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파르테논 신전

Παρθενών

기원전 447–438년 ·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한 문장으로

파르테논은 기원전 447년부터 432년 사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위에 아테나 여신을 위해 세운 거대한 대리석 신전으로, 고전기 그리스 건축과 조각의 본보기이자 길고 험난한 후대의 역사로도 유명합니다.

파르테논 신전
이미지: Steve Swayne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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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그리스의 도시 아테네 한가운데에는 아크로폴리스라는 높은 바위 언덕이 있어요. 그 꼭대기에 하얀 돌기둥이 줄지어 선 커다란 옛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파르테논이에요. 약 2,500년 전, 지혜의 여신이자 도시의 수호신인 아테나의 집으로 지었지요.

건물 안에는 금과 상아로 덮은, 4층 건물만큼 커다란 아테나 조각상이 서 있었어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작은 옛 모형과 기록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복제품을 만들었어요.

건축가들은 무척 영리했어요. 파르테논의 바닥은 완전히 평평하지 않고 가운데가 살짝 불룩해요. 기둥은 중간쯤이 약간 더 굵고, 아주 조금 안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이런 작은 속임수 덕분에 건물이 뻣뻣하거나 처져 보이지 않고, 곧고 튼튼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요.

건물 윗부분을 빙 둘러서는 돌에 새긴 그림들이 있었어요. 신들, 영웅들, 말들,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켄타우로스와의 싸움, 그리고 사람들의 긴 행렬이지요. 이 조각의 상당수는 지금 아테네와 런던의 박물관에 있는데,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두고 지금도 다툼이 있어요.

파르테논은 여러 번 새 삶을 살았어요. 신전이었다가 기독교 교회가 되었고, 그다음에는 이슬람 사원(모스크)이 되었어요. 300여 년 전 전쟁 중에 폭발로 크게 부서져서 지금은 지붕이 없어요. 오늘날 전문가들이 돌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고치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건립
본체 기원전 447~438년, 조각 장식은 기원전 432년 무렵 완성
장소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봉헌 대상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신 아테나)
설계·제작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예술 작업 전체를 감독
발주
페리클레스가 정치를 이끌던 아테네 민주정. 델로스 동맹 금고의 자금 일부를 사용
양식·규모
펜텔리콘 대리석으로 지은 도리스식 신전, 기둥 8×17개, 기단 약 69.5×30.9m
후대의 용도
기독교 교회(고대 말), 라틴 대성당(13세기), 모스크(오스만 시대). 1687년 폭발로 크게 파손
지위
유네스코 세계유산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일부(1987년 등재)

쉬움

파르테논이란 무엇인가

파르테논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내 위로 솟은 바위 성채 아크로폴리스에 세운 신전입니다. 아테네의 수호 여신 아테나, 그 가운데에서도 ‘처녀’를 뜻하는 파르테노스라는 모습의 아테나에게 바쳐졌고, 이 칭호에서 건물 이름이 나왔습니다.

신전이 지어진 때는 아테네 역사에서 가장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로, 그리스가 기원전 490년과 기원전 480~479년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지 몇십 년 뒤였습니다. 페르시아군은 기원전 480년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웠는데, 같은 자리에서 짓고 있던 이전의 대리석 신전도 이때 불탔습니다. 새 건물은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추진한 대규모 재건 사업의 일부였습니다.

파르테논은 흔히 고대 세계의 가장 위대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수백 년 동안 유럽과 그 밖의 건축가들이 그 기둥과 비례를 본떴고, 파르테논은 그리스, 고대 그리스 문명,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는 민주주의 자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87년 아크로폴리스의 다른 기념물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습니다.

[1][3][2]

쉬움

건물을 “읽는” 법

밖에서 보면 파르테논은 네 면 모두 기둥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입니다. 양 끝 정면에 8개씩, 긴 옆면에 17개씩(모서리 기둥은 두 번 셈) 모두 46개의 바깥 기둥이 서 있고, 높이는 각각 약 10.4m입니다. 기둥은 도리스 양식으로, 받침 없이 세로 홈을 판 굵은 기둥 몸에 방석 모양의 단순한 주두(柱頭)를 얹었습니다.

