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악숨 오벨리스크

ሐውልተ አክሱም (Ḥawəlta Aksum)

약 300–400년 · 악숨

한 문장으로

악숨 오벨리스크는 약 1,700년 전 아프리카의 악숨 왕국 사람들이 돌 하나를 통째로 깎아 여러 층 건물 모양으로 만든, 8층 건물만큼 높은 돌기둥으로, 지배층의 무덤 위에 세운 기념물이다.

악숨 오벨리스크
이미지: Ondřej Žváček · CC BY 2.5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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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 오늘날 에티오피아 북부의 높은 땅에 악숨이라는 부유하고 힘센 왕국이 있었다. 악숨의 왕들은 상아와 금, 향료를 로마와 인도, 아라비아까지 내다 팔았고, 자기 나라의 동전도 직접 만들었다.

악숨 사람들은 중요한 사람이 죽으면 무덤 위에 커다란 돌기둥을 세웠다. 이런 돌기둥을 ‘석비(스텔레)’라고 한다. 악숨 오벨리스크는 그중에서도 손꼽히게 큰 것이다. 돌 한 덩어리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는데, 높이는 약 24미터이고 무게는 코끼리 서른 마리쯤 된다.

이 돌기둥은 돌로 만든 고층 건물처럼 생겼다. 맨 아래에는 열리지 않는 가짜 문이 있고, 그 위로 가짜 창문과 동그랗게 튀어나온 가짜 나무 기둥 끝이 한 층 한 층 새겨져 있다. 하늘을 향해 솟은 궁전의 모형 같다.

그렇게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겼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아마 도시 밖 언덕에서 돌을 잘라 낸 다음, 많은 사람이 밧줄로 썰매나 굴림대 위에 얹어 끌고 왔을 것이다. 코끼리가 도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흙으로 비탈을 쌓고 지렛대를 써서 세웠을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모험 같은 일을 많이 겪었다. 아주 오래전에 쓰러져 부러졌고, 1937년에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이탈리아가 조각조각 잘라 로마로 가져가 전리품처럼 세웠다. 에티오피아가 오랫동안 돌려 달라고 요구한 끝에 2005년에 되돌아왔고, 2008년에 원래 자리인 악숨에 다시 우뚝 섰다.

한눈에 보기

무엇
돌 하나로 만든 장례용 석비(스텔레). 흔히 오벨리스크라 부르며, 고고학에서는 ‘제2석비(Stele 2)’라고 한다
언제
4세기 무렵 조각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3세기 말로 보는 학자도 있다). 정확한 연대는 모른다
어디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주 악숨의 북부 석비 지구
크기
높이 약 24m, 무게 약 160톤. 단단한 화산암(흔히 네펠린 섬장암 또는 포놀라이트로 설명) 한 덩어리
만든 이
악숨 왕국의 석공들.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지배층 인물
모양
여러 층 건물을 본뜬 모습. 아래에 가짜 문, 층마다 가짜 창문과 튀어나온 들보 끝
근현대사
1937년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로마로 반출, 2005년 에티오피아로 반환, 2008년 악숨에 다시 세움
지위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악숨 고고 유적’의 일부

쉬움

악숨 오벨리스크는 무엇인가

악숨 오벨리스크는 에티오피아 북부의 도시 악숨(Axum이라고도 쓴다)에 서 있는 커다란 돌기둥이다. 고대 세계의 강국 가운데 하나였던 악숨 왕국 사람들이 만들었으며, 아마 4세기 무렵에 세웠을 것이다. 높이는 약 24미터, 무게는 약 160톤이고, 돌 한 덩어리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흔히 ‘오벨리스크’라고 부르지만 고고학자들은 보통 ‘석비’, 곧 스텔레(stele, 복수형 stelae)라는 말을 쓴다. 기념물로 세운 곧게 선 돌판이나 돌기둥이라는 뜻이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네 면이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꼭대기가 작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끝난다. 악숨의 돌기둥은 그보다 납작하고, 건물처럼 조각되어 있으며, 꼭대기가 둥글다.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점점 커지고 화려해진 악숨 고유의 무덤 표지 전통이다.

