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태평양 한가운데, 어느 대륙에서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세모 모양의 작은 섬이 있어요. 이름은 라파누이, 흔히 ‘이스터섬’이라고도 불러요. 약 800년 전, 폴리네시아의 뱃사람들이 큰 쌍동 카누를 타고 별과 파도, 새가 나는 방향을 읽으며 이 섬을 찾아왔어요.
섬에 자리 잡은 라파누이 사람들은 오래된 화산의 바위를 깎아 커다란 석상을 만들었어요. 이것을 ‘모아이’라고 해요. 모아이는 머리가 크고, 코가 길고, 눈썹이 두툼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어요. 대부분 집보다 크고, 세워진 것 가운데 가장 큰 모아이는 코끼리 열두 마리쯤 되는 무게였어요.
모아이는 그냥 조각이 아니었어요. 라파누이 사람들은 모아이에 훌륭한 조상의 힘이 깃든다고 믿었어요. 모아이 대부분은 바닷가의 돌 제단 위에 섰지만, 바다를 등지고 마을 쪽을 바라보았어요. 마치 가족을 지켜보며 보살피는 것처럼요.
바퀴도, 기중기도, 짐을 끄는 큰 동물도 없이 그렇게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요? 라파누이의 옛이야기는 모아이가 ‘걸어서’ 갔다고 해요. 과학자들이 실제로 실험해 보았어요. 모아이 모형에 밧줄을 묶고 좌우로 흔들었더니, 무거운 냉장고를 옮길 때처럼 뒤뚱뒤뚱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답니다.
나중에 모아이는 거의 다 쓰러졌고, 먼 곳에서 온 뱃사람들 때문에 섬사람들은 큰 고통을 겪었어요. 오늘날 많은 모아이가 다시 세워졌어요. 라파누이 사람들은 지금도 모아이를 돌보고, 모아이는 모두를 위한 세계유산으로 보호받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제작 시기
- 주로 1250~1500년 무렵. 기념물 건설이 더 늦게까지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음(연대 논쟁 중)
- 장소
- 남동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섬 라파누이(이스터섬), 현재 칠레 영토
- 만든 사람들
- 12~13세기 무렵 섬에 정착한 폴리네시아 항해자의 후손인 라파누이 사람들
- 수
- 알려진 모아이는 1,000개 가까이. 그 절반 가까이가 라노 라라쿠 채석장에 남아 있음
- 재료
- 거의 모두 라노 라라쿠의 화산 응회암(굳은 화산재). 머리 위 붉은 푸카오는 푸나 파우의 스코리아
- 최대
- 세워진 것 중 가장 큰 파로는 높이 약 10m, 무게 약 82톤. 채석장의 미완성 석상은 길이 약 21m
- 의미
- 신격화된 조상의 현현으로, 후손에게 마나(신성한 힘)를 전한다고 여겨짐
- 지위
- 라파누이 국립공원,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쉬움
모아이란 무엇인가
모아이는 이스터섬의 라파누이 사람들이 하나의 돌덩이를 통째로 깎아 만든 석상입니다. 이 섬은 칠레 해안에서 서쪽으로 약 3,500km, 가장 가까운 유인도인 핏케언섬에서도 2,000km 넘게 떨어진 남동태평양에 있습니다. 면적은 약 164㎢에 불과하지만 알려진 모아이가 1,000개 가까이 되어, 세계에서 기념 조각이 가장 빽빽이 모인 경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형적인 모아이는 머리부터 엉덩이나 허벅지까지의 사람 모습을 양식화한 것입니다. 몸에 비해 머리가 매우 크고, 이마가 튀어나왔으며, 코는 길고 곧고, 눈은 깊이 들어가 있고, 턱은 앞으로 나왔고, 입술은 얇게 내밀고 있습니다. 팔은 몸통에 붙어 있고 손가락이 긴 두 손이 배 위에서 만납니다. 대부분 다리가 없으며, 아랫부분은 땅이나 제단에 박혀 세워졌습니다.
