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페르세폴리스

파르사(Pārsa, 고대 페르시아어) · Περσέπολις(그리스어) · 탁테 잠시드 تخت جمشید(페르시아어)

약 기원전 518–330년 · 페르세폴리스 (파르사)

한 문장으로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남서부에 있는 페르시아 왕들의 궁전 도시 유적으로, 약 2,500년 전 거대한 돌 단 위에 세워졌으며, 제국 곳곳의 사람들이 왕에게 선물을 가져오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페르세폴리스
이미지: Alborzagros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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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2,500년 전, 페르시아의 왕들은 그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제국을 다스렸어요.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그리스 가까이에서 동쪽으로는 인더스강까지 뻗어 있었지요. 기원전 518년 무렵, 다리우스 대왕은 자기 고향 땅 ‘파르사’에 멋진 궁전 도시를 짓기로 했어요. 나중에 그리스 사람들은 이곳을 ‘페르시아인의 도시’라는 뜻으로 페르세폴리스라고 불렀어요.

일꾼들은 산기슭에 축구장 여러 개보다 넓은 거대한 돌 단을 쌓았어요. 그 위에 가늘고 높은 돌기둥이 숲처럼 늘어선 큰 궁전들을 지었지요. 어떤 기둥은 6층 건물만큼이나 높았어요! 기둥 꼭대기에는 황소 두 마리가 등을 맞댄 조각이 앉아 나무 지붕보를 받치고 있었어요.

페르세폴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돌에 새긴 그림, 곧 부조예요. 커다란 계단을 따라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걸어가요. 이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 옷과 모자가 저마다 다르고, 왕에게 줄 선물을 들고 있어요. 말, 낙타, 금 그릇, 옷감, 심지어 새끼 사자까지요! 제국의 모든 민족이 나오는 돌로 된 행진 같아요.

고고학자들은 작은 점토판도 수만 개 찾아냈어요. 쐐기 모양 글자로 쓴 기록인데, 일꾼들이 곡식과 포도주와 맥주를 얼마나 받았는지가 적혀 있어요. 여성 일꾼이 아기를 낳으면 먹을 것을 더 받았다는 기록도 있답니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고 그의 군대가 페르세폴리스에 불을 질렀어요. 지붕은 타서 무너졌지만, 돌기둥과 문틀과 조각은 많이 남았어요. 오늘날 페르세폴리스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이란과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옛날 사절들이 오르던 바로 그 넓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요.

한눈에 보기

건설
기원전 518~515년 무렵 다리우스 1세 때 시작. 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후대 아케메네스 왕들이 기원전 330년까지 확장
위치
이란 파르스주 마르브다슈트 평원, 쿠헤 라흐마트(‘자비의 산’) 기슭. 시라즈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세운 이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50년 무렵~330년). 제국 여러 민족의 일꾼과 장인이 참여
구조
약 12만 5,000㎡의 높은 돌 단 위에 알현실, 궁전, 보물고, 문루가 있고 뒷산에 왕묘를 팠다
대표 유구
23개 사절단 부조 계단이 있는 아파다나(알현실), 만국의 문, 백주궁(백 개 기둥의 방)
문서
페르세폴리스 성채 점토판(기원전 509~493년)과 보물고 점토판(기원전 492~457년). 대부분 엘람어
파괴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불태움
지위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쉬움

페르세폴리스란 무엇인가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동 대부분과 이집트, 아나톨리아, 중앙아시아를 처음으로 한 왕조 아래 묶은 제국이다. 고대 페르시아어 이름은 파르사로, 지역과 민족의 이름, 곧 페르시아·페르시아인과 같다. 그리스어 이름 페르세폴리스는 그냥 ‘페르시아인의 도시’라는 뜻이다. 누가 지었는지 잊은 후대 이란 사람들은 이란 전승의 전설적인 왕 잠시드의 이름을 따 ‘탁테 잠시드(잠시드의 왕좌)’라고 불렀다.

유적은 페르시아인의 본고장인 이란 남서부 파르스 지방 마르브다슈트 평원의 산기슭에 쌓은 거대한 단 위에 있다. 그 위에 알현실, 궁전, 보물고, 문루, 창고 같은 기념비적 건물들이 들어섰다. 제국에는 수사, 바빌론, 엑바타나 같은 여러 수도가 있었고 왕은 그 사이를 오갔다. 페르세폴리스는 왕조의 본고장에서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 의례를 치르는 곳이자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다.

