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건물은 보통 벽돌이나 돌, 나무를 쌓아 올려서 지어요. 그런데 랄리벨라의 교회들은 거꾸로 만들었어요. 일꾼들은 바위 언덕 꼭대기에서부터 교회가 아닌 부분을 모두 쪼아 내고, 둘레에 깊은 도랑을 팠어요. 가운데 남은 부분이 벽, 지붕, 창문, 기둥까지 모두 갖춘 교회가 되었지요. 돌 한 덩어리로 된 교회예요.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산골 마을 랄리벨라에는 이런 교회가 열한 채 있어요. 가장 유명한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는 십자가 모양이에요. 교회 전체가 네모난 구덩이 바닥에 서 있어서, 땅 위에서는 교회 지붕을 내려다보게 돼요. 커다란 돌 장난감이 구멍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지요.
에티오피아 그리스도인들은 랄리벨라라는 왕의 이야기를 전해요. 그가 아기였을 때 벌 떼가 그를 둘러쌌는데, 어머니는 이것을 그가 위대해질 징조로 여겼대요. 나중에 그는 자기 나라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라는 환상을 보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 마을에는 요르단이라는 개울이 있고, 성지의 이름을 딴 교회들이 있어요.
천사들이 도왔다는 옛이야기도 있어요. 낮에는 일꾼들이 돌을 깎고, 밤에는 천사들이 일을 이어 갔다는 거예요. 역사학자들은 솜씨 좋은 많은 사람이 망치와 끌로,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이 교회들은 박물관이 아니에요. 사제들이 날마다 기도하고, 성탄절과 팀카트 축제 때면 흰옷을 입은 순례자 수천 명이 와서 노래하고 기도하며 축제를 즐겨요.
한눈에 보기
- 무엇
- 살아 있는 바위를 깎아 만든 통바위(모놀리식)·반(半)통바위 교회 열한 채. 도랑과 터널로 이어져 있다
- 위치
- 에티오피아 북부 고원 암하라주 라스타 지방의 랄리벨라(옛 이름 로하), 해발 약 2,500m
- 시기
- 전승상 게브레 메스켈 랄리벨라 치세(1181~1221년 무렵). 학자들은 7~8세기부터 14세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다고 보기도 한다
- 건립
- 전승에 따르면 자궤 왕조(1137~1270년 무렵)의 랄리벨라 왕이 명했다
- 구성
- 북쪽 무리(5채), 동·남쪽 무리(5채), 따로 떨어진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베테 기요르기스)
- 종교
- 에티오피아 정교회(테와흐도 교회). 특히 겐나(성탄절, 1월 7일)와 팀카트(주현절, 1월 19일)에 순례자가 몰린다
- 지위
-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구상
- 요르단이라는 개울과 성지 이름을 딴 교회들로 이루어진 상징적 ‘새 예루살렘’
쉬움
랄리벨라 암굴 교회군이란?
랄리벨라는 에티오피아 북부 산지, 암하라주 라스타 지방의 해발 약 2,500m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 주변에 중세 교회 열한 채가 있는데, 이 교회들은 지은 것이 아니라 깎은 것이다. 일꾼들이 언덕의 단단한 화산암을 아래로 파 내려가 만들었다. 넷은 주변 바위와 완전히 떨어진 독립된 바위 덩어리이고, 나머지 일곱은 한 면 이상이 아직 바위와 붙어 있다.
마을의 옛 이름은 로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181~1221년 무렵 다스린 자궤 왕조의 왕 게브레 메스켈 랄리벨라에게서 왔다. 에티오피아 전승은 이 교회들을 그가 만들었다고 전하며,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한다.
교회들은 요르단이라는 작은 계절 하천을 사이에 두고 모여 있다. 다섯 채는 북쪽에, 다섯 채는 남·동쪽에 있고, 가장 유명한 십자가 모양의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는 서쪽에 따로 서 있다. 각 무리 안의 교회들은 도랑, 통로, 터널로 이어진다.
이곳은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가장 먼저 오른 유산 가운데 하나다. 많은 고대 유적과 달리 원래 용도를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다. 사제와 수도사, 수녀들이 이곳에 살며 예배하고,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들에게 가장 거룩한 순례지 가운데 하나다.
