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옛날 중국은 한 나라가 아니었어요. 주(周)라는 왕실이 다스려야 했지만, 기원전 770년에 도읍을 동쪽으로 옮겨야 했던 뒤로 힘이 약해졌어요. 수백 명의 제후가 저마다 작은 나라를 다스렸지요. 아무도 한데 붙잡아 두지 못하는 커다란 퍼즐 조각들 같았어요.
처음에는 가장 힘센 제후가 반장처럼 나섰어요. 이런 사람을 ‘패자(霸者)’라고 불러요. 패자는 회의를 열고, 다른 제후들에게 주나라 왕을 지키겠다고 약속하게 하고, 전쟁에서 그들을 이끌었어요. 북쪽의 큰 나라 진(晉)과 남쪽의 큰 나라 초(楚)가 번갈아 가장 강한 나라가 되며 유명한 전투를 벌였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삼켰어요. 기원전 400년 무렵에는 큰 나라 일곱만 남았지요. 진(秦)·초·제·연·한·조·위예요. 이 일곱 나라가 거의 쉬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이 시기를 ‘전국시대(싸우는 나라들의 시대)’라고 불러요.
전쟁은 점점 커졌어요. 귀족 몇 명이 전차를 타고 싸우던 방식 대신, 왕들은 쇠로 만든 칼과 쇠뇌를 든 농민들을 수없이 불러 모았어요. 왕들은 나라를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 똑똑한 조언자도 고용했고, 공자·묵자·맹자 같은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 이 싸움을 멈출 수 있을지 논쟁했어요.
마지막에는 서쪽 끝의 진(秦)이 가장 강해졌어요.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 진의 왕은 다른 여섯 나라를 차례로 정복했어요. 그는 스스로를 ‘시황제(첫 번째 황제)’라고 불렀고, 그 뒤로 중국 사람들은 나라가 한 사람의 통치 아래 하나로 뭉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춘추시대(약 기원전 770~481년)와 전국시대(약 기원전 475~221년). 두 시대의 경계는 기원전 481년부터 403년까지 여러 설이 있다
- 장소
- 오늘날 중국 북부·중부·동부의 황허 유역과 창장(양쯔강) 유역
- 주요 세력
- 춘추: 진(晉)·초·제·진(秦), 뒤에 오·월. 전국: ‘전국칠웅’ 진(秦)·초·제·연·한·조·위
- 유명한 전투
- 성복(632), 필(597), 언릉(575), 백거(506), 진양(455~453), 계릉(354~353), 마릉(342), 이궐(293), 장평(262~260), 한단(기원전 259~257)
- 결과
- 진(秦)이 기원전 230~221년 한·조·연·위·초·제를 정복하고 진 제국을 세웠다
- 규모
- 전차 수백 승 규모의 군대가 수십만 명에 이른다는 대군으로 커졌다. 고대의 사상자 수는 전승 기록이며 논란이 있다
- 주요 사료
- 『춘추』와 『좌전』, 『국어』, 『전국책』, 사마천의 『사기』(기원전 100년 무렵)
날짜로 따라가는 전쟁
재생을 누르면 지도에서 전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표시는 전투·사건, 화살표는 기록에 남은 진군로입니다.
단계
기원전 771/770년 주 왕실이 동쪽 낙읍으로 옮긴 뒤 왕권이 약해지자, 힘센 제후가 ‘패자’로서 동맹을 이끌었다. 제 환공이 첫 패자였고, 이어 진(晉)과 초가 그 사이의 작은 나라들을 두고 성복(632)·필(597)·언릉(575)에서 맞붙다가 기원전 546년 휴전했다. 이 캠페인의 날짜는 모두 연 단위다.
Spring and Autumn period (English Wikipedia)Battle of Chengpu (English Wikipedia)Battle of Bi (English Wikipedia)Battle of Yanling (English Wikipedia)Partition of Jin (English Wikipedia)
최근 사건
재생 화면은 그날까지 자료로 확인된 사실을 보여 줄 뿐, 매일 새 사건이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월·연도까지만 알려진 날짜는 기간으로 표시하고, 점선 화살표는 확인된 두 지점을 잇기만 한 개략선입니다.
쉬움
어떤 전쟁이었나
‘춘추전국시대의 전쟁’은 전쟁 하나의 이름이 아니다. 기원전 771/770년 주 왕실이 힘을 잃은 때부터 기원전 221년 진(秦)이 마지막 경쟁국을 정복한 때까지, 500년 넘게 이어진 고대 중국 여러 나라 사이의 싸움을 한데 묶어 부르는 말이다.
