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270년 전, 서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 우스만이라는 아이가 선생님 집안에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배운 사람’이라는 뜻의 ‘포디오’라고 불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이를 ‘단 포디오’, 곧 ‘배운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어요.
우스만의 첫 선생님은 어머니와 할머니였고, 나중에는 아버지와 여러 학자에게 배웠어요.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익히고, 법과 시,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야기를 공부했지요. 스무 살 무렵부터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우스만은 오랫동안 이 마을 저 마을을 걸어 다니며 설교했어요. 임금은 공정해야 하고, 세금을 너무 많이 걷으면 안 되며, 사람을 함부로 노예로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요.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글을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고 했어요. 가난한 농부와 목동들이 그의 말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 땅의 하우사 왕들은 우스만을 따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걱정이 되었어요. 고비르의 왕은 한때 우스만의 제자였는데도 그를 막으려 했고, 목숨까지 노렸다고 해요. 1804년 우스만과 따르는 사람들은 살던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곧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4년 동안 싸운 끝에 우스만 쪽이 하우사 왕들을 이겼어요. 그들은 소코토라는 새 수도를 세우고 여러 지역을 하나의 큰 이슬람 나라로 묶었어요. 역사학자들은 이 나라를 소코토 칼리파국이라고 불러요.
우스만은 화려한 임금 노릇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나라 일은 아들과 동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시 가르치고 글 쓰는 일로 돌아갔지요. 그는 책을 백 권 넘게, 시도 아주 많이 썼어요. 딸 나나 아스마우도 유명한 시인이자 선생님이 되었어요. 오늘날에도 나이지리아의 많은 사람은 그를 그냥 ‘셰후’, 곧 ‘스승님’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어려운 면도 있어요. 새 나라는 전쟁을 많이 치렀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이 노예가 되었어요. 역사학자들은 그가 남긴 좋은 점과 아픈 점을 함께 연구해요.
한눈에 보기
- 생애
- 1754년 12월 15일 ~ 1817년 4월 20일
- 출생
- 하우사 왕국 고비르의 마랏타(오늘날 니제르·나이지리아 접경 지역). 주로 데겔에서 자람
- 사망
- 자신이 세운 나라의 수도 소코토(오늘날 나이지리아 북서부)
- 민족과 언어
- 학자 가문인 토론카와 계열의 풀라니(풀베)족. 아랍어·풀풀데어·하우사어로 저술
- 종교 전통
- 수니파 이슬람, 말리키 법학파, 까디리야 수피 교단
- 업적
- 개혁 설교, 1804~1808년 지하드, 소코토 칼리파국 건국, 여성 교육 장려
- 칭호
- 셰후(샤이흐), 아미르 알무으미닌(신도들의 지휘자) — 1804년 구두에서 추대
- 후계
- 소코토의 아들 무함마드 벨로, 과두의 동생 압둘라히 단 포디오
쉬움
우스만 단 포디오는 누구인가
우스만 단 포디오는 나라를 세운 이슬람 선생이었다. 그는 1754년 사하라 사막 남쪽 사바나에 자리한 여러 하우사 왕국 가운데 하나인 고비르에서 태어났다. 평생 대부분을 군인이나 왕이 아닌 학자이자 설교자로 살았다. 그러나 1817년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그가 이끈 운동은 옛 하우사 왕들을 몰아내고 소코토의 지도자 한 사람에게 충성하는 여러 에미르국의 연결망을 만들어 놓았다.
나이지리아 북부 사람들은 흔히 그를 그냥 ‘셰후’라고 부른다. 원로나 존경받는 스승을 뜻하는 아랍어 ‘샤이흐’의 하우사어 형태다. 추종자들은 그에게 이슬람 역사에서 칼리파들이 쓰던 칭호인 ‘아미르 알무으미닌’, 곧 ‘신도들의 지휘자’라는 이름을 바쳤다. 그가 사람들을 참된 이슬람 실천으로 되돌리려 했다는 점에서 일부 무슬림은 그를 신앙의 ‘갱신자(무잣디드)’로 여긴다.
