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옛날 유럽에서는 책을 모두 손으로 베껴 써야 했어요. 필경사 한 사람이 깃털 펜으로 성서 한 권을 다 쓰려면 1년이 넘게 걸리기도 했지요. 그래서 책은 귀하고 아주 비쌌어요.
독일 마인츠에 살던 금속 기술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멋진 생각을 떠올렸어요. 작은 금속 글자를 수천 개 만들었는데, 글자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어서 이리저리 옮길 수 있었어요. 일꾼들은 이 글자를 늘어놓아 낱말과 쪽을 만들고, 끈적한 잉크를 바른 다음 ‘인쇄기’라는 기계로 종이를 꾹 눌렀어요. 다 찍고 나면 글자를 풀어서 다음 쪽에 다시 쓸 수 있었지요.
1454~55년 무렵 구텐베르크의 공방은 라틴어 성서 인쇄를 마쳤어요. 약 1,280쪽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책이라 보통 무거운 두 권으로 묶었어요. 한 쪽에 두 단, 단마다 42줄이 있어서 ‘42행 성서’라고도 불러요. 종이에 찍은 것과 ‘벨럼’이라는 매끈한 송아지 가죽에 찍은 것을 합쳐 180부쯤 만들었어요.
인쇄된 글자는 거의 손글씨처럼 보여요. 구텐베르크는 가장 훌륭한 필사본만큼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인쇄가 끝나면 화가들이 붉은색·푸른색 머리글자와 알록달록한 꽃무늬를 손으로 그려 넣어서, 책마다 모습이 조금씩 달라요.
지금은 약 49부가 남아 있는데, 온전한 것도 있고 일부만 남은 것도 있어요. 세계 여러 큰 도서관과 박물관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지요. 구텐베르크 성서는 책을 훨씬 빨리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인쇄술은 곧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갔어요.
한눈에 보기
- 인쇄
- 마인츠, 1452~1455년 무렵. 늦어도 1455년에 완성
- 제작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공방. 요한 푸스트가 자금을 대고 페터 쇠퍼도 일했을 것으로 봄
- 본문
- 라틴어 불가타 성서. 중세 ‘파리 성서’ 계통에 가까운 판본
- 형태
- 대형 이절판, 약 1,280쪽(641~643장), 보통 두 권으로 제본. 한 쪽에 두 단, 단마다 42행
- 부수
- 약 160~185부 인쇄(종이 약 135부, 벨럼 약 45부). 약 49부 현존, 그중 완본 약 21부
- 활자
- 고딕 텍스투라체. 합자와 약어를 포함해 약 290종의 글자
- 인정
- 괴팅겐 벨럼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2001)
- 다른 이름
- 42행 성서(B42), 마자랭 성서
쉬움
구텐베르크 성서란 무엇인가
구텐베르크 성서는 1450년대 중반 독일 도시 마인츠에서 인쇄한 라틴어 성서다. 유럽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본격적인 책으로, 같은 글자를 짜 맞추어 찍고 다시 풀어 거듭 쓰는 기술로 만들었다. 마인츠 상인 요한 푸스트가 빌려준 돈으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공방에서 제작되었다.
한 단이 42행이어서 서지학자들은 이를 ‘42행 성서’, 줄여서 B42라고 부른다. ‘마자랭 성서’라고도 하는데, 18세기에 처음 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책이 파리의 마자랭 추기경 도서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쇄술이 마인츠에서 처음 발명된 것은 아니다. 목판 인쇄는 중국·한국·일본에서 수백 년 전부터 쓰였고, 활자는 중국에서 11세기에, 금속 활자는 한국에서 늦어도 13세기에 만들어졌다. 구텐베르크가 만든 것은 금속 활자를 대량으로 주조하고 효율적으로 인쇄하는 하나의 완결된 체계였고, 이 체계는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쉬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누구인가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추어 라덴 춤 구텐베르크는 1400년 무렵 마인츠에서 태어났지만 정확한 해는 알 수 없다. 도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흔히 쓰는 이름은 집안의 저택 ‘구텐베르크 저택(Hof zum Gutenberg)’에서 따왔다. 금속 세공 훈련을 받았고 도시의 조폐 일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인츠의 정치 분쟁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에서 살았다. 1439년 그곳에서 벌어진 소송 기록을 보면, 그는 동업자들과 함께 아헨 순례자에게 팔 금속 거울을 만드는 비밀 사업을 했는데, 여기에 압착기와 납, ‘형틀’이 쓰였다. 많은 역사가는 그가 이미 인쇄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본다.
