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맹자

孟子 (Mèngzǐ), 이름 맹가(孟軻)

약 기원전 372–289년 · 추나라 (오늘날의 쩌우청 부근)

한 문장으로

맹자는 2,300여 년 전 중국의 사상가로, 사람은 누구나 자라날 수 있는 착한 마음의 싹을 지니고 태어나며, 통치자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다스릴 자격을 잃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맹자
이미지: anonymous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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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먼 옛날 중국에서 여러 나라가 서로 싸우던 시절, 추(鄒)나라라는 작은 나라에서 맹가라는 아이가 자랐어요. 우리는 그를 ‘맹 선생님’이라는 뜻의 맹자라고 불러요. 맹자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잃어서 어머니 혼자 그를 키웠어요.

맹자의 어머니에 관한 유명한 옛이야기가 있어요. 처음에는 무덤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가 장례 치르는 놀이를 했대요. 그래서 시장 옆으로 이사했더니 이번에는 물건 사고파는 놀이를 했지요. 마지막으로 서당 옆으로 옮기자 맹자는 학생들을 따라 예의 바르게 절하고 글을 읽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여기가 바로 우리가 살 곳이구나.” 하고 말했대요. 이것이 ‘맹모삼천(孟母三遷)’ 이야기예요.

어른이 된 맹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선생님이 되었어요. 제자들과 함께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왕들에게 말했지요. “이익과 전쟁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질고 바르게 다스리고 백성을 배불리 먹이면 백성이 왕을 사랑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왕은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맹자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이 착하게 태어난다고 믿었어요. 이렇게 말했지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갑자기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구라도 깜짝 놀라 도와주고 싶을 거예요. 상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걱정되니까요. 그 마음은 아주 작은 새싹과 같아요. 물을 주고 잘 보살피면 진짜 착한 마음으로 자라나요.

맹자는 그 시대로서는 아주 용감한 말도 했어요. 백성이 왕보다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왕이 잔인해서 백성을 해치면 더는 진짜 왕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의 말은 『맹자』라는 책에 모였고, 중국·한국·일본·베트남의 아이들이 수백 년 동안 이 책을 외우며 공부했답니다.

한눈에 보기

생몰
전통적으로 기원전 372년경 ~ 289년경(정확한 연대는 불확실, 기원전 4세기)
출생지
노(魯)나라 이웃의 추(鄒)나라(오늘날 중국 산둥성 쩌우청)
시대
동주(東周)의 전국 시대
학파
유가(儒家).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학통과 연결됨
저작
『맹자』: 7편, 각 편을 상·하로 나눈 14권, 약 3만 5천 자의 대화와 어록
핵심 가르침
성선설, 사단(四端), 인정(仁政), 민본(民本)
칭호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라는 뜻의 ‘아성(亞聖)’
경전
성리학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 1313년부터 중국 과거의 기준이 되었고 조선 교육의 중심이었음

쉬움

맹자는 누구인가

맹자는 기원전 4세기 중국의 철학자 맹가(孟軻)를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서양에서는 선교사들이 만든 라틴어식 이름 ‘멘키우스(Mencius)’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공자 다음으로 중요한 유학자로 꼽히며,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아성(亞聖)’, 곧 두 번째 성인으로 불린다. 그의 이름을 딴 책 『맹자』에는 왕·제자·논적들과 나눈 대화가 담겨 있다.

맹자는 무엇보다 두 가지 생각으로 유명하다. 첫째,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성선설). 사람은 누구나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의 실마리, 곧 ‘싹’을 지니고 태어난다. 둘째, 정치는 백성을 위해 있다. 백성을 돌보는 왕은 천하를 얻지만 폭군은 다스릴 자격을 잃는다.

이런 생각 때문에 맹자는 존경받는 동시에 통치자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2천 년 넘게 그의 책은 중국·한국·일본·베트남에서 읽히고 외워지고 논쟁되었으며, 지금도 세계 철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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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생애

맹자는 공자의 고국인 노나라와 이웃한 작은 나라 추(鄒)에서, 지금의 산둥성 지역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으로 전하는 기원전 372~289년이라는 생몰년은 훨씬 뒤에 추정한 것이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활동했다는 정도다. 약 2백 년 뒤의 역사가 사마천에 따르면 그는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문인에게 배웠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맹자의 어머니는 동아시아에서 현명한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었다. 세 번 이사한 이야기(맹모삼천) 말고도, 어린 맹자가 공부를 중간에 그만두고 돌아오자 어머니가 짜던 베를 칼로 끊어 배움을 그만두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단기지교(斷機之敎)’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한나라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처럼 맹자보다 한참 뒤에 엮인 책에 나오므로 도덕적 전설로 읽는 것이 좋다.

