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묵자

墨子 (묵적 墨翟)

약 기원전 470–391년 · 송나라 (상추 부근)

한 문장으로

묵자(기원전 470년경~391년경)는 자기 가족이나 나라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두루 아껴야 한다고 가르치고, 침략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제자들에게 공격받는 성을 지키는 법을 훈련시킨 고대 중국의 사상가입니다.

묵자
이미지: Vjacheslav Rublevskiy · CC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묵자는 약 2,400년 전 중국에 살았어요.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거의 같은 시대예요. 그때 중국은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자주 서로 싸웠어요. 묵자는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왜 훔치고, 다투고, 전쟁을 할까? 그의 대답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 자기 가족, 자기 나라만 아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것을 가르쳤어요. 남의 가족을 내 가족처럼, 남의 나라를 내 나라처럼 아끼라는 것이지요. 모두가 그렇게 하면 아무도 남을 공격하지 않고 온 세상이 더 좋아질 거라고 했어요.

묵자는 남의 나라를 빼앗는 전쟁을 몹시 싫어했어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라면, 전쟁에서 수천 명을 죽이는 것은 왕들이 아무리 영광스럽다고 해도 훨씬 큰 죄라고 했어요. 하지만 공격해 오는 적 앞에서 손 놓고 있지는 않았어요. 묵자와 제자들은 성벽, 사다리, 기계, 영리한 작전으로 성을 지키는 전문가가 되었어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공수반이라는 뛰어난 발명가가 강한 나라 초나라를 위해 거대한 공성용 사다리를 만들어 작은 송나라를 치려고 했어요. 묵자는 열흘 밤낮을 걸어 초나라에 가서, 허리띠로 성벽을 만들고 작은 나뭇조각을 기계 삼아 공수반과 전쟁 놀이를 했어요. 공수반이 어떤 공격을 해도 묵자는 다 막아 냈어요. 결국 초나라 왕은 공격을 포기했어요.

묵자는 또 백성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데 통치자가 화려한 장례식과 거창한 음악 공연에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지도자는 집안이 아니라 착하고 능력 있는지를 보고 뽑아야 한다고도 했지요. 제자들은 그의 생각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 책의 이름도 『묵자』예요.

한눈에 보기

생몰
기원전 470년경 ~ 391년경(추정치이며, 480~390년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지역
전국 시대 중국. 노나라·송나라와 관련된다(오늘날 산둥성·허난성)
이름
묵적(墨翟). ‘묵자’는 ‘묵 선생’이라는 뜻
학파
제자백가의 대표 학파 가운데 하나인 묵가(墨家)의 창시자
핵심 가르침
겸애(兼愛), 비공(非攻), 상현(尚賢), 절용(節用) 등
문헌
제자들이 엮은 『묵자』. 한나라 목록에는 71편, 현재 53편이 전한다
그 밖의 업적
성곽 방어술, 후기 묵가의 「묵경」에 담긴 논리학·광학·기하학·역학
동시대 인물
공자 이후, 맹자 이전. 대략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

쉬움

묵자는 누구인가

묵자는 이름이 묵적인 기원전 5세기 중국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옛 주나라가 쪼개져 서로 다투는 여러 나라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전국 시대 초기에 살았습니다. 고통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지적 창조력이 넘친 시대로, 뒷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라 불렸습니다.

그가 세운 묵가는 약 두 세기 동안 유가와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이름난 두 학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후대 문헌은 대표적인 두 경쟁 사상으로 ‘유묵(儒墨)’을 나란히 언급하곤 했습니다.

묵자는 세 가지 생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아껴야 한다는 것, 침략 전쟁은 잘못이라는 것, 그리고 정치는 통치자의 사치가 아니라 백성의 이익을 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자와 그 제자들은 거의 규율 있는 결사처럼 조직되었고, 작은 나라들의 방어를 도우며 믿음을 실천했다는 점에서도 남달랐습니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 묵가는 쇠퇴했고, 거의 2,000년 동안 잊히다시피 했습니다. 18~19세기 학자들이 다시 발견했고, 지금은 중국 사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전통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3][4][6]

