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병마용

兵馬俑 (bīngmǎyǒng, ‘병사와 말 인형’)

약 기원전 246–209년 · 시안 부근 진시황릉

한 문장으로

병마용은 2,200여 년 전 중국의 첫 황제 무덤을 지키도록 만든, 실물 크기의 흙 병사와 말 수천 점으로 이루어진 땅속 군대예요.

병마용
이미지: Jmhullot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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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1974년, 중국 시안 근처에서 농부들이 우물을 파다가 삽 끝에 흙 조각이 걸렸어요. 흙으로 만든 병사의 머리와 몸이었지요. 곧 고고학자들이 와서 살펴보니, 밭 아래에는 병사 한 명이 아니라 수천 명이 서 있었어요.

이 병사들은 중국의 첫 황제 진시황을 위해 만든 거예요. 진시황은 살아 있을 때 진짜 군대가 자기를 지켜 주었듯, 죽은 뒤에도 군대가 자기를 지켜 주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일꾼들이 흙으로 병사와 말과 전차를 만들어 무덤 가까이 커다란 땅속 구덩이에 묻었지요.

병사 한 명 한 명은 진짜 어른만큼 커요. 갑옷을 입고, 모자를 쓰거나 머리를 틀어 올렸고, 얼굴도 저마다 달라요. 젊은 얼굴, 나이 든 얼굴, 엄한 얼굴, 차분한 얼굴이 있지요. 원래는 알록달록한 색이 칠해져 있었고, 진짜 청동 무기를 들고 있었어요.

이렇게 많은 인형을 만드는 일은 커다란 공장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했어요. 다리, 몸통, 머리 같은 부분은 틀로 찍어 내고, 콧수염이나 귀 같은 세부는 손으로 붙였어요. 많은 병사 몸에는 일을 감독한 사람의 이름이 도장처럼 찍혀 있어서, 잘못 만들면 누가 만들었는지 찾아낼 수 있었대요.

가까운 큰 언덕 아래에 있는 황제의 진짜 무덤은 아직 한 번도 열리지 않았어요. 옛 역사책에는 그 안에 수은으로 만든 강이 흐르는 온 세상의 모형이 있다고 적혀 있어요. 과학자들이 그곳 흙에서 수은을 찾아냈지만, 고고학자들은 안에 있는 것을 잘 지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제작
기원전 246~209년 무렵, 진시황(기원전 210년 사망) 능묘 조성의 일부
위치
중국 산시성(섬서성) 시안시 린퉁구, 여산(리산) 기슭 봉분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발견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민들이 발견, 같은 해 발굴 시작
규모
세 갱에 병사 8천여 점, 전차 약 130대, 전차용 말 520필, 기병용 말 150필로 추정
인형
실물 크기의 구운 흙 인형. 키 약 1.75~2m, 원래 채색. 틀로 찍은 부분을 조립하고 손으로 마무리
무기
수만 점의 청동 무기와 부속 출토. 대부분 화살촉
지정
진시황릉의 일부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무덤
봉분 아래 황제의 매장 공간은 아직 발굴하지 않음

쉬움

병마용이란 무엇인가

병마용은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시황제’라는 새 칭호를 쓴 진시황(기원전 259~210)의 무덤 근처 구덩이에 묻힌 실물 크기의 병사, 말, 전차 흙 조각상들이다. 현대 시안 중심에서 동북동쪽으로 30~40km쯤 떨어진 여산(리산) 북쪽 기슭에 있으며, 옛 진나라 수도 함양과도 멀지 않다.

‘병마용’은 ‘병사와 말의 인형’이라는 뜻이다. 서양에서 부르는 테라코타는 ‘구운 흙’이라는 뜻으로, 인형들은 그 지역의 흙으로 빚어 가마에서 구웠다. 인형들은 나무 지붕을 얹은 지하 공간에 전투 대형으로 배치되었고, 황제가 정복한 경쟁국들이 있던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병마용은 여러 제곱킬로미터에 걸친 거대한 능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능원에는 성벽, 건물터, 마구간, 청동 마차 갱, 문관과 광대 인형, 그리고 황제의 무덤을 덮은 봉분이 있다. 병마용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발견 가운데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대 미술품 가운데 하나다.

