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자기 쪽 이야기를 모든 사람이 영원히 알아주기를 바란 왕이 있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약 2,500년 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지금의 이란 서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가의 바위산에 커다란 그림과 긴 글을 새기게 했어요.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등반 장비 없이는 아무도 닿을 수 없답니다.
그림에서 다리우스는 꼿꼿이 서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사람을 발로 밟고 있어요. 그 앞에는 목에 밧줄이 묶인 작은 포로들이 줄지어 서 있지요. 그 위로는 날개 달린 형상이 떠 있는데, 대개 다리우스가 승리를 감사드린 신 아후라마즈다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요.
글에는 다리우스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적혀 있어요. 가우마타라는 사람이 옛 왕의 동생인 척하며 왕위를 훔쳤대요. 다리우스는 가우마타를 물리친 뒤, 왕이 될 자격을 속인 다른 반란 ‘왕’들까지 무찔렀다고 말해요. 가우마타까지 합쳐 ‘거짓 왕’은 모두 아홉 명이에요. 하지만 다리우스가 모든 진실을 말했다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진짜 거짓말쟁이는 다리우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답니다!
다리우스는 같은 글을 세 가지 언어로 새기게 했는데, 모두 쐐기 모양의 작은 표시로 된 쐐기문자로 썼어요. 오랫동안 아무도 이 글자를 읽지 못했지요. 1800년대에 용감한 영국 장교가 절벽을 올라 글을 베껴 왔고, 학자들은 세 가지 판을 정답이 세 개인 퍼즐처럼 맞춰 보았어요. 덕분에 쐐기문자를 다시 읽는 법을 알아낼 수 있었어요.
뒷날 사람들도 근처에 쉬고 있는 헤라클레스나 파르티아 왕들 같은 조각을 더했어요. 지금은 비소툰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보호받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무엇
- 고대 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아어 세 언어로 된 긴 쐐기문자 비문이 딸린 왕의 암벽 부조
- 장소
- 이란 서부 케르만샤주 비소툰산. 바빌론과 엑바타나(오늘날 하마단)를 잇던 옛길 옆
- 만든 이
-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486). 재위 초기에 새겼다
- 시기
- 기원전 520년 무렵 시작해 518년 무렵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확장. 본 이야기는 기원전 522–521년을 다루고, 고대 페르시아어 다섯 번째 단이 그 뒤 두 해의 원정을 덧붙인다
- 크기
- 새긴 부분 전체가 높이 약 15m, 너비 약 25m로 절벽 높은 곳에 있다. 평지에서 약 60m(유네스코), 산기슭 샘에서 약 66m(『이란 백과사전』), 다른 설명으로는 옛길에서 100m에 이른다
- 글
- 고대 페르시아어 5단 414행, 엘람어 두 판, 바빌로니아어 112행. 모두 합쳐 약 1,200행
- 사본
- 바빌론에서 나온 바빌로니아어 사본 조각, 이집트 엘레판티네에서 나온 아람어 번역 파피루스(기원전 420년 무렵)
- 지위
- 유네스코 세계유산 ‘비소툰’(2006)
쉬움
베히스툰 비문이란?
이란 서부, 메소포타미아와 이란고원을 잇던 옛길 위의 석회암 산에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는 승리의 장면과 자신의 업적을 적은 긴 글을 새기게 했다. 그리스 저술가들은 이 산을 바기스타논이라 불렀고, 학자들은 여기서 ‘신들의 자리’라는 뜻의 고대 페르시아어 지명 *바가스타나를 재구성한다. 중세 아랍·페르시아 지리학자들은 이곳을 베히스툰으로 알았고, 유럽인들이 뒤에 이 이름을 받아들였다. 오늘날 페르시아어 이름은 비소툰이다.
이 기념물은 서로 짝을 이루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돌을 깎아 인물이 도드라지게 한 그림인 부조이고, 다른 하나는 그 둘레를 감싼 비문이다.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아어 세 언어로 쓰였는데, 모두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생겨난 쐐기 모양의 글자인 쐐기문자(설형문자)를 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실 비문 가운데 가장 길고, 사건을 이어지는 이야기로 전하는 유일한 비문이다.
다리우스는 멀리서는 보이되 쉽게 닿을 수 없는 자리를 골랐다. 옛 일꾼들은 조각을 마친 뒤 그 아래 접근로를 깎아 낸 것으로 보이며, 오르기 어려운 덕분에 수백 년 동안 사람에 의한 훼손을 상당히 피했을 것이다. 그래도 비와 스며드는 물이 글의 일부를 닳게 했고, 절벽 아래에서는 아무도 글을 읽을 수 없다.