오늘날 폐허에는 서 있는 기둥, 조각된 문틀, 부조로 뒤덮인 계단, 바위를 파서 만든 왕묘가 남아 있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고고 유적 가운데 하나이자 이란 역사의 강력한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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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페르세폴리스 ‘읽기’: 단 위를 걷다

그때나 지금이나 방문객은 북서쪽 모서리로 들어와, 품위 있게 오를 수 있도록(어쩌면 말을 탄 채로도) 단을 낮게 만든 넓은 쌍둥이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이 있다. 서쪽 문에는 거대한 황소상이, 동쪽 문에는 사람 머리에 날개 달린 황소상이 서 있는데, 이는 문을 지키는 수호상을 세우던 아시리아 전통을 이은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아어 세 언어로 된 비문이 크세르크세스를 건설자로 밝힌다.

남쪽에는 다리우스 1세가 시작하고 크세르크세스가 완성한 큰 알현실 아파다나가 있다. 한 변이 약 60m인 정사각형 중앙 홀에 기둥 36개가 서 있었고, 세 방향의 주랑에 기둥이 더해져 모두 72개였다. 기둥 높이는 20m 안팎이었고, 꼭대기에는 황소·사자·그리핀의 앞몸 두 개를 등지게 새긴 주두가 삼나무 지붕보를 받쳤다. 오늘날 서 있는 기둥은 몇 개뿐이다.

더 남쪽과 동쪽에는 다리우스의 궁전(타차라), 크세르크세스의 궁전(하디시), 흔히 트리필론 또는 회의실이라 부르는 중앙 건물, 그리고 크세르크세스가 시작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완성한 단 위 최대의 지붕 덮인 공간인 백주궁이 있다. 남동쪽 모서리에는 제국의 부를 쌓아 둔 보물고가 있었다. 단 위쪽 산에는 흔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3세의 것으로 보는 무덤이 파여 있다.

기둥, 문틀, 창틀, 계단은 이 지역의 회색 석회암으로, 벽은 두꺼운 흙벽돌로 지었는데 벽은 거의 사라졌다. 조각에는 본래 화려한 색이 칠해져 있었고 금속 장식과 상감도 있었다. 학자들은 부조에서 안료의 흔적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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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돌로 된 행진: 아파다나 부조

페르세폴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은 아파다나의 북쪽과 동쪽 계단을 장식한다. 한쪽에는 모자와 옷으로 구별되는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귀족과 호위병들이 줄지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이는 꽃을 들고 있다. 다른 쪽에는 제국 여러 지역에서 온 23개 사절단이 다가오는데, 사절단마다 관리 한 사람이 앞장서서 대표의 손을 잡아 이끈다.

사절단은 저마다 고유한 옷차림을 하고 그 지역을 대표하는 선물을 들고 온다. 말, 낙타, 혹소, 숫양, 옷감, 금은 그릇, 무기, 장신구, 오카피를 닮은 동물, 영양, 새끼 사자 같은 것들이다. 학자들은 고대 페르시아어 왕실 비문에 나오는 지역 목록을 이용해 메디아인, 엘람인, 아르메니아인, 리디아인, 이오니아 그리스인, 바빌로니아인, 이집트인, 박트리아인, 인도인, 아라비아인, 누비아인 등을 가려내려 하지만, 일부 동정(同定)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장면 사이사이에는 사자가 황소를 덮치는 모습이 되풀이해 새겨져 있다. 계절의 변화, 왕권, 우주의 질서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지만 정확한 뜻은 논쟁 중이다. 눈에 띄는 것은 없는 것이다. 전투도, 처형당하는 포로도, 피 흘리는 적도 없다. 앞선 아시리아 궁전 벽의 전쟁 장면과 달리, 페르세폴리스는 제국을 왕을 중심으로 모인 평화롭고 질서 있는 세계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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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누가, 어떻게 지었나

키루스 대왕은 기원전 550년 무렵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우고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파사르가다에에 수도를 지었다. 키루스나 그 아들 캄비세스가 이미 페르세폴리스 터를 골랐을 수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본격적인 건설은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486년) 때 시작되었다. 다리우스는 비시툰(베히스툰) 비문에 적은 격렬한 왕위 계승 위기를 거쳐 왕이 되었다. 건설은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6~465년)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65~424년) 때도 이어졌고, 후대 왕들이 작은 건물을 더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왔을 때에도 일부는 미완성이었다.