기둥 고리 안쪽에는 벽으로 둘러싼 건물, 곧 켈라(나오스)가 있었습니다. 켈라에는 서로 통하지 않는 방 두 개가 있었습니다. 동쪽의 큰 방에는 거대한 아테나 조각상이 있었고, 세 면을 두른 2층 열주가 조각상을 감쌌습니다. 서쪽의 작은 방에는 더 가느다란 이오니아식으로 보이는 높은 기둥 네 개가 있었고, 보물을 보관하는 데 쓰였던 듯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은 원래 이 방만 가리켰을 수도 있습니다.

조각은 세 구역에 배치되었습니다. 바깥 기둥 위 높은 곳에는 메토프라는 네모난 판 92개를 높은 부조로 새겼습니다. 양 끝의 세모난 박공, 곧 페디먼트에는 커다란 환조 조각상들이 섰습니다. 그리고 바깥 기둥 뒤편 켈라 벽 윗부분에는 길이 약 160m의 띠 조각, 프리즈가 이어졌습니다. 신전을 한 바퀴 도는 사람은 높이 있는 메토프와 페디먼트를 올려다보고, 기둥 사이로 프리즈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건물 곳곳은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색의 흔적과 청동 고삐·무기 같은 금속 부품을 끼웠던 구멍을 보면, 조각들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순백색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

쉬움

돌에 새긴 이야기

정문 쪽인 동쪽 페디먼트에는 아테나의 탄생이 새겨졌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아테나는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 무장한 채 뛰어나왔습니다.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는 사람과 마주하는 서쪽 페디먼트에는 아티카 땅을 두고 아테나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겨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포세이돈은 짠 샘물을,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선물했고, 아테나가 이겼습니다.

메토프에는 네 가지 큰 싸움이 새겨졌습니다. 동쪽은 신들과 거인들, 서쪽은 그리스인과 아마존족, 남쪽은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 북쪽은 트로이의 함락입니다. 모두 질서와 문명이 혼돈을 이기는 이야기이며, 많은 학자는 여기서 얼마 전 페르시아에 거둔 승리의 그림자를 봅니다.

프리즈에는 기마병, 전차, 노인, 악사, 그릇을 든 젊은 여성, 제물로 끌려가는 짐승들이 이루는 큰 행렬과, 동쪽 입구 위에 앉아 있는 신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이것이 아테나를 기리는 도시 최대의 축제 판아테나이아의 행렬이라는 것입니다. 이 축제 때 아테나의 옛 신상에 새 옷(페플로스)을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신과 영웅에게만 허락된 신전 장식에 평범한 시민들을 새겼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입니다.

가장 위대한 작품은 기원전 438년 봉헌된 페이디아스의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이었습니다. 높이 약 11.5m로, 나무 뼈대에 피부는 상아로, 옷과 갑옷은 금으로 덮었습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 금의 무게가 40탈란톤이었고 떼어 낼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조각상은 고대 말에 사라졌고, 우리는 기록과 로마 시대의 작은 복제품, 동전을 통해 그 모습을 압니다.

[1][4][6]

중급

건축 기술과 “보정”

신전은 아테네 북동쪽 약 16km의 펜텔리콘산에서 캔 대리석만으로 지었습니다. 채석장에서 자른 돌덩이를 썰매와 수레로 산 아래로 끌어내리고, 나무 기중기와 밧줄로 들어 올려 쌓았습니다. 기둥은 원통형 돌(드럼)을 쌓아 만들고 가운데를 나무 촉으로 이었으며, 벽돌은 모르타르 없이 납을 부어 고정한 쇠 꺾쇠로 서로 묶었습니다. 기둥의 세로 홈은 조립한 뒤에 마지막으로 팠습니다.

