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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로마 제국이 아직 지중해 둘레를 모두 다스리던 때에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지금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모니카는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말년이 되어서야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똑똑했고, 부모는 돈을 모아 그가 연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공부를 시켰다.
젊은 시절 그는 명성과 즐거움, 그리고 큰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다. 세상에는 왜 악이 있을까? 무엇이 참일까? 그는 여러 무리와 생각을 기웃거리며 카르타고로, 로마로,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옮겨 가 이름난 선생님이 되었다.
서른한 살 때 밀라노에서 그의 마음이 크게 바뀌었다. 훗날 그가 쓴 바에 따르면, 정원에 앉아 울고 있을 때 옆집에서 아이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하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사도 바울의 편지가 담긴 책을 펴서 몇 줄을 읽고, 온 삶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이듬해 봄 그는 세례를 받았다.
아프리카로 돌아온 그는 사제가 되었다가 항구 도시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거의 매주 설교하고, 다툼을 해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엄청나게 많은 책과 편지를 썼다. 가장 유명한 책 『고백록』은 하느님께 드리는 긴 기도 같은 책인데, 그 안에서 그는 어린 시절 그냥 재미로 배를 훔친 일 같은 잘못까지 자기 삶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때는 로마 세계가 흔들리던 시대였다. 410년 고트족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자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하고 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이라는 거대한 책으로 답했다. 그는 430년, 반달족 군대가 그의 도시를 에워싸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한눈에 보기
- 생몰
- 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
- 출생지
- 로마 누미디아 속주의 타가스테(오늘날 알제리의 수크아라스)
- 사망지
- 히포 레기우스(오늘날 알제리 안나바 부근), 반달족의 포위 중
- 직분
- 수사학 교사. 391년 사제, 395/396년 무렵부터 히포의 주교
- 언어
- 라틴어
- 주요 저작
- 『고백록』(약 397~400), 『삼위일체론』(약 399~426), 『신국론』(약 413~426), 『그리스도교 교양』, 수백 통의 편지와 설교
- 핵심 사상
- 선의 결핍으로서의 악, 신을 찾아 쉬지 못하는 마음, 은총과 원죄, 시간과 기억의 내면 경험, 두 도성
- 공경
- 가톨릭의 성인이자 교회 학자. 성공회, 루터교, 정교회에서도 기린다
쉬움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인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흔히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라 부르는 그는 354년부터 430년까지 로마령 북아프리카에서 산 그리스도교 사상가이자 주교다. 서양 사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술가 가운데 하나로, 신학자와 철학자, 역사가와 시인들이 1,600년 동안 그와 논쟁하고 그에게서 빌려 왔다.
그는 오늘날 알제리 동부에 해당하는 누미디아 속주의 작은 도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도시와 농장, 교회가 가득한 부유한 라틴어권 로마 영토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인이자 로마인으로 여겼다. 그의 집안은 지방의 중간층이었으며, 일부 학자는 베르베르(아마지그) 계통이었을지 모른다고 보지만 증명할 수는 없다.
생애의 앞쪽 절반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설득하는 말의 기술인 수사학을 가르치며 지혜를 찾아 방황했다. 뒤쪽 절반은 항구 도시 히포 레기우스의 사제이자 주교로 살았다. 그는 책을 백 권 넘게 썼고, 수백 통의 편지와 설교도 남아 있다. 고대 저술가 가운데 이만큼 많은 글을 남긴 이는 드물다.
가장 유명한 저작은 하느님께 드리는 영적 자서전 『고백록』, 그리고 410년 로마 약탈 뒤에 쓴 역사와 사회에 관한 방대한 성찰 『신국론』이다. 신과 악, 자유의지와 은총, 기억과 시간, 사랑과 교회에 관한 그의 생각은 중세 그리스도교, 종교 개혁, 근대 철학을 빚어냈다.
