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오래전 로마 사람들은 자기 도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유명한 이야기를 전했어요. 한 공주가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는데, 아버지는 전쟁의 신 마르스라고 했지요. 쌍둥이가 언젠가 왕좌를 빼앗을까 두려웠던 못된 왕은 아기들을 테베레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했어요.
하지만 아기들이 든 바구니는 강가로 떠밀려 왔어요. 어미 늑대가 아기들을 발견하고는 자기 새끼처럼 젖을 먹였어요. 그 뒤 친절한 양치기 부부가 쌍둥이를 집으로 데려가 키웠지요. 어른이 된 쌍둥이는 못된 왕을 물리치고, 자기들만의 새 도시를 세우기로 했어요.
그런데 형제는 도시를 어디에 세울지 의견이 맞지 않았어요. 둘은 서로 다른 언덕에 올라가 하늘을 나는 새를 지켜보았어요. 로마 사람들은 새가 신의 뜻을 알려 준다고 믿었거든요. 누가 이겼는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레무스가 죽고 말았어요. 로물루스는 첫 번째 왕이 되었고, 도시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마’가 되었대요.
정말 로마는 그렇게 시작되었을까요? 땅을 조심스럽게 파서 옛날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조금 다른 사실을 찾아냈어요. 약 3,000년 전 로마의 언덕 위에는 둥근 오두막이 모인 작은 마을들이 있었어요. 수백 년 동안 이 마을들이 힘을 합치고, 질척한 골짜기의 물을 빼고, 광장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하나의 도시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쌍둥이 이야기는 뉴스가 아니라 전설이에요. 하지만 로마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했어요. 자기들이 용감하고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걸, 그리고 때로는 거칠고 폭력적이기도 했다는 걸 알려 주는 이야기였거든요. 지금도 로마에서는 해마다 4월 21일에 도시의 생일을 축하하고, 늑대가 쌍둥이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은 로마의 상징이에요.
한눈에 보기
- 전통 연대
- 기원전 753년 4월 21일(기원전 1세기 로마 학자 바로가 계산한 날짜. 다른 고대 저자들은 기원전 814년부터 728년까지 여러 연대를 제시했다)
- 장소
- 이탈리아 중부 라티움, 테베레강 옆 팔라티노 언덕과 주변 언덕들
- 전설 속 건국자
- 레무스의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 군신 마르스와 레아 실비아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 관련 집단
- 라틴인. 가까이에 사비니인, 북쪽에 에트루리아인, 남쪽에 그리스 식민 도시가 있었다
- 고고학이 보여 주는 것
- 기원전 10~9세기경의 마을들이 점차 합쳐졌고, 기원전 8~7세기에 공공 공간과 성벽이 나타난다
- 주요 문헌
- 리비우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플루타르코스. 모두 전통 연대보다 600년 이상 뒤에 썼다
- 상징
- 쌍둥이에게 젖을 먹이는 암늑대(카피톨리노의 늑대)
- 유산
- ‘도시 건설 이후’(AUC) 연대 표기, 오늘날에도 4월 21일에 기념하는 ‘로마의 생일(Natale di Roma)’
쉬움
로마 건국이란 무엇인가
‘로마 건국’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인이 스스로에 관해 전한 이야기입니다. 로물루스라는 한 사람이 어느 하루에 팔라티노 언덕 둘레에 쟁기로 신성한 경계를 긋고 로마의 첫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다른 하나는 역사가와 고고학자가 실제로 복원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테베레강 옆 언덕 위의 작은 공동체 여럿이 자라고 합쳐지면서 하나의 도시로 조직된 긴 과정입니다.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라는 전통 연대는 수백 년 뒤 로마의 고전학자들이 계산해 낸 것입니다. 이 날짜는 ‘도시가 세워진 때부터(ab urbe condita, AUC)’ 해를 세는 로마식 연대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기원전 753년을 실제 사건의 날짜로 보지 않지만, 고고학이 팔라티노 언덕의 중요한 변화를 대략 같은 시기로 본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이 글은 두 측면을 함께 살펴봅니다. 천 년 넘게 로마인의 정체성을 빚어 온 전설, 그리고 고대 이탈리아에서 도시가 실제로 어떻게 생겨났는지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쉬움
전설: 트로이아에서 팔라티노 언덕까지
로마의 이야기는 멀리 트로이아에서 시작합니다. 그리스군이 트로이아를 무너뜨린 뒤, 트로이아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탈출해 오랜 방랑 끝에 이탈리아에 닿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훗날 로마가 될 곳의 남동쪽 알바 산지에 알바 롱가라는 도시를 세웠고, 여러 대에 걸쳐 왕들이 그곳을 다스렸습니다.
