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1,400년 전, 아라비아의 사막 도시 메카에서 무함마드라는 아이가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여섯 살 때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와 삼촌이 그를 키웠어요. 어른이 된 무함마드는 낙타 대상과 함께 먼 길을 오가는 상인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알아민’이라고 불렀어요.
마흔 살쯤 된 무함마드는 메카 근처 산에 있는 동굴에 혼자 가서 생각하고 기도하곤 했어요. 무슬림은 어느 날 밤 그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지브릴)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지고 찾아왔다고 믿어요. 그 뒤 23년 동안 말씀이 계속 내려왔고, 제자들이 그것을 외우고 적어 두었어요. 이것이 모여 이슬람의 경전 쿠란이 되었어요.
무함마드는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고, 고아와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며, 누구나 언젠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쳤어요. 메카의 힘 있는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싫어했어요. 여러 신을 섬기러 오는 순례자들 덕분에 돈을 벌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무함마드와 따르는 사람들은 메디나라는 다른 도시로 옮겨 갔어요. 622년의 이 여행은 너무나 중요해서 이슬람 달력은 이 해부터 햇수를 세요.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새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어요. 오랜 다툼 끝에 630년 거의 싸우지 않고 메카로 돌아갔고, 옛 적들 대부분을 용서했어요. 그리고 632년 메디나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무슬림은 무함마드를 무척 사랑하고 존경해요. 그의 이름 뒤에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덧붙이는 사람이 많아요. 무슬림은 대개 그의 모습을 그리지 않아서, 책이나 박물관에서는 그림 대신 아름다운 아랍어 글씨로 그의 이름을 보여 줘요. 이 페이지도 그렇게 해요.
한눈에 보기
- 생애
- 570년경 ~ 632년 6월 8일(전통적 연대, 출생 연도는 대략적)
- 장소
- 메카에서 태어나 622년부터 메디나(당시 야스리브)에서 삶. 아라비아 서부 히자즈 지방(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 가문
- 쿠라이시족 하심 가문. 첫 아내 카디자, 딸 파티마(그 후손은 많은 무슬림에게 존경받음)
- 이슬람에서의 위치
- 무슬림에게 하느님의 사도이자 ‘예언자들의 봉인’, 곧 아브라함·모세·예수로 이어지는 예언자들의 마지막
- 계시
- 61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슬림이 하느님의 계시로 믿는 말씀을 전함. 뒤에 쿠란으로 모임
- 전환점
-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히즈라(헤지라). 이슬람력 원년
- 주요 사료
- 쿠란, 8~9세기의 전기(시라, 특히 이븐 히샴이 편집한 이븐 이스하크의 전기), 하디스 모음집, 몇몇 초기 비무슬림 기록
- 유산
- 무슬림 공동체(움마)를 세움. 그의 본보기(순나)가 약 20억 명의 법·예배·윤리를 이끎
쉬움
무함마드는 누구인가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라는 570년 무렵 아라비아 서부의 교역·순례 도시 메카에서 태어나 632년 메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슬림에게 그는 하느님의 예언자이자 사도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이라는 뜻이며, 아랍어를 쓰는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도 이 말을 쓴다). 무슬림은 하느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가 낭송한 말씀이 쿠란에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무슬림은 무함마드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를 하느님이 택한 인간, 곧 노아·아브라함·모세·다윗·예수로 이어지는 긴 예언자 계보의 마지막으로 여긴다. 쿠란은 그를 ‘예언자들의 봉인’(33:40)이라 부르며, 무슬림은 이를 그 뒤로 더는 예언자가 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많은 무슬림은 존경의 뜻으로 그의 이름 뒤에 ‘그에게 평화가 있기를’ 또는 아랍어로 ‘살랄라후 알라이히 와 살람’ 같은 축복의 말을 붙인다.
배경과 관계없이 역사가들은 무함마드가 실존 인물로서 종교 공동체를 세웠고, 생애 말년에는 아라비아의 상당 부분을 그 공동체 아래 하나로 묶었다는 데 동의한다. 그가 죽은 뒤 한 세기 안에 이슬람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이베리아반도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뻗었다. 역사에서 그만큼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 인물은 드물다.
