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1971년 여름, 충청남도 공주에서 일꾼들이 옛 왕릉에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도랑을 파고 있었어요. 그런데 삽 끝에 벽돌이 걸렸어요. 벽돌 뒤에는 1,400년 넘게 아무도 열지 않은 문이 있었어요.
그 안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었어요. 도굴꾼이 한 번도 찾지 못해서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요. 불꽃처럼 생긴 금관 꾸미개, 금 귀걸이, 금동 신발, 청동 거울, 용이 새겨진 칼, 그리고 수천 개의 구슬이 나왔어요.
입구에는 뿔이 하나 달린 작은 돌짐승이 왕을 지키는 강아지처럼 서 있었어요. 그 앞에는 글씨가 새겨진 납작한 돌 두 장이 놓여 있었어요. ‘백제 사마왕이 523년 예순두 살에 돌아가셔서 2년 뒤 묻혔고, 왕비는 529년에 함께 묻혔다’는 내용이었어요. 옛 한국 왕의 무덤 가운데 누가 묻혔는지 확실히 아는 곳은 여기뿐이에요.
무덤도 특별해요. 연꽃무늬가 찍힌 벽돌 수천 장으로 중국 남쪽 나라의 무덤처럼 쌓았거든요. 왕과 왕비의 관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소나무 종류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무덤 하나가 백제가 중국과 일본 모두와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셈이에요.
지금 진짜 무덤은 보호를 위해 닫혀 있지만, 옆에 실물 크기 모형이 있고 보물들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조성
- 무령왕(523년 사망, 525년 안장)과 왕비(526년 사망, 529년 합장)
- 위치
-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백제 도읍 웅진)
- 형식
- 터널형 천장의 벽돌무덤(전축분). 중국 남조 양나라 무덤 양식
- 무덤방
- 길이 약 4.2m, 너비 약 2.7m, 높이 약 2.9m, 앞에 널길
- 발견
-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 도굴되지 않음
- 출토품
- 처음 집계로 108종 약 4,600점(국립공주박물관의 새 보고서는 5,232점으로 정리). 이 가운데 12건이 국보(1974)
- 핵심 명문
-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을 적은 지석 2매와 매지권
- 지위
- 사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2015)의 일부
쉬움
무령왕릉은 무엇인가
무령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 낮은 언덕에 있는 왕릉입니다. 6세기 초 공주는 웅진이라 불렸고, 고대 한국 삼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의 도읍이었습니다. 이 무덤은 지금 공식적으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라고 부르는 왕릉 무리에 속합니다.
무령왕은 501년부터 523년까지 백제를 다스렸습니다. 475년 고구려가 서울 근처의 옛 도읍을 함락하고 여러 왕이 잇달아 살해되던 혼란기 뒤에 나라를 다시 일으킨 왕입니다. 아들 성왕이 525년 그를 이곳에 묻었고, 529년 왕비를 곁에 합장했습니다.
이 무덤이 유명한 이유는 셋입니다. 도굴되지 않아 6세기 왕실 장례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줍니다. 무덤 주인의 이름을 적은 돌이 있는데, 이는 고대 한국 무덤에서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리고 벽돌과 관과 부장품이 백제가 중국 남조, 일본, 멀리 동남아시아와도 이어져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쉬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
밖에서 보면 무덤은 둥근 흙더미입니다. 그 아래로 비스듬한 길을 따라가면 좁은 널길(입구 통로)이 나오고, 이어서 남북으로 긴 네모난 무덤방이 있습니다. 벽과 천장은 벽돌로 쌓았고, 천장은 터널처럼 둥글게 휘어 있습니다. 많은 벽돌에는 불교에서 깨끗함을 상징하는 연꽃무늬가 찍혀 되풀이되는 무늬를 이룹니다.
벽에는 아치형 창문 모양의 작은 감실이 있어 등잔을 놓았습니다. 안쪽에는 벽돌로 높인 관대가 있어 나무관 두 개를 얹었는데, 왕은 동쪽, 왕비는 서쪽에 모셨습니다. 관 아래와 둘레에는 왕과 왕비가 몸에 지니거나 함께 가져간 물건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널길에는 쇠뿔 하나가 달린 네발 달린 돌짐승(진묘수)이 바깥을 향해 서서 나쁜 기운을 막았습니다. 그 앞에 지석 두 장이 있었고, 그 위에는 마치 땅값을 치르듯 중국 동전 꾸러미가 놓여 있었습니다.