쉬움
유적을 ‘읽는’ 법: 땅속의 교회
처음 온 사람에게 가장 낯선 것은 교회를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다는 점이다. 아래로 파 내려가 만들었기 때문에 지붕이 주변 땅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고, 벽을 보려면 깊은 도랑 속을 내려다봐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바위를 깎아 낸 좁은 통로를 따라 내려간다.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베테 기요르기스)가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십자가 모양으로 깎아서, 위에서 보면 건물 전체가 땅에 새긴 그리스도교의 상징처럼 읽힌다. 교회는 네모난 구덩이 바닥에 홀로 서 있고, 좁게 굽이도는 도랑을 따라가다 교회 가까이에서 터널로 바뀌는 길로 닿는다. 보통 가장 늦게 만들어졌고 가장 잘 보존된 교회 가운데 하나로 본다.
다른 교회들도 저마다 다르다. 베테 메드하네 알렘(‘세상의 구세주의 집’)은 커다란 직사각형 교회로, ‘랄리벨라 십자가’라는 유명한 행렬용 십자가를 모시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일 수도 있는 베테 마리암(‘마리아의 집’)에는 기하학 무늬와 성경 장면을 그린 화려한 벽화가 있다. 베테 골고타에는 드물게 사람 모습을 새긴 부조가 있고, 전승에 따르면 랄리벨라 왕의 무덤이 있다.
세부도 눈여겨보자. 많은 창과 문에는 모서리 부분이 튀어나온 틀이 있고, 어떤 벽은 나무와 돌을 번갈아 쌓은 층을 흉내 낸다. 이것은 고대 에티오피아 왕국 악숨의 나무·돌 혼합 건축 양식을 돌로 옮긴 것으로, 이 양식은 티그라이와 에리트레아의 오래된 교회 건물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쉬움
새 예루살렘
에티오피아 전승에 따르면 랄리벨라는 왕이 되기 전에 환상 속에서, 혹은 실제 여행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에티오피아에 두 번째 예루살렘을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마을의 많은 이름이 이 구상을 따른다. 개울은 예수가 세례를 받은 강의 이름을 따 요르단이라 부르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타와 태어난 베들레헴의 이름을 딴 교회가 있으며, 주변 지형에도 성경의 지명이 붙어 있다.
일부 전문가는 이 구상을 실제 사건과 연결한다. 1187년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이 십자군에게서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예루살렘 순례가 더 어렵고 위험해지자 고국에 거룩한 도시를 재현하려 했다는 해석이다. 다만 이것은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
에티오피아 그리스도인들은 오래전부터 예루살렘, 이집트와 이어져 있었다. 11~12세기에는 이집트에 에티오피아인이 살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고, 예루살렘의 에티오피아인 공동체는 13세기 후반부터 기록되지만 그 이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학자들은 왕이 예루살렘을 충분히 알고 있어 수도의 배치와 이름에 영감을 받았다고 본다.
신자들에게 이 상징은 역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회에서 교회로 걸으며 바위 속으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순례자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떠올리게 하는 거룩한 풍경을 지나간다.
중급
교회를 깎아 낸 방법
암굴 건축은 ‘빼는’ 건축이다. 재료를 더하는 대신 덜어 내서 공간을 만든다. 랄리벨라의 석공들은 먼저 바위 표면에 평면을 표시하고, 교회가 될 덩어리 둘레에 깊은 도랑을 팠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지붕을 다듬고 윗벽을 깎은 다음, 문과 창을 통해 안을 파내어 방·기둥·아치·궁륭을 모두 같은 돌에서 깎아 냈다.
바위는 무른 화산암으로, 연구에 따라 다공질 현무암 또는 화산 응회암으로 설명된다. 막 드러났을 때는 비교적 깎기 쉽지만 시간이 지나면 풍화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보존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다. 도구는 망치와 끌 같은 단순한 것이었다. 실수할 여지는 없었다. 잘못 깎은 기둥은 다시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들은 다른 면에서도 뛰어난 공학의 산물이다. 많은 교회 옆의 우물에는 물이 고이는데, 마을이 자리한 능선의 바위를 통해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자분정(自噴井) 구조 덕분이다. 물은 실용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웅덩이와 우물은 세례 같은 의례에도 쓰였다.
이 모든 일에 얼마나 걸렸는지는 알 수 없다. 1520년대 포르투갈 방문자들은 현지 사제들에게 교회들을 24년 만에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왕의 성인전에 기록된 후대 전승은 밤에는 천사들이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학자 대부분은 작업이 훨씬 오래 걸렸고 여러 단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때로는 먼저 깎아 놓은 구조를 고쳐 만들었다고 본다.