다리우스는 건축 비문에서 제국의 여러 민족이 함께 그의 건물을 지었다고 강조한다. 수사 궁전의 건립 비문에는 제국 곳곳에서 가져온 재료와 이오니아, 사르디스, 이집트, 바빌론 등지에서 온 일꾼들이 나열되어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1933년 아파다나 모서리에서 금판과 은판으로 된 기초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다리우스의 영토가 소그디아나 너머 스키타이에서 쿠시까지, 인도에서 사르디스까지 이른다고 적혀 있다.

페르세폴리스 성채 점토판은 노동력에 대해 드물게 자세한 그림을 보여 준다. 여기에는 ‘쿠르타시’라 불린 일꾼들에게 지급한 곡식, 포도주, 맥주, 양 같은 배급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이집트인, 이오니아인, 리디아인, 바빌로니아인, 트라키아인 등 여러 민족 출신이었다. 남녀 모두 배급을 받았고, 같은 일을 하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양을 받은 경우도 있으며,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추가 배급을 받았는데 딸보다 아들일 때 더 많이 받았다. 이들이 자유 노동자였는지, 강제 이주민이었는지, 예속 노동자였는지는 논쟁 중이지만, 점토판은 사슬에 묶인 노예의 모습이 아니라 국가가 운영한 조직적인 지급 체계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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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돌 뒤의 제국

다리우스 1세 때 전성기를 맞은 아케메네스 제국은 리비아와 에게해에서 인더스 유역과 중앙아시아까지 뻗어 있었다. 제국은 사트라피라 부른 속주로 나뉘었고, 역참을 갖춘 왕의 길로 이어졌으며, 은과 현물로 세금과 예물을 거두었다. 성채 점토판에는 봉인된 문서를 지닌 여행자들이 인도, 이집트, 사르디스처럼 먼 곳을 오가며 길가의 역참에서 식량을 받은 기록이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행정에 여러 언어를 썼다. 다리우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는 주로 왕의 비문에 쓰였다. 페르세폴리스의 일상 기록은 주로 이란 남서부의 오래된 언어인 엘람어로, 또 상당수는 제국의 공용어였던 아람어로 적혔다. 바빌로니아어(아카드어)는 왕의 비문과 메소포타미아에서 쓰였다.

비문에 드러난 왕권 이념은 왕을 아후라마즈다 신이 택한 존재로, ‘거짓’에 맞서 진리와 질서를 지키는 자로 그린다. 제국의 민족들이 조화롭게 선물을 가져오는 아파다나 부조는 이 이념을 시각적 프로그램으로 옮긴 것이다. 많은 역사가는 이 제국이 지역의 관습, 언어, 종교를 페르시아 지배 아래에서도 이어 가게 한 점에 주목하지만, 반란이 일어나면 가혹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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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세폴리스의 화재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본토로 진군했다. 그는 기원전 330년 초 페르세폴리스에 이르렀고, 병사들에게 도시 약탈을 허락했으며, 막대한 보물을 실어 갔다. 몇 달 뒤인 기원전 330년 봄, 단 위의 궁전들에 불이 붙었다.

고대 자료는 그 이유를 두고 엇갈린다. 앞선 기록들에 기댄 아리아노스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아테네의 신전을 불태운 데 대한 계획된 복수로 서술하면서, 자신은 이를 현명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디오도로스, 플루타르코스, 쿠르티우스는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술자리에서 아테네 출신 기녀 타이스가 궁전을 불태우자고 부추겼고, 알렉산드로스가 첫 횃불을 던졌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 화재가 그리스인에게 보낸 계산된 정치적 메시지였는지, 페르시아인에게 제국이 끝났음을 알린 신호였는지, 취중의 충동이었는지, 아니면 이것들이 뒤섞인 것인지 논쟁한다.

