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

Karolus Magnus imperator (라틴어)

800년 · 옛 성 베드로 대성당 (로마)

한 문장으로

800년 성탄절, 로마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 카롤루스(샤를마뉴)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사람들이 그를 황제라 외쳤어요. 이로써 서유럽에 300여 년 만에 로마 황제라는 칭호가 되살아났어요.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
이미지: Charlemagne. Autorité émettrice de monnaie indéterminé. Atelier monétaire. Émetteu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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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1,200여 년 전, 카롤루스라는 힘센 왕이 프랑크족을 다스렸어요. 프랑크족은 지금의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에 걸쳐 살던 사람들이에요. 그는 무척 유명해서 훗날 사람들이 ‘카롤루스 대제’, 프랑스어로는 ‘샤를마뉴’라고 불렀어요.

800년 성탄절, 카롤루스는 로마의 큰 성 베드로 성당에 기도하러 갔어요. 그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자 서방 교회의 지도자인 교황 레오 3세가 그의 머리에 관을 씌웠어요. 성당 안의 사람들은 하느님이 관을 씌우신 위대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황제 카롤루스에게 ‘생명과 승리를!’ 하고 세 번 외쳤어요.

이게 왜 그렇게 큰일이었을까요? 아주 옛날 로마 제국은 지중해 둘레를 모두 다스렸어요. 서쪽에서는 476년에 마지막 로마 황제가 자리에서 쫓겨났어요. 그 뒤에도 로마 황제는 있었지만, 멀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지금의 이스탄불에 살았지요. 그런데 이제 갑자기 서쪽에도 자기 황제가 다시 생긴 거예요.

교황에게도 사정이 있었어요. 한 해 전, 로마의 적들이 길에서 교황을 덮쳐 눈과 혀를 뽑으려 했어요. 교황은 도망쳐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청했지요. 카롤루스에게 관을 씌워 줌으로써 교황은 든든한 보호자를 얻었어요.

훗날 카롤루스의 전기 작가는 왕이 교황의 계획을 몰랐고, 알았다면 그날 성당에 가지 않았을 거라고 썼어요. 그 말이 사실인지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토론해요. 이 대관식은 그 뒤 천 년 동안 유럽 군주들의 본보기가 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날짜
800년 12월 25일(성탄절)
장소
로마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4세기에 지어졌고 훗날 지금의 대성당으로 대체됨)
주요 인물
프랑크족과 랑고바르드족의 왕 카롤루스(카롤루스 1세), 교황 레오 3세(재위 795~816), 카롤루스의 아들 소(小)카롤루스
일어난 일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관을 씌우고 로마인들이 그를 황제로 환호했으며, 교황이 경배의 예를 올렸다. 교황은 소카롤루스에게 왕으로서 기름을 부었다.
칭호
801년부터 ‘지극히 평온한 아우구스투스, 하느님이 관을 씌운 위대하고 평화로운 황제,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자, 하느님의 자비로 프랑크족과 랑고바르드족의 왕 카롤루스’
비잔티움의 반응
처음에는 찬탈로 보았으나 812년 비잔티움 사절이 카롤루스를 황제(바실레우스)로 인정
주요 사료
『프랑크 왕국 연대기』, 『교황열전(리베르 폰티피칼리스)』의 레오 3세전, 『로르슈 연대기』, 아인하르트의 『카롤루스 대제전』, 테오파네스의 『연대기』
장기적 의의
서방의 로마 황제 칭호를 되살렸고,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교황권과 황제권을 둘러싼 수백 년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쉬움

800년 성탄절에 무슨 일이 있었나

800년 12월 25일, 프랑크 왕 카롤루스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탄 미사에 참석했다. 이 성당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자리 위에 세워진 곳이다. 프랑크 궁정의 공식 연대기에 따르면, 그가 무덤 앞에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설 때 교황 레오 3세가 그의 머리에 관을 씌웠다. 그 자리에 있던 로마 시민들은 ‘하느님이 관을 씌우신 위대하고 평화를 주는 로마인의 황제,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에게 생명과 승리를!’ 하고 외쳤다. 연대기는 이어서 교황이 옛 황제들에게 하던 방식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전한다.