1448년 그는 마인츠로 돌아와 돈을 빌렸다. 처음에는 친척에게, 이어 1450년 무렵 요한 푸스트에게 800굴덴을 빌렸고, 몇 년 뒤 성서 사업을 위해 다시 800굴덴을 빌렸다. 이 빚 때문에 그는 나중에 자기 공방의 운영권을 잃게 된다.
쉬움
어떻게 인쇄했을까
핵심 발명은 똑같은 글자를 빠르게 많이 주조하는 방법이었다. 먼저 장인이 단단한 강철 막대 끝에 글자를 거꾸로 새겨 ‘펀치’(부형)를 만든다. 이 펀치를 무른 구리 덩어리에 쳐서 글자 모양이 오목하게 찍힌 ‘자모(매트릭스)’를 만든다. 자모를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손 주형에 끼우고 녹인 금속을 부으면 몇 초 만에 작은 금속 활자 하나가 완성된다. 금속은 납·주석·안티몬의 합금으로, 쉽게 녹고 빨리 굳으며 인쇄를 견딜 만큼 단단했다.
식자공은 활자 상자에서 활자를 골라 줄을 짓고 쪽을 짰다. 짜 놓은 판을 틀에 고정하고, 필경사가 쓰던 수성 잉크보다 금속에 잘 붙는 유성 잉크를 바른 뒤, 축축하게 적신 종이나 벨럼을 나사식 압착기로 눌러 찍었다. 이 압착기는 포도주·종이·아마포를 짜던 기계를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 공방은 쪽을 훌륭한 손글씨처럼 보이게 하려고 약 290종의 글자를 주조했다. 대문자와 소문자, 여러 합자(이어 쓴 글자)와 약어, 폭이 조금씩 다른 글자가 있었다. 덕분에 최고의 필사본처럼 줄의 양 끝을 가지런히 맞출 수 있었다.
작업 규모는 엄청났다. 학자들은 인쇄기 여러 대와 수십 명의 일꾼이 2~3년 동안 매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 몇 쪽은 단마다 40행, 이어 41행, 그다음 42행으로 짰는데, 종이를 아끼려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몇 장은 붉은 제목을 두 번째로 찍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고 붉은 글씨는 손으로 넣었다.
쉬움
종이본과 벨럼본, 붉은 글씨와 장식
약 180부를 인쇄했는데, 대부분은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고급 종이에, 4분의 1쯤은 훨씬 비싼 벨럼(송아지 가죽)에 찍었다. 벨럼본 한 부를 만들려면 송아지 여러 마리의 가죽이 필요했다.
인쇄한 낱장은 제본하지 않은 채 팔렸다. 산 사람은 그 지역 장인에게 돈을 주고 마무리를 맡겼다. 루브리케이터(붉은 글씨 담당)는 붉은색·푸른색 머리글자와 장 제목, 쪽 머리 제목을 넣었고, 채식사는 금박과 그림 머리글자, 장식 테두리를 더했으며, 제본공은 책을 묶었다. 그래서 똑같은 책이 하나도 없다. 화려하게 채색한 책이 있는가 하면,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본처럼 소박한 펜 장식 머리글자만 있는 책도 있다.
파리에 있는 한 부에는 루브리케이터 하인리히 크레머가 1456년 8월에 작업을 마쳤다는 메모가 있다. 이 메모는 그때 이미 인쇄가 끝나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다.
중급
왜 마인츠에서, 왜 1450년대에?
15세기 중엽 라인란트에서는 여러 조건이 한데 모였다. 한때 이슬람 세계에서 들여오던 종이가 이제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점점 알프스 북쪽에서도 생산되어 양피지보다 훨씬 쌌다. 독일 도시에는 정밀한 펀치와 주형을 다룰 줄 아는 금세공인, 주화 제조공, 주물공이 있었다. 포도주 압착기와 종이 압착기는 익숙한 기계였다. 그리고 대학, 학교, 수도원, 성직자, 부유한 도시민 등 독자 시장이 커지고 있었다.
