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2천여 년 전 중국 한나라 때, 사마천이라는 사람이 황제의 궁궐에서 일했어요. 별을 관찰하고 달력을 만들고 옛 기록을 돌보는 일이었어요. 아버지도 같은 일을 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시작한 큰 역사책을 꼭 끝내 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했어요.
사마천은 그러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는 젊은 시절 중국 곳곳을 여행하며 옛 싸움터와 공자의 고향, 유명한 이야기가 일어난 장소들을 찾아가고, 그 고장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어요.
그런데 무서운 일이 일어났어요. 싸움에 져서 적에게 항복한 장군을 사마천이 궁정에서 감싸 준 거예요. 황제는 몹시 화가 났어요. 사마천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살아남으려면 아주 잔인하고 부끄러운 형벌을 받아야 했어요. 그는 큰 치욕을 견디더라도 살아남는 쪽을 골랐어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고 책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완성한 책이 『사기』예요. 모두 130편이에요. 어떤 편은 임금들이 한 일을 해마다 적었고, 어떤 편은 연표처럼 생긴 표예요. 음악, 달력, 강, 돈 같은 것을 설명하는 편도 있어요. 그리고 절반이 넘는 편이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황제와 왕비뿐 아니라 자객, 상인, 점쟁이, 심지어 광대까지 나와요.
사마천은 이야기를 아주 생생하게 써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글을 즐겨 읽어요. 약 2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의 역사가들은 그의 책 짜임새를 본떠 역사책을 썼어요. 그래서 그를 흔히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러요.
한눈에 보기
- 생몰
- 기원전 145년 무렵 출생(기원전 135년 무렵이라는 설도 있음). 기원전 86년 무렵 사망(정확한 해는 알 수 없음)
- 출생지
- 하양(夏陽), 용문(龍門) 부근(오늘날 중국 산시성 한청 부근)
- 시대
- 전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 때
- 관직
- 태사령(太史令, 기원전 108년 무렵부터), 뒤에 중서령(中書令)
- 대표 저작
- 『사기(史記)』. 본래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
- 분량
- 130편, 저자 스스로 센 바로는 52만 6,500자
- 다루는 범위
- 전설의 황제(黃帝)부터 한 무제 때까지 약 2,500년
- 유산
- 중국 정사(正史)와 동아시아 여러 나라 역사서의 틀이 된 기전체(紀傳體)를 만듦
쉬움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마천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하나인 한 무제의 긴 치세에 살았던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 관리다. 그는 기원전 91년 무렵 완성한 한 권의 책, 『사기』로 기억된다. 『사기』는 중국 세계에 알려진 과거 전체를 한 작품에 담으려 한 최초의 역사서였다.
그의 관직 태사령은 흔히 ‘역사가’로 옮기지만 천문과 역법, 징조, 문서 보관을 맡은 자리였다. 포괄적인 역사를 쓰는 일은 엄밀히 말해 직무가 아니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아버지 사마담이 시작한 개인적 사업이었다.
사마천이 유명한 것은 그가 쓴 책 때문만이 아니라, 그 책을 쓰려고 치른 대가 때문이기도 하다. 기원전 99년 불명예를 입은 장군을 변호했다가 사형을 선고받자, 그는 책을 끝내기 위해 죽음 대신 궁형(宮刑)을 택했다. 이 선택에 대한 그의 성찰, 특히 「보임안서(報任安書)」는 그를 동아시아 문화에서 지조와 인내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쉬움
생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이어진 약속
사마천은 황허의 용문(龍門) 협곡 가까운 하양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확실하지 않아 옛 주석에 따라 기원전 145년 무렵과 기원전 135년 무렵의 두 설이 있다. 집안은 먼 옛날 궁정 사관의 후손이라고 자처했다. 아버지 사마담은 장안에서 태사령에 임명되었고, 여섯 학파를 비교하며 도가를 높인 짧은 글 「논육가요지(論六家要指)」를 남겼다.