쉬움

모두를 아끼기: 겸애

묵가의 가장 유명한 가르침은 겸애(兼愛)입니다. ‘겸’은 ‘아울러, 모두 포함하여’, ‘애’는 ‘사랑’ 또는 ‘아낌’을 뜻합니다. 흔히 ‘보편적 사랑’으로 옮기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는 ‘포괄적 배려’나 ‘차별 없는 배려’ 같은 번역을 선호합니다. 묵자가 말한 것은 주로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안녕에 마음을 쓰고 그들에게 이롭게 행동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묵자는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세상의 혼란은 어디서 오는가? 그의 답은 ‘별(別)’, 곧 차별에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은 제 집만 아껴 남의 집에서 훔치고, 대부는 제 가문만 아껴 남의 가문을 치고, 제후는 제 나라만 아껴 남의 나라를 침략합니다. 해결책은 차별을 ‘겸’으로 바꾸는 것, 곧 남의 집을 내 집처럼, 남의 나라를 내 나라처럼 보는 것입니다.

비판자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묵자는 실제 예로 답했습니다. 먼 길을 떠나며 가족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면, 제 가족만 아끼는 친구와 남의 가족도 제 가족처럼 아끼는 친구 가운데 누구를 고르겠는가? 겸애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모두 겸애하는 친구를 고를 것이라고 그는 논증했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한 우 임금 같은 옛 성왕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묵가는 자기 부모를 아끼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겸애야말로 자기 부모에게도 가장 이로운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내가 남의 부모를 아끼면 남도 내 부모를 아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1][3][7]

쉬움

전쟁에 반대하되, 지킬 준비는 하라

묵가의 두 번째 큰 가르침은 비공(非攻), 곧 ‘공격을 그르다고 함’입니다. 묵자는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누군가 남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훔치면 모두 잘못이라고 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면 모두 범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후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 수천 명을 죽이고 땅을 빼앗으면 사람들은 의롭다고 칭송하고 역사에 기록합니다. 묵자는 이것이 검은 것을 조금 보면 검다 하고 많이 보면 희다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전쟁이 침략한 쪽에도 손해라고 논증했습니다. 곡식, 무기, 말, 사람의 목숨을 낭비하고, 농부를 밭에서 끌어내며, 과부와 고아를 남깁니다. 얻는 것은 잃는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다는 것입니다.

묵가는 그저 굴복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방어전의 전문가가 되었고, 『묵자』의 여러 편은 성벽을 쌓고, 방어용 기계를 만들고, 땅굴을 파고, 주민을 조직하고, 공성 기술에 맞서는 법을 설명합니다. 공격이 늘 실패한다면 침략은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공수(公輸)」편에 나옵니다. 기술자 공수반이 초나라를 위해 송나라를 칠 ‘운제(雲梯)’라는 공성 사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묵자는 열흘 밤낮을 걸어 초나라 도읍에 가서 공수반과 왕을 논박한 뒤, 허리띠로 성을 삼고 작은 나뭇조각을 기계 삼아 모의 전투를 벌였습니다. 공수반은 아홉 번 공격했고 묵자는 아홉 번 막아 냈습니다. 묵자는 제자 금활리(禽滑釐)와 묵가 300명이 이미 송나라 성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고, 왕은 공격을 거두었습니다. 이야기는 잔잔한 아이러니로 끝납니다. 돌아오는 길에 송나라를 지나던 묵자가 비를 만났는데, 그가 방금 구한 도시의 문지기들이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4][7]

중급

생애와 시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묵자의 생애에 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은 매우 적습니다. 한나라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그의 전기를 따로 쓰지 않고, 「맹자순경열전」 끝에 짧은 한 문장만 덧붙였습니다. 묵적은 아마 송나라의 대부로 방어에 뛰어났고 절용을 주장했으며, 공자와 같은 시대였다고도 하고 그보다 뒤였다고도 한다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대체로 그를 공자(기원전 479년 사망) 이후, 맹자(기원전 372년경 출생) 이전인 기원전 5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의 인물로 봅니다.

고향도 논쟁거리입니다. 많은 학자는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 출신으로 보고, 도읍이 오늘날 상추(商丘) 근처였던 송나라와 연결하는 학자도 있으며, 그가 송나라에서 벼슬했을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다른 나라를 드는 소수설도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붙은 책에는 그가 제, 초, 위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군주에게 조언하고 제자들을 관직에 보내는 모습이 나옵니다.