이 페이지는 무슬림 전통이 기억하는 무함마드와 현대 역사학이 연구하는 무함마드를 함께 소개한다. 두 관점은 많은 부분에서 겹치지만 묻는 질문이 다르다. 신자는 그의 삶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묻고, 역사가는 남은 사료로 무엇을 입증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대다수 무슬림의 관행을 따라 이 페이지는 그의 외모를 묘사하거나 보여 주지 않는다.
쉬움
무함마드가 태어난 세계
6세기 아라비아는 두 거대 제국 사이에 있었다. 북서쪽에는 그리스도교 비잔티움(동로마) 제국, 북동쪽에는 조로아스터교를 받든 사산조 페르시아가 있었다. 남아라비아(예멘)에는 오래된 왕국들이 있었고, 얼마 전까지 악숨의 그리스도교 에티오피아인이 이곳을 다스렸다. 반도 곳곳에는 유대교·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여러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아라비아 서부 히자즈 지방 사람들은 대부분 부족과 씨족에 속해 있었다. 씨족은 구성원을 보호했고, 씨족의 보호를 잃은 사람은 실제로 위험에 처했다. 왕도 국가도 없었다. 가장 존경받는 예술은 시였고, 시인은 부족의 명예를 높이기도 무너뜨리기도 했다.
메카는 메마른 골짜기에 자리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그 중심 성소 카바는 아브라함과 아들 이스마엘이 유일신을 섬기려고 지었지만, 무함마드 시대에는 여러 신의 우상이 놓여 있었다. 싸움이 금지된 성스러운 달에 순례자들이 찾아왔기에 메카는 시장이 서기에 안전한 곳이었다. 지배 부족 쿠라이시는 순례와 교역 양쪽에서 이익을 얻었다. 메카 교역의 규모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있다. 퍼트리샤 크론은 1980년대에 그 규모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학자들은 메카를 지역 교역의 중심지로 본다.
쉬움
메카에서 보낸 젊은 날
무함마드는 쿠라이시족 가운데 존경받지만 부유하지는 않은 하심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압드 알라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메카 가문들의 관습대로 아기는 한동안 사막의 베두인에게 맡겨져 젖을 먹고 자랐다. 어머니 아미나는 그가 여섯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 압드 알무탈리브가 두 해 동안 그를 돌보았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가문의 우두머리인 삼촌 아부 탈리브가 그를 키우며 평생 보호했다.
젊은 무함마드는 메카와 시리아를 잇는 대상 교역에 종사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정직하기로 이름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알아민으로 불렸다. 스물다섯 살쯤 그는 자신을 고용했던 과부 상인 카디자 빈트 쿠와일리드와 혼인했다. 사료에 따르면 카디자는 그보다 열다섯 살쯤 많았다. 혼인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약 25년 이어졌고, 그동안 무함마드는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둘 사이의 딸 자이나브·루카이야·움므 쿨숨·파티마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들들은 어려서 죽었다.
사료는 삼십 대 후반의 무함마드가 메카 밖 산에 있는 히라 동굴에 며칠씩 홀로 머물며 명상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전한다. 당시 더 순수한 신앙을 찾던 다른 아라비아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수행이 있었다고 하며, 사료는 이런 사람들을 ‘하니프’라고 부른다.
쉬움
첫 계시와 메시지
무슬림 전통에 따르면 610년 라마단 달, 히라 동굴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무함마드에게 “읽어라(낭송하라)!”라고 명했다. 전통적으로 처음 계시된 말씀은 제96장의 첫 구절로 여겨진다. “창조하신 네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 그분은 인간을 핏덩이에서 창조하셨다.” 크게 놀란 무함마드가 집으로 돌아오자 카디자가 그를 위로했고, 그녀는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첫 사람으로 기억된다.
