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3,000여 년 전, 상나라 왕들은 원하(洹河)라는 강가의 큰 도시에서 중국 북부의 일부를 다스렸어요. 나라가 망하자 도시는 버려졌고, 차츰 밭으로 덮여 버렸어요. 뒷날 사람들은 이곳을 ‘은나라의 폐허’라는 뜻으로 은허라고 불렀어요.
상나라 왕들은 앞날을 알고 싶어 했어요. 비가 올까? 농사가 잘될까? 싸움에서 이길까? 이것을 알아보려고 점치는 사람은 거북의 배딱지나 소의 넓적한 어깨뼈를 가져다 ‘딱’ 소리가 나며 금이 갈 때까지 불로 달궜어요. 그리고 그 금을 왕의 조상이 보낸 메시지처럼 읽었어요. 그다음 서기가 뼈에 질문과, 때로는 그 답까지 새겼어요.
이 갑골은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대량의 한자 기록이에요. 그 글자들 가운데 많은 것이 오늘날 중국 사람들이 쓰는 한자의 먼 조상이에요. 예를 들어 ‘해’를 뜻하는 글자는 점이 찍힌 동그라미였고, ‘사람’을 뜻하는 글자는 옆으로 서 있는 사람처럼 생겼어요.
은허에서 고고학자들은 궁전과 사당의 터, 청동·뼈·옥 공방, 거대한 무덤을 찾아냈어요. 도굴되지 않은 한 무덤에는 부호(婦好)라는 왕비가 묻혀 있었어요. 그녀는 군대를 이끌고 싸움터에 나간 장군이기도 했어요. 부호는 수백 점의 청동 그릇과 옥, 그리고 돈처럼 쓰던 조개껍데기 7,000개 가까이와 함께 묻혔어요.
은허에는 슬픈 모습도 있어요. 상나라 사람들은 조상과 신에게 바치려고 많은 사람, 흔히 전쟁 포로를 죽여 왕릉 근처 구덩이에 묻었어요. 고고학자들은 이 유해를 조심스럽게 연구해서, 왕뿐 아니라 희생된 사람들도 기억할 수 있게 해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상나라 후기, 약 기원전 1300년(또는 1250년)~1046년. 전통적으로 반경(盤庚)이 은으로 천도한 때부터
- 위치
- 중국 허난성 안양시 북서쪽, 원하 양쪽 기슭
- 왕
- 전통적으로 반경에서 제신(帝辛)까지 12왕. 갑골 기록은 무정(武丁) 때부터 나타남
- 규모
- 옛 도시 범위 약 30㎢. 세계유산 구역은 414헥타르
- 주요 구역
- 샤오툰(小屯)의 궁전·종묘 구역(남안), 시베이강(西北岡)–허우자좡(侯家莊)의 왕릉 구역(북안)
- 대표 출토품
- 갑골 약 15만 조각, 도굴되지 않은 부호묘(1976), 무게 약 833kg의 후모무정(后母戊鼎)
- 발굴
- 1928년부터 과학적 발굴(중앙연구원, 1937년까지 15차), 1950년부터 재개
- 지정
- 유네스코 세계유산(2006)
쉬움
은허는 어떤 곳인가
은허(殷墟)는 동시대 문자 기록으로 실재가 확인된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商)나라의 마지막 도읍 유적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허난성 안양시 바로 북서쪽,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화북 평원에 있다. 옛 도시는 유적을 굽이쳐 흐르는 원하의 양쪽 기슭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이름은 ‘은의 폐허’라는 뜻이다. ‘은’은 후대 중국 역사가들이 상나라, 특히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뒤의 마지막 시기를 부를 때 쓴 이름이다. 상나라 사람들 자신은 도읍을 ‘상’ 또는 ‘대읍상(大邑商)’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은허는 건물 하나가 아니라 거대한 유적 경관이다. 다진 흙으로 쌓은 궁전과 사당의 기단, 주거 구역, 청동 주조·골기 제작·옥과 토기 제작 공방, 길, 배수 도랑, 보통 사람들의 묘지, 그리고 왕들의 무덤이 모두 여기에 있다.
은허는 무엇보다 한자의 가장 이른 대량 기록인 갑골, 그리고 동아시아 청동기 주조의 절정을 보여 주는 청동기로 이름나 있다. 유네스코는 2006년 은허를 세계유산 목록에 올리며, 초기 중국 문화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유적으로 인정했다.
