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정약용은 1762년 오늘날 서울 가까운 한강 가의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아주 총명했지요. 많은 사람이 그를 ‘차 산’이라는 뜻의 호 ‘다산’으로 불러요.
어른이 된 그는 가장 어려운 과거 시험에 합격해 새로운 생각을 좋아하던 정조 임금을 모셨어요. 임금은 수원에 새 성을 쌓는 계획을 도와 달라고 했어요. 다산은 도르래를 이용한 기중기 ‘거중기’를 설계해서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더 쉽게 들어 올릴 수 있게 했어요.
그런데 운명이 바뀌었어요.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새 정부는 조선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금지된 종교, 천주교와 관련된 사람들을 벌했어요. 다산의 가족과 친구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있었어요. 형 한 명은 목숨을 잃었고, 다산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어요.
다산은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는데, 대부분을 우리나라 서남쪽 끝 강진에서 보냈어요.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을 쓰고 또 썼어요. 좋은 관리가 백성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재판을 어떻게 공정하게 해야 하는지, 나라 전체를 어떻게 더 잘 꾸릴 수 있는지에 관한 책들이에요.
가장 유명한 책 『목민심서』는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정직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절대 뇌물을 받지 말라고 가르쳐요. 오늘날 우리는 다산을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많은 공무원이 지금도 그의 책을 읽어요.
한눈에 보기
- 출생
- 1762년(영조 38)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 사망
- 1836년(헌종 2) 음력 2월 22일, 마재 본가
- 호
- 다산(茶山), 사암(俟菴) 등. 당호이자 문집 이름은 여유당(與猶堂)
- 시대
- 조선 정조(재위 1776~1800)·순조(재위 1800~1834) 시대
- 경력
- 1789년 문과 급제. 정조 아래 규장각 등에서 벼슬하며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
- 유배
- 1801~1818년. 장기를 거쳐 전라도 강진에 유배, 그중 약 11년을 다산초당에서 지냄
- 주요 저술
- 『경세유표』(1817), 『목민심서』(1818), 『흠흠신서』(1819/1822)와 방대한 경학 주석서 등 모두 500여 권
- 기념
- 탄생 250주년인 2012년 유네스코 기념 인물로 선정
쉬움
정약용은 누구인가
정약용은 흔히 호인 다산으로 불리며, 1392년부터 1897년까지 이어진 조선 왕조의 후기를 살았다. 그는 토지, 세금, 법, 기술, 백성의 복지 같은 실제 문제를 다루는 유학을 주장한 조선 후기 학자들, 곧 뒤에 ‘실학’이라고 불린 흐름의 집대성자로 널리 평가된다.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관리이자 기술자였고, 중년에는 정치적·종교적 박해의 희생자였으며, 유배지에서는 놀라울 만큼 많은 글을 쓴 저술가였다. 그의 저술은 유교 경전 주석에서 지리, 의학, 언어, 음악, 시에 이른다. 현대 학자들은 그 분량을 모두 500여 권으로 헤아린다.
다산은 당시 동아시아 학문의 공용어였던 한문으로 글을 썼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지방관을 위한 지침서 『목민심서』로, 지금도 공직 윤리의 본보기로 읽힌다.
쉬움
집안과 젊은 시절
정약용은 1762년 서울 동쪽 한강 가의 마을 마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집안은 18세기 대부분 동안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南人)에 속했다. 아버지 정재원은 지방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시인 윤선도와 화가 윤두서의 후손인 해남 윤씨였다.
형으로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이 있었다. 그는 가족과 벗들을 통해 많은 남인 학자에게 영감을 준 성호 이익(1681~1763)의 개혁 사상을 접했고, 1784년에는 큰형의 처남 이벽을 통해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접했다. 기독교 교리와 유럽 과학을 아우른 서학(西學)은 이 시기 많은 젊은 학자를 사로잡았다.
