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 이집트에는 투탕카멘이라는 십 대 왕이 있었어요. 그는 겨우 열여덟, 열아홉 살쯤에 세상을 떠났어요.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다시 살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러려면 몸이 안전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왕의 몸을 미라로 만들고, 머리와 어깨 위에 무거운 금 가면을 씌웠지요.
이 가면은 높이가 50센티미터가 조금 넘고, 무게는 약 10킬로그램이에요. 큰 쌀 한 포대만큼 무거워요. 금판 두 장을 망치로 두드려 모양을 만들고 이어 붙였어요. 왕의 눈은 흰 돌로 만들고 눈동자는 까만 화산 유리로 박았어요. 눈썹과 눈가의 선은 라피스라줄리라는 짙푸른 돌로 꾸몄어요.
왕은 머리에 줄무늬가 있는 왕실 두건을 쓰고 있어요. 이마에는 작은 동물 두 마리가 있어요. 코브라와 독수리예요. 이 둘은 이집트의 남쪽과 북쪽을 뜻해서, 이 사람이 온 이집트의 왕이라는 걸 보여 줘요. 턱에는 길고 가는 땋은 수염이 달려 있는데, 죽은 이들의 왕인 오시리스 신의 수염과 같은 모양이에요.
가면 뒤쪽에는 그림 문자인 상형문자로 마법 주문이 새겨져 있어요. 얼굴의 각 부분이 저마다 한 신의 것이라고 말해서, 왕의 얼굴이 영원히 튼튼하게 보호받도록 한 거예요.
이 가면은 3,000년 넘게 사막 골짜기의 작은 무덤 속에 숨어 있었어요.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와 이집트인 일꾼들이 이 무덤을 찾아냈어요. 그리고 1925년, 세 겹으로 겹쳐진 관 가운데 마지막 관을 열었을 때 금빛 얼굴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지요.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집트 피라미드 근처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신왕국 제18왕조 말기, 기원전 1323년경 투탕카멘과 함께 묻힘
- 발견 장소
- 이집트 테베(오늘날 룩소르) 왕가의 계곡 KV62 무덤. 무덤 발견 1922년, 가면 확인 1925년 10월 28일
- 크기·무게
- 높이 약 54cm, 너비 39.3cm, 깊이 49cm, 무게 약 10.2kg
- 재료
- 금판 두 겹(주로 약 23캐럿), 라피스라줄리·석영·흑요석·홍옥수·아마조나이트·터키석·파이앙스·색유리 상감
- 새김글
- 뒷면과 어깨에 세로 10줄, 가로 2줄로 새긴 보호 주문(뒤에 『사자의 서』 151장이 됨)
- 발굴자
- 하워드 카터. 제5대 카나번 백작 조지 허버트가 후원했고, 많은 이집트인 인부가 함께 일함
- 현재 소장
- 기자의 대이집트 박물관(이전에는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쉬움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란?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장례용 가면, 곧 미라의 머리와 어깨를 덮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기원전 1332년경부터 1323년경까지 다스린 제18왕조 말기의 파라오 투탕카멘을 위해 만들어졌거나, 적어도 그의 장례에 쓰였다. 왕이 젊은 나이에 죽자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아마포로 감싸였고, 황금 가면은 감싼 머리 바로 위에 놓인 채 세 겹 관 가운데 가장 안쪽 관에 들어갔다.
이런 가면에는 실용적인 역할과 종교적인 역할이 함께 있었다. 실용적으로는 미라에게 이상화된, 변하지 않는 얼굴을 주었다. 종교적으로는 죽은 왕을 신들과 동일시하고, 왕의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알아볼 수 있고 부서지지 않는 모습을 마련해 주었다. 금을 쓴 것은 이집트인들이 녹슬거나 빛바래지 않는 금을 ‘신들의 살’로 여겼기 때문이다.
많은 왕의 무덤에 이런 가면이 있었겠지만, 거의 모두 고대에 도굴되어 녹여졌다. 투탕카멘의 무덤도 장례 직후 두 차례 도굴을 당했지만 매장실은 대체로 온전하게 남았다. 그래서 이 가면이 살아남았고, 이집트학자 니컬러스 리브스의 말처럼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유물이라 할 만한 것이 되었다.