어른이 된 맹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전국 시대 여러 나라의 궁정을 돌았다. 『맹자』에는 양(梁)나라, 곧 위(魏)나라의 혜왕, 제(齊)나라 선왕, 작은 나라 등(滕)의 문공 등과 만난 기록이 있다. 그는 몇 해 동안 제나라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지만 왕이 자기 조언을 따르지 않자 떠났다. 여행의 정확한 순서와 연대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당대 군주들에게 실망한 그는 말년을 가르치는 데 보냈다. 사마천은 그가 물러나 만장(萬章) 같은 제자들과 함께 일곱 편의 책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의 무덤과 그를 모신 커다란 사당인 맹묘(孟廟)는 지금도 쩌우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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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시대 배경: 전국 시대와 제자백가

맹자가 살았던 전국 시대(기원전 475년경~221년)에는 주나라 왕이 실권을 잃고 일곱 강대국이 패권을 다투었다. 군주들은 대규모 보병 군대를 만들고, 세금과 병사를 더 거두기 위해 제도를 고쳤으며, 뛰어난 책사를 모셔 오려고 경쟁했다. 전쟁과 기근은 백성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맹자는 왕의 개와 돼지가 사람 먹을 곡식을 먹는데 길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널려 있다며 군주를 꾸짖었다.

이런 경쟁 속에서 훗날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불린 사상의 장이 활짝 열렸다. 제나라는 도성의 직하(稷下) 문 근처에 학자들을 모아 지원했다. 맹자가 공식적으로 직하 학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같은 논적들과 겨루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겸애)고 가르치며 유가의 예법을 비판한 묵자의 무리, 자기 삶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며 털 한 올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어도 뽑지 않겠다고 한 양주(楊朱)의 무리, 군주도 백성과 함께 밭을 갈아야 한다고 주장한 농가(農家), 동맹과 전쟁을 설계한 종횡가 등이다.

맹자는 스스로를 이런 논적들에 맞서 공자의 도를 지키는 사람으로 내세웠다. 그는 양주는 ‘임금이 없고(無君)’ 묵자는 ‘아버지가 없다(無父)’고 비판했다. 앞쪽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뒤쪽은 자기 가족에게 마땅히 쏟아야 할 특별한 사랑을 무시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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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책 『맹자』: 일곱 편의 대화

『맹자』는 일곱 편으로 이루어지며 각 편을 상·하로 나누어 모두 14권이다. 편 이름은 첫머리에 나오는 인물이나 구절에서 따왔다. 「양혜왕」, 「공손추」, 「등문공」, 「이루」, 「만장」, 「고자」, 「진심」이다. 연구자들은 편·상하·장 번호로 구절을 가리키는데, 예를 들어 「공손추 상」 6장을 서양에서는 흔히 ‘2A6’이라 표기한다.

주로 짧은 어록으로 된 『논어』와 달리 『맹자』에는 길게 이어지는 대화와 논증이 많다. 맹자는 비유와 이야기와 질문으로 논증하고, 재치도 넘친다. 송나라의 한 농부가 곡식이 너무 더디게 자란다고 걱정하다 싹을 하나하나 뽑아 올려 주었더니 이튿날 모두 말라 죽었다는 ‘알묘조장(揠苗助長)’ 이야기처럼, 도덕적 성장도 억지로 서두를 수 없다고 경고한다.

책의 첫 장면은 전체의 분위기를 보여 준다. 양나라 혜왕이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하겠느냐고 묻자 맹자는 “왕께서는 어찌 꼭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라고 답한다.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 자기 이익만 따지면 나라가 스스로 무너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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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성선설과 사단

맹자 사상의 중심은 인간의 본성(性)이 선하다는 주장이다. 가장 유명한 논증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사고 실험이다(「공손추 상」 6장).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본 사람은 누구나 깜짝 놀라며 측은한 마음을 품는다. 아이 부모와 친해지려는 것도, 칭찬을 들으려는 것도, 아이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니다. 이는 “사람은 모두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있다”는 증거라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사단(四端)론이 나온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실마리,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실마리,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실마리,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실마리다. 사람에게 팔다리가 넷 있듯 누구나 이 네 가지를 지닌다. 수양이란 이 싹을 알아보고 지키며 ‘넓혀서(擴充)’ 삶 전체를 채우는 일이다.