그 왕들 가운데 누미토르는 아우 아물리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겼습니다.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에게 후손이 생기지 않도록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를 결혼할 수 없는 여사제, 곧 베스타 여사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레아 실비아는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마르스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물리우스는 아기들을 테베레강에 빠뜨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인들은 불어난 강가에 쌍둥이를 두고 떠났습니다. 물이 빠지자 암늑대가 아기들을 발견해 팔라티노 언덕 기슭의 동굴에서 젖을 먹였습니다. 이 동굴이 훗날 ‘루페르칼’이라 불린 곳입니다. 마르스의 신성한 새인 딱따구리도 먹이를 날라다 주었다고 합니다.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아이들을 발견해 아내 아카 라렌티아와 함께 길렀습니다.
자란 쌍둥이는 자신들의 출생을 알게 되자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알바 롱가의 왕위를 할아버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목숨을 건진 곳에 새 도시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을 골랐습니다. 신들의 뜻을 묻기 위해 두 사람은 하늘의 새를 지켜보았습니다. 레무스가 먼저 독수리 여섯 마리를 보았고, 뒤이어 로물루스가 열두 마리를 보았습니다. 양쪽 모두 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판본에서는 레무스가 로물루스가 쌓던 새 성벽을 조롱하듯 뛰어넘었다가 로물루스, 혹은 그의 부하 손에 죽습니다. 로물루스는 도시에 자기 이름을 붙였습니다.
쉬움
그 뒤 로물루스가 했다는 일
전설에 따르면 새 도시에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도망자든 추방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로마인이 될 수 있는 피난처를 열었습니다. 여자가 모자라자 그는 이웃 사비니인을 축제에 초대하고, 로마 남자들이 그들의 딸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로마인은 이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를 건국 일화로 전했지만, 이는 납치와 강제 결혼의 이야기이며, 오늘날의 독자는 여성들을 폭력의 피해자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설은 사비니인이 딸들을 되찾으려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이어집니다. 전투가 한창일 때 여인들이 직접 두 군대 사이로 뛰어들어 아버지와 남편에게 싸움을 멈추라고 애원했습니다. 평화가 맺어졌고, 사비니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로물루스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훗날 로마인은 이 이야기로 자기 도시가 여러 민족이 섞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로물루스는 원로 100명으로 첫 원로원을 만들고, 백성을 여러 집단으로 나누고, 첫 군대를 조직했다고 합니다. 오랜 통치 끝에 그는 갑작스러운 폭풍 속에서 사라졌고, 로마인은 그가 신들에게 들려 올라갔다고 믿어 퀴리누스라는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뒤 여섯 왕이 이어졌는데 마지막 세 왕은 에트루리아인과 관련이 있으며, 전통적으로 기원전 509년에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중급
고고학이 보여 주는 것: 자라난 도시
로마 자리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약 25km 떨어진 이곳에는 강 가운데 섬이 있어 테베레강을 건너기 쉬웠고, 팔라티노·카피톨리노·에스퀼리노·퀴리날레 같은 가파른 언덕들은 방어에 유리했습니다. 이 도하 지점은 북쪽의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남쪽의 라티움·캄파니아를 이었고, 강 하구의 소금밭에서 내륙으로 가는 길도 이곳을 지났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최초의 정착지를 기원전 1천년기 초의 철기 시대 ‘라티움 문화’에 둡니다. 훗날 포룸(광장)이 들어설 자리의 무덤은 기원전 10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팔라티노 언덕의 오두막 흔적은 기원전 9~8세기의 것입니다. 바위에 파인 기둥 구멍들은 나무 뼈대에 초가지붕을 얹은 타원형 오두막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후대 로마인이 팔라티노 언덕에서 성물로 소중히 보존한 ‘로물루스의 오두막’과 아주 닮은 모습입니다.
기원전 8~7세기에 이 공동체들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언덕 사이의 습한 골짜기에서 물을 빼고 흙을 메웠으며,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포룸이 포장되어 공공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고고학자 안드레아 카란디니가 이끈 팔라티노 언덕 아래쪽 발굴에서는 그가 기원전 730~720년경으로 추정한 성벽 유구가 드러났고, 그는 이를 초기 도시의 신성한 경계(포메리움)로 해석했습니다. 다른 많은 학자는 성벽이 이르다는 점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단 한 번의 건국 행위를 증명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가는 로마의 기원을 ‘시노이키스모스(synoecism)’, 곧 따로 떨어진 마을들이 서서히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합쳐진 과정으로 봅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면 로마는 신전과 공공건물을 갖춘 상당한 도시였고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도 강했습니다. 마지막 왕들이 에트루리아인이었다는 전승과도 잘 맞습니다.