고고학자들은 두꺼운 재층과 까맣게 탄 삼나무 들보, 그리고 보물고의 많은 물건이 부서진 흔적을 찾아냈다. 불은 지붕과 흙벽돌 벽을 무너뜨렸지만 돌로 된 부분은 살아남았고, 보물고의 점토판도 보존되었다. 이란 사람들에게 이 화재는 오랫동안 문화적 재앙으로 기억되어 왔고, 그리스·로마의 글에서는 흔히 복수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에 관한 이야기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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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불탄 뒤: 기억과 전설, 재발견

페르세폴리스는 다시 왕실 중심지로 재건되지 않았지만 잊히지도 않았다. 가까운 이스타크르가 후대 페르시아 왕조 아래에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후대의 통치자들도 폐허에 흔적을 남겼다. 다리우스 궁전에는 사산 왕조 시대의 중세 페르시아어 비문과 10세기 부이 왕조의 통치자 아두드 알다울라의 아랍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 페르시아 전승에서 이 폐허는 『샤나메』에 나오는 전설의 왕 잠시드와 연결되어 ‘탁테 잠시드’라 불렸고, 때로는 솔로몬왕과도 연결되었다.

15세기부터 유럽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아 폐허를 묘사하고 그렸다. 덴마크 원정대의 카르스텐 니부어는 1765년 비문을 정밀하게 베꼈다. 독일 학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는 이 사본을 바탕으로 1802년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에서 몇몇 왕의 이름을 바르게 읽어 냈는데, 이는 쐐기문자 해독의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과학적 발굴은 1931년 시카고대학 오리엔탈 연구소의 에른스트 헤르츠펠트가 시작했고, 1935~39년 에리히 슈미트가 이어받았다. 이들은 아파다나 계단과 보물고와 점토판 문서를 드러냈고, 이른바 ‘크세르크세스의 하렘’ 일부를 복원해 작업 기지와 박물관으로 썼다. 그 뒤 이란 고고학자들과 1960년대부터는 이탈리아 복원팀이 작업을 이어 갔다. 1971년 무함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왕정 2,500년’ 기념 행사를 호화롭게 열었는데, 막대한 비용과 정치적 의도로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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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점토판 문서: 제국의 행정 기록

1933년 헤르츠펠트 조사단은 단 북동쪽 성벽 안에서 수만 점의 점토판과 조각을 찾아냈다. 이 성채 점토판은 다리우스 1세 치세인 기원전 509년부터 493년까지의 것이다. 대부분 엘람어이고 약 1,000점은 아람어이며, 고대 페르시아어·그리스어·프리기아어로 된 것도 한 점씩 있다. 창고에서 일꾼, 관리, 여행자, 왕실, 종교 제물로 나간 식량과 가축의 흐름이 기록되어 있다. 더 작은 두 번째 문서군인 보물고 점토판(기원전 492~457년)에는 일부를 은으로 지급한 기록이 담겨 있다.

이란은 연구를 위해 1935년 이 점토판을 오리엔탈 연구소에 대여했다. 리처드 핼록이 1969년 엘람어 문서 2,087점을 펴내면서 연구의 판도가 바뀌었고, 2006년부터는 매슈 스톨퍼가 이끄는 ‘페르세폴리스 성채 문서 프로젝트’가 나머지 자료를 기록하고 출판해 왔다. 수십 년에 걸쳐 수백 점이 이란으로 돌아갔다. 이 문서는 소송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7년 폭탄 테러 피해자들이 이란에 대한 배상 판결을 집행하려고 점토판 압류를 시도한 ‘루빈 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사건에서, 2018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해당 법률로는 이 유물을 압류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문서들은 그리스 역사가들이 다루지 않은 세계를 드러낸다. 국가가 비용을 댄 종교 제물(엘람과 이란의 신들 모두에게 바친), 왕의 길을 따른 여행, 영지와 일꾼을 거느린 이르다바마와 이르타슈두나(아르티스토네) 같은 왕실 여성의 역할, 그리고 고대 제국의 일상적 작동 방식이다. 점토판에 찍힌 수천 개의 인장 자국 또한 아케메네스 미술의 중요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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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기능, 의미, 관점

페르세폴리스는 무엇을 위한 곳이었나? 영향력 있던 옛 견해는 이곳을 주로 새해 축제(노루즈)에 쓰인 의례 도시로 보았다. 사절단이 선물을 바치러 왔고, 아파다나 부조가 그 행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는 페르세폴리스와 노루즈를 직접 잇는 고대 증거가 없고, 성채 점토판을 보면 이 일대가 일 년 내내 분주한 지역 행정 중심지였다고 지적한다. 이 단은 왕의 거처, 의례의 무대, 보물고, 행정 중심을 겸한 곳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부조는 무엇을 보여 주나? 예전 학자들은 사절단이 ‘조공’을 바친다고 흔히 묘사했다. 다른 학자들은 부조가 실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제국 질서의 이상화된 그림이며, 선물도 제국의 정규 세금이라기보다 상징적인 예물이라고 본다. 왕좌에 앉은 왕과 왕세자가 관리를 맞는 중앙의 알현 부조 두 점은 고대에 이미 아파다나 계단에서 보물고로 옮겨졌는데, 어느 왕을 새긴 것인지는 논쟁 중이다.