초기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절박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자비롭고 정의로운 창조주다. 우상은 아무 힘이 없다. 모든 사람이 되살아나 심판받는 날이 온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는 기도와 너그러움으로 드러나야 한다. 굶주린 이를 먹이고, 노예를 해방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재물을 쌓아 두지 말아야 한다. 무함마드는 이것이 앞선 예언자들이 저마다의 백성에게 전한 바로 그 메시지라고 말했다.
초기 신자로는 카디자, 무함마드의 어린 사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해방 노예이자 양자인 자이드 이븐 하리사, 상인이던 친구 아부 바크르가 있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들을 서로 다르게 강조하며, 누가 가장 먼저 믿었는가 하는 문제 자체가 수백 년 동안 논의되었다.
중급
메카의 반대와 메디나로의 이주
613년 무렵 무함마드는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카바의 신들과 부자들의 이기심을 비판하는 그의 말은 쿠라이시 지도자들의 종교적 권위와 경제적 이익을 위협했다. 씨족의 보호가 약한 신자들, 특히 빌랄 같은 노예들은 괴롭힘과 고문까지 당했다. 615년 무렵 무함마드는 일부 신자를 에티오피아 악숨의 그리스도교 군주에게 피신시켰고, 사료에 따르면 군주는 그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쿠라이시는 이어 무함마드의 가문과 거래도 혼인도 하지 않는 봉쇄를 벌였다(전통적으로 616~619년경). 봉쇄가 끝난 직후, 뒤 시대 작가들이 ‘슬픔의 해’(619년)라 부른 해에 카디자와 아부 탈리브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삼촌의 보호를 잃은 무함마드의 처지는 위태로워졌다. 이웃 도시 타이프에서 지지를 구하려던 시도는 실패했고, 전승에 따르면 그는 돌팔매를 맞으며 쫓겨났다. 무슬림 전통은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하늘로 인도되었다는 ‘밤의 여행과 승천’(이스라와 미으라즈)을 이 어려운 시기에 둔다. 이것이 몸으로 한 여행인지 영적인 체험인지에 대해서는 무슬림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린다.
도움은 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오아시스 야스리브에서 왔다. 그곳의 아랍 부족들은 서로 오랜 반목에 빠져 있었고 유대인 씨족들도 함께 살았다. 야스리브에서 온 순례자들은 메카 근처 아카바에서 두 차례 무함마드를 만나 그를 받아들이고 보호하겠다고 서약했다. 622년 신자들은 작은 무리로 나뉘어 몰래 메카를 떠났고, 무함마드는 마지막으로 아부 바크르와 함께 떠나 야스리브에 닿았다. 이곳은 ‘예언자의 도시’(마디낫 알나비), 곧 메디나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이주를 히즈라(헤지라)라 하며, 2대 칼리파 우마르 때 이 해를 이슬람력(히즈라력)의 기점으로 정했다. 이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무슬림은 무함마드의 탄생이나 첫 계시가 아니라, 신자들이 스스로의 질서 아래 사는 공동체가 된 순간부터 햇수를 세었다.
중급
메디나에서 공동체를 세우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종교 스승이자 부족 사이의 중재자였다. 그의 집 옆에 모스크가 세워져 기도와 모임과 통치의 장소가 되었다. 메카에서 온 이주자(무하지룬)와 메디나의 ‘조력자’(안사르)는 형제의 연을 맺었다.
이븐 이스하크의 전기와 아부 우바이드의 『재산의 책』(키타브 알암왈)에 전하는 ‘메디나 헌장’이라는 초기 문서는 신자들과 동맹 집단 사이의 상호 의무를 정한다. 여기에는 자기 종교를 지키는 유대인 집단들도 포함된다. 문서는 이들을 혈연이 아니라 공동의 충성으로 묶인 하나의 공동체(움마)로 규정하고, 분쟁의 최종 중재자를 무함마드로 정한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 문서가 실제로 이른 시기의 것이라고 보지만, 한 번의 협약인지 여러 협약을 모은 것인지, 622년 것인지 몇 해 뒤의 것인지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법·가족·상속·단식·희사·전쟁에 관한 쿠란의 긴 구절들은 대부분 메디나 시기와 연결된다. 기도 방향(키블라)은 처음에는 예루살렘이었으나 624년 무렵 메카의 카바로 바뀌었다. 그 뒤 몇 해 동안 메디나의 주요 유대인 씨족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이는 이 이야기에서 가슴 아프고 많이 연구된 부분이다.