그는 여러 모습으로 기억된다. 종교 개혁가, 세 언어로 책과 시를 쓴 저술가, 여성 교육의 옹호자, 그리고 전쟁을 치르고 노예 노동에 크게 기댄 강력한 국가의 창건자. 공정한 그림을 그리려면 이 모두를 함께 보아야 한다.
쉬움
학자 집안
우스만은 풀라니족 이슬람 학자 씨족인 토론카와 출신이다. 집안 전승에 따르면 이들의 조상은 몇 세기 전 세네갈강 유역의 푸타 토로에서 동쪽으로 옮겨 와 하우사 사람들 사이에 정착했다. 아버지 무함마드는 ‘배운 사람’을 뜻하는 풀풀데어 칭호 ‘포디예’로 불렸고, ‘단 포디오(포디오의 아들)’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이 집안에서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학문을 이어 갔다. 우스만의 첫 스승은 어머니 하우와였고, 할머니 루카이야는 존경받는 수행자이자 선생으로 알려졌다. 우스만은 아버지에게 꾸란을 배운 뒤 친척들과 영향력 있는 개혁파 학자 지브릴 이븐 우마르 등 여러 스승을 찾아갔다. 지브릴은 무슬림이 불의한 통치자에 맞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가족은 우스만이 태어난 마랏타에서 고비르의 데겔로 옮겼다. 데겔은 이후 약 30년 동안 그의 삶과 가르침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스무 살 무렵부터 공부를 계속하면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는 스승을 찾아 옮겨 다니며 지식과 수학 증명을 모으던 서아프리카 학자들에게 흔한 방식이었다.
쉬움
떠돌이 설교자
1774년 무렵부터 우스만은 동생 압둘라히와 함께 고비르, 케비, 잠파라를 돌아다니며 설교했다. 학자들을 위해서는 아랍어로 논저를 쓰고,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고 외울 수 있도록 풀풀데어와 하우사어로 시를 지었다.
그의 메시지는 무슬림, 특히 무슬림 통치자가 이슬람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거운 세금, 뇌물, 땅과 소의 강탈, 무슬림을 부당하게 노예로 삼는 일, 이슬람과 옛 종교 의례를 뒤섞는 관행을 비판했다. 지식을 독점하거나 여성을 가르치지 않아 공동체의 절반을 내버려 둔 학자들도 꾸짖었다.
가난한 농민, 소를 세금으로 빼앗긴 목축민, 도망친 노예처럼 하우사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서 희망을 찾았다. 풀라니 목축민, 하우사 농민, 일부 투아레그인이 그의 공동체에 합류했고, 이 공동체는 ‘자마아(공동체)’라고 불렸다. 구성원들은 터번과 베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쉬움
스승에서 ‘신도들의 지휘자’로
처음에 고비르 왕들은 우스만을 용인했고 존중하기까지 했다. 1780년대 후반(사료마다 연도가 다르다) 바와 왕은 그를 불러 선물을 내렸다. 공동체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우스만은 재물을 사양하고 대신 다섯 가지를 청했다. 설교의 자유, 그의 부름에 응할 자유, 터번 쓴 사람들에 대한 존중, 죄수 석방, 그리고 백성의 세금 경감이었다.
뒤를 이은 왕들은 달랐다. 고비르의 나파타는 설교를 금하고 터번과 베일 착용을 막았으며 개종자들에게 옛 종교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 후계자 윤파는 한때 우스만의 제자였지만 스승에게 등을 돌려 무슬림 공동체를 공격했고, 무슬림 측 사료에 따르면 우스만을 암살하려 했다.