그는 1776년 혼인하고 1783년 진사시에, 1789년 문과에 합격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집권 당파 밖의 인재를 등용하려던 정조는 그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쉬움
정조를 섬기다: 화성과 거중기
정조(재위 1776~1800)는 조선에서 가장 학식 높고 개혁적인 임금 가운데 하나로 기억된다. 그는 왕실 도서관이자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세우고 젊은 학자들을 곁에 모았다. 정약용은 그가 특히 아낀 신하였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가까운 수원에 새 성곽 도시를 세우기로 하자, 정약용에게 설계를 돕게 했다. 그는 성곽과 기계에 관한 중국과 서양의 책을 연구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왕실 도서관에 있던 서양 기계를 그림으로 설명한 중국 책도 있었다. 그는 도르래를 이용한 거중기와 여러 운반 기구를 설계해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옮기도록 도왔다. 화성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쌓았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는 1794년 암행어사로 변장한 채 지방을 돌며 수령들을 살폈고, 1797년부터는 황해도 곡산 부사로 일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평범한 농민이 부패한 아전과 불공정한 세금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알게 되었고, 이는 뒷날 지방 행정에 관한 저술의 바탕이 되었다.
중급
천주교, 당쟁, 그리고 1801년의 박해
천주교와의 관계는 정약용에게 사상의 원천이자 몰락의 원인이었다. 1780년대 그는 천주교 서적을 읽고 초기 신앙 공동체에 참여했다. 천주교가 금지되고 남인의 반대파가 신자들을 공격하자 그는 거듭 탄핵을 받았다. 1797년 그는 한때 새 가르침에 끌렸으나 이미 버렸다고 밝히는 상소를 올렸다. 만년에 신앙으로 돌아갔는지는 논란이다. 19세기에 쓰인 일부 천주교 기록은 그렇다고 하지만, 많은 역사가는 증명되지 않았다고 본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남인에게 적대적인 세력과 손잡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801년 정부는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 곧 신유박해를 벌였다. 정약용의 형 정약종과, 정약용의 매형이자 조선 최초의 세례 교인인 이승훈을 비롯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박해는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정약용과 형 정약전은 유배되었는데, 정약용은 먼저 동해안의 장기로 갔다. 그해 조카사위인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북경의 주교에게 교회를 위해 서양의 군사적 도움을 청하는 내용을 비단에 쓴 편지(백서)를 가지고 있다가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다시 심문이 벌어졌고, 정약용은 서남쪽 끝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중급
강진에서의 18년
처음에 정약용은 강진 읍내 주막 뒤편의 작은 방에 머물며 이곳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은 맑게, 용모는 엄숙하게, 말은 적게, 움직임은 무겁게 해야 한다는 네 가지 마땅함이라는 뜻이다. 뒤에 절의 암자와 제자의 집에 머물다가, 1808년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초가로 옮겼다. 이곳 지명이 ‘차 산’이라는 뜻의 다산이었고, 그의 가장 유명한 호가 여기서 나왔다. 그는 1818년 해배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다산초당에서 그는 서재를 꾸리고, 연못이 있는 작은 정원을 만들고, 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샘물을 길어 썼다. 그는 지역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자료를 조사하고 베껴 쓰게 했는데, 이것이 그가 그토록 많은 책을 낼 수 있었던 까닭 가운데 하나다. 승려 혜장, 다도로 이름난 초의와 사귀었고, 흑산도에서 바다 생물을 다룬 선구적 저술 『자산어보』를 쓰고 181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형 정약전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고, 집안이 무너졌어도 품위를 지키며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가 담겨 있어 이 시대의 가장 감동적인 글로 꼽힌다. 지금의 다산초당 건물은 1958년 기와집으로 새로 지은 것이며, 이 일대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중급
‘일표이서’: 더 나은 나라를 위한 설계
경세에 관한 그의 대표 저술 세 권을 묶어 ‘일표이서(一表二書)’, 곧 하나의 표(表)와 두 권의 서(書)라고 한다. 『경세유표』(1817)는 고대 중국 경전 『주례』에서 영감을 얻어 중앙 관제, 토지 제도, 조세, 군제를 전면적으로 다시 짜려는 설계다. 미완성으로 남았고, 임금에게 올리지 못하고 남기는 상소라는 뜻에서 ‘유표(遺表)’라 이름 붙였다.
