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오래전 한반도 남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신라는 나중에 한반도의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지요. 신라의 수도가 바로 지금의 경주예요. 신라는 거의 천 년 동안 이어졌는데, 역사 속 나라들 가운데서도 아주 오래 간 편이에요.
지금 경주 시내를 걷다 보면 풀로 덮인 커다란 언덕이 곳곳에 보여요. 그냥 언덕이 아니에요.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들의 무덤이랍니다. 고고학자들이 몇몇 무덤을 조사했더니 반짝이는 금관과 금 허리띠, 먼 나라에서 온 유리잔, 하늘을 나는 흰 말 그림이 나왔어요.
무덤들 가까이에는 병처럼 생긴 돌탑이 서 있어요. 첨성대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이 신라 사람들이 여기서 별을 관찰했다고 생각해요. 옛날 왕자의 궁궐이 있던 아름다운 연못도 있고, 한국에서 가장 큰 절이 있던 넓은 들판에는 커다란 주춧돌만 남아 있어요. 그 절에는 25층 건물만큼 높은 나무 탑이 있었대요.
도시 바로 남쪽에는 남산이라는 산이 있어요. 숲속에 옛 절터가 백 곳이 넘고, 바위에 새긴 부처님도 아주 많아서 사람들은 남산을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러요.
2000년에 유네스코는 이곳들을 세계유산으로 정했어요. 온 세계 사람들이 함께 지키자는 뜻이에요.
한눈에 보기
- 성격
- 신라 왕경과 그 성산(聖山)의 유적을 다섯 개 지구로 묶은 연속 유산(serial property)
- 위치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 시기
- 신라(전통적으로 기원전 57년~935년). 남아 있는 유적은 대부분 4~10세기
- 다섯 지구
- 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릉원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
- 규모
- 등재 면적 약 2,880ha, 완충 구역 약 350ha. 국가유산청 기준 지정 유산 52건
- 세계유산
- 2000년 12월 제24차 세계유산위원회(오스트레일리아 케언스)에서 등재. 등재 기준 (ii)·(iii), 등재 번호 976
- 대표 유적
- 첨성대, 월성, 동궁과 월지, 천마총·황남대총, 황룡사지, 분황사 모전석탑, 남산 마애불, 포석정지, 명활산성
- 제외
- 같은 경주에 있는 석굴암과 불국사는 1995년에 따로 등재된 별개의 세계유산
쉬움
경주역사유적지구란?
경주는 한반도 남동쪽의 중소 도시다. 이곳은 거의 천 년 동안 삼국 가운데 하나인 신라의 수도였고, 신라는 7세기에 한반도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신라의 건국은 기원전 57년, 멸망은 마지막 왕이 나라를 새 왕조 고려에 넘긴 935년으로 본다. 당시 이 도시는 서라벌 또는 금성이라 불렸고, ‘경주’라는 이름은 신라가 망한 뒤에 붙었다.
많은 고대 수도와 달리 신라의 왕경은 그 위에 거대한 후대 도시가 들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왕릉이 집과 도로 사이에 솟아 있고, 궁궐터는 공원처럼 열려 있으며, 절터의 주춧돌은 논밭 사이에 놓여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이런 유적 가운데 일부를 다섯 지구로 나누어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함께 올린 것이다.
유네스코의 설명은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경주에는 조각·부조·탑, 그리고 절과 궁궐의 터 같은 한국 불교 미술이 특히 7~10세기의 것을 중심으로 유례없이 밀집해 있다. 둘째, 이 지구들은 전체로서 도시 구조와 사회 구조, 생활 방식 등 신라 문화의 모든 면을 증언한다.
무엇이 빠져 있는지도 알아 두면 좋다. 도시 동쪽 토함산의 석굴암과 불국사는 1995년에 따로 등재되었다. 역사유적지구는 왕경과 그 주변, 즉 궁궐과 고분, 도심의 큰 절, 남쪽의 성스러운 산, 도성을 둘러싼 산성으로 이루어진다.
