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세계에서 가장 큰 더운 사막인 사하라의 끝자락에 있는 도시를 떠올려 보세요. 북쪽으로는 몇 주를 걸어도 모래뿐이고,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니제르강이라는 큰 강이 흘러요. 그 도시가 바로 지금의 말리라는 나라에 있는 팀북투예요.
옛날에는 낙타 대상이 사막을 건너 커다란 소금 덩어리를 실어 왔어요. 강 위의 배는 금과 곡식 같은 물건을 날라 왔지요. 팀북투는 사막 사람들과 강 사람들이 만나 물건을 바꾸는 곳이었고, 그래서 부자 도시가 되었어요.
팀북투 사람들은 책을 무척 사랑했어요. 먼 곳에서 학자들이 와서 가르치고 배웠고, 집안마다 수백 년 동안 손으로 책을 베껴 모았어요. 종교와 법에 관한 책도 있지만 별, 의학, 시, 역사에 관한 책도 있어요.
팀북투의 큰 모스크는 주로 진흙에 짚을 섞어 지었고, 벽에는 나무 막대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어요. 비에 벽이 씻겨 나가지 않도록 사람들이 해마다 함께 새 진흙을 덧발라요. 건물에 새 피부를 입혀 주는 셈이에요.
2012년에 무장 단체가 도시를 차지하고 성스러운 분들의 옛 무덤을 부쉈어요. 용감한 사서들과 주민들은 수십만 권의 옛 책을 쇠 상자에 담아 몰래 안전한 곳으로 옮겼어요. 나중에 이 지역 장인들이 무덤을 다시 지었어요.
어떤 나라에서는 “팀북투까지”라는 말을 “아주아주 먼 곳”이라는 뜻으로 써요.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팀북투는 동화 속 장소가 아니라 길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진짜 도시예요.
한눈에 보기
- 위치
- 말리 북부, 사하라 사막 남쪽 가장자리. 니제르강 본류에서 북쪽으로 15~20km쯤 떨어져 있으며 강 쪽 항구는 카바라
- 기원
- 17세기 『타리흐 알수단』은 1100년 무렵 마그샤란 투아레그인이 세운 계절 야영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함. 영구 도시가 된 시기는 12~14세기로 학자마다 견해가 다름
- 황금기
- 14~16세기. 말리 제국(1324년 무렵부터)과 송가이 제국(1468~1591) 시대
- 3대 모스크
- 징게레베르(만사 무사가 세웠다고 전함, 1325~1327년 무렵), 상코레(14~15세기), 시디 야히아(1400년 무렵 착공, 1440년 무렵 완공)
- 건축 양식
- 나무 들보 위에 진흙 벽돌과 진흙 회반죽을 올린 수단·사헬 양식 흙건축.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벽을 덧발라 유지
- 필사본
- 13세기 말~20세기 초의 필사본 수십만 점. 대부분 아랍어이며 일부는 아프리카 언어를 아랍 문자로 적은 아자미(Ajami)
- 세계유산
-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모스크 3곳, 영묘·묘역 16곳). 1990~2005년, 그리고 2012년부터 다시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 오늘날 언어
- 주로 송가이어 계통의 코이라 치이니어. 타마셰크어, 하사니야 아랍어, 밤바라어도 쓰임. 아랍어는 오랫동안 학문의 언어
쉬움
팀북투는 어떤 곳인가
팀북투는 서아프리카 말리 북부의 도시입니다. 사하라 사막이 니제르강의 범람원과 만나는 곳, 강 본류에서 15~20k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합니다. 오늘날에는 통북투 주의 중심 도시로 수만 명이 살며, 주민 대부분은 송가이어 계통의 코이라 치이니어를 씁니다.
1300년대부터 1500년대 말까지 약 300년 동안 팀북투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낙타 대상이 사막을 건너오고, 배가 강을 거슬러 항구에 닿았으며, 학자들이 찾아와 가르치고 책을 베끼고 법과 신앙을 두고 토론했습니다. 역사적인 모스크 세 곳과 존경받는 학자·성인들의 영묘 여러 곳이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팀북투’라는 말에는 또 하나의 삶이 있습니다. 영어를 비롯한 유럽 언어에서 이 이름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먼 곳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도시 자체보다 유럽이 아프리카를 얼마나 몰랐는지를 보여 줍니다. 서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팀북투는 유럽인에게 아테네가 지니는 의미, 곧 학문의 도시에 곧잘 견주어집니다.