한나라 때의 『회남자』에 따르면 묵자는 처음에 유가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예법이 너무 번거롭고 오랜 상례가 낭비라고 여겨 그것을 버렸습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묵자』의 상당 부분은 유가와의 논쟁 속에서 쓰였습니다.

이름부터가 수수께끼입니다. ‘묵(墨)’은 ‘먹’을 뜻하며, 죄인의 얼굴에 먹물로 문신을 새기는 형벌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묵’이 성이 아니라 죄수 출신 노동자나 장인 집단을 부르는 별명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그냥 성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목수, 수레 장인, 건축가에 빗댄 비유와 기술 지식이 책에 많이 나오기 때문에, 많은 학자는 묵자가 귀족이 아니라 장인 계층 출신이었으리라 봅니다.

[1][4][6][3]

중급

열 가지 핵심 주장

『묵자』의 중심부는 열 가지 주장을 중심으로 짜여 있고, 각 주장은 원래 세 편의 글로 다루어졌습니다. 흔히 다섯 쌍으로 묶습니다. 첫째, 상현(尚賢)과 상동(尚同)입니다. 관리는 농부나 장인이라도 능력과 덕을 보고 뽑아야 하며, 모든 사람은 훌륭한 윗사람의 도덕 기준을 위로 천자까지, 궁극적으로는 하늘까지 따라, 사회가 하나의 규범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으로,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셋째, 절용(節用)과 절장(節葬)입니다. 통치자는 백성의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안전에 쓸모 있는 것에만 돈을 써야 합니다. 묵가는 유가가 옹호한 성대한 장례와 3년상을 공격하며, 이것이 집안을 가난하게 하고 사람들이 일하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넷째, 천지(天志)와 명귀(明鬼)입니다. 하늘은 의로움을 바라고 사람들이 서로 이롭게 하기를 원하며, 그 뜻을 따르는 이에게 상을, 어기는 이에게 벌을 줍니다. 귀신도 존재하며 선에 상을 주고 악을 벌합니다. 묵가는 이로써 윤리에 확고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부여했습니다.

다섯째, 비악(非樂)과 비명(非命)입니다. 묵자는 음악이 즐겁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종과 악단을 동원해 가난한 이들의 자원을 빼앗는 값비싼 궁정 공연을 비판했습니다. 또 성공과 실패, 부와 가난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는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믿음은 사람을 게으르게 하고 나쁜 정치를 변명해 준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1][3][7]

중급

묵가의 추론: 기준과 이익

묵가의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목수의 컴퍼스와 곱자처럼 분명한 기준에 비추어 주장을 시험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주장을 판단하는 ‘삼표(三表)’, 또는 ‘삼법(三法)’을 내놓았습니다. 뿌리(本), 곧 옛 성왕의 행적과 맞는가? 근원(原), 곧 백성이 실제로 보고 들은 것과 맞는가? 쓰임(用), 곧 실행하면 나라와 백성에게 이로운가?

가장 중요한 시험은 이익(利)이었습니다. 묵가는 행동과 관습과 정책을 천하의 이익을 늘리고 해를 없애는지, 구체적으로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인구를 늘리며 사회를 다스려지게 하는지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현대 학자가 묵가 윤리를 서양 철학의 결과주의나 공리주의에 견줍니다. 다만 묵가는 개인의 쾌락보다 공동체 전체의 복리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이 비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묵가는 하늘도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하늘은 치우침 없이 모든 사람을 아끼고 먹여 살리므로, 사람의 행동에 가장 좋은 기준(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묵가 사상은 종교적 믿음과 실용적이고 공공을 생각하는 윤리를 결합했습니다.

글쓰기 방식도 이를 반영합니다. 중심 편들은 문체의 아름다움보다 비유와 예시에 기댄, 소박하고 반복적이며 논쟁적인 글입니다. 옛 비평가들은 지루하다고 여겼지만, 현대 독자들은 흔히 이를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논증문으로 봅니다.