쉬움
가면을 ‘읽는’ 법
먼저 두건을 보자. 왕은 오직 왕만 쓸 수 있었던 줄무늬 두건인 네메스를 쓰고 있다. 가면에서는 금 줄과 라피스라줄리를 흉내 낸 푸른 유리 줄이 번갈아 나타난다. 뒤쪽에서 두건 자락이 꼬리처럼 모인다.
이마를 보자. 이마 위로 두 동물이 솟아 있다. 목을 부풀린 코브라는 하이집트(북쪽)의 여신 와제트, 독수리 머리는 상이집트(남쪽)의 여신 네크베트다. 둘이 함께 이 사람이 ‘두 땅’을 다스렸음을 알린다.
이제 얼굴이다. 눈은 흰 석영으로 만들고 눈동자는 검은 화산 유리인 흑요석으로 박았다. 눈썹과 눈에서 길게 뻗은 선에는 라피스라줄리를 박았는데, 이 짙푸른 돌은 멀리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들여와야 했다. 얼굴은 매끄럽고 차분하며 젊다. 사진 같은 초상이 아니라 왕의 이상적인 모습이며, 같은 얼굴이 그의 관과 조각상에도 나타난다.
턱 아래에는 푸른 유리를 땋은 모양으로 박은 가늘고 굽은 금 수염이 달려 있다. 이렇게 끝이 말린 수염은 신들, 특히 죽은 이들의 지배자 오시리스와 연결되었다. 이 수염을 단 죽은 왕은 오시리스 자신으로 나타난다. 어깨에는 여러 줄의 색 상감으로 된 넓은 목깃이 있고, 귀에는 귀걸이 구멍이 뚫려 있다.
쉬움
투탕카멘은 누구였나?
투탕카멘은 기원전 1342년경 ‘아텐의 살아 있는 모습’이라는 뜻의 투탕카텐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2010년에 발표된 DNA 연구에 따르면 아버지는 KV55 무덤에 묻힌 남자, 곧 아마도 파라오 아케나텐이고, 어머니는 미라로만 알려진 ‘젊은 여인(Younger Lady)’이다. 아케나텐은 태양 원반 신 아텐을 다른 모든 신 위에 올리고 아마르나에 새 수도를 세우며 이집트 종교를 바꾸려 했던 왕이다.
투탕카텐은 여덟아홉 살 무렵 왕이 되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그의 정부는 아케나텐의 개혁을 되돌렸다. 왕은 테베의 전통 신 아문을 기려 이름을 ‘아문의 살아 있는 모습’이라는 뜻의 투탕카멘으로 바꾸었고, 오늘날 ‘복원 비문’이라 부르는 포고문은 신전을 고치고 사제들을 되돌려 놓은 일을 전한다. 궁정은 아마르나를 떠났다. 왕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고관 아이(Ay)와 장군 호렘헤브 같은 실력자들이 정책을 이끌었을 것이다.
투탕카멘은 아케나텐의 딸 안케센아멘과 결혼했다. 그의 무덤에서는 사산되었거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딸 둘의 미라가 나왔다. 그는 열여덟아홉 살쯤에 죽었다. 미라 연구에서 말라리아의 흔적과 죽기 직전의 왼쪽 다리 골절이 확인되었지만, 정확한 사인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뒤를 이은 늙은 고관 아이는 매장실 벽에 투탕카멘을 위해 ‘입 열기’ 의식을 행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왕위를 이을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이었다.
후대 왕들은 아마르나 시대와 얽힌 투탕카멘을 공식 왕명표에서 뺐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잊힌 덕분에 무덤이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후대의 도굴이 성행할 무렵, 그의 작은 무덤은 근처에 다른 무덤을 파면서 나온 흙과 돌더미 아래에 묻혀 있었다.
중급
가면은 어떻게 만들었나
가면은 높이 약 54cm, 너비 39.3cm, 깊이 49cm, 무게 약 10.23kg이다. 두께 1.5~3mm의 금판 두 장을 두드려 모양을 잡고 이어 붙였다. 2007년 분석에 따르면 가면 몸체는 대부분 약 23캐럿 금에 구리를 조금 섞은 합금으로, 구리를 섞으면 차갑게 두드려 모양을 내기가 쉬워진다. 표면은 약 30나노미터의 아주 얇은 두 가지 금 합금 층으로 덮여 있는데, 얼굴과 목은 옅은 색(약 18.4캐럿), 나머지는 짙은 색(약 22.5캐럿)이다. 얼굴을 더 밝게 빛나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금 세공인들은 표면에 칸(클루아조네)을 만들고 깎은 돌과 유리를 채워 넣었다. 재료는 이집트가 닿는 넓은 세계에서 왔다. 중앙아시아의 라피스라줄리, 시나이의 터키석, 홍옥수, 아마조나이트, 석영, 흑요석, 그리고 이집트 공방에서 만든 파이앙스와 유리다. 이 시기 색유리는 사치스러운 재료였으며, 단순히 값싼 대용품이 아니라 진짜 보석과 나란히 쓰였다.
