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기원전 470–399년 · 아테네

한 문장으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399년)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평생 사람들에게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지 어려운 질문을 던지다 자기 도시에서 사형당한 아테네의 철학자로, 제자들의 글을 통해 서양 철학의 출발점에 선 인물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미지: Copy of Lysippos (?)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소크라테스는 약 2,400년 전 그리스 아테네에 살았어요. 부자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았어요. 사람들은 그의 납작한 들창코와 툭 튀어나온 눈을 놀렸고, 그는 낡은 망토를 걸치고 맨발로 다니곤 했어요. 하지만 그에게는 대단한 재능이 하나 있었어요. 질문하는 것, 그리고 절대 멈추지 않는 것이었지요.

그는 시장에서 사람을 붙잡고 “용기란 무엇인가요?”, “정의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어요. 상대가 대답하면 또 묻고, 또 물어서, 결국 그 사람이 자기가 생각한 만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어요. 이런 대화를 아주 좋아한 사람도 있었고, 몹시 귀찮아한 사람도 있었어요.

한 친구가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의 유명한 신탁소에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대답은 “아무도 없다”였어요. 소크라테스는 어리둥절했어요. 여러 사람과 이야기해 본 뒤 그는 자기가 딱 한 가지 점에서만 더 지혜롭다고 결론 내렸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일흔 살이 되었을 때 몇몇 아테네 사람이 그를 법정에 세웠어요. 도시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였지요. 약 500명의 시민 배심원이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결정했어요. 친구들이 탈옥을 도우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고, 독이 든 잔을 마셨어요.

소크라테스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어요. 우리가 그를 아는 것은 제자들, 특히 플라톤이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인 대화를 글로 남겼기 때문이에요. 그 덕분에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식’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생몰
기원전 470/469년경 ~ 399년
지역
그리스 아테네(알로페케 구區)
가족
석공 소프로니스코스와 산파 파이나레테의 아들. 크산티페와 결혼해 세 아들을 두었다
저작
없음. 플라톤, 크세노폰,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알려졌다
방법
문답으로 믿음을 검토하는 논박(엘렌코스)
유명한 말(플라톤)
“검토하지 않는 삶은 사람에게 살 가치가 없다”(『소크라테스의 변론』 38a)
죽음
불경죄와 청년 타락죄로 기원전 399년 사형. 독약(흔히 독미나리, 곧 헴록으로 봄)을 마셨다
제자·추종자
플라톤, 크세노폰,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티포스,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 등

쉬움

소크라테스는 누구인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에 살았던 아테네 시민입니다. 이 시기 아테네는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였고, 민주정이 자리 잡은 곳이자 연극·미술·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470년 무렵 태어나 기원전 39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열지도, 수업료를 받지도, 강의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아고라(시장 광장), 체육관, 개인의 집 같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젊은이든 노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이야기하려는 사람이면 누구와도 대화했습니다.