중급
전쟁과 휴전, 그리고 메카 귀환
메카와의 충돌은 쿠라이시 대상을 습격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아라비아 부족 전쟁에서 흔한 전술로, 메카 경제의 생명줄을 겨냥한 것이었다. 624년 적은 수의 무슬림군이 훨씬 큰 메카군을 바드르에서 물리쳤고, 무슬림은 이를 하느님이 돕는다는 표징으로 받아들였다. 625년 우후드 전투에서는 메카군이 이겼고 무함마드도 부상을 입었다. 627년 대규모 연합군이 메디나를 포위했지만, 오아시스의 트인 쪽에 판 방어용 참호 때문에 공격은 실패했다(참호 전투).
이 위기들 뒤에는 매번 메디나의 세 주요 유대인 씨족 가운데 하나에 대한 조치가 뒤따랐다. 사료는 이들이 약속을 어기거나 메카 편에 섰다고 비난한다. 카이누카 씨족과 나디르 씨족은 추방되었다.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627년 포위전 뒤 쿠라이자 씨족의 남자들은 처형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이 사건은 무함마드에 관한 현대 저술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역사가들은 기록된 숫자와 후대 보고의 신빙성, 그리고 7세기 전쟁의 규범으로 이 일을 어떻게 판단할지를 두고 논쟁하며, 무슬림 저자들도 여러 설명을 내놓았고 일부는 기록의 세부를 의심했다.
628년 무함마드는 순례를 하려고 많은 사람을 이끌고 메카로 향했다. 후다이비야에서 가로막히자 그는 10년 휴전에 합의했는데, 일부 동료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쿠란(제48장)은 이를 ‘분명한 승리’라 부른다. 휴전 덕분에 이슬람은 부족들 사이로 빠르게 퍼졌다. 쿠라이시의 동맹이 무슬림의 동맹을 공격하자 무함마드는 630년 대군을 이끌고 메카로 진군했다. 도시는 거의 싸움 없이 항복했고, 그는 옛 적들 거의 모두에게 전면 사면을 베풀었다. 카바의 우상은 부서졌고 성소는 유일신 예배의 장소로 다시 봉헌되었다.
후나인에서 하와진 부족을 이기고 북쪽 타북까지 원정한 뒤, 아라비아 곳곳에서 사절단이 메디나로 와 충성을 서약했다. 632년 무렵 반도의 상당 부분이 느슨하게나마 메디나와 연결되었다.
중급
마지막 순례, 죽음, 그리고 계승 문제
632년 초 무함마드는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순례(하지), 곧 ‘고별 순례’를 했다. 그가 행한 의례는 오늘날 수백만 무슬림이 행하는 하지의 본보기가 되었다. 여러 판본으로 전하는 아라파트의 설교에서 그는 생명과 재산의 신성함, 여성의 권리, 신자들의 평등을 강조했다고 기억된다.
메디나로 돌아온 그는 곧 병이 들어 632년 6월 8일(수니파의 일반적 계산으로 히즈라력 11년 라비 알아왈 12일) 모스크 옆 아내 아이샤의 방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곳에 묻혔다. 그 자리는 지금 예언자의 모스크 초록 돔 아래에 있으며 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 가운데 하나다. 카디자가 죽은 뒤 그는 여러 아내를 맞았는데, 상당수가 과부였고 일부 혼인은 정치적 동맹을 맺는 의미도 있었다. 파티마를 빼고는 자녀들이 모두 그보다 먼저 죽었다.
