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3,000년도 더 전에, 두 큰 나라가 시리아의 부유한 도시들과 교역로를 차지하고 싶어 했어요. 하나는 젊은 파라오 람세스 2세가 다스리는 이집트였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튀르키예 땅에 있던 히타이트 왕국으로 무와탈리 2세가 왕이었어요. 두 군대는 오론테스강 가의 성벽 도시 카데시 근처에서 맞붙었어요.
두 군대는 모두 전차를 썼어요. 전차는 말 두 마리가 끄는 가볍고 빠른 두 바퀴 수레예요. 한 사람은 말을 몰고, 다른 사람은 활을 쏘거나 창을 던졌지요. 이 전투에는 전차가 수천 대나 나왔는데, 우리가 아는 어떤 전투보다 많았을지도 몰라요.
히타이트 사람들은 꾀를 냈어요. 떠돌이 목동인 척하는 두 사람을 보냈지요. 그들은 람세스에게 히타이트 군대가 아주 멀리 있다고 말했어요. 람세스는 그 말을 믿고 군대 일부만 데리고 서둘러 앞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히타이트 군대는 바로 도시 뒤에 숨어 있었어요! 히타이트 전차들이 달려 나와 이집트군 한 무리를 흩어 버렸어요.
람세스는 큰 위험에 빠졌어요. 람세스 자신의 이야기로는, 그는 거의 혼자서 용감하게 싸웠고 곧 이집트 병사들이 더 도착해 히타이트군을 강 건너로 밀어냈대요. 하지만 결국 이집트는 카데시를 차지하지 못했고, 그 지역은 히타이트 차지로 남았어요.
람세스는 나라로 돌아가 신전 벽에 전투 이야기를 마치 대승리처럼 새겼어요. 히타이트 사람들은 다르게 이야기했지요. 약 16년 뒤 두 나라는 평화를 맺고 조약을 글로 남겼어요. 그 조약은 아주 유명해서, 지금 국제연합(유엔) 본부 벽에 큰 복제품이 걸려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람세스 2세 재위 5년, 여름 계절 셋째 달. 보통 기원전 1274년 5월로 봄(다른 연대 체계에서는 약 20년 이르게 봄)
- 장소
- 오론테스강 가 카데시(텔 네비 멘드) 부근, 홈스 호수 근처. 오늘날 레바논 국경에 가까운 시리아 서부
- 교전 세력
- 람세스 2세의 이집트 대 무와탈리 2세의 히타이트 제국과 동맹국들
- 병력
- 이집트: 아문·레·프타·세트 4개 사단과 네아린 부대. 히타이트: 1차 공격에 전차 2,500대, 2차 공격에 약 1,000대와 보병. 수치는 주로 이집트 기록에 근거
- 결과
- 전술적 무승부. 이집트는 괴멸을 면했지만 카데시를 얻지 못했고 아무루도 되찾지 못해 히타이트가 계속 지배함
- 그 뒤
- 기원전 1259년경 람세스 2세와 하투실리 3세 사이의 이집트–히타이트 평화 조약
- 주요 사료
- 아비도스·카르나크·룩소르·라메세움·아부심벨의 이집트 ‘시’, ‘보고문’, 부조. 하투사에서 나온 후대 히타이트 편지와 문서
쉬움
카데시 전투란?
카데시 전투는 기원전 13세기 초 후기 청동기 시대의 두 강대국, 이집트와 히타이트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오늘날 시리아 서부의 성벽 도시 카데시 부근, 오론테스강 가에서 일어났다. 이집트군은 즉위 5년째인 파라오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군은 무와탈리 2세 왕이 이끌었다.
카데시가 유명한 이유는 셋이다. 첫째, 전술과 군대의 움직임이 자세히 전하는 세계사 최초의 전투다. 둘째, 모두 합쳐 5,000~6,000대의 전차가 나섰을 것으로 보여, 역사상 가장 큰 전차 전투였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몇 해 뒤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는데, 이는 양쪽의 판본이 모두 전하는 가장 오래된 평화 조약이다.