[1][3]

중급

묵가 공동체

묵가는 사상의 학파일 뿐 아니라 조직된 공동체였습니다. 구성원들은 검소하게 살고, 거친 옷을 입고, 열심히 일하고, ‘거자(鉅子)’라고 불린 지도자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묵가는 여러 나라에서 관리나 방어 전문가로 일했고, 수입 일부를 집단과 나누어야 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 엮인 『여씨춘추』에는 그들의 규율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묵가 거자는 아들이 사람을 죽이자, 왕이 사면을 제안했는데도 묵가의 법에 따라 아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또 다른 거자와 많은 추종자는 지키기로 약속한 성을 방어하다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이상화되었을 수 있지만, 묵가가 어떻게 기억되었는지 보여 줍니다.

묵자가 죽은 뒤 운동은 갈라졌습니다. 기원전 3세기 법가 사상가 한비자는 묵가가 세 파로 나뉘어 저마다 묵자의 참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고 적었습니다. 다른 문헌들도 여러 지역의 묵가가 교리를 두고 다투며 서로를 이단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1][3][5]

중급

책 『묵자』

『묵자』는 묵자가 직접 쓴 책이 아닙니다. 기원전 5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여러 세대의 제자들이 쓴 글을 모은 것입니다. 한나라 황실 도서 목록(『한서』 「예문지」)에는 71편으로 올라 있고, 53편이 전합니다. 읽는 사람이 적어 수백 년 동안 잘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에, 훼손되거나 난해한 대목이 많습니다.

책은 몇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앞머리의 몇 편은 시기가 섞인 짧은 글입니다. 중심 편들은 열 가지 주장을 담고 있으며, 각 주장은 원래 상·중·하 세 편씩이었지만 여러 편이 사라졌습니다. 이어서 논리·윤리·과학을 다룬 「묵경」과 관련 편들, 「공수」편을 포함해 묵자와 제자들에 관한 대화와 일화, 마지막으로 성곽 방어에 관한 기술적인 편들이 있습니다.

중심 편 대부분은 “자묵자왈(子墨子曰, 우리 선생 묵자께서 말씀하셨다)”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가르침을 펼치며 썼다는 뜻입니다. 각 주장에 세 판본이 있다는 것은 이 책의 큰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입니다.

[1][3][7][5]

심화

후기 묵가: 논리, 언어, 과학

기원전 4~3세기에 후기 묵가는 「묵경(墨經)」이라 불리는 놀라운 문헌, 곧 「경」과 그 풀이인 「경설」, 그리고 「대취(大取)」와 「소취(小取)」 두 편을 남겼습니다. 극도로 압축되어 있고 훼손도 심해서, 이해하려면 현대의 본문 재구성이 필요했습니다.

이 문헌들에는 오늘날 논리학과 언어철학이라 부를 만한 것을 중국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다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을 가르는 실천인 변(辯), 이름(名)과 실제(實)의 관계, 앎의 여러 종류, 유비 논증이 잘못되는 경우 등을 논합니다. 「소취」는 추론의 유형을 살피며, 형식이 같은 문장이라도 똑같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하학(점·선·원의 정의 등), 역학(지렛대·저울·도르래), 광학에 관한 정의와 명제도 있습니다. 광학 조목들은 그림자, 평면거울과 곡면거울, 그리고 작은 구멍을 지난 빛이 거꾸로 선 상을 만드는 현상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흔히 묵자가 카메라 옵스큐라(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를 처음 설명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이 대목은 후기 묵가가 쓴 것입니다.

현대의 기념비적 연구는 A. C. 그레이엄의 『후기 묵가의 논리학·윤리학·과학(Later Mohist Logic, Ethics and Science)』(1978)으로, 이 편들을 재구성하고 번역했습니다. 이후 크리스 프레이저 같은 학자들은 묵가의 언어관과 지식관이 서양 논리학과 어떻게 다른지, 곧 추상적 진리보다 구별을 올바르게 긋는 실천적 능력을 강조한다는 점을 탐구해 왔습니다.

[2][1][9][3]

심화

경쟁자, 쇠퇴, 그리고 학계의 논쟁

묵가는 강한 반발을 불렀습니다. 유가의 맹자는 “묵씨는 겸애하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無父)”이라며 양주의 가르침과 함께 반드시 논파해야 할 위험한 사상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맹자는 묵자가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닳도록 애쓸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순자는 묵자가 쓸모만 중시하고 문화적 세련됨을 무시한다고 비판했고, 『장자』의 마지막 편 「천하」는 그의 도가 인간 본성에 비해 너무 가혹하다고 하면서도 그를 참으로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찬합니다.