48권의 『목민심서』(1818)는 고을 수령을 위한 실무 지침서다. 부임, 율기(자기 다스림), 봉공(나라 섬김), 애민(백성 사랑), 그리고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육전, 진황(흉년 구제), 해관(벼슬에서 물러남)까지 12편에 편마다 6조씩 72조로 이루어져, 수령이 부임해서 떠날 때까지를 따라간다. 아전이 농민을 속이는 방식과 청렴한 관리가 이를 막는 방법을 보여 주는 구체적 사례가 가득하다.
『흠흠신서』(1819년 무렵 완성, 1822년 서문)는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룬다. 제목은 재판할 때 삼가고 또 삼가라는 뜻의 말에서 왔다. 중국과 조선의 판례를 모으고 검시 방법을 논하며, 수령에게 부주의하거나 가혹한 판결을 경계한다. 이 저술들은 개혁이 조정에서 마을까지 닿아야 한다는 그의 믿음을 보여 준다.
중급
시인, 의학자, 지리학자
정약용은 2,500수가량의 시를 남겼으며 상당수를 유배지에서 썼다. 여러 편이 농민과 어민의 삶을 쓰라린 사실감으로 그린다. 가장 유명한 「애절양(哀絶陽)」(1803)은 관리들이 갓난 아들과 죽은 아버지에게까지 군포를 매기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를 해친 강진의 가난한 사내 이야기다. 이런 징수는 불법이었지만 흔했다. 그는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했다.
그의 호기심은 의학, 지리, 언어에까지 뻗었다. 『마과회통』(1798)은 홍역 등에 관한 중국과 조선의 지식을 모은 책인데, 자녀 여럿을 어려서 잃은 그에게는 개인적으로도 절실한 주제였다. 『아방강역고』(1811)는 옛 한국 국가들의 역사 지리를 고증했고, 『아언각비』(1819)는 흔히 잘못 쓰는 말과 글자를 바로잡았다. 음악, 예법, 군사 제도도 연구했다.
이런 폭넓음은 흩어진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 모든 분야는 세상을 정확히 이해해 정치가 실제 고통을 덜어 주게 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었다. 그의 학문은 옛 경전과 일상의 구체적 세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중급
핵심 사상: 토지, 통치자, 인간의 본성
정약용은 토지 문제에 깊이 마음을 썼다. 1799년에 쓴 「전론(田論)」에서 그는 여전제(閭田制)를 제안했다. 30호 안팎의 마을이 땅을 함께 경작하고 각 집이 들인 노동에 따라 수확을 나누어, 땅을 가는 사람만 그 열매를 받게 하자는 것이다. 뒤에 『경세유표』에서는 고대의 정전제(井田制)에 바탕한 더 점진적인 개혁안을 내놓았다.
「원목(原牧)」과 「탕론(湯論)」 같은 짧은 글에서 그는 통치자는 본래 다툼을 해결하려고 백성이 뽑은 지도자에서 비롯되었으며, 백성을 저버린 통치자는 정당하게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글들은 흔히 유럽의 인민 주권 사상과 비교되지만, 그는 유교의 틀 안에서 썼으며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본성에 관해 그는 인성이 곧 우주의 이치(理)와 같다는 주희 계열 성리학의 견해를 거부했다. 대신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 곧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향이라고 보았다(성기호설). 사람은 본래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지만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으며, 덕은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또 사람이 생각과 행동을 삼가야 할 대상으로, 인격적으로 굽어보는 상제(上帝)를 강조했다.
쉬움
귀향과 만년
1818년 해배된 정약용은 마재로 돌아왔고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저술을 계속 고치고, 1822년 자신의 삶과 저술을 정리한 「자찬묘지명」을 쓰고, 찾아오는 학자들과 교유했다. 그는 집 이름을 여유당이라 했는데, 『도덕경』에서 겨울에 언 내를 건너듯 조심하고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삼간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836년 혼인 60주년 되는 날 세상을 떠나 마재 집 뒤 언덕에 묻혔다. 그의 저술은 생전과 사후에 필사본으로 전해졌고, 대부분은 20세기에 들어서야 인쇄되었다.
오늘날 남양주의 다산 유적지에는 그의 생가와 묘, 기념관이 있고, 강진의 다산초당에도 해마다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그의 이름은 학교, 거리, 상 이름에 쓰이며, 『목민심서』는 공직자에게 자주 권하는 책이다.