무함마드의 죽음은 누가 공동체를 이끌 것인가라는 문제를 남겼다. 동료들 일부가 아부 바크르를 첫 칼리파(‘후계자’)로 뽑았다. 다른 이들은 무함마드가 사촌이자 파티마의 남편인 알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믿었으며, 특히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의 가디르 훔에서 있었던 일을 근거로 든다. 이 의견 차이가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진 뿌리다. 수니파는 첫 네 칼리파를 ‘올바르게 인도된 칼리파’로 존중하고,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손인 이맘들을 정당한 지도자로 여긴다.
중급
무슬림의 신앙과 삶 속의 무함마드
무슬림에게 무함마드는 삶의 본보기다. 하디스라 불리는 수많은 짧은 전승에 담긴 그의 말과 행동은 순나(‘관행’, ‘길’)를 이루며, 쿠란 다음가는 이슬람법의 두 번째 원천이다. 학자들은 전승자의 사슬(이스나드)을 검토해 하디스를 판정하는 정교한 학문을 발전시켰다. 부하리와 무슬림 이븐 알핫자즈의 모음집 같은 수니파의 대표 하디스집은 9세기에 편찬되었고, 시아파는 이맘들을 통해 전해진 전승을 중시하는 자체 모음집을 쓴다.
일상의 신앙 생활에는 그의 본보기가 배어 있다. 하루 다섯 번의 기도, 기도 전 씻는 방법, 라마단 단식, 순례, 인사와 식사 예절이 그렇다. 신앙 고백(샤하다) “하느님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도다”는 하느님과 나란히 그의 이름을 부른다. 예언자를 찬미하는 시는 아랍어·페르시아어·튀르크어·우르두어·스와힐리어·말레이어 등 여러 언어로 꽃피었다. 많은 무슬림이 그의 탄신일(마울리드)을 기념하지만, 특히 개혁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이를 후대의 혁신이라며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이슬람 전통은 우상 숭배에 대한 우려와 예언자에 대한 경외 때문에 대체로 그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을 꺼린다. 실천은 지역과 시대마다 달라서, 일부 페르시아·오스만 필사본 그림은 얼굴을 베일로 가리거나 불꽃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신앙을 표현하는 중심 예술은 서예였다. 예언자의 성품을 글로 적어 액자처럼 꾸민 ‘힐리예’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무슬림은 그의 형상을 매우 무례한 것으로 여기며, 이 페이지도 그 정서를 따른다.
심화
어떻게 아는가: 사료와 그 문제
쿠란은 가장 이른 증언이며, 학계의 폭넓은 합의로는 무함마드의 설교를 대체로 동시대에 전하는 자료다(필사본 연대는 쿠란 페이지 참고). 그러나 쿠란은 사람과 장소의 이름을 거의 들지 않고 전기를 서술하지도 않는다. 무함마드라는 이름은 네 번만 나오고, 바드르나 후다이비야 같은 사건도 암시로만 등장한다. 그의 생애 이야기는 후대의 장르에서 온다. 마가지(‘원정기’)와 시라(‘삶의 행적’, 전기) 문헌은 우르와 이븐 알주바이르(713년 사망)와 이븐 시하브 알주흐리(742년경 사망) 같은 학자들이 모은 전승에서 자라났다. 가장 영향력 있는 전기인 이븐 이스하크(767년경 사망)의 저작은 주로 이븐 히샴(833년 사망)의 편집본과 타바리의 발췌로 전한다. 와키디(823년 사망)는 원정에 관해 썼고, 그의 서기 이븐 사드(845년 사망)는 방대한 인물 사전을 엮었다.
결국 가장 자세한 기록은 무함마드가 죽은 지 120~200년 뒤 구전에 기대어 쓰였다. 거기에는 서로 어긋나는 내용, 기적 이야기,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아바스 왕조·알리 가문의 우열을 둘러싼 후대의 다툼이 반영된 자료가 섞여 있다. 무슬림 학자들도 이런 문제를 잘 알았고 전승을 평가하는 기준을 세웠다. 현대 역사가들은 다른 도구를 써서, 전승 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야기가 시간에 따라 변해 간 과정을 살핀다.