중국 역사가들은 이 긴 시대를 둘로 나눈다. 춘추시대라는 이름은 노나라에서 기록한 연대기 『춘추』에서 왔는데, 이 책은 기원전 722년부터 481년까지를 다룬다. 전국시대라는 이름은 후대에 엮은 유세가들의 말과 이야기 모음 『전국책』에서 왔다. 두 이름 모두 사건보다 훨씬 뒤인 한나라 때 자리 잡았다.
이 몇 세기 동안 정치 지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처음에는 강대국부터 작은 도시국가까지 백 곳이 훨씬 넘는 나라가 있었다. 기원전 400년 무렵에는 큰 나라 일곱만 남았고, 기원전 221년에는 하나만 남았다. 이 정리 작업을 한 것이 전쟁이었고, 그 과정에서 군대와 정부와 사상이 모두 달라졌다.
이 글은 그 큰 줄기를 따라간다. 패자의 시대, 동남방 오·월의 전쟁, 대국 진(晉)의 분열, 총력전을 준비한 변법, 기원전 3세기의 큰 전투들, 그리고 진(秦)의 마지막 통일 전쟁이다.
쉬움
힘 잃은 왕과 제후국들의 세계
기원전 1046년 무렵 주나라는 상(商)을 무너뜨리고 친족과 공신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주 왕 아래의 제후로서 그 땅을 다스렸다. 이 체제는 두 세기쯤 잘 돌아갔다. 그런데 기원전 771년 견융이 반란을 일으킨 제후들과 함께 오늘날 시안 부근의 서쪽 도읍을 무너뜨리고 유왕을 죽였다. 그의 아들이 동쪽의 낙읍(오늘날 뤄양 부근)에서 왕으로 세워졌고, 이로써 동주가 시작되었다.
주 왕은 ‘천자’라는 칭호와 의례상의 권위를 지켰다. 역법을 관장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몇 세기 동안 아무도 그를 감히 갈아치우지 못했다. 그러나 제후를 호령할 땅과 군대는 더 이상 없었다. 실제 권력은 큰 제후국의 군주들에게 넘어갔다.
큰 나라들은 옛 중심지를 느슨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북쪽 오늘날 산시성에는 진(晉), 오늘날 산둥의 풍요로운 해안에는 제가 있었다. 진(秦)은 옛 주나라 본거지인 서쪽 웨이허 유역을 지켰다. 초는 창장 중류에 걸쳐 있었는데, 북쪽 나라들은 초를 반쯤만 자기들 세계에 속한 나라로 보았고, 초의 군주는 기원전 704년부터 스스로 왕을 칭했다. 뒤에는 창장 하류에서 오와 월이 일어났고, 연은 오늘날 베이징 부근의 먼 북쪽을 차지했다.
강대국들 사이에는 정·송·노·진(陳)·채 같은 작은 나라가 많았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상당 부분 이 작은 나라들을 누가 거느리느냐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쉬움
전쟁은 어떻게 바뀌었나: 전차에서 대군으로
춘추시대 초기의 전투는 귀족의 일이었다. 귀족은 말이 끄는 전차에서 싸우고 보병이 그 둘레를 따랐으며, 원정은 대체로 짧았고 명예에 관한 규범이 있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이 모습이 달라졌다. 나라마다 농민을 호적에 올려 보병으로 징집했다. 무기와 농기구에 철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쇠뇌와 칼이 퍼졌으며, 나라들은 국경을 따라 긴 방어 장성을 쌓았다. 기원전 307년 조 무령왕은 ‘호복기사(胡服騎射)’, 곧 유목민의 옷을 입고 말 위에서 활을 쏘게 하여 중국 최초의 정식 기병을 만들었다.
원정은 이제 몇 달, 때로는 몇 년씩 이어졌다. 수만, 전하는 바로는 수십만에 이르는 군대를 먹이고 보급하려면 각국이 새로 만들던 관료제가 필요했다. 『월드 히스토리 백과사전』은 예전에는 1만 명 안팎이던 보병이 이 시대에는 20만 명을 넘는 일이 흔해졌다고 정리한다.