쉬움
방황하는 젊은이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려서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 신자’로 등록되었지만 세례는 미루어졌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넉넉지 않은 시 의회 의원으로, 이교도였다가 죽기 얼마 전 세례를 받았다. 가족은 부유한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아우구스티누스를 이웃 도시 마다우로스로, 이어 로마령 아프리카의 대도시 카르타고로 유학 보냈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 시절의 작은 장면들을 많이 떠올린다. 억지로 그리스어를 배운 일,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디도가 죽는 장면을 읽고 운 일, 친구들과 이웃집 나무의 배를 훔친 일 따위다. 배를 훔친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나쁜 짓을 하는 짜릿함 때문이었다. 훗날 그는 이 기억을 통해 깊은 질문을 던진다. 사람은 왜 때로 악을 그 자체로 택하는가?
열여덟 살 무렵 그는 한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는 끝내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느님이 주신 이’)가 태어났고, 둘은 15년쯤 함께 살았다. 열아홉 살 때 지금은 전하지 않는 키케로의 대화편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지혜를 찾는 일, 곧 철학에 반했다.
그 뒤 그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가 세운 종교 운동인 마니교에 들어갔다. 마니교는 세상이 빛과 어둠이라는 대등한 두 힘이 싸우는 전쟁터라고 가르쳤다. 9년쯤 이 가르침은 악이 어디서 오느냐는 그의 질문에 답을 주는 듯했다. 그러나 천문학과 철학에 관한 그의 의문을 마니교 스승들이 풀어 주지 못하자 그는 점차 실망하게 되었다.
쉬움
밀라노의 정원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가르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383년 로마로 갔고, 384년 서로마 황제의 궁정이 있던 밀라노의 공식 수사학 교수 자리를 얻었다. 어머니도 뒤따라왔다. 모니카는 좋은 집안의 어린 소녀와 약혼을 주선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의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훗날 그는 이 결정을 고통스럽게 회고한다.
밀라노에서 두 가지가 그를 바꾸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는 성경을 깊이 있는 영적 의미로 읽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리우스 빅토리누스가 라틴어로 옮긴 플로티노스 같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글, 곧 ‘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은 신을 공간 속에 있지 않은 영적 실재로, 악을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고백록』 제8권에 따르면 386년 여름, 그는 야망과 성생활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괴로움에 정원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때 옆집에서 아이가 “톨레 레게, 톨레 레게(집어서 읽어라)” 하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바울의 로마서를 펼쳐, 그리스도를 옷 입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말라는 구절을 읽었다. 그는 “확신의 빛”이 마음에 가득 찼다고 썼다.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친구와 가족과 함께 카시키아쿰에서 몇 달 동안 철학적 은거를 한 뒤, 387년 부활절에 아들,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는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직전 모자가 함께 겪은 영적 상승의 체험은 제9권에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중급
히포의 주교
388년 아프리카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타가스테에서 친구들과 기도와 공부에 전념하는 조용한 삶을 꾸리려 했다. 아들 아데오다투스는 그곳에서 젊은 나이에 죽었다. 391년 항구 도시 히포 레기우스를 찾았다가 신자들에게 붙들려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초대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395/396년 무렵 그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평생 그 자리를 지켰다.
로마 말기 아프리카의 주교는 공적인 인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때로 한 주에 여러 번 정기적으로 설교했고, 속기사들이 받아 적은 설교가 수백 편 남아 있다. 주교 법정에서 민사 분쟁을 판결하고, 가난한 이들을 변호하고, 관리들에게 탄원하고, 노예 상인에게서 사람들을 풀어 주고, 교회 재산을 관리했다. 또 성직자들과 재산을 공유하며 소박하게 공동생활을 했는데, 이 공동체를 위해 쓴 지침은 훗날 많은 수도회가 따르는 ‘아우구스티누스 회칙’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쉬지 않고 글을 쓰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베들레헴의 히에로니무스를 비롯해 지중해 곳곳의 주교와 관리, 지식인, 평범한 신자들과 편지를 나누었다.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도 참석하며 아프리카 교회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자리 잡았다.