악숨에는 크고 작은 석비가 백 개 넘게 있다. 거의 다듬지 않은 돌부터 정교하게 장식한 몇 개의 거대한 석비까지 다양하다. 악숨 오벨리스크, 곧 학계에서 말하는 제2석비는 장식된 거대 석비 가운데 두 번째로 크다. 오늘날 도시 가장자리에 있는 악숨 지배층의 묘역, 북부 석비 지구에 서 있다.

오늘날 이 석비는 에티오피아의 국가적 상징이다. 그 이야기는 고대 홍해 무역로에서 시작해 1930년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거쳐, 문화재를 원래 나라에 돌려준 가장 유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이어진다.

[1][2][6]

쉬움

석비를 ‘읽는’ 법: 돌로 만든 고층 건물

악숨 오벨리스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높은 건물처럼 조각되었다는 것이다. 맨 아래에는 가짜 문이 있다. 자물쇠나 문고리까지 도드라지게 새겨, 마치 무덤이나 죽은 이의 집으로 열리는 문처럼 보인다. 그 위로는 기둥이 가로띠로 나뉘어 있는데, 띠 하나가 상상 속 건물의 한 층이다.

층마다 실제 악숨 건축의 특징이 담겨 있다. 가짜 창문이 줄지어 새겨져 있고, 층 사이로 가로 들보가 지나가며, 표면에 작은 둥근 혹이나 네모난 돌기가 튀어나와 있다. 이 돌기는 악숨 건물 벽에서 밖으로 삐져나온 나무 들보의 끝을 본뜬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원숭이 머리(monkey heads)’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실제 악숨의 궁전과 교회는 돌과 나무를 켜켜이 쌓아 바로 이런 식으로 지었고, 데브레 다모 수도원 교회처럼 후대 에티오피아 교회 가운데 이 양식을 지금까지 간직한 곳도 있다.

꼭대기는 반원 모양으로 둥글게 끝난다. 구멍과 자국으로 보아 한때 금속판이나 틀을 붙였던 것으로 보이며, 학자들은 거대 석비 일부에 금속 원반이나 상징물이 달려 있었다고 본다. 무엇을 나타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스도교 이전 악숨의 동전과 비문에는 신들을 상징하는 초승달과 원반이 자주 나온다.

아래에서 위로 석비를 읽어 가면, 하늘을 향해 여러 층으로 솟은 죽은 이의 집이 보인다. 정확한 종교적 의미가 무엇이든 강력한 메시지였다. 이곳에 묻힌 지배자는 도시 어디서나 보이는 돌 궁전을 누릴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1][2][8]

쉬움

석비 지구의 거인들

북부 석비 지구에는 정교하게 장식한 거대 석비가 셋 있다. 악숨 오벨리스크는 그중 하나다. 가장 큰 것은 제1석비, 곧 ‘대석비(Great Stele)’로, 길이가 약 33미터이고 무게는 500톤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의 어떤 사람들이 세운 돌보다도 큰 축에 드는 한 덩어리 돌이다. 그러나 대석비는 부러진 채 땅에 누워 있다. 많은 고고학자는 세우는 도중이나 세운 직후에 넘어져 깨졌다고 본다.

세 번째 거인인 제3석비는 높이가 약 21미터로, 흔히 ‘에자나 왕의 석비’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이름은 근래에 붙은 전승일 뿐이다. 석비에는 에자나와 연결할 만한 글자가 전혀 없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유럽 여행자와 고고학자들이 악숨을 기록할 때 장식된 거대 석비 가운데 여전히 서 있던 것은 이것 하나뿐이었고, 세월이 흐르며 기울어졌다.