중급
기원전 8세기의 이탈리아와 지중해
로마는 홀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중부는 여러 공동체가 경쟁하는 활기찬 세계였습니다. 북쪽에서는 에트루리아인이 금속이 풍부한 강력한 도시들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라티움에서는 수십 개의 라틴 공동체가 언어와 축제와 성소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산지에는 사비니인과 그 밖의 이탈리아계 민족이 살았습니다.
같은 시기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이 서쪽으로 항해해 왔습니다. 이스키아섬의 그리스 정착지 피테쿠사이는 기원전 8세기 전반에 세워졌고, 뒤이어 본토에 쿠마이가 세워졌습니다. 페니키아인은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를 세웠습니다(전통 연대 기원전 814년). 이들 상인과의 접촉은 새로운 물건과 생각, 그리고 마침내 알파벳을 가져왔습니다. 알파벳은 그리스를 거쳐 에트루리아인과 라틴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면 로마 전설이 왜 트로이아와 이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자리 잡을 무렵 그리스 신화는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져 있었고, 자기 도시를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과 잇는 것은 넓은 지중해 세계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로마인은 결국 두 건국 이야기, 곧 트로이아에서 온 아이네이아스와 알바 롱가 출신 로물루스를 하나로 합쳤고, 트로이아 함락과 기원전 753년 사이의 수백 년 공백은 알바 롱가 왕들의 계보를 만들어 메웠습니다.
중급
왜 기원전 753년인가: 로마인이 기원을 계산한 방법
고대 저자들은 로마가 언제 세워졌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리스 역사가 티마이오스는 건국을 기원전 814년으로 보았는데, 이는 그가 카르타고 건국 연대로 제시한 해와 같습니다. 로마 시인 엔니우스는 훨씬 이른 연대를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사를 처음 쓴 로마인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기원전 3세기 말, 그리스어로 저술)는 기원전 748/747년에 해당하는 연대를, 동시대의 루키우스 킨키우스 알리멘투스는 기원전 729/728년을 제시했습니다.
표준이 된 기원전 753년은 기원전 1세기의 대학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연결됩니다. 일곱 왕의 전통적인 재위 기간을 더하고 이를 초기 공화정의 연대와 이어서 얻은 날짜입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바로의 친구 루키우스 타루티우스는 날짜를 정하려고 로물루스의 별점까지 계산했다고 합니다.
4월 21일은 목동의 신 팔레스를 기리는 오래된 목축 축제 ‘파릴리아’가 열리던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닥불을 뛰어넘으며 자신과 가축을 정화했습니다. 로마의 생일을 목동의 축제와 연결한 것은 양치기 손에 자란 쌍둥이 이야기와 잘 어울렸습니다. 훗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베누스와 로마 여신에게 큰 신전을 바쳤고, 4월 21일은 계속 도시의 생일로 기념되었습니다.
중급
로마인에게 이 이야기가 뜻한 것
로마인에게 건국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이 지금도 찾아갈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들, 곧 루페르칼 동굴, 쌍둥이의 바구니가 멈춰 섰다는 무화과나무,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 오두막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또한 젊은이들이 팔라티노 언덕 둘레를 달리는 2월의 축제 ‘루페르칼리아’ 같은 의례로 되풀이되었습니다.
이야기에는 도덕적·정치적 메시지도 담겨 있었습니다. 로물루스는 용기, 신들에 대한 경건함, 무에서 나라를 세우는 힘을 상징했습니다. 그의 피난처는 로마가 새로 온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던 까닭을, 사비니 이야기는 적이 동료 시민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설명했습니다. 로마인은 이런 개방성을 성공의 비결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습니다. 로마는 형제 살해로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기원전 1세기 내전 시기 로마 작가들은 이 문제로 거듭 돌아갔습니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로마인이 아직도 레무스의 피값을 치르고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을 잡은 뒤 ‘아우구스투스’를 택하기 전 ‘로물루스’를 칭호로 삼는 것을 검토했다고 합니다. 건국자는 본보기이자 경고였던 셈입니다.