무게 약 2.5kg의 수염은 따로 만들어 관으로 끼워 붙였다. 카터가 가면을 발견했을 때 수염은 떨어져 있었고, 1944년 나무 촉으로 다시 붙였다. 목에는 연꽃 모양 끝장식이 달린 금과 파이앙스 구슬의 세 줄 목걸이가 걸려 있었지만, 보통은 따로 전시한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집트 왕실 미술은 궁정과 신전 공방에서 전문가 집단이 만들었고, 개별 장인의 이름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같은 무덤에서 나온 비슷한 양식의 황금 관과 장신구도 제18왕조 말기 왕실 공방의 작품이다.
중급
종교적 의미: 영원을 위한 얼굴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몸, 카(생명력), 바(인격, 흔히 사람 머리를 한 새로 그림) 같은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죽은 뒤 이 부분들이 다시 합쳐져야 복된 영혼(아크)으로 살 수 있었다. 보존된 몸과 그 형상은 꼭 필요한 닻이었고, 가면은 죽은 이가 언제나 완전한 얼굴을 갖도록 해 주었다.
가면은 왕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신의 수염과 황금 피부를 지닌 투탕카멘은 살해되었다가 되살아나 저승의 지배자가 된 신 오시리스와 하나가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황금 피부와 라피스라줄리 머리카락은 신상의 특징이었고, 이집트 문헌은 신들이 금으로 된 살과 라피스라줄리로 된 머리카락을 지녔다고 묘사한다.
뒷면과 어깨에 새긴 주문은 이를 분명히 말한다. 이 주문은 약 500년 전 중왕국 시대 가면에 처음 나타나며, 뒤에 저승을 위한 주문 모음인 『사자의 서』 151장에 들어갔다. 주문은 가면 자체에게 말을 걸며 얼굴의 각 부분을 신적 존재와 동일시한다. 오른쪽 눈은 태양신의 밤 배, 왼쪽 눈은 낮 배, 눈썹은 아홉 신(엔네아드), 이마는 아누비스, 목덜미는 호루스라는 식이다. 가면은 죽은 이를 좋은 길로 이끌고 혼돈의 신 세트의 무리를 쳐부수라는 부탁을 받는다. 왕은 즉위명 네브케페루레로 불린다.
가면은 보호 체계 전체의 가장 안쪽 층이었다. 겹겹이 포개진 세 관(가장 안쪽은 무게 약 110kg의 순금 관), 돌 석관, 그리고 매장실을 가득 채운 금박 나무 사당 네 개가 이를 둘러쌌다. 층마다 왕의 모습과 신들의 보호가 되풀이되어,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겹을 이루었다.
중급
발견, 1922~1925년
20세기 초 많은 고고학자는 왕가의 계곡에서 더 찾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제5대 카나번 백작 조지 허버트의 후원을 받아 계속 발굴했다. 1922년 11월 4일, 일꾼들이 인부 오두막 터 아래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 하나를 찾아냈다. 11월 26일 카터는 봉인된 문에 작은 구멍을 내고 촛불을 들어, 금박 가구와 전차와 조각상이 가득한 전실을 들여다보았다.
무덤을 비우는 데는 열 번의 발굴 시즌이 걸렸다. 매장실은 1923년 2월 16일 공식적으로 열렸다. 카나번 경은 1923년 4월 카이로에서 감염으로 죽었는데, 이것이 ‘파라오의 저주’라는 소문을 키웠지만 근거는 전혀 없다. 1924년에는 출입과 관리 권한을 두고 카터와 이집트 유물청 사이에 격한 분쟁이 벌어져 작업이 중단되었다.
