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서로마 제국의 멸망

Imperium Romanum Occidentale

476년 · 라벤나

한 문장으로

476년 이탈리아에서 군인 오도아케르가 어린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하고 새 황제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 순간은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영토와 힘을 잃어 온 로마 제국 서쪽 절반의 끝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흔히 쓰인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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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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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로마 제국은 수백 년 동안 브리타니아와 에스파냐에서 이집트와 시리아까지 지중해 둘레의 넓은 땅을 다스렸다. 제국이 워낙 커서 서기 400년 무렵에는 보통 황제 두 명이 나누어 다스렸다. 한 명은 서쪽에, 다른 한 명은 동쪽의 큰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서쪽 절반에서는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 같은 제국 바깥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 어떤 이들은 피난민으로, 어떤 이들은 로마를 위해 싸우는 군인으로, 또 어떤 이들은 침략자로 왔다. 로마 장군들은 권력을 두고 서로 싸웠고, 정부는 돈과 군인이 모자랐다.

서로마 황제들은 조금씩 땅을 잃었다. 로마시 자체도 410년과 455년에 점령당해 약탈을 당했다. 470년대가 되자 서로마 황제가 실제로 다스리는 곳은 이탈리아뿐이었고, 진짜 권력은 군대 지휘관들이 쥐고 있었다.

476년 오도아케르라는 지휘관이 마지막 서로마 황제인 소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물러나게 하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조용히 살도록 보냈다. 오도아케르는 새 황제를 세우지 않았다. 그는 왕으로서 이탈리아를 다스리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를 섬긴다고 말했다.

그 시대를 산 많은 사람에게 476년에 삶이 갑자기 바뀐 것은 아니었다. 농부는 계속 농사를 지었고, 교회는 계속 예배를 드렸으며, 사람들은 계속 라틴어로 말했다. 동로마 제국은 그 뒤로도 거의 천 년을 더 이어 갔다. 그래서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멸망’뿐 아니라 로마 세계의 긴 ‘변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한눈에 보기

기준 날짜
476년 9월 4일: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서로마 제국 종말의 전통적 기준)
장소
서로마 궁정의 수도 라벤나와 이탈리아. 더 긴 과정은 서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에 걸쳐 있다
긴 과정
보통 고트족의 제국 진입(376)과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378)에서 476년 또는 480년까지로 본다
주요 세력
서로마 황제와 장군들(스틸리코, 아에티우스, 리키메르, 오레스테스), 고트족·반달족·훈족·프랑크족·부르군트족·수에비족, 동로마 궁정
마지막 서로마 황제
이탈리아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475~476). 동로마가 인정한 율리우스 네포스는 480년 죽을 때까지 제위를 주장했다
그 뒤
후계 왕국들: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와 동고트, 에스파냐의 서고트, 갈리아의 프랑크, 아프리카의 반달
이어진 것
1453년까지 존속한 동로마(비잔티움) 제국, 서방의 라틴어·로마법·도시·그리스도교 교회
논쟁
이 시대를 ‘쇠퇴와 멸망’으로 볼지,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로 볼지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쉬움

476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476년 여름, 이탈리아의 병사들이 정착할 땅을 요구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로마군에 복무하던 게르만어 계통 집단 출신이었다. 지휘관인 파트리키우스 오레스테스가 이를 거절하자, 병사들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한 장교 오도아케르를 따랐고 476년 8월 23일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오도아케르는 오레스테스를 무찔렀고, 오레스테스는 그달 말 플라켄티아(오늘날 피아첸차) 부근에서 처형되었다. 이어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황실 궁정이 있던 라벤나를 손에 넣었다.

오레스테스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475년 10월 아버지의 손으로 제위에 올라 있었다. 476년 9월 4일 오도아케르는 그를 폐위했다. 그는 소년을 죽이지 않고 연금을 주어 나폴리 근처의 성채 저택 카스텔룸 루쿨라눔에서 살게 했다. 로마의 전설적 건국자 로물루스와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합친 듯한 그의 이름은 후대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오도아케르는 그다음에 색다른 일을 했다. 자신도, 다른 누구도 황제로 세우지 않은 것이다. 대신 로마 원로원은 황제의 표장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세상의 두 절반에 황제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전하며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를 다스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제논은 오레스테스에게 쫓겨난 이전 서로마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가 달마티아에 아직 살아 있다고 일깨우며 모호하게 답했다.