쉬움
사막과 강 사이의 도시
팀북투가 중요했던 비결은 위치였습니다. 니제르강은 사하라 쪽으로 크게 휘어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팀북투는 그 굽이의 꼭대기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막의 동물인 낙타와 강의 탈것인 카누가 만나는 곳이었지요. 물건은 이곳에서 주인이 바뀌어야 했고, 물건을 다루는 사람들은 돈을 벌었습니다.
북쪽에서는 소금이 왔습니다. 사람은 소금 없이 살 수 없는데, 서아프리카의 숲과 초원에는 소금이 귀했고 사하라에는 타가자, 뒤에는 타우데니 같은 암염 광산이 있었습니다. ‘아잘라이’라 불린 거대한 대상이 소금 덩어리를 남쪽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남쪽에서는 강을 따라 금, 곡식, 상아 같은 물건이 올라왔습니다. 노예가 된 사람들도 사막을 건너 거래되었는데, 사료는 이 교역의 아픈 면도 분명히 보여 줍니다.
20세기 후반까지도 수천 마리의 낙타로 이루어진 소금 대상이 1년에 두 번 팀북투를 떠나 북쪽으로 약 660km 떨어진 타우데니로 향했습니다. 편도에 3주쯤 걸렸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트럭이 소금을 나르지만, 여전히 암염 덩어리가 팀북투에 도착해 배에 실려 다른 도시로 갑니다.
강가의 삶은 해마다 찾아오는 홍수에 달려 있었습니다. 니제르강은 멀리 남서쪽의 비로 불어나고, 그 물은 천천히 내려와 12월 말쯤 팀북투에서 가장 높아집니다. 물이 차면 배가 운하를 통해 카바라 항구까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주변 농민들은 물이 차오를수록 키가 자라는 아프리카 벼를 포함해 쌀을 기릅니다.
쉬움
흙 모스크를 ‘읽는’ 법
팀북투의 3대 모스크인 징게레베르, 상코레, 시디 야히아는 역사가들이 ‘수단·사헬 양식’이라 부르는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이 이름은 사하라 남쪽의 건조한 띠인 사헬과, 흑인 아프리카 땅을 가리키던 옛 아랍어 이름 ‘빌라드 알수단’에서 왔습니다. 주재료는 흙입니다. 짚 같은 식물 섬유를 섞은 진흙 벽돌과 진흙 회반죽을 나무 들보 틀 위에 올립니다.
이 건물들을 볼 때는 세 가지를 눈여겨보세요. 첫째, 벽이 비스듬하고 부드럽게 둥근데, 진흙을 손으로 빚기 때문입니다. 둘째, 벽에서 나무 막대가 줄지어 튀어나와 있습니다. 벽을 튼튼하게 하고, 수리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의 붙박이 발판 구실도 합니다. 셋째, 원뿔 모양의 높은 탑이 있습니다. 상코레의 미너렛은 계단식 피라미드처럼 솟아 있습니다.
가장 오래되고 큰 징게레베르에는 안뜰 세 개, 미너렛 두 개, 동서로 늘어선 기둥 25줄이 있고 약 2,000명이 예배할 수 있습니다. 북쪽 정면의 작은 부분과 석회암 블록으로 쌓은 미너렛을 빼면 온전히 흙과 유기 재료로 되어 있습니다. 상코레는 가르침과 가장 깊이 이어진 모스크로, 16세기 후반에 안뜰을 메카 카바의 치수에 맞추어 다시 지었습니다. 시디 야히아는 뒤에 성인으로 추앙된 첫 이맘의 이름을 딴 곳으로, 그의 무덤이 건물 안에 있습니다.