중급
자궤 왕조와 그 세계
교회들은 1137년 무렵부터 1270년까지 에티오피아 북부와 에리트레아의 넓은 지역을 다스린 자궤 왕조 시대에 속한다. 자궤 왕가는 라스타 출신의 아가우(아게우)인이었고, 왕조 이름은 ‘아가우의’라는 뜻의 게에즈어 표현에서 왔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고대 악숨 왕국이 쇠퇴한 뒤 권력을 잡았다.
자궤 왕조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것이 많다. 왕의 수조차 논쟁거리여서, 목록에 따라 다섯, 열하나, 심지어 열여섯 명의 이름이 나온다. 1270년 자궤를 무너뜨리고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후손을 자처한 솔로몬 왕조가 앞선 왕조를 정통성 없는 왕조로 그렸기 때문에, 남은 기록에도 그 시각이 스며 있다.
랄리벨라는 자궤 왕 가운데 가장 기록이 많은 왕이다. 그의 생애는 성인전 『가들라 랄리벨라』에 전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로하에서 태어났고, 아기 때 벌 떼가 그를 둘러쌌다. 그의 이름은 ‘벌들이 그의 주권을 알아본다’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그는 형에게서 왕위를 빼앗기 전까지 여러 해 망명 생활을 했는데,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치세의 토지 하사 문서(1204년, 1225년)와 121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사절단이 남긴 기록도 전한다.
자궤 왕들은 에티오피아 교회의 수장인 아부나를 임명하던 이집트 콥트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역사학자들은 랄리벨라 시대에 에티오피아로 온 콥트 이집트인들이 일부 장식 작업에 참여했을 수 있다고 보지만, 건축 자체는 악숨의 토착 전통을 따른다.
중급
살아 있는 성지
랄리벨라의 교회들은 동방 정교회(오리엔탈 정교회) 가운데 가장 큰 에티오피아 정교회에 속한다. 이 교회의 뿌리는 4세기 악숨 궁정의 개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교회에는 언약궤를 상징하는 축성된 판 ‘타보트’가 있으며, 사제만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안쪽 성소에 모신다.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에도 휘장 뒤에 이런 언약궤 복제물이 있다.
교회에서는 날마다 기도와 예배가 이어지고, 많은 교회가 성직자와 수도사의 거처이기도 하다. 교회마다 고유한 성직자와 행렬용 십자가 같은 보물이 있고, 옛 교회 언어인 게에즈어로 부르는 전례 성가가 울린다.
특히 두 축제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 에티오피아 성탄절인 1월 7일 겐나에는 많은 순례자가 찾아와 며칠에 걸친 예배와 행렬, 음악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가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은 일을 기념하는 1월 19일 주현절 팀카트에는 화려한 천에 싼 타보트를 사제들이 머리에 이고 웅덩이까지 행렬하며, 물을 축복해 신자들에게 뿌린다.
순례자들은 에티오피아 전역과 그 밖에서 찾아온다.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에서는 이곳에 도착한 뒤 숨진 순례자들을 주변 바위벽의 소박한 열린 무덤에 안치했다. 순례자들에게 랄리벨라는 고대 유적이 아니라 거룩함이 머무는 곳이다.
중급
이후의 역사: 방문자, 전쟁, 생존
랄리벨라는 베네치아의 프라 마우로 세계지도(1457~1459)에 ‘랄라베다’로 나온다. 교회를 처음 자세히 묘사한 유럽인은 1520년대 포르투갈 사절단과 함께 온 사제 프란시스쿠 알바레스다. 그는 너무 놀라,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을까 두렵다면서 쓴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느님께 맹세했다.
1530년대 아달 술탄국의 아흐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가지 군대가 에티오피아 고원을 침공했다. 그의 원정 연대기는 그가 랄리벨라 교회 한 채를 불태웠다고 적는다. 역사학자 리처드 팽크허스트는 왕실 연대기에 이런 기록이 없다며 회의적이었고, 사실이라면 베테 메드하네 알렘이나 근처의 비슷한 교회일 것이라고 보았다. 1540년대의 한 포르투갈 병사는 교회를 부수려던 시도가 실패했다고 전했다.