맹자는 악을 본성이 나쁘다는 증거가 아니라 방치와 훼손의 결과로 설명한다. 우산(牛山)의 비유(「고자 상」 8장)에서, 한때 아름다운 나무로 덮였던 산이 도끼질과 소·양의 방목으로 민둥산이 되자 사람들은 원래 나무가 없던 산이라고 여긴다. 날마다 선한 마음을 베어 내는 사람도 처음부터 선한 마음이 없었던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본 고자(告子)와의 논쟁에서 맹자는, 물이 아래로 흐르려는 경향이 있듯 인간의 본성은 선으로 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의로운 일을 꾸준히 행할 때 자라나는 큰 기운인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라고 하고, 자기 마음을 다하면 본성을 알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盡心知性知天)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훗날 성리학과 조선 유학의 심성 논쟁에서 핵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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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인정(仁政)과 민본

맹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정치에 적용한다. 왕도 누구나와 같은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으니 그 마음을 백성에게 넓히기만 하면 된다. 제나라 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의 겁먹은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해 살려 주었을 때, 맹자는 그 마음이면 참된 왕이 될 수 있다고, 다만 같은 마음을 백성에게 베풀라고 말했다.

어진 정치(仁政)란 세금을 가볍게 하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며, 농번기에 농민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고, 도덕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백성이 먹고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고 보았다. 그는 여덟 집이 가운데 공전(公田)을 둘러싼 자기 땅을 경작하는 이상적 토지 제도인 정전제(井田制)를 설명했는데, 이런 제도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가장 급진적인 말은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이 그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구절이다(「진심 하」 14장).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를 죽인 것이 옳으냐는 물음에 맹자는, 인과 의를 해치는 자는 한낱 ‘필부(一夫)’일 뿐이라며 “한낱 사내 주를 처벌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고 답했다(「양혜왕 하」 8장). 하늘의 명(天命)은 백성이 그 통치자를 받아들이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맹자가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세습 군주제를 인정했고, 마음을 쓰는 사람과 힘을 쓰는 사람의 구분(勞心者·勞力者)과 위계적인 가족 관계를 믿었다. 그러나 정당성이 백성의 삶과 동의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후대에 폭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고전적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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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여러 목소리 가운데 하나에서 ‘아성’으로

맹자 사후 천 년이 넘도록 그는 여러 유가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 세대 뒤의 대유학자 순자(荀子)는 그의 인성론을 공격하며,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선은 의식적 노력(僞)과 예, 스승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2세기의 학자 조기(趙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맹자』 주석을 쓰면서 위작이라고 본 ‘외서(外書)’ 4편을 뺐다. 오늘날 전하는 『맹자』는 조기가 남긴 7편이다.

맹자의 위상은 당나라 후기부터 크게 높아졌다.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는 성인의 참된 도가 공자에게서 맹자로 전해졌다가 끊어졌다고 주장했다. 송나라 때 『맹자』는 과거 과목에 들어갔고, 성리학자 주희(朱熹, 1130~1200)는 이를 『논어』, 『대학』, 『중용』과 묶어 사서(四書)로 삼고 주석을 붙였다. 원나라는 1313년 주희의 주석이 달린 사서를 과거 시험의 기준으로 정했고, 1330년에는 맹자에게 공식적으로 ‘아성’의 칭호를 내렸다.

그의 정치사상이 늘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군주의 권위를 제한하는 구절에 분노해 수십 개의 구절을 뺀 축약본 『맹자절문(孟子節文)』(1394)을 만들게 했다. 전체 본문은 뒤에 다시 회복되었다.

조선(1392~1897)에서 『맹자』는 교육과 과거의 핵심 교재였다. 1559년 이황(퇴계)과 기대승(고봉) 사이에 시작된 사단칠정 논쟁은 맹자의 ‘사단’이 『예기』의 ‘칠정(七情)’과 어떤 관계인지를 물은 것으로, 이후 수백 년 동안 조선 성리학의 방향을 규정했다. 정약용(다산)은 『맹자요의(孟子要義)』에서 본성을 고정된 이치(理)가 아니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향(嗜好)으로 읽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일본에서는 부당한 군주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만세일계 천황 이념과 잘 맞지 않았는데, 에도 시대 우에다 아키나리의 『우게쓰 이야기(雨月物語)』에는 『맹자』를 실은 배가 일본으로 오면 가라앉는다는 전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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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과 열린 질문

‘성(性)’이란 무엇인가? 핵심 논쟁은 ‘성’의 뜻을 둘러싼 것이다. A. C. 그레이엄은 영향력 있는 논문(1967)에서 맹자의 ‘성’은 태어날 때 주어진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생명체가 마땅히 밟아 가는 발달 과정을 가리킨다고 주장했고, 로저 에임스는 이를 더 강하게 과정 중심으로 읽었다. 반면 아이린 블룸 등은 맹자가 공유된 선천적 인간 본성 개념을 분명히 지녔다고 반박했다. 이 문제는 맹자의 윤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식 덕 윤리와 닮았는지를 따지는 비교철학에도 영향을 준다.