1804년 2월 우스만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데겔을 떠나 며칠 거리의 구두로 옮겨 갔다. 그들은 이 이주를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일을 본떠 ‘히즈라’라고 불렀다. 구두에서 추종자들은 그를 아미르 알무으미닌으로 받들어 충성을 맹세했고, 고비르는 전쟁을 선포했다. 쉰 살 무렵이던 우스만은 직접 싸우지 않았고, 군사 지휘는 동생 압둘라히, 아들 무함마드 벨로 등이 맡았다.
중급
1804~1808년의 지하드
말도 무기도 부족했던 우스만의 공동체에게 전쟁의 출발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1804년 6월 타브킨 크워토에서 압둘라히가 이끈 소수의 군대가 고비르 기병을 무찌르자 망설이던 많은 사람이 운동에 합류했다. 그해 말 고비르 수도 알칼라와 근처 춘추아에서는 무슬림 쪽이 크게 패했다. 무함마드 벨로는 훗날 약 2,000명이 죽었고 그중 200명이 꾸란을 통째로 외운 이들이었다고 썼다.
전투만큼이나 굶주림이 전쟁의 흐름을 좌우했다. 역사학자 머리 라스트는 공동체의 이동 상당수가 식량·물·목초지를 찾아 나선 결과로 설명된다고 보았다. 지하드 세력은 1805년 케비를 점령하고 과두에 근거지를 마련했으며, 그곳에서 고비르·투아레그·케비 연합군의 공격을 다시 버텨 냈다.
우스만은 ‘깃발 수령자’라 불린 지역 지도자들을 임명해 저마다 고향으로 돌아가 지하드를 이끌게 했다. 이로써 지역 분쟁이 하우사 땅 전체의 운동으로 커졌다. 1807년 카치나와 카노가 무너졌고, 1808년 알칼라와가 함락되며 윤파가 죽었다. 그러나 보르누는 정복하지 못했다. 보르누의 학자이자 정치가 무함마드 알카네미는 무슬림끼리 싸우는 일의 법적 정당성을 문제 삼으며 소코토 지도자들과 유명한 서신 논쟁을 벌였다.
우스만의 지지자들은 이 전쟁을 방어 투쟁이자, 이슬람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불신자인 통치자들에 맞선 종교적 의무로 설명했다. 반대편은 이를 반란이자 정복으로 보았다. 현대 역사학자들도 이것이 종교 운동인지, 풀라니족의 민족 봉기인지, 과세와 억압에 시달린 이들의 반란인지를 두고 논쟁한다. 오늘날 다수는 종교적 지도력을 강조하면서도 대중의 지지를 끌어낸 사회·경제적 불만을 함께 인정한다.
중급
소코토 칼리파국의 건설
1809년 무함마드 벨로는 소코토의 진영을 성벽 도시로 바꾸었고, 이곳이 수도가 되었다. 새 나라는 하나로 빈틈없이 다스려지는 왕국이 아니라 에미르국들의 연합체였다. 각 에미르는 신도들의 지휘자에게서 깃발을 받아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며 자기 영역을 다스렸고, 공물을 보내며 소코토의 종교적·정치적 권위를 인정했다.
우스만은 곧 일상적인 통치에서 물러났다. 1809~1812년 무렵 행정이 둘로 나뉘어, 압둘라히가 과두에서 서부 에미르국들을, 무함마드 벨로가 소코토에서 동부를 맡았다. 우스만은 몇 해 동안 시파와에 머물며 가르치고 글을 쓰다가 1815년 소코토로 옮겼고, 벨로가 그를 위해 집을 지었다. 그는 1817년 4월 20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벨로가 뒤를 이었다.
원칙적으로 관리는 세습이 아니라 학식과 경건함에 따라 뽑혀야 했고, 국가는 무슬림 재판관, 시장 감독관, 예배 인도자를 임명했다. 모든 땅은 공동체 전체의 와크프(종교 기부 재산)로 선언되었다. 통치자는 가문에 땅을 나누어 주었고, 가문은 이를 상속할 수는 있어도 팔 수는 없었다. 세금도 이슬람법의 범주에 따라 다시 짜였다.
