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마추픽추

Machu Picchu (케추아어 Machu Pikchu, ‘늙은 봉우리’)

약 1420–1532년 · 마추픽추 (잉카 제국)

한 문장으로

마추픽추는 약 600년 전 잉카 사람들이 페루 안데스산맥의 좁은 산등성이 위에 세운 돌의 도시로, 잉카 통치자 파차쿠티와 그 가문의 왕실 별장이었던 것으로 보여요.

마추픽추
이미지: Martin St-Amant (S23678)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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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산등성이 위에 올라앉은 마을을 떠올려 보세요. 너무 높아서 가끔은 구름이 마을 아래로 흘러가요. 양쪽은 가파른 낭떠러지이고, 저 아래에서는 강물이 세차게 흘러요. 이곳이 남아메리카 페루의 안데스산맥에 있는 마추픽추예요.

잉카 사람들은 1400년대에 이 마을을 지었어요. 쇠로 만든 도구도, 수레바퀴도, 말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단단한 화강암을 깎아 시멘트 없이 돌끼리 딱 맞물리게 쌓았어요. 커다란 퍼즐처럼요. 어떤 곳은 돌 틈이 너무 좁아서 얇은 종이 한 장도 들어가지 않아요.

마추픽추는 큰 도시가 아니었어요. 집과 신전, 작업장, 샘터, 긴 돌계단이 있는 산속 궁전에 가까웠지요. 많은 학자는 이곳이 파차쿠티라는 위대한 잉카 왕의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왕과 가족이 머물 수 있었고, 이곳을 돌보는 일꾼 수백 명이 살았어요.

마을 둘레의 산비탈에는 거대한 계단 같은 ‘계단식 밭’이 있어요. 평평한 땅을 만들어 곡식을 기르고, 큰비가 와도 산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막아 주었어요. 땅속에는 빗물을 빼내는 똑똑한 배수로도 숨어 있어요.

1530년대에 에스파냐 군인들이 페루에 오자 사람들은 마추픽추를 떠났어요. 에스파냐 사람들은 이곳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그래서 부서지지도 않았어요. 근처 농부들은 늘 이곳을 알고 있었지만, 세계가 마추픽추를 알게 된 것은 1911년 미국 탐험가 하이럼 빙엄이 안내를 받아 산에 오른 뒤였어요. 지금은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가운데 하나예요.

한눈에 보기

시기
15세기. 매장 유골의 방사성탄소 연대로 보면 약 1420년부터 1532년까지 사람이 살았다
위치
페루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우루밤바강 위 마추픽추봉과 와이나픽추봉 사이의 산등성이
해발고도
약 2,430m. 높은 안데스 고원과 동쪽의 숲 지대가 만나는 곳
건설 주체
잉카 국가(타완틴수유). 전통적으로 통치자 파차쿠티와 연결된다
성격
궁전·신전과 수백 명의 상주 시종이 있던 왕실 영지(별장)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본래 이름
불확실. 최근 문서 연구는 ‘픽추’ 또는 ‘와이나픽추’라고 불렸다고 본다
지정
마추픽추 역사 보호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자연 복합유산), 1983년
세계에 알려진 계기
1911년 7월 24일 하이럼 빙엄의 방문과 1913년 4월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쉬움

마추픽추는 어떤 곳인가

마추픽추는 페루 남부 안데스산맥의 말안장 모양 산등성이에 남은 15세기 잉카 정착지의 유적이다. 남쪽에는 케추아어로 ‘늙은 봉우리’라는 뜻의 마추픽추산이, 북쪽에는 ‘젊은 봉우리’라는 뜻의 뾰족한 와이나픽추가 솟아 있다. 아래로는 우루밤바강(빌카노타강)이 산등성이를 세 방향에서 휘감아 흐른다. 해발 약 2,430m로 잉카의 수도 쿠스코보다 낮고 따뜻하며, 추운 고원이 아마존으로 이어지는 습한 숲으로 바뀌는 지대에 있다.

유적의 면적은 몇 헥타르에 불과하지만 집, 회당, 신전, 창고, 작업장 등 100채가 훨씬 넘는 건물이 수백 개의 돌계단으로 이어지고,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 밭이 흘러내린다. 가운데의 넓은 광장이 도시를 크게 둘로 나눈다. 산속 샘에서 끌어온 물은 돌 수로를 따라 흘러 층층이 이어진 작은 샘터들을 차례로 지난다.