전투는 하마터면 이집트의 참패로 끝날 뻔했다. 람세스는 히타이트 첩자에게 속아 매복에 걸렸고, 진영을, 어쩌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이집트군은 전열을 되찾아 히타이트군을 몰아냈지만 카데시를 함락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 전투를 무승부로, 전략적으로는 히타이트의 승리로 본다.
쉬움
두 초강대국과 그 사이의 땅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200년경)에는 이집트,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그리고 그보다 앞서 미탄니 같은 큰 왕국들이 동지중해와 근동을 주름잡았다. 왕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형제’라 부르고, 선물을 교환하고, 딸들을 시집보냈다. 동시에 교역과 목재와 항구가 풍부한 레반트(오늘날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작은 도시국가들을 두고 다투었다.
히타이트는 수도 하투사를 중심으로 아나톨리아 중부(오늘날 튀르키예)를 다스렸다. 기원전 14세기 수필룰리우마 1세 때 미탄니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카데시와 아무루 왕국을 비롯한 시리아 북부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아마르나 시대에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약해진 이집트는 이 땅을 되찾고 싶어 했다.
새로 들어선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그 아들 람세스 2세는 군인 가문 출신으로, 아시아에서 이집트 제국을 되살리려 했다. 세티 1세는 가나안과 시리아로 원정해 한때 카데시를 점령했지만, 카데시는 다시 히타이트의 손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람세스 2세는 재위 4년에 북쪽으로 진군해 아무루를 이집트 편으로 되돌렸다. 히타이트에게 이것은 정면 도전이었고, 무와탈리 2세는 아무루를 되찾기 위해 대군을 모았다.
쉬움
두 군대와 전차
람세스의 군대는 아문, 레, 프타, 세트(수테크)라는 신의 이름을 딴 네 사단으로 이루어졌다. 사단마다 보병 수천 명과 전차 수백 대가 있었을 것이며, 오늘날 추정으로는 전체 병력이 약 2만 명, 전차는 적어도 2,000대였다. 이와 별도로 네아린(nrrn)이라는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이 가나안 군인이었는지 아무루에 주둔한 이집트 병사였는지는 논쟁 중이다. 이집트군에는 셰르덴 전사들도 있었는데, 뒤에 이름을 떨치는 ‘바다 민족’이 용병으로 처음 등장하는 기록 가운데 하나다.
이집트 전차는 가볍고 빨랐으며, 마부와 강력한 합성궁을 쏘는 궁수 두 사람이 탔다. 이집트 부조에서 히타이트 전차에는 마부, 창을 든 전사, 방패수 세 사람이 탄다. 더 무거운 히타이트 전차가 주로 돌격용이었는지, 이집트 화가들이 그 모습을 얼마나 정확히 그렸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여전히 논쟁이 있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무와탈리는 1차 공격에 전차 2,500대와 많은 보병을 동원했고, 여러 동맹국의 군대를 데려왔다. 람세스는 아르자와, 키주와트나, 알레포, 우가리트 등 약 19개 동맹 민족·국가를 나열한다. 람세스에게는 적을 거대하게 보이게 할 이유가 있었으므로 이 수치는 과장되었을 수 있지만, 무와탈리가 히타이트 세계 전체를 동원했음을 보여 준다.
중급
진군과 함정
재위 5년 봄, 람세스는 델타의 수도 피람세스를 떠나 국경 요새 차루(실레)를 지나 가나안을 거쳐 북쪽으로 진군했다. 약 한 달 뒤 군대는 남쪽에서 카데시에 다가갔는데, 사단들은 수 킬로미터에 걸친 긴 행렬로 흩어져 있었다. 람세스는 아문 사단과 함께 앞장섰고, 레 사단이 뒤따랐으며, 프타와 세트 사단은 아직 한참 뒤에 있었다.
카데시에서 약 11km 떨어진 샤브투나 남쪽에서 샤수(유목민) 두 사람이 이집트 진영에 찾아왔다. 그들은 히타이트에서 도망쳐 오고 싶다며, 히타이트 왕은 멀리 북쪽 알레포 부근에 있고 겁이 나서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람세스는 이 말을 믿고 서둘러 오론테스강을 건너 카데시 북서쪽에 진을 쳤다.
