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15층 건물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커다란 방에 들어섰다고 상상해 보세요. 머리 위 아주 높은 곳에는 둥근 지붕이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튀르키예의 도시 이스탄불(옛 이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에 들어선 사람들은 거의 1,500년 동안 이런 느낌을 받아 왔어요.
하기아 소피아는 그리스어로 ‘거룩한 지혜’라는 뜻이에요. 동로마 제국,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성당으로 지었어요. 화가 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옛 성당을 불태우자,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건물을 새로 짓게 했어요. 수많은 일꾼이 겨우 5년쯤 만에 완성했답니다.
가장 유명한 곳은 커다란 둥근 지붕, 곧 돔이에요. 돔은 네 모서리의 굽은 벽 위에 얹혀 있는데, 네모난 탁자 위에 공을 올려놓은 모습과 비슷해요. 돔 아래쪽에는 창문이 40개나 빙 둘러 있어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면 돔이 빛의 고리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안쪽 벽은 알록달록한 대리석과, 작은 유리 조각과 금 조각을 붙여 만든 반짝이는 그림으로 덮여 있었어요. 이런 그림을 모자이크라고 해요.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 천사와 황제들의 모습이 있어요.
1453년에 오스만 튀르크가 이 도시를 차지하면서 하기아 소피아는 무슬림이 기도하는 모스크가 되었어요. 바깥에는 미너렛이라는 높은 탑이 세워졌지요. 1935년에는 누구나 구경할 수 있는 박물관이 되었고, 2020년에 다시 모스크가 되었어요. 지금도 기도 시간이 아니면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 건립
- 532–537년(537년 12월 27일 봉헌). 돔이 무너진 뒤 다시 지어 562년 12월 24일 재봉헌
-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 튀르키예 이스탄불) 역사 반도, 옛 대궁전 가까이
- 후원자
-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
- 설계자
-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 두 번째 돔은 소(小)이시도로스
- 규모
- 본당 약 82 × 73m. 중앙 돔 지름 약 31–33m, 바닥에서 높이 55.6m, 돔 아래 창 40개
- 용도 변화
- 대성당(537–1453, 1204–1261년은 라틴 가톨릭 성당) → 모스크(1453–1934) → 박물관(1935–2020) → 2020년부터 다시 모스크
- 지위
-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스탄불 역사 지구’의 일부(1985년 등재)
- 의의
- 고대 후기 건축의 정점이자 비잔티움 건축을 대표하는 기념물. 후대 정교회 성당과 오스만 제국 황실 모스크의 모델
쉬움
하기아 소피아는 무엇인가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 Ἁγία Σοφία, ‘거룩한 지혜’, 튀르키예어 아야소피아)는 골든혼 만과 마르마라해 사이, 이스탄불 역사 반도의 끝자락에 서 있다. 900년이 넘는 동안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성당이었고, 동방 정교회에서 으뜸가는 주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성당이었다. 이름은 소피아라는 성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당은 ‘하느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에게 봉헌되었다.
지금 건물은 이 자리에 세워진 세 번째 성당이다. 앞선 성당이 격렬한 폭동으로 불타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32년부터 537년까지 새로 지었다.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공간이었으며, 펜덴티브라고 부르는 네 개의 굽은 삼각형 구조 위에 얹힌 중앙 돔은 대담한 공학의 산물이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네 번의 삶을 살았다. 537년부터 1453년까지 크리스트교 대성당(제4차 십자군 이후 잠시 라틴 가톨릭 성당), 1453년부터 193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의 황실 모스크, 1935년부터 2020년까지 튀르키예 공화국의 박물관, 그리고 2020년 7월부터 다시 예배하는 모스크다. 시대마다 흔적을 남겨, 지금은 비잔티움 모자이크와 오스만 서예가 같은 벽을 나누어 쓰고 있다.