덕 윤리학자로서의 맹자. 브라이언 W. 밴 노든, 필립 J. 아이반호, 리 H. 이얼리 같은 학자들은 맹자를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와 비교하며, 좋은 성품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설명한 덕 윤리학자로 다루었다. 신광래(Kwong-loi Shun)의 『맹자와 초기 중국 사상(Mencius and Early Chinese Thought)』(1997)은 심(心)·성(性)·의(義) 같은 핵심 용어를 문헌학적으로 정밀하게 연구했다. 데이비드 S. 니비슨은 도덕적 ‘확충(推)’의 문제, 곧 소 한 마리에게 느낀 측은지심이 어떻게 백성 전체로 넓어지는지에 주목했다.

맹자는 정말 ‘혁명권’을 옹호했는가? 어떤 독자는 「양혜왕 하」 8장과 「진심 하」 14장에서 초기의 인민 주권론을 본다. 다른 이들은 맹자가 정당성의 근거를 하늘의 명에 두었으며, 그것이 백성을 통해 드러나지만 백성을 주권자로 만들지는 않고, 폭군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왕족이나 덕 있는 신하로 한정했다고 강조한다. 이 사상이 동아시아의 현대 민주주의나 인권 사상을 얼마나 뒷받침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자사–맹자 학통. 순자는 자사와 맹자가 ‘오행(五行)’이라는 학설을 지어냈다고 함께 비판했다. 오랫동안 이 학통은 그런 적대적 언급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마왕퇴 무덤(1973년 발굴)과 기원전 3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곽점(郭店) 초묘(1993년 발굴)에서 「오행」이라는 글이 나오면서, 이른바 ‘사맹(思孟) 학파’와 맹자가 알았을 수 있는 심성론 문헌에 관한 논의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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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 우리가 아는 것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전기 자료. 맹자의 생애에 관한 지식은 거의 모두 『맹자』 자체와, 기원전 100년 무렵 사마천이 쓴 『사기』 「맹자순경열전」(권74)의 짧은 전기에서 나온다. 어머니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는 그보다 뒤의 한나라 문헌에서 왔다. 기원전 372~289년이라는 전통적 생몰년은 훨씬 뒤에 계산된 것이며 다른 추정과 수십 년씩 차이가 난다. 『맹자』 자체에는 출생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여행의 연대. 사마천은 제나라 방문을 양나라 방문보다 앞에 놓지만, 양혜왕으로 시작하는 책의 순서는 그 반대를 시사한다. 전국 시대 군주들의 재위 연대 자체가 『죽서기년』을 비롯한 서로 어긋나는 자료로 재계산되기 때문에, 학자마다 맹자의 행적을 다르게 복원한다. 비교적 확실한 기준점은 기원전 314년 무렵 제나라의 연(燕)나라 침공으로, 책은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룬다.

텍스트. 한나라 황실 도서 목록(『한서』 「예문지」)은 『맹자』를 11편으로 기록하는데, 2세기 조기의 판본은 7편만 남기고 4편을 후대의 위작으로 뺐다. 그 ‘외서’ 4편은 사라졌고, 뒤에 그 이름으로 돌아다닌 글은 대체로 위작으로 본다. 전국 시대 무덤에서 『맹자』 사본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노자』의 일부처럼 한나라 이전 사본과 비교해 볼 수는 없다.

저자 문제. 사마천은 맹자가 제자들과 함께 책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현대 학자는 책이 맹자를 ‘맹자(맹 선생)’라는 존칭으로 부르고 군주들을 시호로 기록한다는 점을 들어, 제자들이 한 세대쯤에 걸쳐 엮었다고 본다. 그래도 목소리와 논증이 일관되어 있어 하나의 일관된 가르침을 전한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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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성선설(性善說)
사람은 선으로 향하는 실제 경향을 지니고 태어나며, 이는 길러질 수도 훼손될 수도 있다.
사단(四端)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 인·의·예·지의 실마리.
확충(擴充)·추(推)
한 생명에게 느낀 측은지심처럼 이미 지닌 마음을 비슷한 경우로 넓혀 가는 도덕적 성장.
인정(仁政)
먼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세금과 형벌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얻는 정치.
민귀군경(民貴君輕)
백성이 사직이나 임금보다 더 귀하다는 민본 사상.
천명(天命)
하늘이 통치할 권리를 주며, 그 뜻은 백성이 통치자를 받아들이는지로 드러난다. 폭군은 이를 잃는다.
호연지기(浩然之氣)
의로운 일을 꾸준히 행할 때 자라나는 크고 굳센 도덕적 기운.