쉬움
왕과 왕비의 보물
가장 유명한 유물은 금관 꾸미개 두 쌍입니다. 얇은 금판을 오려 타오르는 불꽃이나 식물처럼 만들고 작은 금 달개를 달아,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게 했습니다. 박물관 분석으로는 거의 순금입니다. 천이나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은 금 귀걸이, 금은 장식 허리띠, 길이 40cm 가까운 금동 신발을 갖추었습니다. 신발은 걷기에는 너무 크고 약해서 장례용으로 만든 것입니다. 곁에는 고리 모양 손잡이 안에 왕권의 상징인 용을 넣은 고리자루 큰칼이 있었습니다. 왕비에게는 만든 장인 ‘다리(多利)’의 이름이 새겨진 은팔찌와, 붉게 칠하고 금으로 꾸민 나무 베개·발받침이 있었습니다.
사방을 지키는 신령한 동물과 신선을 새긴 청동 거울, 중국 청자 항아리, 등잔, 많은 유리구슬도 나왔습니다. 출토품은 세는 방식에 따라 수가 달라서, 처음에는 약 4,600점으로 집계되었고 국립공주박물관의 새 보고서는 5,232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지금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급
지석과 매지권
두 지석은 각각 약 35×41cm 크기로, 중국 남조 서풍의 단정한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왕의 지석은 중국식 칭호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과 ‘백제 사마왕’으로 시작합니다. 계묘년(523) 5월에 예순두 살로 세상을 떠나 을사년(525) 8월 큰 무덤에 모셨다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의 명문은 땅을 산 문서, 곧 매지권입니다. 왕이 돈 1만 문으로 토지신과 저승의 관리들에게서 무덤 자리를 샀다는 내용입니다. 죽은 이에게 무덤에 대한 법적 권리를 주어 귀신과 뒷사람의 침범을 막는 중국의 장례 풍습으로, 삼국 시대 무덤에서 나온 매지권은 이것이 유일합니다. 왕비를 묻을 때 덧새긴 왕비의 지석에는 526년에 세상을 떠나 서쪽 땅에서 상을 치르고 529년 무덤에 모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글들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알려 줍니다. 무덤 주인을 확정해 줍니다. 무령왕이 523년 5월에 죽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확인하고 보완합니다. 왕의 이름이 사마(斯麻)였음을 보여 주는데, 『일본서기』도 그를 ‘시마’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521년 양 황제가 준 중국식 칭호를 무덤 안에서까지 썼다는 점에서, 왕이 죽어서도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고자 했는지 보여 줍니다.
왕과 왕비 모두 죽음과 안장 사이에 약 27개월의 간격이 있는데, 이는 중국식으로 계산한 유교의 삼년상과 맞습니다. 1996년 옛 왕궁 터 서쪽인 공주 정지산에서 건물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많은 연구자는 이곳을 이 기간 동안 시신을 모신 빈전으로 봅니다.
중급
어떻게 지었나: 백제 땅의 중국식 무덤
웅진 시대 이전 백제 왕릉은 돌무지무덤이나 굴식 돌방무덤이었습니다. 무령왕릉은 전혀 다른 기술을 썼습니다. 장인들은 천장용 쐐기 모양 벽돌을 비롯해 여러 모양의 벽돌 수천 장을 구웠고, 많은 벽돌에 연꽃무늬를 찍었으며, 벽돌을 눕혀 쌓기와 세워 쌓기를 번갈아 했습니다. 터널형 천장, 등잔 감실, 관대 배치는 모두 육조, 특히 난징 일대 양나라 벽돌무덤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백제는 512년과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양나라 역사서는 무령왕이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백제는 이런 교류를 통해 벽돌 기술, 어쩌면 장인까지 얻었을 것입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벽돌무덤인 송산리 6호분에는 남조풍 주제인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이 무덤에서 나왔다고 알려진 벽돌에는 ‘양나라 관청 기와를 본보기로 삼았다’는 뜻으로 흔히 읽히는 명문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복제는 아닙니다. 무덤의 비례, 벽돌 색의 배치, 등잔 놓는 방식에는 백제의 선택이 드러나고, 부장품도 중국 수입품과 백제식 물건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을 백제가 남조의 모델을 받아들여 고쳐 만든 것으로, 조정이 국제적 연결을 과시하고자 하던 시기의 산물로 설명합니다.