쉬움
건물을 ‘읽는’ 법: 아래는 네모, 위는 하늘
밖에서 보면 하기아 소피아는 돔과 버팀벽이 산처럼 겹쳐 있고, 네 모서리에 오스만 시대의 가느다란 미너렛이 솟아 있다. 이 덩치의 상당 부분은 건물을 버티려고 여러 세기에 걸쳐 덧붙인 것이다. 처음 의도는 안에 들어가야 더 잘 보인다.
방문객은 서쪽에서 길게 이어진 두 겹의 현관, 곧 바깥 나르텍스와 안쪽 나르텍스를 지나 들어간다. 가운데 문인 ‘황제의 문’은 한때 황제만 드나들었다. 그 너머로 거대한 중앙 공간인 네이브(신랑)가 열린다. 그 중심은 한 변이 약 31m인 정사각형이며, 네 개의 거대한 기둥(피어)이 모서리를 이룬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아치가 걸리고, 아치 사이의 펜덴티브 네 개가 위로 안쪽으로 휘어 올라 둥근 테두리를 만들고, 그 위에 돔이 앉는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반돔 두 개가 공간을 넓히고, 거기서 다시 작은 반돔(엑세드라)이 퍼져 나가, 시선은 곡면의 폭포를 따라 중앙 돔으로 올라간다.
돔 밑동에는 창문 40개가 고리처럼 둘러 있다. 이 창과 벽의 수많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무거운 구조를 녹여, 돔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완공된 성당을 직접 본 역사가 프로코피오스는 돔이 단단한 석조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황금 사슬로 매달린 것 같다고 썼다.
네이브의 세 면은 측랑으로 둘러싸이고, 그 위에는 말굽 모양의 넓은 회랑(갤러리)이 있다. 비잔티움 시대에는 황후와 궁정 사람들이 이 회랑을 썼는데, 서쪽 회랑 바닥의 초록색 원형 돌은 황후의 자리가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동쪽 끝에는 제단이 놓였던 반원형 공간인 앱스가 있다. 오스만 시대에는 여기에 메카의 방향을 가리키는 벽감 미흐라브를 두었는데, 메카가 남동쪽에 있어서 성당의 중심축에서 조금 비껴 있다.
쉬움
왜 지었나: 화재, 폭동, 그리고 황제의 야망
이 자리의 첫 ‘대성당’은 360년 콘스탄티우스 2세 때 봉헌되었다. 404년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 주교의 추방을 둘러싼 소요 때 불탔고, 테오도시우스 2세 때 다시 지은 두 번째 성당이 415년에 봉헌되었다. 그 입구 주랑의 잔해는 지금도 건물 앞에서 볼 수 있다.
532년 1월,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차 경주의 두 응원 집단인 청색당과 녹색당이 손잡고 유스티니아누스에 맞서 들고일어났다. 그들이 외친 “니카!(이겨라!)”에서 이름을 딴 니카 반란이다. 도심 대부분이 불탔고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도 사라졌다. 반란은 히포드롬(전차 경기장)에서 잔혹하게 진압되었는데, 고대 사료는 수만 명이 죽었다고 전한다.
불과 몇 주 뒤 유스티니아누스는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규모로 재건을 시작했다. 새 대성당은 황제가 질서를 되찾았으며 그의 통치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반란 뒤 채 6년이 되지 않은 537년 12월 27일에 봉헌되었다. 완성된 성당에 들어선 황제가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넘어섰노라!”라고 외치며 예루살렘 성전과 견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훨씬 뒤의 문헌에 나오는 전설로,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는다.
중급
돔의 공학: 설계자, 재료, 그리고 붕괴
유스티니아누스는 공사를 두 사람에게 맡겼다. 사료는 이들을 오늘날의 건축업자가 아니라 기하학과 역학의 전문가인 ‘메카니코이’로 부른다. 광학과 반사경에 관한 글을 쓴 수학자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을 편집한 기하학자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다. 이들의 설계는 전통적 성당 평면인 바실리카의 긴 축과, 돔을 얹은 집중형 건물의 형식을 하나로 합쳤다.