20세기에도 랄리벨라는 에티오피아의 전쟁을 겪었다. 1936년 이탈리아 침공 중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이곳을 순례했고, 곧 이탈리아군이 마을을 점령했다. 1980년대 내전 중에는 반군의 공격으로 관광이 줄었다. 2021년 티그라이 전쟁 때는 마을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2023년에는 연방군과 파노 민병대의 전투가 벌어져 교회들에 대한 국제적 우려가 커졌다.
이런 위험 속에서도 교회들은 대체로 온전히 살아남았다. 살아 있는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지역 공동체가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돌보아 왔다는 점 덕분이다.
중급
보존: 보호 지붕, 비, 엇갈리는 의견
교회들은 무른 화산암을 깎아 만들었고 비바람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 비와 침식이 표면과 조각, 벽화를 늘 위협한다. 교회의 성격을 바꾸거나 예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보호하기란 쉽지 않다.
2008년 유럽연합의 지원으로 교회 다섯 채 위에 임시 보호 지붕 네 개가 세워졌다. 이 지붕들은 계획보다 훨씬 오래 남아 있고, 이제는 무거운 구조물과 지지대가 무너지면 오히려 교회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에티오피아 문화유산 당국은 철거해야 한다고 밝혔지만 장기적 해결책은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
미국 대사관의 지원으로 베테 가브리엘라파엘과 베테 골고타를 복원하는 사업 등 다른 복원 사업도 어려움을 겪었다. 국가 문화유산 당국(ARCCH), 지역 교회 위원회, 외국 협력 기관 사이의 소통이 늘 원활하지는 않았고, 사업 범위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이런 문제는 살아 있는 종교 유적 어디에서나 나오는 기본적 질문을 던진다. 거룩한 장소를 어떻게 보존할지는 누가 정하는가? 날마다 교회를 쓰는 성직자와 순례자, 국내 전문가, 국제기구의 우선순위는 서로 다를 수 있다. 예배와 관광과 보존의 균형은 랄리벨라의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심화
교회는 언제 만들어졌나? 연대 논쟁
전승은 열한 채 모두를 게브레 메스켈 랄리벨라의 것으로 보고, 오래된 교과서들은 1200년 무렵으로 적는다. 그러나 건립을 기록한 비문이나 당대 문헌은 없어, 연대는 전승·양식·고고학에 기댄다. 데이비드 벅스턴은 널리 쓰이는 양식 편년을 세우면서, 두 교회가 데브레 다모와 예므레한나 크레스토스로 대표되는 앞선 건축 전통을 매우 충실히 따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많은 바위를 깎는 일이 한 왕의 치세로는 벅찼으리라 보고, 작업이 14세기까지 이어졌다고 추정했다.
케임브리지의 고고학자 데이비드 필립슨은 더 길고 복잡한 역사를 제시했다. 그는 지금 교회로 쓰이는 베테 메르코리오스, 베테 가브리엘라파엘, 베테 다나겔 등 일부 구조물이 악숨 후기인 대략 600~800년 사이에 요새나 궁전 건물로 처음 깎였다가 뒤에 교회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랄리벨라의 이름은 그가 죽은 뒤 유적 전체에 붙은 것이다.
다른 증거들은 또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지역 역사가 게타추 메코넨은 랄리벨라의 왕비 메스켈 키브라가 남편을 기리려 베테 아바 리바노스를 짓게 했다고 본다. 최근 발굴에서는 900~1100년 무렵의 토기와 동물 뼈가 많이 나와, 이곳이 종교 중심지가 되기 전에는 주로 세속 취락이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랄리벨라 때의 변모와 잘 맞는다. 근처 와샤 미카엘 동굴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의 동물 띠 부조가 발견된 것은 이 지역이 당시 아직 그리스도교화 과정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학자 대부분은 교회들이 자궤 시대의 대규모 작업과 이후의 개수를 포함한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는 데 동의하지만, 어느 교회가 먼저인지, 랄리벨라 자신의 몫이 얼마인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문헌 증거도 부족하다. 1882년에 입수되어 한때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에서 데려온 외국인 일꾼 500명을 기록했다고 소개된 필사본은, 다시 검토해 보니 그런 내용이 전혀 없었다.
심화
토착의 천재인가 외국 장인인가: 양식, 영향, 해석
16세기 이후 유럽 방문자들은 에티오피아인이 이 교회들을 만들 수 있었는지 자주 의심했다. 알바레스는 많은 현지인이 교회를 주로 외국인의 작품이라고 말한다고 기록했고, 뒤에 마누엘 드 알메이다와 히오프 루돌프 같은 저자들은 이집트 건축가의 공으로 돌렸다. 이런 견해는 증거만큼이나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인의 선입견을 반영한 경우가 많았다.