칼리파국은 우스만이 죽은 뒤에도 수십 년 동안 계속 커졌다. 19세기 중반에는 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에서 카메룬까지 뻗어 30개가 넘는 에미르국을 거느렸고, 인구는 흔히 1,000만~2,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중급
사상: 정의, 법, 앎
우스만의 사상은 말리키 법학과 수피 영성을 아울렀다. 그는 까디리야 교단에 속했고 신비 체험을 기록했다. 1789년의 환시를 계기로 자신이 특별한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믿게 되었고, 1790년대에는 교단 창시자 압드 알까디르 알질라니를 환시 속에서 만났다고 전했다. 그가 남긴 기도문(위르드)은 지금도 암송된다.
정의는 그의 정치사상의 중심이었다. 그의 글과 연결되어 전하는 말 가운데, 앞선 이슬람 정치사상을 이어받아 ‘나라는 불신앙과 함께는 버틸 수 있어도 불의와 함께는 버틸 수 없다’는 취지의 가르침이 있다. 그는 억압, 뇌물, 부당한 세금, 토지 강탈, 거짓 혐의로 인한 투옥을 비난하고, 국고(바이트 알말), 시장 감독(히스바), 자카트, 기부 재산 같은 제도를 되살리자고 주장했다.
그는 무슬림 통치와 비무슬림 통치 사이에도 뚜렷한 선을 그었다. 『탄비흐 알이크완』에서 그는 땅의 성격은 통치자를 따른다고 보았다. 불신자가 다스리는 땅은 불신의 땅이며, 무슬림은 그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우사 왕들이 실천에서 불신자라는 그의 판단과 결합되어, 이 논리는 히즈라와 지하드를 정당화했다.
세 번째 주제는 교육이었다. 그는 여성을 무지 속에 ‘짐승처럼 버려둔’ 학자들을 비판했고, 여성과 남성을 함께 가르쳤으며 아들과 딸을 똑같이 교육했다. 이 때문에 당대 일부 학자들과 논쟁을 벌였고, 그의 집안에는 여성 학문의 전통이 자리 잡았다.
중급
저술과 시, 그리고 집안의 여성 학자들
우스만은 학자들을 위해서는 아랍어로, 더 넓은 독자를 위해서는 아랍 문자로 적은 풀풀데어와 하우사어(아자미)로 썼다. 저술 규모에 대한 추정은 엇갈린다. 현대 학자들은 백 편이 넘는 산문 저작을 꼽고, 시의 수는 무엇을 포함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나이지리아 학자 이스마일 발로군은 115편의 목록을 정리했다.
대표작으로는 올바른 실천의 안내서인 『이흐야 알순나 와 이크마드 알비드아(순나의 부흥과 이단의 소멸)』, 정의로운 무슬림 통치를 하우사 왕들의 방식과 대비한 『키탑 알파르크(차이의 책)』, 히즈라·지하드·통치를 다룬 법학 논저 『바얀 우주브 알히즈라 알라 알이바드(이주 의무의 해설)』, 『탄비흐 알이크완』, 『누르 알알밥』, 그리고 ‘와시카트 아흘 알수단’으로 알려진 회람 서한이 있다.
동생 압둘라히와 아들 무함마드 벨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압둘라히의 『타즈인 알와라카트』와 벨로의 『인파크 알마이수르』 같은 지하드 기록은 핵심 사료다. 나나 아스마우의 저술까지 더하면, 소코토 운동은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 역사에서 내부자 기록이 가장 풍부한 사건 가운데 하나다.
우스만의 딸 나나 아스마우(1793~1864)는 소코토 칼리파국에서 가장 칭송받는 작가가 되었다. 데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지하드를 겪었고, 아랍어·풀풀데어·하우사어로 된 60편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오빠 무함마드 벨로와 이후 통치자들에게 조언했다.