만년은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힘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다. 429년 반달족이 에스파냐에서 바다를 건너왔고, 430년 히포를 포위했다. 열병을 앓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포위 중이던 430년 8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전기 작가 포시디우스에 따르면 그는 침상 옆 벽에 참회 시편을 써 붙여 놓았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의 장서는 살아남았다.
중급
『고백록』: 하느님께 들려준 삶
397~400년 무렵에 쓴 『고백록』은 13권으로 되어 있다. 제1~9권은 갓난아기 때부터 387년 어머니의 죽음까지 그의 삶을 이야기한다. 제10권은 현재의 자신과 기억의 본성을 살피고, 제11~13권은 창세기 첫머리로 눈을 돌려 시간과 창조, 성경의 의미를 성찰한다. 책 전체가 하느님을 ‘당신’이라 부르며 드리는 긴 기도다.
라틴어 ‘콘페시오(confessio)’는 죄의 고백과 찬미의 고백을 함께 뜻한다. 책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당신께서 저희를 당신을 향하도록 지으셨으니,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안식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아 헤맨 여정으로, 하느님께 돌아온 일을 자신이 참으로 찾던 것의 발견으로 그린다.
『고백록』은 흔히 서양 문학 최초의 자서전이라 불리지만,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어서 학자들은 이 명칭을 두고 논쟁한다. 이 책은 심리를 꿰뚫는 작품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동기, 습관의 힘, 둘로 갈라진 의지, 우정과 슬픔, 그리고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파고든다.
제11권에는 시간에 관한 이름난 분석이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으면 나는 안다.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하면 나는 모른다.” 그는 과거와 미래가 기억과 기대로서 마음속에만 있으며, 시간은 영혼의 일종의 ‘늘어남(distentio)’이라고 주장한다. 후설에서 리쾨르까지 많은 철학자가 이 분석과 씨름했다.
중급
『신국론』: 로마 약탈 이후의 역사
410년 8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해 약탈했다. 로마가 외적에게 함락된 것은 약 800년 만의 일이었다. 피난민들이 아프리카로 건너왔고, 일부 이교도는 로마가 옛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약 413년부터 426년까지 여러 차례에 나누어 쓴 22권의 『신국론』으로 이에 답했다.
제1~10권은 이교의 신들이 로마를 지켜 주었다거나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로마의 종교와 철학을 비판하면서도,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자들을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가장 가까운 이들로 칭송한다. 제11~22권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나뉘는 두 공동체, 두 ‘도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을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자기 사랑으로 세워진 지상의 도성, 그리고 자기를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신의 사랑으로 세워진 하늘의 도성이다.
두 도성은 이 세상에서 뒤섞여 있다가 시간의 끝에야 갈라진다. 어떤 지상 국가도, 그리스도교 로마 제국조차도, 하느님의 도성과 같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평화와 질서도 그리스도인이 소중히 여겨야 할 참된 선이지만, 국가에는 교만과 지배욕(libido dominandi)도 새겨져 있다고 보았다. 정의가 없다면 왕국이란 큰 강도 떼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그의 물음은 유명하다.
『신국론』은 라틴 서방 세계에 하느님의 뜻을 어느 한 제국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끝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이야기로 생각하는 방법을 주었다. 이 책은 중세 정치 이론과 교회·국가 관계 논쟁, 그리고 그가 여러 글에서 다룬 정당한 전쟁(정전) 개념을 빚어냈다.
중급
핵심 사상: 신, 악, 자아, 사랑
신과 영혼.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은 오직 “신과 영혼”뿐이라고 썼다. 그는 안으로 눈을 돌려 신을 찾았다.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수학의 진리처럼 변하지 않고 마음보다 높은 진리들을 발견하게 되며, 이것이 진리 자체인 신을 가리킨다. 그는 이를 ‘조명’이라 불렀다. 해가 사물을 비추듯 신이 마음을 밝힌다는 것이다.
확실성. 회의주의자들에 맞서 그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보다 천 년 넘게 앞선 이 논증은 흔히 그것과 비교된다.
악. 마니교에 맞서 그는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선하며, 악은 사물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는 것처럼 선이 모자라거나 망가진 상태, 곧 ‘결핍’이라고 주장했다. 도덕적 악은 의지가 더 높은 선에서 등을 돌려 낮은 선으로 향할 때 생긴다.