이 일이 일어난 성당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지어진 거대한 바실리카, 곧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다. 16세기에 헐리고 그 자리에 지금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이 의식으로, 후대에 카롤루스 대제(라틴어 카롤루스 마그누스, 프랑스어 샤를마뉴)라 불린 카롤루스는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된 뒤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황제 칭호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이 사건은 그 뒤로 줄곧 유럽사의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어 왔다.

[1][2][8]

쉬움

카롤루스 대제는 누구인가

카롤루스는 748년 무렵,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쥔 카롤링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피핀은 751년에 왕이 되었다. 768년 피핀이 죽자 왕국은 카롤루스와 동생 카를로만에게 나뉘었고, 771년 카를로만이 죽은 뒤로는 카롤루스가 홀로 다스렸다.

그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냈다. 774년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랑고바르드족의 왕 칭호를 얻었다. 30년이 넘는 동안(772~804) 북독일의 작센족과 싸워 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강요했다. 에스파냐와 바이에른, 도나우강 유역의 아바르족에게도 원정했다. 800년 무렵 그의 영토는 피레네산맥에서 엘베강까지, 북해에서 이탈리아 중부까지 뻗어 있었다.

카롤루스는 학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잉글랜드 출신 요크의 알퀸 같은 학자들을 궁정에 모으고, 책의 필사와 학교 개혁, 라틴어 개선을 장려했다. 이 ‘카롤링 르네상스’ 덕분에 자칫 사라졌을 고대 라틴 문헌이 많이 보존되었다. 790년대부터 그가 즐겨 머문 곳은 아헨으로, 그가 지은 궁전 예배당은 지금도 남아 있다.

[2][9][10]

쉬움

위기에 빠진 교황

레오 3세는 795년 12월 교황이 되었다. 그는 로마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고, 전임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친척과 지지자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799년 4월 25일 종교 행렬 도중, 교황청 고위 관리 파스칼리스와 캄풀루스가 이끄는 무장 무리가 길에서 그를 습격했다. 그들은 그의 눈을 멀게 하고 혀를 자르려 했으며, 위증과 간통 등의 죄를 뒤집어씌웠다.

레오는 탈출해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달아났다. 799년 여름 그는 작센 원정 중이던 카롤루스를 파더보른에서 만났다. 이 무렵 쓰인 라틴어 시, 흔히 『파더보른 서사시』라 불리는 작품은 두 사람의 만남을 찬란하게 그리며 카롤루스를 벌써 ‘유럽의 아버지’라 부른다.

카롤루스는 799년 말 프랑크 귀족과 주교들을 호위로 붙여 레오를 로마로 돌려보냈고, 이들은 교황에 대한 고발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년 뒤 카롤루스가 몸소 로마에 와서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이제 교황의 안전과 권위는 프랑크 왕에게 달려 있었다.

[3][1]

중급

배경: 프랑크 왕국과 교황의 동맹

대관식은 반세기에 걸친 협력의 절정이었다. 751년 카롤루스의 아버지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의 승인을 받아 마지막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프랑크 왕이 되었다. 754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알프스를 넘어와 피핀과 어린 카롤루스를 포함한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붓고 ‘로마인의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주어 로마의 보호자로 삼았다. 그 대가로 피핀은 로마를 위협하던 랑고바르드족과 싸우고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교황에게 주었다. 흔히 ‘피핀의 기증’(756)이라 부르는 이 땅이 전통적으로 교황령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랑고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가 다시 로마를 위협하자 카롤루스는 이탈리아에 쳐들어가 774년 랑고바르드의 수도 파비아를 함락하고 스스로 랑고바르드 왕이 되었다. 그는 774년 부활절에 로마를 방문해 아버지가 교황에게 한 약속을 확인했다. 이때부터 프랑크의 힘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지배했고, 교황들은 보호자를 동쪽이 아니라 북쪽에서 찾았다.