제국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서양의 페르시아 상은 오랫동안 헤로도토스처럼 페르시아의 적 입장에서 쓴 그리스 저자들과, 페르시아가 ‘타락’해 알렉산드로스에게 졌다는 후대 서사에 좌우되었다. 1980년대부터 헬레인 산키시바이르덴뷔르흐와 에이멀리 커트가 이끈 ‘아케메네스 역사’ 워크숍과 피에르 브리앙 같은 역사가들의 연구는 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아어·아람어 자료를 중심에 두도록 학계를 이끌었다. 비문과 부조와 문서를 모두 지닌 페르세폴리스는 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한편 이란 안에서 이 유적은 강한 민족적 의미를 지니며, 팔라비 왕정과 이슬람 공화국은 이를 서로 다르게 해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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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 보존, 남은 문제

페르세폴리스에 관한 지식의 많은 부분은 1930년대 시카고 발굴에서 나왔고, 무엇보다 에리히 슈미트의 세 권짜리 보고서 『페르세폴리스』(1953~1970)로 출판되었다. 당시 발굴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빠르게 진행되어, 층위, 건설 순서, 무엇이 옮겨지거나 복원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남아 있다. 일부 부조와 유물은 골동품 거래나 그 이전 시기에 유적을 떠나 지금은 이란 밖의 박물관에 있다.

보존에도 과제가 이어지고 있다. 석회암의 풍화, 부조 위의 지의류와 생물 번식, 비와 기온 변화의 영향, 관광객의 압박 등이다. 이란의 보존 전문가들은 때로 국제 협력기관과 함께 돌을 관찰하고 처리하며, 어디까지 복원하고 보호 지붕을 씌울지를 두고 논의해 왔다.

남은 연구 과제로는 건물별 정확한 건설 연대, 부조의 본래 채색, 사절단의 정체, 파사르가다에와 나크셰 로스탐(다리우스 1세를 포함한 네 왕의 암굴묘가 있는 곳) 같은 주변 유적과의 관계, 단과 그 아래 도시가 어떻게 함께 기능했는지 등이 있다. 성채 점토판의 새로운 판독이 이 그림을 계속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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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왕권의 과시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의 권력과 질서와 부를 방문객과 신민에게 보여 주도록 설계되었다.
평화로운 제국
부조는 전쟁이나 잔혹한 장면 없이, 제국의 민족들이 조화롭게 선물을 가져오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러 민족, 하나의 사업
제국 곳곳의 일꾼과 장인과 재료가 왕의 건축에 모였다.
행정 중심지
점토판 문서는 페르세폴리스가 배급, 세금, 여행, 기록의 중심이었음을 보여 준다.
다언어 제국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아람어가 비문과 기록에 나란히 쓰였다.
파괴와 기억
알렉산드로스의 방화는 그리스, 이란, 현대의 서사에서 저마다 다르게 기억되어 왔다.
그리스 시각 너머
페르세폴리스는 주로 그리스 저자에 기댄 옛 역사를 바로잡는 페르시아 쪽 증거를 준다.

기록

  1. 기원전 522년 — 다리우스 1세가 왕위 계승 위기를 거쳐 왕이 되다(기원전 522년).
  2. 약 기원전 518년 — 다리우스 1세 때 페르세폴리스 단의 건설이 시작되다(기원전 518~515년 무렵).
  3. 기원전 509년 — 가장 이른 페르세폴리스 성채 점토판이 쓰이다(기원전 509년. 기원전 493년까지 이어짐).
  4. 기원전 486년 —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해 만국의 문 등 건설을 이어 가다(기원전 486년).
  5. 기원전 480년 —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을 불태우다(기원전 480년). 훗날 복수의 명분으로 거론됨.
  6. 기원전 330년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페르세폴리스를 약탈하고 불태우다(기원전 330년).
  7. 1802년 — 그로테펜트가 고대 페르시아어 쐐기문자에서 왕의 이름을 읽어 내다.
  8. 1931년 — 에른스트 헤르츠펠트가 시카고대학 오리엔탈 연구소의 발굴을 시작하다(1935~39년 에리히 슈미트가 이어받음).
  9. 1933년 — 성채 점토판과 아파다나 기초 비문판이 발견되다.
  10. 1971년 —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왕정 2,500년’ 기념 행사가 열리다.
  11. 1979년 — 페르세폴리스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다.
  12. 2018년 — 미국 연방대법원이 ‘루빈 대 이란’ 사건에서 페르세폴리스 점토판을 압류할 수 없다고 판결하다.