그 뒤 여러 세기 동안 476년은 서로마 제국이 끝난 해로 여겨졌다. 6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글을 쓴 연대기 작가 마르켈리누스 코메스는 이미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를 서로마 제국의 종말로 제시했다. 그러나 476년을 살던 많은 사람은 거의 알아채지 못했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 관리와 원로원, 법정은 계속 일했고, 오도아케르는 그들을 통해 다스렸다.

[1][3][4]

쉬움

멸망 이전의 로마 제국

2세기 전성기의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 북부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라인강과 도나우강에서 사하라 사막까지 뻗어 있었다. 인구는 5,000만~7,000만 명쯤이었을 것이며, 도로와 바닷길, 하나의 군대, 로마법,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이들을 이었다.

3세기에 제국은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많은 황제가 살해당했고,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이 로마군을 무찔렀으며, 침입자들이 국경을 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는 권력을 여러 통치자에게 나누고 군대와 관료제를 크게 늘려 제국을 재편했다. 뒤이은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동쪽에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웠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제국은 두 아들에게 영구히 나뉘었다. 동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아르카디우스가, 서쪽은 호노리우스가 다스렸다. 여전히 황제가 둘인 하나의 제국으로 여겨졌지만, 두 절반은 점점 각자의 길을 갔다. 동쪽은 더 부유하고 도시가 많았으며 지리적으로도 더 잘 보호받았다. 서쪽은 국경이 더 길고 세금 기반이 약했다.

400년 무렵 서로마의 수도는 더 이상 로마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밀라노, 402년부터는 아드리아해 근처 늪지대에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한 라벤나였다. 로마시는 제국의 상징이자 원로원과 로마 주교, 곧 교황의 자리로 남았다.

[1][2]

쉬움

누가 참여했나

로마인. 이 시기 서로마 황제들은 힘이 약하거나 아주 어린 경우가 많았고, 실제 권력은 ‘마기스테르 밀리툼(군사령관)’이라 불린 장군들이 쥐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반달족 혈통이었던 스틸리코(408년 사망), 훈족과 싸운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454년 사망), 여러 황제를 세우고 갈아 치운 리키메르(472년 사망)가 있다. 로마의 지주와 주교, 도시 의회도 각 지역이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큰 역할을 했다.

고트족. 고트족은 도나우강과 흑해 북쪽에 살았다. 흔히 서고트라 부르는 집단은 376년 제국에 들어와 410년 로마를 약탈했고, 나중에 갈리아와 에스파냐에 왕국을 세웠다. 동고트는 테오도리쿠스의 지휘 아래 489~493년 오도아케르에게서 이탈리아를 빼앗았다.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은 406년 무렵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지나 에스파냐로 들어갔다. 429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439년 카르타고를 점령했고, 서로마 제국은 가장 부유한 속주들을 잃었다.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은 갈리아에, 앵글족·색슨족·주트족은 5세기 초 로마군이 떠난 브리타니아에 자리 잡았다.

훈족. 초원의 유목 기마민인 훈족은 370년 무렵 흑해 북쪽에 나타났다. 이들의 이동은 다른 집단들을 로마 국경 쪽으로 밀어냈고, 440년대와 450년대 초 아틸라 아래에서 제국의 양쪽 절반을 모두 약탈했다.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 제국은 빠르게 무너졌다.

[1][5]

중급

사건의 흐름, 376~480년

376~382년: 고트족이 제국에 들어오다. 훈족을 피해 달아난 많은 고트족이 도나우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청했고, 동로마 황제 발렌스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마 관리들에게 학대와 착취를 당한 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켰다. 378년 8월 9일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이들은 로마군을 궤멸하고 발렌스를 죽였다. 382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고트족이 제국 안에서 반쯤 자치하는 집단으로 정착하도록 허락하는 조약을 맺었는데, 이는 새롭고도 위험한 방식이었다.

406~410년: 국경이 무너지고 로마가 약탈당하다. 406년 말 무렵 반달족·알란족·수에비족이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들어왔고,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에서는 찬탈자들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408년 스틸리코가 처형되고, 로마 병사들이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이민족 병사의 가족들을 학살했다. 그 병사들 상당수가 고트족 지도자 알라리크에게 넘어갔다. 협상이 실패한 뒤 알라리크의 고트족은 410년 8월 24일 로마를 약탈했다. 외적이 로마시를 점령한 것은 약 800년 만이었다.