흙 건물은 돌봄이 필요합니다. 비는 회반죽을 무르게 하고 바람은 모래를 몰고 옵니다. 그래서 팀북투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숙련된 미장 장인의 지휘 아래 함께 모스크 벽을 덧발라 왔습니다. 문화유산 전문가들은 이 살아 있는 보수 전통을 이 유산의 중요한 가치로 꼽습니다. 공동체가 계속 새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건물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중급
기원: 야영지에서 도시로
팀북투의 시작을 전하는 대표적인 현지 기록은 팀북투의 학자이자 관리였던 압드 알라흐만 알사디가 1655년 무렵 아랍어로 쓴 연대기 『타리흐 알수단(수단의 역사)』입니다. 그는 계절 야영지로서의 창건을 ‘히즈라력 5세기 말’, 곧 서기 1100년 무렵으로 보고 마그샤란 투아레그인을 창건자로 꼽았습니다. 그들의 여름 야영지가 짐을 맡겨 두는 창고가 되었다가 길손들이 만나는 곳으로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야영지를 돌보던 한 여인의 이름에서 지명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정확한 연대라기보다 전승으로 봅니다. 두꺼운 모래층 때문에 도시 안을 발굴하기가 매우 어렵고, 지금의 시가지 안에서 11~12세기로 확실히 연대가 매겨지는 유적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주변 조사로 보면 이 지역에는 훨씬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습니다. 2008~2010년 예일 대학교와 팀북투 문화사절단이 발굴한 도시 남동쪽 약 9km의 철기 시대 유적 언덕은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사람이 살다가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쇠퇴했습니다.
지명의 뜻도 논쟁거리입니다. ‘구덩이·움푹한 곳’을 뜻하는 송가이어 낱말, ‘작은 모래언덕이 있는 곳’이라는 베르베르어 표현, 알사디가 전한 ‘혹이 있는 여인’ 이야기, ‘멀다·숨겨져 있다’는 뜻의 베르베르어 어근 등이 거론됩니다. 어느 설이 맞는지는 누가 도시를 세웠느냐에 달려 있는데, 그것부터 불확실합니다. 가까운 가오와 달리 팀북투는 초기 아랍 지리학자 알바크리와 알이드리시의 책에 나오지 않는데, 11~12세기에는 아직 작은 곳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중급
말리 제국과 만사 무사
팀북투는 14세기 초 말리 제국에 편입되었습니다. 현지 연대기에 따르면 이름난 군주 만사 무사가 1324~1325년 메카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 도시를 평화롭게 합병하고 왕궁을 짓게 했습니다. 『타리흐 알수단』과 『타리흐 알파타시』는 모두 징게레베르 모스크를 그가 세웠다고 적으며, 전통적으로 1325~1327년 무렵으로 봅니다.
전승에서는 만사 무사와 함께 온 알안달루스 그라나다 출신 시인 아부 이스하크 알사힐리가 이 모스크를 설계했다고 합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의심합니다. 아랍어 사료가 알사힐리와 확실히 연결하는 건물은 말리 수도의 왕실 알현실뿐이며, 서아프리카 모스크 양식은 안달루스 양식보다 주로 사하라의 건축 전통과 현지 아프리카 건축에서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알사힐리가 이 건축을 ‘발명’했다는 이야기를 흔히 신화로 봅니다.
팀북투의 성장은 서쪽, 지금의 모리타니에 있던 오래된 대상 도시 왈라타의 쇠퇴와도 이어져 있습니다. 학자와 상인들이 왈라타에서 팀북투로 옮겨 왔습니다. 모로코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말리 수도에서 돌아오는 길인 1353년에 이곳을 지났을 때, 주민 대부분이 산하자 베르베르의 한 갈래인 마수파 사람이라고 적었을 뿐 학문의 중심지로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375년 마요르카에서 만든 『카탈루냐 지도』에 이 도시가 등장하는데, 유럽 지도 제작자들도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중급
투아레그 지배, 송가이 제국, 그리고 황금기
15세기 초 말리가 약해지자 투아레그 집단이 팀북투를 장악했고, 1433년 무렵 투아레그 지도자 아킬은 도시의 통치를 현지 관리에게 맡겼습니다. 시디 야히아 모스크는 이 무렵인 1400년께 착공되어 1440년께 완공되었습니다. 1468년 또는 1469년, 가오를 수도로 삼은 신흥 송가이 제국의 순니 알리가 도시를 차지했습니다. 순니 알리는 팀북투 학자들과 심하게 충돌했고, 많은 학자가 왈라타로 피신했습니다.