용어 풀이

아케메네스 왕조
전설적 조상 아케메네스의 이름을 딴 페르시아 왕조(기원전 550년 무렵~330년).
아파다나
기둥이 늘어선 알현실을 뜻하는 고대 페르시아어. 페르세폴리스의 가장 큰 아파다나는 다리우스 1세가 시작했다.
단(테라스)
높이 쌓은 평평한 대지. 페르세폴리스는 산에 기대어 일부를 인공으로 쌓은 단 위에 있다.
부조(浮彫)
평평한 바탕에서 형상이 도드라지게 새긴 조각.
쐐기문자
점토에 눌러 쓰거나 돌에 새긴 쐐기 모양 글자. 고대 중동의 여러 언어에 쓰였다.
엘람어
이란 남서부의 고대 언어. 페르세폴리스 행정 점토판 대부분이 이 언어로 쓰였다.
사트라피
아케메네스 제국의 속주. 사트라프(총독)가 다스렸다.
쿠르타시
페르세폴리스 점토판에서 왕실 행정으로부터 배급을 받은 일꾼을 가리키는 말.
아후라마즈다
아케메네스 왕들이 비문에서 부른 최고신.
탁테 잠시드
‘잠시드의 왕좌’. 전설의 왕 이름을 딴 페르세폴리스의 페르시아어 이름.
노루즈
춘분에 맞는 이란의 새해. 한때 페르세폴리스의 주된 축제로 널리 여겨졌다.

묻고 답하기

페르시아 왕은 늘 페르세폴리스에서 살았나요?

아니에요. 왕들은 수사, 바빌론, 엑바타나 같은 여러 수도를 오갔어요. 페르세폴리스는 의례를 치르고 행정을 보던 왕실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어요.

페르세폴리스는 노예들이 지었나요?

점토판을 보면 여러 민족 출신 일꾼들이 정기적으로 배급을 받았고,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식량을 더 받았어요. 이들의 법적 지위는 논쟁 중이지만, 증거는 단순한 노예보다는 조직적으로 대가를 받은 노동력을 가리켜요.

알렉산드로스는 왜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웠나요?

고대 저자들의 말이 엇갈려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불태운 데 대한 복수였다는 기록도 있고, 술자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계획된 일이었는지 충동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에요.

페르세폴리스에는 어떤 언어가 쓰여 있나요?

왕의 비문은 보통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세 언어로 쓰였어요. 일상 기록은 대부분 엘람어이고 아람어로 된 것도 많아요.

계단에 새겨진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메디아인, 리디아인, 이오니아인, 이집트인, 인도인, 누비아인 등 제국 여러 지역에서 온 23개 사절단이 왕에게 선물을 가져오는 모습이에요. 일부는 어느 민족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페르세폴리스는 노루즈 축제에 쓰였나요?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학설이지만, 이를 직접 보여 주는 고대 증거는 없어요. 오늘날 많은 학자는 페르세폴리스가 왕실과 행정의 여러 목적에 쓰였다고 봐요.

페르세폴리스 점토판은 왜 중요한가요?

페르시아 제국 스스로 남긴 가장 큰 문서 묶음이기 때문이에요. 그리스 역사가들이 다루지 않은, 일꾼을 먹이고 관리에게 급료를 주고 여행을 조직한 방식을 보여 줘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Persepolis.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2. Persepolis. Wikipedia
  3. Apadana. Wikipedia
  4. Persepolis Administrative Archives. Wikipedia
  5. Achaemenid Empire. Wikipedia
  6. Naqsh-e Rostam. Wikipedia
  7. Erich F. Schmidt, Persepolis I: Structures, Reliefs, Inscription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3
  8. Richard T. Hallock, Persepolis Fortification Tablet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9
  9. Pierre Briant (trans. Peter T. Daniels), From Cyrus to Alexander: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Eisenbraun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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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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