한국에서 알려진 벽돌무덤은 몇 기뿐이고 모두 공주 일대에 있습니다. 538년 사비 천도 뒤 백제 왕실은 부여 능산리에서 보듯 다시 굴식 돌방무덤으로 돌아갔습니다. 공주의 벽돌무덤은 남조 영향이 짧고 강렬하게 나타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중급
세 바다에서 온 물건들: 중국, 일본, 그 너머
부장품은 백제의 연결망을 지도처럼 보여 줍니다. 중국 남부에서는 월주요나 홍주요 계통으로 보이는 청자, 지석 위에 놓인 양나라 오수전, 그리고 청동 거울 일부가 왔을 것입니다. 지석과 매지권 자체도 중국의 장례 형식을 따릅니다.
관은 일본에서만 자연적으로 자라는 금송(고야마키)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무는 대한해협을 건너 배로 실어 왔을 것이며, 백제와 왜 지배층 사이의 귀한 선물이나 교역품이었다고 추정됩니다. 다른 백제 왕릉에서도 금송 관이 확인되었고, 고고학자들은 무덤의 청동 그릇과 장례 풍습을 오사카의 다카이다야마 고분 같은 같은 시기 일본 무덤과 비교합니다.
무덤에서 나온 유리구슬에 대한 과학 분석은 일부 유리가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에서 왔을 가능성을 보여 주며, 이는 부남과 벵골만을 둘러싼 해상 세계와의 간접 교류를 뜻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아직 다듬어지는 중이지만, 6세기 한국의 한 왕실이 인도양까지 이어진 교역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일본서기』는 개인적인 연결 고리도 전합니다. 무령왕이 가족이 왜로 가던 길에 쓰쿠시(북규슈)의 가카라시마라는 섬에서 태어나 ‘시마(섬)’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연구자들은 이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루지만, 무덤의 일본산 관재는 그의 시대 백제와 왜의 가까운 관계를 물질로 보여 줍니다.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무덤을 짓고 닫은 525~529년은 유라시아 곳곳이 분주한 때였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527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가 되었고, 529년 칙법휘찬 초판을 내놓아 뒷날 『로마법 대전』으로 불리는 로마법 대편찬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무렵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가 이탈리아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웠다고 전해지며(529년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는 카바드 1세 아래에서 마즈다크 운동으로 흔들리다 531년 호스로 1세가 즉위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무령왕에게 칭호를 준 양 무제가 527년 처음으로 동태사에 몸을 바쳤습니다. 무령왕의 동쪽 이웃 신라에서는 527년 또는 528년 이차돈이 순교해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길이 열렸습니다. 일본에서는 527년 북규슈에서 이와이의 난이 일어났는데, 『일본서기』가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전하는 섬과 가까운 곳입니다.
무령왕릉의 중국식 벽돌 구조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관은, 백제 왕실이 사신·장인·교역으로 이어진 동아시아 교류망 안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한 세기 뒤 잉글랜드 동부의 서튼 후 배 무덤에서도 또 다른 왕가가 수입 보물로 죽음 속의 지위를 드러냈습니다. 두 무덤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지만, 나란히 보면 멀리 떨어진 통치자들이 외래의 물건과 양식을 권력의 표시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급
발견과 서두른 발굴
발견은 우연이었습니다. 1971년 7월, 일꾼들은 6호분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봉분 뒤에 배수로를 파고 있었습니다. 7월 5일 그들은 알려지지 않았던 무덤의 벽돌 벽을 건드렸습니다. 7월 7일 입구가 열렸고 소식은 빠르게 퍼졌습니다.
구경꾼과 기자, 관리들이 몰려드는 압박 속에서 발굴단은 무덤방을 곧바로 비우기로 했습니다. 밤을 새워 작업하며 오늘날 기준으로는 있을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에 유물을 거두었습니다. 작은 유물은 한꺼번에 쓸어 담기도 했고, 많은 유물의 출토 위치가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발굴을 이끈 고고학자 김원룡은 뒷날 이 발굴을 큰 실수이자 한국 고고학의 교훈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출토품은 백제 연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1973년 발굴 보고서가 나왔고, 이후 전문가들은 유물, 직물, 목재, 유리를 다시 연구했습니다. 최근에는 남은 기록과 사진, 유물을 바탕으로 장례 과정을 단계별로 재구성하려는 연구도 이루어졌습니다.
무덤은 오랫동안 공개되었지만, 습기와 이끼, 관람객의 입김이 벽돌을 위협해 1997년 영구 폐쇄되었습니다. 지금은 가까운 전시관의 실물 크기 모형으로 내부를 볼 수 있습니다.