같은 무렵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계는 틀어져 있었다. 교황은 오랫동안 비잔티움(동로마) 황제의 신민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의 힘은 약해졌고 양쪽은 신학 논쟁, 특히 성화상 사용을 둘러싼 논쟁(성상 파괴 운동)으로 갈라져 있었다. 프랑크족 역시 이 문제에서 비잔티움과 의견이 달랐다. 카롤루스의 궁정은 787년 비잔티움의 니케아 공의회를 비판하는 긴 논고 『카롤루스의 책(리브리 카롤리니)』을 내놓았다.

[2][3][9]

중급

배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제

당시 사람들에게 로마 제국은 여전히 존재했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그 황제는 자신이 지상의 유일한 그리스도교 황제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나라를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지만, 그 백성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불렀다.

797년 여제 이레네는 자기 아들인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하고 눈을 멀게 한 뒤 홀로 다스리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으로 통치한 첫 여성이었다. 일부 서방 저자들은 여성은 황제직을 가질 수 없으므로 황제 자리가 비어 있다고 주장했다. 사건 당시와 가까운 때에 쓰인 『로르슈 연대기』는 이를 카롤루스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 한 이유로 든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황제 칭호가 끊겼으니, 로마와 이탈리아·갈리아·게르마니아의 옛 황제 거처들을 차지한 카롤루스가 그 칭호를 받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799년 6월 알퀸은 카롤루스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세상의 세 최고 권위를 말했다. 지금 로마에서 굴욕을 당한 교황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 자리의 주인이 제 가족에게 폐위당한 황제권, 그리고 힘과 지혜에서 다른 둘을 능가하는 카롤루스의 왕권이다. 이 편지는 대관식 이전부터 카롤루스의 측근들이 이미 그를 황제에 가까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4][1][10]

중급

800년의 사건, 하나씩 따라가기

카롤루스는 800년 가을 이탈리아로 향했다. 11월 말 레오는 로마에서 약 20km 떨어진 멘타나에서 그를 맞았다. 멘타나는 로마가 전통적으로 황제를 맞이하던 곳이었고, 이튿날 왕은 로마에 공식 입성했다. 12월 1일 프랑크인과 로마인의 회의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려 교황에 대한 고발을 다루었다. 교황 측 기록에 따르면 주교들은 사도좌(교황)를 심판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12월 23일 레오는 복음서에 손을 얹고 고발된 죄에 대해 결백하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같은 날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보낸 사절이 도착해 카롤루스에게 성묘(聖墓)의 열쇠와 깃발을 바쳤다. 존경을 표하는 상징적인 몸짓이었다.

이틀 뒤 성탄 미사와 대관식이 열렸다. 프랑크 측과 교황 측 사료는 일의 순서를 다르게 적는다. 『프랑크 왕국 연대기』는 관을 씌운 다음 환호가 있었고, 이어 교황이 전통적으로 황제에게 바치던 경배의 예(아도라티오)를 올렸다고 쓴다. 『교황열전』의 레오 3세전은 교황이 손수 관을 씌웠다는 점, 환호가 하느님과 성 베드로의 뜻으로 일어났다는 점, 그리고 교황이 이어서 카롤루스의 아들 소카롤루스에게 왕으로서 기름을 부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관식 뒤에는 재판이 이어졌다. 레오를 해치려던 음모자들은 로마법에 따라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교황의 요청으로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카롤루스는 801년 부활절이 지날 때까지 로마에 머문 뒤 북쪽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로마를 보지 못했다.