사마천은 고전 교육을 받았고, 스스로 쓴 후기에 따르면 열 살에 옛 글자로 된 글을 읽었다. 스무 살 무렵 그는 긴 여행에 나섰다. 남쪽으로 장강과 회수에 이르고, 치수의 영웅 우(禹)가 묻혔다는 회계산에 오르고, 공자의 고향 곡부에서 학생들이 옛 예법을 익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뒤에 낭중(郎中)이 되었고, 기원전 111년 무렵 새로 정복한 서남 지방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기원전 110년 무제는 태산에서 봉선(封禪)을 거행했다. 왕권의 가장 엄숙한 의례였다. 사마담은 병으로 이 의례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큰 불행으로 여겼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훌륭한 군주와 충성스러운 신하, 의로운 선비의 행적이 잊히지 않도록 자기가 시작한 역사를 완성해 달라고 당부했다. 사마천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약 2년 뒤 사마천은 아버지를 이어 태사령이 되어 황실 도서관과 문서고를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104년에는 태초력(太初曆)을 만든 역법 개정에 참여했고,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쉬움
이릉 사건과 「보임안서」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李陵)은 적은 보병을 이끌고 한나라의 최대 맞수였던 유목 연합 흉노를 치러 초원 깊숙이 들어갔다. 훨씬 큰 군대와 치열하게 싸운 끝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궁정에서는 그를 칭찬하던 관리들이 이제 그를 비난했다. 이릉을 잘 알지도 못하던 사마천은 그의 지난날 충성을 들어 변호하며, 그가 뒷날 황제에게 보답하려고 항복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무제는 이 말을 본군을 이끈 총사령관 이광리(李廣利), 곧 총애하는 후궁의 오빠를 겨냥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사마천은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나라 법에서는 큰돈을 내거나 궁형을 받으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돈이 없었고, 뒤에 쓴 바에 따르면 그를 위해 나서 준 친구도 없었다. 그는 궁형을 택했다. 선비라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고 여겨질 만큼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기원전 91년의 정변 뒤 처형을 앞둔 벗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선택을 설명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기러기 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고 썼다. 치욕을 견딘 것은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탐구하고, 예와 지금의 변화를 꿰뚫어,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했다는 것이다. 반고의 『한서』에 실려 전하는 이 편지는 중국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산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형벌 뒤 사마천은 보통 환관이 맡는 중서령이 되어 황제 가까이에서 일했다. 「보임안서」는 그의 생애에 대한 마지막 분명한 기록이다.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제와 비슷한 무렵인 기원전 87년이나 86년 무렵 죽었을 수 있다.
중급
『사기』의 짜임새
『사기』는 130편으로,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본기(本紀)」 12편은 황제(黃帝)부터 하·상·주, 진, 그리고 무제까지의 한나라에 이르는 주요 왕조와 군주를 시간 순서로 따라간다. 「표(表)」 10편은 여러 나라와 제후 가문의 연대를 격자로 맞추어, 사건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 한 표다.
「서(書)」 8편은 제도와 지식을 다룬다. 예, 음악, 율(律), 역법, 천문, 봉선, 강과 운하, 경제가 그 주제다. 「세가(世家)」 30편은 주나라 시대 제후국과 한나라 초기 명문가의 역사를 담는다.
「열전(列傳)」 70편은 책의 절반이 넘는다. 정치가, 장군, 사상가, 시인의 단독·합동 전기와 함께 자객, 유협(遊俠), 혹리(酷吏), 화식(貨殖, 재산을 모은 사람), 점술가, 골계(滑稽, 익살꾼) 같은 무리를 다룬 편, 그리고 흉노와 서남이(西南夷), 한반도의 조선(朝鮮) 같은 이웃 민족과 나라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다. 마지막 편은 가문의 내력과 책을 쓴 목적을 밝힌 사마천 자신의 후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다.
많은 편이 ‘태사공은 말한다(太史公曰)’로 시작하는 짧은 평으로 끝난다. 여기서 저자는 개인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여행에서 얻은 정보를 보태거나 공감을 드러낸다. 체계적인 기록과 개인의 목소리가 섞인 이 방식이 『사기』의 가장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중급
이야기로서의 역사
『사기』는 역사서인 만큼 문학으로도 높이 평가된다. 사마천은 대화가 살아 있는 극적인 장면들을 썼다. 한나라를 세울 유방이 경쟁자 항우에게 암살될 뻔하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홍문연(鴻門宴), 자객 형가(荊軻)가 뒷날 시황제가 될 진왕을 찌르려 한 장면, 포위된 항우가 우미인에게 이별의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순간이 그렇다.