얼마 뒤 이집트 정찰병이 히타이트 병사 둘을 붙잡았다. 매질을 당한 그들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히타이트 왕과 그의 전군이 도시 반대편 ‘옛 카데시’ 뒤에 숨어 싸울 채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는 적을 찾지 못한 지휘관들을 꾸짖고, 다른 사단들을 서둘러 오게 하려고 전령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중급
전투
람세스가 아직 지휘관들과 회의하는 사이, 히타이트 전차 부대가 카데시 남쪽에서 오론테스강을 건너 진영으로 행군하던 레 사단의 옆구리를 들이쳤다. 트인 곳에서 기습당한 레 사단은 무너져 아문 사단의 진영이 있는 북쪽으로 달아났고, 히타이트 전차가 그 뒤를 쫓았다. 전차들은 이어 이집트 진영 자체로 돌진해 아문 사단을 공황에 빠뜨렸다.
이집트 기록에서 람세스는 이제 거의 혼자 남는다. “나와 함께 있는 지휘관도, 전차병도, 군대의 병사도 없었다.” 그는 아문 신에게 기도하고, 신이 응답하자 “제 때를 맞은 세트처럼” 거듭 적에게 돌진한다. 부조에는 거대한 람세스가 전차에서 활을 쏘고, 쓰러지는 히타이트 병사들이 무더기로 그려져 있다. 이 영웅적 그림 뒤에는 실제 사건이 있다. 왕과 호위대가 살아남은 전차들을 이끌고 반격에 나선 것이다.
붐비는 진영 안에서 히타이트의 공격은 기세를 잃었고, 많은 공격자가 약탈하느라 멈추었다. 그때 이집트 증원군이 도착했다. 아무루 쪽에서 온 네아린 부대가 히타이트군을 기습했다. 무와탈리는 고위 귀족들이 이끄는 약 1,000대의 전차를 2차로 보냈지만 이집트군은 버텼다. 뒤이어 프타 사단이 남쪽에서 다가왔다. 히타이트 전차는 오론테스강까지 밀려났다. 부조에는 사람과 말이 강물에 빠지고 건져지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는 물을 빼내려고 거꾸로 들려 있는 알레포의 군주도 있다.
무와탈리는 대규모 보병을 끝내 투입하지 않았고, 보병은 카데시 근처 동쪽 강변에 머물렀다. 그 이유는 논쟁거리다. 싸움터까지 너무 느렸을 수도, 도시를 지키려 했을 수도, 강을 건너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이튿날 싸움이 다시 벌어졌지만 결판은 나지 않았다.
중급
누가 이겼나?
람세스는 카데시를 포위하지 않았다. 둘째 날 뒤 그는 다마스쿠스 쪽으로 물러나 이집트로 돌아갔다. 그는 비문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히타이트 왕이 편지를 보내 평화를 애걸했다고 주장한다. 히타이트 쪽의 기억은 달랐다. 무와탈리는 이집트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의 속주 우피(다마스쿠스 일대)를 차지하고 동생 하투실리, 곧 훗날의 하투실리 3세에게 맡겼다. 아무루는 다시 히타이트 편이 되었고, 이집트 편에 섰던 아무루 왕 벤테시나는 폐위되어 히타이트 땅으로 끌려갔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대개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다고 결론짓는다. 군대가 괴멸될 수도 있었던 매복에서 벗어난 것은 람세스의 실제 성과였지만, 히타이트는 카데시와 아무루를 지킨다는 전략 목표를 이루었다. 히타이트사 전문가 트레버 브라이스는 이를 이집트의 전술적 성공이자 히타이트의 전략적 승리로 요약한다.
인명 피해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집트 기록은 무와탈리의 형제 두 명을 포함해 전사한 히타이트 귀족들을 나열하고, 수많은 적의 시신과 포로를 보여 준다. 무너진 레 사단을 비롯한 이집트 쪽 손실도 컸겠지만, 왕의 비문은 결코 이를 기록하지 않는다. 전쟁의 이면에는 두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밭과 마을이 있었고, 이후의 원정에서 포로로 끌려간 시리아 도시 사람들도 있었다.