쉬움
지도 읽는 법: 다섯 지구, 다섯 가지 공간
다섯 지구는 아무렇게나 나눈 것이 아니다. 각각이 왕경 생활의 한 측면을 보여 준다. 국가유산청은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남산지구는 불교 미술의 보고, 월성지구는 천년 왕조의 궁궐터, 대릉원지구는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의 분포지, 황룡사지구는 신라 불교의 정수, 산성지구는 왕경 방어 시설의 핵심이다.
옛 도시를 하나의 원으로 떠올려 보자. 한가운데, 남천 옆 반달 모양 언덕에 왕궁 월성이 있었다. 그 북쪽과 서쪽으로 거대한 고분들이 펼쳐졌다. 북동쪽에는 도시에서 가장 큰 절들이 섰다. 그 모두의 남쪽에는 절과 마애불로 가득한 남산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동쪽 산 위에는 명활산성 같은 성벽이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켰다.
경주를 돌아볼 때 이 지구들을 오가며 신라사를 읽을 수 있다. 고분은 대체로 불교가 국가 종교가 되기 전 시기의 것이고, 절터는 6세기 이후 불교가 도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보여 준다. 궁궐 연못과 그 출토품은 통일 이후 세련된 궁정 문화를, 남산은 신앙이 산과 바위 곳곳으로 퍼져 나간 모습을 보여 준다.
공식 목록은 다섯 지구에 걸쳐 52건의 지정 유산을 꼽지만, 자료마다 세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남산처럼 산 하나에 수백 점의 유적이 있어도 이를 몇 건의 지정 단위로 묶기 때문이다.
쉬움
황금이 가득한 언덕: 왕릉과 고분
경주 도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분이다. 풀로 덮인 커다란 봉분 가운데에는 높이가 10m를 넘는 것도 있다. 대릉원지구에는 황남리·노동리·노서리 고분군, 전 미추왕릉, 그리고 신라 초기 왕들과 관련된 오릉 등 여러 고분군이 있다.
큰 봉분의 상당수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땅에 나무로 덧널을 짜서 관과 껴묻거리를 넣고, 그 위에 냇돌을 두껍게 쌓은 뒤 흙으로 덮었다. 나무가 썩으면 돌이 안으로 무너져 내려 덧널을 봉해 버린다. 그래서 도굴이 매우 어려웠고, 덕분에 많은 보물이 근대까지 남을 수 있었다. 이런 무덤은 대략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경주 평지에 대규모로 만들어졌다.
특히 유명한 것은 1970년대의 두 발굴이다. 천마총(황남동 제155호분)은 1973년에 발굴되었다. 밑지름 약 47m, 높이 12.7m로, 금관과 함께 흰 천마가 그려진 자작나무 껍질 말다래 등 11,000점이 넘는 유물이 나왔고 무덤 이름도 이 그림에서 따왔다. 가까운 황남대총(황남동 제98호분)은 1973~1975년에 발굴된,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큰 신라 고분이다. 둥근 봉분 두 개가 남북으로 이어진 표주박 모양으로, 전체 길이가 약 120m에 이른다.
황남대총의 남분에는 남자가, 북분에는 여자가 묻혔다. 북분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 장식이 나왔다. 금관과 허리띠, 장신구, 무기, 토기, 그리고 먼 곳에서 들여온 유리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유라시아 동쪽 끝에 있던 신라가 중국과 그 너머까지 이어진 교역망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중급
월성지구: 궁궐, 신성한 숲, 첨성대, 연회의 연못
월성은 신라의 정궁이 있던 곳이다. 동서 약 890m, 남북 약 260m, 둘레 약 2,340m의 길쭉한 반달 모양 토성이다. 1145년에 편찬된 관찬 사서 『삼국사기』는 101년(파사 이사금 22)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 불렀다고 적는다. 그러나 고고학의 결과는 조금 다르다. 발굴 조사에서는 4세기 중엽에 기초부가 조성되고 5세기 초에 성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궁궐 건물은 땅 위에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서 있는 석조 건물인 석빙고는 조선 후기인 1741년에 만든 것이다.