사랑과 질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느냐로 정의된다. 덕은 ‘올바른 질서를 갖춘 사랑’, 곧 각각을 그 가치에 맞게 사랑하고 무엇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죄는 질서가 어긋난 사랑이다. 그 자체로 ‘누릴’ 것과 더 높은 것을 위해 ‘쓸’ 것을 나눈 그의 구분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교육을 빚었고, 『그리스도교 교양』은 성경 해석과 고전 학문의 그리스도교적 활용에 관한 핵심 안내서가 되었다.
삼위일체. 20년 가까이 쓴 『삼위일체론』에서 그는 한 하느님 안의 세 위격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탐구하며, 기억·이해·의지처럼 인간 정신 안에서 유비를 찾은 것으로 유명하다.
중급
논쟁: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은 생각을 논쟁 속에서 다듬었다. 한때 동료였던 마니교도들에 맞서 창조의 선함과 악의 본성, 자유의지에 관해 썼다. 초기작 『자유의지론』은 악이 자유의 오용에서 오는 것이므로 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나투스 논쟁은 아프리카 교회를 둘로 갈랐다. 거대한 경쟁 교회였던 도나투스파는 4세기 초 박해 때 성경을 내준 성직자는 거룩함을 잃었고, 자격 없는 성직자가 베푼 성사는 무효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사가 집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하며, 이 세상의 교회는 성인과 죄인이 섞인 공동체라고 반박했다. 411년 카르타고 회의 뒤 제국의 법이 도나투스파를 억압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를 되돌리기 위해 국가의 압력을 쓰는 것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 입장은 종교적 강제를 정당화한 초기 사례로 거센 비판을 받아 왔다.
411년 무렵 시작된 펠라기우스 논쟁은 은총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다. 브리타니아 출신 금욕가 펠라기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므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가 원죄로 상처 입었고, 오직 신의 은총만이 의지를 치유해 선을 사랑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를 상대한 마지막 저작들에서는 예정에 관한 강한 견해를 펼쳤다.
이런 입장은 서방 그리스도교에 깊은 영향을 주었지만 논란도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성인으로 공경하는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대체로 그의 원죄론을 같은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가 시작한 은총과 자유의지 논쟁은 중세와 종교 개혁까지 이어졌다.
중급
여러 세기에 걸친 영향
라틴 중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용된 권위였다. 수도사와 학자, 교황들이 그를 읽었고, 그의 저작은 수천 부의 사본으로 베껴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크게 기대면서도 끊임없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와 수도회 같은 수도 단체들은 그의 이름이 붙은 회칙을 따랐다.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고, 종교 개혁가들은 당대의 오류라고 여긴 것에 맞서 그의 은총론에 호소했다. 가톨릭 사상가들도 그를 자기편으로 여겼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책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이름을 딴 얀센주의가 그의 은총론을 어떻게 읽을지를 둘러싼 논쟁 끝에 로마 교황청의 단죄를 받았다.
근대 철학자들도 거듭 아우구스티누스로 돌아왔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그의 논증과 비교되어 왔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를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관한 『고백록』의 한 대목으로 시작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시간과 기억, 자아에 관한 그의 성찰은 지금도 현상학과 심리철학에 영향을 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 지성사의 일부로도 기억된다. 알제리를 비롯한 곳에서 그의 아프리카인 정체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서양’ 사상의 기초를 놓은 인물 가운데 하나가 라틴어로 글을 쓴 북아프리카인이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심화
사료와 신뢰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어떻게 아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인치고 드물게 기록이 풍부한 인물이다. 『고백록』 외에도 수십 년 동안 그를 알고 지낸 칼라마의 주교 포시디우스가 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포시디우스가 정리한 저작 목록 『인디쿨룸』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만년에 『재론고(Retractationes)』를 써서 자기 책들을 대략 쓴 순서대로 되짚고 바로잡았는데, 이는 학자들이 저작 연대를 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새로운 발견도 계속 기록을 보태고 있다. 1970년대 요하네스 디비야크가 프랑스의 사본들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편지 묶음을 찾아냈고(1981년 출간), 1990년에는 프랑수아 돌보가 마인츠의 사본에서 알려지지 않은 설교 모음을 발견했다. 이 글들은 노예 매매, 법적 분쟁, 목회 같은 일상의 문제와 씨름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여 준다.