거인들 주위에는 장식이 있거나 없는 작은 석비들과 지하 무덤이 흩어져 있다. 이 지구는 여러 세기에 걸쳐 지배층의 묘역으로 쓰였고, 석비의 크기는 그 아래나 곁에 묻힌 사람의 지위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2][7]

중급

돌을 캐고, 옮기고, 세우기

석비는 악숨 서쪽 언덕에서 나는 단단하고 결이 고운 화산암으로 만들었다. 고고학자들은 도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고대 채석장을 찾아냈고, 그곳에는 반쯤 다듬다가 버려진 석비가 아직 남아 있다. 석공들은 아마 바위에 구멍을 줄지어 뚫고 쐐기를 박아 쪼갠 뒤, 쇠 연장과 연마재로 다듬고 윤을 냈을 것이다.

100톤이 넘는 돌덩이를 몇 킬로미터나 옮기는 일은 엄청난 과업이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모든 설명은 추정이다. 대부분의 학자는 다져 놓은 길을 따라 나무 썰매나 굴림대에 얹어 많은 사람이 밧줄로 끌었다고 본다. 악숨 사람들이 코끼리를 잡아 부렸다는 기록이 있으니 코끼리도 힘을 보탰을 수 있다. 세밀한 조각은 돌이 묘역에 도착한 뒤에야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석비를 세우는 것은 가장 위험한 단계였다. 밑동을 미리 파 둔 구덩이로 밀어 넣고, 나무로 받치면서 지렛대와 밧줄, 흙 비탈로 윗부분을 조금씩 들어 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밑동 주위에는 커다란 받침돌과 쐐기돌을 놓았다. 대석비가 무너진 것은 이 기술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돌이 클수록 제 무게를 못 이겨 금이 갈 위험도 커졌다.

이런 일을 해내려면 수백 명의 일꾼을 조직하고 먹이며, 목재와 쇠, 밧줄을 댈 수 있는 국가가 있어야 했다. 그러니 석비는 예술품일 뿐 아니라 악숨 지배자들의 경제력과 정치력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8][7][2]

중급

악숨 왕국: 고대 세계의 교차로

악숨 왕국은 서기 1세기 무렵 오늘날 에티오피아 북부와 에리트레아의 고원에서 성장했다. 1세기 중엽 그리스어로 쓰인 상인 안내서 『에리트라해 항해지(Periplus Maris Erythraei)』에 이미 악숨과 홍해의 항구 아둘리스가 나오며, 이곳을 통해 상아 등이 수출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 뒤 몇 세기 동안 악숨은 로마의 지중해 세계와 아라비아, 인도를 잇는 큰 무역 강국이 되었다. 상아와 금, 향료, 짐승 가죽 등을 내보내고 옷감, 유리, 금속 제품, 포도주, 올리브유 등을 들여왔다. 3세기 말에는 엔두비스 왕이 금·은·동으로 동전을 찍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나라는 몇 되지 않았다. 악숨 동전은 멀리 동지중해와 인도 남부에서도 발견된다.

3세기 페르시아의 종교 지도자 마니는 악숨을 로마·페르시아·중국과 함께 세계 4대 왕국으로 꼽았다고 전한다. 악숨의 왕들은 게에즈어(고유 문자로 쓰는 에티오피아의 고전어)와 사바어(남아라비아어), 그리스어로 비문을 남겼다. 아프리카와 홍해 건너편을 함께 바라보던 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6세기 칼레브 왕 때 악숨은 한동안 예멘 일부까지 다스리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거대 석비는 그보다 앞선 시기, 곧 그리스도교가 왕실의 종교가 되기 전에 세워진 것이다.