그가 이야기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였습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덕, 정의, 용기, 경건, 우정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잘못으로 갚아도 되는가?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쓰면서 자기 영혼, 곧 내면의 자아를 돌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라고 부르는 그 앞의 철학자들은 주로 자연을 연구했습니다.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물었지요.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방향을 인간의 삶과 윤리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키케로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에서 불러 내려” 도시와 집 안으로 데려왔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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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질문하는 사람: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소크라테스가 철학하는 방식을 엘렌코스라고 합니다. ‘검토’ 또는 ‘시험’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우리말로는 흔히 논박이라고 옮깁니다. 대개 이렇게 진행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누군가에게 용기 같은 중요한 개념을 정의해 달라고 합니다. 상대는 “용기란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이어 가며 상대가 다른 명제들, 예컨대 용기는 언제나 훌륭한 것이라거나 때로는 물러서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데 동의하게 합니다.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처음 대답이 그 사람이 믿는 다른 것들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상대는 더 나은 정의를 내놓아야 하고, 그 정의도 같은 방식으로 검토됩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가운데 많은 수가 최종 답 없이, 그리스인들이 아포리아라고 부른 ‘난관’ 또는 ‘길 없음’의 상태로 끝납니다. 답답할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에게 이것은 진전이었습니다. 거짓을 계속 믿는 것보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는 중요한 것을 아무것도 모르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도울 뿐이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그는 어머니처럼 자신을 산파에 빗댑니다. 스스로 생각을 낳지는 않지만 남이 생각을 낳도록 돕고, 그 생각이 건강한지 살핀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분명히 매우 영리했으니, 많은 독자는 이 겸손이 어느 정도 반어적이라고 봅니다. 진짜 겸손과 놀림이 섞인 이런 태도를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신탁 이야기는 그의 사명을 설명해 줍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따르면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 신탁에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고, 무녀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가, 시인, 장인들에게 질문하며 이 대답을 시험했고, 그들이 중요한 것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지혜는 자기의 무지를 아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고, 자신의 질문을 신에 대한 봉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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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인간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석공 또는 조각가였고,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였습니다. 그는 성벽 바로 바깥의 알로페케 구(데모스)에 속했습니다. 젊을 때는 아버지의 일을 했을 수도 있지만, 평생 대부분 돈이 별로 없고 일정한 직업도 없이 소박하게 살며 친구들의 도움에 어느 정도 기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크산티페와 결혼해 람프로클레스, 소프로니스코스, 메넥세노스 세 아들을 두었고, 그가 죽을 때 둘은 아직 어린아이였습니다. 후대 작가들은 크산티페를 전설적인 악처로 만들었지만, 이런 모습은 대부분 플라톤이 아니라 한참 뒤에 쓰인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대 저자들은 그의 특이한 외모를 묘사합니다. 납작한 들창코, 튀어나온 눈, 두꺼운 입술이었지요. 플라톤의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그를 사티로스 조각상에 빗댑니다. 겉은 못생겼지만 안에는 신들의 황금 형상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겨울에도 맨발로 다닐 만큼 몸이 강인하고 절제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습니다. 술을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또 어릴 때부터 ‘다이모니온’, 곧 신적인 신호 또는 내면의 목소리를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목소리는 그가 하려던 일을 이따금 막았지만, 무엇을 하라고 시킨 적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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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아테네

소크라테스는 마라톤 전투 20년쯤 뒤, 힘과 부가 커지던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파르테논이 지어지는 것을 보았고,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페리클레스의 지도를 겪었습니다. 아테네는 직접 민주정이었습니다. 시민 남성들이 민회에서 투표하고, 추첨으로 뽑힌 대규모 배심원단에 앉았습니다.

이런 세계는 소피스트도 낳았습니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같은 떠돌이 교사들로, 민주정에서 성공하는 데 꼭 필요한 설득의 기술, 곧 수사학을 돈을 받고 가르쳤습니다. 많은 아테네인은 소크라테스를 이들과 한데 묶어 보았습니다. 그는 돈을 받지 않았고 덕을 가르칠 수 있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을 비판했는데도 말입니다.

그의 인생 후반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지배했습니다. 아테네는 기원전 430년 끔찍한 역병을 겪어 페리클레스를 잃었고, 뒤이어 참담한 패배를 거듭했습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항복했습니다. 스파르타를 등에 업은 과두정, 곧 ‘30인 참주’가 권력을 잡고 많은 시민을 죽였고, 기원전 403년에야 민주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정치적 배경은 소크라테스 이야기에서 중요합니다. 그와 대화한 사람 가운데 악명을 얻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를 버리고 스파르타로 넘어간 뛰어난 장군 알키비아데스, 그리고 30인 참주의 지도자였던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입니다. 이들과의 관계는 많은 아테네인이 소크라테스를 불신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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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군인이자 시민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세 전역에서 중장보병(호플리테스)으로 싸웠습니다. 북부 그리스의 포티다이아(기원전 432년부터)에서는 부상당한 알키비아데스의 목숨을 구했고, 델리온(기원전 424년)에서는 아테네군이 퇴각할 때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며, 암피폴리스(기원전 422년)에도 참전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의 용기와 인내를 칭송합니다.

그는 신적인 신호가 말린다며 정치에는 거의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당하다고 생각한 일에 두 번 맞섰습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 뒤, 아테네 민회는 난파한 선원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승리한 장군들을 한꺼번에 재판하려 했습니다. 그날 평의회 의장단으로 일하던 소크라테스는 일괄 재판이 불법이라며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장군들은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기원전 404년 30인 참주 치하에서 소크라테스와 다른 네 사람은 살라미스의 레온을 처형하고 재산을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그를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갔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나중에 정권이 곧 무너지지 않았다면 이 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 일화들은 법과 도시를 존중하면서도 어떤 다수나 통치자에 대한 복종보다 정의를 위에 두었던 사람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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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주요 사상

영혼을 돌보라. 소크라테스에게 영혼은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이며, 덕으로 더 나아지고 잘못으로 더 나빠집니다. 『변론』에서 그는 배심원들에게, 자신이 평생 아테네인들에게 돈과 평판과 명예보다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가장 좋은 상태에 더 마음을 쓰라고 권해 왔다고 말합니다.