뒤를 이은 아스키아 왕조, 특히 아스키아 무함마드 1세(재위 1493~1528) 때 팀북투는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수도는 여전히 가오였지만, 팀북투는 재판관(카디)과 학자 가문을 통해 상당한 자치를 누렸습니다. 가다메스, 아우질라 등 북아프리카 도시의 상인들이 찾아와 사하라의 소금과 북아프리카의 옷감·말을 내주고 금과 노예를 샀습니다.
대(大)카디 알아키브 이븐 마흐무드는 1570년부터 징게레베르 모스크를 더 크게 다시 지었고, 1578~1582년에는 상코레를 복원했습니다. 유럽에서 ‘레오 아프리카누스’로 알려진 안달루스 출신 여행가는 1512년 무렵 이곳을 찾았고, 뒤에 왕이 많은 학자를 자기 비용으로 부양하며 북아프리카에서 들여온 필사본이 어떤 상품보다 비싸게 팔린다고 썼습니다. 1550년 이탈리아어로 출간된 그의 책은 수백 년 동안 유럽인의 팀북투 상을 만들었습니다.
중급
학자의 도시: 학문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흔히 ‘팀북투 대학’이나 ‘상코레 대학’이라는 말을 씁니다. 편리한 표현이지만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유럽식으로 총장·학적부·학위를 갖춘 중앙 기관은 없었습니다. 대신 학자(울라마)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스크나 자기 집에서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학생은 한 스승 밑에서 길게는 10년까지 도제처럼 배우며, 특정 문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인가(이자자)를 받았습니다.
학문은 가문을 중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대카디를 여럿 낸 아키트 가문 같은 집안이 대대로 학문을 이어 갔고 때로 학생들을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16세기에는 기초 읽기와 꾸란 암송을 가르치는 꾸란 학교가 150~180곳, 학생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그중 훨씬 적은 수백 명 정도가 아랍어 문법, 말리키 법학, 신학, 수사학, 논리학, 산술, 천문학 같은 고등 학문으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이 숫자들은 추정치이며 자료마다 다릅니다.
책이 중심이었습니다. 학자들은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 필사본을 사들여 현지에서 베끼게 했고, 학생들은 필경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천 권이 훨씬 넘는 개인 장서를 모은 학자도 있었습니다. 현지 저자들도 자기 책을 썼고, 널리 퍼진 책도 있었습니다. 팀북투에서 가장 이름난 학자 아흐마드 바바(1556~1627)가 쓴 말리키 법학자 전기 사전 『나일 알이브티하즈』는 마그레브 전역에서 널리 읽혔습니다.
아흐마드 바바의 글은 당대 학문이 어려운 문제와도 씨름했음을 보여 줍니다. 1615년의 법적 견해에서 그는 무슬림 땅의 무슬림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검은 피부 자체가 노예의 표지라는 생각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노예제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고 비무슬림의 노예화는 인정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의 글을 인종 노예제에 대한 도전이자 종교에 근거한 노예제의 옹호로 함께 읽습니다. 팀북투의 학문이 그 나름의 세계와 가치관 속에 있었음을 일깨워 줍니다.
중급
팀북투의 필사본
‘팀북투 필사본’은 수백 년 동안 이 도시의 집과 도서관에 보관되어 온 엄청난 양의 손글씨 문서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대부분 아랍어로 쓰였지만, 풀라어, 송가이어, 타마셰크어, 밤바라어, 소닌케어 같은 아프리카 언어를 아랍 문자로 적은 ‘아자미’ 문서도 있습니다. 대략 13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것입니다.
주제는 폭넓습니다. 꾸란 사본과 법학·신학·수피즘 문헌, 문법서와 사전, 역사와 시, 예배 시각과 달력을 정하는 천문학, 의학과 사막 식물의 약효, 그리고 편지·계약서·판결문 같은 일상 문서가 있습니다. 한 연대기는 1583년 8월의 장관을 이룬 유성우를 묘사합니다. 결혼, 대부, 노예제를 논하는 글도 있고 점성술과 점술을 다룬 글도 있습니다.
