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종이가 없던 시절 중국 사람들은 대나무나 나무를 얇게 쪼갠 조각을 끈으로 엮어 그 위에 글을 쓰거나, 비단에 썼어요. 대나무 책은 무척 무거워서 긴 책 한 권이 수레 하나를 가득 채우기도 했어요. 비단은 가볍지만 아주 비쌌지요. 사람들에게는 가볍고 값싸고 글쓰기 쉬운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채륜은 거의 2천 년 전 수도 낙양에 있던 황제의 궁궐에서 일했어요. 그는 궁궐 공방을 맡았는데, 그곳에서는 솜씨 좋은 장인들이 황제를 위해 칼과 도구와 귀한 물건을 만들었어요.
옛 역사책에 따르면 채륜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어요. 나무의 속껍질, 삼 부스러기, 해진 천, 낡은 고기잡이 그물을 물에 불리고 삶은 다음 두드려서 아주 가는 섬유로 된 부드러운 죽을 만들었어요. 이 죽을 물에 풀고 고운 발로 떠 올리면 섬유가 얇은 막을 이루어요. 이것이 마르면 바로 종이가 되지요!
105년에 그가 종이를 황제에게 보여 주자 황제는 무척 기뻐했어요. 곧 온 나라 사람들이 이 종이를 쓰며 '채후지(채 제후의 종이)'라고 불렀어요.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그보다 더 오래된 종이 조각을 찾아냈으니, 채륜이 맨 처음 종이를 만든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종이를 더 좋게 만들고 널리 퍼뜨렸어요. 누군가 만든 재주 있는 물건을 모두가 쓸 수 있게 다듬은 사람과 비슷하지요.
중국에서 시작된 제지술은 천천히 한국, 일본,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거쳐 마침내 유럽까지 갔어요. 여러분이 본 모든 책과 공책과 신문은 채륜이 시작을 도운 이야기의 한 부분이에요.
한눈에 보기
- 생몰
- 약 50~62년 사이 출생(정확한 해는 모름), 121년 사망
- 출생지
- 계양군(桂陽郡). 전통적으로 오늘날 중국 후난성 레이양(耒陽)으로 봄
- 활동지
- 후한의 수도 낙양(洛陽)의 황궁
- 직위
- 환관. 중상시(中常侍), 상방령(尚方令, 궁중 공방 책임자)
- 업적
- 105년(원흥 원년) 화제에게 개선된 제지법을 보고
- 재료
- 나무껍질, 삼 부스러기, 헌 천, 고기잡이 그물
- 작위
- 용정후(龍亭侯, 114년). 그의 종이는 '채후지(蔡侯紙)'라 불림
- 주요 사료
- 『후한서』 권78 「환자열전(宦者列傳)」의 채륜전
쉬움
채륜은 누구인가
채륜(蔡倫)은 자가 경중(敬仲)으로, 중국 후한(25~220) 궁정의 환관 관리였다. 중국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그를 종이의 발명자로 기려 왔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역할을 더 정확히 설명한다. 종이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는 더 싸고 새로운 원료를 쓰고 글쓰기에 알맞은 품질의 종이를 만드는 개선된 방법을 개발해 조정에 바쳤다는 것이다. 105년 그가 황제에게 올린 보고는 중국 역사에서 제지에 관한 첫 공식 기록이다.
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5세기에 한나라의 옛 기록을 바탕으로 편찬된 『후한서』에 실린 3백 자 남짓한 짧은 전기에서 나온다. 이 전기는 그의 경력, 장인이자 관리로서의 솜씨, 궁정 정치에 얽힌 일, 그리고 극적인 죽음을 전한다.
거의 2천 년 전 사람이지만 채륜은 지금도 중국 안팎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제지업자들은 그를 수호신으로 모셨고,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꼽는 현대의 목록에도 자주 이름을 올린다.