418~454년: 속주 상실과 아에티우스의 시대. 418년 서고트족이 갈리아 남서부 아키타니아에 정착했다. 브리타니아는 사실상 버려졌다. 429~439년 반달족의 아프리카 정복은 아마 가장 뼈아픈 손실로, 곡물과 세수를 끊어 놓았다. 아에티우스는 동맹 집단들의 도움으로 갈리아를 붙들었고, 451년 서고트·프랑크 등과 함께 카탈라우눔 평원에서 아틸라의 군대를 저지했다. 452년 아틸라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가 물러갔다. 454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가 아에티우스를 살해했고, 이듬해 황제 자신도 암살당했다.

455~476년: 서로마 궁정의 끝.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다시 2주 동안 약탈했다. 이후 20년 동안 단명한 황제들이 잇따랐고, 그중 여럿은 리키메르가 세우고 끌어내렸다. 468년 동서 로마가 함께 꾸린 거대한 원정을 비롯해 아프리카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474년 동로마는 율리우스 네포스를 황제로 세웠지만, 475년 그의 장군 오레스테스가 그를 몰아내고 자기 아들 로물루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476년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를 폐위했다. 제논의 인정을 받은 네포스는 480년 살해될 때까지 달마티아에서 서로마 제위를 주장했고, 일부 역사학자는 이때를 서로마 황제 계보의 진짜 끝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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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서로마 제국은 왜 무너졌나

서로마 제국이 왜 무너졌느냐는 역사 전체에서 가장 많이 논쟁된 질문 가운데 하나다. 독일 역사학자 알렉산더 데만트는 여러 세기 동안 나온 설명을 210가지나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현대 역사학자는 원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데 동의하지만, 여러 요인에 두는 무게는 저마다 다르다.

바깥의 압력. 한 학파는 훈족의 등장과 수많은 집단의 제국 유입을 강조한다. 서로마는 이들을 흡수하지도 물리치지도 못했고, 사산 페르시아와의 오랜 대립은 동로마의 자원을 묶어 두었다. 예컨대 피터 헤더는 서로마 제국이 주로 훈족이 일으킨 바깥의 힘 때문에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안의 약점. 다른 이들은 내전과 찬탈, 장군들 사이의 경쟁, 무거운 세금과 남에게 빼앗긴 속주에서 끊긴 세수, 동로마보다 더 노출되고 자원이 부족했던 서로마의 처지, 그리고 자기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동맹 이민족 군대(포이데라티)에 대한 의존을 강조한다.

환경과 질병. 최근 연구는 기후와 전염병도 그림에 더했다. 카일 하퍼 같은 역사학자는 2세기부터 이어진 불리한 기후로의 변화와 잇따른 전염병이 제국을 장기적으로 약하게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논쟁 중이다.

도덕적 타락, 에드워드 기번이 강조한 그리스도교의 확산, 납 중독 같은 옛 설명은 오늘날 대체로 부정되거나 기껏해야 작은 요인으로 여겨진다. 똑같이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동로마 제국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단순한 종교적 설명을 반박하는 근거로 자주 거론된다.

[1][2][8]

중급

476년 이후: 후계 왕국들과 동로마

오도아케르는 493년까지 이탈리아를 다스렸다. 489년 동로마 황제 제논은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에게 이탈리아 침공을 부추겼다. 여러 해의 전쟁과 긴 라벤나 포위 끝에 테오도리쿠스는 493년 도시에 들어갔고, 연회 자리에서 오도아케르를 직접 죽였다. 테오도리쿠스의 동고트 왕국(493~553)은 로마의 행정과 원로원을 상당 부분 유지했으며,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 같은 로마 학자들이 그의 궁정에서 일했다.

옛 서로마 속주 곳곳에 새 왕국들이 세워졌다. 에스파냐에는 서고트, 갈리아에는 프랑크, 론강 유역에는 부르군트, 아프리카에는 반달, 브리타니아에는 여러 집단이 자리 잡았다. 이 왕들은 대개 압도적으로 로마인인 주민을 다스렸고, 통치에 로마법과 라틴어 문서, 교회를 활용했다. 500년 무렵 가톨릭 세례를 받은 프랑크 왕 클로비스는 훗날 프랑스와 독일이 갈라져 나올 왕국을 세웠다.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그냥 ‘로마’라 부르며 이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 때 그 군대는 반달족에게서 북아프리카를(533~534), 554년까지 이어진 참혹한 전쟁 끝에 동고트족에게서 이탈리아를 되찾았다. 그러나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동로마는 서방 대부분을 지키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1453년까지 살아남았다.