현대 학계는 건축의 토착적 뿌리를 강조해 왔다. 스튜어트 먼로헤이는 베테 아마누엘이 나무 들보가 튀어나온 악숨식 벽 구조를 돌로 재현했고, 틀을 두른 창과 문이 악숨의 거대한 석비에 보이는 모티프를 닮았다고 지적했다. 벅스턴은 일부 장식 세부에 콥트의 영향이 있지만 암굴 교회들은 악숨식 원형을 간직한 지역의 건축 교회 양식을 따른다고 결론지었다. 필립슨은 악숨식 특징만으로 악숨 시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덧붙인다. 악숨 멸망 뒤에도 오래 쓰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강한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 준다.
몇몇 특징은 더 넓은 동방 그리스도교와의 연결을 시사한다. 베테 마리암의 박공지붕과 몰딩은 시리아 교회 건축과 비교되어 왔고, 먼로헤이는 랄리벨라 시대에 많은 콥트 이집트인이 에티오피아로 이주해 장식에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지배적인 견해는 외국의 영향이 에티오피아 건축 전통 안에서 주로 장식 기법에 그쳤다는 것이다.
랄리벨라는 훨씬 더 큰 에티오피아 암굴 교회 전통의 일부이기도 하다. 티그라이에서만 150채가 넘는 암굴 교회가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14~15세기에 깎인 것으로 보이며, 새 암굴 교회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랄리벨라를 외딴 불가사의가 아니라 이 전통 속에서 보면, 그 뛰어난 기술과 이어지는 신앙생활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핵심 개념
- 빼는 건축
- 재료를 더하지 않고 바위를 덜어 내어 만든 건축. 랄리벨라의 벽·기둥·창은 모두 살아 있는 바위를 깎은 것이다.
- 통바위 교회
- 돌 한 덩어리를 깎아 만든 교회. 랄리벨라 교회 가운데 넷은 완전히 독립된 통바위다.
- 새 예루살렘
- 요르단 개울과 성지 이름을 딴 교회들로 거룩한 도시를 에티오피아에 재현한 랄리벨라의 상징적 구상.
- 악숨과의 연속성
- 교회들은 고대 악숨의 나무·돌 건축 양식을 돌로 흉내 내어 깊은 토착적 뿌리를 보여 준다.
- 살아 있는 유산
- 지금도 날마다 예배와 순례에 쓰이며, 이 점이 보존과 관람의 방식을 좌우한다.
- 다단계 편년
- 학자 대부분은 교회들이 한 왕 때 한꺼번에가 아니라 여러 단계에 걸쳐 만들어지고 고쳐졌다고 본다.
- 전승과 역사
- 천사와 환상의 이야기는 유적의 종교적 의미의 일부이며, 역사가들은 이를 고고학·양식 연구와 함께 살핀다.
기록
- 약 330년 — 악숨 궁정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에티오피아 교회가 알렉산드리아 콥트 교회와 이어진다.
- 약 700년 — 데이비드 필립슨에 따르면 뒷날 교회로 쓰인 일부 구조물이 처음 깎였을 수 있는 시기.
- 약 1137년 — 전승에 따르면 자궤 왕조가 권력을 잡는다.
- 약 1181년 — 게브레 메스켈 랄리벨라가 왕위에 오른다(전승상 연대).
- 1187년 —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일부 학자는 이를 랄리벨라의 ‘새 예루살렘’ 구상과 연결한다.
- 약 1221년 — 랄리벨라의 치세가 끝난다(전승상 연대).
- 1270년 — 솔로몬 왕조를 연 예쿠노 암라크가 자궤 왕조를 무너뜨린다.
- 약 1520년 — 포르투갈 사제 프란시스쿠 알바레스가 방문해 유럽 최초의 자세한 기록을 남긴다.
- 1936년 — 이탈리아 침공 중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랄리벨라를 순례한다.
- 1978년 — 랄리벨라 암굴 교회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다.
- 2008년 — 유럽연합의 지원으로 교회 다섯 채 위에 임시 보호 지붕이 세워진다.
- 2021년 — 티그라이 전쟁 중 마을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다.