쉬움
세상은 왜 종이가 필요했나
초기 중국에서는 대부분 죽간이나 목간에 글을 썼다. 한 줄씩 글자를 적은 얇은 대나무·나무 조각을 끈으로 엮어 두루마리로 만든 것이다. 관청 기록, 편지, 법률, 책이 모두 이렇게 쓰였다. 죽간은 만들기 쉬웠지만 부피가 크고 무거웠다. 부유한 사람들은 비단에 쓸 수 있었는데, 가볍고 매끄럽지만 매우 비쌌다.
『후한서』는 문제를 깔끔하게 요약한다. '예로부터 글은 대부분 죽간을 엮어 썼고, 비단에 쓴 것을 지(紙)라 했다. 비단은 비싸고 죽간은 무거워 모두 사람들에게 불편했다(自古書契多編以竹簡,其用縑帛者謂之為紙。縑貴而簡重,並不便於人).' 흥미롭게도 오늘날 종이를 뜻하는 '지(紙)'라는 글자는 처음에 비단으로 된 필기 재료를 가리켰다.
죽간에 글을 쓰는 방식은 서리(書吏)의 문화 전체를 빚었다. 서리는 글을 쓰는 붓과 함께 나무나 대나무에서 틀린 글자를 깎아 내는 작은 칼을 지녔고, 그래서 하급 관리를 '도필리(刀筆吏)'라 부르기도 했다. 긴 글 하나에 죽간 수백, 수천 개가 필요했고, 끈이 삭으면 죽간의 순서가 뒤섞여 후대 학자들이 지금도 순서를 맞추느라 애를 먹는다. 긴 보고서를 수도로 보내려면 무거운 짐을 날라야 했다.
한 제국은 거대한 관료 국가여서, 관리들이 수천 km에 걸쳐 보고서와 장부와 명령을 주고받았다.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가볍고 값싼 필기 재료는 정보를 보관하고 옮기는 방식을 바꿀 수 있었다. 종이가 채운 것이 바로 이 필요였다.
쉬움
한나라 종이는 어떻게 만들었나
전기에 따르면 채륜은 '나무껍질, 삼 부스러기, 헌 천, 고기잡이 그물로 종이를 만들었다(用樹膚、麻頭及敝布、魚網以為紙)'. 모두 식물 섬유가 들어 있는 재료다. 삼과 모시는 옷감과 밧줄에 쓰였고, 나무껍질은 아마 닥나무 같은 나무의 속껍질이었을 것이다. 닥나무의 길고 질긴 섬유는 훗날 동아시아 종이의 대표 원료가 되었다.
후대 중국의 기록과 한대 기법을 재현한 실험으로 알 수 있는 대략의 과정은 이렇다. 원료를 잘게 잘라 물에 불리고, 아마 잿물이나 석회와 함께 삶아 부드럽게 만든다. 그런 다음 방망이나 절구로 두드려 섬유를 풀어 죽(펄프)으로 만든다. 이 죽을 물통에 풀어 젓는다. 일꾼이 틀에 댄 발을 물통에 담그거나 발 위에 죽을 부은 뒤 들어 올리면 물은 빠지고 얇고 고른 섬유 막이 남는다. 이 한 장을 눌러 짜고 햇볕이나 벽에 말린다.
핵심은 종이가 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옷감과 달리 종이는 수많은 가는 섬유가 마르면서 서로 엉겨 붙어 만들어진다. 헌 천과 그물은 섬유가 이미 한 번 가공되어 있어서 특히 쓸모 있었고, 나무껍질을 쓰면서 원료를 거의 무한히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중급
한나라 궁정에서의 생애와 경력
채륜은 남쪽 계양군 출신으로, 전통적으로 오늘날 후난성 레이양으로 본다. 집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아마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명제 때인 영평(58~75) 말년에 환관으로 궁궐 일을 시작했고, 장제 때인 건초(76~84) 연간에 소황문(小黃門)이 되었다.
88년 열 살의 화제가 즉위하자 채륜은 환관만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중상시(中常侍)로 승진해 기밀 논의에 참여했다. 전기는 그가 재주와 학식이 있고, 온 마음을 다해 신중했으며, 황제의 잘못을 거리낌 없이 바로잡으려 했다고 칭찬한다. 쉬는 날이면 문을 닫고 손님을 받지 않은 채 들판에 나가 지냈다고 한다.