그 수는 추정마다 크게 달라 이 지역 전체에 약 30만~70만 점으로 보며, 수십 곳의 공공·개인 도서관에 흩어져 있습니다. 규모가 큰 곳으로는 1970년대 유네스코의 뒷받침으로 설립되어 학자의 이름을 딴 국립 아흐메드 바바 연구소, 맘마 하이다라 도서관, 폰도 카티, 그 밖의 여러 가문 장서가 있습니다. 많은 필사본이 도시가 쇠락한 뒤에도 살아남은 것은 가족들이 궤짝이나 지하실, 심지어 벽 속에 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아직 목록조차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두 연대기 『타리흐 알수단』과 흔히 『타리흐 알파타시』로 불려 온 책은 송가이와 팀북투 역사의 핵심 문헌입니다. 식민지 시대에 사본이 파리로 건너간 뒤, 20세기 초 옥타브 우다와 모리스 들라포스가 프랑스어 번역본을 냈습니다.
중급
정복과 쇠퇴, 그리고 유럽의 신화
1591년 모로코 사아드 왕조의 술탄 아흐마드 알만수르가 보낸 군대가 주다르 파샤의 지휘 아래 화기를 들고 사하라를 건너와 톤디비 전투에서 송가이를 무찔렀습니다. 팀북투는 1591년 5월 30일 점령되었습니다. 1593~1594년 모로코 당국은 불충을 이유로 도시의 학자들을 대거 체포했고, 일부는 죽이고 아흐마드 바바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책과 함께 모로코로 끌고 갔습니다. 아흐마드 바바는 1608년에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로코 병사들과 그 후손은 ‘아르마’라 불리며 현지 지배층이 되었고, 1612년 뒤로는 사실상 모로코에서 독립했습니다. 그 뒤 여러 세기 동안 투아레그, 밤바라, 쿤타 등 여러 세력이 도시를 두고 다투었고, 1826년부터는 마시나 국가가, 1860년대에는 투쿨뢰르 제국이 지배했습니다. 동시에 대서양 해운이 교역을 해안으로 끌어갔습니다. 팀북투의 부와 정치적 비중은 줄었지만 학문과 책 문화는 이어졌습니다.
한편 유럽에서는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묘사한 금과 학문 덕분에 팀북투가 전설이 되었습니다. 1788년 런던에서 창설된 아프리카 협회는 이곳을 찾으려 탐험가를 보냈고, 파리 지리학회는 이곳을 방문하고 살아 돌아오는 첫 비무슬림에게 상금을 걸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인 알렉산더 고든 랭은 1826년 8월 도착했지만 떠난 직후 살해되었습니다. 변장하고 여행한 프랑스인 르네 카이예는 1828년 도착해 무사히 돌아왔고, 이 도시를 “흙으로 지은 볼품없는 집들의 무더기”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실망은 전설을 ‘황금의 도시’에서 ‘세상의 끝’으로 바꾸는 데 한몫했습니다.
1893년 12월 15일 프랑스군이 팀북투를 점령했고, 도시는 식민지 프랑스령 수단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1960년 말리 공화국이 독립할 때까지 프랑스의 지배가 이어졌습니다. 식민 통치 아래 아랍어 교육이 쇠퇴하면서 많은 집안이 필사본을 팔거나 방치했습니다.
중급
2012~2013년: 파괴, 구출, 그리고 재판
2012년 4월 말리의 반란과 군사 위기 속에서 투아레그 분리주의 세력 MNLA와 이슬람주의 단체 안사르 딘이 팀북투를 점령했고, 곧 안사르 딘이 도시를 장악했습니다. 안사르 딘은 성인의 무덤을 공경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여겼습니다. 5월, 그리고 6월 말부터 7월까지 그들은 곡괭이와 괭이로 영묘들을 공격해 징게레베르 모스크의 무덤 두 기를 포함한 여러 무덤을 부수고 시디 야히아 모스크 일부를 훼손했습니다. 유네스코는 2012년 팀북투를 다시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습니다.