『고백록』은 특별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책은 사건이 일어나고 10년 이상 지나, 목회적·신학적 목적을 지닌 주교가 쓴 것이다. 프랑스 학자 피에르 쿠르셀은 1950년에 정원 장면이 문학적·상징적 관습에 따라 빚어진 것이며, 386년의 회심은 어느 정도 신플라톤주의로의 회심이었다고 주장해 큰 논쟁을 일으켰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고백록』을 단순한 역사도, 순전한 허구도 아닌, 실제 경험에 대한 정교한 신학적 해석으로 본다.
피터 브라운의 전기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1967, 개정판 2000)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로마 말기 아프리카의 사회 속에 놓고 읽었으며 지금도 표준 저작이다. 개정판에서 브라운은 디비야크 편지와 돌보 설교에 비추어 예전의 판단 일부를 다시 검토했는데, 새로운 증거가 역사 해석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심화
학계의 논쟁: 연속성, 강제, 은총
연속인가 변화인가.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순탄하게 발전했는지, 큰 전환을 겪었는지를 두고 논쟁한다. 흔한 견해는 390년대, 특히 『심플리키아누스에게 보낸 답변』(약 396)에서 은총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바뀌어 신의 주도권을 훨씬 강하게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386년의 회심보다 더 중요한 사상의 전환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철학과 신학. 철학사가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디까지 플라톤주의자였는지 묻는다. 그는 분명 플로티노스와 포르피리오스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지만, 특히 그들의 교만과 육화에 대한 거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 관계를 종합으로 볼지, 변형이나 비판으로 볼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강제.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억지로라도 데려오라”(루카 복음 14장 23절)는 비유를 근거로 도나투스파에 대한 제국의 조치를 지지했고, 이는 훗날 박해를 정당화하는 데 인용되었다. 역사가들은 국가가 종교적 통일을 흔히 강요하던 그의 시대 기준으로 그를 평가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게 쓴 사상에 그가 책임이 있는지를 논한다.
원죄, 성, 예정. 원죄가 전해진다는 견해, 성적 욕망을 어긋난 의지의 표시로 보는 견해, 예정론은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와 남부 갈리아 수도사들 등 당대부터 비판받았고, 지금도 신학자와 역사가, 페미니스트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된다. 반면 그의 사상이 이런 비판이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섬세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런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에 여전히 살아 있는 참여자임을 보여 준다.
핵심 개념
- 쉬지 못하는 마음
- 사람은 신을 향하도록 지어졌으며, 가장 깊은 갈망은 신 안에서만 채워진다.
- 결핍으로서의 악
- 악은 실체가 아니라 선의 부재나 훼손이며, 도덕적 악은 의지가 더 높은 선에서 등을 돌릴 때 생긴다.
- 은총
- 인간의 의지를 치유하고 움직이는 신의 값없는 선물.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 없이는 참으로 선을 사랑할 수 없다고 보았다.
- 원죄
- 모든 인류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상처 입은 본성과 죄책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으로, 서방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에 있다.
- 영혼의 늘어남으로서의 시간
- 과거와 미래는 기억과 기대로서 마음속에 있으며, 시간은 영혼이 늘어나는 것이다.
- 두 도성
- 인류는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나뉜다. 자기 사랑은 지상의 도성을, 신의 사랑은 하늘의 도성을 세운다.
- 질서 잡힌 사랑
- 덕은 각각을 그 가치에 맞게 사랑하는 것이고, 죄는 질서가 어긋난 사랑이다.
- 내면성
- 진리는 마음 안으로, 그리고 다시 신을 향해 위로 돌아설 때 발견된다. 이 길은 서양의 자아 관념을 빚었다.