그는 궁중에 쓸 무기와 기구와 사치품을 만드는 공방의 책임자인 상방령(尚方令)도 맡았다. 97년(영원 9년)에는 칼과 여러 기구의 제작을 감독했는데, 역사책은 그 솜씨가 정교하고 견고해 후대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적는다. 개선된 제지법도 아마 이처럼 숙련된 장인과 재료를 부릴 수 있는 환경에서 개발되었을 것이다. 105년(원흥 원년) 그는 이 방법을 화제에게 바쳤고, 황제는 그의 능력을 칭찬했으며, 역사책에 따르면 이때부터 모두가 이를 따라 썼다.
화제는 106년 초 세상을 떠났다. 실권은 섭정이 된 그의 황후, 등태후(鄧綏)에게 넘어갔다. 등태후는 채륜에게 상을 내렸다. 114년(원초 원년) 그를 식읍 3백 호의 용정후(龍亭侯)로 봉했고, 뒤에 그는 태후의 궁을 관리하는 장락태복(長樂太僕)이 되었다. 117년(원초 4년) 태후는 동관(東觀) 도서관에서 학자들이 유교 경전과 역사서의 글을 교정하는 사업을 그에게 맡겼다.
중급
궁정의 음모와 비극적인 최후
후한 궁정은 위험한 곳이었다.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일이 잦았고, 황후의 집안(외척)과 궁중 환관들이 권력을 다투었다. 채륜은 이 세계에서 출세했고, 동시에 그 세계에 물들었다.
여러 해 전 장제 때, 두황후(竇皇后)는 태자의 어머니인 경쟁자 송귀인(宋貴人)을 없애려 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채륜은 두황후의 뜻을 받들어 송귀인을 무고하는 데 가담했고, 송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그 아들은 태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바로 그 아들의 아들이 뒷날 안제(安帝)가 되었다.
121년 등태후가 죽고 안제가 직접 정사를 돌보게 되자, 황제는 채륜에게 스스로 정위(廷尉)에게 출두하라고 명했다. 모욕을 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채륜은 목욕을 하고 의관을 정제한 뒤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의 봉국은 없어졌다. 그의 무덤은 전통적으로 옛 봉지였던 산시성(陝西省) 양현(洋縣) 용정(龍亭)에 있다고 전한다.
중급
채륜 이전의 종이: 고고학이 보여 주는 것
수백 년 동안 채륜은 그저 종이를 발명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20세기 고고학이 이 그림을 바꾸었다. 그가 보고하기 한 세기도 더 전인 전한(기원전 206~기원후 9) 시대의 무덤과 군사 유적에서 종이 같은 재료의 조각들이 나왔다.
가장 유명한 것은 간쑤성 톈수이 근처 방마탄(放馬灘)에서 나온 것이다. 1986년 발굴자들은 전한 초기, 대략 기원전 2세기 초의 무덤에서 지도가 그려진 종이 조각을 찾았다. 흔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로 소개된다. 그 밖에 시안 근처 파교(灞橋)에서 나온 재료(1957년 발견), 둔황 근처 한대 역참인 현천치(懸泉置)에서 나온 수천 점의 조각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일부에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적힌 종이는 기원전 1세기 말의 것으로 연대가 측정되었다.
이런 초기 종이는 대부분 삼으로 만들었고 거칠고 고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물건을 싸거나 받치는 데 쓰였고, 가끔 글쓰기에도 쓰였다. 이 발견물들이 모두 펄프로 만든 진짜 종이인지, 아니면 일부는 섬유가 엉긴 것이거나 연대가 잘못 매겨진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 학자들도 있다. 과학사가 판지싱(潘吉星)은 채륜 훨씬 이전에 종이가 있었다는 견해를 앞장서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더 신중했다. 그러나 전체 결론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종이는 한 사람이 한순간에 발명한 것이 아니다.