교회에도 믿을 만하고 통일된 텍스트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개혁 운동가들은 손으로 베낀 전례서와 성서에 오류와 차이가 많다고 불평했다. 1451~52년 독일을 돌며 교회 개혁을 촉구한 교황 특사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정확하고 통일된 전례서를 요구했다. 일부 역사가는 이런 요구가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대작으로 고르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지만, 쿠자누스와 공방을 직접 잇는 증거는 없다.
마지막으로 인쇄는 사업이었다. 구텐베르크는 책을 한 부라도 팔기 훨씬 전에 금속, 종이, 벨럼을 사고 일꾼에게 임금을 주기 위해 큰돈을 빌려야 했다. 성서는 위험하지만 수익을 기대할 만한 선택이었다.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 필요했고 본문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서를 찍는 동안에는 면벌부, 달력, 학교 문법책(도나투스의 라틴어 문법서는 마인츠에서 여러 번 인쇄되었다) 같은 작은 일감이 더 빨리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중급
연대 추정: 훗날 교황이 된 사람의 편지
이 성서에는 인쇄 날짜나 간기가 없어서 연대는 다른 증거로 추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훗날 교황 비오 2세가 되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가 1455년 3월 후안 데 카르바할 추기경에게 쓴 편지다. 그는 1454년 10월 프랑크푸르트 시장에서 한 ‘놀라운 사람’이 성서의 접장(몇 장을 접어 묶은 묶음)을 보여 주었는데, 글씨가 어찌나 또렷한지 안경 없이도 읽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 이미 모든 부수가 팔렸다고들 한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핵심 문서는 푸스트가 구텐베르크를 상대로 낸 소송을 기록한 1455년 11월 6일의 ‘헬마스페르거 공증 문서’다. 이 문서는 푸스트가 대출금과 이자를 갚으라고 요구했고 법원이 대체로 그의 손을 들어 주었음을 보여 준다. 소송 뒤 푸스트는 장비 상당 부분을 넘겨받았고, 구텐베르크와 함께 일했던 필경사 출신으로 나중에 푸스트의 사위가 되는 페터 쇠퍼와 함께 성공한 인쇄업자가 되었다.
이런 증거를 종합해 대부분의 학자는 작업이 1452년 무렵 시작되어 1454년 또는 1455년 초에 인쇄가 끝났다고 본다. 같은 공방은 이 무렵 면벌부(1454~55)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뒤 튀르크에 맞선 십자군을 촉구한 작은 소책자 ‘튀르크 달력(Türkenkalender)’도 찍었다.
중급
본문과 디자인
본문은 성 히에로니무스와 연결되는 라틴어 번역본이자 서방 교회의 표준 성서였던 불가타다. 구텐베르크 판은 오늘날까지 쓰이는 성서의 책 순서와 장 구분을 정한 13세기 ‘파리 성서’ 전통을 따르며, 각 책에 붙인 히에로니무스의 서문도 싣고 있다.
글꼴은 전례용 필사본에 쓰던 격식 있는 고딕체 텍스투라다. 획이 각지고 빽빽하며 짙은 글자 덕분에 쪽은 호화로운 필사본처럼 보였다. 넉넉한 여백, 두 단 구성, 세심한 간격은 당대 최고 필사본의 미학을 반영한다.
이 책은 주로 교회와 수도원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예배와 식사 시간에 소리 내어 읽을 크고 읽기 쉬운 성서가 필요했다. 한 추정에 따르면 종이본 한 부가 약 30플로린으로 비쌌지만, 비슷한 필사본보다는 싸고 훨씬 빨리 구할 수 있었다.
중급
인쇄술의 확산
성서 공방을 잃은 뒤에도 구텐베르크는 작은 규모로 인쇄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푸스트와 쇠퍼는 1457년 『마인츠 시편』을 펴냈는데, 인쇄 날짜와 인쇄업자 이름을 찍은 유럽 최초의 책이자 색깔을 찍은 머리글자로 유명하다. 구텐베르크 활자의 초기 형태로 찍은 ‘36행 성서’도 1458~61년 무렵, 아마 밤베르크에서 나왔다.