중급
전쟁에서 최초의 평화 조약으로
싸움은 여러 해 계속되었다. 람세스는 재위 8년과 9년에 다시 시리아로 원정해 다푸르와 투니프를 점령했지만 오래 지키지 못했다. 그사이 히타이트는 안에서 위기를 맞았다. 무와탈리가 죽은 뒤 아들이 무르실리 3세(우르히테슈브)로 즉위했으나, 몇 해 뒤 삼촌 하투실리 3세에게 쫓겨났다. 동쪽에서는 아시리아가 힘을 키워 이집트와 히타이트 모두의 이익을 위협했다.
람세스 재위 21년, 기원전 1259년경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정식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영원한 평화와 형제 관계, 상호 불가침, 외적과 반란자에 맞선 동맹, 도망자의 송환을 정하고, 송환된 사람을 벌하지 않는다고 보장했다. 두 나라의 신들이 증인으로 불렸다. 조약은 이집트 상형문자 판본(카르나크와 라메세움)과 아카드어 쐐기문자로 쓴 히타이트 판본(하투사 출토)으로 모두 전해지므로, 역사가들은 둘을 비교하며 각자가 합의를 어떻게 제시했는지 볼 수 있다.
평화는 매우 길었던 람세스의 남은 치세 내내 지켜졌다. 히타이트의 왕비 푸두헤파는 이집트 궁정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람세스 재위 34년에는 히타이트 공주가 그의 아내로 이집트에 왔다. 히타이트 조약 점토판의 복제품은 오늘날 뉴욕의 유엔 본부에 초기 외교의 상징으로 걸려 있다.
중급
기억과 선전: 람세스는 어떻게 이야기했나
고대 근동에서 이만큼 많은 글과 그림으로 기록된 전투는 없다. 람세스는 이 이야기를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라메세움(테베에 있는 그의 장제전), 아부심벨 등 적어도 다섯 주요 신전의 벽에 새기게 했다. 기록은 크게 두 형태다. 이른바 ‘시(Poem)’는 ‘펜타우르의 시’라고도 하는데(파피루스 사본에 나오는 서기의 이름에서 왔다), 왕의 영웅적 행동과 아문 신에게 드린 기도를 중심으로 한 긴 문학적 서사다. 이른바 ‘보고문(Bulletin)’은 부조에 딸린 짧은 산문이다. 많은 설명문과 함께 이들은 진영, 첩자, 전투, 구원을 묘사한다.
이 기록들은 말 그대로 선전이다. 왕이 신들의 은총으로 홀로 세상의 질서를 혼돈에 맞서 지킨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역설적으로 이 이야기는 심각한 실수도 인정한다. 왕은 속았고, 지휘관들은 실패했으며, 군대는 달아났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가 왕의 용기를 더욱 빛나게 하고, 관리들을 벌한 일을 정당화하려 했을 수도 있다.
히타이트 쪽 시각은 간접적으로만 남아 있다. 전투를 서술한 히타이트 연대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투사에서 나온, 람세스가 하투실리 3세에게 보낸 편지는 람세스의 자랑에 대한 히타이트의 항의에 답하는 내용이다. 하투실리가 람세스의 승리 주장을 비웃었던 모양이다. 하투실리가 스스로의 생애를 변론한 글, 이른바 ‘변명(Apology)’은 대이집트 원정을 자기 경력의 일부로 언급한다. 히타이트에게 이 전쟁은 시리아 지배를 굳힌 성공이었다.
근대에도 이 전투는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되었다. 1903년 처음으로 학문적 재구성을 내놓은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를 비롯한 19~20세기 초 역사가들은 흔히 이집트 판본을 그대로 따랐다. 히타이트 문서가 해독된 뒤로 학자들은 히타이트 쪽에 더 무게를 두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람세스는 여전히 국가적 상징이고, 튀르키예에서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조약 점토판이 나라의 고대 유산으로 기려진다.