덕은 앎이다. 소크라테스는 덕, 곧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일종의 앎, 참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앎이라고 본 듯합니다. 이와 이어진 것이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역설’입니다. 모든 사람은 좋은 것을 원하고 무지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뿐이므로 아무도 기꺼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용기·정의·지혜 같은 여러 덕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느니 당하는 편이 낫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와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불의를 저지르면 그 사람의 영혼이 해를 입으므로,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결코 불의로 갚아서는 안 된다고 논증합니다. 친구를 돕고 적을 해치는 것을 흔히 칭찬하던 문화에서 이는 놀라운 주장이었습니다.

검토하는 삶. 소크라테스는 누구나 다른 사람과 따져 보며 자기 믿음을 시험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변론』에서 그는 “검토하지 않는 삶은 사람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정의를 요구하고, 논증이 이끄는 곳까지 따라가고,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철학의 기본 습관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직접 알지는 못했지만 플라톤에게 배운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 두 가지를 그의 공으로 돌렸습니다. 개별 사례에서 일반 결론으로 나아가는 논증, 그리고 보편적 정의의 탐구입니다. 그는 또 소크라테스가 플라톤과 달리 이 보편자를 따로 존재하는 ‘형상(이데아)’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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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재판과 죽음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일흔 살 무렵일 때 멜레토스라는 젊은이가 유력한 민주파 정치가 아니토스, 그리고 리콘의 지지를 받아 그를 공소했습니다. 뒤에 전해진 고발 내용은 소크라테스가 도시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적 존재를 들여오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요구한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

재판은 500명 또는 501명쯤의 시민 배심원 앞에서 하루 만에 열렸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전하는 글은 둘이 남아 있는데,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쓴 것으로 모두 『변론(아폴로기아)』이라고 불립니다. ‘아폴로기아’는 그리스어로 ‘변론 연설’이라는 뜻입니다. 플라톤의 판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비를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고, 자신은 굼뜬 말을 깨우는 등에처럼 신이 아테네에 준 선물이라고 말하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철학을 멈추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는 약 280 대 220(또는 221)이라는 비교적 근소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아테네 재판에서는 피고가 다른 형벌을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처음에 자신은 올림픽 우승자처럼 시청사에서 공짜 식사를 대접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했고, 이어 플라톤과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30므나로 올린 적은 벌금을 제안했습니다. 배심원단은 사형을 택했는데, 전하는 바로는 유죄 판결 때보다 표 차이가 컸습니다.

처형은 약 한 달 미뤄졌습니다. 해마다 델로스섬으로 가는 신성한 배가 돌아오기 전에는 아무도 처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준비했지만,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거절합니다. 평생 그 아래에서 살아온 도시의 법과 맺은 약속을 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한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그는 친구들과 영혼의 불멸을 논한 뒤 담담히 독약을 마십니다. 『파이돈』은 그것을 그저 ‘약(파르마콘)’이라고 부르며, 흔히 독미나리(헴록)로 봅니다. 전하는 마지막 말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바치라고 크리톤에게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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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영향과 유산

그가 죽은 뒤 많은 추종자가 ‘소크라테스 대화(소크라티코이 로고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글을 썼습니다. 완전히 남은 것은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것뿐입니다. 기원전 387년 무렵 아카데메이아를 세운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의 주류 전통 맨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후대 그리스의 거의 모든 학파가 그를 자기편으로 내세웠습니다. 안티스테네스는 그의 강인함과 안락에 대한 무관심을 높이 샀고 뒷날 견유학파의 선구자로 여겨졌습니다. 키레네의 아리스티포스는 쾌락을 중심에 둔 전혀 다른 교훈을 끌어내 키레네학파를 세웠고, 에우클레이데스는 논리학의 메가라학파를 세웠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소크라테스를 참된 현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여겼습니다.

후대는 그를 거듭 새로 만들어 냈습니다.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그의 부당한 죽음을 예수의 죽음에 견주기도 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도덕적 지혜의 본보기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자유로운 사유의 순교자로 칭송했습니다. 19세기에 쇠렌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에 관한 학위 논문을 썼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를 지나친 합리주의의 상징으로 공격했습니다.