중급
늑대와 쌍둥이, 역사 속의 기억
쌍둥이에게 젖을 먹이는 암늑대의 모습은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96년 정무관 그나이우스 오굴니우스와 퀸투스 오굴니우스 형제가 전설의 무화과나무 ‘피쿠스 루미날리스’ 근처에 늑대와 쌍둥이 상을 세웠습니다. 이 도상은 로마 주화에 새겨졌고 제국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가장 유명한 청동상 ‘카피톨리노의 늑대’는 오랫동안 기원전 5세기의 에트루리아 또는 초기 로마 작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쌍둥이 조각은 르네상스 시대, 아마도 15세기 말에 덧붙인 것입니다. 2000년대의 과학 조사는 늑대상 자체가 중세에 주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연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근현대에 들어 건국 이야기는 여러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1920~1930년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4월 21일 ‘로마의 생일’을 공휴일로 기념하며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계승자로 내세웠습니다. 전쟁 뒤에도 로마에서는 이날 축제와 역사 재현 행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카피톨리노의 늑대 복제품을 세계 여러 도시에 선물했고, 이 늑대는 축구단 AS 로마의 엠블럼에도 들어 있습니다.
이탈리아 밖에서 보면 이 전설은 세계 곳곳의 건국 신화와 한 계열에 속합니다. 버려진 아기가 동물이나 목동에게 구조되는 이야기는 아카드의 사르곤, 페르시아의 키루스 등에 관한 전승에도 나타납니다. 이런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사람들이 어디서나 기원 이야기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화
사료와 그 한계
주요 기록은 모두 늦습니다. 리비우스는 로마사 『도시가 세워진 때부터(Ab urbe condita)』의 제1권을 기원전 20년대 무렵에 썼고, 로마에 살던 그리스인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곧이어 『로마 고대사』를 펴냈으며, 플루타르코스는 서기 100년 무렵 『로물루스 전』을 썼습니다. 이들은 모두 파비우스 픽토르, 킨키우스 알리멘투스, 대(大)카토 같은 앞 시대 역사가에 의존했는데, 그 저작들은 단편으로만 남아 있고 누구도 기원전 200년 무렵보다 앞서 쓰지 않았습니다. 전통 연대보다 5백 년 이상 뒤입니다.
초기 로마 역사가들 자신도 문서가 매우 부족했습니다. 초기 기록은 기원전 390년경(현대 계산으로는 387년) 갈리아인이 로마를 약탈했을 때 대부분 사라졌다고 전합니다. 남은 것은 사제단의 명부, 귀족 가문의 전승, 지명, 제의, 구전 이야기였습니다. 몇몇 그리스 작가는 그보다 앞서 로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로메’라는 트로이아 여인 같은 건국자를 거론했는데, 로물루스 이야기는 이런 그리스 전승과 주고받으며 모양을 갖추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리비우스 자신도 이 문제를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도시가 세워지기 전후의 전승은 믿을 만한 역사보다는 시에 더 어울린다고, 그리고 옛사람들이 도시의 시작을 더 거룩하게 만들려고 인간사와 신의 일을 섞는 것은 너그럽게 봐줄 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전설을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 로마인이 무엇을 믿고 소중히 여겼는지 보여 주는 증거로 읽습니다.
심화
논쟁: 신화, 기억, 고고학
전설 속에는 역사가 얼마나 숨어 있을까요? 한쪽 끝에는 안드레아 카란디니를 대표로 하는 소수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팔라티노 언덕의 발견, 특히 기원전 730~720년경의 성벽이 기원전 8세기의 실제 건국 행위를 확인해 주며, 후대의 기억이 이를 ‘로물루스’라는 인물로 형상화했다고 봅니다. 다른 쪽 끝에는 회의적인 역사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로마(Roma)에서 만들어 낸 ‘로마 사람’이라는 뜻의 명조(名祖)로 보이며, 이야기가 민담 모티프로 가득하고, 고고학은 한순간이 아니라 점진적 성장을 보여 준다고 강조합니다.
많은 역사가는 그 사이에 섭니다. 예를 들어 팀 코넬은 왕정기에 관한 전통 서사가 개별 이야기는 역사적이지 않더라도 제도와 큰 흐름에 관한 진짜 기억, 이를테면 기원전 6세기 에트루리아계 왕들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고 봅니다. 티모시 피터 와이즈먼은 『레무스: 로마 신화(Remus: A Roman Myth)』에서 레무스라는 인물이 비교적 늦게 이야기에 들어와 시간이 흐르며 다시 빚어졌을 가능성을 분석했습니다.