심화
학술 논쟁
연대. 전투 날짜는 람세스 2세 재위 5년, 셰무(여름) 셋째 달 9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오늘날의 날짜로 바꾸는 것은 신왕국 연대 체계에 달려 있다. 널리 쓰이는 ‘저연대’는 람세스의 즉위를 기원전 1279년, 전투를 기원전 1274년 5월로 본다. 지금은 덜 지지되는 더 높은 연대는 약 20년 앞선다. 천문 자료, 왕명표, 이집트의 방사성탄소 연대가 이 체계들을 검증하는 데 계속 쓰인다.
수치와 신뢰성. 히타이트 전차 2,500대와 1,000대, 동맹국 목록은 적을 크게 보일 이유가 충분했던 이집트 사료에서 나온다. 학자들은 이를 얼마나 믿을지 의견이 갈린다. 이집트군의 구성, 사단의 규모, 네아린의 정체(이집트인, 가나안인, 또는 정예 예비대)도 모두 논쟁 중이다. 히타이트 공격로와 이집트 진영의 위치를 재구성하는 일은 부조의 해석과 텔 네비 멘드 주변 지형에 달려 있다.
텍스트의 성격. 1960년에 중요한 편찬본을 낸 앨런 가디너를 비롯한 학자들은 ‘시’가 정말 운문인지 문학적 산문 서사인지, ‘보고문’ 및 부조와 어떤 관계인지 논의했다. 앤서니 스팔링어 등 후대 학자들은 여러 판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신전마다 어떻게 조정되었는지 연구했다. 핵심 방법론적 문제는 왕권 이데올로기에서 어떻게 군사사를 끌어낼 것인가이다.
전략적 해석. 어떤 역사가는 무와탈리를 완승 직전까지 갔다가 병력을 아끼는 쪽을 택한 유능한 지휘관으로 본다. 다른 이들은 양쪽의 실수를 강조하거나, 히타이트가 보병을 전투에 넣지 않은 것은 청동기 시대 지휘·통신의 한계를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더 넓게는 카데시가 전환점이었는지, 아니면 양쪽이 지치고 아시리아를 함께 두려워하게 되어서야 끝난 긴 투쟁의 한 장면이었는지가 문제다.
심화
사료와 증거
이집트 기념물.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라메세움, 아부심벨의 신전 벽에 ‘시’ 8벌과 ‘보고문’ 7벌이 부조와 함께 남아 있다. 일부 사본은 훼손되어 있어 편찬자들은 판본을 비교해 본문을 복원한다. ‘시’의 파피루스 사본, 특히 사예 파피루스 3번(Papyrus Sallier III)과 레페 파피루스(Papyrus Raifé)도 알려져 있어, 이 이야기가 서기들 사이에서 문학으로 읽혔음을 보여 준다.
히타이트 문서. 1906년부터 발굴된 하투사(오늘날 튀르키예의 보아즈칼레) 문서고에는 조약, 두 궁정이 주고받은 편지, 하투실리 3세의 ‘변명’ 같은 문헌이 있다. 이들은 전투를 직접 서술하지 않지만 그 결과와 히타이트의 해석을 보여 준다.
고고학. 흔히 고대 카데시로 보는 텔 네비 멘드는 발굴되었지만, 고대 전투가 대개 그렇듯 전장 자체에는 물리적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투탕카멘 무덤에서 나온 것을 비롯한 이집트 무덤의 전차 유물은 당시 기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표준 번역으로는 ‘시’와 ‘보고문’의 영어 번역을 담은 미리엄 리히트하임의 『고대 이집트 문학』 제2권(1976)과 가디너의 비문 편찬본이 있다. 히타이트 쪽 시각으로는 트레버 브라이스의 『히타이트 왕국』이 표준 개설서다.
핵심 개념
- 강대국 경쟁
- 이집트와 히타이트 제국은 시리아와 레반트의 도시국가들을 두고 다투었다.
- 전차전
- 말이 끄는 빠른 전차는 후기 청동기 시대 군대의 정예 타격 부대였고, 카데시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큰 전차 전투였다.