기록

  1. 약 기원전 372년 — 전통적으로 전하는 맹자의 출생 연도. 추나라에서 태어나다.
  2. 약 기원전 320년 — 양(위)나라 혜왕을 만나다. 혜왕이 죽기 얼마 전이다.
  3. 약 기원전 314년 — 제나라가 연나라를 침공하다. 맹자가 제 선왕과 이 전쟁을 논하다.
  4. 약 기원전 289년 — 전통적으로 전하는 맹자의 사망 연도.
  5. 약 기원전 100년 — 사마천이 『사기』에 맹자의 짧은 전기를 싣다.
  6. 약 200년 — 조기의 주석이 본문을 7편으로 정하다.
  7. 1190년 — 주희가 『맹자』를 포함한 사서를 자신의 주석과 함께 펴내다.
  8. 1313년 — 원나라가 사서를 과거 시험의 기준으로 삼다.
  9. 1330년 — 맹자가 공식적으로 ‘아성’의 칭호를 받다.
  10. 1394년 — 명 태조 때 군주 비판 구절을 뺀 『맹자절문』이 나오다.
  11. 1559년 — 조선에서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이 시작되다.
  12. 1993년 — 곽점 초묘가 발굴되어 자사–맹자 학통과 관련된 유가 문헌이 드러나다.

용어 풀이

전국 시대
진나라의 통일 이전, 여러 나라가 패권을 다툰 시기(기원전 475년경~221년).
유가(儒家)
공자와 관련된 예법·경전·가르침을 따르는 학자들의 전통.
인(仁)
어짊. 남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
의(義)
옳음. 마땅한 것에 대한 감각과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
예(禮)
가정·사회·제사에서 공경을 나타내는 바른 행동의 형식.
성(性)
본성. 생명체가 지닌 고유한 경향.
심(心)
마음. 동아시아 사상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기관.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주희가 유학 교육의 중심으로 묶었다.
정전제(井田制)
여덟 집이 가운데 공전을 둘러싼 땅을 경작하는, ‘井’ 자 모양의 이상적 토지 제도.
사단칠정 논쟁
1559년부터 이어진 조선 성리학의 논쟁.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따졌다.

묻고 답하기

왜 ‘맹자’라고 부르나요?

본명은 맹가(孟軻)이고, ‘자(子)’는 선생님을 높이는 말이라 ‘맹자’는 ‘맹 선생님’이라는 뜻이에요. 서양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공자를 Confucius로 바꾼 것처럼 Mencius라는 라틴어식 이름을 붙였어요.

맹자의 어머니는 정말 세 번 이사했나요?

이 이야기는 맹자보다 수백 년 뒤인 한나라 때 쓰인 글에 나와요. 글자 그대로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환경과 부모의 가르침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보여 주는 사랑받는 본보기가 되었지요.

맹자는 모든 사람이 이미 착하다고 생각했나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누구나 착한 마음의 싹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식물처럼 지키고 길러야 한다고 했어요. 싹을 돌보지 않거나 망가뜨리면 사람은 나빠질 수 있다는 거예요.

맹자와 순자는 어떻게 다른가요?

맹자는 인간 본성이 선하며 가꾸어야 한다고 했고, 순자는 본성이 악하며 선은 예·스승·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둘 다 유학자였고 둘 다 배움을 중시했습니다.

맹자는 나쁜 왕을 몰아내도 된다고 했나요?

인과 의를 해치는 통치자는 더는 참된 임금이 아니며, 폭군 주를 죽인 것은 시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반 백성의 혁명권에까지 이르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습니다.

맹자는 왜 한국에서 중요했나요?

『맹자』는 조선 과거 시험에서 공부한 사서 가운데 하나였고, 사단 개념은 한국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논쟁인 사단칠정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맹자』의 고대 사본이 발견된 적이 있나요?

아직 없습니다. 곽점 같은 무덤에서 관련 유가 문헌은 나왔지만 전국 시대의 『맹자』 사본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읽는 본문은 2세기 조기의 판본에서 왔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맹자. 위키백과
  2. 맹자 (책). 위키백과
  3. Bryan Van Norden, Menciu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4. Mencius (c. 372—289 B.C.E.).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5. Mencius. Wikipedia
  6. Mencius (book). Wikipedia
  7. 孟子 Mengzi (원문과 제임스 레그의 영역). Chinese Text Project
  8. Guodian Chu Slips. Wikipedia
  9. Kwong-loi Shun, Mencius and Early Chinese Though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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