[1][3][5][6]

중급

그 뒤: 두 명의 황제

새 칭호는 어려운 문제를 낳았다. 로마 황제가 둘일 수 있는가? 801년 카롤루스는 신중하게 다듬은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지극히 평온한 아우구스투스, 하느님이 관을 씌운 위대하고 평화로운 황제,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자, 하느님의 자비로 프랑크족과 랑고바르드족의 왕 카롤루스.’ 그는 자신을 곧바로 ‘로마인의 황제’라 부르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을 피하려 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프랑크 왕으로 남고 싶었을 수도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대관식을 찬탈로 여겼다. 9세기 초에 글을 쓴 비잔티움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는 카롤루스가 이레네에게 청혼까지 해 두 제국을 합치려 했다고 전한다. 이 계획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 802년 이레네가 니케포로스 1세에게 쫓겨나면서 무산되었다. 프랑크와 비잔티움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해안을 두고 충돌했다. 812년 황제 미카엘 1세의 사절들은 아헨에서 카롤루스를 만나 베네치아 반환을 대가로 그를 바실레우스, 곧 황제라 부르며 환호했다. 이 타협은 니케포로스 때 시작된 협상의 이름을 따 흔히 ‘니케포로스의 평화’라 부른다.

다른 세력과의 관계도 카롤루스의 새 위상을 보여 준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는 그와 사절을 주고받았다. 프랑크 사절은 802년 아불아바스라는 코끼리를 데리고 돌아왔고, 이 코끼리는 아헨에서 몇 해를 살았다. 이 교류는 프랑크 사료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알려진 바로는 아랍어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813년 카롤루스는 아헨에서 교황 없이 손수 아들 루도비쿠스 경건왕에게 공동 황제의 관을 씌웠다. 이는 그가 교황의 대관을 황제권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카롤루스는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루도비쿠스는 816년 교황 스테파노 4세에게 다시 대관을 받았는데, 이는 교황의 역할이 그리 쉽게 밀려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1][4][2][10]

중급

장기적 영향: 제국, 교황권, 그리고 유럽

카롤루스의 제국은 하나의 나라로 오래가지 못했다. 손자들이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나누었고, 서방의 황제 칭호는 힘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그 이념은 살아남았다. 962년 독일 왕 오토 1세가 카롤루스의 선례를 의식적으로 따라 로마에서 교황 요한 12세에게 황제 대관을 받았다. 오토의 대관에서 자라난 제국은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되었고 1806년까지 이어졌다.

800년의 의식은 중세 정치를 형성한 질문 하나를 낳았다. 제국은 누가 주는가? 훗날 교황들은 교황권이 제국을 그리스인에게서 프랑크인에게로 옮겼다(제국 이양, translatio imperii)고 주장했다. 이는 교황이 황제권을 주고, 심판하고, 거둘 수도 있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황제들은 자기 권력이 하느님과 선출에서 직접 나온다고 맞섰다. 이 대립은 11~12세기 서임권 투쟁을 비롯한 수많은 중세 갈등의 배경이 되었다.

대관식은 라틴 서방과 그리스 동방의 분리도 깊게 했다. 언어와 교회와 정치 전통이 다른, 로마 황제 칭호를 두고 다투는 두 주장자가 나란히 존재하게 된 것이다. 많은 역사학자는 대관식을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로 이어진 긴 과정의 한 단계로 본다.

후대 군주들은 거듭 카롤루스로 돌아갔다.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1165년 자기가 세운 대립 교황 파스칼 3세를 통해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게 했다. 1804년 교황 비오 7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은 의도적으로 카롤루스를 내세웠다. 20세기에 카롤루스는 유럽 통합의 상징이 되었고, 아헨시는 1950년부터 유럽 통합에 이바지한 이에게 ‘카롤루스 대제상(샤를마뉴상)’을 수여하고 있다.

