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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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먼 옛날 멕시코 고원의 큰 호수 한가운데, 섬 위에 세운 도시가 있었어요. 사람들은 물로 된 길인 운하를 따라 카누를 타고 다녔어요. ‘둑길’이라 부르는 긴 길 세 개가 호수를 가로질러 도시와 육지를 이어 주었지요.
이 도시를 세운 사람들은 자신들을 ‘멕시카’라고 불렀어요. 오늘날에는 흔히 ‘아스텍’이라고 부르지요.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신은 바위에서 자란 선인장 위에 독수리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까지 떠돌라고 했어요. 호수의 작은 섬에서 그 모습을 보자 그곳에 도시를 세웠대요. 지금도 멕시코 국기에서 독수리와 선인장을 볼 수 있어요.
멕시카 사람들은 호수 바닥의 진흙을 퍼 올려 운하 사이에 길쭉한 밭을 만들었어요. 이 똑똑한 밭을 ‘치남파’라고 해요. 돌과 흙으로 만든 수로는 언덕의 샘에서 깨끗한 마실 물을 끌어왔어요. 도시 한가운데에는 꼭대기에 신전 두 개가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었어요. 하나는 전쟁과 태양의 신, 하나는 비의 신을 모셨지요.
이곳에는 20만 명쯤이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때 유럽의 거의 어느 도시보다 많은 숫자예요. 큰 시장은 어찌나 붐볐는지, 에스파냐 사람들은 이런 곳을 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에스파냐 군인들이 왔어요. 멕시카와 원수였던 수만 명의 원주민 전사들이 그들과 손을 잡았고, 천연두라는 무서운 병까지 퍼졌어요. 그들은 도시를 포위해 1521년에 무너뜨렸어요. 에스파냐 사람들은 폐허 위에 멕시코시티를 세웠고,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그 거리 아래에서 테노치티틀란의 흔적을 찾아내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건립
- 전통적으로 1325년. 대부분의 나우아·에스파냐 사료가 말하는 ‘2 집(오메 칼리)’의 해
- 함락
- 1521년 8월 13일, 약 80일간의 포위전 끝에
- 위치
- 멕시코 계곡 텍스코코호 서쪽의 섬들. 오늘날 멕시코시티 역사 지구
- 주민
- 나우아틀어를 쓰는 멕시카. 1428년부터 삼각동맹(‘아스텍 제국’)의 주도 세력
- 규모
- 쌍둥이 도시 틀라텔롤코를 포함해 약 8~13.5km². 인구는 흔히 20만 명 안팎으로 추정(추정치 편차가 큼)
- 대표 건축
- 우이칠로포치틀리와 틀랄록을 모신 쌍둥이 피라미드 신전 템플로 마요르. 일곱 차례 크게 증축
- 지정
- 유네스코 세계유산 ‘멕시코시티 역사 지구와 소치밀코’의 일부(1987)
쉬움
테노치티틀란은 어떤 도시였나
테노치티틀란은 나우아틀어를 쓰던 멕시카의 수도다. 멕시카는 15세기와 16세기 초 메소아메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끌었다. 도시는 텍스코코호 서쪽 연안 가까이의 섬들 위에 있었다. 당시 해발 약 2,240m의 멕시코 계곡 바닥에는 얕은 호수 여러 개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 정식 이름 ‘메시코 테노치티틀란’에서 멕시코시티와 멕시코라는 나라 이름이 나왔다.
전성기인 1519년, 테노치티틀란과 북쪽 섬의 쌍둥이 도시 틀라텔롤코는 세계에서 손꼽히게 큰 도시를 이루었다. 인구 추정치는 편차가 크지만 20만 명 안팎으로 보는 역사가가 많다. 당시 유럽에서 이만한 규모의 도시는 파리, 나폴리, 콘스탄티노폴리스 등 몇 곳뿐이었다.