벽과 볼트는 주로 벽돌을 아주 두꺼운 모르타르 층과 함께 쌓아 만들었고, 기둥은 돌로 지었다. 대리석은 지중해 곳곳에서 가져왔다. 마르마라해 프로콘네소스섬의 흰 대리석, 테살리아의 초록 돌, 이집트의 붉은 자주색 반암이 쓰였다. 옛 전설은 기둥을 이교 신전에서 약탈해 왔다고 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대부분의 대리석을 새로 캐 왔고 반암만 재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쇠꺾쇠와 철제 띠가 석조를 붙잡아 주었다.
속도에는 대가가 따랐다. 모르타르가 굳기도 전에 다음 층을 쌓았고, 얕은 첫 돔의 무게가 기둥과 벽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553년과 557년의 지진 뒤 558년에 돔 일부가 무너졌다.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소이시도로스가 돔을 약 6m 더 높이, 더 가파른 곡면과 늑골 40개로 다시 지어 바깥으로 미는 힘을 줄였다. 성당은 562년 12월 24일에 재봉헌되었고, 시인 ‘침묵관’ 파울로스가 이를 기념하는 긴 시를 지었다.
그 뒤로도 989년과 1346년 지진 때 부분 붕괴가 있었다. 989년 뒤에는 아르메니아 건축가 트르다트가 서쪽 아치와 돔 일부를 다시 쌓았고, 1346년 뒤에는 1350년대에 보수가 이루어졌다. 이런 보수 때문에 돔은 지금 약간 타원형이며, 6세기의 돔 껍질은 일부만 남아 있다. 비잔티움 황제들이 버팀벽을 덧댔고, 16세기에는 오스만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보강했는데, 그의 보강이 이후 지진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중급
비잔티움의 대성당: 전례, 권력, 모자이크
비잔티움 사람들에게 하기아 소피아는 그냥 ‘대성당(메갈레 에클레시아)’이었다. 수도의 장엄한 전례, 황제 대관식, 중요한 교회 회의와 의식이 여기서 열렸다. 황제와 총대주교가 이곳에서 만나는 의례는 교회와 국가의 이상적 조화를 보여 주었다. 1054년 교황 사절이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는 교서를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 위에 놓았는데, 이 사건은 흔히 가톨릭과 정교회가 갈라선 동서 교회 분열의 상징적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원초 연대기』(러시아 최초의 연대기)는 키이우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보낸 사절들이 980년대에 이곳 예배에 참석하고는 하늘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고 전한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 보고가 블라디미르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야기가 그대로 사실이든 아니든, 이 건물이 예배자에게 주려던 느낌을 잘 보여 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성당은 사람 모습보다 대리석 판, 금빛 모자이크, 십자가로 주로 꾸며졌다. 성상 파괴 운동 시기(726–787, 814–842)에는 종교 형상이 금지되었다. 843년 성상 공경이 회복된 뒤 여러 세기에 걸쳐 인물 모자이크가 더해졌다. 대표작으로는 867년 총대주교 포티오스의 설교와 함께 공개된 앱스의 성모자상(현존 이미지의 연대는 논쟁 중), 남서쪽 입구 위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에게 도시와 성당을 바치는 장면, 남쪽 회랑의 황제·황후 초상, 그리고 성모와 세례자 요한 사이의 그리스도를 그린 감동적인 ‘데이시스’(1261년 직후 제작으로 추정)가 있다.
중급
십자군, 쇠퇴, 그리고 오스만의 정복
1204년 방향을 틀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 제4차 십자군이 도시를 약탈했다. 하기아 소피아도 약탈당해 많은 보물과 성유물이 베네치아를 비롯한 서유럽 도시로 실려 갔다. 이후 57년 동안 십자군 통치 아래 라틴 가톨릭 대성당이 되었다. 공격을 이끈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 성당에 묻혔으며, 19세기에 놓은 표지가 지금도 동쪽 회랑의 추정 위치를 가리킨다.