지휘관도 달라졌다. 태생만으로는 부족했고, 장수는 전략을 알아야 했다. 군사 이론서도 나왔다. 손자의 것으로 전하는 『손자병법』, 『오자』, 『위료자』, 『사마법』이 모두 이 시대에 속한다.
중급
패자들, 그리고 진(晉)과 초의 긴 대결
주 왕실이 동쪽으로 옮긴 뒤 곧 새로운 질서가 생겼다. 가장 강한 군주가 ‘패자(霸)’로 인정받아 제후들의 회맹을 주재하고, 바깥 세력에 맞선 공동 원정을 이끌며, 명목상 주 왕을 보호했다. 첫 패자는 제 환공(재위 기원전 685~643)이었다. 그는 재상 관중과 함께 나라를 개혁하고 ‘존왕양이(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를 내세워 제후들을 모았다. 전통적으로 다섯 패자를 꼽지만 명단은 책마다 다르다.
제가 약해진 뒤의 핵심 문제는 황허와 창장 사이의 작은 나라들을 진(晉)과 초 가운데 누가 거느리느냐였다. 오랜 망명 끝에 기원전 636년 즉위한 진 문공은 나라를 중앙집권화하고 작은 나라와 이웃 종족을 흡수한 아버지의 개혁을 발판으로 삼았다. 기원전 632년 그는 제와 진(秦)의 군대와 함께 성복에서 초와 그 동맹군을 물리쳤고, 주 왕은 그를 제후의 으뜸으로 인정했다.
초도 반격했다. 초 장왕은 국경을 창장 훨씬 북쪽까지 넓혔고, 한때는 군대를 주 왕성 밖에 세워 두고 왕권의 상징인 구정(九鼎)의 무게를 물었다. 마치 가져갈 수도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기원전 597년 장왕은 황허 가의 필에서 지휘부가 갈라진 진(晉)군을 격파하고 으뜸가는 세력이 되었다. 기원전 575년에는 진(晉)이 언릉에서 다시 이겼고, 이런 전투들이 초의 북진을 막았다.
지친 강대국들은 외교에 기대 보았다. 기원전 579년의 군비 축소 회의와 기원전 546년 진(晉)·초의 휴전이다. 휴전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한 명의 패자가 주 왕을 보호한다는 옛 관념은 흐려지고 있었다. 그사이 진(晉)·노 등 여러 나라 안에서는 유력한 귀족 가문들이 군주의 권력을 빼앗고 있었다.
중급
오와 월: 동남방의 복수극
기원전 584년 진(晉)은 옛 주나라 문화권 바깥의 창장 하류 나라 오에 사신을 보내, 동쪽에서 초를 치도록 전차와 군사 훈련을 제공했다. 계획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 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는 초에서 망명한 오자서, 아우 부개와 함께 회수를 거슬러 오른 뒤 육로로 진군해 백거에서 초군을 무너뜨렸다. 오군은 다섯 번 연달아 이겨 초의 도읍 영을 점령했다. 기원전 505년 진(秦)이 초를 도우러 군대를 보내고서야 오는 물러났다.
오는 이어 남쪽의 이웃 월로 눈을 돌렸다. 기원전 496년 취리에서 월이 오를 이겼고, 합려는 그때 입은 상처로 죽었다. 아들 부차는 기원전 494년 부초에서 복수하고 월왕 구천을 회계산에 몰아넣었지만, 월을 없애야 한다는 오자서의 경고를 듣지 않고 구천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부차는 대신 북쪽을 바라보았다. 기원전 484년 애릉에서 제를 이기고, 기원전 482년에는 패권을 인정받으려 정예군을 이끌고 황지의 회맹에 나갔다. 그가 없는 사이 구천이 오를 쳐서 태자를 죽이고 도성을 차지했다. 월은 기원전 478년 입택에서 다시 이겼고, 약 3년 동안 오의 도성을 포위한 끝에 기원전 473년 오를 멸망시켰다. 부차는 자결했고, 구천은 마지막 패자로 인정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구천은 치욕을 잊지 않으려고 섶나무 위에서 자고 쓸개를 맛보았다고 한다. 이 ‘와신상담(臥薪嘗膽)’ 이야기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인내와 복수의 이야기가 되었다.
중급
진(晉)의 분할과 전국시대의 시작
북방 최강국 진(晉)에게는 특이한 약점이 있었다. 군주가 자기 친족을 멀리하고 경대부 가문에 기대었는데, 이 가문들이 점점 나라를 장악한 것이다. 6세기 말에는 여섯 가문이 진을 좌우했고, 기원전 497년부터의 내전에서 두 가문이 제거되어 지씨·조씨·한씨·위씨가 남았다.