묵가는 왜 사라졌을까요? 여러 이유가 제시됩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이 통일되면서 방어 전문가가 필요했던 다국 체제가 끝났다는 것, 한나라가 점점 유학을 우대했다는 것, 엄격한 규율과 독자적 충성심을 지닌 묵가 조직이 황제 권력에 위협으로 보였을 수 있다는 것, 능력주의나 하나의 옳음 기준 같은 묵가 사상의 일부가 다른 전통에 흡수되었다는 것 등입니다. 이 요인들을 어떻게 저울질할지는 학자마다 다릅니다.

중심 편들의 성립도 큰 논쟁거리입니다. A. C. 그레이엄은 각 주장의 세 판본이 한비자가 말한 세 파를 반영한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진화하는 텍스트로서의 묵자(The Mozi as an Evolving Text)』(2013)의 필자들을 비롯한 학자들은 세 판본이 경쟁하는 분파가 아니라 시간에 따라 발전한 전통을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번역도 문제입니다. ‘보편적 사랑’은 기독교적인 감정적 사랑처럼 들릴 수 있는 반면, ‘포괄적 배려’나 ‘차별 없는 관심’은 실제적 이익을 강조합니다.

끝으로, 묵가 윤리를 어떻게 분류할지도 논쟁 중입니다. 초기 형태의 결과주의, 하늘의 뜻에 기초한 신명론(神命論), 또는 사회적 이익에 관한 독자적 윤리라고 불려 왔습니다. 지금은 어느 이름표도 일부만 포착한다고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1][3][10][5]

중급

재발견과 유산

거의 2,000년 동안 『묵자』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지만 도교 경전 총서인 『도장(道藏)』 속에 보존되었습니다. 청나라 때 고증학에 관심을 둔 학자들이 이를 교감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원(畢沅)이 1783년 주석본을 냈고, 1890년대에 완성된 손이양(孫詒讓)의 『묵자한고(墨子閒詁)』가 표준 주석서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량치차오(梁啓超), 후스(胡適) 같은 중국 지식인들은 묵가에서 논리, 과학, 평등, 공공 정신의 자생적 전통을 찾아내고 서양 사상과 견주었습니다. 묵자는 민중의 사상가로, 20세기 후반에는 과학자이자 기술자의 본보기로 칭송되었습니다.

오늘날 묵자의 이름은 여러 방식으로 기려집니다. 2016년 중국은 묵자의 라틴어식 이름을 딴 양자 과학 위성 ‘묵자호(Micius)’를 발사했는데, 그의 이른 광학 연구를 기린 것입니다. 침략 전쟁에 대한 반대와 모든 사람을 아끼라는 이상도 윤리학, 국제 관계, 공평한 도덕적 관점에 관한 현대의 논의에서 자주 거론됩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묵가는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주로 유가의 비판을 통해 알려졌지만, 근대 이후 그곳의 학계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평화와 사회 복지의 사상가로서 묵자에 새로운 관심을 보여 왔습니다.

[1][4][8][6]

핵심 개념

겸애(兼愛)
모든 사람의 안녕을 차별 없이 아끼며, 남의 집과 나라를 내 집과 나라처럼 여기는 것.
비공(非攻)
정복 전쟁은 큰 규모의 범죄이며 침략한 쪽에도 해롭다. 방어 전쟁은 정당하다.
이익(利)
옳음의 핵심 기준.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인구를 늘리며 질서를 가져오는 것이 좋다.
삼표(三表)
주장을 옛 성왕의 행적, 백성의 경험, 실제 이익이라는 세 기준으로 시험하는 방법.
상현(尚賢)
관직은 출신과 관계없이 유능하고 덕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하늘을 기준으로
하늘은 치우침 없이 모두를 아끼므로, 그 뜻이 사람 행동의 객관적 본보기다.
절약
통치자는 백성의 자원을 낭비하는 성대한 장례, 음악, 사치를 피해야 한다.
변(辯)
후기 묵가가 체계적으로 탐구한, 구별을 올바르게 긋고 타당하게 추론하는 기술.