[3][2][7]

중급

종교와 죽음: 석비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석비는 악숨 지배층의 무덤을 표시했다. 북부 석비 지구의 땅 밑과 주변에서 고고학자들은 바위를 파거나 돌로 쌓은 지하 무덤을 찾아냈고, 그중에는 방이 여러 개인 것도 있다. 쓰러진 대석비 바로 옆에는 ‘마우솔레움(영묘)’이라 불리는 큰 석조 무덤이 있고, 근처에는 ‘벽돌 아치 무덤’이 있다. 많은 무덤이 이미 고대에 도굴되었지만, 남은 토기와 유리, 금속 제품 등으로 보아 죽은 이를 값진 물건과 함께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석비에 담긴 믿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 이전 악숨의 종교에 관한 기록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비문과 동전에는 아스타르, 베헤르, 마흐렘 같은 신이 나오며, 마흐렘은 왕과 연결되었다. 원반과 초승달도 상징으로 쓰였다. 많은 학자는 여러 층 건물 모양이 무덤을 죽은 이의 집이나 궁전으로 여기는 생각을 표현했고, 석비의 높이는 지배자와 그 가문의 힘과 지위를 드러냈다고 본다.

석비는 산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도시 어디서나 보이는 죽은 왕의 기념물은 왕조의 위대함을 사람들에게 일깨웠고, 다음 왕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점점 더 큰 석비를 세운 것은 왕이나 가문 사이의 경쟁이었을지도 모른다.

석비 근처에서는 홈이 파인 돌 제단 같은 공양 시설도 발견되었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무덤에서 의례가 이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8][7][2]

중급

그리스도교와 석비 전통의 끝

4세기에 에자나 왕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로마 세계 출신의 그리스도교인 프루멘티우스의 영향이었다. 프루멘티우스는 어린 시절 포로로 악숨 궁정에 왔다가 나중에 악숨의 첫 주교가 된 인물이다. 에자나의 동전에서는 옛 원반과 초승달 상징이 십자가로 바뀌었는데, 국가 화폐에 십자가를 새긴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세 언어로 새긴 ‘에자나 비석’을 비롯한 그의 비문들은 원정을 기록하고, 후기 비문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신을 찬양한다.

이 변화 뒤로 거대 석비는 더 이상 세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는 악숨 오벨리스크를 비롯한 장식된 거대 석비들을 에자나의 개종 직전이나 그 무렵, 곧 4세기나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본다. 대석비가 넘어진 극적인 실패가 전통의 종말을 앞당겼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추측일 뿐이다.

그리스도교는 에티오피아 고원에 뿌리내린 신앙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인 에티오피아 정교회 테와히도 교회는 악숨을 가장 거룩한 도시로 여긴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들은 악숨의 시온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언약궤가 모셔져 있으며 수도사 한 명이 이를 지킨다고 믿는다. 이 전승은 에티오피아인의 종교적 정체성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7세기 초 메카에서 박해를 받던 예언자 무함마드의 초기 추종자들이 악숨으로 피신했고, 그리스도교인 악숨 왕이 그들을 보호했다. 흔히 ‘첫 번째 히즈라’라고 부르는 이 일로 악숨은 이슬람의 기억 속에서도 존경받는 자리를 차지한다.

[5][3][2]

중급

쓰러지고, 약탈당하고, 돌아오다

악숨은 7세기부터 쇠퇴했다. 홍해를 건너는 무역로가 바뀌고 에티오피아 고원의 정치 중심이 남쪽으로 옮겨 갔으며, 8세기 초 무렵에는 동전 발행도 멈추었다. 그래도 악숨은 성스러운 곳으로 남았고, 에티오피아 황제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악숨 오벨리스크는 쓰러져 몇 조각으로 부러진 채 수백 년 동안 땅에 누워 있었다.