쉬움
유적을 ‘읽는’ 법
은허의 중심은 원하가 굽이도는 남쪽 기슭의 샤오툰이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판축, 곧 나무판 사이에 흙을 한 켜씩 단단히 다져 쌓는 방식으로 만든 큰 건물 기단을 80곳 넘게 찾아냈다. 이 기단 위에 초가지붕을 얹은 목조 전각이 서 있었다. 학자들은 이를 궁전, 종묘, 제단으로 해석한다. 돌로 된 벽은 없었다. 상나라 건축은 흙과 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기단, 기둥 구멍, 주춧돌만 남았다.
성벽 대신, 궁전 구역의 서쪽과 남쪽에는 큰 도랑이 둘러 있었고, 나머지 쪽은 강이 막아 주었다. 이 중심부 둘레로 약 30㎢에 걸쳐 집, 공방, 가족 묘지가 여러 무리를 이루며 흩어져 있었다. 이는 성벽으로 단단히 둘러싼 도시라기보다 여러 씨족 집단이 느슨하게 모여 이룬 도시였음을 시사한다.
북쪽 기슭, 허우자좡 부근의 시베이강에는 왕릉 구역이 있다. 가장 큰 무덤은 두 방향이나 네 방향에서 비스듬한 묘도가 내려가는 거대한 구덩이로, 네 방향 묘도를 가진 무덤은 ‘아(亞)’자 또는 십자 모양을 이룬다. 매장 칸은 10m 넘는 깊이에 있었다. 무덤 둘레에는 희생된 사람, 말, 전차 등을 묻은 작은 구덩이가 천 개 넘게 있다.
오늘날 방문객은 복원된 건물, 보존된 거마갱(車馬坑), 부호묘, 박물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적 대부분은 밭과 현대 시가지 아래에 있고, 아직 발굴할 곳이 많이 남아 있다.
쉬움
갑골: 조상에게 묻다
상나라 왕들은 죽은 조상과 ‘제(帝)’라 불린 높은 신을 비롯한 여러 힘이 날씨, 수확, 병,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믿었다. 그 뜻을 알아내려고 왕의 점복관들은 불로 점치는 방법을 썼다. 소의 어깨뼈(견갑골)와 거북의 배딱지(복갑)를 손질하고 뒷면에 홈을 줄지어 판 다음, 홈에 열을 가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이 가게 했다. 흔히 ‘卜(복, 점치다)’ 자처럼 생긴 금의 모양을 답으로 읽었다.
그 뒤 서기가 뼈에 기록을 새기는 일이 많았다. 온전한 복사(卜辭)는 날짜, 점복관의 이름, 물음(명사命辭), 왕의 판단(점사占辭), 때로는 실제로 일어난 일(험사驗辭)을 담는다. 주제는 비와 수확, 사냥, 원정, 출산, 병, 꿈, 어느 조상에게 어떤 제사를 드릴지 등이다. 부호의 출산이 좋을지를 묻는 복사는 잘 알려진 예다.
글자가 새겨진 갑골은 약 15만 조각이 발견되었고, 대부분이 은허에서 나왔다. 복사에 쓰인 서로 다른 글자는 4,000~5,000자쯤인데, 그 가운데 확실하게 해독된 것은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다. 많은 글자가 오늘날 한자의 조상임이 분명하다.
갑골이 특별한 까닭은 몇백 년 뒤에 적힌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왕들이 그 시대에 품었던 관심사를 기록했다는 데 있다. 갑골은 상나라의 역사, 종교, 언어에 관한 지식의 토대다.
중급
청동, 전차, 공방
상나라 장인들은 조상에게 음식과 술을 바치는 청동 제기와 함께 무기, 도구, 전차 부속을 만들었다. 금속을 두드리거나 단순한 거푸집에 붓는 경우가 많았던 초기 서아시아나 유럽의 금속 장인과 달리, 상나라의 주조 장인들은 여러 조각으로 나뉜 흙 거푸집(도범陶范)을 써서 복잡한 형태와 무늬를 한 번에 주조했다. 은허의 주조 공방 터에서는 거푸집 조각이 수천 점 나와, 대규모의 조직적인 생산을 보여 준다.
가장 큰 상나라 청동기인 후모무정(后母戊鼎)은 1939년 은허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1.33m, 무게 약 833kg의 네모난 솥으로, 고대 세계에서 알려진 가장 무거운 청동 그릇이다. 안쪽 명문은 예전에 ‘사모무(司母戊)’로 읽었으나, 지금은 흔히 ‘후모무’, 곧 ‘무(戊)’라는 이름의 왕실 어머니에게 바친 것으로 읽는다. 지금은 베이징의 중국 국가박물관에 있다.