오늘날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은 법학 교육, 교실, 심리 상담에서 쓰이고, 소크라테스식 질문은 비판적 사고의 기본기로 가르쳐집니다. 소크라테스는 같은 시대에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고 제자들이 말을 전한 위대한 스승으로서 공자, 붓다와 함께 거론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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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소크라테스 문제’: 어느 소크라테스인가

소크라테스가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며, 그 사료들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이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합니다. 주요 증인은 아리스토파네스, 크세노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넷이고, 저마다 다른 인물을 보여 줍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소크라테스 생전인 기원전 423년 초연)은 그를 하늘을 연구하고 전통적인 신들을 부정하며 돈을 받고 옳지 않은 논변으로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우스꽝스러운 선생으로 그립니다. 자연철학자와 소피스트의 특징을 뒤섞은 풍자입니다. 플라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미지가 배심원들에게 편견을 심었다고 탓합니다. 군인이자 작가였던 크세노폰은 실용적이고 경건하며 관습적인 도덕 조언자, 곧 살림살이와 지도력에 관해 분별 있는 조언을 하는 인물을 보여 줍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가장 풍부하고 철학적이지만, 대화편마다 견해가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고, 후기 작품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가 아닌 플라톤의 것으로 돌린 형상 이론 같은 이론을 말합니다.

영향력 있는 해법 하나는 그레고리 블라스토스가 『소크라테스: 아이러니스트이자 도덕철학자(Socrates: Ironist and Moral Philosopher)』(1991)에서 내놓았습니다. 그는 『변론』, 『크리톤』, 『에우티프론』, 『라케스』, 『카르미데스』 같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은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중기와 후기 대화편은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담는다고 보았습니다. 대화편의 집필 순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에 기댄 이 접근은 수십 년 동안 영어권 학계를 지배했습니다.

지금은 대화편의 연대를 그렇게 확실히 정할 수 있는지, 플라톤의 어떤 글이 역사 기록을 의도했는지 의심하는 학자가 많습니다. 저자마다의 ‘소크라테스’를 문학적·철학적 창조물로 연구하는 쪽을 택하는 학자도 있고, 모든 사료를 비판적으로 활용해 적어도 그의 생애와 재판의 윤곽은 재구성하려는 학자도 있습니다. W. K. C. 거스리의 말처럼, 소크라테스 문제는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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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소크라테스는 정말 왜 유죄 판결을 받았나

역사가들은 재판의 진짜 이유를 두고 지금도 논쟁합니다. 공식 혐의는 종교적인 것이었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신들이 도시 전체를 지키거나 벌한다고 믿는 공동체에게 소크라테스의 신적 신호와 신들에 관한 전통적 이야기에 대한 그의 의문 제기는 실제로 위험해 보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추첨으로 관리를 뽑는 것이나 다수의 의견을 믿는 것 같은 민주정의 여러 면을 비판했고, 알키비아데스·크리티아스와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30인 참주가 무너진 뒤 기원전 403년에 맺은 사면 협정은 그 이전 행위에 대한 기소를 금지했습니다. 일부 역사가는 종교적 혐의가 부분적으로는 이 사면을 우회하는 수단이었다고 봅니다. 언론인 I. F. 스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The Trial of Socrates)』(1988)에서 소크라테스가 반민주주의자였다고 주장했는데, 대부분의 전문가가 받아들이지 않은 도발적인 주장이었지만 논쟁을 자극했습니다.

세 번째 견해는, 예컨대 토머스 브릭하우스와 니컬러스 스미스가 『재판정의 소크라테스(Socrates on Trial)』(1989)에서 옹호했듯이, 혐의를 적힌 그대로 읽어야 하며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도발이 아니라 혐의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재판에 참석했다고는 하지만 사후에 문학 작품으로 쓴 것이므로, 『변론』이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한 말을 얼마나 옮겼는지도 논쟁거리입니다.

죽음의 의학적 세부도 검토되었습니다. 『파이돈』에 묘사된 차분하고 점진적인 마비는 독미나리(Conium maculatum) 중독 증상과 비교되어 왔습니다. 묘사가 이상화되었다고 보는 의사도 있고, 이 식물과 들어맞는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떠했든, 플라톤의 서술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서양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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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논박(엘렌코스)
문답으로 상대의 믿음이 서로 맞는지 시험하는 소크라테스의 방법.
무지의 자각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사실은 모른다는 깨달음. 소크라테스에게는 지혜의 출발점이다.
영혼의 돌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재산이나 명성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좋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덕은 앎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을 아는 데 달려 있으며, 잘못은 무지에서 나온다는 견해.
불의로 갚지 말라
잘못은 저지르는 사람의 영혼을 해치므로, 불의를 당해도 불의로 갚아서는 안 된다.
검토하는 삶
이성과 대화로 끊임없이 시험하는 삶만이 사람에게 살 가치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무지를 내세우면서 질문으로 상대를 이끄는 태도. 진심이기도 하고 놀림이기도 하다.