심화
여러 관점
무령왕은 누구의 아들인가. 『삼국사기』는 그를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합니다. 『일본서기』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백제 기록을 인용해 그를 개로왕 또는 개로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로 적는데, 그렇다면 동성왕과는 이복형제가 됩니다. 지석은 죽을 때 나이를 예순둘로 적어 출생을 462년으로 만드는데, 이는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의 연대와 더 잘 맞습니다. 한국과 일본 연구자들은 지금도 이 계보를 두고 논쟁하며, 이는 웅진 시대의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이어집니다.
무령왕과 일본. 가카라시마 출생 이야기는 두 나라 모두에서 사랑받아, 사가현의 그 섬에는 기념비가 서고 기념 행사가 열립니다. 2001년 아키히토 천황은 『속일본기』에 따르면 간무 천황(재위 781~806)의 어머니가 무령왕의 자손이라며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한국인은 이를 일본사에서 백제의 역할을 인정한 것으로 반겼습니다. 일본의 일부 논자는 의미를 축소했고, 두 나라 연구자들은 이 발언이 황실 전체의 기원이 아니라 8세기 한 후궁의 기록된 계보를 가리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모방인가, 창조인가. 초기 연구는 이 무덤을 양나라 무덤의 단순한 복제로 묘사하곤 했고, 때로는 백제 문화가 파생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한국 연구자들은 남조 모델을 골라 받아들이고 고쳐 쓴 점을 강조해 왔고, 지금 한·중·일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이 무덤을 각 왕실이 수입 양식과 자기 양식을 결합한 동아시아 공동의 지배층 문화의 증거로 봅니다. 금송 관도 왜의 조공, 백제 주도 교류 속의 선물, 대등한 교역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며, 나무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가릴 수 없습니다.
1971년 발굴의 윤리. 서두른 발굴은 지금 한국 문화유산 교육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의 예로 자주 언급됩니다. 이는 세계적으로 논의되는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온전한 왕릉을 얼마나 서둘러 발굴해야 하는지, 어떤 무덤은 열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하는지, 대중과 정치의 압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입니다. 이후 한국은 경주의 가장 큰 고분처럼 온전한 왕릉을 여는 일을 대체로 피해 왔습니다.
심화
무덤이 역사가에게 알려 주는 것
연대가 정확하기 때문에 무령왕릉은 동아시아 고고학의 연대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나온 관 꾸미개, 귀걸이, 칼, 도자기 등은 연대를 모르는 한국과 일본 무덤의 비슷한 유물을 시간 속에 자리매김하게 해 줍니다. 예컨대 일본 고고학자들은 6세기 초 고분 시대 무덤의 연대를 정할 때 무령왕릉 출토품과 비교합니다.
지석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백제 문자 자료 가운데 하나로, 백제가 중국식 칭호, 역법 용어, 장례 관념을 어떻게 썼는지 보여 줍니다. 왕의 지석 뒷면에 새긴 간지와 팔괘를 결합한 방위도는 중국 우주론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며, ‘서쪽’에서 상을 치렀다는 구절은 정지산 빈전의 위치를 찾는 데 쓰였습니다.
그러나 무덤이 모든 것을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1971년의 서두름 때문에 많은 유물의 원래 위치가 불확실하고, 어떤 유물이 왕의 것이고 어떤 것이 왕비의 것인지, 무엇을 525년에 넣고 무엇을 529년에 넣었는지에 관한 논의는 사진과 기억에 부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시신도 남지 않아 연구할 인골이 없습니다. 역사가는 이 무덤을 『삼국사기』, 양나라 역사서, 『일본서기』의 기록과 함께 읽어야 하며, 각 문헌에도 저마다의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핵심 개념
- 주인이 밝혀진 왕릉
- 지석 덕분에 무덤 주인의 이름을 확실히 아는 유일한 고대 한국 왕릉입니다.
- 남조식 벽돌무덤
- 터널형 천장의 벽돌 무덤방은 양나라 양식을 따르되 백제 장인이 고쳐 만든 것입니다.
- 매지권
- 죽은 이가 토지신에게서 무덤 자리를 사는 중국의 장례 풍습입니다.
- 국제적인 부장품
- 중국 도자기와 동전, 일본산 관재, 외래 유리는 백제의 넓은 연결망을 보여 줍니다.
- 빈장과 상례
- 죽음과 안장 사이 약 27개월은 중국식 상례와 맞으며, 정지산이 빈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연대 기준점
- 정확한 연대 덕분에 한국과 일본의 비슷한 유물의 연대를 정할 수 있습니다.
기록
- 462년 — 지석으로 계산한 사마(뒷날의 무령왕)의 출생.
- 475년 —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다.