심화
경학, 그리고 성리학 비판
오늘날에는 경세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정약용 저술의 가장 큰 부분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상서』, 『주역』, 『시경』과 예서(禮書)에 관한 경학 주석이다. 그는 한·송·명·청 학자들의 해석은 물론 조선에 전해진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같은 일본 유학자들의 저술까지 비교하며, 옛 성인의 본뜻이라고 여긴 것을 되찾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조선 학문을 지배하던 주자학 정통과 결별했다. 이(理)와 기(氣)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비판하고, 인(仁) 같은 덕은 타고난 실체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의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또 청대에 벌어진 『상서』 고문(古文) 편의 진위 논쟁에 참여해, 중국 고증학자들처럼 그것이 후대의 위작이라고 논했다(『매씨서평』).
이런 사상의 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일부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같은 천주교 서적이, 특히 상제 개념과 자유로운 도덕적 선택 개념에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다른 이들은 이전 유학 사상, 성호 이익으로 이어지는 남인 학통, 동아시아 전반의 고증학 흐름과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마크 세턴의 『정약용: 정통 성리학에 대한 한국의 도전』(1997)은 이 논쟁을 다룬 대표적인 영문 연구다.
심화
사료와 판본, 그리고 근대가 만든 다산상
정약용의 생애에 관한 지식은 주로 그 자신의 글, 곧 자찬묘지명, 편지, 시, 서문에서 오며, 여기에 『조선왕조실록』과 1801년 박해 관련 기록 같은 관찬 자료가 더해진다. 그의 자기 서술은 귀중하지만, 자신의 평판과 집안의 명예 회복을 염두에 둔 사람이 쓴 이해관계가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저술 대부분이 필사본으로 남았기 때문에 그 간행은 근대의 사건이었다. 『목민심서』는 1901년 광문사에서 인쇄되었다. 문집 『여유당전서』는 외현손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안재홍이 교열에 참여해 1934~1938년 신조선사에서 154권 76책으로 간행했다. 이는 1936년 서거 100주년 무렵이자, 일제 강점기 학자들이 자주적 근대 사상의 뿌리를 한국의 과거에서 찾던 ‘조선학 운동’과 맞물렸다. 현대의 교감본은 본문을 계속 바로잡고 제자들이 쓴 글을 가려내고 있다.
‘실학’이라는 범주 자체도 상당 부분 20세기에 만들어졌다. 남북한의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정약용을 한국이 스스로 근대를 향해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근대 지향적 사상가로 그렸는데, 이는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맞선 ‘내재적 발전론’과 이어져 있었다. 최근 학자들은 이 틀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가 군주제 안에서 활동한 유교 개혁가였고 실학이 하나의 통일된 학파가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천주교, 서양 과학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논의는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의 시대 속에 더 단단히 자리매김한다.
핵심 개념
- 실학
- 유학을 토지·조세·법·기술의 실제 개혁으로 돌린 조선 후기 학자들을 가리키는 근대의 이름. 정약용은 그 집대성자로 평가된다.
- 목민(牧民)
-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관리는 백성을 돌보기 위해 있다는 이상. 수령 지침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 여전제
- 마을 단위로 땅을 함께 경작하고 노동량에 따라 수확을 나누어, 땅을 가는 사람이 그 열매를 받게 하자는 제안.
- 백성에게서 나온 통치자
- 통치자는 본래 백성의 선택에서 비롯되었고 제 구실을 못 하면 바꿀 수 있다는 「원목」·「탕론」의 주장.
- 성기호설
- 인간의 본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기호이며, 덕은 스스로 선택한 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이론.
- 상제(上帝)
- 고대 경전에 나오는 인격적 하느님. 정약용은 상제가 인간의 행위를 굽어보며 도덕적 삼감을 이끈다고 보았다.
- 고증학적 경학
- 고대 문헌을 문헌학적으로 꼼꼼히 따져 본뜻을 되찾으려는 학문. 정약용은 이를 통해 후대 성리학의 해석을 비판했다.
기록
- 1762년 — 경기도 광주 마재에서 태어나다.