중급
종이는 어떻게 세계로 퍼졌나
중국에서 종이는 그 뒤 몇 세기에 걸쳐 차츰 죽간과 비단을 대신했다. 3세기에는 흔한 필기 재료가 되었고, 후대 기록에 따르면 404년 환현(桓玄)이 관청 문서에 죽간 대신 종이를 쓰라고 명했다. 종이는 문자 문화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관청 문서고, 불경 필사, 서예와 회화, 그리고 마침내 당나라의 목판 인쇄가 그것이다.
제지술은 4세기 무렵 한반도에, 7세기 초에는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의 『일본서기』는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종이와 먹 만드는 기술을 전했다고 기록한다. 비단길을 따라 종이는 중앙아시아에 나타났고, 8세기 중엽에는 사마르칸트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중국인 포로들이 아랍인에게 제지술을 가르쳤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 지역에서는 그 전부터 종이가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역사가가 이를 의심한다.
제지술은 사마르칸트에서 바그다드로 퍼졌는데, 794~795년 무렵 그곳에 제지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로 이어졌다. 이슬람 세계는 행정과 학문과 꾸란 필사에 종이를 대규모로 썼다. 종이는 이슬람 지배하의 에스파냐를 거쳐 유럽에 들어갔는데, 12세기에는 샤티바(Xàtiva)가 생산 중심지였다. 이어 이탈리아로 넘어가, 13세기 파브리아노의 제지소들이 투명무늬(워터마크) 같은 개량을 도입했다. 값싼 종이가 없었다면 15세기 유럽의 인쇄 혁명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급
유산과 기억
종이는 뒤에 인쇄술, 나침반, 화약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으로 꼽혔다. 근대에 만들어진 이 묶음은 세계 기술사에 대한 중국의 공헌을 상징하게 되었고, 채륜은 그 얼굴이다. 제국 시대 중국의 제지업자들은 그를 기술의 수호신으로 모셔 사당과 묘에서 제사를 지냈고, 제지 동업 조합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전통적 출생지인 레이양과, 봉지와 무덤이 있는 산시성 양현에는 모두 그를 기리는 기념 시설이 있다. 그는 중국 우표와 교과서에 등장한다. 서구에서는 대중서를 통해 더 알려졌는데,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순위를 매긴 마이클 H. 하트의 『세계사를 바꾼 100인(The 100)』은 그를 7위에 올렸다.
그의 이야기는 역사가 발명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교훈도 준다. 황제에게 보고했기에 기록된 한 관리의 이름이 그 앞뒤의 수많은 이름 없는 장인들의 일을 대표하게 되었다. 한나라 말의 좌백(左伯) 같은 후대의 제지 장인들은 종이를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이름났다.
기술사가들은 채륜의 이야기로 발명이 더 낫다는 이유만으로 퍼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보여 준다. 중국에서 종이와 죽간은 약 3세기 동안 함께 쓰였다. 죽간은 튼튼하고 익숙했으며 대나무가 나는 지역에서는 값쌌고, 기록을 남기는 오랜 관습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새 기술의 보급은 원료 공급, 비용, 새 재료에 대한 신뢰, 그리고 국가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심화
학계의 논쟁: 발명자인가, 개량자인가, 조직자인가
역사가들은 이제 여러 질문을 나누어 생각한다.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나? 아니다. 고고학 자료는 전한 시대의 종이 같은 재료를 보여 준다. 글쓰기용 종이를 발명했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아니다. 전한 시대 조각 가운데 일부에 글씨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로웠나? 대부분의 학자는 두 가지를 꼽는다. 재활용 삼·헌 천·그물과 함께 나무껍질을 원료로 도입한 것, 그리고 궁중 공방에서 관청이 쓸 만한 고른 품질의 종이를 내는 믿을 만한 생산 공정을 조직한 것이다. 전기의 '채륜이 이에 뜻을 내어(倫乃造意)'라는 구절은 독창적 발명으로도, 새 방법의 고안으로도 읽을 수 있다.
채륜을 장인이라기보다 관리자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상방령으로서 그는 장인들을 거느렸고, 그의 보고는 여럿이 함께 개발한 공정을 조정에 올린 것일 수 있다. 관료 문화에서는 상주문을 올린 관리에게 공이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가 114년에야 받은 작위를 쓰는 '채후지'라는 이름은 발명이 얼마나 빨리 그 개인에게 붙게 되었는지 보여 준다.