- 501년 — 무령왕이 즉위한다.
- 521년 — 양나라가 무령왕에게 ‘영동대장군’ 칭호를 준다.
- 523년 — 무령왕이 5월에 예순두 살로 세상을 떠난다.
- 525년 — 왕을 벽돌무덤에 모신다. 매지권도 이해의 날짜로 적혀 있다.
- 526년 — 왕비가 세상을 떠난다.
- 529년 — 왕비를 왕 곁에 합장한다.
- 538년 — 백제가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다.
- 1971년 — 7월 5일 배수로 공사 중 발견되어 며칠 안에 발굴된다.
- 1974년 — 출토품 12건이 국보로 지정된다.
- 1997년 — 보존을 위해 무덤을 영구 폐쇄한다.
- 2015년 —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용어 풀이
- 백제
- 한반도 서남부의 왕국(전통적으로 기원전 18~기원후 660).
- 웅진
- 475~538년 백제의 도읍, 지금의 공주.
- 지석
- 무덤에 넣어 죽은 이의 이름과 연대를 적은 돌.
- 매지권
- 토지신에게서 무덤 자리를 샀다고 적은 문서.
- 터널형 천장
- 벽돌이나 돌로 둥글게 쌓은 굴 모양의 천장.
- 진묘수
- 나쁜 기운을 막으려고 무덤에 둔 짐승 조각.
- 청자
- 푸른빛이 도는 유약을 입힌 자기로, 중국에서 일찍부터 만들었다.
- 양(梁)
- 건강(난징)을 도읍으로 한 중국 남조의 왕조(502~557).
- 금송
-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침엽수로, 왕과 왕비의 관재로 쓰였다.
묻고 답하기
무령왕의 무덤인 줄 어떻게 알아요?
무덤 안의 돌 두 장에 ‘백제 사마왕’이라는 이름과 돌아가신 날, 묻힌 날이 적혀 있기 때문이에요.
왜 도굴되지 않았나요?
옆 무덤의 봉분 뒤와 아래에 숨어 있어서 도굴꾼 눈에 띄지 않았어요. 1971년에 우연히 발견되었지요.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나요?
아니요. 보호를 위해 1997년에 닫았어요. 대신 옆에 실물 크기 모형이 있고, 보물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있어요.
관은 왜 일본 나무로 만들었나요?
금송은 일본에서만 자라서 바다 건너 가져와야 했어요. 백제와 왜가 가까웠다는 증거인데, 선물이었는지 조공이었는지 교역이었는지는 의견이 갈립니다.
왕이 돌아가시고 2년 뒤에야 묻은 이유는요?
중국식 상례에 따라 약 27개월 동안 시신을 임시로 모신 뒤 무덤에 안장했기 때문입니다.
1971년 발굴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대중의 압박 속에 아주 짧은 시간에 무덤방을 비워 많은 유물의 정확한 위치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발굴 책임자도 뒷날 한국 고고학의 교훈이라고 말했습니다.
무덤은 백제와 중국 남조에 대해 무엇을 알려 주나요?
벽돌 구조, 동전, 청자, 지석 풍습이 521년 무령왕에게 칭호를 준 양나라와의 가까운 관계를 보여 줍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무령왕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무령왕릉 지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공주 정지산 유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Ungjin Baekje Hall (상설전시 웅진백제실). 국립공주박물관
- 권오영, Cultural Exchange and International Interaction in East Asia as Seen through the Tomb of King Muryeong. Journal of Korean Art and Archaeology 16, 2022
- 강원표, Research on the Excavation and Investigation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Journal of Korean Art and Archaeology 16, 2022
- Tomb of King Muryeong. Wikipedia
- Muryeong of Baekje. Wikipedia
- Emperor Wu of Liang. Wikipedia
함께 보기
- 백제 성왕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백제를 양나라와 일본을 잇는 다리로 만들었으며, 신라와 싸우다 전사한 백제 제26대 왕(재위 523~554)이다.
- 이차돈전승에 따르면 527년 순교해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게 한 법흥왕의 젊은 측근이다.
- 서튼후잉글랜드 동부의 7세기 초 왕실 묘역으로, 1호분에서 금·석류석 장신구와 비잔티움 은기로 가득한 27미터 배 무덤이 나왔다.
- 로마법대전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529~534년에 편찬된 로마법 모음집. 뒤에 유럽과 그 너머 대륙법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 경주역사유적지구신라 왕경의 궁궐터·왕릉·절터·마애불·산성을 다섯 지구로 묶어 2000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적군이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