병마용이 섬긴 황제는 누구였을까? 영정은 어린 나이에 기원전 246년 서쪽의 진나라 왕이 되었다.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 10년 동안 그의 군대는 전국시대의 다른 여섯 대국을 정복했고, 그는 스스로 ‘첫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라 칭했다. 승상 이사와 함께 군현제라는 단일한 행정 체계를 펴고, 도량형·화폐·문자를 통일했으며, 거대한 토목 공사를 벌였다. 동시에 후대 전통에서는 가혹한 법, 강제 노역, 분서(焚書)로 악명을 얻었다. 병마용도 같은 이야기에 속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물자를 부릴 수 있는 국가만이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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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1974년의 발견

1974년 3월 말, 가뭄이 들자 린퉁 시양촌 주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흙 인형 조각과 청동 화살촉을 캐냈다. 우물을 판 사람 가운데 양즈파는 훗날 ‘병마용을 발견한 농부’로 유명해졌다. 여러 주민이 함께 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공을 돌려야 하는지를 두고 다툼이 일기도 했다.

현지 관리와 린퉁현 문화 기관의 고고학자 자오캉민이 조각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소식이 베이징에 전해진 뒤, 1974년 여름부터 산시성 고고학자들이 체계적인 발굴에 나섰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세계에서 알려진 가장 큰 도용(陶俑, 흙인형) 무리였다.

1976년 시추 조사로 2호갱과 3호갱이 확인되었다. 1호갱 위에 세운 박물관이 1979년 문을 열었고, 이곳은 곧 중국 고대 문명의 상징이 되어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인형 하나하나를 기록하고 보존 처리하고 다시 맞춰야 하므로 발굴은 지금도 천천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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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갱을 ‘읽는’ 법

가장 큰 1호갱은 길이 약 230m, 너비 약 62m다. 주력 부대가 있는 곳으로, 수천 점(흔히 6천 점쯤으로 추정)이 묻혀 있다고 보지만 일부만 발굴되었다. 맨 앞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궁수와 쇠뇌수 세 줄이 선봉으로 서 있다. 그 뒤로 흙벽으로 나뉜 11개의 긴 통로에 갑옷 입은 보병과 전차가 줄지어 있고, 양옆의 병사들은 바깥을 향해 옆구리를 지킨다.

ㄴ자 모양의 2호갱은 여러 병종이 섞인 다른 배치를 보여 준다. 무릎 꿇은 궁수와 선 궁수, 전차, 안장 얹은 말 옆에 선 기병, 보병이 있어 진나라 군대가 여러 병종을 어떻게 조합했는지 알 수 있다. 가장 작은 3호갱에는 전차 한 대와 인형 약 68점이 ㄷ자 모양으로 마주 보고 있어 보통 지휘부로 해석된다. 4호갱은 파기만 하고 비어 있는데, 제국이 무너지면서 공사가 멈추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계급은 옷차림과 자세로 읽을 수 있다. 일반 병사는 짧은 전포나 작은 비늘 갑옷을 입고, 높은 장교는 끈이나 매듭이 달린 더 정교한 갑옷과 관을 썼으며, 이른바 장군 인형이 가장 키가 크다. 머리 모양, 허리띠, 신발, 심지어 신발 바닥의 미끄럼 방지 무늬까지 꼼꼼히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병마용은 기원전 3세기 군대의 편제와 장비를 알려 주는 놀라운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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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인형은 어떻게 만들었나

인형은 표준화된 부품과 개별 마무리를 결합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다리는 속이 차 있고, 몸통은 흙 띠나 판을 쌓아 속이 비게 만들었으며, 팔과 손은 따로 만들었다. 머리는 틀에 눌러 찍은 뒤 손으로 귀, 머리카락, 콧수염, 표정을 덧붙였다. 부분들은 굽기 전에 이어 붙였다. 미술사학자 로타 레더로제는 한정된 부품으로 큰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중국 미술의 ‘모듈’ 체계를 설명하면서 병마용을 핵심 사례로 들었다.