1462년 대주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분쟁 중에 마인츠가 약탈당하자 많은 인쇄공이 도시를 떠났다. 그들은 새 기술을 독일의 다른 도시로, 이어 이탈리아·프랑스·네덜란드 등지로 가져갔다. 1465년 승리한 대주교 나사우의 아돌프 2세는 구텐베르크에게 궁정인 칭호와 함께 해마다 옷감·곡식·포도주를 주었다. 그는 1468년 2월 3일 마인츠에서 세상을 떠났다.
1500년까지 유럽의 250개가 넘는 도시에서 인쇄기가 돌아갔고, 수만 종의 판본이 쏟아졌다. 1501년 이전에 인쇄된 책은 ‘요람’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인큐내뷸라(초기 간본)’라고 부른다. 인쇄술이 갓 태어난 시기의 책이라는 뜻이다.
중급
현존하는 책들
상당한 분량이 남은 책은 약 49부이고, 그중 완본은 21부쯤이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폴란드, 러시아, 일본 등지의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뉴욕 모건 도서관·박물관이 세 부를 가지고 있고, 미국 의회도서관, 영국도서관, 프랑스 국립도서관, 도쿄 게이오 대학 등이 한 부씩 소장한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해리 랜섬 센터는 1978년 종이 완본을 구입해 상설 전시하고 있다.
괴팅겐 주립·대학 도서관의 벨럼본은 관련 문서 두 가지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책의 장식과 일치하는 채식 교본인 『괴팅겐 모범서』, 그리고 헬마스페르거 공증 문서다. 이 셋은 2001년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괴팅겐은 이 책을 디지털로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팔린 완본은 1978년 약 240만 달러에 거래되었다. 과거 훼손된 책에서 떼어 낸 낱장이 가끔 시장에 나오는데, 오늘날 사서들은 옛 책을 쪼개 파는 일을 학문의 손실로 여긴다.
중급
동아시아 인쇄술과 ‘최초’의 문제
구텐베르크보다 훨씬 전에 동아시아에서는 인쇄가 꽃피었다. 날짜가 있는 현존 최고(最古)의 인쇄본은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868년의 『금강경』이다. 학자 심괄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장인 필승은 1040년대에 구운 흙으로 활자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에 금속 활자를 썼으며,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불교 문헌 『직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다. 거대한 목판 대장경인 팔만대장경은 13세기에 새겨졌다.
동아시아 인쇄술에 대한 지식이 구텐베르크에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전파를 보여 주는 문헌 증거는 없고, 그의 방법, 특히 손 주형, 합금, 유성 잉크, 압착기는 동아시아 기술과 다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가는 동아시아의 훨씬 이른 성취를 인정하면서도 유럽 인쇄술을 독자적인 발전으로 본다. 교역로를 통한 간접 전파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추측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활자가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서로 다른 영향을 낳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문자 체계다. 한자는 수천 자가 필요해서 목판이 더 실용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몇십 자로 된 알파벳은 다시 쓰는 활자에 잘 맞는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개발하던 바로 그 무렵인 1443~46년에 한글이 만들어졌다.
심화
논쟁: 인쇄술은 얼마나 혁명적이었나
인쇄술은 흔히 혁명이라 불린다. 역사가 엘리자베스 아이젠스타인은 『변화의 동인으로서의 인쇄기』(1979)에서, 인쇄가 텍스트를 표준화하고 널리 보급하고 영구히 보존함으로써 유럽 문화를 바꾸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이런 변화가 르네상스의 고전 부흥, 종교 개혁, 과학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보았다.
다른 학자들은 이 견해를 비판했다. 에이드리언 존스는 『책의 본성』(1998)에서 초기 인쇄본이 저절로 믿을 만하거나 균일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해적판, 오류, 지역마다 다른 관행이 흔했고, 인쇄물에 대한 신뢰는 사람과 제도가 시간을 두고 쌓아야 했다는 것이다. 필사는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고, 인쇄의 효과는 문해력, 종교, 교역, 정치에 따라 달랐다는 지적도 있다.