몇몇 비무슬림 자료가 단편적이지만 독립적인 증거를 준다. 흔히 630~640년대로 연대가 매겨지는 시리아어 기록은 634년 가자 근처에서 ‘무함마드의 아랍인들’이 관련된 전투를 언급한다. 634년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어 문헌 『야곱의 가르침』(독트리나 야코비)은 사라센인 사이에 나타난 예언자를 이야기한다. 660년대에 쓰인 아르메니아의 세베오스 역사서는 무함마드를 아랍인에게 아브라함의 종교를 전한 상인으로 묘사한다. 이 문헌들은 정복 시기에 무함마드라는 예언자가 아랍인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지만, 바깥의 시선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그를 그린다. 무함마드의 이름이 새겨진 물질 증거, 곧 680년대의 주화와 예루살렘 바위의 돔 비문(691~692년)은 그가 죽고 수십 년 뒤에 나타난다.
심화
학계의 논쟁: 신뢰에서 회의로, 그리고 다시
19세기 유럽 학자 윌리엄 뮤어와 알로이스 슈프렝거는 시라를 비판적으로 다루면서도 그 큰 줄거리는 대체로 믿었다. 20세기 중반 W. 몽고메리 와트는 『메카의 무함마드』(1953)와 『메디나의 무함마드』(1956)에서 큰 영향을 끼친 사회경제적 해석을 내놓았다. 상업 경제의 성장이 부족의 연대를 약화시켜 생긴 도덕적 위기에 무함마드의 메시지가 응답했다는 것이다. 한편 요제프 샤흐트는 법에 관한 하디스 대부분이 8~9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해 전승 사슬의 역사적 가치에 의문을 던졌다.
1970년대에는 ‘수정주의’ 또는 회의주의적 접근이 나타났다. 존 원스브러는 이슬람 전통을 후대 종파적 환경의 산물로 보았고, 퍼트리샤 크론과 마이클 쿡은 『하가리즘』(1977)에서 비무슬림 자료만으로 초기 이슬람을 실험적으로 재구성해 전통과 크게 다른 그림을 얻었다. 이 연구들은 지리·연대·이슬람 정체성의 형성에 관한 새로운 질문을 자극했지만, 크론과 쿡은 뒤에 『하가리즘』의 구체적 주장에서 거리를 두었고, 어떤 수정주의적 재구성도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극히 주변적인 견해다.
최근 연구는 중간의 길을 찾아왔다. 하랄트 모츠키, 그레고어 쇨러, 안드레아스 괴르케는 여러 이본의 전승 사슬과 본문을 함께 비교해 가장 이른 공통 전승자를 찾아가는 ‘이스나드 겸 마튼’ 방법을 발전시켰고, 일부 자료는 우르와 이븐 알주바이르에게 거슬러 올라가는 전승을 포함해 7세기 말까지 추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레드 도너는 『무함마드와 신자들』(2010)에서 초기 운동이 경건과 다가오는 최후 심판에 초점을 둔 포용적인 ‘신자’ 공동체로 스스로를 이해했으며, 뚜렷이 구별되는 ‘무슬림’ 정체성은 690년대 무렵에야 굳어졌다고 제안했다. 다른 학자들은 후기 고대라는 배경을 강조하며 쿠란을 당대의 유대교·그리스도교·아라비아 전통과 나란히 읽는다.
무슬림 학계도 시라와 하디스 비판이라는 오랜 전통을 이어 가면서 학술적 방법과 점점 더 많이 대화하고 있다. 그 결과 메카 출신, 예언자로서의 설교, 이주, 메디나에서의 지도력, 메카 정복, 632년 무렵의 죽음이라는 생애의 기본 틀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많은 세부와 그 해석은 여전히 열려 있다.