크기는 다양합니다. 높이 3~6m, 무게 몇 톤에서 수십 톤인 것이 많습니다. 제단 위에 세워진 모아이 가운데 가장 큰 ‘파로’는 높이 약 10m, 무게 약 82톤이었습니다. 채석장에는 흔히 ‘엘 히간테(거인)’라 부르는 길이 약 21m의 미완성 석상이 누워 있는데, 이것은 애초에 옮길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모아이’는 라파누이어로 그저 ‘석상’,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모아이에게는 저마다 이름이 있었고, 사람들은 모아이를 장식용 초상이 아니라 조상의 ‘살아 있는 얼굴’로 여겼습니다.
쉬움
누가 만들었나: 대양 끝의 폴리네시아 항해자들
라파누이 사람들은 폴리네시아인입니다. 그들의 조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 전통을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폴리네시아 항해자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쌍동선 원양 카누를 타고 북쪽의 하와이, 남서쪽의 아오테아로아(뉴질랜드), 남동쪽의 라파누이를 꼭짓점으로 하는 거대한 삼각형 안의 사람이 살 수 있는 섬에 거의 모두 정착했습니다. 이들은 도구 없이 별과 너울, 바람, 구름, 새를 읽어 길을 찾았습니다.
처음 정착한 시기는 논쟁 중입니다. 예전에는 4세기에서 9세기 사이로 보았지만, 특히 아나케나 해변에서 신중하게 고른 시료의 방사성탄소 연대는 12~13세기 무렵의 도착을 가리킵니다. 이주민은 아마 동폴리네시아에서 왔을 것이며, 감비에 제도(망가레바)와 마르키즈 제도가 흔히 거론됩니다. 라파누이 구전은 시조 족장 호투 마투아가 가족과 무리를 이끌고 아나케나에 상륙했다고 전합니다.
정착민은 타로, 얌, 바나나, 닭 같은 폴리네시아 작물과 가축을 가져왔고, (아마 의도치 않게) 폴리네시아쥐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남아메리카가 원산인 고구마도 길렀는데, 많은 학자는 이것을 유럽인이 태평양에 오기 전에 폴리네시아인이 남아메리카에 닿았다가 돌아왔다는 증거로 봅니다.
사회는 섬의 여러 구역을 나누어 다스린 친족 집단(마타)으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크게 두 연합으로 묶였습니다. 각 집단은 해안 가까이에 자신만의 의례 장소를 두었고, 모아이 대부분은 바로 그곳에 세워졌습니다.
쉬움
모아이 유적을 ‘읽는’ 법
완성된 모아이는 보통 해안을 따라 쌓은 돌 제단 ‘아후’ 위에 세워졌습니다. 아후는 바다 쪽으로 정교하게 맞춘 석벽, 모아이가 한 개 또는 여러 개 서는 평평한 윗면, 그리고 육지 쪽의 포장된 경사로와 광장으로 이루어집니다. 모아이 하나만 올린 아후도 있고, 가장 큰 남동 해안의 아후 통가리키에는 오늘날 모아이 열다섯 개가 서 있습니다. 아후는 매장과 모임의 장소이기도 했고, 그 앞 광장에서 의례가 열렸습니다.
아후 위의 모아이는 대부분 바다를 등지고 광장과 친족 집단의 마을이 있는 내륙을 바라봅니다. 이런 방향은 모아이가 후손을 지켜보고 보호한다는 생각과 잘 들어맞습니다. 내륙에 있는 아후 아키비에서는 일곱 모아이가 해안 쪽을 바라보는데, 잘 알려진 예외입니다.
아후 위의 많은 모아이는 머리에 ‘푸카오’를 얹고 있었습니다. 푸카오는 푸나 파우 채석장에서 캔 붉은 화산암(스코리아)으로 만든 커다란 원기둥으로, 보통 상투처럼 묶은 머리나 머리 장식으로 해석되며, 붉은색은 폴리네시아에서 신성한 색이었습니다. 몇 톤이나 되는 푸카오도 있어서, 그것을 어떻게 머리 위에 올렸는지도 연구 주제입니다.