19세기에 이 비문은 또 다른 이유로 유명해졌다. 하나의 글을 세 가지 문자로 되풀이한 덕분에 학자들이 쐐기문자를 읽는 법을 알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흔히 로제타석에 비유된다. 2006년에는 후대의 여러 유적을 아우르는 비소툰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
쉬움
부조를 읽는 법
가장 큰 인물부터 보자. 실물 크기쯤으로 새겨진 다리우스는 왕권의 상징인 활을 들고, 등을 대고 누운 사람의 가슴에 발을 올려놓고 있다. 비문은 이 쓰러진 사람을 다리우스가 왕위를 훔쳤다고 고발하는 ‘마구스’ 가우마타라고 밝힌다. 왕 뒤에는 그의 무기를 든 페르시아 귀족 둘이 서 있다.
다리우스 앞에는 왕보다 훨씬 작은 포로들이 손이 묶이고 목이 밧줄 하나로 이어진 채 줄지어 서 있다. 크기로 중요도를 나타내는 것은 근동 미술의 오랜 관습이다. 포로마다 붙은 짧은 설명문은 그의 이름과 ‘거짓말’을 적는데,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자신이 나보니두스의 아들이자 바빌론의 왕인 네부카드네자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맨 끝에서 뾰족하고 높은 모자를 쓴 인물은 스키타이(사카)계 집단의 우두머리 스쿤카로, 나중에 비집고 들어가듯 덧새겨졌다.
모든 것 위로는 고리 안에 든 날개 달린 형상이 떠 있다. 다리우스는 ‘아후라마즈다의 뜻으로’ 이겼다고 거듭 말하며, 이 형상은 대개 장면을 굽어보는 그 신으로 해석된다. 이긴 지배자가 적을 밟고 포로들이 줄지어 선 전체 구도는 같은 산악 지대의 훨씬 오래된 암벽 부조, 특히 서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사르에폴에자하브의 룰루비 왕 아누바니니 부조를 닮았다.
쉬움
다리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
글은 다리우스의 자기소개로 시작한다. 이름과 칭호, 그리고 아버지 히스타스페스를 거쳐 아케메네스라는 조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계다. 왕가는 이 조상에게서 아케메네스 왕조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다스렸다는 스물세 나라를 꼽는데, 페르시아와 바빌로니아부터 이집트, 이오니아 그리스인, 박트리아, 간다라까지 이른다.
다음은 그가 권력을 잡은 이야기다. 다리우스에 따르면 키루스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왕이 친동생 바르디야를 몰래 죽였다. 캄비세스가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기원전 522년 가우마타라는 마구스가 자신이 바르디야라며 들고일어났고, 많은 사람이 그를 받아들였다. 캄비세스가 죽은 뒤에도 아무도 가짜 왕에게 맞서지 못하다가, 다리우스가 몇몇 동료와 함께 메디아의 한 요새에서 가우마타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가 밝힌 날짜는 기원전 522년 9월 29일에 해당한다.
그러자 반란이 잇따랐다. 엘람, 바빌로니아, 메디아, 페르시아 본토, 아르메니아, 마르기아나 등 지방마다 스스로 왕을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다리우스는 열아홉 번의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쳤다고 적고, 이 모든 일이 한 해 안에 일어났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반란을 ‘거짓’을 뜻하는 드라우가라는 한 낱말로 설명한다. 반란자들이 거짓말을 했고, 거짓이 나라들을 반란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는 뒷날의 왕들에게 거짓말하는 자를 벌하고, 이 기념물을 지키고, 자신을 도운 여섯 귀족을 받들라고 당부한다.
중급
아홉 ‘거짓 왕’과 한 해의 전쟁
부조는 패배한 경쟁자들을 쓰러진 순서대로 보여 주지만, 본문은 대체로 지역별로 묶어 이야기한다. 가우마타 다음으로 엘람의 아치나, 몇 달 동안 ‘네부카드네자르’로 바빌론을 다스린 니딘투벨, 옛 메디아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프라와르티시, 엘람의 두 번째 반란자 마르티야, 사가르티아의 치산타크마, 페르시아 본토에서 두 번째 ‘바르디야’를 자처한 와흐야즈다타, 바빌론에서 다시 네부카드네자르를 자칭한 아르메니아인 아라카, 그리고 중앙아시아 마르기아나의 프라다가 나온다.
이 가운데 두 가지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빌론의 반란자 둘은 스스로를 나보니두스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라 불렀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에서 가장 이름난 왕의 이름을 빌리고, 기원전 539년 키루스가 무너뜨린 마지막 독립 군주의 후손임을 내세운 것이다. 독립의 기억이 여전히 강했음을 보여 준다. 또 두 사람이 키루스의 아들 바르디야를 자처했는데, 이는 키루스의 혈통이 끊긴 뒤에도 그 가문에 대한 충성이 강력한 정치적 힘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모든 전투를 ‘같은 한 해에’ 이겼다는 다리우스의 자랑은 오랫동안 의심받았다. 아시리아학자 뤼클레 보르거는 가우마타를 죽인 일을 빼고 보면, 기원전 522년 12월 13일 바빌로니아군에 대한 첫 승리부터 기원전 521년 12월 28일 프라다의 패배까지 날짜가 밝혀진 원정이 바빌로니아력으로 한 해 안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그해는 윤달이 하나 더 들어가 길어진 해였다. 이렇게 읽으면 왕의 주장은 생각보다 과장이 덜하지만, 이런 단서를 달아야만 성립한다.
