 미국 혁명 때 식민지인들은 마그나 카르타가 보장한다고 믿은 권리를 지키려 싸운다고 주장했다.

미국 헌법 수정 제5조는 누구도 ‘적법 절차 없이 생명, 자유, 재산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동등한 신분의 사람들에 의한 적법한 판결이나 국법’을 ‘적법 절차(due process of law)’로 바꾸어 쓴 1354년 법령을 거쳐 헌장에서 내려온 것이다. 미국 국립기록원은 1297년 사본과 함께 이 연결을 관람객에게 소개한다. 1957년 미국 변호사 협회는 러니미드에 기념물을 세웠다.

헌장의 영향은 대영 제국을 통해서도 퍼졌다. 1297년 법령의 29장은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주·준주에서 지금도 유효하다. 세계 곳곳의 운동가와 법원이 마그나 카르타를 내세웠지만, 대개는 실제 법이라기보다 상징으로서였다. 그 유산은 잉글랜드 보통법의 확산과 얽혀 있으며, 그 과정에서 고유한 법 전통이 밀려난 식민지 사회들의 경험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1][4][7]

심화

오늘날 역사가들의 논쟁

현대 학계는 마그나 카르타를 잉글랜드와 유럽 여러 곳에서 권리를 밝히고 왕권을 제한한 당대의 많은 헌장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 언어는 헨리 1세의 자유 헌장, 도시에 준 특허장, 교회와 귀족 법정의 관행에서 왔다. 역사가들은 이 헌장이 얼마나 좁게 귀족을 위한 문서였고 얼마나 그 너머에 닿았는지 논쟁한다. 헌장은 한정된 범주인 ‘자유인’을 말했지만, 일부 조항은 과부, 상인, 도시, 그리고 16·20·28조에서는 농노까지 다루었다.

J. C. 홀트의 『마그나 카르타』(초판 1965)는 헌장을 당대의 정치사상과 행정 관행 속에 놓았다. 헌장이 ‘정치 이론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고 말한 데이비드 카펜터는 헌장의 작성과 사본을 연구했는데, 2015년에는 도버에서 발견된 영국 도서관의 손상된 사본이 캔터베리 대성당에 보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2013년 피터버러 수도원 등록부에서 초안이 발견되고, 2025년 하버드의 1300년 확인본이 원본으로 확인된 것은 문서 연구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 준다.

역사가들은 헌장이 주변부 집단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도 연구한다. 유대인 채권자에 관한 조항은 1290년 추방될 잉글랜드 유대인 공동체의 불안정한 처지를 반영하며, 헌장의 약속은 부자유민이 많던 사회에서 ‘자유인’에게 한 것이었다. 동시에 W. L. 워런이 말했듯, 내용을 잘 모르는 많은 이들도 그 이름을 불러냈는데, 그것은 헌장이 적힌 것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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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법의 지배
왕도 ‘힘과 의지’가 아니라 왕국의 법과 관습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 헌장에 오래가는 힘을 준 핵심이다.
적법한 판결과 국법
자유인은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39조의 약속. 뒤에 ‘적법 절차’와 연결되었다.
팔지 않는 정의
왕이 정의를 팔거나 거절하거나 미루지 않겠다는 40조의 서약. 왕실 법정 이용에 돈을 받던 존의 관행을 겨냥했다.
과세 동의
일부 봉건 부과금은 ‘왕국의 공동 협의’가 필요했다. 뒤에 세금에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쓰였다.
위원회를 통한 강제
61조의 25인 귀족 위원회는 왕이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할 합법적 방법을 만들려는 급진적 시도였다.
헌장과 신화
1215년 헌장은 봉건적 합의였으며, 보편적 자유의 보장이라는 명성은 대부분 17세기에 만들어졌다.
살아 있는 상징
거의 모든 조항이 폐지되었지만, 마그나 카르타는 자유와 국가 권력을 둘러싼 논쟁에서 여전히 강력한 상징으로 불린다.