아후 위의 모아이에게는 눈도 주어졌습니다. 눈구멍은 석상이 제단에 도착한 뒤에야 파냈고, 적어도 일부는 흰 산호에 흑요석이나 붉은 스코리아로 눈동자를 박은 눈을 끼웠습니다. 1970년대 후반 아나케나에서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이 산호 눈을 찾아냈고, 이후 그곳의 복원된 모아이 하나에 복제품 눈이 끼워졌습니다. 많은 라파누이 사람과 학자는 눈을 넣는 순간 석상이 조상의 ‘살아 있는 얼굴(아링가 오라)’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중급
라노 라라쿠: 모아이가 태어난 채석장
모아이는 수십 개를 빼고 모두 섬 동쪽의 사화산 분화구 라노 라라쿠의 응회암으로 만들었습니다. 응회암은 화산재가 굳은 돌로, 갓 드러났을 때는 비교적 물러서 돌 도구로 다룰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겉이 어느 정도 단단해집니다. 이 채석장은 여러 세기 동안 쓰였으며, 제작의 모든 단계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곳입니다.
석공들은 단단한 현무암으로 만든 손도끼 ‘토키’로 바위 면을 직접 깎았습니다. 먼저 윤곽을 잡고, 둘레에 홈을 판 다음, 등은 좁은 용골 모양으로 바위에 붙여 둔 채 앞면과 옆면을 다듬었습니다. 거의 완성되면 용골을 끊어 석상을 비탈 아래로 내렸고, 흔히 구덩이에 세워 등을 마저 다듬었습니다. 채석장 주변에서 버려진 토키가 수백 개 발견되었습니다.
알려진 모아이의 절반 가까이가 아직 라노 라라쿠에 있습니다. 상당수는 분화구 안팎의 비탈에 서 있는데, 여러 세기 동안 흘러내린 흙에 어깨나 가슴까지 묻혀 있습니다. 이스터섬 사진에 나오는 유명한 ‘머리’들이 바로 이것이지만, 발굴해 보면 땅 아래에 몸 전체가 있습니다. 바위 속에 미완성으로 남은 것도 있는데, 거인 ‘엘 히간테’도 그중 하나입니다. 비탈에 선 석상에는 눈구멍도 푸카오도 없고, 아후 위의 석상과 달리 일부러 쓰러뜨려지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모아이가 채석장에 남았는지는 논쟁거리입니다. 돌의 결함이나 파손 때문에 버려진 것도 있고, 옮겨지기를 기다리던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탈에 선 모아이는 애초에 그 자리에 두려고 만든 것으로, 신성한 돌의 원천을 표시하는 석상의 행렬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중급
모아이는 어떻게 옮겼을까
바퀴도, 짐을 끄는 동물도, 금속도 없이 몇 톤에서 수십 톤짜리 석상을 몇 킬로미터나 험한 땅 위로 옮긴 방법은 방문자들을 가장 사로잡은 수수께끼입니다. 라파누이 구전은 모아이가 스스로 걸어갔다고, 곧 특정 족장과 사제가 지닌 신성한 힘 ‘마나’로 움직였다고 답합니다.
연구자들은 여러 현실적인 방법을 실험했습니다. 고고학자 조 앤 반 틸버그는 석상을 나무 썰매에 눕혀 레일이나 사다리 위로 끄는 방법을 모형으로 검토했는데, 이 방법에는 밧줄과 목재가 많이 필요합니다. 1950년대 노르웨이의 탐험가 토르 헤위에르달은 지렛대와 돌로 모아이를 일으켜 세웠고, 이후 체코의 기술자 파벨 파벨이 헤위에르달과 함께 한 실험은 선 채로 밧줄로 흔들면 석상을 ‘걷게’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2012년 고고학자 테리 헌트와 칼 리포는 18명이 약 4.35톤짜리 콘크리트 복제품을 세운 채로 짧은 거리를 옮긴 실험을 발표했습니다. 석상 머리에 양쪽과 뒤쪽으로 밧줄을 묶고 당겨 좌우로 흔들며 비틀어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옛길을 따라 버려진 모아이들이 밑면이 넓은 D자 모양이고 앞으로 기울어 있어 이런 ‘걷기’에 유리하며, 길 자체도 가운데가 살짝 오목해 흔들리는 석상을 안정시켰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가설은 오늘날 폭넓은 지지를 받지만, 가장 큰 석상에 대해서는 증명되지 않았고 시기에 따라 다른 방법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푸카오는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푸카오와 아후의 경사로 연구에 따르면 원기둥을 흙 경사로 위로 굴려 올린 뒤 지렛대로 석상 머리에 얹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자세한 과정은 아직 불확실합니다.