심화
유산, 그리고 역사 속의 여러 시선
무함마드가 곧바로 남긴 것은 경전과 의례와 정치적 중심을 갖춘 공동체였다. 그가 죽은 지 10년 안에 아랍군은 시리아·이라크·이집트를 차지했고, 한 세기 안에 이슬람의 지배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인더스강까지 이르렀다. 그 뒤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은 정복의 경계를 훨씬 넘어 교역과 학문과 수피 교단의 연결망을 따라 서·동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로 퍼졌다. 오늘날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아라비아가 아니라 인도네시아다.
이슬람 바깥에서 무함마드를 보는 시선은 크게 변해 왔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논쟁서는 흔히 그를 거짓 예언자나 이단자로 그렸고, 이런 이미지는 오랫동안 유럽인의 시각을 좌우했다. 계몽주의 이후 1840년 ‘예언자로서의 영웅’을 강연한 토머스 칼라일처럼 그를 더 공감적으로 그린 작가들도 나왔고, 현대 학계는 판단보다 역사적 이해를 목표로 삼는다. 20~21세기에는 서구 매체의 무함마드 묘사와 모욕이 대규모 항의와 때로는 폭력을 불러,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존중을 둘러싼 논쟁을 낳았다.
후대의 몇몇 종교도 무함마드를 인정한다. 바하이교는 그를 하느님의 현현으로 보고, 드루즈는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존중한다. 그러나 무슬림에게 그의 의미는 유일무이하다. 그들이 믿기에 그는 하느님의 마지막 계시가 내려온 통로이며, 그 계시대로 사는 법을 몸소 보여 준 사람이다.
핵심 개념
- 타우히드(하느님의 유일성)
- 무함마드 설교의 중심 가르침. 하느님은 한 분이며 동반자도 짝도 없고, 오직 그분만이 예배받기에 합당하다.
- 예언자직(누부와)
- 하느님이 아담부터 아브라함·모세·예수에 이르는 많은 예언자를 인류에게 보냈으며, 무함마드가 그 마지막인 ‘예언자들의 봉인’이라는 믿음.
- 계시
- 무슬림은 쿠란을 천사 가브리엘이 가져오고 무함마드가 낭송한 하느님 자신의 말씀으로 믿는다. 무함마드 개인의 말(하디스)은 이와 구별된다.
- 움마(공동체)
- 혈연이 아니라 신앙과 공동의 충성으로 정의된 공동체. 메디나에서 처음 조직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 무슬림을 가리킨다.
- 순나(예언자의 본보기)
- 하디스로 전해지는 무함마드의 관행과 가르침. 쿠란 다음가는 두 번째 원천으로 이슬람의 법·예배·예절을 이끈다.
- 사회 정의
- 초기 메시지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난한 이·고아·노예에 대한 의무와 묶고 탐욕을 꾸짖었다. 희사(자카트)는 이슬람의 기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심판과 책임
- 모든 사람은 최후의 날에 되살아나 믿음과 행위에 따라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 특히 메카 시기 설교에서 두드러진 주제다.
기록
- 약 570년 —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태어났다는 전통적 연대(사료와 계산에 따라 한두 해 차이가 있다).
- 약 595년 — 카디자 빈트 쿠와일리드와 혼인.
- 약 610년 — 전승에 따르면 라마단 달 히라 동굴에서 첫 계시를 받음.
- 약 613년 — 메카에서 공개 설교를 시작함.
- 약 615년 — 일부 무슬림이 그리스도교 왕국 악숨(에티오피아)으로 피신.
- 약 619년 — ‘슬픔의 해’. 카디자와 아부 탈리브가 세상을 떠남.
- 622년 — 히즈라. 메카에서 야스리브(메디나)로 이주, 이슬람력 원년.
- 624년 — 바드르 전투. 이 무렵 기도 방향이 메카로 바뀜.
- 627년 — 메디나 포위전(참호 전투).
- 628년 — 쿠라이시와 후다이비야 휴전 협정.
- 630년 — 메카 항복. 전면 사면과 카바의 우상 제거.
- 632년 — 고별 순례. 6월 8일 메디나에서 세상을 떠나고 아부 바크르가 첫 칼리파가 됨.