상나라 청동기는 눈, 뿔, 턱이 좌우 대칭을 이루는 가면 같은 무늬인 도철문(饕餮紋)으로 장식되는데, 흔히 옆모습의 짐승 두 마리가 맞붙어 이루어진다. 그 뜻은 논쟁 중이다. 신령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고, 단지 강렬한 장식 무늬일 수도 있다.
은허는 중국에서 전차가 쓰인 가장 이른 증거도 제공한다. 두 바퀴 전차를 말, 때로는 마부와 함께 묻은 구덩이가 무정 무렵부터 나타난다. 전차가 갑자기, 그것도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는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들어온 것으로 본다. 뼈 제품(비녀, 화살촉 등), 옥 조각, 토기를 만드는 공방까지 합치면, 크고 전문화된 도시 경제의 모습이 그려진다.
중급
부호묘
은허의 큰 왕릉들은 거의 모두 고대나 근대에 도굴되었다. 1976년 고고학자 정전샹(鄭振香)과 그 팀은 샤오툰의 궁전 구역 가까이에서 한 번도 파헤쳐지지 않은 작은 무덤(M5)을 찾아냈다. 이 무덤은 무정의 배우자 부호(婦好)의 것으로 밝혀졌다.
무덤은 약 5.6×4m 크기의 구덩이에 나무 곽을 넣은 것이었지만, 놀라운 부장품을 담고 있었다. 청동기 460점 넘게(제기 약 200점, 무기 약 130점 포함), 옥기 약 755점, 골기 560점 넘게, 상아 잔, 그리고 재산으로 쓰인 조개껍데기(자안패) 약 6,900개가 나왔다. 많은 청동기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람 16명과 개 6마리도 함께 묻혔다.
부호는 여러 갑골 복사에 등장한다. 복사는 그녀가 수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서고, 제사를 주관하며, 자기 영지를 가졌음을 보여 준다. 왕은 그녀의 출산과 병에 관해 점을 쳤다. 부호는 상나라에서 가장 생생하게 기록된 여성으로, 지배층 여성이 군사적·종교적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무덤이 온전하고 기록이 잘 남아 있기 때문에, 부호묘는 상나라 유물의 연대를 가늠하고 갑골 대부분이 나온 무정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 기준점이 된다.
중급
왕, 조상, 그리고 상나라의 멸망
전통 중국 사서, 무엇보다 사마천의 『사기』(기원전 100년 무렵)는 상나라가 여러 차례 도읍을 옮긴 끝에 반경 왕이 은에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그때부터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12명의 왕이 이곳을 다스렸다. 마지막 왕 제신(주왕紂王)은 후대 주나라 문헌에서 잔인한 폭군으로 기억되었는데, 이 모습은 주의 정복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했다.
갑골 덕분에 학자들은 이 전승을 검증할 수 있었다. 1917년 학자 왕궈웨이(王國維)는 복사에 나오는 상나라 왕과 조상의 이름이 천 년 뒤에 쓰인 사마천의 왕 계보와 대체로 일치함을 보였다. 이로써 상나라가 역사적 실재였고, 『사기』가 순서와 관계에 몇몇 오류가 있기는 해도 진짜 정보를 간직하고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복사는 왕과 그의 조상 제사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모습을 드러낸다. 왕은 최고의 점복자였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수많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렸다. 왕권은 여러 씨족과의 동맹, 그리고 서쪽의 강(羌) 같은 이웃 집단과의 전쟁에 기대고 있었다.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 제시한 연대에 따르면 기원전 1046년 무렵 주나라 무왕이 목야(牧野) 전투에서 제신을 무찔렀고, 상의 도읍은 버려졌다. 주는 상의 후손이 송(宋)나라에서 조상 제사를 이어 가도록 허락했다. 정복의 정확한 연대는 여전히 논쟁 중이며, 제시된 연대들은 수십 년에 걸쳐 있다.