2013년 1월 프랑스군과 말리군이 다가오자 무장 세력은 아흐메드 바바 연구소의 새 건물에서 필사본에 불을 질렀습니다. 약 4,200점이 불타거나 도난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미 옮겨진 뒤였습니다. 맘마 하이다라 도서관의 압델 카데르 하이다라와 현지 단체 SAVAMA-DCI가 이끄는 가운데 주민과 운반꾼들이 필사본을 쇠 트렁크에 몰래 담아 약 35만 점을 남쪽 바마코로 옮겼습니다. 2022년에도 약 30만 점이 그곳에 있었고, 습기가 새로운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뒤 현지 장인들이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전통 방식으로 부서진 영묘를 다시 지었습니다. 2016년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안사르 딘의 ‘풍기 단속대’를 이끈 아흐마드 알파키 알마흐디에게 팀북투의 종교·역사 건물을 공격한 전쟁 범죄로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문화유산 파괴를 핵심 범죄로 다룬 첫 ICC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유죄를 인정하고 뉘우침을 밝혔으며 징역 9년을 선고받았고, 재판소는 뒤에 공동체에 대한 배상을 명령했습니다.
불안은 지금도 이어집니다. 2023년부터 알카에다 계열 단체가 도시를 봉쇄해 굶주림과 피란이 이어졌습니다. 팀북투 주민들에게 문화유산 문제는 안전, 먹거리, 생계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심화
사료와 그 문제점
팀북투의 역사는 적은 수의 문헌에 기대며, 문헌마다 관점이 있습니다. 이븐 바투타(1353)와 이븐 할둔 같은 외부 아랍 저자들은 짧은 단서만 줍니다. 1512년 무렵 방문한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수십 년 뒤 이탈리아 독자를 위해 썼고 수사적인 대목도 있어, 역사가들은 조심스럽게 이용합니다. 가장 중요한 내부 사료는 현지 학자들이 아랍어로 쓴 17세기의 ‘팀북투 연대기’, 그리고 18세기 중엽 모로코계 파샤들의 전기 사전 『타드키라트 알니스얀』입니다.
알사디(1594년생)의 『타리흐 알수단』은 아르마 행정부에서 일한 인물이 1655년 무렵 쓴 책입니다. 이른 시기는 주로 구전에 기대며 출처를 거의 밝히지 않았고, 1610년 무렵부터는 목격자로서 썼습니다. 그의 관점은 팀북투 학자 엘리트의 것이어서 통치자 묘사에 영향을 줍니다. 학자들과 충돌한 순니 알리는 폭군으로,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경건한 개혁가로 그려집니다.
이른바 『타리흐 알파타시』는 더 복잡합니다. 1913년 우다와 들라포스의 프랑스어판은 서로 다른 두 문헌을 합친 것입니다. 하나는 학자 마흐무드 카티의 손자 이븐 알무크타르가 쓴 17세기 연대기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초 누흐 이븐 알타히르가 이를 고쳐 쓰면서 마시나 국가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목을 끼워 넣고 카티를 저자로 내세운 판본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그대로 16세기 사료로 쓰는 것은 위험하며, 노빌리(Mauro Nobili)와 마티(Mohamed Shahid Mathee) 같은 학자들이 이 조작을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심화
논쟁: 고고학, ‘대학’, 문화유산의 정치
고고학은 교역만으로 설명하는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1984년 수전·로더릭 매킨토시 부부의 조사와 와디 엘아흐마르 인근의 후속 발굴은 오래 지속된 철기 시대 취락을 보여 주었고, J. 캐머런 먼로 같은 연구자는 팀북투가 사하라 대상의 기착지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변 농촌과의 도농 관계, 그리고 중부 니제르와 제네제노·디아 같은 도시를 잇던 더 오래된 교환망에서 자라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도시 자체가 몇 미터의 모래 밑에 있어 가장 이른 단계의 직접 증거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대학’이라는 말도 논쟁거리입니다. 대중적 서술과 일부 백과사전은 학생 2만 5천 명 같은 숫자를 제시합니다. 전문가들은 팀북투의 체계가 중앙 행정 없는 스승과 학습 모임의 연결망이었으며 큰 숫자는 검증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상코레를 볼로냐나 파리에 견주는 것은 팀북투의 성취를 기리는 방법일 수 있지만, 가문과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다른 전통에 유럽식 틀을 씌우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성기 인구를 5만~10만 명으로 보는 숫자도 추정일 뿐입니다.