기록

  1. 기원전 551년 — 공자가 태어난다(기원전 551년).
  2. 기원전 479년 — 공자가 세상을 떠난다(기원전 479년).
  3. 기원전 475년 — 관례상 전국 시대가 시작된다(기원전 475년).
  4. 약 기원전 470년 — 묵자가 아마도 노나라나 송나라에서 태어난다(기원전 470년경).
  5. 약 기원전 391년 — 묵자가 세상을 떠나고(기원전 391년경), 제자들이 조직된 학파를 이어 간다.
  6. 약 기원전 372년 — 묵가를 격렬히 비판한 맹자가 태어난다(기원전 372년경).
  7. 약 기원전 300년 — 후기 묵가가 논리·광학·역학을 다룬 「묵경」을 짓는다(기원전 4~3세기).
  8. 약 기원전 239년 — 『여씨춘추』가 묵가 거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기원전 239년경).
  9. 기원전 221년 —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다(기원전 221년). 이후 묵가가 쇠퇴한다.
  10. 1783년 — 필원이 『묵자』 주석본을 펴낸다.
  11. 약 1894년 — 손이양이 표준 주석서 『묵자한고』를 완성한다.
  12. 2016년 — 중국이 묵자의 이름을 딴 양자 과학 위성 ‘묵자호(Micius)’를 발사한다.

용어 풀이

묵가(墨家)
묵자가 세우고 제자들이 이어 간 사상 학파.
전국 시대
경쟁하던 중국의 여러 나라가 진나라의 통일(기원전 221년)까지 다툰 시기(기원전 475~221년).
제자백가
춘추 전국 시대에 경쟁한 여러 사상가와 학파.
겸애(兼愛)
포괄적·차별 없는 배려. 흔히 ‘보편적 사랑’으로 번역된다.
천(天)
하늘. 묵가는 뜻을 지니고 모두를 공평하게 아끼는 힘으로 이해했다.
거자(鉅子)
묵가 집단의 지도자.
이(利)
이익 또는 복리. 옳은 행동을 가르는 묵가의 기준.
변(辯)
어떤 구별이 옳은지를 두고 벌이는 논변.
묵경(墨經)
『묵자』 가운데 논리·윤리·기하·역학·광학을 다룬 전문적인 편들.
결과주의
행위를 그 결과로 판단하는 윤리 이론들.

묻고 답하기

묵자는 모르는 사람을 부모만큼 사랑하라고 했나요?

남의 가족을 내 가족처럼 아끼라고 했습니다. 묵가는 그렇게 하면 남들도 내 부모를 아낄 테니, 이것이 자기 부모를 돌보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묵자는 평화주의자였나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침략 전쟁은 비판했지만 방어는 지지했고, 제자들은 공격받는 성을 지키는 데 뛰어났습니다.

묵자가 카메라를 발명했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후기 묵가의 「묵경」은 작은 구멍을 지난 빛이 거꾸로 선 상을 만든다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설명하며, 가장 이른 기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묵가는 왜 그렇게 오래 잊혔나요?

통일 이후 방어 전문가가 덜 필요해졌고, 국가가 유학을 우대했으며, 묵가 조직이 위협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지금도 이유를 논쟁합니다.

유가와 묵가는 무엇이 달랐나요?

유가는 가족에서 시작하는 차등적 사랑과 예악을 중시했고, 묵가는 차별 없는 배려, 검소함, 실제적 이익을 강조하며 값비싼 의례를 비판했습니다.

중심 편마다 왜 판본이 세 개인가요?

아무도 확실히 모릅니다. A. C. 그레이엄은 묵가의 세 파와 연결했고, 다른 학자들은 시간에 따라 발전한 문헌의 층위로 봅니다.

묵자는 소크라테스와 비슷한가요?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고, 둘 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논했으며,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아 제자들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사상과 방법은 꽤 달랐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Chris Fraser, Mohis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 Chris Fraser, Mohist Canon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3. Hui-chieh Loy, Mozi (Mo-tzu, c. 400s–300s B.C.E.).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4. Mozi. Wikipedia
  5. Mohism. Wikipedia
  6. 묵자. 위키백과
  7. Mozi (Chinese text with partial English translation). Chinese Text Project
  8. Micius (satellite). Wikipedia
  9. A. C. Graham, Later Mohist Logic, Ethics and Science. Chinese University Press, 1978
  10. Carine Defoort and Nicolas Standaert (eds.), The Mozi as an Evolving Text: Different Voices in Early Chinese Thought. Brill, 2013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 지도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