마추픽추가 유명한 이유는 세 가지다. 빼어난 자연 풍경, 잉카 석조 기술과 토목 공학의 수준, 그리고 에스파냐 식민 시대 기록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채 20세기 초까지 온전히 남아 있다가 바깥 세계에 알려졌다는 이야기다. 유네스코는 이곳을 문화적 가치와 자연적 가치를 함께 지닌 몇 안 되는 ‘복합유산’으로 등재했다.

[1][2][3]

쉬움

마추픽추를 ‘읽는’ 법: 도시 한 바퀴

방문객은 보통 남쪽 끝의 농업 구역으로 들어온다. 돌과 흙으로 쌓은 넓은 계단식 밭과 창고·경비용 건물 몇 채가 있다. 마른 해자와 긴 담장이 이 구역과 도시 구역을 가르고, 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거대한 돌 상인방을 얹은 정문 하나뿐이다. 도시 출입이 통제되었다는 뜻이다.

도시 구역은 중앙 광장을 사이에 두고 나뉜다. 더 높은 서쪽에 가장 정성 들여 지은 건물들이 모여 있다. ‘신성한 광장’은 주신전과 ‘세 창문의 신전’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세 창문의 사다리꼴 창은 광장 너머 동쪽을 바라본다. 그 위 작은 언덕에는 인티와타나가 있다. 자연 암반을 그대로 깎아 비스듬한 면과 짧은 기둥을 만든 돌이다. 흔히 ‘태양을 묶는 기둥’이라 옮기지만 이 이름은 후대에 붙은 것이고, 정확한 용도는 모른다. 다만 의례에서 매우 중요한 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가까이에는 ‘태양의 신전’ 또는 토레온(탑)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다. 자연 바위 위에 정교하게 맞춘 돌로 곡선 벽을 둘렀고, 창문 하나가 안데스의 한겨울인 6월 하지의 해돋이 방향과 맞는다. 그 아래에는 벽감을 새긴 동굴이 있어 ‘왕의 무덤’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실제로 매장은 발견되지 않았다. 토레온 옆의 정교한 주거 건물은 통치자 자신의 거처로 보는 학자가 많다. 전용 정원과 욕실이 있고 첫 번째 샘터를 바로 쓸 수 있는 자리다.

낮은 동쪽에는 거친 돌로 지은 집과 작업장이 무리 지어 있다. 남쪽 가장자리의 ‘콘도르 신전’에서는 콘도르 머리 모양으로 깎은 평평한 바위와 날개처럼 펼쳐진 자연 바위가 어우러져 신성한 새의 모습을 이룬다. 도시 밖으로는 와이나픽추로 오르는 길, 절벽에 걸린 좁은 잉카 다리, 쿠스코에서 오는 잉카 길이 처음 도시를 내려다보는 ‘태양의 문’(인티 푼쿠)으로 가는 길이 뻗어 있다.

[2][10]

쉬움

잉카는 어떻게 지었을까

잉카의 석공들은 산 자체를 채석장으로 썼다. 산등성이에 흩어진 화강암 바위를 돌망치와 청동 도구로 쪼갠 뒤 더 단단한 돌로 두드려 다듬었다. 무거운 돌은 많은 사람이 밧줄과 지렛대, 경사로를 이용해 옮겼을 것이다. 잉카에는 무거운 짐을 끌 만한 가축이 없었다. 라마는 작은 짐만 질 수 있다.

석조 방식은 두 가지다. 가장 중요한 건물은 모르타르 없이 정밀하게 다듬은 돌을 맞춰 쌓았다. 줄을 맞춘 벽도 있고, 여러 면을 가진 돌을 서로 끼워 맞춘 벽도 있다. 일반 건물은 거친 돌을 진흙 모르타르로 쌓고 겉에 회반죽을 발랐으며 색을 칠했을 수도 있다. 문과 창, 벽감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이고 벽은 안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다. 지진이 잦은 안데스에서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돕는 구조다.