[1][2]

중급

서로 다른 시각과 기억

프랑크 저자들은 대관식을 이미 그리스도교 서방 대부분을 다스리던 왕에게 걸맞은 보상으로 그렸다. 교황 측 저자들은 성 베드로를 대신한 교황의 행위로 그렸다. 비잔티움 저자들은 정통성 없는 야만족 왕이 자기네 황제의 칭호를 가로챈 일로 보았다. 각 시각이 사건의 기록 방식을 좌우했으므로,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들을 나란히 놓고 읽어야 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은 모두 카롤루스를 민족의 시조로 내세웠다. 프랑스인에게는 ‘샤를마뉴’, 독일인에게는 ‘카를 대제’였다. 그의 대관식은 저자에 따라 프랑스 왕정의 탄생으로도, 독일 제국의 탄생으로도 읽혔다. 제2차 세계 대전 뒤에는 같은 인물이 민족 간 대립을 넘어선 ‘유럽의 아버지’로 새롭게 그려졌다.

모두가 카롤루스의 통치를 황금시대로 겪은 것은 아니다. 작센족은 수십 년 전쟁 끝에 정복당하고 개종을 강요당했다. 프랑크 연대기는 782년 페르덴에서 작센인 약 4,500명이 하루에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 수치가 과장되었거나 잘못 읽혔을 수 있다고 보지만, 실제로 있었던 잔혹함을 반영한다. 작센에 부과된 법은 세례를 거부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현대의 서술은 대관식이 기린 제국을 평가할 때 점점 더 이런 시각을 함께 담는다.

[2][9][10]

심화

사료와 그 의도

『프랑크 왕국 연대기』는 741년부터 829년까지의 사건을 해마다 적은 기록으로, 카롤링 궁정이나 그 가까이에서 편찬되었다. 환호의 문구와 교황의 경배를 포함해 대관식에 대한 가장 자세한 프랑크 측 서술을 담고 있다. 814년 이후 만들어져 한때 아인하르트의 작품으로 여겨진 개정판은 라틴어를 다듬고 세부를 덧붙였다. 로저먼드 매키터릭 같은 역사학자들은 이 연대기가 중립적인 기록이 아니라 카롤링 왕조의 성공을 치밀하게 구성한 서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로마에서 편찬된 교황들의 집단 전기인 『교황열전』에는 사건 직후에 쓰인 레오 3세전이 들어 있다. 이 글은 799년의 습격을 극적으로 서술하고 레오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하며, 대관식에서 교황의 주도권과 소카롤루스의 도유를 강조한다. 시기상 가까운 프랑크 문헌인 『로르슈 연대기』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여성이 다스리고 있어 황제 칭호가 비어 있었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카롤루스를 직접 알았던 궁정 신하 아인하르트는 아마 820년대에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을 본떠 『카롤루스 대제전』을 썼다. 그는 카롤루스가 처음에는 황제 칭호를 몹시 싫어해서, 교황의 계획을 알았더라면 큰 축일이었는데도 그날 성당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또 카롤루스가 비잔티움 황제들의 분노를 큰 인내로 견뎠다고 덧붙인다. 810년대에 그리스어로 글을 쓴 비잔티움 연대기 작가 증거자 테오파네스는 교황이 카롤루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을 부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서방 사료에는 없는 세부다. 그는 이레네에 대한 청혼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 사료도 중립적인 목격 보고가 아니다. 프랑크 연대기, 교황 전기, 아인하르트, 테오파네스는 저마다 후원자나 관점을 위해 쓰였고, 관을 씌움·환호·도유라는 기본 순서조차 서로 다르다.