비잔티움은 1261년 수도를 되찾았지만, 되살아난 제국은 가난했고 영토는 줄어들었다. 14세기의 지진 피해는 어렵사리 보수되었다. 15세기 초 방문자들은 성당이 퇴락했다고 적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사흘 동안 약탈이 이어졌고,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한 사람들은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어 메흐메트는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라고 명했고, 곧 금요 예배가 열렸다. 정교회 신자들에게 도시의 함락과 대성당의 상실은 오래도록 재앙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 오스만과 후대 튀르크인에게 정복은 나라를 세운 승리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복자를 칭송했다고 전하는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의 성취로 기억되었다.
중급
아야소피아: 오스만 제국의 황실 모스크
모스크가 된 아야소피아는 이스탄불 최초의 황실 모스크였고, 자선 재단(와크프)의 풍부한 기부를 받았다. 오스만인들은 미흐라브와 설교단(민바르)을 들였고, 차츰 미너렛 네 개를 세웠다. 첫 미너렛은 정복 직후에, 서쪽의 큰 두 개는 16세기 후반 시난이 세웠다. 사람 모습의 모자이크는 서서히 회반죽이나 칠로 덮였지만, 여행자들의 기록을 보면 일부는 오랫동안 보였다. 건물 둘레에는 술탄들의 묘당, 학교, 세정용 샘 등이 들어섰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스만 건축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시난은 이 건물을 보강하면서 구조를 연구했고, 이스탄불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와 에디르네의 셀리미예 모스크 같은 자신의 작품에서 그 돔에 맞서고 넘어서려 했다. 17세기 초 바로 맞은편에 완공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 모스크’)도 중앙 돔과 반돔의 구성을 발전시킨 것이다.
1847년부터 1849년까지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스위스계 이탈리아인 건축가 가스파레 포사티와 주세페 포사티 형제에게 복원을 맡겼다. 형제는 쇠사슬로 돔을 조였고, 기울어진 기둥을 바로잡았으며, 발견한 모자이크를 기록한 뒤 다시 덮었다. 서예가 카자스케르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가 하느님(알라), 예언자 무함마드, 네 정통 칼리파, 예언자의 두 손자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을 쓴 지름 수 미터의 둥근 나무판 여덟 개가 네이브에 걸렸고,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중급
박물관, 그리고 다시 모스크: 현대의 하기아 소피아
튀르키예 공화국이 세워진 뒤 건물은 1931년 복원을 위해 문을 닫았다. 그해부터 토머스 휘트모어가 이끄는 미국 비잔틴 연구소가 모자이크를 드러내 보존하기 시작했다. 1934년 각료회의 결정으로 박물관이 되어 1935년에 문을 열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 공화국에게 박물관은 이 건물을 한 종교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보여 주는 방식이었다. 박물관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기념물이 되었고,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스탄불 역사 지구’에 포함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모스크로 되돌리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2020년 7월 10일 튀르키예 최고 행정법원인 국가평의회(다니슈타이)는 1934년 결정을 무효로 하면서, 건물은 메흐메트 2세가 세운 재단의 소유이며 모스크 외의 용도로 쓸 수 없다고 판결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곧 건물을 종무청으로 넘겼고, 7월 24일 금요 예배가 열렸다.
튀르키예와 다른 나라의 많은 무슬림은 이를 모스크의 회복으로 반겼다. 반면 그리스 정부, 정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 지도자, 유네스코, 그리고 일부 튀르키예 작가와 정치인은 인류 공동의 기념물이 민족적·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었다고 비판했다. 현재 공식 명칭은 ‘하기아 소피아 대모스크’다. 기도 시간이 아니면 방문객에게 열려 있으며, 기도 중에는 앱스 모자이크처럼 예배 공간을 향한 크리스트교 형상을 휘장이나 조명으로 가린다. 출입, 보존, 비잔티움 장식의 보호를 둘러싼 문제는 여전히 국제적 논의 대상이다.