- 1784년 —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대해 듣다.
- 1789년 — 문과에 급제해 정조를 섬기기 시작하다.
- 1792년 — 화성 설계에 참여하고 거중기를 고안하다. 화성은 1794~1796년에 쌓았다.
- 1797년 — 천주교와의 관계를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고 곡산 부사가 되다.
- 1800년 — 정조가 세상을 떠나다.
- 1801년 — 신유박해로 형 정약종이 처형되고, 정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되다.
- 1808년 — 다산초당으로 옮겨 1818년까지 머물다.
- 1817년 — 『경세유표』를 쓰다.
- 1818년 —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다.
- 1836년 — 혼인 60주년 되는 날 마재에서 세상을 떠나다.
- 1934년 — 문집 『여유당전서』 간행이 시작되다(1938년 완간).
용어 풀이
- 조선
- 1392년부터 1897년까지 이어진 한국의 왕조.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 남인
- 정약용 집안이 속한 조선의 붕당. 초기 천주교 신자 상당수가 이 계열에서 나왔다.
- 규장각
- 정조가 1776년 세운 왕실 도서관이자 연구 기관.
- 화성
- 정조 때인 1794~1796년에 쌓은 수원의 성곽.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 거중기
- 정약용이 화성 공사 때 돌을 들어 올리려고 설계한 도르래 기중기.
- 신유박해
- 1801년(신유년)의 천주교 박해. 집권 세력의 정적 제거 수단이기도 했다.
- 황사영 백서
- 1801년 조선 천주교를 위해 서양의 도움을 청하려고 비단에 쓴 비밀 편지. 발각되어 박해가 더 심해졌다.
- 다산초당
- 정약용이 1808년부터 1818년까지 살며 저술한 강진의 초가.
- 수령
- 임금이 임명해 고을을 다스리게 한 지방관. 『목민심서』의 주된 대상이다.
- 여유당전서
- 1934~1938년에 간행된 정약용의 전집.
묻고 답하기
왜 ‘다산’이라고 부르나요?
다산은 ‘차 산’이라는 뜻이에요. 그가 귀양살이한 강진의 언덕 이름인데, 그것을 호로 삼았어요.
정말 기중기를 발명했나요?
기계에 관한 중국과 서양의 책을 참고해서 도르래를 쓴 들어 올리는 기계, 거중기를 설계했어요. 화성을 쌓을 때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드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왜 귀양을 가게 되었나요?
그와 가족이 금지된 종교인 천주교와 관련되어 있었고, 정조가 죽은 뒤 정치적 반대파가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에요. 귀양은 18년 동안 이어졌어요.
『목민심서』는 무엇을 가르치나요?
고을 관리가 정직하고 신중하게 다스리도록 가르칩니다. 자기를 다스리고, 부패한 아전을 막고,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고, 재판을 바르게 하고, 가난하고 아프고 굶주린 사람을 돌보라고 합니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였나요?
젊은 시절 초기 천주교 공동체와 관계를 맺었지만 1797년 공식적으로 이를 버렸다고 밝혔습니다. 만년에 신앙으로 돌아갔는지는 논란이 있으며, 믿을 만한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는 ‘근대적’ 사상가였나요?
통치자, 토지, 인간 본성에 관한 그의 생각은 흔히 근대 사상과 비교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는 그가 자기 시대의 유교 개혁가였으며, 그를 근대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에는 20세기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고 강조합니다.
서학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그는 역학·천문학·종교에 관한 서양 저술의 한문 번역본을 공부했습니다. 그것이 유교 경전과 동아시아 고증학에 견주어 그의 철학을 얼마나 깊이 형성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조광, 정약용(丁若鏞).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목민심서(牧民心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강진 정약용 유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Jeong Yak-yong. Wikipedia
- 정약용. 위키백과
- Catholic Persecution of 1801. Wikipedia
- Hwaseong Fortress. Wikipedia
- Silhak. Wikipedia
- Mark Setton, Chong Yagyong: Korea’s Challenge to Orthodox Neo-Confucianism.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7
- 정약용 지음, 최병현(Choi Byonghyon) 옮김, Admonitions on Governing the People: Manual for All Administrato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