가장 뛰어난 공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이 산등성이는 우기에 비가 많이 내리고 두 단층 사이에 놓여 있다. 잉카 사람들은 기초를 깊이 놓고, 계단식 밭 안을 큰 돌·자갈·모래·흙의 층으로 채워 빗물이 스며들어 빠져나가게 했다. 산이 쓸려 내려가지 않게 한 것이다. 도시 곳곳에 배수로와 도랑도 있다. 미국의 수문학자 케네스 라이트와 페루 고고학자 알프레도 발렌시아 세가라는 이 배수 체계가 유적이 500년 넘게 잘 남은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결론지었다.

[2][11]

중급

이 도시를 세운 사회: 잉카 제국

15세기 초 잉카는 쿠스코 일대에서 경쟁하던 여러 집단 가운데 하나였다. 잉카의 구전을 바탕으로 한 에스파냐 식민 시대 연대기에 따르면, 전환점은 이웃한 찬카족과의 전쟁이었다. 훗날 파차쿠티(흔히 ‘세상을 뒤엎는 자’로 옮긴다)로 불린 왕자가 쿠스코를 지켜 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파차쿠티와 그 후계자들, 특히 아들 토파 잉카 유판키는 오늘날의 에콰도르·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부까지 약 4,000km에 이르는 제국 ‘타완틴수유’(‘하나로 모인 네 지방’)를 정복했다. 찬카 전쟁 이야기에서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부터가 후대 왕실의 전설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잉카 국가에는 시장 화폐도 알파벳 문자도 없었다. 정보는 ‘키푸’라는 매듭 끈으로 기록했고, 노동은 ‘미타’로 조직했다. 공동체가 일정 기간 국가를 위해 일하고, 그동안 국가는 음식과 술로 대접하는 제도다. 역참과 창고를 갖춘 거대한 도로망 ‘카팍 냔’이 제국을 하나로 묶었고, 마추픽추도 그 지선으로 쿠스코와 이어져 있었다.

파차쿠티는 쿠스코를 기념비적인 수도로 다시 지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잉카 통치자들은 우루밤바 계곡 등지에 궁전과 밭, 상주 일꾼을 갖춘 영지를 두었다. 이런 영지는 통치자 혈통 집단(파나카)의 사유재산이어서 그가 죽은 뒤에도 후손이 계속 소유하고 이용했다. 피삭, 오얀타이탐보, 마추픽추는 모두 쿠스코 북쪽 계곡에 자리한 이런 왕실 영지의 흐름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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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왜 지었나: 왕실 영지, 성소, 그리고 풍경

20세기 대부분 동안 마추픽추의 용도를 두고 요새, 잉카 최후의 피난처, ‘태양의 처녀들’의 수도원 등 여러 추측이 오갔다. 오늘날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는 식민 시대 문서에서 나왔다. 1990년 미국 인류학자 존 로는 16세기 소송 문서를 공개했는데, ‘픽추’의 땅이 파차쿠티의 소유였고 에스파냐 정복 뒤에도 그 후손이 권리를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마추픽추를 파차쿠티와 그 혈통의 왕실 영지로 본다.

영지로서 마추픽추는 여러 역할을 겸했다. 통치자와 가족, 손님이 쉬고 잔치를 열고 의례를 치르는 휴식처였고, 주로 건기에 머물렀을 것이다. 태양과 산과 물을 섬기는 종교 중심지이기도 했다. 또한 권력의 과시였다. 이토록 험한 산등성이에 정교한 도시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잉카 국가의 힘을 보여 주었다. 상주 인구는 보통 750명 안팎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은 건물을 관리하고 엘리트를 섬기는 시종이었다.

자리도 중요했다. 안데스 종교에서 산(아푸)은 힘 있는 존재이고 샘·바위·강도 신성한 대상(와카)이 될 수 있다. 마추픽추는 남쪽의 살칸타이를 비롯한 중요한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있고, 잉카가 신성하게 여긴 우루밤바강이 감싸 흐른다. 많은 건물이 특정 봉우리를 창틀처럼 담거나 자연 바위를 품고 있으며, 몇몇 구조물은 하지·동지의 해돋이나 해넘이 방향과 맞는다. 이런 정렬이 얼마나 체계적인지는 논쟁이 있지만, 설계자들이 풍경과 대화하듯 도시를 지은 것은 분명하다.