지씨의 우두머리가 다른 가문들에게 땅을 요구했다. 한과 위는 따랐지만 조양자는 거절하고 오늘날 타이위안 부근의 진양으로 물러났다. 기원전 455년부터 지·한·위의 군대가 약 2년 동안 진양을 포위하고 물길을 돌렸다. 조의 사신은 마침내 한과 위에게 다음 차례는 당신들이라고 설득했다. 두 가문은 편을 바꾸어 큰 물줄기를 지씨 진영으로 돌렸고, 기원전 453년 지씨는 멸망했다.
한·조·위는 진(晉)을 나누어 가졌다. 기원전 403년 주 위열왕이 이들의 우두머리를 제후로 인정하면서 ‘삼진(三晉)’은 독립한 나라가 되었다. 비슷한 무렵 제에서는 전씨(田氏)가 옛 군주 가문을 대신했다. 이 사건들이 흔히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로 쓰인다.
이후 일곱 대국이 판을 주도했다. 서쪽의 진(秦), 동쪽의 제, 남쪽의 초, 북쪽의 연, 그리고 가운데의 한·조·위다. 그 사이의 작은 나라들은 한동안 살아남았지만 하나씩 흡수되었다.
중급
전쟁을 위한 개혁: 위, 제, 그리고 상앙의 진(秦)
기원전 4세기에 나라들은 앞다투어 자신을 개조했다. 군주들은 여러 나라를 떠도는 전문가들을 고용했다. 이들은 통치·외교·전쟁의 방책을 내놓았고, 그 방책이 성공하면 높은 벼슬을, 실패하면 끔찍한 형벌을 받기도 했다.
가운데의 위는 새 시대의 첫 강대국이었지만, 한가운데 자리한 탓에 사방이 적이었다. 기원전 354년 위가 조의 도읍 한단을 포위했다. 제의 장수 전기와 손빈은 한단으로 가지 않고 위의 도읍 대량을 위협했고, 위의 장수 방연이 급히 돌아오자 계릉에서 매복해 무찔렀다. 이 계책에서 ‘위위구조(圍魏救趙, 위를 포위해 조를 구한다)’라는 말이 나왔다. 기원전 342년 위가 한을 치자 손빈은 다시 대량으로 진군했다가, 날마다 아궁이 수를 줄이며 물러나 방연이 제군이 도망치고 있다고 믿게 했다. 방연은 뒤쫓다가 마릉의 매복에 걸려 죽었다. 위는 다시는 으뜸 자리를 되찾지 못했다.
서쪽의 진(秦)은 뒤떨어진 나라로 여겨졌다. 기원전 359년부터 재상 상앙이 기원전 356년과 350년 두 차례에 걸쳐 변법을 시행했다. 그는 엄하고 획일적인 법을 세우고 가족에게 서로의 죄를 연대 책임지게 했으며, 평민도 전공으로 얻을 수 있는 작위를 만들고, 땅을 나누어 중앙이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현을 두었고, 토지 분배와 조세를 개혁했으며, 도읍을 함양으로 옮겼다. 후원자인 효공이 죽은 뒤 기원전 338년 그는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제도는 살아남았다.
그 결과 진은 ‘농사와 전쟁’을 위해 조직된 나라가 되었다. 함곡관 뒤의 든든한 국경과 팽창할 여지를 갖춘 진은 기원전 316년 쓰촨 분지의 비옥한 촉을 차지했다. 진의 군주는 기원전 325년 왕을 칭했고, 다른 군주들도 곧 뒤따랐다.
중급
합종과 연횡
진(秦)이 강해지자 다른 나라들은 지도 위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합종(合縱)’으로 힘을 합치려 했다. 진은 나라들을 하나씩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연횡(連橫)’으로 맞섰다. 소진과 장의 같은 유세가가 두 정책의 설계자로 기억되며, 사실이든 지어낸 것이든 그들의 말이 『전국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첫 대규모 합종군은 기원전 318년 진을 쳤지만 함곡관에서 실패하고 흩어졌다. 이후의 연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맹국마다 진만큼이나 이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293년 진의 장수 백기는 바로 이 불신을 이용해 이궐에서 한군과 위군을 차례로 무찔렀다.