바빌로니아어판과 아람어판에는 죽거나 사로잡힌 적의 수처럼 고대 페르시아어판에 없는 내용이 더 있다. 처벌은 거리낌 없이 묘사된다. 반란 지도자 몇몇은 신체가 훼손된 채 궁전 문 앞에 전시되었다가 말뚝에 꿰어 처형되었다. 이 비문은 알리는 것만큼이나 겁을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중급
하나의 기념물, 세 언어, 여러 단계
이 기념물은 처음부터 완성된 3개 언어 비문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 하인츠 루셰이가 비계 위에서 직접 조사했고, 이어 레오 트륌펠만, 발터 힌츠, 뤼클레 보르거의 연구로 기념물이 여러 단계를 거쳐 커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작업은 마지막 반란이 진압된 뒤인 기원전 520년 초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먼저 부조가 새겨졌고, 이어 왕 옆의 짧은 엘람어 설명문과 부조 오른쪽의 엘람어 본문이 새겨졌다.
이란 남서부의 옛 왕국 엘람의 언어인 엘람어는 당시 페르시아 궁정의 기록 언어였으므로, 첫 번째 글로 쓰인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어 부조 왼쪽의 비스듬한 면에 바빌로니아어판이 새겨졌고, 마지막으로 장면 바로 아래에 고대 페르시아어판이 새겨졌다. 다리우스 자신의 언어로 된 이 글들은 연대가 확실한 고대 페르시아 쐐기문자 가운데 가장 이른 예다.
그 뒤 사건들이 변경을 불렀다. 재위 2년과 3년에 엘람의 새 반란자 아타마이타, 그리고 스쿤카가 이끄는 스키타이인을 상대로 원정을 벌인 뒤, 다리우스는 포로 행렬 맨 끝에 스쿤카의 모습을 덧새기게 했다. 새 인물이 첫 번째 엘람어 본문을 침범하는 바람에 그 본문은 버려지고 다른 자리에 다시 새겨졌다. 이 후기 원정을 다룬 다섯 번째 단은 고대 페르시아어판에만 덧붙었다.
그 결과 세 판은 똑같지 않다. 다리우스가 결정판으로 여긴 듯한 고대 페르시아어판은 처음 네 단을 문자와 사본에 관한 단락(70단락)으로 마무리하는데, 이 단락은 엘람어·바빌로니아어 본문에는 없다. 엘람어로 된 대응 단락은 부조 위의 빈자리에 비집고 들어가 있고, 후기 원정을 다룬 다섯 번째 단이 그 뒤를 잇는다. 기념물은 기원전 518년 무렵 완성되었을 것이다.
중급
새 문자, 그리고 제국 곳곳의 사본
고대 페르시아어판에 덧붙은 단락에서 다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자유롭게 옮김). “아후라마즈다의 뜻으로, 이것이 내가 만든 문자 체계이니, 아리아어로 된 것이다.” 이어 그것을 점토판과 양피지에 적어 자기 앞에서 소리 내어 읽게 한 뒤 ‘모든 나라에’ 보냈다고 덧붙인다. 많은 학자는 이를 고대 페르시아 쐐기문자가 바로 이 기념물을 위해 그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으로 본다.
문자 자체도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대 페르시아 쐐기문자에는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가 약 36개뿐이고, 여기에 낱말 기호 몇 개와 낱말 구분 기호가 더해진다. 수백 개의 기호를 쓰는 바빌로니아어에 비하면 훨씬 적다. 겉보기에는 쐐기문자이지만 새로 만든 단순한 체계다. 비소툰에서는 낱말 구분 기호를 비롯한 두 기호의 모양이 이후의 모든 고대 페르시아어 비문과 조금 다른데, 이 문자가 처음 시험 삼아 쓰인 곳이라는 단서다. 고대 페르시아어는 거의 왕실의 과시용 비문에만 쓰였고, 일상 행정은 엘람어와 점점 더 아람어로 이루어졌다.