그의 선택은 대담했다. 통일 제국을 다스린 적 없는 항우와 한나라 초기 궁정을 휘어잡은 여태후를 「본기」에 넣었다. 실제로 최고 권력을 쥐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다스린 적 없는 공자, 그리고 진나라에 맞서 처음 봉기한 농민 진승(陳勝)을 「세가」에 넣었다. 이런 결정은 그가 공식적인 지위만이 아니라 역사적 중요성에 따라 인물을 분류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지배층 밖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상인과 재산가를 다룬 「화식열전」은 상업을 진지하게 다루며, 「유협열전」은 법을 어기더라도 약속을 지킨 사람들을 기린다. 「진시황본기」는 천하 통일, 분서(焚書), 수은으로 강을 만든 무덤 조성까지 서술하는데, 이 기록은 오늘날에도 병마용 유적의 고고학자들에게 길잡이가 된다.
동시에 『사기』는 권력, 그가 살던 시대의 권력에도 비판적이다. 무제의 값비싼 전쟁, 가혹한 관리들, 불로장생 추구에 대한 서술은 흔히 자신을 벌한 황제에 대한 조용한 비판으로 읽혀 왔다. 개인적 원한이 그의 역사 서술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중급
자료와 방법
사마천은 폭넓은 자료를 활용했다. 『서경』과 『춘추』 및 그 전(傳) 같은 유교 경전, 『국어』와 『전국책』, 계보, 황실 문서고의 진·한 궁정 문서, 제자백가의 글, 그리고 여행에서 모은 구전이 그것이다. 자료가 서로 어긋나면 여러 설을 함께 적거나 판단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전설의 문제도 알고 있었다. 「오제본기」에서 그는 황제(黃帝)에 관한 이야기에 ‘우아하거나 바르지 못한’ 것이 많아서, 여러 지방 노인들의 말과 문헌을 견주어 가장 믿을 만한 것을 골랐다고 적는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전설을 많이 받아들였지만, 이는 사료 비판의 이른 사례다.
몇몇 분야에서 그의 신뢰성은 극적으로 입증되었다. 1917년 학자 왕궈웨이(王國維)는 『사기』의 상나라 왕 계보가, 19세기 말에야 다시 발견된 상나라 도읍 안양(은허)의 갑골문에 기록된 이름들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밝혔다. 사마천이 상나라에 대한 진짜 오래된 기록을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 뒤 출토된 전국·한나라 시대의 죽간과 백서는 그의 서술의 다른 부분들을 확인하기도 하고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중급
『사기』는 어떻게 전해졌나
「태사공자서」에 따르면 사마천은 책을 두 벌 만들어 하나는 ‘명산에 감추고’, 곧 안전하게 보관하고, 하나는 도읍에 두었다. 생전에는 널리 읽히지 않은 듯하며, 선제(재위 기원전 74~48년) 때 외손자 양운(楊惲)을 통해 더 알려지게 되었다.
후한 무렵에는 열 편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일부는 후대 사람이 채워 넣었는데,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활동한 저소손(褚少孫)이 덧붙인 대목에는 그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어떤 편이 뒤에 복원된 것인지, 전하는 텍스트가 사마천 자신의 글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지금도 논의된다.
중세에는 배인(5세기), 사마정과 장수절(둘 다 8세기)의 세 주석, 이른바 ‘삼가주(三家注)’가 표준이 되어 본문과 함께 인쇄되었다. 현대의 표준본은 1959년 베이징 중화서국에서 나왔다. 『사기』는 여러 언어로 완역 또는 부분 번역되었다. 에두아르 샤반의 프랑스어 번역(1895년부터), 버턴 왓슨의 영어 선역, 윌리엄 H. 닌하우저가 이끈 여러 권짜리 영어 번역이 있고, 한국어와 일본어 완역본도 있다.
중급
중국과 동아시아에 남긴 유산
『사기』는 중국 정사의 본보기가 되었다. 1세기 후반에 완성된 반고의 『한서』는 사마천의 형식을 한 왕조만 다루도록 고쳐 썼다. 그 뒤 왕조마다 공식 역사서를 기전체로 편찬했고, 이것이 『사기』를 첫머리로 하는 ‘이십사사(二十四史)’가 되었다.