중급
영향과 유산
하기아 소피아는 세 전통의 종교 건축에 기준을 세웠다. 정교회 세계에서는 키이우와 노브고로드 등지에 ‘성 소피아’라는 이름의 대성당이 세워졌고, 대개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돔을 얹은 성당이 비잔티움과 슬라브 성당의 전형이 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15–17세기 오스만 고전기 모스크의 형태를 빚었다. 서구에서는 19–20세기 건축가들이 그 돔과 반돔을 의식적으로 본뜬 신(新)비잔틴 양식 성당을 지었다.
로마의 판테온은 돔 지름이 더 넓지만, 그 돔은 두꺼운 원통형 벽 위에 얹혀 있다. 하기아 소피아의 업적은 사방으로 트인 네모난 공간 위에 지름 30m가 넘는 돔을 높이 들어 올린 데 있으며, 여러 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넓은 실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공학자들은 이 건물을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지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 주는 실험실로 연구해 왔다.
마지막으로 하기아 소피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상징이다. 정교회 신자에게는 잃어버린 비잔티움의 심장이고, 많은 튀르키예인에게는 1453년 정복의 기념물이며, 세속주의 튀르키예인과 많은 외국 방문객에게는 공존을 상징하던 박물관이었다. 이 건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함께 이해하는 일이다.
심화
학계의 논쟁과 열린 질문
첫 번째 돔. 537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원래 돔은 남아 있지 않아, 프로코피오스의 서술, 558년 붕괴를 전하는 요안네스 말랄라스와 테오파네스의 연대기, 그리고 현존하는 기둥·아치·펜덴티브의 분석으로 모양을 복원해야 한다. 대부분의 복원안은 더 얕은 돔, 어쩌면 펜덴티브와 한 곡면으로 이어진 돔을 가정한다. 그러나 정확한 단면, 창의 역할, 그리고 붕괴 원인으로서 급한 공사·지진 피해·기둥 변형이 각각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롤런드 메인스톤 같은 연구자와 마크·차크막 편 논문집의 필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의된다.
설계와 척도. 설계는 수학을 익힌 건축가들의 기하학 작업으로 분석되어 왔다. 한 변 약 31m인 중앙 정사각형은 오랫동안 비잔티움 척도 100피트로 여겨졌지만, 건축사가 헬게 스벤숀은 √2의 근삿값을 주는 고대의 변·대각선 수열(70 : 99)과 관련된 99피트를 제안했다. 매력적인 가설이지만, 여러 번 변형되고 보수된 건물에서 증명하기는 어렵다.
모자이크의 연대. 앱스 성모자상의 연대는 논쟁 중이다. 어떤 학자는 이를 포티오스가 867년에 묘사한 이미지로 보지만, 다른 학자는 포티오스가 서 있는 성모를 말한 반면 모자이크의 성모는 앉아 있다는 점을 들어, 현존 이미지를 성상 파괴 이전, 989년 지진 이후, 심지어 1346년 붕괴 뒤인 14세기 후반으로 본다. 데이시스도 보통 양식을 근거로 1261년 이후로 보지만, 명문이 아니라 비교에 기댄 판단이다.
유산과 의미. 2020년 이후 학자들은 논쟁적 역사를 지닌 살아 있는 종교 건물에 세계유산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지 토론해 왔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박물관 지위를 요구하는지, 국가와 종교 공동체의 권리를 국제적 관심과 어떻게 조정할지, 모스크 안의 크리스트교 미술을 어떻게 보여 줄지 하는 문제다. 이는 미술사만큼이나 법, 윤리, 정치의 문제다.