[5][6][7][9]

심화

논쟁: 누가 계획했고, 무엇을 뜻했나

카롤루스는 알고 있었을까? 카롤루스가 놀랐다는 아인하르트의 말은 여러 방식으로 읽혀 왔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를 진짜 불만의 증거로 본다. 칭호 자체가 아니라, 교황이 황제를 만든다는 뜻을 품을 수 있는 교황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불만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로마의 본보기에서 빌려 온, 마지못해 영예를 받는 군주라는 관습적인 겸양의 문학적 장치로 본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는 대관식이 미리 준비되었다고 생각한다. 프랑크와 로마 지도자들의 소집, 성탄절이라는 시점, 앞서 쓰인 알퀸의 편지가 모두 계획을 시사한다. 로저 콜린스는 799년 파더보른 회동 때 이미 합의되었다고 보았고, 요하네스 프리트는 카롤루스가 늦어도 798년에는 황제 칭호를 겨냥했다고 보았다.

누구의 제국인가? 역사학자들은 이 칭호가 참여자들에게 각각 무엇을 뜻했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교황에게는 황제를 로마시와 그 주교에게 묶어 두는 로마의 칭호였을 수 있다. 프랑크 궁정에게는 옛 로마의 부활이라기보다, 알퀸의 표현대로 그리스도교 백성에 대한 통치, 곧 ‘그리스도교 제국(imperium christianum)’을 나타냈을 수 있다.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자’라는 카롤루스의 신중한 칭호, 813년 루도비쿠스에게 손수 관을 씌운 결정은 그가 교황과 로마의 요소를 멀리 두고 싶어 했다는 신호로 읽혀 왔다.

더 넓은 틀. 벨기에 역사학자 앙리 피렌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1937년 출간)에서 아랍의 정복이 지중해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서방의 중심을 북쪽으로 밀어냈으며, 그래서 카롤루스의 제국은 새로운 북방의 내륙 질서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명제는 특히 고고학과 경제사의 근거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대관식을 세계사적 맥락에 놓았고, 후대 역사학자들은 카롤링 왕조와 비잔티움, 아바스 칼리프국 사이의 연결을 계속 탐구해 왔다.

로저먼드 매키터릭(2008)과 재닛 L. 넬슨(2019)의 전기 같은 최근 연구는 대관식을 단 하나의 결정적 순간으로 다루기보다 카롤루스의 생애와 치세 전체 안에 놓고, 그것이 799년의 위기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황에 얼마나 크게 좌우되었는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1][7][9][10]

핵심 개념

서방 제국의 부활
476년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의 군주가 황제 칭호를 가졌다.
프랑크-교황 동맹
교황은 보호를 프랑크 왕에게 기댔고, 프랑크 왕은 교황에게서 종교적 정통성을 얻었다.
두 황제 문제
콘스탄티노폴리스도 로마 황제 칭호를 주장해, 812년 타협 때까지 대립이 이어졌다.
황제는 누가 만드는가
의식에서 교황이 맡은 역할은 황제권의 원천을 두고 교황과 황제가 벌인 수백 년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제국 이양(translatio imperii)
로마 제국이 그리스인에게서 프랑크인에게, 뒤에는 독일인에게 옮겨졌다는 중세의 관념.
그리스도교 제국
카롤루스의 측근들은 제국을 단순히 되살아난 고대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백성의 정치 형태로 보았다.
엇갈리는 기억
프랑스, 독일, 교황청, 비잔티움, 현대 유럽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전해 왔다.

기록

  1. 476년 —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됨.
  2. 751년 — 카롤루스의 아버지 피핀이 교황의 승인 아래 프랑크 왕이 됨.
  3. 754년 —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피핀과 카롤루스를 포함한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음.
  4. 768년 — 카롤루스와 동생 카를로만이 피핀을 계승. 771년부터 카롤루스 단독 통치.
  5. 774년 —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랑고바르드 왕이 됨.
  6. 797년 — 여제 이레네가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하고 비잔티움을 단독 통치.
  7. 799년 — 교황 레오 3세가 로마에서 습격당하고(4월 25일) 파더보른의 카롤루스에게 피신.
  8. 800년 — 레오가 결백 선서(12월 23일)를 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씌움(12월 25일).
  9. 812년 — 비잔티움 사절이 아헨에서 카롤루스를 황제로 환호.
  10. 813년 — 카롤루스가 아헨에서 아들 루도비쿠스 경건왕에게 공동 황제의 관을 씌움.
  11. 814년 — 카롤루스가 아헨에서 사망(1월 28일).
  12. 962년 — 오토 1세가 로마에서 황제 대관. 신성 로마 제국의 계보가 시작됨.