월성 옆에는 오래된 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 계림이 있다. 신라 전설에 따르면 경주 김씨의 시조가 이곳에서 금궤에 담긴 아기로 발견되었다. 그 가까이에 첨성대가 있다. 높이 약 9m(자료에 따라 9.17~9.51m)의 화강암 구조물로, 네모난 기단, 27단으로 쌓은 병 모양의 몸통, 우물 정(井) 자 모양의 네모난 머리로 이루어지며 몸통 중간쯤에 작은 창이 나 있다. 13세기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쌓았다고 전한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월성 북동쪽에는 오늘날 월지(옛 이름 안압지)라 부르는 연못과 동궁 터가 있다. 동궁은 태자가 머물고 왕실 연회를 열던 곳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14년(674)에 궁 안에 새 못을 팠고, 후대 왕들도 이곳에서 잔치를 열었다. 못 안에는 작은 섬이 셋 있고 물가가 구불구불해서, 못가 어디에서 보아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들 한다.
1975년부터 이어진 월지 발굴에서는 못 바닥 진흙 속에서 수만 점(영어 위키백과는 약 33,000점으로 적는다)의 유물이 나왔다. 기와와 토기, 금동 불상, 궁중 생활 용품 등이다. 옛 건물터 위에는 전각 세 채가 복원되었고, 조명을 밝힌 밤의 월지는 지금 경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다.
중급
황룡사지구: 누런 용의 절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이자 동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큰 절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553년(진흥왕 14) 진흥왕이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했는데, 그곳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절로 고쳐 지었다. 569년에 담장을 두르며 경역이 갖추어졌고, 574년에는 높이 5m가 넘는 장륙존상을 주조했으며, 이를 모신 금당은 584년에 완성되었다.
가장 유명한 건물은 구층목탑이다. 선덕여왕 12년(643)에 짓기 시작해 645년에 완성했다. 승려 자장이 건의하고, 경쟁국 백제에서 초청한 장인 아비지가 기술을 이끌었다고 전한다. 전체 높이는 225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약 80m로 환산한다. 각 층이 신라가 이겨 내야 할 이웃 나라를 하나씩 상징한다는 전승도 있어, 불교와 국가 수호 사상이 얼마나 긴밀했는지 알 수 있다. 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은 ‘신라삼보(新羅三寶)’ 가운데 둘로 꼽혔다.
목탑은 벼락과 지진으로 여러 차례 손상되어 수리를 거듭했다. 그러다 1238년(고려 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절 전체가 불타면서 함께 사라졌고,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발굴로 탑 하나 뒤에 금당 셋을 두고 회랑으로 두른 ‘1탑 3금당’ 배치가 드러났고, 거대한 치미를 비롯해 약 4만 점의 유물이 나왔다. 절의 면적은 약 8만㎡로 추정되는데, 자료마다 수치가 조금씩 다르다.
길 건너에는 선덕여왕 3년(634)에 세운 분황사가 있다. 이 절의 탑은 검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중국의 전탑을 본뜬 것이다. 기록에는 더 높은 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기단 네 모서리를 돌사자가 지킨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중급
남산지구: 부처의 땅이 된 산
남산은 옛 도성 바로 남쪽에 있다. 봉우리 높이가 466~495m 정도로 그리 높지 않고, 남북 약 8km, 동서 약 4km 크기다. 그런데도 다섯 지구 가운데 가장 넓고 유적이 풍부하다. 조사 결과 절터가 백 곳 넘게, 석불이 80구 안팎, 석탑이 60기 안팎, 석등이 20기 넘게 확인되었다. 골짜기에서 새로운 유적이 계속 발견되고 있어 조사마다 숫자가 조금씩 다르다.