용어 풀이
- 히즈라(헤지라)
- 622년 무함마드와 신자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일. 이슬람력의 기점.
- 쿠라이시
- 메카를 지배하고 카바를 지키던 부족. 무함마드도, 초기의 많은 반대자도 이 부족 출신이다.
- 카바
- 메카의 정육면체 성소. 무슬림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지었다고 믿으며, 무슬림 기도의 방향이다.
- 시라
- 무함마드의 전통적 전기 장르. 이븐 히샴이 편집한 이븐 이스하크의 전기가 가장 유명하다.
- 하디스
- 무함마드의 말이나 행동을 전하는 보고. 전승자 사슬(이스나드)과 본문(마튼)으로 이루어진다.
- 이스나드
- 보고를 전해 준 사람들의 이름 사슬. 무슬림 학자와 현대 역사가 모두 이를 검토한다.
- 안사르와 무하지룬
- 무함마드를 맞아들인 메디나의 ‘조력자’들과 메카에서 함께 온 ‘이주자’들.
- 칼리파
- ‘후계자’. 무함마드 이후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 첫 칼리파는 아부 바크르다.
- 수니파와 시아파
- 이슬람의 두 주요 갈래. 본래 무함마드 이후 누가 공동체를 이끌 것인가를 두고 갈라졌다.
- 힐리예
- 특히 오스만 미술에서 예언자를 그림 대신 글로 묘사한 서예 작품.
묻고 답하기
무슬림은 무함마드를 숭배하나요?
아니요. 무슬림은 오직 하느님만 예배해요.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도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의 본보기를 따르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으로 여겨요.
이 페이지에는 왜 무함마드의 그림이 없나요?
대부분의 무슬림은 예언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무례하다고 여기고, 여러 이슬람 전통은 이를 금지해요. 이슬람 미술은 대신 서예로 그를 기려 왔고, 이 페이지도 그 관행을 따라요.
무함마드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나요?
무슬림 전통은 그를 ‘알나비 알움미’라고 부르는데, 흔히 ‘글을 모르는 예언자’로 이해해요. 신자들은 이를 쿠란이 그의 학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요. 일부 현대 학자는 ‘움미’를 ‘경전이 없던 민족에 속한’ 같은 뜻으로 달리 해석해요.
이슬람력은 왜 그의 탄생이 아니라 622년에서 시작하나요?
칼리파 우마르 때 공동체는 메디나 이주인 히즈라를 기점으로 골랐어요. 무슬림 공동체가 독립된 사회로 세워진 때이기 때문이에요.
이슬람 사료 밖에서도 무함마드가 언급되나요?
네. 630~660년대의 시리아어·그리스어·아르메니아어 그리스도교 문헌 몇 가지가 무함마드라는 아랍인의 예언자 또는 지도자를 언급해, 초기 정복 시기에 그가 한 역할을 확인해 줘요.
초기 전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그가 죽고 한 세기가 넘게 지난 뒤 구전을 바탕으로 기록되었어요. 역사가들은 생애의 큰 틀에는 동의하지만 많은 세부를 두고 논쟁하며, 방법도 회의적 거부부터 가장 오래된 전승 층을 세심하게 복원하는 것까지 다양해요.
수니파와 시아파는 왜 갈라졌나요?
632년 무함마드가 죽은 뒤 지도자 문제에서 시작되었어요. 다수는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로 받아들였고, 한 무리(시아, ‘당파’)는 알리가 지명되었다고 보았어요. 이후 수백 년 동안 신학과 법도 다르게 발전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Muhammad. Wikipedia
- Prophetic biography. Wikipedia
- Historiography of early Islam. Wikipedia
- Historicity of Muhammad. Wikipedia
- Constitution of Medina. Wikipedia
- Depictions of Muhammad. Wikipedia
- History of the Quran. Wikipedia
- W. Montgomery Watt, Muhammad at Mecca. Clarendon Press, Oxford, 1953
- Fred M. Donner, Muhammad and the Believers: At the Origins of Islam.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 Jonathan A. C. Brown, Muhamma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