많은 인형에는 공방 우두머리나 장인의 이름이 도장으로 찍히거나 새겨져 있다. 어떤 이름은 궁정 공방과, 어떤 이름은 주변 고을의 지방 공방과 연결된다. 비슷한 표시는 진나라 궁궐의 벽돌과 기와에도 나타난다. 이는 불량품이 나오면 추적해 처벌할 수 있도록 ‘만든 이의 이름을 새기는(物勒工名)’ 진나라의 법적 관행을 반영한다.

구운 뒤에는 옻칠을 하고 빨강, 초록, 파랑, 보라, 분홍, 흰색, 검정 등 여러 색을 칠했다. 보라색은 흔히 ‘한 퍼플(Han purple, 漢紫)’이라고 부르는 합성 안료인 규산구리바륨이다. 발굴 뒤 인형이 마르면 채색 상당 부분이 몇 분 만에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보존 전문가들은 매우 천천히 일한다.

병사들은 진짜 청동 무기를 들었다. 검, 창, 극(戟), 쇠뇌, 그리고 엄청난 양의 화살촉이다. 일부 무기에 새겨진 글은 제작 연대를 기원전 240~220년대로 알려 주어, 이 무기들이 국가 병기 공방에서 만들어진 뒤 묻혔음을 보여 준다. 화살촉 묶음에 대한 분석은 작고 자급적인 공방 단위들이 공통 규격에 맞춰 생산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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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능묘: 사후 세계를 위한 또 하나의 세상

무덤 공사는 훗날의 황제가 열세 살에 진나라 왕이 된 기원전 246년에 시작되었고, 기원전 221년 통일 뒤 크게 확대되었다. 약 한 세기 뒤에 『사기』를 쓴 사마천은 온 나라에서 70만 명을 보내 공사를 시켰다고 적었다. 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죽어 그해 이곳에 묻혔고, 공사는 아들 대에도 이어지다가 반란으로 멈추었다.

사마천은 보물로 가득한 지하 궁전, 침입자를 쏘도록 설치한 쇠뇌, 천체를 그린 천장,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흐르게 한 땅의 모형을 묘사한다. 그러나 병마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봉분 조사에서 흙 속 수은 농도가 유난히 높게 나타나, 많은 학자가 이를 사마천 기록의 부분적 뒷받침으로 보지만 해석에는 논란이 있다.

능원은 황제의 세계를 본뜬 모형으로 설계되었다. 봉분을 안팎 두 겹의 성벽이 둘러싼다. 발굴에서는 말과 마부까지 갖춘 절반 크기의 청동 마차(1980년 발견), 문관 인형 갱, 곡예사나 광대 인형, 악사 인형, 돌로 만든 갑옷, 실제 말을 묻은 마구간 갱, 청동 학·백조·오리가 놓인 지하 정원 등이 나왔다. 병마용 군대는 이 상상의 제국 가운데 동쪽을 지키는 부대일 뿐이었다.

그 바탕에는 죽은 군주도 사후 세계에서 조정과 시종과 오락과 경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보다 앞선 중국의 군주들은 때로 사람을 순장했는데, 진시황의 능원은 흙과 청동으로 만든 대체물을 전례 없는 규모로 썼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자식 없는 후궁들이 황제를 따라 죽어야 했고, 무덤의 비밀을 아는 장인들이 안에 갇혔다고 전한다.

[2][4][5]

중급

누가 만들었나: 노동, 법, 그리고 진나라

병마용은 법과 행정으로 사람과 자원을 철저히 조직한 진나라 국가의 산물이다. 통일 전쟁에 병사를 징발한 바로 그 체계가 도로, 궁궐, 변방 성벽, 능묘 같은 거대 사업에 노역자와 죄수와 장인을 동원했다.