중급
인신 공양과 희생자의 이야기
인신 공양은 상나라 왕실 종교의 정규적인 일부였다. 갑골 복사는 조상에게 사람을 바친 기록을 전하는데, 때로는 한 번에 수십, 수백 명이었고, 희생자 가운데 많은 수가 전쟁 포로, 특히 강인이었다. 복사에 기록된 희생자 수는 수천 명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고고학은 이 기록을 뒷받침한다. 시베이강 왕릉 둘레에는 제사 구덩이가 천 개를 훌쩍 넘게 있고, 그 가운데 많은 구덩이에 머리가 잘린 유골이 줄지어 누워 있다. 큰 무덤에는 죽은 이와 함께 묻힌 순장자도 있는데, 친족, 호위병, 시종이었을 수 있다. 말, 개, 소 같은 동물 희생도 흔했다.
치아의 스트론튬·산소 동위원소 분석과 고대 DNA 분석을 비롯한 유골의 과학적 연구는 희생자가 어디에서 왔고, 몇 살이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이런 연구는 복사에 숫자로만 나오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되돌려 준다.
인신 공양은 상나라 이후 줄어들었고 후대 중국 사상에서 점점 더 비판받았지만, 순장은 일부 나라에서 여러 세기 동안 이어졌다. 은허에서 희생자를 기억하는 일은, 위대한 예술과 한자의 시작을 낳은 동시에 이런 일을 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중급
‘용골’과 중국 고고학의 탄생
수백 년 동안 안양 근처의 농민들은 땅에서 옛 뼈를 캐어 ‘용골(龍骨)’이라는 이름으로 약재상에 팔았다. 용골은 가루로 빻아 쓰던 전통 약재였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1899년 학자 왕이룽(王懿榮)이 병을 치료하다가 약으로 사 온 뼈에서 옛 글자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세부는 전설일 가능성이 크지만, 왕이룽이 글자가 새겨진 뼈를 처음으로 모으고 옛 문자로 알아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1903년 류어(劉鶚)가 갑골 탁본을 모은 첫 책 『철운장귀(鐵雲藏龜)』를 펴냈다. 학자 뤄전위(羅振玉)는 갑골의 출처가 안양의 샤오툰 마을임을 밝혀내고 그곳을 상나라 도읍의 폐허로 비정했다. 뒤이어 왕궈웨이의 연구가 복사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했다.
1928년 새로 세워진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가 은허에서 과학적 발굴을 시작했다. 둥쭤빈(董作賓), 리지(李濟), 량쓰융(梁思永) 등이 발굴을 이끌었다. 1937년까지 15차례의 발굴에서 궁전 기단과 왕릉을 드러냈고, 1936년에는 글자 새긴 갑편 1만 7,000점 넘게 나온 YH127 구덩이를 찾았다. 이는 중국 고고학자들이 직접 수행한 최초의 대규모 과학 발굴 가운데 하나로, 은허는 흔히 중국 근대 고고학의 발상지로 불린다.
1937년 일본의 침략으로 발굴은 멈추었다. 국공 내전 뒤 중앙연구원 발굴의 출토품과 기록은 타이완으로 옮겨졌고, 은허 발굴은 1950년 베이징의 고고연구소 주도로 다시 시작되었다. 두 곳의 소장품은 모두 연구에 꼭 필요하며, 20세기 중국 분단이 남긴 유산이기도 하다.
심화
논쟁: 은허의 연대, 환베이, 상나라 국가의 성격
은허는 언제 도읍이 되었나? 전통 사서는 반경의 은 천도를 기원전 1300년 무렵으로 둔다. 그러나 갑골 복사는 무정 때부터야 시작되고, 은허의 가장 이른 고고학적 단계는 규모가 작다. 1999년 원하 건너편, 은허 바로 북동쪽에서 성벽을 두른 큰 도시가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원하 북쪽’이라는 뜻으로 환베이(洹北)라 부른다. 약 470헥타르에 이르는 이 도시는 기원전 1350~1300년 무렵 수십 년 동안 사람이 살다가 불타 버려졌다. 많은 학자는 환베이가 은허의 앞선 도읍, 아마도 반경이나 그보다 앞선 왕의 도성이었으며, 무정 무렵(기원전 1250년 무렵) 도읍이 샤오툰 일대로 옮겨졌다고 본다.
절대 연대. 하상주 단대공정(1996~2000)은 문헌, 복사 속 천문 기록(월식 등),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고고학을 결합해 주의 정복을 기원전 1046년, 무정의 재위를 약 기원전 1250~1192년으로 제시했다. 이 방법과 결론은 중국 밖의 일부 학자들에게 비판받았고, 전통적인 기원전 1122년이나 (『죽서기년』에서 끌어낸) 기원전 1027년 같은 다른 정복 연대도 계속 거론된다. 이전 학계는 대략 기원전 1130년에서 1018년 사이에 수십 가지 연대를 제시한 바 있다. 연대는 어디까지나 대략적이다.