도시는 1521년 에스파냐 정복자들과 그보다 훨씬 많은 원주민 동맹군의 긴 포위전 끝에 파괴되었다. 에스파냐는 그 폐허 바로 위에 누에바에스파냐의 수도를 세웠다. 수백 년 동안 테노치티틀란은 주로 문헌과 그림으로만 알려졌지만, 1970년대 이후 멕시코시티 거리 아래의 발굴로 중앙 신전과 여러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쉬움
선인장 위의 독수리: 건국 이야기
멕시카의 전승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북쪽 어딘가의 고향 아스틀란을 떠나 수호신 우이칠로포치틀리의 인도를 받으며 여러 세대 동안 떠돌았다. 사람이 붐비는 멕시코 계곡에 이르렀을 때 좋은 땅은 이미 오래된 도시국가들의 차지였다. 멕시카는 한동안 차풀테펙 근처에서, 이어 쿨우아칸의 신민으로 살다가 호수의 늪지대로 쫓겨났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에서 그들은 우이칠로포치틀리가 약속한 징표를 보았다. 바위에서 자란 부채선인장(노치틀리) 위에 앉은 독수리였다. 그 자리에 도시를 세웠다. ‘테노치티틀란’은 흔히 ‘바위 위 부채선인장의 땅’으로 풀이되며, 건국 당시 멕시카 지도자 테노치의 이름과 연결하기도 한다. 선인장 위 독수리는 16세기 『멘도사 코덱스』의 첫 장과 오늘날 멕시코 국기에 그려져 있다.
건국 연도를 적은 나우아·에스파냐 사료 대부분은 1325년에 해당하는 ‘2 집(오메 칼리)’의 해를 들며, 날짜는 밝히지 않는다. 2021년 멕시코 정부는 1321년을 기준으로 ‘건립 7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는데, 역사학자들과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INAH) 인류학자들은 사료로도 고고학으로도 뒷받침되지 않는 연도라고 비판했다. 고고학으로 정확한 해를 가릴 수는 없으며, 전통적인 연도 이전부터 섬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분명한 것은 멕시카가 보잘것없는 땅의 작은 주변 집단으로 출발해 약 150년 만에 제국의 중심을 일구었다는 사실이다.
쉬움
물 위의 도시: 도시 구조 ‘읽기’
도시는 중심을 기준으로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한가운데에는 담으로 둘러싼 성역이 있어 신전, 학교, 구기장 등 수십 채의 의례 건물이 들어섰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에게 정보를 준 나우아 사람들은 이 일대의 건물 78채를 꼽았다. 성역을 중심으로 도시는 모요틀란, 테오판(소키아판), 아차코알코, 쿠에포판이라는 네 구역으로 나뉘었다. 각 구역은 저마다 신전과 지도자, 공동 토지를 가진 ‘칼폴리’라는 동네로 이루어졌다.
세 개의 큰 둑길이 섬과 육지를 이었다. 북쪽으로 테페약, 남쪽으로 이스타팔라파, 서쪽으로 틀라코판으로 가는 길이다. 둑길 중간중간에는 떼어 낼 수 있는 나무다리를 놓아 카누가 지나다닐 수 있게 했고, 방어에도 썼다. 흙길과 나란히 난 운하망이 교통의 대부분을 맡아, 수만 척의 카누가 사람과 식량, 건축 자재, 심지어 오물까지 실어 날랐다.
물은 늘 문제였다. 텍스코코호의 물은 짰기 때문에, 마실 물은 15세기에 돌과 회반죽으로 만든 수로를 통해 차풀테펙의 샘에서 끌어왔다. 수로가 두 줄이어서 하나를 청소하는 동안 다른 하나를 쓸 수 있었다. 15세기 중엽 큰 홍수가 난 뒤에는 텍스코코의 시인 군주 네사우알코요틀이 세웠다고 전하는 긴 제방을 호수에 가로질러 쌓아 홍수를 막고, 도시 주변의 비교적 맑은 물을 동쪽의 짠물과 갈라놓았다.