가장 극적인 연합 전쟁은 진이 아니라 제를 겨냥했다. 기원전 284년 연의 악의가 연·진(秦)·조·한·위의 군대를 이끌고 제를 쳐서 제수 서쪽에서 크게 이기고 도읍 임치를 차지했다. 몇 달 만에 연은 제의 성 70여 곳을 손에 넣었고, 거와 즉묵만 버텼다. 즉묵의 장수 전단은 5년 동안 저항하다가 기원전 279년 포위군을 무찌르고 제를 되살렸지만, 제는 크게 약해진 채로 남았다.
기원전 278년에는 백기가 이끈 진군이 초의 도읍 영을 함락해, 초는 한수 서쪽 땅을 내주어야 했다. 260년대에 진의 재상 범수는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친다)’을 주장했다.
중급
장평과 한단: 결정적 대결
기원전 3세기 중엽에는 조만이 진(秦)에 맞설 수 있어 보였다. 충돌은 상당에서 비롯되었다. 상당은 타이항산맥에 있는 한의 땅으로, 진에 의해 본국과 끊겨 있었다. 태수 풍정은 진에 항복하느니 조에 땅을 바치겠다고 했고, 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기원전 262년부터 진군과 조군은 오늘날 가오핑 서북쪽의 장평 부근에서 맞섰다.
조의 장수 염파는 요새화한 방어선을 쌓고 정면 대결을 피하며, 길고 험한 진의 보급로가 지치기를 기다렸다. 진은 염파가 늙고 겁이 많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조왕은 그를 병서 암송으로 이름났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 젊은 조괄로 바꾸었다. 진은 몰래 백기를 사령관으로 보냈다. 기원전 260년 조괄이 공격하자 백기의 군대는 물러나는 척하며 조군의 보급로를 끊고 포위했다. 몇 주 동안 굶주린 끝에 조괄은 포위를 뚫으려다 전사했고 조군은 항복했다.
약 150년 뒤에 쓰인 『사기』에 따르면 백기는 어린 병사 240명만 돌려보내고 포로를 거의 모두 죽였는데, 산 채로 묻었다고 전한다. 『사기』는 이 전역 전체에서 조군 약 45만 명, 진군 약 25만 명이 죽었다고 적는다. 이는 전승 숫자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아래 참고). 전장 터에서는 흩어진 뼈와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어 왔다.
진은 기원전 259년부터 조의 도읍 한단을 포위했지만, 조는 그사이 동맹을 다시 쌓아 두었다. 평원군은 초의 원조를 얻어 냈고, 위의 신릉군은 훔친 병부(兵符)로 위군의 지휘권을 빼앗아 한단을 구하러 갔다. 기원전 257년 구원군과 성안의 출격군이 포위를 깨뜨렸다. 상앙의 변법 이후 진이 겪은 가장 큰 패배였다. 그래도 기원전 256년 진은 서주와 구정을 차지해 주 왕실을 끝냈다.
중급
진(秦)의 여섯 나라 정복(기원전 230~221)
기원전 238년 젊은 진왕 정이 권력을 온전히 쥐었다. 그는 이사 같은 신하들과 함께 남은 나라를 하나씩 차지하는 계획을 밀고 나갔다. 기원전 230년 진군은 황허를 건너 가장 약한 나라 한의 도읍 정을 점령했고, 한은 진의 군(郡)이 되었다.
명장 이목이 이끈 조는 버텼지만, 진이 조의 대신을 매수해 이목을 반역죄로 모함하게 했다. 이목은 해임되어 죽었고 기원전 228년 진은 한단을 차지했다. 연 태자가 보낸 형가가 진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진은 연을 칠 구실을 얻었다. 기원전 226년 진은 역수에서 이기고 연의 도읍 계를 점령했으며, 기원전 222년 요동에서 마지막 연왕을 사로잡았다. 기원전 225년 왕분은 황허와 운하의 물을 끌어 위의 도읍 대량에 대었고 위는 항복했다.