용어 풀이

프랑크족
갈리아를 근거지로 한 왕국을 세워 서유럽의 지배 세력이 된 게르만계 민족.
카롤링 왕조
카롤루스(Carolus)의 이름을 딴 그의 가문. 751년부터 프랑크족을 다스렸다.
교황
로마의 주교이자 라틴(서방) 교회의 수장.
비잔티움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스린 동로마 제국의 현대식 이름. 그 백성은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불렀다.
환호(아클라마티오)
회중이 격식을 갖추어 외치는 승인의 함성. 로마·비잔티움의 황제 추대 의식의 일부였다.
도유(기름 부음)
사람에게 거룩한 기름을 발라 왕이나 사제로 축성하는 의식.
아도라티오
로마 황제에게 바치던, 절이나 엎드림 같은 경배의 예.
교황령
교황이 다스린 이탈리아 중부의 땅. 전통적으로 756년 피핀의 기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신성 로마 제국
962년 오토 1세 때 되살아나 1806년까지 이어진 서방 제국. ‘신성 로마’라는 이름은 더 뒤에 쓰이기 시작했다.
카롤링 르네상스
카롤루스와 후계자들 아래에서 일어난 학문·필사·교육의 부흥.

묻고 답하기

카롤루스는 스스로 관을 썼나요?

아니요. 교황 레오 3세가 그의 머리에 관을 씌웠어요. 나중에 813년에는 카롤루스가 교황 없이 아들 루도비쿠스에게 손수 관을 씌웠지요.

교황은 왜 카롤루스에게 관을 씌웠나요?

교황은 로마의 적들에게 습격을 당한 뒤 든든한 보호자가 필요했고, 카롤루스는 이미 그리스도교 서방의 대부분을 다스리고 있었어요. 관을 씌워 그를 높이면서 로마와 단단히 묶어 둔 거예요.

카롤루스는 정말 몰랐을까요?

전기 작가 아인하르트는 그렇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의식이 미리 계획되었다고 보고, 아인하르트의 이야기를 왕의 겸손이나 교황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불만을 보여 주는 장치로 봅니다.

대관식이 열린 성당은 지금도 있나요?

아니요.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16세기에 헐리고 같은 자리에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어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비잔티움 군주가 자신만이 유일한 로마 황제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관식을 찬탈로 보았습니다. 812년 비잔티움 사절이 카롤루스를 황제로 인정했지만, 자기네 황제와 나란히 있는 서방의 황제로서였습니다.

이것이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인가요?

본보기이자 출발점이었지만, 역사학자들은 보통 신성 로마 제국을 962년 오토 1세의 대관부터 셉니다. 그 이름은 그보다도 더 뒤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대관식에 관한 기록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주요 사료마다 의도가 있습니다. 프랑크 연대기는 왕을 찬양하고, 교황 전기는 교황의 역할을 강조하며, 비잔티움 연대기는 적대적입니다. 일의 순서조차 서로 다르게 적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Coronation of Charlemagne. Wikipedia
  2. Charlemagne. Wikipedia
  3. Pope Leo III. Wikipedia
  4. Irene of Athens. Wikipedia
  5. Royal Frankish Annals. Wikipedia
  6. Liber Pontificalis. Wikipedia
  7. Vita Karoli Magni. Wikipedia
  8. Old St. Peter’s Basilica. Wikipedia
  9. Rosamond McKitterick, Charlemagne: The Formation of a European Ident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0. Janet L. Nelson, King and Emperor: A New Life of Charlemagne. Allen Lane, 2019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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