조각은 작고 소박한 것부터 거대한 부조까지 다양하다. 칠불암에는 높이 약 4.26m의 바위 면에 삼존불이 거의 환조에 가까운 높은 부조로 새겨져 있고, 그 앞 돌기둥 네 면에 부처가 한 분씩 새겨져 모두 일곱 분이다. 2009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배리 석조여래삼존입상, 삼릉계곡의 큰 마애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등이 유명하다.
남산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성한 산이었다. 신라에는 산과 바위를 섬기는 전통이 강했고, 한국 학자들은 남산의 불교 조각을 이런 오래된 신앙과 새 종교가 만난 결과로 보곤 한다. 부처가 바위 앞에 놓였다기보다 살아 있는 바위 속에서 드러나는 듯 보이는 것도 그래서다. 남산을 불교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도성 곁에 옮겨 놓은 것처럼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남산에는 왕실과 관련된 유적도 있다. 산기슭의 나정은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산자락에는 여러 왕릉이 있다. 포석정지는 길이 약 22m의 구불구불한 돌 물길이 남은 곳으로, 이궁(離宮)에서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을 열던 자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927년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던 중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을 습격했고, 왕은 목숨을 잃었다. 신라는 끝내 이 타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중급
산성지구와 남산신성: 왕경을 지키다
신라 왕경에는 중국의 도성처럼 도시 전체를 두르는 성벽이 없었다. 대신 주변 산에 쌓은 산성에 의지했다. 세계유산의 산성지구는 주로 도시 동쪽 산 위의 명활산성으로 이루어진다. 기록에는 405년에 이 성이 공격받았다는 기사와 5~6세기에 여러 차례 고쳐 쌓았다는 기사가 있으며, 475년에는 자비왕이 한동안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647년 귀족 비담의 반란과 관련된 이후로는 중요성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남산에도 돌로 쌓은 남산신성이 있다. 『삼국사기』는 591년(진평왕 13)에 이 성을 쌓았다고 적는다. 이 성은 아주 특별한 증거를 남겼는데, 공사를 맡은 작업단들이 세운 비석이다. 1930년대부터 1994년까지 모두 9기가 발견되었고,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비석마다 591년 2월 26일이라는 날짜, 공사를 책임진 관리와 마을 사람들의 직명·출신지·이름·관등, 그리고 맡아서 쌓은 성벽의 길이가 적혀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쌓은 구간이 3년 안에 무너지면 벌을 받겠다고 맹세한 내용이다. 6세기 후반 신라가 지방에서 어떻게 노동력을 동원했는지 보여 주는 이 비문들은 신라 지방 통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문자 자료 가운데 하나다.
산성들을 함께 보면 경주는 지형으로 방어된 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한가운데 왕궁이 있고, 한쪽은 남천이, 사방은 성을 쌓은 산봉우리들이 지켰다.
중급
이 유적을 만든 사회: 작은 나라에서 통일 왕국으로
신라는 한반도 남동부의 여러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했다. 4~6세기에 걸쳐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했는데, 황금으로 가득한 거대 고분은 바로 이 시기, 지배층이 무덤으로 권력을 과시하던 때의 것이다. 신라 사회는 골품제로 짜여 있었다. 골품제는 혈통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직은 물론 집의 크기, 옷, 수레까지 정해 놓은 세습 신분제였다.
불교는 다른 두 나라보다 늦게 신라에 공인되었다. 527년 또는 528년 무렵의 일로, 전통적으로 이차돈의 순교와 연결된다. 이후 황룡사·분황사 같은 큰 절이 들어서면서 도성의 모습이 바뀌었고, 거대한 봉분을 쌓던 장례 풍습도 점차 작은 무덤으로, 나중에는 일부 지배층의 화장으로 옮겨 갔다.