남아 있는 사본은 이 글이 실제로 퍼졌음을 확인해 준다. 바빌론에서는 바빌로니아어판 일부를 새긴 현무암 기념물 조각이 나왔는데, 부조의 사본도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일강의 섬으로, 페르시아 왕에게 복무한 유대인 군사 거류지가 있던 이집트 남부 엘레판티네에서는 사건으로부터 약 한 세기 뒤인 기원전 420년 무렵 다리우스 2세 때 옮겨 쓴 아람어 번역 파피루스 조각이 전한다. 공식 이야기가 먼 국경 수비대에서도 여전히 베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급
쐐기문자 해독: 페르세폴리스에서 베히스툰으로
이미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 그리스인 궁정 의사 크테시아스는 이 부조를 전설 속 여왕 세미라미스의 기념물로 여겼고, 그의 말은 뒷날 디오도로스가 인용했다. 제국이 무너진 뒤 쐐기문자를 읽는 지식은 점차 끊겼고, 1598년부터 이곳을 지난 유럽 여행자들은 저마다 짐작을 내놓았다. 본격적인 해독은 이곳이 아니라 페르세폴리스에서 시작되었다. 덴마크 탐사대원 카르스텐 니부어가 그곳의 짧은 왕실 비문을 베껴 1778년에 출간했다. 그는 이 비문들이 세 종류의 쐐기문자를 쓰며, 가장 단순한 것은 기호가 수십 개뿐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첫 돌파구는 1802년 괴팅겐의 젊은 학교 교사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가 열었다. 그는 오직 페르세폴리스 사본만으로 작업했다. 베히스툰은 아직 아무도 베끼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이 글들이 아케메네스 왕들의 비문이며, 얼마 전 실베스트르 드 사시가 읽어 낸 훨씬 후대의 사산 왕조 왕실 비문과 같은 틀, 곧 ‘아무개, 위대한 왕, 왕 중의 왕, 아무개의 아들’을 따른다고 가정했다. 올루프 튁센과 프리드리히 뮌터의 관찰을 바탕으로, 그는 한 비문에서 왕의 아버지에게 왕이라는 칭호가 붙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왕이 아니었던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리우스, 그리고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와 들어맞았다. 이렇게 그는 다리우스·크세르크세스·히스타스페스라는 이름을 밝혀내고 열 개 남짓한 기호에 대략적인 소릿값을 매겼는데, 모두 맞지는 않았다. 그는 1802년 9월 4일 괴팅겐 학술원에 논문을 발표했지만 당시에는 인쇄되지 못했고, 그가 직접 펴낸 첫 설명은 1805년에 나왔다.
이어 라스무스 라스크, 외젠 뷔르누프, 크리스티안 라센 등이 아베스타어와 산스크리트어의 도움을 받아 고대 페르시아 문자표를 다듬었다. 그동안 페르시아에서 군사 고문으로 일하던 영국 동인도회사 장교 헨리 롤린슨이 비소툰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1835년 처음 이 바위를 보았고, 1836–1837년에 바위 턱까지 거듭 올라가 고대 페르시아어판 전체를 베껴 1837년 9월에 마쳤다. 1844년 9월에는 이를 다시 베끼고 엘람어판을 종이로 떠냈으며(탁본), 1847년에는 심하게 훼손된 바빌로니아어 본문을 일부는 망원경으로, 일부는 고용한 쿠르드 소년이 절벽 면을 기어올라 떠낸 탁본으로 확보했다. 그는 고대 페르시아어판을 1846–1847년에, 바빌로니아어판을 1851년에 출간했다.
바빌로니아어는 훨씬 어려웠다. 그 문자에는 기호가 수백 개 있고, 상당수가 소릿값을 여럿 지닌다. 아일랜드 성직자 에드워드 힝크스는 1846년 이 문자들이 부분적으로 음절 문자임을 밝히고, 그 언어가 셈어임을 알아보았다. 롤린슨, 힝크스, 쥘 오페르 등은 서로의 성과를 딛고 나아갔고, 니네베 같은 아시리아 유적에서 새로 발굴된 글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1857년 런던의 왕립아시아학회는 롤린슨, 힝크스, 오페르,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에게 새로 발견된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의 비문을 각자 따로 번역하게 했고, 심사위원들은 번역들이 충분히 일치하여 해독이 진짜임을 보여 준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언어인 아카드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중급
여러 시대가 겹친 산: 후대의 조각과 보존
다리우스의 부조는 긴 역사의 한 층일 뿐이다. 근처 동굴은 구석기 시대에 이미 쓰였고, 산비탈의 요새는 다리우스의 말대로 가우마타가 죽임을 당한 메디아의 요새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기원전 148년,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은 셀레우코스 왕조 아래에서 길가에 연대를 적은 그리스어 비문과 함께 비스듬히 누운 헤라클레스가 새겨졌다. 파르티아인들은 미트리다테스 2세와, 그보다 뒤에 고타르제스 2세의 부조를 더했다.
가장 야심 찬 흔적은 사산 왕조가 남겼다. 왕(아마도 호스로 2세, 재위 590–628)과 여신 아나히타를 새긴 커다란 기둥머리, 그리고 끝내 마무리되지 못한 사업을 위해 다듬은 듯한 너비 약 200m, 높이 약 30m의 거대한 암벽이 그것이다. 지역 전승과 12세기 시인 니자미의 이야기시 『호스로와 시린』은 이런 작업을 시린을 위해 산을 깎은 상사병 걸린 조각가 파르하드와 연결했고, 이 암벽은 지금도 ‘파르하드가 깎은 곳’이라는 뜻의 파르하드 타라시로 불린다.