800년 교황은 로마에서 프랑크 왕 카롤루스(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서방에 로마 황제의 칭호를 되살렸다. 서로마 제국 자체가 끝난 지 오래였지만 로마라는 이념이 여전히 강력했음을 보여 준다.

[4][1][2]

중급

몰락을 겪은 사람들: 피해자와 생존자

많은 사람에게 5세기는 폭력과 두려움, 상실의 시대였다. 도시가 포위되고 약탈당했으며, 농장이 불탔고, 사람들이 죽거나 노예가 되거나 몸값을 위해 붙잡혔다. 당대 저술가들은 410년 로마 약탈의 참상을 전한다. 베들레헴에 있던 히에로니무스는 온 세상을 정복한 도시가 스스로 정복당했다고 썼다. 이탈리아의 피난민들은 아프리카와 동방으로 달아났다.

피해자는 로마인만이 아니었다. 376년의 고트족 피난민은 로마 관리들에게 굶주림과 착취를 당했고,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일부가 먹을 것을 얻으려고 자기 자식을 노예로 팔아야 했다고 전한다. 408년 이탈리아의 로마군은 이민족 병사들의 아내와 자녀를 학살했다. 노예화와 강제 이주, 공동체 파괴는 모든 집단에 닥쳤다.

동시에 많은 지역은 적응했다. 갈리아 남부와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지주와 주교들이 새 통치자들과 협상해 영지를 지키고 그들의 정부에서 일했다. 주교는 종종 지역의 지도자가 되어 방어를 조직하고, 포로의 몸값을 치르고, 가난한 이들을 먹였다. 마실리아(마르세유)의 사제 살비아누스 같은 저술가는 일부 로마인이 로마 관리들의 불의와 무거운 세금을 견디느니 차라리 이민족의 통치 아래 살기를 원했다고까지 주장했다.

고고학은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브리타니아에서는 400년 이후 몇십 년 안에 로마식 도시와 빌라, 화폐 사용이 사라졌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갈리아 남부 일부에서는 변화가 더 느렸다. 동지중해에서는 5세기와 6세기 초가 많은 곳에서 번영의 시기였다.

[1][6][9]

중급

기억과 의미: 전통마다 다른 이야기

‘로마의 멸망’이라는 이야기는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전해져 왔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게 서로마의 종말은 고대의 영광과 자신들의 고전 부흥 사이에 낀 ‘어두운’ 중세의 시작이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1776~1789)는 이 주제를 영어권에 널리 알렸고, 이를 “야만과 종교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19세기 독일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흔히 게르만 민족을 지친 제국을 새롭게 한 활기찬 계승자로 찬양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이 시기를 침략의 비극으로, 또는 클로비스 왕국 같은 민족 국가의 기원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해석은 5세기보다 근대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현대 학자들은 ‘게르만 민족’이 다양한 집단이었고, 그 정체성도 상당 부분 로마 세계 안에서 형성되었다고 강조한다.

동지중해의 시각에서 보면 476년에 멸망은 없었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어졌고, 그리스어를 쓰는 비잔티움 사람들은 1453년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불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반달족의 정복, 비잔티움의 재정복, 뒤이은 아랍의 정복이 별개의 이야기를 이루며, 여기서는 베르베르(아마지그) 왕국들도 큰 역할을 했다.

로마의 멸망은 18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정치 논쟁에서 경고로도 쓰여 왔다. 논평가들은 현대 국가를 쇠퇴하는 로마에 빗대곤 한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런 비교가 복잡하고 전혀 다른 과거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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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쇠퇴인가, 변화인가, 파국인가

변화. 1970년대 피터 브라운의 『고대 후기의 세계』(1971)는 쇠퇴보다 종교적·문화적 창조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고대 후기(대략 200~700년)’라는 분야를 여는 데 이바지했다. 월터 고퍼트의 『이민족과 로마인』(1980)은 일부 이민족 집단이 폭력적 정복이 아니라 세수나 토지의 몫을 나누는 비교적 질서 있는 방식으로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유럽의 대규모 공동 연구 ‘로마 세계의 변화(The Transformation of the Roman World)’는 이 접근을 더 밀고 나갔다.