1935~36년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식민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지켜 온 몇 안 되는 아프리카 나라인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는 군인과 민간인에게 독가스를 썼고, 이어진 점령기에는 1937년 2월 아디스아바바 학살 같은 대규모 보복 살육이 벌어졌다. 1937년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부러진 석비가 악숨에서 반출되어 이탈리아로 실려 갔고, 로마에 다시 세워졌다. 제막일은 파시스트 ‘로마 진군’ 15주년인 1937년 10월 28일이었고, 자리는 이탈리아 아프리카부 청사 앞의 포르타 카페나 광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1947년 평화 조약에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져간 물건들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비용과 기술적 위험, 소유권을 둘러싼 논란 속에 오벨리스크는 수십 년 동안 로마에 남아 있었다. 에티오피아인에게 이 석비는 점령의 굴욕을 상징했고, 정권이 바뀌어도 반환 운동은 계속되었다. 2002년 5월에는 석비가 벼락을 맞아 손상되기도 했다.

2003~04년 오벨리스크는 다시 세 조각으로 해체되었고, 2005년 4월 세계 최대급 화물기가 여러 차례 날아 에티오피아로 실어 왔다. 원래 자리 근처 땅속에는 부서지기 쉬운 무덤들이 있어 다시 세우기 전에 정밀 조사가 필요했다. 유네스코의 감독 아래 석비는 북부 석비 지구에 다시 세워졌고 2008년 9월 4일 제막되었다. 이 반환은 전쟁이나 식민 지배 중에 빼앗긴 문화재의 반환을 둘러싼 국제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는 사례다.

[1][3][6]

심화

학계의 논쟁: 연대, 순서, 의미

연대. 거대 석비에는 글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연대는 석비와 연결된 무덤의 고고학, 그곳 출토품을 연대가 알려진 다른 유물과 비교한 결과, 그리고 그리스도교 수용 뒤에는 거대 석비를 세우지 않았다는 일반적 전제에 기댄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제2석비를 4세기의 것으로 보며, 3세기 말까지 올려 보는 이들도 있다. 세 거인 사이의 상대적 순서도 논쟁거리다. 악숨 석비 전통 전체는 서기 1천년기 초의 단순한 표지석에서 끝 무렵의 장식된 거대 석비까지 여러 세기에 걸친 것으로 추정된다.

대석비의 붕괴. 제1석비는 마우솔레움 부근에 부러진 채 누워 있다. 데이비드 필립슨(David Phillipson) 같은 고고학자들은 기초가 부실했던 탓에 세우는 도중이나 직후에 쓰러졌고, 거대 석비 가운데 마지막 것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훗날 무너졌거나 일부러 넘어뜨렸을 가능성을 검토한 연구자들도 있다. 이 문제는 석비들의 순서와 전통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름과 귀속. ‘에자나 왕의 석비’처럼 특정 왕과 석비를 잇는 대중적인 이름은 비문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후대의 게에즈어 문헌과 구전은 악숨을 시바 여왕, 그리고 솔로몬 왕조의 전설적 시조 메넬리크와 연결하지만, 이런 전승은 석비보다 훨씬 늦게 형성된 것으로 고고학보다는 에티오피아의 종교사·국가사에 속한다.

장식의 의미. 조각된 석비가 여러 층 건물을 본떴다는 데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같지만, 그것을 얼마나 문자 그대로 볼지는 갈린다. 실제 궁전의 모습으로 읽는 이도 있고, 죽은 이를 위한 상징적 ‘집’이나 아래의 무덤과 위의 하늘을 잇는 표현으로 보는 이도 있다. 사라진 꼭대기의 금속 장식이 남아 있었다면 몇몇 의문은 풀렸을지 모른다.

‘오벨리스크’라는 말. ‘악숨 오벨리스크’라는 널리 퍼진 이름에는 아프리카의 기념물을 이집트의 것에 빗대어 보던 유럽의 습관이 배어 있다. 많은 학자는 더 정확하게, 그리고 악숨의 전통이 독자적으로 발전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석비’나 ‘제2석비’라는 말을 선호한다.