660년대에 신라는 당과 손잡고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무너뜨린 뒤, 676년까지 당과 싸워 한반도 대부분을 차지했다. 흔히 통일신라라 부르는 이 시기는 동궁과 월지, 석굴암과 불국사, 남산의 많은 조각이 만들어진 때다. 『삼국유사』는 전성기 왕경이 17만 8,936호였다고 전하는데, 이 숫자를 얼마나 믿을 수 있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8세기 후반부터 진골 귀족들의 왕위 다툼으로 왕권이 약해졌다. 지방 세력이 떨어져 나가 후삼국 시대가 열렸고, 견훤은 후백제를, 궁예는 태봉을 세웠다. 태봉은 918년 왕건이 정권을 잡아 고려가 되었다. 927년 견훤이 왕경을 짓밟은 뒤, 마지막 왕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넘겼다.
중급
신라 이후: 쇠락, 재발견, 그리고 세계유산
935년 이후 경주는 지방 도시가 되었다. 고려 때 한동안 ‘동경(東京)’으로 불리는 등 상징적 지위는 유지했지만 정치의 중심은 북쪽으로 옮겨 갔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1238년 황룡사가 불탔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억누른 조선 시대에는 남산의 많은 절이 폐허가 되었고, 훼손된 조각도 있다.
경주의 근대 고고학은 일제강점기(1910~1945)에 시작되었다. 1921년 민가 공사 중에 발견된 금관총에서 처음으로 신라 금관이 나오면서 고분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일제강점기 발굴은 화려한 유물을 수습했지만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서두르고 기록이 부실한 경우가 많았고, 한국사를 식민 통치에 맞게 해석하려는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한국 학계는 이 시기를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광복 이후, 특히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은 경주를 국가 문화유산과 관광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1973~1975), 월지(1975~), 황룡사지(1976~1983) 발굴은 한국 고고학의 이정표가 되었다. 많은 유적이 문화유산 관련 법과 경주국립공원 안에서 보호받게 되었다. 월성 발굴은 1990년부터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이어 오고 있다.
2000년 12월 오스트레일리아 케언스에서 열린 제24차 세계유산위원회는 경주역사유적지구를 등재 기준 (ii)와 (iii)에 따라 세계유산으로 올렸다. 국가유산청은 이미 등재된 일본 교토·나라의 유적보다 유적의 밀집도와 다양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소개한다. 다만 이는 한국 문화유산 당국의 평가로, 중립적인 순위라기보다는 국가적 관점의 서술로 읽는 것이 좋다.
심화
학계의 논쟁: 누가 묻혔나, 첨성대는 무엇이었나
신라의 큰 고분에는 묻힌 사람을 밝히는 글자가 거의 없어서 특정 왕에게 비정하기가 어렵다. 대표적인 예가 황남대총이다. 연대를 4~5세기로 보느냐 5~6세기로 보느냐에 따라 남분의 주인이 확실한 세습 왕권을 연 내물왕인지, 눌지왕인지, 다른 왕인지 의견이 갈린다. 이는 신라 토기와 금속 공예품을 중국·고구려 자료와 비교해 어떻게 편년하느냐, 그리고 『삼국사기』의 재위 연대를 얼마나 믿느냐에 달려 있다. 천마총은 흔히 지증왕의 무덤으로 조심스럽게 추정되고, 금관총에서는 역사 기록에 없는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집 장식이 나왔다. 고고학과 문헌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보여 주는 인상적인 사례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기원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일부 학자는 무덤 구조와 나뭇가지·사슴뿔 모양 장식을 단 금관 등을 근거로 북방 기마민족의 영향을 주장했다. 반면 고구려나 한반도 다른 지역의 무덤 양식이 변형된 것으로 보거나, 경주 지역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어느 한쪽으로 결론 내리지 않고 이 견해들을 나란히 소개한다.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도 오래 논쟁이 이어져 왔다.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이름과 후대 기록에 근거한 전통적인 견해는 천문 관측대로, 꼭대기에 관측 기구를 두거나 사람이 올라가 관측했으리라 본다. 반론은 꼭대기가 좁고 오르내리기 불편하다는 점을 든다. 그래서 제단, 기념물, 수미산을 형상화한 불교적 상징물로 보거나, 그림자로 절기를 재는 규표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약 365개의 돌, 27단, 창 위아래 12단 같은 숫자 상징도 자주 거론되지만, 어떤 돌을 세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지므로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최근에는 월성의 인신 공희가 새로운 쟁점이 되었다. 2017년 발굴단은 서쪽 성벽 아래에서 나란히 누운 인골 두 구를, 2021년에는 그 가까이에서 젊은 여성의 인골 한 구를 더 찾았다고 발표했다. 발굴단은 이를 성벽을 쌓을 때 바친 희생으로 해석하며, 성이나 둑을 튼튼히 하려고 사람을 묻었다는 전설을 뒷받침하는 한국 최초의 고고학 증거로 본다. 해석에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으며,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다.