심화
증거와 연구 방법
문헌 사료. 가장 중요한 동시대 문헌은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오스가 유스티니아누스를 찬양하려고 쓴 『건축에 관하여』(De aedificiis)로, 제1권이 하기아 소피아로 시작한다. 목격자의 서술이지만 찬양문이기도 해서, 신의 영감이나 황제 개인의 역할에 관한 주장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562년 재봉헌 때 침묵관 파울로스가 지은 운문 묘사(에크프라시스)는 설비, 조명, 전례 배치를 자세히 전한다. 요안네스 말랄라스와 테오파네스 같은 연대기 작가는 붕괴를 기록했다. 9세기의 『하기아 소피아 건축 이야기(나라티오)』는 솔로몬 이야기를 비롯한 전설로 가득해, 6세기의 사실보다 후대 비잔티움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 주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
시각·기록 자료. 서구 여행자들의 그림, 포사티 복원 기록(현재 스위스 티치노주 문서고 소장), 1930년대 비잔틴 연구소의 사진과 보고서는 어떤 모자이크가 있었는지, 얼마나 복원되거나 사라졌는지(예컨대 1894년 이스탄불 지진) 알려 주는 필수 자료다.
건물 자체. 벽돌 도장, 모르타르 분석, 이음매와 변형은 건설과 보수의 단계를 드러낸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공학자들은 측량, 레이저 스캐닝, 지표 투과 레이더, 중력 측정, 지진 거동 컴퓨터 모델로 구조를 연구했고, 건물 주변 발굴에서는 5세기 성당과 주변 시설의 잔해가 드러났다. 2020년대 중반에는 돔을 지진에 대비해 보강하는 대규모 보존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방법론의 교훈. 하기아 소피아는 하나의 6세기 기념물이 아니라 비잔티움, 라틴, 오스만, 공화국 시대의 개입이 겹겹이 쌓인 팰림프세스트(거듭 쓴 양피지)다. 연구자는 이 층들을 구분하되, 각 층 역시 건물 역사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
핵심 개념
- 펜덴티브 돔
- 네 개의 굽은 삼각형 면이 네모난 평면을 둥근 받침으로 바꾸어 그 위에 돔을 얹는 방식. 하기아 소피아는 가장 이르고 큰 사례 가운데 하나다.
- 거룩한 지혜
- 소피아라는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 곧 말씀(로고스)인 그리스도에게 봉헌되었다는 뜻.
- 빛의 건축
- 창, 금빛 모자이크, 윤이 나는 대리석으로 거대한 구조를 가볍고 천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법.
- 황제의 교회
- 대성당은 황제와 총대주교가 교회와 국가의 협력을 보여 주는 무대였다.
- 겹겹의 유산
- 비잔티움, 라틴, 오스만, 현대 튀르키예 시기가 모두 건물을 바꾸었고, 각 층이 모두 그 의미의 일부다.
- 건축의 모델
- 중앙 돔과 반돔의 구성은 정교회 성당, 오스만 황실 모스크, 후대의 신비잔틴 건축에 영감을 주었다.
- 논쟁적 상징
- 정교회 신자, 무슬림, 세속주의 튀르키예인, 세계 사람들에게 서로 다르고 때로 충돌하는 의미를 지닌다.
기록
- 360년 —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이 자리의 첫 대성당이 봉헌된다.
- 415년 — 404년 화재 뒤 테오도시우스 2세가 지은 두 번째 성당이 봉헌된다.
- 532년 — 니카 반란으로 두 번째 성당이 불타고, 몇 주 뒤 유스티니아누스가 지금 건물을 짓기 시작한다.
- 537년 — 12월 27일 하기아 소피아가 봉헌된다.
- 558년 — 잇따른 지진 뒤 첫 돔 일부가 무너진다.
- 562년 — 소이시도로스가 더 높게 다시 지은 돔과 함께 12월 24일 재봉헌된다.
- 1054년 — 교황 사절이 파문 교서를 제단에 놓는다. 동서 교회 분열의 상징적 시작.
- 1204년 —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1261년까지 라틴 가톨릭 대성당이 된다.
- 1453년 — 5월 29일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꾼다.
- 1847년 — 술탄 압뒬메지트 1세의 명으로 포사티 형제가 대규모 복원을 시작한다(1849년까지).
- 1935년 — 튀르키예 공화국의 박물관으로 문을 연다.