구텐베르크 성서 자체가 이 이야기의 양면을 보여 준다. 기술적 돌파구였지만, 일부러 필사본을 흉내 내도록 설계되었고, 교회에 적은 부수로 팔렸으며, 손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장의 독자는 대중이 아니라 중세 교회였다. 더 극적인 변화는 이후 수십 년 동안 값싼 책과 소책자, 각 나라 말로 된 책이 늘어나면서 찾아왔다.
심화
자료와 연구 방법
구텐베르크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모두 1439년 슈트라스부르크 소송, 대출 기록, 헬마스페르거 문서 같은 몇 안 되는 법률·재정 문서에서 나온다. 현존하는 그의 인쇄물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찍혀 있지 않다. 그의 역할은 이 문서들과 책 자체에 대한 물리적 연구를 결합해 재구성한다.
서지학자들은 현존본들을 세밀하게 비교한다. 활자의 차이, 40행에서 42행으로의 변화, 종이본과 벨럼본의 차이, 종이의 투명 무늬(워터마크), 조판을 다시 한 자리 등은 작업이 어떻게 조직되었고 식자공과 인쇄기가 몇이나 되었는지를 알려 준다. 루브리케이터의 메모와 제본은 연대와 초기 소장자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새로운 기법은 활자를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문제에 계속 빛을 비춘다. 2001년 폴 니덤과 블레즈 아게라 이 아르카스는 초기 마인츠 인쇄물의 글자 모양을 디지털로 분석해, 초창기 활자가 통념처럼 글자마다 하나의 영구 자모에서 주조된 것이 아니라 좀 더 임시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결론은 아직 논쟁 중이다. 잉크의 과학 분석으로는 구텐베르크의 잉크에 구리와 납 같은 금속 성분이 들어 있음이 밝혀져, 오랫동안 윤기 있는 검은빛을 유지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핵심 개념
- 금속 활자
- 하나하나 금속으로 주조한 글자로, 짜 맞추어 찍고 다시 쓸 수 있다.
- 손 주형
-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주형으로, 똑같은 글자를 빠르게 대량 주조할 수 있게 했다.
- 필사본 흉내
- 성서의 활자, 배치, 손 장식은 최고의 손글씨 책과 겨루도록 설계되었다.
- 손 마무리
- 붉은 글씨, 채식, 제본을 손으로 더했기 때문에 모든 책이 저마다 다르다.
- 체계로서의 인쇄
- 구텐베르크는 활자 주조, 잉크, 종이, 압착기를 효율적인 생산 체계로 묶었다.
- 독자적 발명
- 동아시아에는 훨씬 이른 인쇄술과 활자가 있었고, 유럽 인쇄술은 따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 인쇄 문화
- 인쇄가 지식의 보존·신뢰·확산 방식을 얼마나 바꾸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이 논쟁한다.
- 날짜 없는 책의 연대
- 인쇄 날짜가 없어서 학자들은 편지, 소송 기록, 루브리케이터의 메모, 현존본의 물리적 증거를 종합해 연대를 정한다.
기록
- 1377년 — 고려에서 금속 활자로 『직지』를 찍다.
- 약 1400년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서 태어나다.
- 1439년 — 슈트라스부르크 소송으로 압착기를 쓴 구텐베르크의 비밀 사업이 드러나다.
- 1448년 — 구텐베르크가 마인츠로 돌아와 돈을 빌리다.
- 약 1450년 — 구텐베르크가 요한 푸스트에게 800굴덴을 빌리다.
- 약 1452년 — 42행 성서 작업이 시작되다.
- 1454년 — 10월, 피콜로미니가 프랑크푸르트 시장에서 성서의 접장을 보다.
- 1455년 — 3월 피콜로미니의 편지, 11월 6일 헬마스페르거 공증 문서가 푸스트의 소송을 기록하다.
- 1456년 — 8월, 루브리케이터 하인리히 크레머가 지금 파리에 있는 한 부의 장식을 마치다.