뒷날의 통치자들도 이곳에 건물을 지었다. 몽골 시대의 한 건물은 14세기 초 일한국의 군주 올제이투와 관련되고, 1681–1685년에는 총독 셰이크 알리 칸 장가네가 큰 카라반사라이(대상 숙소)를 지었다. 1684–1685년에 새긴 그의 기증 비문은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부조를 상당 부분 망가뜨렸다.
다리우스 기념물은 비와 철마다 쏟아지는 급류, 바위 속으로 스며드는 물 때문에 손상되었다. 광물 피막이 일부 글자를 덮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오히려 글자를 보호하기도 했다. 20세기에는 아래 길을 지나던 군인들이 인물상을 사격 표적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유네스코가 공개한 설명은 부조 뒤로 스며드는 물을 가장 큰 위협으로 꼽고, 긴급 조치를 항구적인 해결책으로 바꿔야 한다고 적는다. 또 2004년에 승인된 관리 계획과 2010년에 새로 채택된 계획을 기록하고 있다.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다리우스가 꼽은 나라 가운데에는 키루스의 정복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아나톨리아 서부의 이오니아 그리스인, 곧 야우나가 있다. 그리스인들은 제국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수사의 궁전 건립 비문에서 다리우스는 이오니아인과 리디아인을 석공으로 적고 있다. 한 세대 뒤 이오니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고(기원전 499–493), 페르시아의 응징 원정은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로 이어졌다. 수십 년 뒤 할리카르나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쓴 다리우스의 집권 이야기는 곳곳에서 베히스툰의 글과 아주 가까워, 공식 기록이 직간접으로 그에게 전해졌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에게 정복된 이집트에서는 관리 우자호레스넷이 자기 경력을 새긴 조각상을 사이스에 세웠는데, 아마도 다리우스 재위 3년(기원전 519년 무렵), 곧 비소툰이 새겨지던 무렵이었다. 그는 페르시아 왕들에게 이집트 신전을 존중하도록 일깨운 충직한 신하로 자신을 내세운다. 두 글을 나란히 읽으면 같은 시기를 중심과 지방에서 바라본 모습이 드러난다. 정당성을 선포하는 왕, 그리고 그를 섬긴 까닭을 설명하는 지방 엘리트다.
유다에서는 『학개서』가 예언의 날짜를 ‘다리우스 왕 제2년’으로 적는다. 대부분의 학자 생각대로 이 왕이 다리우스 1세라면 기원전 520년으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 작업이 다시 시작된 때다. 『에스라서』는 성전이 그의 재위 6년에 완공되었다고 전한다.
다리우스는 근동의 오랜 왕실 선전 전통 안에서 움직이기도 했다. 기원전 539년 키루스가 바빌론을 차지했을 때, 키루스 원통은 그를 불경한 왕을 대신하도록 마르두크 신이 고른 인물로 그렸다. 다리우스는 자신을 거짓말하는 사칭자를 대신하도록 아후라마즈다가 고른 인물로 내세웠다. 둘 다 메소포타미아의 본보기를 따랐다.
심화
여러 관점
가우마타인가, 바르디야인가? 다리우스와 헤로도토스는 큰 줄거리에서 일치한다. 키루스의 작은아들이 몰래 살해되었고, 마구스 사칭자가 나타났으며, 일곱 공모자가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생생한 세부를 덧붙인다. 귀가 잘려 있어서 정체가 드러난 사칭자, 가장 좋은 정치 형태를 두고 벌인 공모자들의 토론, 말을 이용한 꾀로 왕위를 차지한 다리우스 이야기다. 그가 꼽은 일곱 사람의 명단도 다리우스의 명단과 한 사람만 다르다. 그러나 일치가 곧 증거는 아니다. 헤로도토스는 결국 다리우스 자신의 선전에서 갈라져 나온 이야기에 기댔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 문서가 확인해 주는 것은 기원전 522년 몇 달 동안 바르지야(바르디야)라는 왕이 인정받았다는 사실뿐이다.
1938년 A. T. 옴스테드 이후 무하마드 단다마예프, 피에르 브리앙 등 많은 역사학자는 다리우스가 진짜 바르디야를 죽이고, 왕위에 대한 권리가 약한 먼 친척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려고 ‘가우마타’를 지어냈다고 의심해 왔다. 브리앙은 힘으로 권력을 잡은 통치자가 흔히 전임자를 전통을 무너뜨린 사칭자로 그린다고 지적한다. 반면 A. 샤푸르 샤바지 등은 다리우스를 옹호한다. 그의 연대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고, 바빌로니아어판은 가우마타를 메디아인이라고 밝히며, 고대의 어떤 저술가도 다리우스를 찬탈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증거로는 결론을 내릴 수 없으므로, 다리우스의 이야기는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왕의 공식 주장으로 소개하는 것이 알맞다.