1925년 가을에야 조사단은 미라에 이르렀다. 1925년 10월 28일 가장 안쪽의 황금 관 뚜껑을 들어 올리자, 감싼 몸 위에 놓인 가면이 보였다. 카터는 일기에 가면의 ‘슬프지만 평온한 표정’을 적었다. 장례 때 부어 놓은 수지와 향유가 굳어 미라와 가면이 관에 달라붙어 있었고, 조사단은 열과 도구를 써서 떼어 내다가 미라를 훼손했다. 1925년 12월 가면은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카터의 조사단에는 사진가 해리 버턴, 화학자 앨프리드 루커스, 보존 전문가 아서 메이스, 그리고 출판된 기록에서 이름이 자주 빠진 많은 이집트인 인부와 감독이 있었다. 최근의 연구와 전시는 발견에서 이집트인 인부들이 한 역할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중급
누구의 보물인가: 가면과 근대 이집트
발견은 이집트 역사의 전환점에 이루어졌다. 영국은 무덤이 발견되기 몇 달 전인 1922년 2월 이집트의 형식적 독립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큰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 그때까지 이집트에서 외국 발굴단은 보통 발굴품의 일부를 나누어 받았다. 이집트 정부와 민족주의자들은 온전한 왕묘는 전부 이집트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4년 분쟁 뒤 합의가 이루어져, 무덤의 유물은 이집트 정부와 발굴 후원자 사이에 나누지 않기로 했고 거의 모든 유물이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으로 갔다. 이는 이집트 고고학사에서, 그리고 과거는 누구의 것인가를 둘러싼 더 넓은 논쟁에서 이정표가 된 일이었다.
투탕카멘은 곧 근대 이집트 정체성의 상징이 되어, 1920년대 이집트의 미술·건축·공공 이미지에 나타났다. 이런 흐름을 ‘파라오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유럽과 미국에서는 ‘투트 열풍(Tutmania)’이 패션·디자인·영화·광고를 휩쓸었다. 가면은 두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집트인에게는 국가의 상징이고, 세계에는 ‘고대 이집트’ 그 자체를 뜻하는 아이콘이다.
중급
해외 전시, 훼손, 그리고 새 보금자리
20세기 대부분 동안 가면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의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970년대에는 ‘투탕카멘의 보물’ 전시로 해외에 나가 런던과 미국 여러 도시에서 엄청난 관람객을 모았다. 그 뒤 이집트는 가면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후의 해외 투탕카멘 전시는 가면 없이 열렸다.
2014년 8월, 관리 작업 중 가면을 다루다가 수염이 떨어졌다. 박물관 직원들은 서둘러 에폭시 접착제로 붙였고, 수염은 살짝 비뚤어지고 접착제 자국이 드러났다. 2015년 1월 이 사실이 알려지자 독일·이집트 공동 보존팀이 에폭시를 제거하고, 고대 이집트인들도 쓰던 밀랍으로 수염을 다시 붙였다. 2016년에는 박물관 직원 여러 명이 징계를 받았다. 이 일은 보존 기준과 전문 교육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기자 피라미드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지은 대이집트 박물관이 2025년 11월 1일 공식 개관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5,000점이 넘는 투탕카멘 유물 전체가 한자리에 전시되며, 황금 마스크는 그 중심에 있다.
심화
논쟁: 가면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나?
2001년 무렵부터 니컬러스 리브스를 비롯한 몇몇 이집트학자는 가면의 전부 또는 일부가 원래 다른 통치자, 곧 네페르네페루아텐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해 왔다. 네페르네페루아텐은 아마르나 시대 말기에 잠시 다스린 수수께끼의 파라오로, 흔히 네페르티티나 아케나텐의 딸 가운데 한 명과 동일시된다. 투탕카멘 무덤의 몇몇 유물, 예컨대 내장을 담는 작은 관들은 네페르네페루아텐을 위해 만들었다가 이름을 고친 것이 확인되므로, 앞선 왕의 부장품을 다시 쓰는 일 자체는 드물지 않았다.