또 하나의 논쟁은 초기 발견물의 판정과 연대다. 파교 재료 같은 초기 주장에 비판적인 이들은 그것이 진짜 종이가 아니라 가공하지 않은 섬유일 수 있고, 연대도 불확실한 무덤 맥락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지자들은 두드려 풀어져 무작위로 배열된 섬유, 곧 종이를 규정하는 특징을 보여 주는 섬유 분석을 근거로 든다. 학계의 합의는 105년 이전에 종이가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되, 구체적인 연대에는 여전히 신중하다.
심화
증거: 문헌, 고고학, 실험실 분석
문헌. 핵심 사료는 범엽(范曄)이 5세기에 후한 조정의 기록인 『동관한기(東觀漢記)』 등 이전 역사서를 바탕으로 편찬한 『후한서』 권78의 전기다. 『동관한기』는 단편만 전한다. 범엽은 사건보다 약 3세기 뒤에 썼고, 이 전기는 유교 사가들이 대체로 의심의 눈으로 본 환관들의 열전 속에 있으므로, 역사가들은 이를 사실의 기록이자 도덕적 틀로 함께 읽는다. 11세기의 『자치통감』 같은 중요한 후대 연대기는 그의 제지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고고학. 건조한 서북 지역, 특히 간쑤와 내몽골의 한대 무덤·봉수대·역참에서 나온 종이 조각이 직접적인 물적 증거다. 연대는 맥락에 달려 있다. 함께 나온 연대가 적힌 목간, 동전, 무덤 부장품 등이다. 현천치에서 종이와 함께 나온 연대 기록 목간은 특히 중요했다.
실험실 분석. 현미경과 섬유 분석으로 식물 종(삼, 모시, 닥나무)을 가려내고, 섬유가 진짜 종이처럼 두드려져 물에 풀렸는지 아니면 그저 엉겨 붙었는지 확인한다. 20세기에 시작되어 현대 기법으로 이어지는 이런 연구 덕분에 역사가들은 채륜 이전의 종이와 후한 후기의 종이를 비교하고, 그의 시대를 전후해 재료가 바뀌었는지 검증할 수 있다.
표준 참고 문헌으로는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가운데 첸춘쉰(錢存訓)이 쓴 종이와 인쇄 권(1985), 그리고 서쪽으로의 전파에 관해서는 탈라스 이야기와 이슬람 세계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조너선 블룸의 『인쇄 이전의 종이(Paper Before Print)』(2001)가 있다.
핵심 개념
- 최초 발명이 아닌 개량
- 종이는 채륜 이전에도 있었다. 그의 공헌은 더 낫고 값싸며 조정이 공인한 방법이었다.
- 새로운 원료
- 나무껍질, 헌 천, 고기잡이 그물을 쓰면서 제지업자들은 섬유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다.
- 국가 공방의 혁신
- 개선된 종이는 숙련된 장인들이 관리의 지휘 아래 일하던 궁중 공방에서 나왔다.
- 필기 재료와 권력
- 가볍고 값싼 종이는 기록과 책을 만들고 옮기기 쉽게 해 관료제와 학문과 종교를 강화했다.
- 유라시아를 가로지른 전파
- 제지술은 중국에서 한반도와 일본으로, 비단길을 따라 이슬람 세계와 유럽으로 퍼졌다.
- 공로와 기억
- 역사는 이름 없는 장인들의 공동 작업을 이름이 남은 한 관리의 공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 느린 보급
- 더 나은 기술도 천천히 퍼졌다. 종이와 죽간은 수백 년 동안 나란히 쓰였다.
기록
- 약 기원전 179년 — 간쑤성 방마탄에 지도가 그려진 종이 조각이 묻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 가운데 하나다(기원전 2세기 초).
- 25년 — 후한이 세워지고 낙양이 수도가 된다.
- 약 57년 — 채륜이 계양군에서 태어난다(약 50~62년 사이).
- 약 75년 — 명제 말년에 환관으로 궁궐 일을 시작한다.