고고학은 그 인간적 대가도 드러냈다. 능원 근처에서 노역자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일부에는 이름, 고향, 법적 신분을 새긴 작은 기와 조각이 함께 묻혀 있어, 빚이나 형벌을 노역으로 갚던 죄수들이 많았음을 보여 준다. 노역자 매장 구덩이에서 나온 유골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었다. 이 발견들은 감탄을 자아내는 조각 뒤에 강제로 일하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일깨운다.

동시에 조각의 수준은 도자기, 청동 주조, 건축에 숙련된 장인들의 솜씨를 보여 준다. 그래서 병마용은 황제 권력의 기념비이자, 이름이 겨우 흙 위의 도장으로만 남은 보통 사람들의 지식과 노동의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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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약탈, 불, 그리고 땅속의 2천 년

진 왕조는 시황제가 죽고 겨우 4년 만에 무너졌다. 기원전 206년 반란군이 수도 지역에 들어왔고, 후대의 기록은 반란군 지도자 항우가 능원을 약탈하고 건물을 불태웠다고 전한다.

갱의 고고학 증거는 이 이야기의 일부와 들어맞는다. 1호갱과 2호갱의 나무 지붕은 불타 무너지면서 아래의 인형들을 짓눌렀고, 무기 상당수가 사라졌는데 반란군이 가져갔을 수 있다. 그러나 불이 다른 원인으로 났을 수도 있고, 증거만으로 항우의 소행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황제의 무덤 자체가 도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은 측정 결과와 뚜렷한 도굴 통로가 없다는 점 때문에 온전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 뒤 2천여 년 동안 여산에서 흘러내린 흙과 모래가 갱을 덮었다. 이따금 주민들이 흙 인형 조각을 발견했고 후대의 무덤이 일대를 파고 들어가기도 했지만, 병마용 군대는 1974년까지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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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발굴, 보존, 전시

거의 모든 인형이 조각난 채 발견되었다. 복원가들은 파편을 가려내 붙이고 빈 곳을 메우는데, 병사 한 점을 복원하는 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발굴은 1974년 이후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1980년대와 2009년 이후 1호갱에서 새로운 발굴이 있었고 2호갱에서도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채색 보존이다. 물감 아래의 옻칠층은 수분을 잃자마자 줄어들며 말려 올라간다. 중국의 보존 전문가들은 국제 협력을 통해 갓 드러난 표면을 촉촉하게 유지하며 굳히는 방법을 개발했지만, 색이 많이 남은 인형은 아주 적다.

1987년 병마용을 포함한 진시황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70~80년대 이후 일부 인형은 세계 여러 나라로 전시를 다니며 기록적인 관람객을 모았는데, 2007~2008년 영국박물관의 ‘첫 황제’ 전시가 대표적이다. 중국은 현재 기술로는 내용물 보존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당분간 황제의 무덤을 열지 않기로 했다.

[3][5][7]

중급

미술사에서의 위치와 유산

진나라 이전 중국 무덤에 넣은 인형은 대개 작았다. 진의 병마용은 실물 크기와 사실성, 곧 다양한 얼굴, 실감 나는 몸, 세밀한 복식에서 독보적이다. 한나라 무덤에도 양가만(楊家灣)이나 경제의 양릉(陽陵)처럼 도용 군대가 이어졌지만, 크기가 훨씬 작아 실물의 3분의 1 정도인 경우가 많다. 진나라 규모의 대형 인물 조각은 몇백 년 뒤 불교 조각이 나타날 때까지 중국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날 병마용은 중국과 진시황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이다. 영화, 게임, 만화, 광고에 등장하며, 전쟁과 강제 노동으로 광대한 땅을 통일한 군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논쟁에도 불려 나온다. 중국에게는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고, 세계의 연구자들에게는 최초의 제국 국가의 조직을 들여다보는 유일무이한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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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초상인가 유형인가? 얼굴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병사마다 실제 인물의 초상이라는 말이 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는 머리를 한정된 수의 틀 유형으로 만든 뒤 손으로 개성을 더했다고 보아, 현대적 의미의 초상보다는 다양하게 변주된 유형으로 이해한다. 최근에는 사진 측량으로 귀와 얼굴을 비교해 인형들이 얼마나 개별적인지를 검증하려는 연구도 있으며, 이 문제는 아직 열려 있다.