쇠퇴론의 귀환. 2005년 영향력 있는 두 책이 이 견해에 도전했다. 브라이언 워드퍼킨스의 『로마의 멸망과 문명의 종말』은 토기의 품질과 유통, 건물의 크기, 심지어 가축의 몸집까지 급격히 줄어든 고고학 증거를 들어, 서방에서 로마 지배가 끝나면서 경제적 복잡성과 생활 수준이 실제로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피터 헤더의 『로마 제국의 멸망: 새로운 역사』는 훈족이 촉발한 바깥의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강조했다.

정체성과 종족. 헤르비히 볼프람과 발터 폴의 ‘빈 학파’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종족 생성(ethnogenesis)’을 연구했다. 고트족이나 프랑크족 같은 집단이 오래전부터 고정된 민족이 아니라 지도자와 전통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진 정치 공동체였다는 생각이다. 가이 홀솔은 『이민족의 이주와 로마 서방, 376~568』(2007)에서 서로마 제국의 위기는 주로 내부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민족 집단은 바깥에서 쳐들어왔다기보다 로마 정치에 끌려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이주 집단의 규모와 로마 주민과의 관계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시대 구분.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476년을 결정적이기보다 상징적인 날짜로 본다. 410년, 455년, 480년, 심지어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을 기준으로 삼는 이들도 있고, 지역마다 로마 지배가 끝난 시기가 브리타니아의 410년 무렵부터 지중해 일부의 6세기 이후까지 크게 달랐다고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1][9][8][10]

심화

증거와 방법: 멸망을 알려 주는 사료

서사 사료. 서방의 5세기 전체를 다룬 당대의 역사서는 하나도 없다. 4세기 말 라틴어로 쓰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역사서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끝난다. 5세기 초에 관해서는 사라진 올림피오도루스의 역사서를 활용한 조시무스 같은 후대 그리스어 저술가들, 아틸라의 궁정을 방문한 프리스쿠스의 단편에 기댄다. 그리스도교 저술가 오로시우스는 410년대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유로 이교도를 반박하는 역사서를 썼다.

6세기의 기록. 476년의 사건은 주로 후대 사료로 알려져 있다. 마르켈리누스 코메스의 연대기, 이른바 『발레시우스 익명 연대기』, 55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쓰인 요르다네스의 『게티카』, 프로코피우스의 『전쟁사』 등이다. 이 저술가들은 서방을 ‘잃어버린 땅’으로 그려 유스티니아누스의 이탈리아 재정복을 정당화하는 등 저마다의 목적이 있었고, 이는 서로마 종말을 서술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그 밖의 문헌. 법전, 특히 『테오도시우스 법전』(438), 갈리아의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 같은 주교·귀족의 편지, 설교, 성인전, 에스파냐 히다티우스의 연대기 같은 기록은 위기에 대한 지역의 시각을 보여 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살비아누스의 『신의 통치에 관하여』는 그리스도인들이 재난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려 준다.

고고학과 과학. 도시와 빌라, 요새, 묘지의 발굴, 화폐와 토기 연구, 그리고 최근에는 고대 DNA, 빙하 코어, 나이테, 꽃가루 분석이 문헌과 독립된 증거를 제공하며 논쟁을 바꾸어 놓았다. 이 증거들은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경제 변화를 측정할 수 있게 하지만, 새로운 해석 문제도 낳는다. 예컨대 매장 풍습이나 유물의 변화가 이주를 반영하는지, 단지 새로운 유행인지를 가려야 한다.

[1][3][9][8]

핵심 개념

쇠퇴와 멸망
기번이 널리 알린 전통적 견해로, 서로마 제국이 점차 약해지다가 무너졌다고 본다.
변화
로마 세계가 종교·법·언어·문화에서 많은 연속성을 지닌 채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는 견해.
고대 후기
대략 200~700년의 시기. 쇠퇴기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창조적인 시대로 연구된다.
포이데라티
조약을 맺고 제국 안이나 가까이에 정착해 병력을 제공한 비로마 동맹 집단. 5세기 서로마에 결정적이었다.
후계 왕국
서방에서 로마 지배를 대신한 서고트·프랑크·반달·동고트 등의 왕국.
동서의 갈림
서로마는 무너지고 동로마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멸망에 관한 설명을 검증하는 기준이 된다.
시대 구분
476년은 관례적 기준일 뿐이며, 지역마다 로마 지배가 끝난 시기가 달랐다.