건축가들 사이에서 파르테논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시각 보정입니다. 이 건물에는 진짜로 곧은 선이 거의 없습니다. 기단(스틸로베이트)은 각 변의 가운데로 갈수록 살짝 솟아 긴 변에서 약 10cm 높아집니다. 기둥에는 엔타시스, 곧 윤곽이 살짝 부푼 곡선이 있고, 조금씩 안쪽으로 기울어 있으며, 모서리 기둥은 다른 기둥보다 약간 굵습니다. 기둥 사이 간격도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조정 때문에 모든 돌을 하나하나 따로 다듬어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비트루비우스 같은 고대 저자들은 길고 곧은 수평선이 가운데가 처져 보이는 것 같은 착시를 바로잡으려 했다고 보았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건물에 긴장감과 생동감을 주려 했다거나, 배수를 도왔다는 설명도 내놓습니다. 목적이 무엇이든, 이는 석공들의 놀라운 정밀함을 보여 줍니다. 어떤 이음매는 오차가 1mm에도 훨씬 못 미칩니다.

건물에는 비례 체계도 쓰였습니다. 많은 학자가 기단의 너비와 길이의 관계처럼 주요 치수 여러 곳에 4:9 비율이 나타난다고 지적합니다. 건축가들이 하나의 비율을 얼마나 의식적으로 설계했는지, 아니면 현대의 측정이 만들어 낸 것인지는 논쟁 중입니다.

[1][7]

중급

페리클레스, 제국, 그리고 돈

페르시아 전쟁 뒤 아테네는 기원전 478/477년 페르시아와의 싸움을 이어 가려고 결성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동맹, 델로스 동맹을 이끌었습니다. 회원국들은 배나 돈을 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테네는 이 동맹을 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회원국은 탈퇴할 수 없었고, 기원전 454년에는 동맹 금고가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졌습니다.

아테네의 지도적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민회를 설득해 이 돈의 일부와 아테네 자체의 재원으로 페르시아가 파괴한 신전들을 다시 짓게 했습니다. 파르테논에 이어 아크로폴리스의 기념비적 관문(프로필라이아), 작은 아테나 니케 신전, 에레크테이온이 세워졌습니다. 훨씬 뒤에 쓴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의 반대파가 아테네가 동맹국의 돈으로 보석을 사서 허영심 많은 여자처럼 치장한다고 불평했다고 전합니다.

건축 감독관들이 해마다 남긴 회계 기록 비문이 조각난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를 보면 공사는 선출된 감독관을 둔 민주정이 조직했고, 시민, 거류 외국인(메토이코이), 노예 등 많은 노동자가 일당을 받았습니다. 파르테논은 종교적 헌신인 동시에 아테네의 힘과 부와 자신감을 드러낸 선언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훗날 민주주의와 자유의 상징이 된 건물이, 동맹국의 자유를 빼앗은 제국의 돈으로 일부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1][7][8]

중급

신전인가 보물고인가: 종교적 의미

그리스 신전은 신의 집이지 신자들이 모이는 예배당이 아니었습니다. 예배, 특히 제사는 바깥의 제단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파르테논에는 자체 제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신성한 아테나 상도 페이디아스의 금·상아 조각상이 아니라, 옛 신전과 뒷날 에레크테이온에 모셔진 올리브나무로 만든 아테나 폴리아스(‘도시의’ 아테나) 상이었습니다. 판아테나이아 축제 때 새 옷을 받은 것도 이 옛 신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파르테논이 실제로 예배하는 신전이라기보다 기념비적 봉헌물이자 국가 보물고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아테나 상의 금은 재정 비축금 구실을 했고, 건물 안에 보관된 귀중한 봉헌물 목록이 돌에 새겨졌습니다. 반대편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인이 종교, 시민의 자부심, 부를 오늘날처럼 나누지 않았으며 파르테논은 온전히 신성한 건물이었다고 답합니다.

어느 쪽이든 이 건물은 아테네와 수호 여신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했습니다. 페디먼트는 아테나의 탄생과 포세이돈을 이긴 이야기를, 프리즈는 통상적 해석에 따르면 여신을 기리는 시민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전과 도시와 여신이 하나로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1][8]

중급

교회, 모스크, 그리고 폐허

파르테논은 약 900년 동안 신전으로 남았습니다. 고대 말 어느 시점, 아마도 267년 헤룰리족의 침입 때나 그 이후에 불이 나 손상되었다가 수리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하고 이교 제사가 금지된 뒤, 건물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학자들은 그 시기를 5세기 후반이나 6세기로 봅니다. 동쪽 끝에 제단 공간(앱스)이 덧붙여졌고, 일부 조각, 특히 메토프가 일부러 훼손되었습니다.