외부의 영향이 있었나? 실물 크기의 사실적 조각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헬레니즘 그리스 미술의 영향이 들어왔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지자들은 새로운 사실성과 유라시아 교류를 근거로 들지만, 비판자들은 직접 증거가 없고 제작 기법이 순전히 중국적이며, 사실성은 그리스에서 와야 한다는 유럽 중심적 전제가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중국 고고학자 대부분은 자생적 발전을 강조하며,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군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흔히 황제가 정복한 동쪽 나라들을 향해 사후의 황제를 지키는 호위대로 읽힌다. 수도의 근위대나 주둔군을 재현했다는 견해도 있고, 문관과 광대까지 포함해 제국의 질서 전체를 무덤 안에 재현하려는 더 큰 계획의 일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해석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사마천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그의 기록은 사건 약 한 세기 뒤, 진나라를 잔혹하고 단명한 정권으로 그리던 한나라 시대의 역사가가 쓴 것이다. 고고학은 능원의 규모와 수은 같은 일부 세부를 확인하는 한편, 병마용 자체처럼 그가 언급하지 않은 것도 많이 보여 준다. 그래서 문헌과 유적의 관계는 방법론의 핵심 문제다.

[3][8][7]

심화

증거와 연구 방법

발굴과 탐사. 지식의 대부분은 갱과 관련 무덤의 발굴, 그리고 시추·지구물리 탐사·토양 화학 분석 같은 봉분의 비파괴 조사에서 나온다. 1호갱과 이후 갱들의 공식 발굴 보고서는 상세한 도면과 목록을 제공하며, 봉분은 파지 않고 연구한다.

과학 분석. 안료 분석은 색과 합성 보라색을 밝히고, 청동 무기와 마차의 금속학 분석은 주조와 마무리 기법을, 흙과 소성 분석은 현지 원료와 가마 온도를, 인골 연구는 노동력의 구성을 알려 준다. 이런 방법들 덕분에 병마용은 볼거리에서 생산 과정을 담은 상세한 기록으로 바뀌었다.

명문과 문헌. 도공의 도장, 무기 명문, 노역자의 기와 명문은 당대의 문자 증거로서, 공방과 노역 규정을 담은 수호지 진간(睡虎地秦簡) 같은 진나라 법률 문서와 비교할 수 있다. 『사기』는 역사 서술의 뼈대를 제공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윤리와 보존. 발굴할 때마다 연약한 재료가 드러나므로 고고학자들은 얻을 지식과 잃을 위험을 저울질한다. 황제의 무덤을 닫아 두기로 한 선택 자체가 하나의 방법론적 선언이다. 어떤 증거는 기다리는 것이 가장 잘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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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사후 세계의 군대
죽은 군주에게도 다음 세상에서 경호와 조정과 시종이 필요하다는 믿음. 여기서는 조각 대체물로 채웠다.
모듈식 생산
틀로 찍은 표준 부품을 조립하고 손으로 마무리해 거대한 규모에서도 다양성을 만들었다.
이름을 새긴 품질 관리
인형에 찍힌 제작자 이름으로 진나라는 불량품의 책임자를 추적하고 처벌할 수 있었다.
제국의 축소판
능원은 병사에서 문관, 마구간, 정원까지 황제의 세계를 재현했다.
국가 권력과 강제 노동
막대한 수의 징발민과 죄수를 동원한 이 사업은 진나라의 역량과 가혹함을 함께 보여 준다.
사실성
실물 크기에 다양하고 세밀한 인형으로, 이전 중국 무덤 미술에 전례가 없었다.
발굴보다 보존
연약한 채색과 열지 않은 무덤은 고고학자가 때로 기다림을 택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기록