틀라텔롤코 시장은 에스파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코르테스는 날마다 6만 명쯤이 모인다고 썼다. 오늘날의 추정치는 이보다 낮지만 여전히 엄청난 규모다. 옥수수·콩·고추부터 면직물, 깃털, 흑요석 칼날, 금, 노예로 팔리는 사람까지 물건은 종류별로 자리를 나누었고, 재판관이 그 자리에서 분쟁을 해결했다. 카카오 콩과 일정 길이의 면직물이 화폐처럼 쓰였다.
쉬움
큰 도시를 먹여 살리기: 치남파와 공물
계곡의 식량 상당 부분은 치남파에서 나왔다. 얕은 호수에 말뚝으로 틀을 세우고 진흙과 수초를 층층이 쌓아 만든 길고 좁은 밭이다. 가장자리에 버드나무를 심어 뿌리로 밭을 붙잡았다. 밭 사이의 운하는 물과 기름진 진흙을 대 주었고, 카누로 수확물을 도시까지 실어 나를 수 있게 했다. 치남파에서는 옥수수, 콩, 호박, 고추, 아마란스, 꽃을 한 해에 여러 번 거둘 수 있었다.
가장 큰 치남파 지대는 민물인 남쪽 호수들, 소치밀코와 찰코 일대에 있었고, 소치밀코에서는 지금도 치남파 농사를 짓는다. 테노치티틀란 안에도 작은 치남파 텃밭을 가진 집이 많았다.
테노치티틀란은 공물로도 살았다. 정복된 지방들은 옥수수, 콩, 면직물, 전사 복장, 카카오, 깃털, 금, 옥 등을 정기적으로 바쳤다. 1541년 무렵 원주민 화가들이 에스파냐 행정 당국을 위해 그린 『멘도사 코덱스』에는 수십 개 지방이 바쳐야 할 공물이 적혀 있어, 도시의 부가 어떻게 모였는지 이해하는 핵심 사료가 된다.
중급
템플로 마요르: 세계의 중심에 선 산
성역 한가운데에는 ‘우에이 테오칼리’, 오늘날 템플로 마요르(대신전)라 부르는 건물이 있었다. 밑변이 약 100×80m인 계단식 피라미드로, 두 줄의 계단이 꼭대기의 두 신전으로 이어졌다. 남쪽 신전은 태양과 전쟁의 신이자 멕시카의 수호신 우이칠로포치틀리를, 북쪽 신전은 비와 농업의 신 틀랄록을 모셨다. 한쪽은 전쟁과 공물, 다른 쪽은 물과 옥수수. 두 신전은 멕시카 삶의 두 기둥을 표현했다.
신전은 신성한 산을 나타내기도 했다. 우이칠로포치틀리 쪽은 ‘뱀의 언덕’ 코아테펙을 상징했다. 멕시카 신화에서 갓 태어난 우이칠로포치틀리는 이곳에서 누이 코욜샤우키와 형제들을 물리치고 누이의 몸을 토막 내 언덕 아래로 던졌다. 그의 계단 발치에는 부서진 코욜샤우키의 몸을 새긴 거대한 돌 원반이 놓여 있었다. 틀랄록 쪽은 계곡에 비를 가져오는 산들을 떠올리게 했다.