제4차 십자군(1204년) 뒤 아테네는 라틴(서유럽) 통치자들의 손에 들어갔고, 파르테논은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튀르크는 1458년 아테네를 차지했고, 15세기 후반에 건물은 모스크로 바뀌었습니다. 라틴 시대에 세운 탑을 높여 미너렛(첨탑)으로 삼았습니다. 17세기에 이곳을 본 여행자들은 건물이 대체로 온전하다고 적었습니다.

재앙은 1687년에 닥쳤습니다.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이 싸우던 중, 베네치아의 지휘관 프란체스코 모로시니가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했습니다. 오스만 수비대는 파르테논을 화약고로 쓰고 있었습니다. 1687년 9월 26일 베네치아군의 박격포탄이 건물에 맞아 화약이 폭발했고, 약 300명이 죽었으며, 옆면 열주 상당 부분, 켈라의 벽, 지붕 등 신전의 가운데가 날아갔습니다.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한 모로시니는 서쪽 페디먼트의 조각을 떼어 가려 했지만, 일부가 떨어져 산산조각 났습니다.

18세기에는 폐허 안에 작은 모스크가 지어졌습니다. 1820년대 그리스 독립 전쟁 때 아크로폴리스가 여러 차례 포위되면서 파르테논은 또 피해를 입었습니다.

[1][2]

중급

런던에 있는 파르테논 조각

1801년부터 1812년 사이,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 대사였던 제7대 엘긴 백작 토머스 브루스의 대리인들이 파르테논에 남아 있던 조각의 약 절반, 곧 프리즈의 큰 부분과 메토프 15점, 페디먼트 조각상 여럿을 떼어 영국으로 실어 갔습니다. 엘긴은 오스만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1816년 영국 의회가 이 소장품을 사들였고, 이후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왔습니다. 흔히 ‘엘긴 마블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는 수십 년 동안 반환을 요구해 왔고, 특히 1980년대 초 그리스 문화부 장관 멜리나 메르쿠리가 시작한 운동 이후 그 요구가 널리 알려졌습니다. 반환을 지지하는 쪽은 조각이 외국 점령 세력 아래에서 반출되었고, 엘긴이 받은 허가의 합법성과 의미가 의심스러우며, 프리즈와 페디먼트는 한 기념물의 부분으로서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영박물관은 반출이 당시 합법적이었고, 세계 문화의 맥락 속에서 무료로 수백만 명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영국 법이 박물관 소장품의 양도를 제한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습니다.

그리스는 2009년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에 새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열었습니다. 신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맨 위층 파르테논 전시실에는 아테네에 남은 프리즈를 원래 순서대로 전시하고, 런던 등지에 있는 부분은 석고 복제품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다른 조각들은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 분쟁은 문화재, 식민지 시대의 수집, ‘보편 박물관’의 역할을 둘러싼 더 넓은 논쟁의 대표 사례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도 양측의 논의가 이어졌지만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5][6][1]

심화

복원과 보존

그리스 독립 이후 고고학자들은 고전기 기념물을 드러내려고 파르테논 안의 작은 모스크를 비롯해 아크로폴리스의 후대 건물 대부분을 걷어 냈습니다. 이 ‘정화’에는 그리스 유산에서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19세기의 생각이 반영되었습니다. 비잔티움·프랑크·오스만 시대의 많은 층위가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고, 역사가들은 지금 이를 안타까워합니다.

대략 1898년부터 1933년 사이 기술자 니콜라오스 발라노스가 파르테논 일부를 복원해 북쪽 열주의 쓰러진 기둥들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는 쇠 꺾쇠와 보강재를 썼고, 돌을 엉뚱한 자리에 놓는 일이 잦았습니다. 쇠는 나중에 녹슬며 부풀어 대리석을 쪼개 심각한 새 손상을 낳았습니다. 20세기 아테네의 대기 오염도 대리석 표면을 갉아먹었습니다.