중급
종교적·사회적 의미: 조상, 마나, 경쟁
폴리네시아 종교에서 ‘마나’는 혈통으로 이어지며 뛰어난 통치력과 풍요, 번영으로 드러나는 신성한 힘 또는 효험입니다. 모아이는 일반적으로 신격화된 족장 같은 중요한 조상의 현현으로 이해되며, 아후 위에 세워져 그 마나가 살아 있는 공동체로 흘러가게 했다고 여겨집니다. 1774년 이 섬을 찾은 제임스 쿡 선장은 석상들이 옛 족장들을 기리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뒤에 라파누이 원로들의 증언으로 많은 석상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기념물은 그것을 세운 친족 집단의 지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모아이를 깎고 옮기고 세우려면 많은 사람의 협력과 일꾼을 먹일 잉여 식량, 조각과 의례의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더 크고 인상적인 모아이는 그 집단과 족장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래서 모아이 건립을 경쟁적 과시로 보는 학자도 있고, 채석장과 푸카오 채석지를 모든 집단이 함께 썼다는 점에서 협력을 강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모아이의 양식은 시대에 따라 변했습니다. 이른 시기의 석상은 더 작고 다양했으며 현무암이나 붉은 스코리아 같은 다른 돌로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라노 라라쿠 응회암으로 만든 후기 석상은 더 커지고 규격화되었습니다.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과 발굴로 대략적인 편년만 세울 수 있을 뿐이어서, 정확한 순서는 여전히 연구 과제입니다.
중급
모아이 이후: 쓰러뜨리기, 새인간 의례, 식민의 재앙
1722년 부활절 일요일에 네덜란드 항해가 야코프 로헤베인이 섬에 도착해 ‘이스터섬(부활절 섬)’이라는 유럽식 이름을 붙였을 때, 선원들은 서 있는 석상들을 보았습니다. 1770년의 에스파냐 방문자들과 1774년의 쿡도 석상을 보았지만, 쿡은 이미 많은 석상이 쓰러져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더 많은 석상이 쓰러졌고, 19세기 후반에는 아후 위에 서 있는 모아이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라파누이 전승은 이 시기를 ‘후리 모아이(석상 쓰러뜨리기)’로 기억합니다. 많은 석상이 얼굴을 땅에 대고 앞으로 넘어졌고, 목이 부러진 것도 있습니다.
쓰러뜨린 까닭은 논쟁 중입니다. 친족 집단 사이의 갈등, 종교·정치 권위의 변화, 유럽인과의 접촉 이후의 혼란 등이 거론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의례 체계가 두드러졌는데, 절벽 위 마을 오롱고를 중심으로 한 ‘탕가타 마누(새인간)’ 의례입니다. 해마다 참가자들이 작은 바위섬에서 검은등제비갈매기의 첫 알을 먼저 가져오려고 경주했고, 승자의 후원자가 한 해 동안 신성한 지도자인 새인간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재앙은 바깥에서 왔습니다. 1862~63년 페루의 노예 사냥꾼들이 인구의 절반쯤인 약 1,500명을 납치해 페루에서 일을 시켰습니다. 대부분이 죽었고, 돌아온 몇 안 되는 생존자가 천연두를 옮겨 섬에 퍼뜨렸습니다. 이어 결핵, 선교사의 압력, 이주, 섬 전체를 양 목장으로 쓰는 일이 뒤따랐습니다. 1877년 섬에 남은 라파누이 사람은 111명뿐이었습니다. 롱고롱고 문자를 비롯해 사제와 원로가 지니던 많은 지식이 사라졌습니다. 칠레는 1888년 섬을 병합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라파누이 사람들은 항가로아 마을에 갇혀 살았으며 땅 대부분은 목축 회사에 임대되었습니다.