가장 큰 나라 초가 가장 어려웠다. 20만 명을 이끈 이신의 침공은 초의 장수 항연에게 무너졌다. 진왕은 노장 왕전에게 그가 요구한 60만 명을 내주었다. 왕전은 요새화한 진영에서 기다리다가 초군이 물러가자 기원전 224년 기남에서 격파했고, 기원전 223년 도읍 수춘을 함락했다. 재상이 매수되어 모든 동맹에서 빠져 있던 제는 기원전 221년 진군이 임치에 이르자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진왕 정은 ‘시황제’라는 칭호를 썼다. 그는 옛 봉건 영지를 없애고 제국을 중앙이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군으로 나누었으며, 귀족 가문들을 함양으로 옮겼다. 진 왕조는 기원전 206년까지밖에 가지 못했지만, 뒤이은 한 왕조가 통일된 관료제의 틀을 이어받았다.
중급
기억과 고사성어, 그리고 사상
이 전쟁들은 언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계릉 전투에서 나온 ‘위위구조’는 삼십육계의 하나가 되었다. 장평에서 조괄이 실패한 일은 이론에는 밝고 실전에는 서툰 사람을 가리키는 ‘지상담병(紙上談兵,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이라는 말을 낳았다. 구천의 ‘와신상담’은 지금도 끈질긴 결의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전쟁은 중국 사상도 빚어냈다. 맹자·순자 같은 유가, 묵가, 도가, 법가를 아우르는 제자백가는 모두 끝없는 싸움의 세계에 대한 응답이었다. 묵자는 침략 전쟁을 비난하고 작은 나라의 방어를 도왔다. 맹자는 인정(仁政)을 펴는 군주는 싸우지 않고도 백성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상앙과 한비 같은 법가는 엄격한 법과, 농업과 전쟁에 맞춘 국가를 주장했다.
후대는 이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읽었다. 진을 대신한 한나라의 역사가들은 흔히 진을 가혹한 나라로 그리면서도, 통일을 피비린내 나는 시대의 자연스러운 결말로 보았다. 많은 이들이 이 몇 세기의 고통을 중국 정치 문화에서 오래 이어진 ‘하나로 통일된 국가’에 대한 선호와 연결한다. 이름은 중국 밖으로도 퍼졌다. 일본 역사가들은 자기 나라의 내전기를 여기서 따와 센고쿠(전국) 시대라고 불렀다.
심화
군대는 얼마나 컸나: 숫자의 문제
고대 문헌은 엄청난 숫자를 전한다. 진(秦)과 초가 각각 보병 백만, 이궐에서 24만 명 전사, 마릉에서 10만 명, 장평에서 조군 약 45만 명 전사, 백기가 평생 죽인 적군 89만 명 같은 것이다. 이런 숫자는 오늘날의 대중 역사서에 되풀이되고, 진지한 개설서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영어 위키백과의 전국시대 항목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마이클 로이(Michael Loewe)와 에드워드 쇼네시(Edward L. Shaughnessy) 같은 학자들은 이 숫자가 과장되었다고 본다. 근거는 기록이 부실하다는 점, 비슷한 사회들의 수치보다 훨씬 크다는 점, 벤 머리 수로 병사에게 상을 준 진의 제도가 부풀린 집계를 부추겼다는 점, 그리고 한나라 저자들이 통일 이전 시대의 참혹함을 강조할 이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더라도 전쟁의 규모와 비용이 크게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장평은 좋은 시험 사례다. 『사기』의 숫자는 전투 후 약 150년 뒤에 쓰였고, 포로를 한꺼번에 묻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극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물리적 유해는 실재한다. 당나라 황제가 뼈를 모은 곳 위에 사당을 세웠고, 전장 터에서는 지금도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고 있다. 고고학은 대규모 살육을 확인할 수 있지만 정확한 숫자까지 확인해 주지는 않는다.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도 이 전쟁들로 일반 이론을 시험해 왔다. 빅토리아 틴보 후이(Victoria Tin-bor Hui)는 전국시대 체제를 근세 유럽과 비교해, 왜 중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끝나고 유럽은 나뉜 채 남았는지를 물었다. 에드거 카이저(Edgar Kiser)와 차이융(Yong Cai)은 끊임없는 전쟁이 진의 이른 관료화를 이끌었다고 주장했고, 자오딩신(Zhao Dingxin)은 이를 비판했다. 이런 논쟁은 전승된 숫자와 서사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심화
사료, 연대, 논쟁
춘추시대의 주된 서사 사료는 노나라의 간결한 연대기 『춘추』에 붙은 자세한 주석서 『좌전』이다. 기원전 4세기에 편찬되었고 그 서술은 진(晉)의 분할에서 끝난다. 『국어』는 비슷한 내용을 나라별로 다룬다. 전국시대에 대해서는 『전국책』이 유세가들의 말과 일화를 전하는데, 상당수는 기록이라기보다 문학에 가깝다. 기원전 100년 무렵 완성된 사마천의 『사기』가 이런 자료를 엮어 하나의 연속된 역사로 만들었고, 기원전 3세기에 관한 지식의 많은 부분이 여기서 나온다.