기록

  1. 376년 — 훈족을 피해 달아난 고트족이 도나우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에 들어온다.
  2. 378년 —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8월 9일): 고트족이 발렌스 황제를 무찌르고 죽인다.
  3. 395년 —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고 제국이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영구히 나뉜다.
  4. 406년 — 반달족·알란족·수에비족이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들어온다(전통적으로 12월 31일).
  5. 410년 —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한다(8월 24일).
  6. 439년 — 반달족이 카르타고를 점령해 서로마의 가장 부유한 속주들을 차지한다.
  7. 451년 —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 아에티우스와 동맹군이 아틸라를 저지한다.
  8. 455년 —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한다.
  9. 476년 — 오도아케르가 왕으로 추대되고(8월 23일)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한다(9월 4일).
  10. 480년 — 동로마가 인정한 마지막 서로마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가 달마티아에서 살해된다.
  11. 493년 — 동고트의 테오도리쿠스가 라벤나를 차지하고 오도아케르를 죽인다.
  12. 554년 — 유스티니아누스의 이탈리아 재정복이 끝난다.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침입한다.

용어 풀이

서로마 제국
395년 분할 이후 보통 밀라노나 라벤나에서 자기 황제가 다스린 로마 제국의 서쪽 절반.
동로마(비잔티움)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스린 제국의 동쪽 절반. 1453년까지 이어졌다.
마기스테르 밀리툼
‘군사령관’. 로마군 최고 지휘직으로, 5세기 서로마에서는 흔히 제위 뒤의 실권자였다.
파트리키우스
제국 후기에 가장 강력한 장군과 관리에게 준 높은 명예 칭호.
포이데라티
조약에 따라 로마에 군사적 봉사를 제공한 동맹 집단.
찬탈자
법적 권리 없이 권력, 특히 황제의 칭호를 차지한 사람.
서고트 / 동고트
고트족의 두 주요 집단. 서고트는 갈리아와 에스파냐에, 동고트는 이탈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반달족
429년 에스파냐에서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왕국을 세운 집단.
종족 생성(ethnogenesis)
한 민족이나 종족 정체성이 흔히 정치 지도자와 전통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과정.
역사 서술사(historiography)
역사가 어떻게 쓰이고 해석되어 왔는지를 연구하는 분야.

묻고 답하기

로마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나요?

아니다. 476년은 상징적인 날짜다. 서로마 제국은 수십 년에 걸쳐 영토와 힘을 잃었고, 많은 곳에서 삶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어졌다.

마지막 로마 황제는 누구인가요?

서방에서는 보통 476년에 폐위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꼽지만, 율리우스 네포스가 480년까지 제위를 주장했다. 동방에서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까지 황제가 있었다.

‘이민족’은 그냥 침략자였나요?

그렇지만은 않다. 상당수는 피난민이거나 동맹군, 로마군의 병사였고, 로마 세계를 파괴하기보다 그 안에서 자리를 얻기를 원한 경우가 많았다.

왜 동쪽 절반은 살아남았나요?

경제가 더 부유하고 도시가 많았으며, 국경이 짧고 방어가 잘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튼튼한 요새 도시였다. 침입자들을 서쪽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멸망의 원인이었나요?

기번은 그렇게 암시했지만, 대부분의 현대 역사학자는 똑같이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동로마가 살아남았다는 점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멸망’이라는 말이 맞나요?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변화와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고, 경제 붕괴를 보여 주는 고고학 증거를 들어 쇠퇴와 멸망이라는 표현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다.

오도아케르의 칭호는 무엇이었나요?

병사들은 그를 왕(rex)으로 추대했다. 동로마 황제 제논은 그를 이탈리아를 다스리는 파트리키우스로 인정했고, 그는 형식상 제논의 권위를 받들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Wikipedia
  2. 서로마 제국의 멸망. 위키백과
  3.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위키백과
  4. 오도아케르. 위키백과
  5.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위키백과
  6. 로마 약탈 (410년). 위키백과
  7.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Wikipedia
  8. Peter Heather,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A New History. Macmillan, 2005
  9. Bryan Ward-Perkins, The Fall of Rome and the End of Civi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0. Peter Brown, The World of Late Antiquity, AD 150–750. Thames and Hudson, 197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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