1975년부터 아크로폴리스 기념물 보존 위원회와 뒤이은 전담 복원 기관이 긴 복원 사업을 이어 왔습니다. 건축가와 기술자들은 예전 복원을 해체하고, 녹스는 쇠를 티타늄으로 바꾸고, 돌을 제자리로 돌려놓았으며, 안정에 꼭 필요한 곳에만 새 펜텔리콘 대리석을 깎아 맞춰 넣되 옛 돌과 구별되게 했습니다. 건물에 남아 있던 원래 조각들은 박물관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복제품을 달았습니다.

이 사업은 학술적 엄밀함과 되돌릴 수 있는 개입이라는 원칙으로 널리 칭찬받았지만, 논쟁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얼마나 다시 쌓아야 하는가, 방문객은 폐허를 보아야 하는가 반쯤 완성된 신전을 보아야 하는가, 해마다 수백만 명이 찾는 관광과 유적 보호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들입니다.

[1][3][7]

심화

학계의 논쟁

프리즈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18세기 이래 판아테나이아 해석이 지배적이었지만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행렬에는 축제에서 알려진 요소 일부가 빠져 있고, 입구 위 중앙 장면, 곧 어른과 아이가 접힌 천을 다루는 장면은 해석이 모호합니다. 조앤 브레턴 코널리는 『파르테논의 수수께끼(The Parthenon Enigma)』(2014)에서 프리즈가 동시대의 축제가 아니라, 아테네를 구하려고 딸을 제물로 바치려는 신화 속 왕 에레크테우스의 이야기, 곧 건국 신화를 보여 준다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신화와 시민 의례가 어떻게 결합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했습니다.

건물은 얼마나 정치적이었나? 파르테논을 페리클레스의 선전물이나 민주주의의 기념물로 읽는 해석에는 현대 정치가 스며 있습니다. 종교적 기능을 강조하는 역사가도, 제국의 자금과 메시지를 강조하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건물 어디에도 ‘민주주의’라는 말은 없고, 아테네인 자신이 조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고대 사료는 비교적 적게 말합니다.

페이디아스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플루타르코스는 페이디아스가 페리클레스의 모든 건축 사업을 감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각을 그가 얼마나 직접 설계했고, 양식이 서로 다른 조각가 집단이 얼마나 맡았는지는 논쟁 중입니다. 메토프들 사이의 양식 차이는 여러 사람의 손을 짐작하게 합니다. 페이디아스는 뒷날 아테네에서 공금 횡령 혐의로 고발되었지만, 재판의 경위와 시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보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현대 복원팀의 측정으로 곡률과 기울기에 관한 매우 정밀한 자료가 얻어졌고, 먹줄 표시와 시공 기법도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건축가들이 하나의 이론 체계를 가졌는지, 현장에서 시행착오로 조정했는지는 아직 논의 중입니다.

[1][9][7][8]

핵심 개념

도리스 양식
바깥 열주에 쓰인 그리스 건축의 굳건한 양식. 받침 없는 세로 홈 기둥과 단순한 주두가 특징이다.
시각 보정
솟아오른 기단과 부푼 기둥처럼 건물이 조화롭게 보이도록 일부러 넣은 곡선과 기울기.
조각 프로그램
페디먼트·메토프·프리즈를 하나의 계획으로 묶어 아테나와 혼돈에 대한 질서의 승리를 기린 이미지 체계.
페리클레스의 건축 사업
페르시아가 파괴한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한 사업. 일부는 동맹국의 공납금으로 지었다.
역사의 층위
신전·교회·대성당·모스크·폐허로 이어진 각 시기가 흔적을 남기고 오늘 남은 모습을 만들었다.
문화재 반환 논쟁
엘긴이 반출한 조각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는 박물관과 반환을 둘러싼 현대 논쟁의 대표 사례다.
되돌릴 수 있는 복원
현대 보존은 기록되고 제거 가능한 개입으로, 원형을 왜곡하지 않고 고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록