심화
복원과 진정성, 그리고 살아 있는 도시
경주는 문화유산 보존의 근본 질문 하나를 던진다. 사라진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하는가? 신라의 목조 건축은 거의 다 사라지고 주춧돌과 토축, 발굴된 파편만 남았다. 복원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과거를 떠올리게 해 주지만, 증거보다 현대의 추측에 기댄 건물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유산이 역사적 형태와 재료를 믿을 만하게 전해야 한다는 세계유산 제도의 ‘진정성’ 요구는 사라진 궁궐과 탑을 되살리려는 구상과 긴장 관계에 있다.
이 논쟁은 2019년 12월 제정되어 2020년 12월부터 시행된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16779호)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법은 월성, 황룡사, 동궁과 월지, 첨성대 등을 핵심 유적으로 정하고 그 복원과 정비를 규정한다. 지지하는 쪽은 천년 왕경의 중심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보지만, 고고학자와 유산 전문가 가운데에는 황룡사 구층목탑 같은 건물을 실물 크기로 복원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디지털 복원이나, 보문관광단지에 목탑을 본떠 새로 지은 황룡원처럼 원래 자리를 벗어난 건축은 하나의 절충안이 될 수 있다.
역사유적지구는 살아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고분 사이에서 살고 농사짓고 차를 몬다. 현대 도시는 보호 구역을 둘러싸며 커졌다. 주민의 권리, 관광, 새 기반 시설, 유적 보호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은 끝나지 않는 과제다. 지진도 걱정거리다. 첨성대는 2007년부터 기울기와 구조 변화를 관측하고 있으며, 2016년에는 경주에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연구자에게 계속되는 발굴은 기회이자 방법론적 문제다. 조사할 때마다 신라에 대한 그림이 바뀌지만, 모든 발굴은 연구 대상인 증거의 일부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고고학자는 더 느리고 선별적인 발굴,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옛 발굴 자료의 충실한 보고서 간행, 지하 투과 레이더(GPR) 같은 비파괴 조사 방법의 적극적 활용을 주장한다.
핵심 개념
- 후대 대도시가 덮지 않은 수도
- 935년 이후 경주가 지방 도시가 되었기에 신라의 고분·궁궐터·절터가 지금도 도시 안팎에 드러나 있다.
- 연속 유산
- 궁궐, 고분, 도심 사찰, 성산, 방어 시설이라는 왕경의 여러 측면을 다섯 개의 떨어진 지구로 묶어 하나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 고분에서 사찰로
- 황금이 가득한 봉분에서 거대한 불교 사찰로의 변화는 6세기 초 불교 공인 이후 신라가 겪은 변화를 보여 준다.
- 호국 불교
- 황룡사 구층목탑 같은 기념물이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준다고 믿었다.
- 성스러운 경관
- 남산에서는 오래된 산악·암석 신앙과 불교가 어우러져 산 전체가 노천 신앙 공간이 되었다.
- 문헌과 고고학
-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연대와 인명은 발굴 결과와 어긋날 때가 많아 둘 다 비판적으로 따져 보아야 한다.
- 진정성과 복원
- 사라진 신라 건축을 다시 짓는 구상은 증거, 진정성, 유산의 목적에 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기록
- 약 기원전 57년 — 『삼국사기』에 따른 박혁거세의 신라(사로국) 건국 전통 연대(기원전 57년).