1838년 그녀는 ‘얀 타루(함께 모이는 사람들)’라는 여성 교사 연결망을 만들어, 칼리파국에 새로 편입된 지역을 포함한 농촌 여성들을 가르치게 했다. 아버지의 저작을 현지어로 옮기고 다듬어 아랍어를 읽는 엘리트 너머로 그의 사상을 퍼뜨렸다. 베일과 남녀 구분을 당연시하던 사회의 규범 안에서, 그의 집안 여성들은 공인된 학자로서 공부하고 가르치고 글을 썼다.
중급
전쟁과 노예제: 이야기의 다른 면
지하드와 뒤이은 칼리파국의 팽창은 큰 고통을 낳았다. 마을이 약탈당하고 도시가 불탔으며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붙잡혔다. 복종을 거부한 공동체, 특히 칼리파국 변경의 여러 비무슬림 민족에게 이 나라는 무엇보다 노예 사냥의 근원이었다.
우스만은 자유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일을 비난했지만, 그가 해석한 이슬람법은 전쟁에서 사로잡은 비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했다. 그의 후계자들 아래에서 노예 사냥과 플랜테이션 농업은 크게 늘었다. 폴 러브조이와 얀 호겐도른 같은 역사학자들은 1900년 무렵 칼리파국에 적어도 100만, 많게는 25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추산하며, 이는 근대 세계에서 가장 큰 노예 사회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고 해서 개혁가이자 학자로서 우스만의 역할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나이지리아와 이웃 나라의 여러 공동체, 특히 정복당하거나 노예가 된 이들의 후손이 그의 유산을 서로 다르게 읽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중급
서아프리카와 그 너머에 남긴 유산
우스만의 운동은 이미 분두, 푸타 토로, 푸타 잘롱에 국가를 세운 서아프리카 이슬람 개혁의 긴 물결에 속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다시 후대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세쿠 아마두는 니제르강 내륙 삼각주에 마시나 국가를 세웠고(이 나라는 젠네를 지배하게 된다), 소코토에 머물렀고 우스만 집안과 혼인한 알하지 우마르 탈은 투쿨뢰르 제국을 세웠다.
칼리파국은 1903년 프레더릭 루가드가 이끈 영국군이 소코토를 점령할 때까지 이어졌고, 영토의 다른 부분은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차지했다. 영국은 칼리파국의 주권을 없앴지만 에미르들과 소코토 술탄을 간접 통치 체제의 일부로 남겨 두었다. 우스만의 후손인 소코토 술탄은 지금도 많은 나이지리아 무슬림에게 가장 중요한 전통 종교 지도자다.
독립 나이지리아에서 그의 이름은 소코토의 우스마누 단포디요 대학교에 남아 있고, 그의 글과 말은 널리 인용된다. 북부 나이지리아의 첫 총리이자 무함마드 벨로의 후손인 아마두 벨로를 비롯한 북부 정치인들은 칼리파국을 도덕적 통치의 본보기로 삼았다.
심화
사료, 이름, 해석: 칼리파국인가 제국인가 혁명인가
우스만에 대한 지식은 압도적으로 운동 자체의 기록에서 나온다. 그의 논저와 시, 압둘라히의 『타즈인 알와라카트』, 무함마드 벨로의 『인파크 알마이수르』, 동료와 가족을 나열한 와지리 기다도의 『라우드 알지난』, 나나 아스마우의 시 등이다. 이 기록들은 풍부하고 자세하며 사건과 가까운 시기에 쓰였지만, 지하드가 정당했고 적들이 불신자였음을 해명하려는 변증적 성격도 띤다.
하우사 왕들과 비무슬림 공동체의 시각은 훨씬 간접적으로만, 주로 구전, 보르누의 알카네미가 낸 반론, 후대 식민지 민족지를 통해 전한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윤파의 암살 시도나 고비르 왕들의 ‘이교’에 관한 서술이 사실과 함께 논쟁적 수사를 담고 있지 않은지 따져 가며 소코토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는다.