기록
- 354년 — 11월 13일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난다.
- 약 373년 —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마니교에 들어간다.
- 384년 — 밀라노의 공식 수사학 교수가 되어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는다.
- 386년 — 밀라노의 정원에서 회심하고 카시키아쿰에서 은거한다.
- 387년 — 부활절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어머니 모니카가 오스티아에서 숨진다.
- 391년 — 히포 레기우스에서 사제로 서품된다.
- 약 395년 — 히포의 주교가 된다(395년 또는 396년).
- 약 397년 — 『고백록』을 쓰기 시작한다.
- 410년 —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고, 피난민과 논쟁이 아프리카에 이른다.
- 411년 — 도나투스파에 맞선 카르타고 회의가 열리고, 펠라기우스 논쟁이 시작된다.
- 약 426년 — 『신국론』을 완성하고, 곧이어 『재론고』를 쓴다.
- 430년 —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한 가운데 8월 28일 세상을 떠난다.
용어 풀이
- 수사학
- 설득하는 말하기와 글쓰기의 기술. 로마 세계 고등 교육의 핵심이었다.
- 마니교
- 3세기 예언자 마니가 세운 종교로, 빛과 어둠의 우주적 싸움을 가르쳤다.
- 신플라톤주의
- 플로티노스가 발전시킨 고대 말기 철학. 모든 실재가 지고의 일자에게서 흘러나온다고 보았다.
- 예비 신자
- 그리스도교 세례를 준비하며 교리를 배우는 사람.
- 도나투스파
- 자격 없는 성직자가 베푼 성사는 무효라고 본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 운동.
- 펠라기우스주의
- 인간이 은총의 특별한 도움 없이도 신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와 연관된 가르침.
- 은총
-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신이 인간에게 값없이, 공로 없이 베푸는 도움.
- 원죄
- 인류가 아담의 첫 죄로 타락한 상태를 물려받았다는 교리.
- 예정
- 신이 영원으로부터 구원받을 이들을 택했다는 교리.
- 교회 학자
- 가톨릭교회가 가르침이 특히 중요한 성인에게 주는 칭호.
묻고 답하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 사람이었나요?
그렇다. 오늘날 알제리와 튀니지에 해당하는 로마령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보냈고, 라틴어로 글을 썼다. 집안이 베르베르 계통이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왜 배를 훔쳤나요?
『고백록』에서 그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금지된 일을 하는 짜릿함 때문에 친구들과 배를 훔쳤다고 말하며, 이 기억으로 사람이 왜 잘못을 택하는지를 탐구한다.
정말 “집어서 읽어라”라는 소리를 들었나요?
10년쯤 뒤에 쓴 『고백록』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 장면의 문학적·상징적 성격을 강조하는 학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제 경험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본다.
왜 『신국론』을 썼나요?
410년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하자 그리스도교 탓이라는 비난이 나왔다. 그는 영원한 지상 도성은 없으며 역사는 두 가지 사랑으로 빚어진다고 설명하며 답했다.
시간에 대해 뭐라고 했나요?
아무도 묻지 않으면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만 설명하려 하면 모르겠다고 했고, 과거와 미래는 기억과 기대로서 마음속에 있다고 보았다.
왜 논란이 되나요?
원죄와 예정에 관한 가르침, 도나투스파에 대한 국가 압력 지지는 그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비판받아 왔다. 그럼에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대하다.
철학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확실성, 시간, 의지, 기억, 내면 경험에 관한 그의 논증은 중세 사상가들과 데카르트, 비트겐슈타인, 아렌트, 현상학에 영향을 주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Saint Augustin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ugustine (354–430 C.E.).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ugustine of Hippo. Wikipedia
-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위키백과
- 신국론. 위키백과
- 도나투스파. 위키백과
- 펠라기우스주의. 위키백과
- 로마 약탈 (410년). 위키백과
- 아우구스티누스. 위키백과
- Peter Brown, Augustine of Hippo: A Biography. Faber and Faber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7 (rev. 200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