신전은 적어도 일곱 번 증축되었다. 대개 새 통치자가 즉위할 때마다 새 건물이 옛 건물을 양파 껍질처럼 감쌌다. 가장 유명한 증축은 1487년 아우이초틀 치세에 봉헌되었는데, 이때 대규모 인신 공양이 있었다. 에스파냐와 후대 식민 시대 사료는 희생자 수를 엄청나게 제시하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과장으로 본다. 그러나 고고학은 인신 공양이 멕시카 국가 종교의 중심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멕시카의 사고에서 신들은 스스로를 희생해 해를 움직이게 했고, 인간은 그 대가로 신들에게 양분을 바쳐야 했다. 희생자는 대부분 전쟁 포로였고, 그 두개골은 거대한 해골 선반(우에이 촘판틀리)에 전시되었다. 2015년부터 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INAH) 고고학자들은 이 선반과 해골 탑의 잔해를 발굴했는데,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의 두개골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급
공물 바치던 도시에서 제국으로: 삼각동맹
건국 후 첫 한 세기 동안 테노치티틀란은 아스카포찰코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테파넥 왕국에 공물을 바치고 대신 싸워 주는 종속 도시였다. 1370년대에 멕시카는 명망 높은 쿨우아칸 왕가의 후손을 자처한 통치자(틀라토아니) 아카마피치틀리를 시작으로 왕조를 세웠다. 1428년 이츠코아틀은 네사우알코요틀이 이끄는 텍스코코, 그리고 틀라코판과 손잡고 아스카포찰코를 무너뜨렸다. 이 연합을 삼각동맹이라 하며, 후대 사람들이 ‘아스텍 제국’이라 부른 것이 이들의 지배 영역이다.
모테쿠소마 1세(모테쿠소마 일우이카미나), 악사야카틀, 아우이초틀 같은 통치자들 아래에서 동맹은 멕시코 중부와 남부로 세력을 넓혀 멕시코만에서 태평양, 과테말라 경계 가까이까지 이르렀다. 1473년 테노치티틀란은 이웃 틀라텔롤코를 정복해 흡수했고, 점차 동맹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이 제국은 모든 지방에 중앙 관료를 둔 영토 국가가 아니었다. 정복된 도시국가 대부분은 공물을 바치고 멕시카의 우위를 인정하는 한 자기 통치자를 유지했다. 동쪽의 틀락스칼라처럼 끝내 정복되지 않은 강한 이웃도 있었다. 멕시카는 이들과 의례화된 ‘꽃의 전쟁’(소치야오요틀)을 벌여 희생 제물로 쓸 포로를 얻었다. 공물 바치는 속국과 적들이 뒤섞인 이 구조는 훗날 그토록 많은 원주민이 에스파냐 편에 서서 테노치티틀란과 싸운 이유를 설명해 준다.
테노치티틀란은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기도 했다. 귀족 자제는 ‘칼메카크’, 평민 자제는 ‘텔포치칼리’라는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전문 장인들은 매우 세련된 깃털 공예, 금 세공, 석조 조각을 만들었고, 시인들이 지은 노래는 훗날 『칸타레스 멕시카노스』 같은 모음집에 기록되었다. 흔히 ‘아스텍 달력’이라 잘못 부르는 ‘태양의 돌’과 거대한 코아틀리쿠에 석상은 멕시카 조각의 걸작이다.
중급
테노치티틀란의 함락, 1519~1521년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에스파냐 병사 수백 명과 함께 멕시코만 연안에 상륙했다. 나우아 여성 말린친(에스파냐인은 도냐 마리나, 후대에는 ‘라 말린체’라 불렀다)과 마야어를 할 줄 아는 에스파냐인 한 명을 통해 그는 현지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는 토토낙족을 동맹으로 삼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멕시카의 숙적 틀락스칼라와도 손을 잡았다. 1519년 11월 8일 에스파냐군과 동맹군은 테노치티틀란에 들어갔고, 통치자 모테쿠소마 2세(모테쿠소마 쇼코요친)가 그들을 맞았다.