- 88년 — 화제가 즉위하고 채륜이 중상시가 된다.
- 97년 — 상방령으로서 정교한 칼과 기구의 제작을 감독한다.
- 105년 — 개선된 제지법을 화제에게 바친다.
- 114년 — 등태후가 그를 용정후로 봉한다.
- 117년 — 동관 도서관의 경전 교정 사업을 감독한다.
- 121년 — 등태후가 죽은 뒤 안제가 그를 소환하자 독약을 마시고 죽는다.
- 610년 —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에 종이와 먹 만드는 기술을 전한다.
- 약 794년 — 바그다드에 제지소가 세워져 종이가 이슬람 세계로 퍼진다.
용어 풀이
- 후한
- 한나라의 후반기(25~220). 수도는 낙양이었다.
- 환관
- 거세된 남성으로 황궁에서 일한 사람. 한나라 궁정에서는 환관이 큰 정치 권력을 쥐기도 했다.
- 죽간
- 필기 재료로 쓴 얇은 대나무·나무 조각. 끈으로 엮어 두루마리로 만들었다.
- 펄프(종이죽)
- 종이를 뜨는 데 쓰는, 풀어진 식물 섬유가 물에 섞인 덩어리.
- 닥나무
- 속껍질에서 길고 질긴 섬유를 얻는 나무. 동아시아 종이의 대표 원료다.
- 발(종이틀)
- 물에서 얇은 종이죽 막을 떠 올려 한 장의 종이를 만드는 틀과 발.
- 후(侯)
- 봉지의 수입을 받는 작위. 채륜은 용정후였다.
- 『후한서』
- 5세기에 범엽이 편찬한 후한의 정사.
- 태후
- 황제의 어머니나 선황제의 황후.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하는 일이 많았다.
- 상주문
- 관리가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 보고서나 건의서.
묻고 답하기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나요?
맨 처음 종이는 아니에요. 한 세기도 더 앞선 종이가 발견되었거든요. 그는 제조법을 개선해 황제에게 바쳤고, 덕분에 종이가 널리 쓰이게 되었어요.
무엇으로 종이를 만들었나요?
『후한서』에 따르면 나무껍질, 삼 부스러기, 헌 천, 낡은 고기잡이 그물로 만들었어요.
종이가 없을 때는 어디에 글을 썼나요?
주로 대나무나 나무를 얇게 쪼개 엮은 죽간·목간에 썼고, 가끔 비싼 비단에도 썼어요.
왜 환관이 공방을 맡았나요?
한나라 궁정에서 환관은 궁궐 안에서 일하며 황제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공방을 비롯한 여러 궁중 관청을 관리하곤 했어요.
채륜은 어떻게 죽었나요?
121년 안제가 실권을 잡자, 수십 년 전 황제의 할머니를 모함한 일에 대해 책임을 물었어요. 채륜은 재판을 받는 대신 독약을 마셨어요.
탈라스 전투 뒤에 아랍인이 제지술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유명한 이야기지만 많은 역사가가 의심해요. 751년 이전에도 중앙아시아에서는 종이가 알려져 있었거든요. 이 전투는 기껏해야 사마르칸트의 제지업이 커진 시기와 겹쳤을 뿐일 수 있어요.
과학자들은 옛 조각이 진짜 종이인지 어떻게 알아내나요?
현미경으로 섬유를 살펴봐요. 진짜 종이는 섬유를 두드려 물에 푼 뒤 무작위로 가라앉혀 만든 것이라 그런 흔적이 보여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Cai Lun. Wikipedia
- 채륜. 위키백과
- 范曄 (Fan Ye), 後漢書 卷78 宦者列傳 (Book of the Later Han, ch. 78, Biographies of Eunuchs). Wikisource (Chinese)
- Book of the Later Han. Wikipedia
- History of paper. Wikipedia
- Papermaking. Wikipedia
- Fangmatan. Wikipedia
- 종이. 위키백과
- Tsien Tsuen-hsuin,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 5, Part 1: Paper and Print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 Jonathan M. Bloom, Paper Before Print: The History and Impact of Paper in the Islamic World. Yale University Press, 200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