1868년 영국 군함 HMS 토파즈호의 승무원들이 오롱고에서 ‘호아 하카나나이아’라는 모아이를 가져갔습니다. 응회암이 아닌 짙은 회갈색 용암으로 만든 높이 약 2.4m의 이 석상에는 뒷면에 나중에 새긴 새인간 부조가 있습니다. 석상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쳐졌고 1869년부터 대영박물관에 있습니다. 2018년 섬의 지사가 이끄는 라파누이 대표단이 공식적으로 반환을 요청했으며, 이 사례는 문화재 반환 논쟁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중급
발굴, 복원, 살아 있는 유산
과학적 조사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답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캐서린 라우틀리지가 이끈 1914~15년 마나 탐사대는 원로들의 구전을 기록했습니다. 1955~56년 토르 헤위에르달의 노르웨이 탐사대는 라노 라라쿠를 비롯한 곳에서 발굴을 하고 모아이 하나를 다시 세웠습니다. 섬의 문화가 남아메리카에서 왔다는 헤위에르달의 가설은 폴리네시아 기원을 가리키는 고고학·언어학·유전학 증거로 부정되었지만, 그의 탐사대가 남긴 현장 조사는 여전히 유용합니다.
1960년부터 미국의 고고학자 윌리엄 멀로이가 아후 아키비를 시작으로 항가로아 근처의 타하이까지 복원을 이끌었고, 라파누이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큰 사업은 1992~96년의 아후 통가리키 복원으로, 칠레 고고학자 클라우디오 크리스티노와 파트리시아 바르가스가 이끌고 일본 기업 다다노가 기중기와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이 제단과 열다섯 모아이는 1960년 칠레 대지진이 일으킨 쓰나미로 내륙까지 흩어져 있었습니다.
칠레는 1935년 섬의 상당 부분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고, 라파누이 국립공원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습니다. 2017년부터는 라파누이 원주민 공동체 조직인 마우 헤누아가 공원을 관리합니다. 보존 과제로는 비·소금·지의류에 의한 무른 응회암의 풍화, 침식, 방목 가축, 관광 압력, 그리고 화재가 있습니다. 2022년 10월에는 라노 라라쿠 일대의 산불로 여러 모아이가 손상되었습니다.
라파누이 사람들에게 모아이는 사라진 문명의 유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민족의 조상입니다. 언어와 조각 전통, 해마다 열리는 타파티 축제 같은 의례가 이어지고 있으며, 모아이를 연구하고 보여 주고 돌보는 방식에 라파누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반영되고 있습니다.
심화
논쟁: ‘생태 자살’인가, 회복력인가
꽃가루 시추 자료는 라파누이가 한때 칠레야자와 가까운 거대한 야자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덮여 있었고, 유럽인이 도착할 무렵에는 숲이 거의 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대중서 『문명의 붕괴(Collapse)』(2005)는 이 섬을 생태적 자멸의 우화로 그렸습니다. 서로 경쟁하던 족장들이 더 큰 모아이를 옮기려고 숲을 베어 냈고, 그 결과 토양 침식, 기근, 전쟁, 식인, 인구 붕괴가 유럽인과의 접촉 이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생태 자살’ 서사는 강한 반론에 부딪혔습니다. 테리 헌트와 칼 리포는 정착이 예전 생각보다 늦은 1200년 무렵이었고, 야자 열매를 먹는 폴리네시아쥐가 삼림 파괴에 큰 역할을 했으며, 섬사람들은 작물을 보호하는 돌 정원과 돌 멀칭을 수천 곳에 만드는 등 성공적으로 적응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는 인구 붕괴가 확실히 기록된 것은 접촉 이후, 노예 사냥과 외래 질병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생태 자살 이야기가 인구 감소의 책임을 식민 폭력에서 라파누이 사람들 자신에게로 떠넘겼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접촉 이전 인구 규모, 갈등의 정도(‘마타아’라는 흑요석 날은 무기보다 주로 도구였다는 연구가 있고, 유골 연구에서도 치명상은 비교적 적게 나타남), 삼림 파괴 시기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2020년에 방사성탄소 연대와 통계 모형을 이용한 한 연구는 아후 건설이 1722년 이후에도 이어졌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기념물 전통은 그 전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접촉 당시에도 살아 있었던 셈입니다.