며칠 만에 에스파냐군은 모테쿠소마를 그의 도시 안에서 인질로 잡았다. 1520년 5월, 코르테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부관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성역에서 톡스카틀 축제를 벌이던 무장하지 않은 귀족들을 공격해 많은 이를 죽였다. 도시는 봉기했다. 모테쿠소마는 6월 말 에스파냐군에 붙잡힌 채 죽었다. 에스파냐 측 기록은 자기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고, 여러 원주민 기록은 에스파냐인이 그를 죽였다고 한다. 1520년 6월 30일에서 7월 1일로 넘어가는 밤, 에스파냐군은 틀라코판 둑길로 탈출하다 많은 병사와 금을 잃었다. 그들은 이 참사를 ‘슬픈 밤’(라 노체 트리스테)이라 불렀다.
이어 1520년 늦가을 아메리카에 처음 들어온 천연두가 계곡을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모테쿠소마의 후계자 쿠이틀라우악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틀락스칼라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코르테스는 호수를 장악할 작은 범선(브리간틴) 13척을 만들고, 틀락스칼라·텍스코코·우에호친코·찰코 등에서 수만 명의 원주민 동맹군을 모았다. 포위전은 1521년 5월 말에 시작되었다. 공격군은 차풀테펙 수로를 끊고 둑길을 봉쇄한 뒤 건물을 허물며 한 거리씩 밀고 들어갔다.
젊은 통치자 쿠아우테목이 이끈 수비군은 굶주림과 갈증, 질병 속에서 약 80일을 버텼다. 마지막 저항은 틀라텔롤코에서 벌어졌다. 1521년 8월 13일 카누로 탈출하려던 쿠아우테목이 사로잡히면서 도시는 함락되었다. 포위전 동안 수만 명이 죽었고, 원주민 사망자 추정치는 약 10만 명에서 20만 명 이상까지 이른다. 뒷날 기록된 나우아 사람들의 증언은 거리에 쌓인 시신과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을 전한다.
중급
테노치티틀란 위의 멕시코시티
정복 뒤 코르테스는 이 도시가 지닌 상징적 힘을 이용하려고 폐허 위에 에스파냐의 수도를 세우기로 했다. 성역은 평평하게 밀렸고, 그 돌은 교회와 집을 짓는 데 다시 쓰였다. 중앙 광장(오늘날의 소칼로)과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 성역의 일부 위에 들어섰다. 원주민 주민은 따로 구획된 지역에 모여 살게 되었지만, 새 도시를 지은 것은 원주민의 노동이었고, 나우아틀어를 쓰는 공동체와 그 자치 기구는 수백 년 동안 그곳에서 이어졌다.
호수는 서서히 사라졌다. 거듭된 홍수 끝에 식민 당국은 1607년 계곡 밖으로 물을 빼내는 배수 공사를 시작했고, 이 사업은 멕시코 독립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후 수백 년에 걸쳐 호수는 대부분 말라붙었다. 오늘날 멕시코시티는 무른 옛 호수 바닥 위에 있어 땅이 가라앉고 지진에 취약하다. 소치밀코에 남은 운하와 치남파는 옛 호수 풍경의 마지막 조각이다.
테노치티틀란은 기억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1790년 중앙 광장을 다시 포장하던 인부들이 태양의 돌과 코아틀리쿠에 석상을 찾아냈다. 1978년에는 대성당 근처에서 땅을 파던 전력 회사 인부들이 거대한 코욜샤우키 원반을 발견했고, 이것이 고고학자 에두아르도 마토스 모크테수마가 이끈 템플로 마요르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이후 발굴로 신전의 여러 단계와 수천 점의 봉헌물이 드러났고, 2006년에는 대지의 신 틀랄테쿠틀리의 거대한 석판이 발견되었다.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은 1987년 문을 열었고, 같은 해 유네스코는 멕시코시티 역사 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중급
정복을 기억하는 여러 시선
오랫동안 테노치티틀란 함락의 이야기는 주로 정복자의 눈으로 전해졌다. 코르테스가 카를 5세에게 보낸 편지, 병사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의 회고록, 에스파냐 연대기들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용감한 에스파냐인 수백 명이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린다. 현대 역사가들은 오히려 이 전쟁을 주로 원주민 군대가 치렀고, 틀락스칼라 등은 저마다의 이유로 참전했으며, 질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원주민의 시선은 나우아틀어 문헌과 그림 문서에 남아 있다. 1959년 멕시코 역사가 미겔 레온포르티야는 나우아 사람들의 증언을 모은 『패자의 시선(Visión de los vencidos)』(영어판 『부러진 창』)을 펴내 ‘패배한 자들의 눈’을 널리 알렸다. 반면 틀락스칼라의 문서는 자기 민족을 특권을 누려 마땅한 에스파냐 왕실의 충실한 동맹으로 그린다. 정복에 대한 원주민의 시선은 하나가 아니었다.