고대 페르시아 문자는 누가 만들었는가? 다리우스의 말, 그리고 고대 페르시아어 글이 모두 나중에 덧붙었다는 기념물의 제작 단계는 많은 학자에게 이 문자가 기원전 520년 무렵 다리우스 때 만들어졌다고 확신하게 했다. 다른 학자들은 키루스 때 이미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보며, 그 근거로 그의 이름 쿠루시를 쓰는 데 필요한 기호들의 모양이 단순하다는 점 등을 든다. 파사르가다에의 키루스 이름으로 된 짧은 고대 페르시아어 글과 다리우스 조상들의 이름으로 된 금판은 한때 더 이른 사용의 증거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는 이를 후대의 것으로 본다. 70단락의 핵심 낱말조차 해석이 갈린다. 옛 번역은 ‘비문’으로, 뒤의 번역은 ‘문자’로 옮기며, 새로운 판독도 계속 나오고 있다.
쐐기문자의 ‘로제타석’인가? 이 비유는 쓸모 있지만 단순화된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어판은 학자들에게 길고 믿을 만한 글을 주었고, 롤린슨의 사본은 뒷날 다른 판들의 판본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케빈 캐스카트는 비소툰의 바빌로니아어판이 1851년 말에야 출간되었으며, 그 전에 이미 힝크스 등이 페르세폴리스·메소포타미아·반 호수의 비문으로 핵심적인 진전을 이루었다고 강조한다. 피터 대니얼스도 엘람어·바빌로니아어 사본의 복제도가 각각 1855년과 1866년 이후에야 출간되었다고 지적한다. 아카드어는 서로 경쟁한 여러 학자가 함께 해독했으며, 공을 롤린슨 한 사람에게 돌리는 대중적 설명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심화
증거와 방법: 훼손된 왕실 글 읽기
완전한 판은 하나도 없으며, 침식은 바빌로니아어판에 가장 큰 피해를 주었다. 오늘날의 판본은 롤린슨의 사본에 후대의 작업을 더해 만든다. A. V. 윌리엄스 잭슨의 사진(1903), L. W. 킹과 R. C. 톰슨이 이끈 영국박물관 조사단(1904), 그리고 읽을 수 없다고 여겨지던 첫 번째 엘람어판을 상당 부분 되살린 조지 G. 캐머런의 라텍스 탁본(1948)이 그것이다. 표준 판본으로는 롤런드 켄트의 고대 페르시아어 비문집(1950, 개정판 1953), 엘리자베스 폰 포크틀랜더의 바빌로니아어판(1978), 조너스 그린필드와 베잘렐 포르텐의 아람어판(1982), 뤼디거 슈미트의 고대 페르시아어판(1991)이 있다. 옛 사본에는 오류와 판독하지 못한 빈틈이 있어 새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사베르 아미리 파리안은 2013년부터 엘람어판의 새 판본을 위해 사본을 다시 만들어 왔고, 2017년부터 나누어 발표하고 있다.
여러 판을 비교하는 일 자체가 연구 방법이다. 바빌로니아어판과 아람어판은 죽거나 사로잡힌 적의 수와 이름 표기를 공유하며 서로 닮았고, 엘람어판과 고대 페르시아어판이 또 한 쌍을 이룬다. 글이 처음에는 제국의 실무 언어인 아람어로 작성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증거는 결정적이지 않다. 뤼디거 슈미트는 고대 페르시아어판이 왕 앞에서 낭독되고 승인을 받았으리라고 추론하며, 작은 생략과 변경도 그렇게 설명한다.
이 글은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메소포타미아, 특히 아시리아의 왕실 연대기를 따르면서도, 모든 단락이 ‘다리우스 왕이 말한다’로 시작해 말로 하는 선포 같은 리듬을 지닌다. ‘아후라마즈다의 뜻으로’ 같은 일부 정형구는 아나톨리아 동부 우라르투의 왕실 비문과 비교되어 왔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이 글을 두 겹으로 읽어야 한다. 바빌로니아 문서와 그리스 저술로 확인해야 할 사건의 증거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통치권을 위해 공들여 짠 논증으로서다.
연대 추정은 재위 연도, 바위에 보이는 조각 단계, 판마다 다른 왕의 칭호 같은 내부 증거를 바빌로니아력과 맞추어 이루어진다. 그 결과는 한 해가 아니라 대략 기원전 520–518년이라는 범위다. 유네스코의 설명은 기념물 제작 연대를 기원전 521년으로 적고 있어, 참고 문헌마다 연대가 늘 같지는 않다.
핵심 개념
- 거짓(드라우가)
- 다리우스는 모든 반란을 거짓의 소행으로 설명하고, 자신을 아후라마즈다가 고른 진리의 수호자로 내세운다.