- 1457년 — 푸스트와 쇠퍼가 유럽 최초로 날짜를 찍은 인쇄본 『마인츠 시편』을 펴내다.
- 1468년 — 2월 3일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서 세상을 떠나다.
- 2001년 — 괴팅겐 소장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다.
용어 풀이
- 활자
- 다른 글을 찍을 수 있도록 다시 짜 맞출 수 있는 낱낱의 글자.
- 펀치(부형)
- 끝에 글자를 돋을새김한 강철 막대로, 자모를 만드는 데 쓴다.
- 자모(매트릭스)
- 글자 모양이 오목하게 찍힌 구리 덩어리로, 활자를 주조하는 틀이 된다.
- 소트(sort)
- 금속 활자 한 개.
- 식자공
- 활자를 골라 줄과 쪽으로 짜는 일꾼.
- 벨럼
-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고급 양피지로, 호화 책에 쓰였다.
- 루브리케이션
- 책에 붉은(흔히 푸른색도) 제목과 머리글자를 손으로 넣는 일.
- 채식(彩飾)
- 책에 그려 넣은 그림 장식으로, 흔히 금박을 쓴다.
- 불가타
- 성 히에로니무스와 연결되는 라틴어 성서 번역본으로, 서방 교회에서 썼다.
- 인큐내뷸라(초기 간본)
- 1501년 이전에 유럽에서 인쇄된 책.
- 접장(quire)
- 종이 여러 장을 접어 포갠 묶음으로, 책의 한 부분을 이룬다.
- 간기(colophon)
- 책 끝에 인쇄업자·장소·날짜 등을 적은 기록. 구텐베르크 성서에는 없고, 1457년 『마인츠 시편』에는 있다.
묻고 답하기
구텐베르크 성서가 세계 최초의 인쇄본인가요?
아니에요. 동아시아에는 훨씬 이른 인쇄본이 있고, 유럽에서도 그 전에 작은 인쇄물이 있었어요. 구텐베르크 성서는 유럽에서 금속 활자로 찍은 첫 본격적인 책이에요.
지금 몇 부가 남아 있나요?
약 49부가 남아 있고, 그중 온전한 책은 21부쯤이에요. 나머지는 일부가 빠졌거나 조각만 남았어요.
책마다 모습이 왜 다른가요?
색깔 머리글자, 장식, 제본을 인쇄 뒤에 손으로 더했는데, 산 사람마다 다른 장인에게 맡겼기 때문이에요.
어떤 언어로 쓰였나요?
라틴어예요. 중세 서방 교회에서 쓰던 라틴어 성서 불가타를 찍었어요.
구텐베르크는 발명으로 부자가 되었나요?
아닙니다. 1455년 소송 뒤 돈을 빌려준 요한 푸스트에게 공방의 상당 부분을 넘겼습니다. 다만 나중에 마인츠 대주교에게서 연금을 받았습니다.
구텐베르크는 고려의 금속 활자를 알았나요?
알았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한국이 더 일찍 금속 활자를 썼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는 유럽 인쇄술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봅니다.
날짜가 없는데 인쇄 시기를 어떻게 아나요?
1455년 3월 피콜로미니의 편지, 1455년 11월 푸스트 소송의 법률 기록, 파리 소장본에 적힌 1456년 8월 루브리케이터의 메모로 압니다.
왜 ‘마자랭 성서’라고도 부르나요?
18세기에 처음 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책이 파리의 마자랭 추기경 도서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Gutenberg Bible. Wikipedia
- Johannes Gutenberg. Wikipedia
- Movable type. Wikipedia
- Incunable. Wikipedia
-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 Europe and North America (entry: 42-line Gutenberg Bible, printed on vellum, and its contemporary documentary background). Wikipedia
- The Gutenberg Bible. Harry Ransom Center,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 The Gutenberg Bible at the Library of Congress: A Resource Guide. Library of Congress
- 구텐베르크 성서. 위키백과
- 엘리자베스 아이젠스타인(Elizabeth L. Eisenstein), The Printing Press as an Agent of Chan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 알베르트 카프르(Albert Kapr), 더글러스 마틴(Douglas Martin) 옮김, Johann Gutenberg: The Man and His Invention. Scolar Press, 1996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