갑골의 시기 구분. 둥쭤빈은 복사에 이름이 나오는 점복관, 서체, 내용을 바탕으로 갑골을 다섯 시기로 나누었다. 후대 학자들은 점복관 집단과 출토 맥락에 따라 복사를 묶어 이 체계를 다듬었다. 예컨대 ‘역조(歷組)’ 복사는 학자에 따라 전혀 다른 왕대로 비정되어 왔으며, 이 오랜 논쟁은 상나라 역사 복원에 영향을 준다.
상나라는 어떤 국가였나? 일부 역사가는 지방 행정 구역을 갖춘 영역 국가로 묘사한다. 다른 이들은 복사를 근거로, 왕이 직접 다스린 작은 중심부를 충성이 수시로 바뀌는 동맹 세력과 적대 세력이 둘러싼 모습으로 본다. 복사는 은허 왕실의 관심사만 보여 주므로 그 영향력을 부풀릴 수 있다. 쓰촨의 싼싱두이(三星堆) 같은 동시대의 다른 청동기 문화는 상나라가 오늘날 중국 땅에 있던 여러 복잡한 사회 가운데 하나였음을 보여 준다.
심화
증거와 방법
문자 증거. 갑골은 특별한 종류의 1차 사료다. 이야기가 아니라 점복을 기록한 것이며, 왕실을 위해 왕실이 만든 것이다. 갑골은 『갑골문합집(甲骨文合集)』 같은 대규모 자료집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고문자학, 문법, 서로 관련된 복사 묶음의 복원을 통해 연구된다. 데이비드 키틀리의 『상사 사료(Sources of Shang History)』(1978)는 지금도 영어권의 고전적인 방법론 입문서다. 은허의 청동기 명문은 아직 짧지만, 주나라 때에는 훨씬 길어진다.
고고학 증거. 토기와 청동기 양식의 층위를 바탕으로 은허는 크게 네 시기로 나뉜다. 취락 조사는 유적 전역에 걸쳐 주거 구역, 공방, 묘지의 분포를 그려 내고, 도시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음을 보여 준다. 주조 공방과 작업장 발굴은 생산 방식과 노동 조직을 드러낸다.
과학적 방법. 갑골 자체의 연대 측정을 포함한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은 연대를 고정하는 데 쓰였다. 동위원소 분석은 식생활과 이동을 추적하고, 고대 DNA 연구는 주민과 희생자의 기원을 탐구하며, 야금학 분석은 청동기에 쓰인 구리, 주석, 납의 산지를 추적하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먼 지역에서 왔을 수 있다.
후대 문헌의 비판적 읽기. 『사기』를 비롯한 주·한 시대 문헌의 상나라 서술은 왕조가 망하고 오랜 뒤에 쓰였고, 정복을 정당화하는 데 쓰인 천명(天命) 사상 같은 주나라의 이념에 부분적으로 물들어 있다. 이를 동시대 복사와 견주어 보면, 후대 전통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간직했는지, 그리고 과거를 어떻게 다시 빚어냈는지가 함께 드러난다.
핵심 개념
- 상나라 후기 도읍
- 은허는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1046년 무렵까지 상나라 마지막 왕들의 정치·종교 중심지였다.
- 갑골 점복
- 왕들은 뼈와 거북딱지를 불로 달궈 갈라지게 하여 조상에게 묻고, 물음과 결과를 글로 남겼다.
- 가장 이른 한자
- 갑골문은 한자의 가장 이른 대량 기록이자 현대 한자의 직계 조상이다.
- 조상 숭배
- 왕실 종교는 산 사람을 돕거나 해칠 수 있는 죽은 왕과 왕비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중심으로 했다.
- 청동기 공예
- 조합 거푸집 주조로 조직적인 공방에서 거대하고 정교한 무늬의 제기를 만들었다.
- 인신 공양
- 전쟁 포로를 비롯한 수천 명이 왕실 의례에서 희생되었고, 오늘날 고고학은 그들의 삶과 출신을 연구한다.
- 문헌과 고고학의 만남
- 은허는 전통 사서 속 상나라가 실재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 사서가 틀린 곳도 보여 주었다.
기록
- 약 기원전 1350년 — 은허와 원하를 사이에 둔 환베이 성곽 도시에 사람이 산다(기원전 1300년 무렵까지).