- 가계를 통한 정당성
- 비문은 다리우스를 아케메네스와 잇는 가계로 시작해, 그의 왕위 계승권에 대한 의심에 답하려 한다.
- 하나의 제국, 여러 언어
- 엘람어·바빌로니아어와 새 고대 페르시아 문자를 함께 써서, 왕은 제국의 오랜 문자 문화들에 각자의 방식으로 말을 걸었다.
- 권력으로서의 공표
- 다리우스는 글을 점토판과 양피지에 옮겨 제국 곳곳에 보냈고, 사본은 바빌론과 이집트에까지 닿았다.
- 단계적으로 만든 기념물
- 새 승리를 거둘 때마다 부조와 글이 늘어나고 바뀌었으며, 그래서 판마다 차이가 있다.
- 쐐기문자의 열쇠
- 이 3개 언어 비문은 다른 비문들과 함께 19세기 학자들이 고대 페르시아어·엘람어·아카드어를 해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기억의 지층
- 셀레우코스·파르티아·사산과 그 뒤의 통치자와 이야기꾼들이 이 산에 저마다 조각과 건물과 전설을 더했다.
기록
- 기원전 522년 — 다리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522년 키루스의 아들 바르디야를 사칭한 가우마타가 캄비세스에 맞서 일어났고, 캄비세스가 죽은 뒤 다리우스가 9월 29일 그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 기원전 521년 — 다리우스와 장군들이 반란 왕들을 물리친다. 마지막으로 마르기아나의 프라다가 기원전 521년 12월 28일에 패한다.
- 약 기원전 520년 — 비소툰 부조 작업이 시작된다(기원전 520년 무렵). 엘람어 글이 가장 먼저 새겨진다.
- 약 기원전 519년 — 바빌로니아어판과 고대 페르시아어판이 더해진다. 엘람과 스키타이 원정 뒤 스쿤카의 모습과 고대 페르시아어 다섯 번째 단이 덧붙는다(기원전 519–518년 무렵).
- 약 기원전 420년 — 다리우스 2세 때 이집트 엘레판티네에서 비문의 아람어 번역이 파피루스에 옮겨 적힌다(기원전 420년 무렵).
- 기원전 148년 — 셀레우코스 왕조 아래 비소툰에 연대를 적은 그리스어 비문과 함께 누운 헤라클레스가 새겨진다(기원전 148년).
- 약 600년 — 왕(아마도 호스로 2세)과 여신 아나히타를 새긴 사산 왕조의 기둥머리가 만들어지고, 끝내 완성되지 못한 사업을 위해 거대한 암벽이 다듬어진다.
- 1802년 — 9월 4일 그로테펜트가 페르세폴리스 비문의 왕 이름 판독을 괴팅겐 학술원에 발표한다.
- 1835년 — 헨리 롤린슨이 비소툰 비문을 처음 본다. 1836–1837년에 고대 페르시아어판 전체를 베낀다.
- 1847년 — 롤린슨이 바빌로니아어판을 종이로 떠낸다. 바빌로니아어판 출간은 1851년이다.
- 1857년 — 왕립아시아학회의 시험: 학자 네 명이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의 비문을 각자 번역해 아카드어 해독을 입증한다.
- 2006년 — 비소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다.
용어 풀이
- 쐐기문자(설형문자)
- 쐐기 모양의 표시로 이루어진 문자.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생겨나 여러 언어에 맞게 고쳐 쓰였다.
- 고대 페르시아어
- 페르시아 왕가의 언어. 주로 왕실 비문에 쓰인 단순한 쐐기문자로 적었다.
- 엘람어
- 이란 남서부 엘람의 언어. 페르시아 궁정의 행정 기록에 쓰였다.
- 바빌로니아어(아카드어)
-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셈어인 아카드어의 한 갈래로, 복잡한 쐐기문자로 적었다.
- 부조
- 평평한 바탕에서 인물이 도드라지게 새긴 조각.
- 3개 언어 비문
- 세 언어로 쓴 글. 비소툰에는 같은 글이 세 판으로 새겨져 있다.
- 마구스(마기)
- 사제 역할과 관련된 메디아의 한 집단에 속한 사람. 다리우스는 가우마타를 ‘마구스’라 부른다.
- 탁본(스퀴즈)
- 젖은 종이(뒷날에는 라텍스)를 돌에 눌러 비문의 모양을 떠낸 것.
- 레스 게스타이
- ‘한 일들’이라는 뜻의 라틴어. 통치자가 자기 업적을 직접 밝힌 공식 기록.
- 아후라마즈다
- 다리우스가 모든 승리의 공을 돌린 최고신.
묻고 답하기
다리우스는 왜 비문을 그렇게 높이 새겼나요?
아마 길에서는 보이지만 쉽게 훼손되지는 않게 하려고 그랬을 거예요. 조각을 마친 뒤 일꾼들이 아래쪽 접근로를 깎아 없앤 것으로 보여요.