‘로마’라는 이름의 뜻 자체도 불확실합니다. 테베레강의 옛 이름(루몬)과의 관련, 에트루리아 가문 이름과의 관련, 무화과나무 ‘피쿠스 루미날리스’와 이어지는 ‘젖꼭지(ruma)’라는 낱말과의 관련 등이 제안되었지만 어느 것도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발견은 논쟁을 거듭 되살립니다. 2007년 고고학자들은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서 장식된 지하 공간을 찾았다며 그것이 루페르칼일 수 있다고 발표했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후대의 님파이움(장식 분수실)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반박했습니다. 이 일은 전설이 지금도 로마의 발굴 성과를 해석하는 방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줍니다.
심화
증거와 연구 방법
초기 로마의 고고학은 어렵습니다. 고대 도시가 현대 도시 아래에 묻혀 있고, 후대 로마의 건축이 이전 지층을 깎아 내거나 덮었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내용의 상당 부분은 19세기 말 이후 포룸과 팔라티노 언덕의 발굴, 에스퀼리노 언덕 같은 묘지 유적, 보존 상태가 더 좋은 인근 라틴 유적과의 비교에서 나옵니다. 연대는 토기 편년과 가능한 경우 과학적 방법에 기댑니다. 라티움 철기 시대 각 시기의 절대 연대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수정되어 왔고, 이는 초기 취락의 연대 판단에도 영향을 줍니다.
금석문도 조금 도움이 됩니다. 포룸의 ‘라피스 니게르(검은 돌)’ 아래에는 기원전 6세기의 비문이 있는데, 알려진 가장 오래된 라틴어 문헌 가운데 하나로 ‘왕(rex)’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로마가 한때 왕의 통치를 받았다는 전승을 뒷받침하는 증거입니다. 역사 시대까지 이어진 ‘일곱 언덕’의 축제 셉티몬티움이나 루페르칼리아 같은 종교 관습에도 초기 공동체 조직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핵심적인 방법론의 교훈은 두 종류의 증거를 합치기 전에 먼저 따로 다루라는 것입니다. 전설은 기원전 3세기 이후 로마인의 자기 이해를 알려 주고, 물질 자료는 철기 시대의 정착·경제·사회를 알려 줍니다. 팔라티노의 오두막과 기원전 750년 무렵이라는 연대처럼 둘이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 역사가는 그것이 진짜 기억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후대 작가들이 눈에 보이던 옛 유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지어낸 결과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핵심 개념
- 건국 전설
- 영웅적인 건국자를 통해 도시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 로마는 트로이아의 아이네이아스와 로물루스·레무스 이야기를 합쳤다.
- 시노이키스모스(취락 통합)
- 여러 마을이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합쳐지는 일. 대부분의 역사가는 로마가 이렇게 형성되었다고 본다.
- 도시 건설 이후(AUC)
- 바로가 정한 기원전 753년부터 해를 세는 로마식 연대 표기.
- 포메리움
- 로물루스가 쟁기로 그었다는 도시의 신성한 경계. 종교적·법적으로 중요한 선이었다.
- 조점(鳥占)
- 새가 나는 모습으로 신의 뜻을 읽는 일. 쌍둥이는 이것으로 도시 자리를 정하려 했다.
- 건국의 폭력
- 레무스 살해와 사비니 여인 납치는 로마인이 자기 기원을 영광스러우면서도 폭력적인 것으로 이야기했음을 보여 준다.
- 신화와 고고학
- 문헌 전설과 물질 증거는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므로, 비교하기 전에 따로 해석해야 한다.
기록
- 약 기원전 1000년 — 훗날 로마 포룸이 될 자리에 최초의 철기 시대 무덤이 만들어진다.
- 약 기원전 850년 — 팔라티노 언덕과 테베레강 옆 언덕들에 오두막 마을이 발달한다.
- 기원전 814년 — 그리스 역사가 티마이오스가 로마와 카르타고의 건국 연도로 제시한 해.
- 기원전 753년 — 바로의 계산에 따른 로물루스의 전통적 로마 건국일(4월 21일).
- 약 기원전 730년 — 팔라티노 언덕 기슭에 성벽이 세워진다. 일부 학자는 도시의 첫 경계로 해석한다.
- 약 기원전 600년 — 포룸 골짜기의 물을 빼고 포장해 공공 공간으로 만든다. 이 무렵 로마는 하나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 기원전 509년 — 전통적으로 왕정이 끝나고 로마 공화정이 시작된 해.