[8][7][1]

심화

증거와 방법: 석비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나

초기 탐사. 16세기부터 유럽 여행자들이 석비를 기록했다. 처음으로 체계적인 조사를 한 것은 동양학자 엔노 리트만(Enno Littmann)이 이끈 1906년 독일 악숨 탐사대(Deutsche Aksum-Expedition)로, 기념물과 비문, 건축을 기록했다. 이들이 남긴 도면과 사진은 뒤에 바뀐 부분을 확인할 때 특히 귀중하다.

현대의 발굴. 1970년대 동아프리카 영국연구소가 네빌 치틱(Neville Chittick)의 지휘 아래 석비 지구를 발굴해 거대 석비와 연결된 무덤들을 확인했다. 에티오피아의 정치적 격변으로 중단되었던 작업은 1990년대 데이비드 필립슨이 다시 이어받아 마우솔레움과 벽돌 아치 무덤 등을 발굴하고 채석장을 조사했다. 그 뒤로도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 독일 등 여러 나라의 조사단이 현장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문헌 증거. 게에즈어·사바어·그리스어로 된 악숨 자체의 비문과 동전은 몇몇 왕의 이름과 순서를 알려 주지만, 석비를 직접 언급한 것은 없다. 『에리트라해 항해지』, 그리스·로마 저술가들, 코스마스 인디코플레우스테스의 이름으로 전하는 6세기 기록 같은 바깥 자료는 악숨의 무역과 궁정을 묘사한다. 『케브라 나가스트(왕들의 영광)』 같은 후대 에티오피아 문헌은 이 도시의 성스러운 과거에 관한 전승을 담고 있다.

보존 과학. 제2석비를 돌려받아 다시 세우려면 균열과 지반, 그 아래 무덤에 관한 공학적 연구가 필요했다. 2008년 재조립 때는 조각 사이를 현대식 보강재로 이었다. 기울어진 제3석비를 관찰하고 약한 무덤들을 보호하는 일은 지금도 과제로 남아 있다. 악숨은 보존과 고고학, 정치가 얼마나 얽혀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곳이다.

[8][7][2][1]

핵심 개념

석비(스텔레)
곧게 세운 돌 기념물. 악숨의 석비는 돌 한 덩어리로 만든 무덤 표지로, 일부는 엄청나게 크다.
단일석(모놀리스)
돌 하나로 만든 기념물. 악숨 오벨리스크는 길이 약 24m의 한 덩어리 돌로 조각되었다.
돌에 새긴 건축
조각된 석비는 가짜 문과 창문, 들보 끝까지 실제 악숨 건축을 본떠 여러 층 건물을 표현한다.
지배층의 추모
석비의 크기와 장식은 죽은 이의 지위와 그 가문이나 왕조의 힘을 반영했다.
홍해 무역
아프리카·지중해·아라비아·인도를 잇는 무역이 악숨의 부를 낳았고, 그 부로 기념물을 세웠다.
그리스도교화
4세기 에자나 왕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뒤 거대 석비는 더 이상 세워지지 않았다.
문화재 반환
2005년 로마에서 돌아온 오벨리스크는 전쟁 중 빼앗긴 문화재 반환 논의의 이정표가 되었다.

기록

  1. 약 50년 — 『에리트라해 항해지』가 악숨과 홍해 항구 아둘리스를 언급한다.
  2. 약 270년 — 엔두비스 왕이 금·은·동으로 악숨 고유의 동전을 찍기 시작한다.
  3. 약 300년 — 제2석비를 비롯한 장식된 거대 석비들이 조각되어 세워진 시기로 추정된다(4세기, 연대 불확실).
  4. 약 340년 — 에자나 왕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동전에 십자가가 등장한다. 이후 거대 석비는 세워지지 않는다.
  5. 약 520년 — 칼레브 왕이 예멘 원정에 나서며 악숨의 영역이 가장 넓어진다.
  6. 약 615년 —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메카의 초기 무슬림들이 악숨 왕에게 피신한다.
  7. 1906년 — 독일 악숨 탐사대가 석비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조사한다.
  8. 1937년 — 점령군 이탈리아가 쓰러진 석비를 로마로 가져가 10월 28일 제막한다.
  9. 1947년 — 이탈리아가 평화 조약에서 에티오피아에서 가져간 물건들의 반환을 약속한다.
  10. 1980년 — 악숨 고고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11. 2005년 — 4월, 세 조각으로 나뉜 오벨리스크가 항공편으로 에티오피아에 돌아온다.
  12. 2008년 — 석비가 악숨에 다시 세워져 9월 4일 제막된다.