반고는 사마천을 비판하기도 했다. 유교 경전보다 도가를 앞세웠고, 유협과 상인을 칭찬했으며, 엄격한 정통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수백 년 동안 『사기』를 읽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 문학적 가치는 누구나 인정했다. 당나라 때부터 한유(韓愈) 같은 고문(古文) 운동가들은 사마천의 문체를 힘 있고 명료한 글쓰기의 모범으로 삼았다.
이 형식은 동아시아로 퍼졌다. 한국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가 본기·연표·지·열전으로 같은 방식을 따랐고, 뒤의 『고려사』도 그러했다. 일본과 베트남의 궁정 역사가들도 『사기』를 알고 본받았다. 『사기』의 「조선열전」은 위만조선과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정복을 기록한, 한국 고대사의 핵심 사료이기도 하다.
사마천 개인의 이야기도 오래도록 힘을 발휘했다. ‘태산보다 무겁고 기러기 털보다 가볍다’는 그의 말은 1944년 마오쩌둥의 연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서처럼 지금도 인용된다.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그는 사명을 이루려고 치욕을 견딘 선비의 본보기이며, 고향 한청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과 무덤이 있다.
심화
역사가 사마천: 비교와 방법
사마천은 흔히 약 3세기 앞서 산 그리스의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와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널리 여행하고 구전을 모아 지리·민족지·서사를 엮었다. 그러나 『사기』는 다른 관념 위에 서 있다. 왕조의 흥망, 유교 전통에서 역사가 주는 도덕적 교훈, 그리고 천문관이 연구하던 우주의 순환이 그것이다. 본기·표·서와 전기를 결합한 더 체계적인 구조도 갖추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사기』를 조심스럽게 쓴다. 하나라처럼 이른 시기에 대해서는 고고학으로 확인할 수 없는 전승을 담고 있고, 상나라는 일부가 갑골문으로 확인되며, 전국 시대는 죽서(竹書) 같은 출토 문헌이 연대를 반박하기도 한다. 진과 한나라 초기에 대해서는 흔히 유일한 상세 서사 사료여서, 현대 학자들은 출토된 법률·행정 문서와 견주어 그 서술을 검증한다.
사마천이 자신의 일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도 논쟁거리다. 「태사공자서」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역사의 본보기로 공자의 『춘추』를 들지만, 사마천은 자신이 그에 견줄 수 없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예와 지금의 변화를 꿰뚫겠다’는 목표는 변화와 인과의 유형, 운명과 하늘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그는 「백이열전」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묻는다. 하늘이 착한 사람 편이라면 왜 착한 사람이 고통받는가? 스스로 고통을 겪은 사람이 던진 이 물음이 『사기』에 오래가는 철학적 깊이를 준다.
핵심 개념
- 기전체(紀傳體)
- 본기와 열전에 표와 서를 결합한 사마천의 구성. 동아시아 공식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 태사공왈
- 편 끝에 붙인 짧은 개인적 평. 역사에 한 개인의 목소리를 부여했다.
- 효(孝)의 의무
- 사마천은 자신의 작업을 죽어 가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로 제시한다.
- 뜻을 위해 치욕을 견딤
- 그는 책을 끝내려고 죽음 대신 치욕을 택했고, 후대는 이를 우러러보았다.
- 하늘과 사람
- 우주의 질서와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탐구했고, 하늘이 선한 이에게 보답하는지 물었다.
- 사료 비판
- 문헌과 구술 증언, 현장을 견주고 때로 의심을 밝혔지만 전설도 기록했다.
- 온갖 사람들의 역사
- 『사기』는 통치자 말고도 상인, 자객, 유협, 여성 통치자, 이웃 민족을 기록한다.
기록
- 약 기원전 145년 — 사마천이 용문 부근 하양에서 태어난다(기원전 135년 무렵이라는 설도 있음).
- 기원전 141년 — 무제가 즉위해(재위 원년은 기원전 141년으로 셈) 50년 넘게 다스린다.
- 약 기원전 126년 — 스무 살 무렵 사마천이 한나라 곳곳을 도는 긴 여행을 시작한다.
- 기원전 110년 — 사마담이 태산 봉선에 참여하지 못한 채 죽으며 아들에게 역사 완성을 당부한다.
- 약 기원전 108년 — 사마천이 태사령이 된다.
- 기원전 104년 — 태초력이 반포된다. 사마천은 역법 개정에 참여하고 집필을 시작한다.
- 기원전 99년 — 사마천이 장군 이릉을 변호했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궁형을 택한다(기원전 99년 또는 98년).