오늘날 멕시코에서 테노치티틀란은 국가의 기원을 상징하며, 멕시카의 과거는 국가 정체성의 중심에 있다. 정복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민감하다. 2019년 멕시코 대통령은 에스파냐와 교황청에 정복 과정의 잘못을 사과하라고 요구했고, 에스파냐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2021년 멕시코는 함락 500주년을 맞아 원주민의 저항을 강조하는 기념행사를 열었다.
심화
학계의 논쟁: 신화, 숫자, 이름
멕시카는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을까. 모테쿠소마가 코르테스를 돌아온 신 케찰코아틀로 믿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매슈 레스톨, 카밀라 타운센드를 비롯한 많은 역사가는 이 이야기가 정복 수십 년 뒤의 사료에만 나타나며, 에스파냐인과 정복 이후 원주민의 관심사가 반영되어 만들어졌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코르테스의 편지에 나오는 모테쿠소마의 ‘제국 양도’ 이야기도 에스파냐 국왕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꾸며 낸 법적·정치적 허구로 널리 여겨진다.
몇 명이 살았고 몇 명이 죽었나. 도시 인구 추정치는 가구 규모, 밀집 거주 면적, 에스파냐 보고의 신뢰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약 6만 명에서 30만 명 이상까지 벌어진다. 접촉 이전 멕시코 중부 전체 인구의 추정치는 더 크게 갈리며, 16세기 전염병이 부른 인구 붕괴의 규모도 논쟁 중이다. 다만 그것이 파국적이었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인신 공양은 얼마나 대규모였나. 20세기의 일부 저자는 대량 희생에 관한 에스파냐 기록을 식민 선전으로 의심했고, 다른 이들은 엄청난 숫자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템플로 마요르와 우에이 촘판틀리의 발굴은 인신 공양이 실제로 광범위하게 행해졌음을 확인했지만, 연대기의 구체적 숫자는 믿기 어렵다. 오늘날 학자들은 인신 공양을 단순히 잔혹함의 증거나 에스파냐의 편견으로 보기보다 멕시카의 우주관과 정치 속에서 해석하려 한다.
‘아스텍’인가 ‘멕시카’인가. 멕시카는 스스로를 아스텍이라 부르지 않았다. 아스틀란에서 나온 이 말은 18~19세기 저술가들이 널리 퍼뜨렸다. 지금 많은 학자는 테노치티틀란 사람들을 ‘멕시카’로, 제국을 ‘삼각동맹’으로 부르고, ‘아스텍’은 일반적인 용어로 남겨 둔다.
심화
증거와 방법
에스파냐 측 사료로는 생생하지만 자기변명적인 코르테스의 편지(『보고 서한』, 1519~1526), 수십 년 뒤 노병이 쓴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의 『누에바에스파냐 정복의 참된 역사』, 그리고 도시를 직접 보지 못한 저자들의 연대기가 있다. 모두 테노치티틀란을 유럽의 잣대로 묘사했고,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복무했다.