[2][5][10]

중급

누가 살았나: 무덤과 DNA가 말해 주는 것

1912년과 1915년 빙엄 조사단은 유적 주변의 동굴과 바위 그늘에서 100기가 넘는 무덤을 발굴했다. 초기 분석은 유골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보았고, 이것이 ‘선택받은 여인들’의 공동체라는 낭만적인 상상을 낳았다. 그러나 이후 형질인류학자들이 뼈를 다시 조사한 결과 남녀 비율은 훨씬 고르게 나타났고, ‘태양의 처녀’ 가설은 폐기되었다.

마추픽추에 묻힌 사람들은 왕족이 아니라 상주 일꾼이었다. 왕족은 쿠스코에서 성대한 의식과 함께 묻혔을 것이다. 식민 시대 기록은 이런 시종을 ‘야나코나’라고 부른다. 고향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평생 잉카 엘리트를 섬긴 사람들이다. 유골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옥수수를 많이 먹었고 일하며 살았지만, 대부분 극도로 고된 노동을 하지는 않았다.

2023년 루시 살라사르가 이끌고 리처드 버거, 데이비드 라이크 등 유전학자들이 참여한 연구팀은 마추픽추에 묻힌 34명의 고대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 공동체는 해안, 고원, 아마존 등 제국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서로 다른 혈통의 사람들이 함께 살며 아이를 낳고 함께 묻혔다. 영지 일꾼이 여러 민족 집단에서 모였다는 식민 시대 기록을 뒷받침하며, 잉카 제국이 사람들을 먼 거리까지 이동시켰음을 보여 준다.

[8][2][10]

중급

버려진 도시와 에스파냐의 정복

마추픽추에 사람이 산 기간은 약 한 세기에 불과하다. 1520년대 후반, 천연두로 추정되는 유럽의 전염병이 에스파냐 사람들보다 먼저 안데스에 퍼져 통치자 와이나 카팍이 죽었다. 이어 그의 아들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가 파괴적인 내전을 벌였다.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소규모 에스파냐군이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았고, 이듬해 그를 처형한 뒤 1533년 쿠스코에 들어갔다.

잉카 국가가 무너지자 왕실 영지 체계도 함께 무너졌다. 마추픽추 무덤의 방사성탄소 연대는 정복 무렵에서 끝나며, 유적은 그 뒤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1537년부터 1572년까지 마추픽추 북서쪽의 외진 빌카밤바 지역에 독립 잉카 국가가 남아 있었으나, 1572년 에스파냐가 마지막 통치자 투팍 아마루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마추픽추는 이 경계 가까이에 있었지만 빌카밤바의 저항에 어떤 역할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에스파냐 연대기 작가 누구도 마추픽추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은 식민 당국과 선교사들이 잉카의 성소를 조직적으로 파괴할 때에도 화를 피했다. 건물은 초가지붕을 잃고 숲에 덮였지만 돌벽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지명은 지역 문서에 이어졌고, 농부들은 일부 계단식 밭에서 계속 살며 농사를 지었다.

[2][5]

중급

‘잃어버린 도시’였을까: 빙엄, 현지인의 앎, 예일대 소장품

마추픽추는 진짜로 잃어버린 적이 없다. 1902년 쿠스코의 농부이자 탐험가 아구스틴 리사라가가 유적에 올라 세 창문의 신전 벽에 숯으로 ‘A. Lizárraga 1902’라고 적었다. 19세기 지도와 지역 토지 문서에도 이곳이 나오며, 외부인이 찾아왔을 때 이미 여러 가족이 계단식 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예일대학교 강사 하이럼 빙엄 3세는 잉카 최후의 피난처 빌카밤바를 찾아 페루에 왔다. 1911년 7월 24일 농부 멜초르 아르테아가가 그를 산 위로 안내했고, 페루 경찰 하사 한 명이 동행했다. 정상에서는 리차르테 가족과 알바레스 가족이 유적 사이에서 살며 농사를 짓고 있었고, 한 소년이 가장 훌륭한 건물들로 그를 이끌었다. 빙엄은 처음에는 리사라가의 방문을 인정했으나 나중으로 갈수록 자신을 발견자로 내세웠다. 그는 이곳이 빌카밤바라고 믿었지만, 실제 빌카밤바 유적은 훨씬 서쪽의 에스피리투 팜파로 확인되었다. 빙엄도 그곳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빙엄은 1912년과 1915년 예일대·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와 함께 다시 왔다. 마추픽추 특집으로 꾸민 1913년 4월호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이곳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조사단은 유적을 정리하고 측량했으며, 수천 점의 유물과 유골을 예일대로 가져갔다. 페루 정부는 이것을 대여로 여겼고, 반환 분쟁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이어졌다. 합의와 페루의 소송을 거쳐 예일대는 2011~2012년 소장품을 돌려주었으며, 지금은 쿠스코에서 산안토니오아바드 국립대학교와 협력해 보관·전시한다.