심화
증거와 방법
목록화와 조사. 조 앤 반 틸버그가 시작한 석상 목록 작업과 오랜 기간 이어진 ‘이스터섬 석상 프로젝트’ 같은 체계적 조사는 1,000개 가까운 모아이의 크기, 석재, 위치를 기록했습니다. 라노 라라쿠에 선 석상들을 발굴하자 묻혀 있던 몸통과 조각된 등, 경우에 따라서는 암각화 문양, 그리고 석상을 세울 때 쓴 구덩이와 받침이 드러났습니다.
연대 측정. 모아이 자체는 방사성탄소로 연대를 잴 수 없으므로, 채석장 부스러기와 아후 건설층, 주거지에서 나온 숯·뼈 같은 유기물, 그리고 흑요석 수화층 측정에서 연대를 얻습니다. 오래 산 나무나 해양 시료는 결과를 왜곡할 수 있어서, 최근의 편년은 엄격히 가려 낸 시료와 베이즈 통계 모형에 기댑니다. 이런 방법이 정착 연대를 늦춰 잡는 흐름과, 모아이 제작이 언제 절정에 이르고 끝났는지에 관한 논쟁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구전과 초기 기록. 라우틀리지, 세바스티안 엥글레르트 신부, 그리고 후대 연구자들이 채록한 라파누이 구전은 이름과 계보, 이야기를 전하지만, 1860년대의 재앙 이후에 수집된 것이라 신중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1722년, 1770년, 1774년의 유럽 항해 일지는 석상과 인구에 관해 짧은 외부인의 스냅 사진을 제공하는데, 귀중하지만 부분적입니다.
실험고고학과 경관 연구. 복제품 실험, 도로망과 버려진 모아이 형태의 분석, 석재의 지구화학적 산지 추정, 돌 정원과 토양 양분 연구는 기념물을 그것을 떠받친 일상 경제와 연결해 줍니다. 연구는 점점 더 라파누이 공동체와 협력하며 이루어지고, 공동체의 지식과 우선순위가 연구 질문을 함께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핵심 개념
- 조상의 현현
- 모아이는 후손을 지키고 북돋우는 신성한 힘을 지닌 중요한 조상의 구현으로 여겨졌다.
- 마나
- 혈통으로 이어지는 폴리네시아의 신성한 힘·효험 개념. 구전은 마나가 모아이를 걷게 했다고 전한다.
- 아후와 광장
- 모아이가 의례 광장과 친족 집단의 땅을 바라보며 서 있던 해안의 돌 제단.
- 기록 보관소로서의 채석장
- 라노 라라쿠에는 바위에 그은 윤곽부터 비탈에 선 완성품까지 조각의 모든 단계가 남아 있다.
- 걷기 가설
- 선 모아이를 밧줄로 흔들어 앞으로 옮겼다는 가설로, 실험으로 뒷받침되며 ‘모아이가 걸었다’는 전승과 맞닿는다.
- 붕괴냐 회복력이냐
- 섬사람들이 스스로 환경을 파괴했는가, 아니면 식민 폭력이 닥치기 전까지 잘 적응했는가를 둘러싼 논쟁.
- 살아 있는 유산
- 모아이는 오늘날 공원을 함께 관리하고 반출된 석상의 반환을 요구하는 살아 있는 폴리네시아 민족의 것이다.
기록
- 약 1200년 — 폴리네시아 항해자들이 라파누이에 정착, 아마 아나케나에 상륙(연대 논쟁 중, 현재는 12~13세기가 유력).
- 약 1250년 — 라노 라라쿠에서 모아이 제작의 주요 시기가 시작되어 대략 1500년 무렵이나 그 뒤까지 이어짐.
- 1722년 — 야코프 로헤베인이 부활절 일요일에 도착. 선원들이 서 있는 모아이를 봄.
- 약 1760년 — 오롱고의 새인간(탕가타 마누) 의례가 두드러지기 시작해 1860~70년대까지 이어짐.
- 1774년 — 제임스 쿡이 방문해 많은 석상이 쓰러져 있다고 기록. 석상이 옛 족장들을 기린다는 말을 들음.
- 1862년 — 페루 노예 사냥(~1863)으로 섬사람 약 1,500명이 납치됨. 돌아온 생존자가 천연두를 옮김.