- 약 기원전 1300년 — 반경 왕이 상나라 도읍을 은으로 옮겼다고 전하는 전통적 연대.
- 약 기원전 1250년 — 무정 왕의 재위가 시작된다. 가장 이른 갑골 복사와 부호묘가 그의 시대에 속한다.
- 약 기원전 1046년 — 주 무왕이 목야에서 제신을 무찌르고 상의 도읍이 버려진다(하상주 단대공정 연대).
- 약 기원전 100년 — 사마천의 『사기』가 상나라 왕 계보를 기록한다. 이 계보는 뒷날 갑골로 확인된다.
- 1899년 — 왕이룽이 글자 새긴 ‘용골’을 옛 문자로 알아본다.
- 1917년 — 왕궈웨이가 갑골이 『사기』의 왕 계보를 뒷받침함을 밝힌다.
- 1928년 — 중앙연구원이 은허에서 과학적 발굴을 시작한다(1937년까지 15차).
- 1936년 — YH127 구덩이에서 글자 새긴 갑편 1만 7,000점 넘게 출토된다.
- 1976년 — 도굴되지 않은 부호묘가 발굴된다.
- 1999년 — 상나라 중기의 도시 환베이가 발견된다.
- 2006년 — 은허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용어 풀이
- 상나라
- 기원전 2천년기에 중국 북부 일부를 다스린 청동기 시대 왕조. 동시대 문자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왕조다.
- 갑골
- 점을 치는 데 쓴 소 견갑골이나 거북 복갑. 흔히 그 결과를 새겼다.
- 복사
- 갑골에 새긴 점복 기록.
- 판축
- 나무판 사이에 흙을 한 켜씩 단단히 다져 쌓는 고대 중국의 건축 기법.
- 정(鼎)
- 다리가 달린 제사용 솥. 조상에게 바칠 음식을 익히거나 담았다.
- 도철문
- 상나라 청동기에 흔한 좌우 대칭의 짐승 얼굴 무늬.
- 조합 거푸집 주조
- 여러 조각을 맞춘 흙 거푸집에 녹인 청동을 붓는 기법.
- 자안패
- 상나라에서 귀중품이자 재산으로 쓰인 작은 바다 조개껍데기.
- 탁본
- 새긴 글자 위에 종이를 대고 먹을 두드려 떠낸 사본.
- 제(帝)
- 날씨 등을 다스린다고 여긴 상나라 종교의 높은 신.
묻고 답하기
‘은허’는 무슨 뜻인가요?
‘은의 폐허’라는 뜻이에요. ‘은’은 상나라, 특히 마지막 시기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에요.
왜 뼈에 글을 썼나요?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려던 게 아니라, 조상에게 물은 질문과 뼈의 금에서 읽은 답을 기록하려고 새긴 거예요.
오늘날 갑골문을 읽을 수 있나요?
일부는 읽을 수 있어요. 서로 다른 글자 4,000~5,000자 가운데 확실히 해독된 것은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지만, 자주 쓰는 낱말은 대부분 여기에 들어 있어요.
부호는 누구인가요?
무정 왕의 배우자로, 군대를 이끌고 제사를 지냈어요. 1976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그녀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풍부한 무덤 가운데 하나예요.
상나라는 정말 사람을 제물로 바쳤나요?
네. 복사와 고고학 모두 전쟁 포로를 비롯한 수천 명이 왕실 의례에서 죽임을 당했음을 보여 줘요.
은허가 가장 오래된 중국의 도읍인가요?
아니에요. 정저우나 환베이 같은 더 이른 상나라 중심지, 그리고 얼리터우 같은 더 이른 유적이 있어요. 은허는 동시대 문자 기록이 대량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도읍이에요.
기원전 1046년은 얼마나 확실한가요?
중국의 하상주 단대공정이 제시한 연대지만, 다른 연대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상나라의 멸망 연대는 대략적인 것으로 보는 게 좋아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Yin Xu.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Yinxu. Wikipedia
- 은허. 위키백과
- Oracle bone. Wikipedia
- Tomb of Fu Hao. Wikipedia
- Houmuwu ding. Wikipedia
- Huanbei. Wikipedia
- Shang dynasty. Wikipedia
- Xia–Shang–Zhou Chronology Project. Wikipedia
- David N. Keightley, Sources of Shang History: The Oracle-Bone Inscriptions of Bronze Age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8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