오늘날 많은 페루인과 역사학자는 빙엄의 진짜 업적이 ‘발견’이 아니라 홍보와 학술 기록이었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책과 영화가 되풀이한 ‘잃어버린 도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이곳을 알던 페루 사람들과 원주민을 지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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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오늘날의 유산, 관광, 보존

페루는 1981년 이 일대를 역사 보호지구로 지정해 유적과 함께 주변 산림을 보호했다. 이 숲에는 안경곰과 수많은 난초 등 풍부한 동식물이 산다. 유네스코는 1983년 문화적·자연적 가치를 함께 인정해 ‘마추픽추 역사 보호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2014년에는 잉카 도로망 카팍 냔이 6개국 공동의 세계유산으로 따로 등재되었다.

마추픽추는 페루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중요한 수입원이다. 방문객 대부분은 기차로 아과스칼리엔테스(마추픽추 푸에블로)까지 간 뒤 20세기 중반에 닦은 도로를 버스로 오르고, 며칠에 걸쳐 잉카 트레일을 걷는 사람도 있다. 연간 방문객은 100만 명을 훌쩍 넘었고, 페루 정부는 하루 입장 인원 제한, 시간대별 입장, 정해진 관람 동선을 운영한다. 이 규정은 여러 차례 바뀌었고, 유적 보호와 지역 주민의 생계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이 된다.

보존 과제로는 침식과 산사태, 수많은 발걸음에 따른 마모, 아래 마을의 무분별한 팽창, 사고 등이 있다. 예컨대 2000년에는 광고 촬영에 쓰던 크레인이 인티와타나 돌의 모서리를 깨뜨렸다. 지역의 케추아 원주민 공동체는 유적의 관리와 소개 방식에 더 큰 목소리를 내기를 요구하고 있다.

[1][2][6]

심화

논쟁: 마추픽추의 연대와 잉카 연대기

수십 년 동안 마추픽추의 연대는 문헌에서 끌어냈다. 존 로가 1940년대에 주로 미겔 카베요 발보아의 연대기(1586)를 바탕으로 제시한 잉카 왕 연대표는 파차쿠티의 즉위를 1438년으로 잡았다. 마추픽추는 파차쿠티가 우루밤바강 하류를 정복한 뒤 지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보통 1450년 무렵 이후에 건설되었고, 사람이 산 기간은 약 80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2021년 리처드 버거, 루시 살라사르, 제이슨 네스빗, 이든 워시번, 라르스 페렌슈미츠는 빙엄 시대에 발굴된 사람 뼈와 치아에서 얻은 가속질량분석(AMS) 방사성탄소 연대 26개를 발표했다. 그 결과 마추픽추에는 약 1420년부터 1532년까지 사람이 계속 살았으며, 이는 기존 연대표보다 20년가량 이르다. 연구진은 사건이 일어난 지 한 세기 뒤에 쓰인 식민 시대 연대기가 잉카의 역사를 압축했으며, 잉카의 팽창이 로의 연대보다 일찍 시작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잉카 유적의 방사성탄소 연대로 비슷한 결론에 이른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무덤의 방사성탄소 연대는 사람들이 살았던 시기를 알려 줄 뿐 특정 건물이 지어진 때를 알려 주지는 않으며, 15세기의 보정 곡선은 오차 범위가 넓다. 새 연대와 파차쿠티·토파 잉카의 재위 기간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도 논쟁 중이며, 여전히 두 왕의 치세에 걸쳐 건설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더 큰 교훈은 방법론이다. 에스파냐 문헌에만 기댄 잉카 연대기는 독립적인 고고학 연대로 검증해야 한다.