- 약 기원전 91년 — 「보임안서」. 『사기』가 사실상 완성된다.
- 약 기원전 86년 — 무제가 죽은 기원전 87년 무렵 사마천도 죽은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해는 알 수 없다.
- 약 기원전 61년 — 선제 때 외손자 양운이 『사기』를 널리 알린다.
- 1145년 — 고려의 김부식이 『사기』의 기전체를 따라 『삼국사기』를 편찬한다.
- 1917년 — 왕궈웨이가 『사기』의 상나라 왕 계보가 갑골문과 일치함을 밝힌다.
용어 풀이
- 한나라
- 기원전 206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9~23년의 신나라 시기 제외) 중국을 다스린 왕조. 사마천은 전한 사람이다.
- 태사령
- 사마천 부자가 맡은 관직. 천문·역법·기록을 담당했다.
- 본기
- 군주와 왕조의 일을 해마다 기록한 편.
- 세가
- 제후국과 명문가를 다룬 편.
- 열전
- 개인이나 무리의 생애를 다룬 편. 『사기』에는 70편이 있다.
- 흉노
- 한나라 북쪽 초원에 있던 강력한 유목 연합.
- 갑골문
- 상나라 때 조상에게 묻는 물음을 거북 배딱지와 짐승 뼈에 새긴 글. 가장 이른 대규모 한자 자료다.
- 이십사사
- 『사기』로 시작하는 중국 역대 공식 정사의 전통적 묶음.
- 궁형
- 생식 능력을 없애는 형벌. 사형 대신 받을 수 있었지만 극도의 치욕으로 여겨졌다.
- 고문(古文)
- 당나라 때 일어난 문학 운동. 사마천 같은 옛 작가를 문체의 본보기로 삼았다.
묻고 답하기
사마천을 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나요?
『사기』가 중국에 알려진 과거 전체를 한 권에 담은 첫 역사책이었고, 그 짜임새를 공식 역사가들이 2천 년 동안 본떴기 때문이에요.
사마천은 왜 그렇게 끔찍한 형벌을 받아들였나요?
죽어 가는 아버지에게 역사책을 끝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그는 작업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치욕을 견뎠다고 썼어요.
『사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나오나요?
황제, 왕비, 장군, 사상가뿐 아니라 자객, 상인, 유협, 점쟁이, 광대, 그리고 흉노 같은 이웃 민족도 나와요.
『사기』에 한국 이야기도 나오나요?
네. 제115권 「조선열전」이 위만조선과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정복을 서술해요. 한국 고대사의 핵심 사료예요.
『사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전설과 역사가 섞여 있다. 상나라 왕 계보는 갑골문으로 확인되었지만, 아주 이른 시기와 일부 전국 시대 연대에서는 출토 문헌이 오류를 보여 준다. 역사가들은 고고학과 견주어 비판적으로 읽는다.
「보임안서」는 정말 사마천이 썼는가?
대부분의 학자가 진본으로 받아들여 왔지만, 최근에는 후대에 손질되었거나 일부가 뒤에 지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다. 논쟁은 열려 있다.
『사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어떻게 다른가?
두 역사가 모두 여행하고 구전 자료를 썼지만, 『사기』는 본기·표·서·세가·열전으로 짜여 있고 왕조 교체와 도덕적 판단이라는 중국적 관념을 반영한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Sima Qian. Wikipedia
-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Wikipedia
- Sima Tan. Wikipedia
- Li Ling (Han dynasty). Wikipedia
- 사마천. 위키백과
- 사기 (역사서). 위키백과
- Burton Watson,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of China (영역).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1 (개정판 1993)
- Stephen W. Durrant, The Cloudy Mirror: Tension and Conflict in the Writings of Sima Qia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5
- Grant Hardy, Worlds of Bronze and Bamboo: Sima Qian's Conquest of Histor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 Stephen Durrant, Wai-yee Li, Michael Nylan, Hans van Ess, The Letter to Ren An and Sima Qian's Legacy.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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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허오늘날의 안양 부근에 있는 상나라 후기 도읍의 유적으로, 왕릉과 공방, 글자가 새겨진 갑골이 발견되었다.
- 손자병법손자에게 전해지는 고대 중국의 병서다. 저자와 성립 연대에는 논쟁이 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