- 2020년 — 국가평의회가 박물관 결정을 무효로 하고, 7월 24일 다시 모스크로 문을 연다.
용어 풀이
- 비잔티움 제국
-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다스린 동로마 제국을 부르는 현대의 이름.
- 펜덴티브
- 네모난 받침과 둥근 돔을 잇는 굽은 삼각형 석조 부분.
- 네이브(신랑)
- 성당의 중심이 되는 넓은 공간.
- 나르텍스
- 성당 정면을 가로지르는 현관 복도.
- 앱스
- 성당 동쪽 끝의 반원형 공간으로, 제단이 놓이는 곳.
- 모자이크
- 색돌, 유리, 금박 유리의 작은 조각(테세라)을 붙여 만든 그림.
- 성상 파괴 운동
- 종교 형상을 거부하거나 파괴한 운동. 비잔티움에서는 726–787년과 814–842년에 공식 정책이었다.
- 미흐라브
- 모스크 벽에서 기도 방향인 메카 쪽을 가리키는 벽감.
- 미너렛
- 모스크 곁에 세워 기도 시간을 알리는 높은 탑.
- 와크프
- 이슬람법에서 재산을 종교적·공익적 목적에 바친 자선 재단.
- 에크프라시스
- 미술품이나 건물을 글, 흔히 운문으로 묘사한 작품.
묻고 답하기
‘하기아 소피아’는 무슨 뜻인가요?
그리스어로 ‘거룩한 지혜’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에게 바친 성당이었어요.
그렇게 큰 돔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지었나요?
유스티니아누스가 막대한 재원과 수많은 일꾼을 모았어요. 돔은 네 개의 커다란 기둥 위 펜덴티브에 얹혀 있고, 비교적 가벼운 벽돌과 모르타르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너무 서두른 탓에 첫 돔은 558년에 일부 무너져 더 높게 다시 지어야 했어요.
하기아 소피아는 성당인가요, 모스크인가요?
둘 다였어요. 537–1453년에는 성당, 1453년부터 1930년대까지는 모스크, 1935–2020년에는 박물관이었고, 2020년부터 다시 모스크예요.
지금도 크리스트교 모자이크를 볼 수 있나요?
기도 시간이 아닐 때는 많은 모자이크를 볼 수 있어요. 기도 중에는 앱스의 성모자상처럼 예배 공간을 향한 형상을 천이나 조명으로 가려요.
누가 설계했나요?
수학과 역학을 연구한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예요. 558년 붕괴 뒤에는 소이시도로스가 새 돔을 설계했어요.
비잔티움 건물에 왜 미너렛이 있나요?
1453년 뒤 모스크가 되면서 오스만인들이 세웠어요. 지금의 미너렛 네 개는 15–16세기의 것이에요.
프로코피오스의 서술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프로코피오스는 건물을 직접 보고 생생하게 묘사했지만, 『건축에 관하여』는 유스티니아누스를 찬양하는 글이어서 역사가들은 구조적 증거와 다른 사료로 교차 검토합니다.
2020년 모스크 재전환은 왜 논란이 되었나요?
지지하는 쪽은 메흐메트 2세가 세운 모스크를 되찾은 일로 보았고, 유네스코와 여러 교회를 비롯한 비판하는 쪽은 인류 공동 유산의 성격을 국제적 협의 없이 바꾸었고 정치적 메시지가 담겼다고 보았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Historic Areas of Istanbul.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Hagia Sophia. Wikipedia
- 하기아 소피아. 위키백과
- Nika riots. Wikipedia
- Anthemius of Tralles. Wikipedia
- Procopius. Wikipedia
- Mimar Sinan. Wikipedia
- Thomas Cohen, Hagia Sophia.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15
- Rowland J. Mainstone, Hagia Sophia: Architecture, Structure and Liturgy of Justinian’s Great Church. Thames and Hudson, 1988
- Robert Mark and Ahmet Ş. Çakmak (eds.), Hagia Sophia from the Age of Justinian to the Pres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