땅에서 글을 읽을 수 있나요?
아니요. 인물은 보이지만, 글은 너무 높고 작아서 절벽을 오르거나 사진을 보지 않으면 읽을 수 없어요.
가우마타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다리우스와 헤로도토스는 비슷한 사칭자 이야기를 전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는 다리우스가 진짜 바르디야를 죽이고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려고 사칭자를 지어냈다고 의심해요. 다리우스의 기록을 받아들이는 학자들도 있어요.
그로테펜트가 1802년에 베히스툰 비문을 해독했나요?
아니요. 1802년에 그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베껴 온 짧은 비문을 연구해 다리우스·크세르크세스·히스타스페스라는 이름을 바르게 밝혀냈어요. 베히스툰의 글은 1830년대부터 롤린슨이 베끼기 시작했어요.
정말 쐐기문자의 ‘로제타석’인가요?
특히 고대 페르시아어와 엘람어에서는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아카드어 해독은 다른 많은 비문과 에드워드 힝크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에게도 기대었어요.
다리우스가 고대 페르시아 문자를 발명했나요?
그는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기념물을 보면 고대 페르시아어 글이 가장 나중에 더해졌어요. 그러나 키루스 때 이미 문자가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어서 아직 논쟁 중이에요.
비소툰에는 또 무엇이 있나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헤라클레스, 파르티아 부조, 사산 왕조의 조각과 미완성된 거대한 암벽, 일한국 시대의 건물, 사파비 왕조의 카라반사라이 등이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Rüdiger Schmitt, BISOTUN iii. Darius’s Inscriptions. Encyclopaedia Iranica, 2000 (online edition)
- Rüdiger Schmitt, BISOTUN i. Introduction. Encyclopaedia Iranica
- Heinz Luschey, BISOTUN ii. Archeology. Encyclopaedia Iranica
- Bisotun.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Jona Lendering, Behistun. Livius.org
- Behistun, Persian Text (adapted from the King/Thompson translation). Livius.org
- Pierre Briant, GAUMĀTA. Encyclopaedia Iranica
- A. Shapur Shahbazi, DARIUS iii. Darius I the Great. Encyclopaedia Iranica
- Rüdiger Schmitt, CUNEIFORM SCRIPT. Encyclopaedia Iranica, 1993
- GROTEFEND, GEORG FRIEDRICH. Encyclopaedia Iranica
- CTESIAS. Encyclopaedia Iranica
- Peter T. Daniels, RAWLINSON, HENRY ii. Contributions to Assyriology and Iranian Studies. Encyclopaedia Iranica
- Arthur John Booth, The Discovery and Decipherment of the Trilingual Cuneiform Inscriptions. Longmans, Green, and Co. (Project Gutenberg edition), 1902
- Kevin J. Cathcart, The Earliest Contributions to the Decipherment of Sumerian and Akkadian. Cuneiform Digital Library Journal 2011:1, 2011
- Kathryn E. Kelley, Bīsitūn Inscription. Cuneiform Digital Library Initiative
- Saber Amiri Parian, A New Edition of the Elamite Version of the Behistun Inscription (I). Cuneiform Digital Library Bulletin 2017:3, 2017
- Herodotus, The Histories, Book 3 (from 3.61), tr. A. D. Godley.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 DSf: Darius’s foundation charter from Susa. Livius.org
- Behistun inscription. Wikipedia
- Decipherment of cuneiform. Wikipedia
- Bardiya. Wikipedia
- Udjahorresnet. Wikipedia
- Ionian Revolt. Wikipedia
- Alan B. Lloyd, The Inscription of Udjahorresnet: A Collaborator’s Testament. Journal of Egyptian Archaeology 68, 1982
- Haggai, chapter 1 (Hebrew–English, JPS 1917 translation). Mechon Mamre
- Ezra, chapter 6 (Hebrew–English, JPS 1917 translation). Mechon Mamre
- Book of Haggai. Wikipedia
- Cyrus Cylinder. Wikipedia
함께 보기
- 페르세폴리스이란 남서부에 있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의례·행정 중심지로, 다리우스 1세 때 건설이 시작되었다.
- 키루스 원통기원전 539년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한 뒤 바빌로니아 쐐기 문자로 새긴 점토 기초 원통으로, 그를 마르두크 신이 고른 정의로운 왕으로 내세운다.
- 쐐기 문자갈대를 젖은 점토에 눌러 쓴 세계 최초의 문자 가운데 하나.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명되어 3,000년 넘게 여러 언어를 적는 데 쓰였다.
-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8세기 바빌론 왕 함무라비의 이름으로 발표된 법률 조항 모음이다.
- 로제타석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기리는 사제 칙령을 상형문자·민중문자·그리스 문자로 새긴 화강섬록암 비석 조각. 세 판본의 대조가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군이 마라톤에서 페르시아 원정군을 물리친 전투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