  1. 기원전 480년 — 페르시아군이 아크로폴리스와 그 자리에서 짓던 이전 신전을 불태운다(기원전 480년).
  2. 기원전 447년 — 파르테논 공사가 시작된다(기원전 447년).
  3. 기원전 438년 —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이 봉헌된다(기원전 438년).
  4. 기원전 432년 — 페디먼트 조각이 완성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무렵이다(기원전 432년).
  5. 약 500년 — 파르테논이 성모 마리아 교회로 바뀐다(5세기 후반 또는 6세기).
  6. 1458년 — 오스만 제국이 아테네를 차지하고, 15세기 후반 파르테논이 모스크로 바뀐다.
  7. 1687년 — 베네치아군의 포탄이 안에 쌓인 오스만군 화약에 불을 붙여 건물이 크게 부서진다(9월 26일).
  8. 1801년 — 엘긴의 대리인들이 조각을 떼어 내기 시작한다(1812년까지).
  9. 1816년 — 영국 의회가 엘긴 소장품을 사들여 대영박물관에 둔다.
  10. 1975년 — 현대의 아크로폴리스 보존·복원 사업이 시작된다.
  11. 1987년 — 아테네 아크로폴리스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다.
  12. 2009년 — 아테네에 새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 문을 연다.

용어 풀이

아크로폴리스
‘높은 도시’라는 뜻의 요새화된 언덕. 아테네에서는 아테나의 신성한 언덕을 가리킨다.
켈라(나오스)
신상을 모신 신전의 안쪽 방.
열주
지붕이나 들보를 받치는 기둥의 줄.
페디먼트
신전 양 끝의 세모난 박공. 흔히 조각으로 채웠다.
메토프
도리스식 신전 기둥 위, 세로 홈이 파인 돌(트리글리프) 사이의 네모난 판. 흔히 부조를 새겼다.
프리즈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띠 모양의 부조 조각.
엔타시스
기둥 윤곽이 살짝 부푼 곡선. 우리 전통 건축의 배흘림과 비슷하다.
크리셀레판틴
금(크리소스)과 상아(엘레파스)로 만든 조각 기법.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이 대표적이다.
델로스 동맹
기원전 478년 이후 아테네가 이끈 그리스 도시국가 동맹. 뒤에 아테네의 제국이 되었다.
판아테나이아
행렬과 새 옷 봉헌이 있었던 아테네 최대의 아테나 축제.
펜텔리콘 대리석
아테네 근처 펜텔리콘산에서 나는 고운 흰 대리석. 세월이 지나면 황금빛을 띤다.

묻고 답하기

파르테논에는 왜 지붕이 없나요?

1687년의 폭발 때문입니다. 오스만 수비대가 안에 쌓아 둔 화약에 베네치아군 포탄이 맞아 건물 가운데가 날아갔습니다.

파르테논은 원래 하얀색이었나요?

아닙니다. 조각과 장식 일부는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금속 장식도 달려 있었습니다. 세월과 비바람에 칠이 대부분 벗겨졌습니다.

거대한 아테나 조각상은 어디 있나요?

사라졌습니다. 고대 말에 없어졌고, 옛 기록과 로마 시대의 작은 복제품으로 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조각 일부가 런던에 있나요?

엘긴 경의 대리인들이 1801~1812년에 떼어 갔고, 1816년 대영박물관이 사들였습니다. 그리스는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대영박물관은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파르테논에 정말 곧은 선이 없나요?

거의 없습니다. 건물이 균형 있어 보이도록 기단은 위로 휘고, 기둥은 부풀고 안쪽으로 기울며, 모서리 기둥은 더 굵습니다.

파르테논은 신전이었나요, 보물고였나요?

양쪽 모두 지지자가 있습니다. 자체 제단이 없고 보물을 보관했지만, 아테나에게 바쳐졌고 그 신상을 모셨습니다. 많은 학자는 이런 구분이 너무 현대적이라고 봅니다.

공사비는 누가 냈나요?

아테네 국가가 자체 수입과 델로스 동맹 회원국의 공납금을 썼습니다. 당시에도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Parthenon. Wikipedia
  2. 파르테논 신전. 위키백과
  3. Acropolis, Athens.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4. Athena Parthenos. Wikipedia
  5. Elgin Marbles. Wikipedia
  6. Acropolis Museum. Acropolis Museum, Athens
  7. Jenifer Neils (ed.), The Parthenon: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8. Mary Beard, The Parthenon. Profile Books, 2002
  9. Joan Breton Connelly, The Parthenon Enigma. Alfred A. Knopf, 2014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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