필사본은 소유와 접근의 문제를 낳습니다. 많은 집안은 장서를 국가 기관에 넘기기보다 직접 지키려 하며, 1990년대 이후의 디지털화 사업들, 곧 오슬로 대학교, 케이프타운 대학교, 힐 박물관·필사본 도서관(HMML), 영국도서관 ‘위기의 기록물’ 프로그램 등은 보존, 공개 접근, 개인 소유자의 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습니다. 알마흐디 사건은 국제법이 문화유산 공격을 지역 공동체에 대한 범죄로 볼지,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로 볼지, 아니면 둘 다로 볼지를 두고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ICC의 배상 명령은 두 차원을 함께 다루려 했습니다.
핵심 개념
- 사막의 항구
- 사하라의 낙타 대상과 니제르강의 배가 만나는 곳으로서, 북쪽의 소금과 남쪽의 금·곡식을 맞바꾸며 번영했다.
- 수단·사헬 건축
- 나무 틀 위에 진흙 벽돌과 회반죽을 올린 흙건축. 튀어나온 들보와 원뿔형 탑이 특징이며, 주민들의 공동 덧바르기로 유지된다.
- 캠퍼스 없는 학문
- 학문은 하나의 공식 대학이 아니라 개별 스승, 학자 가문, 모스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책 문화
- 필사본을 사고 베끼고 쓰고 지키는 일이 도시의 위신의 핵심이었고, 개인 가문이 수백 년 동안 장서를 지켰다.
- 살아 있는 유산
- 모스크와 성인의 영묘는 기념물일 뿐 아니라 공동체가 돌보는 예배·참배의 장소다.
- 신화와 실제 도시
- 잃어버린 황금 도시, 세상의 끝이라는 유럽의 전설은 널리 연결된 실제 아프리카 도시를 가렸다.
- 문화유산과 정의
- 2012년의 파괴와 2016년 ICC 유죄 판결로 팀북투는 문화유산 공격을 범죄로 다루는 이정표가 되었다.
기록
- 약 1100년 — 『타리흐 알수단』이 전하는 투아레그 계절 야영지 창건 연대.
- 약 1325년 — 말리의 만사 무사가 메카에서 돌아오며 팀북투를 합병한다. 이어 몇 해 사이에 징게레베르 모스크가 세워진다.
- 1353년 — 이븐 바투타가 말리 수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팀북투를 방문한다.
- 1468년 — 순니 알리의 송가이 제국이 팀북투를 차지한다(1468년 또는 1469년). 많은 학자가 왈라타로 피신한다.
- 1493년 — 아스키아 무함마드 1세가 송가이의 권력을 잡으며 팀북투의 황금기가 열린다.
- 1591년 — 톤디비 전투 뒤 모로코군이 5월 30일 팀북투를 점령한다.
- 1594년 — 아흐마드 바바를 비롯한 주요 학자들이 모로코로 끌려간다(체포는 1593년 시작).
- 1828년 — 르네 카이예가 팀북투에 도착한 뒤 유럽으로 돌아간다. 고든 랭은 1826년 방문 뒤 살해되었다.
- 1893년 — 12월 15일 프랑스군이 팀북투를 점령하고, 도시는 프랑스령 수단에 편입된다.
- 1988년 — 유네스코가 팀북투의 모스크와 영묘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
- 2012년 — 안사르 딘이 도시를 점령하고 영묘를 파괴한다. 팀북투가 다시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이 된다.
- 2016년 — 국제형사재판소가 팀북투 문화유산 공격으로 아흐마드 알파키 알마흐디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용어 풀이
- 사헬
- 사하라 사막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반건조 지대.
- 아잘라이
- 팀북투와 사하라 소금 광산 사이를 오간 대규모 낙타 소금 대상.
- 마드라사
- 이슬람 고등 교육의 장. 팀북투에서는 모스크와 학자의 집이 가르침의 중심이었다.
- 울라마
- 종교법, 신학 등 이슬람 학문을 닦은 학자들.