용어 풀이

석비(스텔레)
기념물로 곧게 세운 돌판이나 돌기둥. 흔히 무덤을 표시하는 데 쓴다.
오벨리스크
본래 꼭대기가 작은 피라미드 모양인 이집트의 네모난 돌기둥. 다른 높은 돌 기념물에도 느슨하게 쓴다.
단일석(모놀리스)
돌 한 덩어리를 깎아 만든 기념물.
가짜 문
열리지 않는 조각된 문. 무덤이나 죽은 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상징한다.
‘원숭이 머리’
악숨 건물 벽에서 튀어나온 나무 들보 끝을 가리키는 고고학자들의 별명. 석비에도 돌로 새겨져 있다.
게에즈어
에티오피아의 고전어와 그 문자. 지금도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전례 언어로 쓰인다.
아둘리스
오늘날 에리트레아의 홍해 연안에 있던 악숨의 주요 항구.
『에리트라해 항해지』
이집트에서 인도까지의 항구와 무역을 설명한 1세기 그리스어 상인 안내서.
마우솔레움(영묘)
큰 무덤 건물. 악숨에서는 대석비 옆의 석조 무덤을 이렇게 부른다.
문화재 반환
빼앗긴 문화재를 원래의 나라나 공동체에 되돌려주는 일.

묻고 답하기

악숨 오벨리스크는 정말 오벨리스크인가요?

이집트식 오벨리스크는 아니다. 건물처럼 조각되고 꼭대기가 둥근 납작한 돌기둥인 악숨의 석비다. ‘오벨리스크’는 널리 쓰이는 별칭이다.

기계도 없이 그렇게 무거운 돌을 어떻게 세웠나요?

기록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밧줄로 썰매나 굴림대에 얹어 끌어 온 뒤 지렛대와 나무 받침, 흙 비탈을 써서 세웠을 것으로 본다.

그 아래에는 누가 묻혀 있나요?

알 수 없다. 지배층 묘역의 일부를 표시하지만, 누구를 기린 것인지 알려 주는 글자가 없다.

왜 로마에 가 있었나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하던 1937년, 파시스트 정권이 쓰러져 있던 석비를 전리품으로 로마에 가져갔기 때문이다. 2005년에 반환되었다.

왜 석비들이 그리스도교 이전의 것이라고 보나요?

4세기 에자나 왕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뒤로 거대 석비를 세우지 않았고, 석비와 연결된 무덤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의 유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석비는 한 번이라도 서 있었나요?

아닐 수도 있다. 많은 고고학자는 33미터짜리 대석비가 세우는 도중이나 직후에 부러졌다고 보지만, 논쟁이 있다.

건물 모양에는 어떤 뜻이 있나요?

여러 층의 악숨 건물을 본떴다는 데에는 의견이 같다. 많은 학자는 죽은 이의 집이나 궁전이자 가문의 힘을 과시하는 표현으로 읽지만, 정확한 믿음은 알 수 없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Obelisk of Axum. Wikipedia
  2. Axum. Wikipedia
  3. Kingdom of Aksum. Wikipedia
  4. 악숨 왕국. 위키백과
  5. Ezana Stone. Wikipedia
  6. Aksum.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7. Stuart Munro-Hay, Aksum: An African Civilisation of Late Antiquity.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1
  8. David W. Phillipson, Ancient Ethiopia: Aksum, Its Antecedents and Successors. British Museum Press, 1998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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