연대도 문제다. 바와 왕과의 만남(1780년대), 지브릴 이븐 우마르에게 배우기 시작한 때, 윤파의 즉위(1801~1803), 통치에서 물러난 때(1809~1812)에 대해 사료마다 연도가 다르다. 이슬람력과 그레고리력 사이의 환산도 불확실성을 더한다. 이 페이지는 사료가 엇갈리는 곳에서 범위를 제시했다.
식민지 시대 영국 저술가들은 대개 이 나라를 ‘풀라니 제국’이라 불러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1960년대 자리아의 아마두 벨로 대학교에서 압둘라히 스미스와 그의 제자 머리 라스트가 ‘소코토 칼리파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웠고, 라스트의 1966년 박사 논문과 1967년 같은 제목의 책이 이 용어를 표준으로 만들었다. 라스트는 훗날 이 선택이 제대로 된 이슬람적 범주를 쓰려는 학문적 이유와 함께, 새 북부 나이지리아 정부가 칼리파국에서 도덕적 본보기를 찾으려 했다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고 밝혔다. 일부 학자, 특히 프랑스어권(l’empire peul)은 여전히 옛 이름을 선호한다.
해석도 그에 따라 갈린다. 머빈 히스켓의 전기 『진리의 검(The Sword of Truth)』에서 두드러지는 한 흐름은 우스만을 무엇보다 이슬람 갱신(타즈디드) 전통 안의 종교 개혁가로 읽는다. 또 다른 흐름은 약탈적 과세와 노예 사냥에 맞선 농민·목축민의 사회 혁명을 강조한다. 세 번째 흐름은 새 에미르가 거의 모두 풀라니였다는 점을 들어 풀라니족의 민족적 결속을 강조한다. 최근 연구 대부분은 이들을 배타적인 설명이 아니라 서로 얽힌 요인으로 다룬다.
폴 러브조이는 이 지하드를 미국·프랑스·아이티 혁명과 나란히 세계적 ‘혁명의 시대’ 안에 놓았다. 서아프리카의 지하드가 그 시대의 큰 정치 격변 가운데 하나였고, 그 포로들이 대서양 너머로 경험을 가져가 브라질 바이아의 노예 반란 등에 이어졌다는 것이다. 영향력 있는 틀이지만, 지하드의 목표가 세속적 공화주의와 달랐다는 점에서 논쟁도 있다.
심화
법적 논리: 타크피르, 히즈라, 지하드의 정당성
가장 논쟁적인 지적 쟁점은 명목상의 무슬림을 불신자로 선언하는 ‘타크피르’였다. 우스만의 스승 지브릴 이븐 우마르는 중대한 죄가 사람을 이슬람 밖으로 내몰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우스만은 훗날 그와 의견을 달리해 일반 신자에 대해서는 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통치자에 대해서는, 정령에 대한 제사, 부당한 몰수, 비이슬람적 관습의 비호 같은 행위 때문에 하우사 술탄들이 ‘이슬람을 고백하더라도’ 불신자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바얀 우주브 알히즈라』 같은 저작에 담긴 법적 논리의 사슬이 나온다. 불신자 통치자 아래 사는 무슬림은 할 수 있다면 이주해야 하고, 이주한 공동체는 이맘을 뽑아야 하며, 그 이맘은 합법적으로 지하드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코토 지도자들은 송가이 통치자에게 보낸 15세기 학자 무함마드 알마길리의 답변을 비롯한 말리키·북아프리카 권위자들, 그리고 알마와르디의 통치론에 크게 기댔다.
보르누의 알카네미는 바로 이 논리에 맞서, 보르누는 무슬림의 땅이며 통치자의 잘못이 전쟁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와 무함마드 벨로가 주고받은 서신은 아프리카 이슬람 정치 논쟁의 중요한 문헌이며, 지하드의 정당성이 후대 비판자들만이 아니라 당대 무슬림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투어졌음을 보여 준다.