기록

  1. 1100년 — 헨리 1세가 자유 헌장을 반포한다. 1215년 반란군은 그 확인을 요구한다.
  2. 1204년 — 존 왕이 노르망디와 프랑스 내 앙주 영토 대부분을 필리프 2세에게 잃는다.
  3. 1214년 — 존의 동맹군이 부빈에서 패하고 프랑스 원정이 실패한다.
  4. 1215년 — 반란군이 런던을 차지하고(5월), 6월 15일 러니미드에서 헌장이 합의되며, 8월 24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무효를 선언한다. 제1차 바론 전쟁이 시작된다.
  5. 1216년 — 프랑스의 루이가 침공하고, 10월 존이 죽으며, 11월 헨리 3세의 섭정 정부가 수정 헌장을 반포한다.
  6. 1217년 — 링컨과 샌드위치에서 왕당파가 승리하고 램버스 조약이 맺어진다. 헌장이 삼림 헌장과 함께 다시 반포되어 마그나 카르타로 불린다.
  7. 1225년 — 헨리 3세가 세금을 받는 대가로 ‘자유 의지로’ 헌장을 재반포한다. 이것이 확정본이 된다.
  8. 1297년 — 에드워드 1세가 헌장을 재반포하고, 헌장이 법령집에 오른다.
  9. 1628년 — 에드워드 코크 경이 지지한 권리 청원이 찰스 1세에 맞서 마그나 카르타를 인용한다.
  10. 1759년 — 윌리엄 블랙스톤이 1215년 헌장 교정본을 내고 오늘날 쓰는 조항 번호를 붙인다.
  11. 1791년 — 적법 절차 조항(수정 제5조)을 포함한 미국 권리장전이 비준된다.
  12. 2015년 — 800주년. 1215년 사본 네 장이 영국 도서관에 함께 전시된다.

용어 풀이

헌장(차터)
통치자가 반포하고 인장으로 인증한, 권리나 특권을 부여하는 공식 문서.
바론(귀족)
군역 등의 의무를 지는 대가로 왕에게서 직접 땅을 받은 유력 영주.
국새
밀랍에 눌러 문서에 달아 왕의 승인을 보여 주는 왕의 공식 인장.
인증 사본(exemplification)
국새를 달아 공식 반포한 헌장 사본. 현존하는 1215년 사본 하나하나가 이에 해당한다.
상속 상납금(relief)
상속인이 봉건 영지를 물려받을 때 주군에게 내던 돈.
군역 대납금(스커티지)
‘방패 돈’. 군역을 치르는 대신 왕에게 내던 돈.
왕실 삼림
사냥과 왕실 수입을 지키려고 특별한 왕실 법을 적용한 땅. 꼭 숲이 아니어도 되었다.
적법 절차
국가가 누군가를 처벌하기 전에 공정하고 정해진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원칙.
인신 보호 영장(해비어스 코퍼스)
구금된 사람을 법정에 데려와 구금이 합법인지 가리게 하는 법원의 명령.
섭정
군주가 너무 어리거나 다스릴 수 없을 때 그를 대신해 하는 통치.

묻고 답하기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했나요?

아니요. 중세 왕들은 헌장에 서명하지 않았어요. 사본은 밀랍에 찍은 국새로 인증했지요. 존이 펜으로 서명하는 그림은 후대의 상상이에요.

마그나 카르타는 모든 사람에게 권리를 주었나요?

1215년에는 아니었어요. 대부분의 조항은 귀족, 교회, ‘자유인’에 관한 것이었고, 잉글랜드에는 부자유민이 많았어요. 후대 사람들이 그 원칙을 훨씬 넓게 해석했지요.

마그나 카르타는 지금도 법인가요?

1297년판 가운데 교회의 자유, 런던시의 자유, 적법한 판결과 정의에 관한 세 조항만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유효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왜 ‘큰’ 헌장이라고 부르나요?

1217년 더 작은 삼림 헌장과 함께 반포되었기 때문에 서기들이 큰 쪽을 ‘큰 헌장’이라 불렀습니다. 명성보다 크기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어디서 합의했나요?

서리주 템스강 가의 풀밭 러니미드입니다. 윈저의 왕과 스테인스의 반란군 사이 중립 지대였습니다. 풀밭 안의 정확한 지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미국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식민지인들은 이 헌장을 잉글랜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서로 보았고, 수정 제5조의 ‘적법 절차’라는 표현은 그 언어에서 내려왔습니다. 1297년 사본 한 장이 미국 국립기록원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왜 그 이야기의 일부를 신화라고 하나요?

17세기 법률가들은 헌장이 옛 앵글로색슨의 자유를 되찾고 배심 재판과 인신 보호 영장을 보장했다고 주장했습니다. 19세기 이후 연구는 이것이 13세기 봉건 문서를 잘못 읽은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도 그 신화 자체가 실제 정치사를 움직였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Magna Carta. Wikipedia
  2. 마그나 카르타. 위키백과
  3. Magna Carta 1214–1225. The National Archives (UK)
  4. Magna Carta. U.S. National Archives
  5. Magna Carta. Salisbury Cathedral
  6. First Barons’ War. Wikipedia
  7. Runnymede. Wikipedia
  8. Charter of the Forest. Wikipedia
  9. J. C. Holt, Magna Carta (3rd e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10. David Carpenter, Magna Carta. Penguin Classics, 201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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