원주민·혼혈 사료도 똑같이 중요하다. 1540년대부터 1570년대까지 사아군이 나우아 학자·원로들과 함께 편찬한 『피렌체 코덱스』는 나우아틀어 본문과 에스파냐어 번역, 수백 점의 그림으로 멕시카 사회를 백과사전처럼 기록했으며, 제12권은 틀라텔롤코의 시각에서 본 정복을 전한다. 『멘도사 코덱스』(1541년 무렵)는 테노치티틀란 통치자들의 역사와 공물, 일상생활을 기록했다. 『틀라텔롤코 연대기』처럼 로마자로 적은 나우아틀어 연대기, 치말파인과 페르난도 데 알바 익스틀릴소치틀 같은 후대 원주민·메스티소 역사가의 저작도 지역 전승을 보존한다. 이 사료들은 모두 정복 뒤 식민 상황에서 만들어졌으므로 누가 왜 썼는지를 따져 읽어야 한다.
고고학은 독립적인 증거를 준다. 옛 도시가 세계 최대급 현대 도시 아래 있어서 발굴은 주로 건설 공사 때, 템플로 마요르 구역에서, 그리고 INAH의 도시 고고학 사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전 각 단계의 층위, 봉헌물·인골·동위원소 분석, 호수 환경사 연구가 이 도시에 대한 이해를 계속 바꾸고 있다.
핵심 개념
- 호수 위의 도시
- 테노치티틀란은 둑길과 운하로 이어진 섬 위의 도시였고, 수로·제방·치남파가 이를 떠받쳤다.
- 치남파
- 얕은 호수에 쌓아 올린 밭. 생산성이 매우 높으며 소치밀코에서 지금도 경작한다.
- 삼각동맹
- 1428년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틀라코판이 맺은 연합. 흔히 아스텍 제국이라 부른다.
- 공물 제국
- 정복된 도시국가는 자기 통치자를 유지하되 테노치티틀란에 물자를 바쳤다. 『멘도사 코덱스』에 기록되어 있다.
- 템플로 마요르
- 우이칠로포치틀리와 틀랄록을 모신 쌍둥이 신전으로, 멕시카 세계의 중심에 선 신성한 산을 나타냈다.
- 원주민의 전쟁으로서의 정복
- 도시의 함락은 소수의 에스파냐인과 손잡은 원주민 군대가 천연두 유행 속에서 이룬 것이었다.
- 패자의 시선
- 나우아 문헌은 정복에 대한 원주민의 관점을 보존해 에스파냐 측 기록과 균형을 이룬다.
- 겹쳐 쌓인 도시
- 멕시코시티가 테노치티틀란 바로 위에 있어 현대의 건설과 고고학이 긴밀히 얽혀 있다.
기록
- 약 1325년 — 텍스코코호의 섬에 테노치티틀란이 세워졌다고 전하는 전통적 연도.
- 약 1337년 — 이웃 섬에 틀라텔롤코가 세워졌다고 전하는 전통적 연도.
- 1428년 —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틀라코판이 아스카포찰코를 물리치고 삼각동맹을 결성.
- 1473년 — 테노치티틀란이 틀라텔롤코를 정복해 흡수.
- 1487년 — 아우이초틀 치세에 템플로 마요르의 대규모 증축을 봉헌.
- 1502년 — 모테쿠소마 2세가 테노치티틀란의 통치자가 됨.
- 1519년 — 11월 8일 에르난 코르테스와 원주민 동맹군이 도시에 들어옴.
- 1520년 — 톡스카틀 학살(5월), 모테쿠소마의 죽음, ‘슬픈 밤’(6월 30일~7월 1일). 가을에 천연두 확산.
- 1521년 — 약 80일간의 포위 끝에 8월 13일 함락, 쿠아우테목이 사로잡힘.
- 1790년 — 멕시코시티 중앙 광장 아래에서 태양의 돌과 코아틀리쿠에 석상 발견.
- 1978년 — 인부들이 코욜샤우키 석판을 발견해 템플로 마요르 프로젝트가 시작됨.