리브스가 가면에 대해 드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얼굴이 따로 만든 조각을 두건에 이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 얼굴과 두건의 금 성분이 조금 다르다는 점, 귀 뚫음이 이집트 미술에서 왕비와 어린이에게 더 흔하다는 점, 그리고 새김글의 카르투슈에 남은 흔적이 앞선 이름을 투탕카멘의 이름으로 고친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다른 전문가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2015년 수염 수리에 참여해 가면을 자세히 조사한 보존가 크리스티안 에크만은 얼굴이 나머지 부분과 다른 금으로 되어 있다거나 카르투슈가 고쳐졌다는 흔적을 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자히 하와스는 제18왕조 왕들도 귀걸이를 했으므로 귀 뚫음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이 문제는 아케나텐 이후의 왕위 계승, 네페르네페루아텐과 스멘크카레의 정체를 둘러싼 더 큰 논쟁과 얽혀 있으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매장실의 벽화 뒤에 숨은 방이 있고 그 안에 네페르티티의 무덤이 있을지 모른다는 리브스의 관련 가설은 2015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레이더 조사 결과는 엇갈렸고, 2018년 연구는 그런 방이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일부 연구자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심화
증거와 연구 방법
발굴 기록. 카터의 노트, 유물 카드, 도면, 일기, 그리고 해리 버턴의 사진은 옥스퍼드 대학교 그리피스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상당 부분이 온라인으로 공개되었다. 덕분에 KV62는 당대에 가장 잘 기록된 발굴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연구자들은 각 유물이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 복원할 수 있다. 카터가 대중을 위해 쓴 『투탕카멘의 무덤』(제1권은 아서 메이스와 공저, 1923)은 많은 것을 생략했으므로 이 기록들과 함께 읽어야 한다.
과학적 분석. 2007년 금 합금 분석 같은 X선·성분 연구와 2015년 보존 작업 때의 정밀 관찰은 가면의 제작 방식에 관한 자료를 주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표면이나 작은 부분만 조사하며, 박물관은 당연히 파괴적 검사를 제한해 왔다.
맥락과 비교. 신왕국 왕실 매장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가면은 왕족이 아닌 사람들의 가면, 같은 무덤의 다른 유물(황금 관, 내장 관 등), 『사자의 서』 같은 문헌과 비교해 해석해야 한다. 도굴 뒤 관리들이 유물을 다시 꾸려 넣은 흔적 같은 고대 도굴의 증거는 KV62조차 완전히 ‘손대지 않은’ 유적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미라 연구. 2005년의 CT 촬영과 2010년에 발표된 DNA 분석은 투탕카멘의 건강과 가족에 대한 이해를 크게 바꾸었다. 그러나 고대 DNA 연구의 어려움과 1925년에 미라가 입은 손상 때문에, 특히 가족 관계와 사인에 관한 결론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러므로 가면의 역사는 변화하는 과학 방법과 그 한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핵심 개념
- 장례용 가면
- 미라의 얼굴 위에 놓아 죽은 이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얼굴을 주고 신들과 동일시하는 형상.
- 신의 살인 금
- 이집트인은 빛바래지 않는 금을 신들의 몸과 연결했고, 왕의 황금 얼굴은 그를 신성하고 영원하게 만들었다.
- 오시리스가 된 왕
- 끝이 말린 수염과 장례의 맥락은 죽은 왕을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로 보여 준다.
- 보호 주문
- 뒤에 『사자의 서』 151장이 된 새김글은 얼굴의 각 부분을 신에게 맡겨 왕을 지킨다.
- 겹겹의 보호
- 가면, 세 관, 석관, 네 개의 사당이 왕의 몸을 겹겹이 둘러쌌다.
- 왕실 유물의 재사용
- 무덤의 일부 유물은 앞선 통치자를 위해 만든 것이었고, 가면도 그런지는 논쟁 중이다.
- 문화유산과 국가
- 무덤 유물을 이집트에 온전히 남긴 결정은 가면을 이집트가 자기 과거를 소유한다는 상징으로 만들었다.
기록
- 약 기원전 1342년 — 아케나텐 치세에 투탕카텐이 아마도 아마르나에서 태어남.
- 약 기원전 1332년 — 투탕카텐이 어린 나이에 즉위, 곧 투탕카멘으로 이름을 바꾸고 아문 신앙을 되살림.
- 약 기원전 1323년 — 투탕카멘이 열여덟아홉 살쯤 죽어 황금 가면과 함께 KV62에 묻힘. 아이가 뒤를 이음.
- 1922년 — 11월 4일 하워드 카터 조사단이 KV62의 첫 계단을 찾음. 11월 26일 카터가 전실을 들여다봄.
- 1923년 — 2월 16일 매장실이 공식적으로 열림. 4월 카나번 경 사망.
- 1925년 — 10월 28일 가장 안쪽 관이 열리고 가면이 드러남. 12월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겨짐.
- 1944년 — 떨어져 있던 수염을 나무 촉으로 가면에 다시 붙임.