사료들은 서로 어긋난다. 『사기』는 손무(손자)를 백거 전투의 지휘관으로 들지만, 가장 이른 기록인 『좌전』에는 그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현대의 개설서들도 이신이 초에서 패한 해(기원전 224년 또는 225년), 기원전 221년 제를 차지한 지휘관(영어 위키백과는 이신, 중국어 위키백과는 왕분) 같은 세부에서 엇갈린다. 진(晉)의 분할조차 어느 단계를 결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기원전 481·475·468·453·403년으로 달리 잡힌다. 사마천은 전국시대를 기원전 475년부터 시작했고,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기원전 403년 삼진의 제후 책봉으로 시작한다.
정확한 날짜는 드물다. 연대기는 해를 군주의 재위 연수로 적고, 때로는 나라마다 달랐던 역법으로 달과 날을 적는다. 이런 날짜를 서양력의 달로 바꾸려면 각 나라의 역법에 관한 가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원전 453년 5월 8일’처럼 날짜를 제시하는 현대 저작은 조심해서 보아야 한다. 이 때문에 테라 스크립타의 전쟁 지도는 연도만 보여 준다.
끝으로, 이 이야기는 대부분 조정의 시각에서 쓰였다. 대군으로 징집된 농민, 진양과 대량처럼 물에 잠긴 도시의 주민, 남쪽과 북쪽 변경의 사람들은 스치듯 등장할 뿐이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고고학, 출토 문헌, 비교 연구를 통해 그들의 경험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핵심 개념
- 패권(霸)
- 춘추시대에는 가장 강한 제후가 패자로 인정받아, 힘없는 주 왕의 이름으로 동맹을 이끌었다. 큰 나라들이 저마다 세력권을 만들면서 이 체제는 약해졌다.
- 영토 통합
- 백 곳이 넘던 나라가 일곱으로, 다시 하나로 줄었다. 정복한 변경은 세습 귀족이 아니라 중앙이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현과 군이 되었다.
- 전쟁을 위한 국가 건설
- 진(秦)의 상앙 변법 같은 개혁은 백성을 호적에 올리고, 전공에 작위로 보상하며, 농사와 전쟁을 묶어 거대한 군대를 동원하고 보급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 대규모 보병전
- 귀족의 전차전은 철제 무기와 쇠뇌, 뒤에는 기병까지 갖춘 징집군의 전쟁으로 바뀌었고, 원정은 몇 년씩 이어지기도 했다.
- 동맹 외교
- 진(秦)에 맞선 합종과 이를 깨뜨린 진의 연횡은 여러 나라가 공존한 국제 체제를 보여 주며, 흔히 유럽의 세력 균형과 비교된다.
- 통일의 이상
- 이 시대의 고통과 진의 통일은 하나의 중앙집권 제국을 중국 국가의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여기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기록
- 기원전 771년 — 서주의 도읍이 무너지고 주 왕실이 동쪽 낙읍에서 다시 선다(기원전 771/770년).
- 기원전 632년 — 성복 전투: 진(晉)이 초를 이기고 문공이 패자가 된다.
- 기원전 597년 — 필 전투: 초 장왕이 진(晉)을 격파한다.
- 기원전 506년 — 백거 전투: 오가 초를 이기고 도읍 영을 점령한다.
- 기원전 473년 — 월이 약 3년의 포위 끝에 오를 멸망시킨다.
- 기원전 453년 — 진양 포위전이 조·한·위의 지씨 멸망으로 끝난다.
- 기원전 403년 — 주 왕이 한·조·위를 제후로 인정한다.
- 기원전 356년 — 진(秦)에서 상앙의 첫 변법이 시행된다(두 번째는 기원전 350년).
- 기원전 342년 — 마릉 전투: 제가 위군을 격멸하고 방연이 죽는다.
- 기원전 284년 — 연이 이끈 연합군이 제의 도읍 임치를 차지한다.
- 기원전 260년 — 장평 대전이 조군의 항복과 대량 학살로 끝난다.