- 1987년 —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 개관. 멕시코시티 역사 지구와 소치밀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
용어 풀이
- 멕시카
- 테노치티틀란을 세운 나우아틀어 사용 집단. 흔히 아스텍이라 부른다.
- 나우아틀어
- 멕시카와 멕시코 중부 여러 민족의 언어. 지금도 100만 명 넘게 쓴다.
- 틀라토아니
- ‘말하는 자’라는 뜻으로 나우아 도시국가의 통치자. 테노치티틀란의 통치자는 ‘우에이 틀라토아니’(위대한 말하는 자)였다.
- 칼폴리
- 자체 신전·지도자·토지를 가진 동네 또는 친족 공동체.
- 치남파
- 얕은 호수에 쌓아 만든 농경지.
- 둑길
- 물이나 습지를 가로질러 높게 쌓은 길.
- 촘판틀리
- 희생자의 두개골을 전시하던 선반.
- 코덱스
- 필사본 책. 메소아메리카에서는 나무껍질 종이나 사슴 가죽에 그림 문자로 그린 경우가 많다.
- 메소아메리카
- 옥수수 농사, 구기 경기, 역법 등을 공유한 멕시코 중남부와 중앙아메리카의 문화권.
- 브리간틴
- 돛과 노를 함께 쓰는 작은 배. 코르테스는 텍스코코호에서 싸우려고 13척을 만들었다.
묻고 답하기
멕시카는 왜 호수 안에 도시를 세웠나요?
전설로는 신이 그곳에서 선인장 위의 독수리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는 좋은 땅이 이미 다른 도시들 차지였고, 호수가 방어와 물고기·새, 농사에 좋은 진흙을 주었지요.
사람들은 어떻게 돌아다녔나요?
주로 운하를 따라 카누를 탔고, 길과 섬을 육지에 잇는 둑길 세 개를 걸어 다녔어요.
테노치티틀란과 멕시코시티는 같은 곳인가요?
네. 에스파냐 사람들이 테노치티틀란 위에 멕시코시티를 세웠어요. 소칼로 광장과 대성당이 옛 성역 일부 위에 있어요.
에스파냐인 수백 명이 어떻게 그렇게 큰 도시를 이겼나요?
혼자 이긴 게 아닙니다. 틀락스칼라를 비롯한 수만 명의 원주민 동맹군이 멕시카와 싸웠고, 천연두가 수많은 수비군과 지도자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아스텍 사람들은 정말 코르테스를 케찰코아틀 신이라고 믿었나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많은 역사가는 이 이야기가 정복 뒤에 만들어졌다고 보며, 가장 이른 사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인신 공양에 대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나요?
템플로 마요르와 거대한 해골 선반의 발굴로 대규모로 실제 행해졌음이 확인되었지만, 연대기 작가들이 제시한 숫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호수는 어디로 갔나요?
1607년부터 식민 당국과 이후 멕시코 정부가 홍수를 막으려고 호수의 물을 빼냈습니다. 소치밀코 같은 작은 흔적만 남았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Historic Centre of Mexico City and Xochimilco.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 Tenochtitlan. Wikipedia
- 테노치티틀란. 위키백과
- Templo Mayor. Wikipedia
- Fall of Tenochtitlan. Wikipedia
- Florentine Codex. Wikipedia
- Codex Mendoza. Wikipedia
- Aztec Triple Alliance. Wikipedia
- Camilla Townsend, Fifth Sun: A New History of the Aztecs.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 Matthew Restall, When Montezuma Met Cortés: The True Story of the Meeting that Changed History. Ecco, 2018
함께 보기
- 테오티우아칸멕시코 중부의 고대 대도시로, 거대한 도로와 피라미드, 넓은 주거 단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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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멕 거대 두상멕시코만 연안의 올메카 사람들이 만든 거대한 현무암 두상으로, 통치자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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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폴 부세계의 기원과 신성한 인물, 조상의 역사를 전하는 키체 마야의 이야기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