핵심 개념
- 타즈디드(갱신)
- 신이 갱신자(무잣디드)를 보내 참된 이슬람 실천을 되살린다는 생각. 추종자들은 우스만을 그런 인물로 보았다.
- 히즈라(이주)
- 예언자의 메디나 이주를 본뜬, 억압의 땅을 떠나는 일. 1804년 데겔에서 구두로의 이주가 이렇게 규정되었다.
- 지하드
- 여기서는 공인된 무슬림 지도자가 불신자나 압제자로 판단한 통치자에 맞서 선포한 무력 투쟁. 우스만은 개혁과 배움이라는 내적 분투도 강조했다.
- 통치의 기초로서의 정의
- 나라는 불신앙은 견뎌도 불의는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뇌물·과세·몰수를 공격했다.
- 여성을 포함한 모든 무슬림의 교육
- 지식은 나누어야 하며, 여성을 무지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학자의 실패라고 보았다.
- 에미르국 연합
- 중앙 관료제가 아니라 신도들의 지휘자에 대한 충성으로 묶인 반자치 에미르국들의 칼리파국.
- 현지어로 전한 가르침
- 아랍 문자로 적은 풀풀데어·하우사어 시(아자미)가 아랍어를 모르는 이들에게 종교 가르침을 전했다.
기록
- 1754년 — 고비르의 마랏타에서 태어나다(12월 15일).
- 약 1774년 — 고비르, 케비, 뒤이어 잠파라에서 순회 설교를 시작하다.
- 약 1788년 — 고비르의 바와 왕에게 불려 가 설교·죄수·세금에 관한 양보를 얻어 내다(사료마다 연도가 다르다).
- 1789년 — 신비 체험을 통해 특별한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하다.
- 1793년 — 딸 나나 아스마우가 데겔에서 태어나다.
- 약 1802년 — 옛 제자 윤파 왕이 등을 돌리다. 무슬림 사료는 암살 시도를 전한다.
- 1804년 — 2월 데겔에서 구두로 히즈라. 아미르 알무으미닌으로 추대되고 고비르와 전쟁이 시작되다. 6월 타브킨 크워토 승리, 이후 춘추아 패배.
- 1805년 — 지하드 세력이 케비를 점령하고 이어 과두에 자리 잡다.
- 1808년 — 고비르의 수도 알칼라와가 함락되고 윤파가 죽다.
- 1809년 — 무함마드 벨로가 소코토를 성벽 도시로 세우고, 이곳이 수도가 되다.
- 1815년 — 시파와에서 몇 해를 보낸 뒤 소코토로 옮기다.
- 1817년 — 소코토에서 세상을 떠나다(4월 20일). 무함마드 벨로가 뒤를 잇다.
용어 풀이
- 셰후
- ‘원로’, ‘스승’을 뜻하는 샤이흐의 하우사어 형태. 나이지리아에서 우스만을 부르는 친근한 이름.
- 아미르 알무으미닌
- ‘신도들의 지휘자’. 1804년 추종자들이 우스만에게 바친 칼리파의 칭호.
- 하우사 왕국들
- 오늘날 나이지리아 북부와 니제르 남부에 있던 고비르, 카노, 카치나, 자자우, 잠파라 같은 도시국가들.
- 풀라니(풀베)족
- 서아프리카 곳곳에 퍼진 민족. 목축민이 많고 오랜 이슬람 학문 전통이 있으며 풀풀데어(풀라어)를 쓴다.
- 자마아
- ‘공동체’. 지하드 전후 우스만 추종자들을 부르던 이름.
- 말리키 법학파
- 수니파 4대 법학파 가운데 하나로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서 주류를 이룬다.
- 까디리야
- 압드 알까디르 알질라니(1166년 사망)의 이름을 딴 수피 교단. 우스만과 역대 소코토 술탄이 속했다.