[7][5][2]

심화

논쟁: 이름, 용도, 그리고 사료

잉카는 이곳을 무엇이라 불렀을까. 2021년 역사학자 도나토 아마도 곤살레스와 고고학자 브라이언 바워는 빙엄의 현장 기록, 19세기 지도, 16~17세기 문서를 검토해 이 도시의 본래 이름이 ‘픽추’, 더 가능성 높게는 ‘와이나픽추’였고, ‘마추픽추’라는 이름은 빙엄의 출판물을 통해 유적에 붙었다고 주장했다. 증거 가운데에는 빌카밤바 지역 사람들이 ‘와이나픽추’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1588년 문서도 있다. 이 주장은 널리 보도되었지만, 마추픽추라는 이름이 이미 굳어진 만큼 이름을 바꾸자는 사람은 없다.

무엇을 위한 곳이었나. 왕실 영지 해석은 로가 공개한 식민 시대 문서, 건축(엘리트 주거, 정교한 신전, 적지만 다양한 상주 인구), 그리고 우루밤바 계곡의 다른 영지와의 비교에 근거한다. 이와 다르거나 보완하는 견해로는 종교 성소이자 순례지로서의 역할, 천문 정렬, 아마존 저지대와의 경계라는 입지가 주었을 경제·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각이 있다. 이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지금은 주거·의례·과시가 결합된 공간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사료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문헌 증거는 주로 후안 데 베탄소스(1551)와 페드로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1572) 같은 에스파냐 연대기, 그리고 토지에 관한 식민 시대 소송 문서다. 연대기는 잉카의 구전을 기록했지만 정보 제공자와 식민 관리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모양이 잡혔다. 고고학 증거로는 건축물, 1912~1915년 발굴품(상당수는 페루로 돌아온 뒤에야 본격 연구되었다), 이후 페루 학자들의 발굴이 있다. 최근에는 생물고고학, 동위원소 분석, 고대 DNA가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직접 증거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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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왕실 영지
잉카 통치자와 그 후손이 소유한 궁전·밭·상주 일꾼을 갖춘 시골 영지. 마추픽추를 이해하는 가장 유력한 틀이다.
정밀 석조(애슐러)
모르타르 없이 정확히 다듬은 돌을 맞춰 쌓는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잉카 건물에 쓰였다.
풍경과 함께하는 공학
계단식 밭, 기초, 배수로가 불안정하고 비가 많은 산등성이를 오래가는 도시로 바꾸었다.
신성한 풍경
안데스 종교에서 산·바위·샘·강은 힘 있는 존재였고, 도시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설계되었다.
이동하는 노동
DNA는 주민들이 제국 곳곳에서 왔음을 보여 주며, 사람들을 옮겨 국가와 엘리트를 섬기게 한 잉카의 정책을 반영한다.
‘잃어버린 도시’ 신화
이곳은 1911년 이전부터 현지에 알려져 있었다. ‘발견’ 이야기는 외부인의 시선을 반영한다.
연대기의 검증
방사성탄소 연대는 문헌에 근거한 잉카 연대표를 고고학으로 확인해야 함을 보여 준다.

기록

  1. 약 1420년 — AMS 방사성탄소 연대에 따르면 이 무렵부터 마추픽추에 사람이 살았다.
  2. 약 1438년 — 존 로의 연대표에 따른 파차쿠티의 전통적 즉위 연도(찬카 전쟁 이후).
  3. 1532년 — 에스파냐군이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음. 마추픽추의 가장 늦은 방사성탄소 연대도 이 무렵이다.
  4. 1572년 — 에스파냐가 빌카밤바를 점령하고 투팍 아마루를 처형. 이때쯤 마추픽추는 이미 버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5. 1588년 — 식민 시대 문서에 ‘와이나픽추’라는 곳이 언급됨. 도시의 본래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6. 1902년 — 아구스틴 리사라가가 유적을 방문하고 세 창문의 신전에 이름을 남김.
  7. 1911년 — 7월 24일 멜초르 아르테아가가 하이럼 빙엄을 유적으로 안내.
  8. 1913년 — 마추픽추 특집으로 꾸민 『내셔널 지오그래픽』 4월호로 세계에 널리 알려짐.
  9. 1981년 — 페루가 마추픽추 역사 보호지구를 지정.
  10. 1983년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11. 2011년 — 예일대가 빙엄 조사단의 발굴품을 페루에 반환하기 시작(2012년 완료).
  12. 2021년 — 새 AMS 방사성탄소 연대로 거주 시작 시점이 약 1420년으로 앞당겨짐.