- 기원전 296년 — 리비우스에 따르면 오굴니우스 형제가 암늑대와 쌍둥이 상을 세운다.
- 약 기원전 200년 —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가 건국 이야기를 담은 최초의 로마사를 쓴다.
- 약 기원전 27년 — 리비우스가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의 가장 유명한 판본이 담긴 로마사 제1권을 쓴다.
- 2007년 —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서 루페르칼로 추정되는 지하 공간 발견이 발표되지만, 해석은 논쟁 중이다.
용어 풀이
- 라티움
- 로마 주변의 이탈리아 중부 지역. 라틴어를 쓰는 사람들의 고향.
- 팔라티노 언덕
- 로마의 언덕 가운데 하나. 전통적으로 로물루스가 첫 도시를 세운 곳이며, 훗날 황제의 궁전이 들어섰다.
- 베스타 여사제
- 화로의 여신 베스타를 섬기는 여사제. 봉사하는 동안 결혼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 루페르칼
- 전설에서 암늑대가 쌍둥이에게 젖을 먹였다는 동굴.
- 파릴리아
- 4월 21일에 열린 옛 목축 축제. 로마의 생일이 되었다.
- 사비니인
- 로마 북동쪽에 살던 이탈리아계 민족. 초기 로마 전설의 중심에 있다.
- 에트루리아인
- 로마 북쪽 이탈리아 중부의 강력한 민족. 초기 로마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명조(名祖, eponym)
- 어떤 이름의 유래가 된 인물. 로물루스는 로마라는 이름에서 거꾸로 만들어진 명조일 수 있다.
- 연대기 작가
- 파비우스 픽토르처럼 해마다의 일을 차례로 기록한 로마 역사가.
- 카피톨리노의 늑대
-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있는 유명한 암늑대 청동상. 제작 연대는 논쟁 중이다.
묻고 답하기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정말 있었나요?
이야기 그대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전설 속 인물로 보며, 로물루스라는 이름은 단지 ‘로마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로마는 정말 기원전 753년에 세워졌나요?
그 연대는 수백 년 뒤에 계산된 것입니다. 로마는 점차 자라났지만, 기원전 8세기 무렵 팔라티노 언덕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늑대가 정말 쌍둥이에게 젖을 먹였나요?
그렇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버려진 아기를 동물이 키웠다는 이야기는 여러 문화에 있으며, 로마에서 늑대는 마르스 신과도 연결되었습니다.
로마는 왜 트로이아와 연결되나요?
그리스 신화를 알던 지중해 세계에서 트로이아 전쟁 영웅과의 연결은 도시에 위신을 주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이 연결을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초기 로마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오두막·무덤·성벽·포룸 같은 고고학 자료, 라피스 니게르 같은 몇몇 비문, 그리고 옛 전승을 이용한 후대 작가들의 기록을 통해서입니다.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란 무엇인가요?
전설에서 로마 남자들이 결혼하려고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한 사건입니다. 로마인은 건국 이야기로 전했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습니다.
카란디니의 성벽을 둘러싼 학계 논쟁은 무엇인가요?
카란디니는 팔라티노의 성벽을 기원전 730~720년경으로 보고 실제 건국과 연결했습니다. 많은 학자가 이른 연대는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단 한 번의 건국을 증명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Founding of Rome. Wikipedia
- Romulus and Remus. Wikipedia
- 로물루스와 레무스. 위키백과
- 리비우스(Livy), Livy, Ab urbe condita (라틴어 원문·영역).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 Quintus Fabius Pictor. Wikipedia
- Parilia. Wikipedia
- Capitoline Wolf. Wikipedia
- Latial culture. Wikipedia
- Lapis Niger. Wikipedia
- T. J. Cornell, The Beginnings of Rome: Italy and Rome from the Bronze Age to the Punic Wars (c. 1000–264 BC). Routledge, 1995
함께 보기
- 베르길리우스『아이네이스』를 쓴 로마 시인으로, 라틴 문학에 큰 영향을 남겼다.
- 호메로스그리스 문학의 출발점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가로 전해지는 시인. 한 사람이 두 작품을 모두 지었는지는 논쟁 중이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한 사건이다.
-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물러난 사건은 흔히 서로마 제국의 종말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쓰인다.
- 판테온하드리아누스 시대에 다시 지어진 로마의 신전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돔과 천장의 원형 개구부로 유명하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