- 에미르국
- 소코토의 신도들의 지휘자에게서 권위(와 깃발)를 받은 에미르가 다스린 지방.
- 아자미
- 하우사어·풀풀데어 같은 아프리카 언어를 아랍 문자로 적은 것.
- 와크프
- 종교 기부 재산. 지하드 뒤 모든 땅이 공동체의 와크프로 선언되었다.
묻고 답하기
‘단 포디오’는 무슨 뜻인가요?
‘포디오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포디예는 ‘배운 사람’을 뜻하는 풀풀데어 칭호로, 아버지 무함마드가 얻은 이름이에요.
우스만이 직접 전투에 나갔나요?
아니요. 전쟁이 시작될 때 쉰 살 무렵이었고 전장에서 지휘하지 않았어요. 동생 압둘라히, 아들 무함마드 벨로 등이 군대를 이끌었어요.
왜 여자아이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나요?
모든 무슬림에게 종교 지식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여성을 무지하게 내버려 둔 학자들을 비판했어요. 딸들을 직접 가르쳤고, 그중 나나 아스마우는 유명한 선생님이자 시인이 되었어요.
지금의 소코토 술탄은 그의 후손인가요?
네. 소코토 술탄은 우스만의 후손이에요. 1903년 이후 주권적인 정치 권력은 없지만, 많은 나이지리아 무슬림에게 중요한 종교 지도자예요.
지하드는 풀라니족의 민족 전쟁이었나요?
강조점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습니다. 새 에미르 대부분이 풀라니였지만 하우사 농민과 일부 투아레그인도 참여했고, 지도자들은 이를 종교적 언어로 규정했습니다. 오늘날 다수는 종교·사회·민족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고 봅니다.
그의 생애 기록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자세하지만 대부분 지하드를 정당화하려던 가족과 추종자가 쓴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보르누의 반론이나 구전 같은 다른 증거와 견주어 읽고, 연대는 신중하게 다룹니다.
‘소코토 칼리파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왜 논쟁거리인가요?
1960년대 머리 라스트와 압둘라히 스미스가 식민지 시대 이름인 ‘풀라니 제국’ 대신 이 나라의 이슬람적 성격을 강조하려고 널리 퍼뜨렸습니다. 라스트 자신도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고 인정했고, 일부 학자는 여전히 다른 이름을 씁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Usman dan Fodio. Wikipedia
- Sokoto Caliphate. Wikipedia
- Jihad of Usman dan Fodio. Wikipedia
- Nana Asmaʼu. Wikipedia
- Narasingha P. Sil, Uthman dan Fodio. EBSCO Research Starters
- Murray Last, The Sokoto Caliphate. Longmans, 1967
- Mervyn Hiskett, The Sword of Truth: The Life and Times of the Shehu Usuman dan Fodio. Oxford University Press, 1973
- Paul E. Lovejoy, Jihād in West Africa during the Age of Revolutions. Ohio University Press, 2016
함께 보기
- 팀북투니제르강 가까운 사막 가장자리의 도시로, 사하라 횡단 교역과 이슬람 학문의 서아프리카 중심지가 되었다. 흙으로 지은 모스크와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 젠네 대모스크전승상 13세기에 세워진 모스크 자리에 1906~1907년 젠네 미장이들이 다시 지은, 세계에서 가장 큰 흙벽돌 건축물.
- 만사 무사말리 제국의 통치자로, 메카 순례와 이슬람 학문 후원, 제국의 부로 알려져 있다.
- 이븐 할둔사회와 국가의 변화를 분석한 『무깟디마』를 쓴 북아프리카의 역사가이자 사상가다.
- 아이티 혁명1791년 생도맹그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의 봉기로 시작해 노예제 폐지와 1804년 아이티 독립으로 이어진 혁명.
- 쿠란이슬람의 경전. 무슬림은 610년경부터 632년까지 무함마드에게 아랍어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