- 1972년 — 런던에서 ‘투탕카멘의 보물’ 전시가 열리고, 1970년대 후반 미국 순회가 이어짐.
- 2014년 — 8월 관리 작업 중 수염이 떨어져 에폭시로 서둘러 붙임.
- 2015년 — 독일·이집트 공동팀이 에폭시를 제거하고 밀랍으로 수염을 다시 붙임.
- 2025년 — 11월 1일 대이집트 박물관 개관. 황금 마스크가 투탕카멘 유물 전체 전시의 중심이 됨.
용어 풀이
- 파라오
- 고대 이집트 왕을 가리키는 오늘날의 이름. ‘큰 집’(왕궁)을 뜻하는 이집트어 표현에서 왔다.
- 신왕국
- 제18~20왕조를 포함하는 기원전 1550~1070년경. 이집트가 강대한 제국이던 시기.
- 아마르나 시대
- 아텐 신을 다른 신들 위로 높이고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긴 아케나텐의 치세와 그 직후.
- 네메스
- 이집트 왕이 쓰던 줄무늬 왕실 두건.
- 우라에우스
- 왕의 이마에 다는 몸을 세운 코브라. 왕권과 보호의 상징.
- 라피스라줄리
-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로 들여온 짙푸른 돌. 가면의 눈썹과 눈가 선에 쓰였다.
- 카르투슈
- 왕의 이름을 상형문자로 쓰고 둘러싼 타원형 테두리.
- 사자의 서
- 죽은 이가 저승에서 도움을 받도록 쓴 이집트 주문 모음을 가리키는 오늘날의 이름.
- KV62
- 투탕카멘 무덤의 공식 번호. 왕가의 계곡(King’s Valley)에서 62번째로 기록된 무덤이라는 뜻.
- 석관
- 관을 넣는 큰 돌 상자. 투탕카멘의 석관은 규암으로 만들었다.
묻고 답하기
가면은 통째로 금덩어리인가요?
아니요. 두께 몇 밀리미터의 금판 두 장을 두드려 만든 것이라 속이 꽉 찬 덩어리는 아니에요. 그래도 금이 약 10kg 들어 있고, 보석과 유리가 박혀 있어요.
가면이 정말 투탕카멘을 닮았나요?
그의 다른 형상들과 같은 이상화된 왕의 얼굴이에요. 이집트 왕의 초상은 사진이 아니라 영원히 그래야 할 왕의 모습을 보여 주었어요.
수염은 왜 떨어졌나요?
수염은 따로 만들어 붙인 것이에요. 1925년 발견 때 이미 떨어져 있었고 1944년에 다시 붙였어요. 2014년 관리 중 다시 떨어져 잘못 붙였고, 2015년 전문가들이 제대로 고쳤어요.
무덤에 저주가 있나요?
없어요. ‘저주’ 이야기는 1923년 카나번 경이 감염으로 죽은 뒤 신문을 통해 퍼졌어요. 하워드 카터를 비롯해 발굴에 참여한 사람 대부분은 오래 살았어요.
가면은 왜 세 겹의 관 속에 있었나요?
이집트 왕의 장례는 몸을 지키고 왕의 신성한 모습을 되풀이하려고 가면, 세 관, 돌 석관, 금박 사당 네 개를 겹겹이 썼어요.
가면은 원래 다른 파라오를 위해 만든 것인가요?
니컬러스 리브스 등 일부 학자는 아마르나 시대의 통치자 네페르네페루아텐을 위해 처음 만들었다가 고쳤다고 봐요. 가면을 가까이서 조사한 다른 전문가들은 고친 흔적이 없다고 해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예요.
가면은 왜 이집트에 남았나요?
1924년 분쟁 뒤, 무덤의 유물을 발굴 후원자와 나누지 않기로 합의했어요. 이 결정은 이집트의 새로운 정치적 독립과 자기 유산에 대한 권리 주장을 반영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Mask of Tutankhamun. Wikipedia
- Tutankhamun. Wikipedia
- KV62 (Tomb of Tutankhamun). Wikipedia
- Howard Carter. Wikipedia
- Neferneferuaten. Wikipedia
- Book of the Dead. Wikipedia
- Nemes. Wikipedia
- Grand Egyptian Museum. Wikipedia
- Howard Carter, A. C. Mace, The Tomb of Tut.ankh.Amen, Volume 1. Cassell, 1923
- Nicholas Reeves, The Complete Tutankhamun. Thames & Hudson, 199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