- 1868년 — HMS 토파즈호가 오롱고에서 모아이 호아 하카나나이아를 반출. 1869년 대영박물관에 들어감.
- 1877년 — 섬에 사는 라파누이 사람이 111명으로 기록됨.
- 1888년 — 칠레가 섬을 병합.
- 1960년 — 윌리엄 멀로이가 아후 아키비를 복원. 칠레 대지진의 쓰나미가 아후 통가리키를 흩뜨림.
- 1995년 — 라파누이 국립공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아후 통가리키는 1992~96년 복원).
- 2017년 — 라파누이 공동체 조직 마우 헤누아가 국립공원 관리를 맡음.
용어 풀이
- 라파누이
- 이스터섬의 폴리네시아어 이름이자, 그 섬의 사람들과 언어를 가리키는 말.
- 모아이
- 조상을 나타내는 통돌 석상. ‘석상’, ‘형상’이라는 뜻.
- 아후
- 주로 해안에 쌓은 돌 의례 제단. 그 위에 모아이를 세웠다.
- 푸카오
- 모아이 머리 위에 얹은 붉은 스코리아 원기둥. 상투나 머리 장식으로 해석된다.
- 응회암
- 화산재가 굳어 생긴 돌. 모아이의 주재료.
- 토키
- 모아이를 깎는 데 쓴 현무암 손도끼·자귀.
- 마나
- 폴리네시아 신앙에서 말하는 신성한 힘 또는 효험.
- 후리 모아이
- ‘석상 쓰러뜨리기’. 아후 위의 모아이들이 넘어뜨려진 시기.
- 탕가타 마누
- 새인간. 오롱고 의례에서 해마다 열린 알 경주의 승자.
- 롱고롱고
- 라파누이의 나무판에 새겨진 기호 문자.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묻고 답하기
모아이는 머리만 있나요?
아니요. 라노 라라쿠의 유명한 ‘머리’들은 흘러내린 흙에 어깨까지 묻힌 전신상이에요. 발굴해 보면 아래에 팔과 손이 있는 몸통이 있어요.
모아이는 왜 대부분 바다를 등지고 있나요?
해안 제단 위에서 친족 집단의 마을이 있는 내륙을 바라보도록 세워졌기 때문이에요. 후손을 지켜보는 조상이라는 뜻이에요.
모아이는 어떻게 옮겼나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험에 따르면 선 모아이를 밧줄로 흔들어 ‘걷게’ 할 수 있는데, 이는 라파누이 전승과도 맞습니다. 썰매 등 다른 방법도 제안되었습니다.
모아이를 만들다가 섬의 숲과 사회가 무너졌나요?
한때 널리 퍼진 이론이지만,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는 쥐가 삼림 파괴에 큰 역할을 했고 섬사람들은 적응했으며, 인구 붕괴는 주로 접촉 이후의 노예 사냥과 질병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모아이는 왜 쓰러졌나요?
라파누이 전승은 석상 쓰러뜨리기 시기를 기억합니다. 집단 간 갈등, 종교 변화, 유럽인과의 접촉에 따른 혼란이 원인으로 거론되며, 각각이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논쟁 중입니다.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모아이를 만들었나요?
아닙니다. 고고학·언어·유전학은 라파누이 사람들이 폴리네시아인임을 보여 줍니다. 고구마처럼 남아메리카와의 접촉 흔적은 있지만, 모아이는 폴리네시아의 전통입니다.
이스터섬 밖에서도 모아이를 볼 수 있나요?
네, 19~20세기에 몇 개가 반출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호아 하카나나이아는 대영박물관에 있으며, 라파누이 사람들은 반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Rapa Nui National Park.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모아이. 위키백과
- Moai. Wikipedia
- Easter Island. Wikipedia
- Rano Raraku. Wikipedia
- Ahu Tongariki. Wikipedia
- Hoa Hakananai'a. Wikipedia
- Terry Hunt and Carl Lipo, The Statues That Walked: Unraveling the Mystery of Easter Island. Free Press, 2011
- Jo Anne Van Tilburg, Easter Island: Archaeology, Ecology and Culture. British Museum Press, 1994
- Jared Diamond, Collapse: How Socie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 Viking, 200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