용어 풀이

잉카
본래 통치자의 칭호였으나 지금은 15~16세기 초 안데스 제국의 사람들과 국가를 가리킨다.
타완틴수유
잉카 제국의 케추아어 이름으로 ‘하나로 모인 네 지방’이라는 뜻.
케추아어
잉카 국가의 언어. 지금도 안데스에서 수백만 명이 쓴다.
계단식 밭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고 돌벽으로 받친 평지. 농사와 침식 방지에 쓰였다.
애슐러
정밀하게 다듬어 맞춘 돌로 쌓은 석조.
와카
안데스 종교에서 성소·바위·샘처럼 신성한 장소나 사물.
아푸
안데스 신앙의 산신, 또는 신성한 산.
미타
공동체가 돌아가며 국가에 노동을 바치던 잉카의 제도.
야나코나
고향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평생 잉카 엘리트를 섬긴 사람들.
카팍 냔
제국을 잇던 잉카 도로망. 총연장 3만 km 이상으로 추정된다.
AMS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가속질량분석기로 탄소-14를 측정해 생물 유래 물질의 연대를 재는 방법. 적은 시료로도 가능하다.

묻고 답하기

잉카 사람들은 무거운 돌을 어떻게 산 위로 옮겼나요?

대부분 옮길 필요가 없었어요. 화강암은 산등성이 자체에서 나왔거든요. 일꾼들이 그 자리에서 바위를 쪼개고 다듬은 뒤 밧줄과 지렛대, 경사로로 옮겼어요.

마추픽추는 정말 ‘잃어버린 도시’였나요?

아니에요. 근처 농부들이 계단식 밭에서 살았고 1902년에는 아구스틴 리사라가가 다녀갔어요. 1911년 이후 하이럼 빙엄이 알리기 전까지 외부 사람들만 몰랐던 거예요.

에스파냐 사람들은 왜 이곳을 부수지 않았나요?

에스파냐 연대기 작가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정복 뒤 중요성을 잃고 버려져서 잉카 성소 파괴를 피했을 것으로 보여요.

몇 명이 살았나요?

많아야 750명 안팎으로 추정되고 대부분 시종이었어요. 통치자와 궁정이 찾아오면 더 늘었겠지요.

언제 지어졌나요?

전통적으로는 1450년 무렵 파차쿠티를 위해 지었다고 보지만, 2021년 발표된 방사성탄소 연대는 약 1420년부터 1532년까지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 줍니다.

인티와타나는 무엇에 쓰였나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암반을 깎아 만든 의례상 매우 중요한 돌로, 태양 관측이나 주변 산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추픽추’가 본래 이름인가요?

아마 아닐 겁니다. 아마도 곤살레스와 바워의 연구는 잉카가 이 도시를 ‘픽추’ 또는 ‘와이나픽추’라고 불렀다고 봅니다.

예일대 소장품은 왜 논란이 되었나요?

페루는 1912~1915년 발굴된 유물과 유골을 대여품으로 보았지만 예일대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보유했고, 2011~2012년에야 반환했기 때문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Historic Sanctuary of Machu Picchu.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2. Machu Picchu. Wikipedia
  3. 마추픽추. 위키백과
  4. Hiram Bingham III. Wikipedia
  5. Pachacuti. Wikipedia
  6. Inca road system. Wikipedia
  7. Richard L. Burger, Lucy C. Salazar, Jason Nesbitt, Eden Washburn, Lars Fehren-Schmitz, New AMS dates for Machu Picchu: results and implications. Antiquity 95 (383), 2021
  8. Lucy C. Salazar 외, Insights into the genetic histories and lifeways of Machu Picchu’s occupants. Science Advances, 2023
  9. Donato Amado Gonzales, Brian S. Bauer, The Ancient Inca Town Named Huayna Picchu. Ñawpa Pacha 42 (1), 2021
  10. Richard L. Burger, Lucy C. Salazar 엮음, Machu Picchu: Unveiling the Mystery of the Incas. Yale University Press, 2004
  11. Kenneth R. Wright, Alfredo Valencia Zegarra, Machu Picchu: A Civil Engineering Marvel. ASCE Press, 200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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