- 약 101년 — 『삼국사기』에 월성 축조 기록. 고고학적으로는 4~5세기에 성벽이 조성된 것으로 본다.
- 약 528년 — 신라가 불교를 공인(527년 또는 528년). 전통적으로 이차돈의 순교와 연결된다.
- 553년 — 진흥왕이 새 궁궐을 지으려던 자리에 황룡사를 짓기 시작한다.
- 591년 — 남산신성을 쌓고, 공사 담당자들이 서약을 새긴 비석을 세운다.
- 645년 — 높이 약 80m의 황룡사 구층목탑이 완성된다.
- 674년 — 문무왕이 궁 안에 새 못(지금의 월지)을 판다.
- 927년 — 후백제 견훤이 왕경을 습격하고,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죽음을 맞는다.
- 935년 —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며 신라가 막을 내린다.
- 1238년 — 몽골군의 침입으로 황룡사와 구층목탑이 불탄다.
- 1973년 —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이 시작된다(~1975).
- 2000년 — 경주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용어 풀이
- 신라
- 경주를 수도로 한 한국 고대 왕국(전통적으로 기원전 57년~935년). 7세기에 한반도 대부분을 통합했다.
- 고분
- 흙이나 돌을 높이 쌓아 올린 옛 무덤.
- 돌무지덧널무덤
- 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고 다시 흙으로 덮은 신라 특유의 무덤 양식. 적석목곽분이라고도 한다.
- 연속 유산
- 떨어져 있는 여러 유적이 함께 하나의 탁월한 가치를 나타내는 세계유산 등재 방식.
- 탑
- 사리를 모시는 불교 건축물. 나무·벽돌·돌 등으로 짓는다.
- 골품제
- 혈통에 따라 관직·옷·집 등을 제한한 신라의 세습 신분 제도.
- 마애불
- 절벽이나 큰 바위에 직접 새긴 불상.
- 『삼국사기』
- 1145년 김부식 등이 편찬한 관찬 역사서.
- 『삼국유사』
- 13세기 승려 일연이 역사·설화·불교 이야기를 모아 엮은 책.
- 등재 기준 (ii)·(iii)
- 세계유산 등재 기준 가운데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 주는 것(ii)과 문화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증거가 되는 것(iii).
묻고 답하기
경주 시내에는 왜 커다란 언덕이 있나요?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들의 무덤이에요. 대부분 4~6세기에 만들어졌어요.
첨성대는 정말 천문대였나요?
전통적으로 그렇게 보며, 흔히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불립니다. 하지만 제단·기념물·상징 건축물이라는 견해도 있어 아직 논쟁 중입니다.
황룡사 구층목탑을 지금도 볼 수 있나요?
아니요. 1238년에 불타 없어졌어요. 지금은 주춧돌과 절의 배치만 남아 있어요.
석굴암과 불국사도 경주역사유적지구에 속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경주에 있지만 1995년에 따로 등재된 별개의 세계유산입니다.
신라 건국 연대인 기원전 57년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초기 연대를 전승으로 보며,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 무렵부터 신라가 강한 왕국으로 성장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신라 고분의 주인을 알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덤 안에 주인의 이름을 적은 글이 거의 없고, 토기·금속기로 매기는 연대는 정확한 해가 아니라 범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정 왕과의 연결은 가설로 남습니다.
옛 궁궐과 탑이 다시 지어지나요?
2019년 특별법이 핵심 유적의 복원을 규정했지만, 증거가 부족하고 세계유산의 진정성 문제도 있어 실물 복원은 논란이 큽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Gyeongju Historic Areas.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 경주역사유적지구.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윤성호, 경주 월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22
- 경주 황룡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유경로, 경주 첨성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황남대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돌무지덧널무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경주 남산 일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진홍섭, 경주 남산 신성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16779호). 위키문헌, 2019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