기록

  1. 약 기원전 470년 —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태어난다(기원전 470/469년).
  2. 기원전 432년 — 포티다이아 포위전에 참전해 알키비아데스를 구한다(기원전 432년부터).
  3. 기원전 431년 —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기원전 431년).
  4. 기원전 424년 — 델리온 전투의 퇴각전에서 싸운다(기원전 424년).
  5. 기원전 423년 —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 무대에서 소크라테스를 풍자한다(기원전 423년).
  6. 기원전 422년 — 마지막 전역인 암피폴리스에 참전한다(기원전 422년).
  7. 기원전 406년 — 아르기누사이 해전 뒤 장군들에 대한 불법 일괄 재판에 반대한다(기원전 406년).
  8. 기원전 404년 — 아테네가 항복한다. 30인 참주 치하에서 살라미스의 레온 체포를 거부한다(기원전 404년).
  9. 기원전 403년 — 민주정이 회복되고 사면이 선포된다(기원전 403년).
  10. 기원전 399년 —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 뒤 처형된다(기원전 399년).
  11. 약 기원전 387년 — 플라톤이 아테네에 아카데메이아를 세운다(기원전 387년경).

용어 풀이

아고라
그리스 도시의 중앙 광장이자 시장.
소피스트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수사학 등을 돈을 받고 가르친 떠돌이 전문 교사.
아포리아
‘난관’. 답을 찾지 못한 채 막힌 상태로, 플라톤 초기 대화편의 많은 수가 이렇게 끝난다.
다이모니온
소크라테스의 ‘신적인 신호’. 특정 행동을 막는 내면의 목소리.
아레테
‘탁월함’ 또는 ‘덕’. 무엇이든 제 종류에서 좋게 만드는 성질.
프시케
영혼 또는 내면의 자아.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돌보라고 촉구했다.
아세베이아
‘불경’. 신들에게 죄를 범했다는 법적 혐의로, 소크라테스에게 적용되었다.
대화편
등장인물들의 대화로 쓴 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플라톤의 작품들이 대화편이다.
30인 참주
기원전 404~403년 아테네를 다스린 친스파르타 과두 정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전 또는 동시대에 주로 자연과 우주를 탐구한 그리스 사상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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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왜 아무것도 쓰지 않았나요?

확실히는 모릅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은 살아 있는 대화와 달리 되묻는 말에 답하거나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그가 책보다 대화를 중시했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나요?

정확히 그런 말은 아닙니다. 플라톤의 『변론』에서 그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뒤에 유명한 표어가 되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왜 그를 죽였나요?

공식적으로는 불경죄와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였습니다. 역사가들은 크리티아스·알키비아데스와의 관계에 대한 분노와 그의 민주정 비판도 이유로 듭니다.

탈옥할 수는 없었나요?

할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친구들이 탈옥을 준비했지만, 그는 도시의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문제’란 무엇인가요?

플라톤, 크세노폰,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사료들이 서로 달라서, 어떤 견해가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것인지 알기 어렵다는 문제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였나요?

많은 아테네인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돈을 받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으며 소피스트를 비판했습니다. 플라톤은 그를 소피스트의 반대편에 둡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었나요?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글에서 그는 신앙심이 깊습니다. 델포이 신탁을 따르고 제사를 지내며 신적인 신호를 말합니다. 다만 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전통적이라기보다 도덕적이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Debra Nails, Socrate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 Socrates.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3. Socrates. Wikipedia
  4. 소크라테스. 위키백과
  5. Trial of Socrates. Wikipedia
  6. Socratic problem. Wikipedia
  7. Plato, Apology (Greek text and English translation by H. N. Fowler).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8. Gregory Vlastos, Socrates: Ironist and Moral Philosoph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9. Thomas C. Brickhouse and Nicholas D. Smith, Socrates on Trial.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10. I. F. Stone, The Trial of Socrates. Little, Brown, 1988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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