  1. 기원전 246년 — 영정이 열세 살에 진나라 왕이 되고 무덤 공사가 시작된다(기원전 246년).
  2. 기원전 221년 — 진이 다른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고 영정이 시황제가 된다(기원전 221년).
  3. 기원전 210년 — 시황제가 순행 중에 죽어 여산에 묻힌다(기원전 210년).
  4. 약 기원전 208년 — 반란으로 능묘 공사가 중단된다(기원전 208년 무렵).
  5. 기원전 206년 — 진 왕조가 멸망한다. 후대 기록은 항우가 능원을 약탈했다고 전한다(기원전 206년).
  6. 1974년 — 우물을 파던 농민들이 조각을 발견하고, 1호갱 발굴이 시작된다.
  7. 1976년 — 시추 조사로 2호갱과 3호갱이 확인된다.
  8. 1979년 — 1호갱 위의 박물관이 일반에 공개된다.
  9. 1980년 — 봉분 서쪽에서 절반 크기의 청동 마차 두 대가 발견된다.
  10. 1987년 — 진시황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11. 1999년 — 곡예사 또는 광대 인형이 든 갱이 발굴된다.
  12. 2009년 — 1호갱에서 새로운 단계의 발굴이 시작된다.

용어 풀이

테라코타
구운 흙. 그릇, 기와, 조각에 쓰인다.
용(俑)
무덤에 함께 묻는 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인형.
능원
왕릉과 그에 딸린 건물, 부장 갱, 담장 등을 모두 포함한 무덤 구역.
진(秦)
중국을 처음 통일한 나라이자 왕조(기원전 221~206).
거푸집(틀)
흙을 눌러 같은 모양을 반복해 찍어 내는 빈 틀.
옻칠
옻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 인형의 채색 아래에 발랐다.
쇠뇌
방아쇠가 달린 기계식 활. 전국시대와 진나라 군대의 주요 무기였다.
『사기』
사마천이 기원전 90년 무렵 완성한 역사서. 진시황에 관한 주요 문헌 사료다.
징발
국가가 사람을 강제로 병사나 노역자로 불러 쓰는 일.
한 퍼플(漢紫)
고대 중국에서 쓴 규산구리바륨 합성 보라색 안료. 영어 Han purple.

묻고 답하기

병사는 모두 몇 명인가요?

고고학자들은 세 개의 주요 갱에 병사 8천여 점과 전차, 말이 있다고 추정해요. 지금까지 그중 일부만 발굴되었어요.

얼굴이 정말 모두 다른가요?

서로 달라 보이지만, 몇 가지 틀로 찍은 뒤 손으로 다듬어 만든 거예요. 그래서 실제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이라기보다는 다양하게 변주된 얼굴이라고 보는 것이 좋아요.

병사들은 원래 회색이었나요?

아니에요. 옻칠 위에 밝은 색을 칠했지만, 대부분의 물감이 떨어져 나갔고 상당 부분은 발굴 직후 몇 분 만에 사라졌어요.

황제의 무덤은 왜 열지 않나요?

안에 든 것, 특히 연약한 재료가 공기에 드러나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아직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 당국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무덤 안에 정말 수은이 있나요?

봉분 흙에서 수은 농도가 유난히 높게 나와 사마천이 적은 수은 강과 맞아떨어지지만, 무덤 안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병마용을 만들었나요?

국가와 지방의 공방이 장인들, 그리고 징발된 수많은 노역자와 죄수를 동원해 만들었습니다. 여러 감독자의 이름이 인형에 도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았나요?

그런 주장을 편 학자도 있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고, 많은 고고학자는 인형들이 중국 자체의 기법과 발전을 보여 준다고 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병마용. 위키백과
  2. 진시황릉. 위키백과
  3. Terracotta Army. Wikipedia
  4.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Wikipedia
  5.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6. Shuihudi Qin bamboo texts. Wikipedia
  7. Jane Portal (편), The First Emperor: China’s Terracotta Army. British Museum Press, 2007
  8. Lothar Ledderose, Ten Thousand Things: Module and Mass Production in Chinese Art.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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