용어 풀이
- 암굴(암착) 건축
- 따로 떼어 낸 돌을 쌓지 않고 자연 바위를 깎아 만든 건축.
- 모놀리스(통바위)
- 돌 한 덩어리로 된 것.
- 자궤 왕조
- 1137년 무렵부터 1270년까지 에티오피아 북부와 에리트레아를 다스린 아가우인 왕조.
- 악숨
- 1~7세기 무렵 번성한 에티오피아 북부·에리트레아의 고대 왕국.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 타보트
- 언약궤를 상징하는 축성된 판. 모든 에티오피아 정교회 교회의 성소에 모신다.
- 팀카트
-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주현절. 1월 19일에 지낸다.
- 겐나
- 1월 7일에 지내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성탄절.
- 가들라
- 성인의 생애를 전하는 게에즈어 성인전. 예: 『가들라 랄리벨라』.
- 게에즈어
- 고대 에티오피아의 언어. 지금도 에티오피아 정교회 전례에 쓰인다.
- 아부나
- 에티오피아 교회 수장 주교의 칭호. 역사적으로 이집트 콥트 교회에서 임명했다.
묻고 답하기
교회가 정말 바위 한 덩어리로 만들어졌나요?
네. 넷은 주변 바위와 완전히 떨어져 있고, 나머지는 몇 면이 바위와 붙어 있지만, 따로 떼어 낸 돌을 쌓아 지은 교회는 하나도 없어요.
천사들이 정말 도왔나요?
왕의 생애 이야기에 나오는, 많은 신자가 믿는 전승이에요. 역사학자들은 솜씨 좋은 석공들이 오랜 시간 들여 만든 것으로 설명해요. 두 시각 모두 이 유적의 이야기예요.
에티오피아에 왜 요르단이라는 강이 있나요?
랄리벨라를 ‘새 예루살렘’으로 설계했기 때문이에요. 개울에 예수가 세례받은 강의 이름을 붙이고, 다른 곳에도 성경의 지명을 붙였어요.
방문객도 안에 들어갈 수 있나요?
네, 지금도 예배에 쓰이는 교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타보트를 모신 가장 안쪽 성소는 사제만 들어갑니다.
랄리벨라 왕이 열한 채를 모두 지었나요?
전승은 그렇다고 하지만, 많은 학자는 교회들이 여러 단계에 걸쳐 만들어지고 고쳐졌으며, 일부는 그의 치세 이전, 일부는 이후일 수 있다고 봅니다.
몇몇 교회 위에 있는 큰 지붕은 무엇인가요?
무른 바위에 비가 닿지 않도록 2008년에 세운 임시 보호 지붕입니다. 계획보다 훨씬 오래 남아 있어 이제는 보존상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랄리벨라와 악숨은 어떤 관계인가요?
교회들은 에티오피아 북부의 앞선 그리스도교 왕국 악숨의 건축 양식을 돌로 옮겨, 지역 전통과의 강한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Rock-Hewn Churches, Lalibela. Wikipedia
- Lalibela. Wikipedia
- Gebre Meskel Lalibela. Wikipedia
- Zagwe dynasty. Wikipedia
- Church of Saint George, Lalibela. Wikipedia
- Monolithic church. Wikipedia
- Ethiopian Orthodox Tewahedo Church. Wikipedia
- Timkat. Wikipedia
- David W. Phillipson, Ancient Churches of Ethiopia: Fourth–Fourteenth Centuries. Yale University Press, 2009
함께 보기
- 악숨 오벨리스크오늘날 에티오피아의 고대 악숨 왕국에서 세운 석조 장례 기념물이다.
- 하기아 소피아532년부터 537년까지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지은 대성당이다.
- 페트라향료와 향신료를 나르는 사막 대상 무역으로 부유해진 아랍계 민족 나바테아인의 수도. 알카즈네(보물창고)와 알데이르(수도원) 같은 신전과 무덤을 사암 절벽에 직접 깎아 만들었다.
- 그레이트 짐바브웨쇼나인의 선조들이 세우고 거주한 남부 아프리카의 큰 도시 유적이다.
- 킬와 키시와니중세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가장 부유했던 스와힐리 도시국가, 킬와 술탄국의 섬 수도. 산호석으로 지은 모스크·궁전·요새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 아잔타 석굴인도 서부의 불교 석굴군으로, 승원과 예배 공간, 벽화로 알려져 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