- 카디
- 이슬람 재판관. 팀북투의 대카디는 도시의 강력한 지도자였다.
- 아자미
- 아프리카 언어를 아랍 문자로 적는 방식.
- 영묘
- 무덤을 모신 건물. 팀북투의 영묘는 존경받는 학자와 성인을 기린다.
- 아르마
- 1591년 팀북투를 정복한 모로코 병사들의 후손으로, 도시의 지배층이 된 집단.
- 타리흐
- ‘역사’, ‘연대기’를 뜻하는 아랍어. 『타리흐 알수단』 등.
- 수단·사헬 양식
- 서아프리카 사헬과 사바나 지대의 흙건축 양식.
묻고 답하기
팀북투는 진짜 있는 곳인가요?
네. 말리 북부에 있는, 수만 명이 사는 도시예요. 영어에서 ‘아주 먼 곳’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건 옛 유럽의 전설 때문이지, 도시의 실제 중요성과는 상관없어요.
모스크를 왜 진흙으로 지었나요?
흙은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건축 재료이고, 사막의 더위 속에서 실내를 시원하게 해 주며, 공동체가 함께 고칠 수 있어요. 정기적으로 벽을 덧바르는 것도 전통의 일부예요.
팀북투에는 대학이 있었나요?
오늘날 같은 대학은 아니었어요. 상코레 같은 모스크와 자기 집에서 제자를 가르친 학자가 많았어요. 이 연결망을 ‘팀북투 대학’이라 부르지만, 중앙 기관이나 학위 제도는 없었어요.
필사본은 모두 몇 점인가요?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팀북투와 그 일대에 약 30만~70만 점으로 추정하며, 아직 목록에 오르지 않은 것도 많아요.
2012~2013년에 필사본은 어떻게 되었나요?
약 4,200점이 불타거나 도난당했지만, 현지 사서와 주민들이 수십만 점을 바마코로 몰래 옮겼어요. 오래 보존하고 언젠가 돌려보내는 일은 아직 과제로 남아 있어요.
징게레베르 모스크는 실제로 누가 지었나요?
연대기는 만사 무사가 세웠다고 적어요. 안달루스 시인 알사힐리가 설계했다는 전승은 현대 역사가들이 의심하는데, 이 양식이 사하라와 서아프리카 건축 전통에 뿌리를 둔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1570년 등 여러 차례 다시 지어지기도 했어요.
팀북투 연대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아주 귀중하지만 특정 관점을 담고 있고 일부는 구전에 기대요. 1913년에 출간된 『타리흐 알파타시』는 17세기 연대기와 19세기에 고쳐 쓴 판본이 섞여 있어서, 역사가들은 그 층위를 구분해야 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Timbuktu. Wikipedia
- History of Timbuktu. Wikipedia
- Timbuktu Manuscripts. Wikipedia
- Djinguereber Mosque. Wikipedia
- Sankoré Madrasah. Wikipedia
- Sidi Yahya Mosque. Wikipedia
- Tarikh al-Sudan. Wikipedia
- Tarikh al-fattash. Wikipedia
- Ahmad Baba al-Timbukti. Wikipedia
- Ahmad al-Faqi al-Mahdi. Wikipedia
함께 보기
- 만사 무사말리 제국의 통치자로, 메카 순례와 이슬람 학문 후원, 제국의 부로 알려져 있다.
- 이븐 바투타아프리카·아시아와 유럽 일부를 여행한 기록을 남긴 모로코의 여행가다.
- 젠네 대모스크전승상 13세기에 세워진 모스크 자리에 1906~1907년 젠네 미장이들이 다시 지은, 세계에서 가장 큰 흙벽돌 건축물.
- 이븐 할둔사회와 국가의 변화를 분석한 『무깟디마』를 쓴 북아프리카의 역사가이자 사상가다.
- 킬와 키시와니중세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가장 부유했던 스와힐리 도시국가, 킬와 술탄국의 섬 수도. 산호석으로 지은 모스크·궁전·요새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 우스만 단 포디오하우사 왕국들에서 벌인 개혁 운동이 1804년 지하드로 이어져 소코토 칼리파국을 세운 풀라니족 이슬람 학자·설교자·시인.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