- 기원전 221년 — 제가 항복하고 진왕 정이 시황제가 된다.
용어 풀이
- 주 왕 / 천자
- 주 왕조의 군주. 기원전 770년 이후에도 가장 높은 의례상 칭호는 지켰지만 실권은 거의 없었다.
- 패자(霸者)
- 춘추시대에 여러 나라 동맹의 우두머리로 인정받은 제후.
- 삼진(三晉)
- 진(晉)이 나뉘어 생긴 세 나라 한·조·위.
- 전국칠웅
- 전국시대의 일곱 강대국 진(秦)·초·제·연·한·조·위.
- 합종(合縱)
- 동쪽 나라들이 진(秦)에 맞서 맺은 동맹.
- 연횡(連橫)
- 나라들을 하나씩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연합을 깨뜨린 진(秦)의 정책.
- 법가(法家)
- 엄격하고 획일적인 법, 상과 벌, 강한 군주를 강조한 통치 사상. 상앙·한비와 연관된다.
- 군(郡)
- 군주가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지방 행정 단위. 진은 제국을 군으로 나누었다.
- 『좌전(左傳)』
- 『춘추』에 붙은 서사적 주석서로, 춘추시대의 주된 사료.
- 『전국책(戰國策)』
- 한나라 때 엮은 전국시대 유세가들의 말과 이야기 모음.
- 『사기(史記)』
- 사마천이 기원전 100년 무렵 완성한 역사서. 전국시대와 진에 관한 주된 역사 기록.
- 구정(九鼎)
- 천하를 다스릴 권리를 상징한 청동 솥. 기원전 256년 진이 주에게서 가져갔다.
묻고 답하기
왜 ‘춘추’시대라고 불러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연대기가 노나라에서 기록한 『춘추』이기 때문이에요. ‘봄과 가을’은 ‘한 해 전체’를 뜻하는 표현이라서, 이름은 ‘연대기’ 정도의 뜻이에요.
결국 누가 이겼어요?
서쪽 끝의 진(秦)이에요.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 다른 여섯 나라를 정복했고, 진의 왕은 중국의 첫 황제가 되었어요.
손자는 정말 이 전쟁에서 싸웠나요?
『사기』는 손무(손자)가 기원전 506년 백거 전투에서 오군을 지휘했다고 하지만, 더 오래된 『좌전』에는 그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의심하는 학자가 많고, 『손자병법』 자체도 뒤의 전국시대에 글로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평에서 정말 40만 명이 넘게 죽었나요?
약 150년 뒤에 쓰인 『사기』가 그렇게 전합니다. 전장 터에서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어 큰 학살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정확한 숫자는 과장되었다고 보는 역사가가 많습니다.
왜 다른 나라가 아니라 진(秦)이 이겼을까요?
역사가들은 여러 요인을 듭니다. 군대를 모으고 보급하는 데 탁월하게 만든 상앙의 변법, 산과 관문 뒤의 안전한 위치, 촉 같은 새 농토, 적들을 계속 갈라놓은 외교, 유능한 장수들입니다. 운과 경쟁국들의 실수도 작용했습니다.
전국시대는 정확히 언제 시작됐나요?
합의된 한 해는 없습니다. 사마천은 기원전 475년을 썼고, 삼진이 제후로 인정된 기원전 403년이나 지씨가 멸망한 기원전 453년 같은 진(晉) 분할의 다른 단계를 쓰기도 합니다.
지도에는 왜 정확한 날짜 없이 연도만 나오나요?
사료는 보통 해를 군주의 재위 연수로, 달을 나라마다 다른 역법으로 적습니다. 이를 서양력의 달로 바꾸려면 각 나라 역법에 대한 추측이 필요해서, 연도만 보여 주고 원래의 달은 메모로 남깁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Warring States period. Wikipedia
- Spring and Autumn period. Wikipedia
- Qin's wars of unification. Wikipedia
- Battle of Changping. Wikipedia
- Battle of Handan. Wikipedia
- Partition of Jin. Wikipedia
- Battle of Boju. Wikipedia
- Battle of Guiling. Wikipedia
- Battle of Maling. Wikipedia
- Shang Yang. Wikipedia
- 越灭吴之战 (월의 오 정복 전쟁). 중국어 위키백과
- 即墨之戰 (즉묵 전투). 중국어 위키백과
- Mark Cartwright, Warring States Period.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17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