- 기만과 정보
- 히타이트 첩자의 거짓 정보가 람세스를 매복으로 이끌었다. 기록에 남은 가장 이른 군사 기만 가운데 하나다.
- 왕실 선전
- 람세스는 참패할 뻔한 전투를 이집트 곳곳의 신전 벽에 새긴 개인적 영웅담으로 바꾸었다.
- 전술적 무승부, 전략적 결과
- 이집트는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히타이트는 카데시와 아무루를 지켰다.
- 외교와 조약
- 계속된 교착 상태는 양쪽 판본이 모두 남은 정식 평화 조약으로 이어졌다.
- 양쪽 사료 읽기
- 이집트와 히타이트 문서를 견주면 두 나라가 같은 전쟁의 기억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인다.
기록
- 약 기원전 1350년 — 수필룰리우마 1세가 카데시와 아무루를 포함한 시리아 북부 대부분을 히타이트 지배 아래 둠.
- 약 기원전 1290년 — 세티 1세가 시리아로 원정해 한때 카데시를 차지함.
- 기원전 1279년 — 람세스 2세가 이집트 왕으로 즉위(저연대 기준).
- 기원전 1275년 — 재위 4년, 람세스가 북쪽으로 원정해 아무루를 이집트 편으로 되돌림.
- 기원전 1274년 — 5월, 람세스 2세와 무와탈리 2세의 카데시 전투.
- 약 기원전 1271년 — 람세스가 다시 시리아로 원정해 다푸르와 투니프를 점령하지만 곧 잃음.
- 약 기원전 1267년 — 하투실리 3세가 조카 무르실리 3세를 몰아내고 히타이트 왕이 됨.
- 기원전 1259년 — 람세스 재위 21년, 이집트–히타이트 평화 조약 체결.
- 약 기원전 1245년 — 람세스 재위 34년, 히타이트 공주가 그의 아내로 이집트에 옴.
- 1828년 — 샹폴리옹이 카르나크에서 조약의 이집트 판본을 연구함.
- 1903년 —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가 전투에 대한 첫 학문적 재구성을 발표함.
- 1906년 — 후고 빙클러의 하투사 발굴에서 조약의 히타이트 판본이 나옴.
용어 풀이
- 히타이트
- 아나톨리아 중부의 민족. 하투사를 수도로 제국(기원전 1650~1180년경)을 세웠다.
- 카데시
- 시리아 서부 오론테스강 가의 성벽 도시. 텔 네비 멘드로 비정된다.
- 아무루
-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서부에 있던 왕국.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충성을 두고 다투었다.
- 전차
- 말이 끄는 가벼운 두 바퀴 수레. 움직이는 전투 발판으로 쓰였다.
- 사단
- 이집트군의 큰 부대 단위. 카데시에서는 신의 이름을 딴 네 사단이 있었다.
- 네아린
- 가나안인 또는 이집트인이었을 부대. 이들의 도착이 이집트군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샤수
- 이집트인이 레반트의 반유목민을 부른 이름. 샤수 두 사람이 람세스에게 거짓 정보를 주었다.
- 시와 보고문
- 전투를 서술한 두 가지 주요 이집트 비문을 부르는 오늘날의 이름.
- 저연대
- 신왕국 연대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체계. 전투를 기원전 1274년으로 본다.
- 쐐기문자
- 점토판에 쐐기 모양으로 새긴 문자. 조약의 히타이트 사본은 아카드어로 쓰였다.
묻고 답하기
카데시 전투는 누가 이겼나요?
어느 쪽도 완전히 이기지 못했어요. 람세스는 함정에서 벗어나 히타이트군을 몰아냈지만, 히타이트는 카데시와 그 주변 땅을 지켰어요. 대부분의 역사가는 무승부로 봐요.
왜 카데시를 두고 싸웠나요?
카데시와 이웃 아무루 왕국은 시리아를 지나는 중요한 길목을 쥐고 있었어요. 이곳을 차지하면 레반트의 부유한 교역 도시들을 좌우할 수 있었지요.
전투 규모는 얼마나 컸나요?
전차 5,000~6,000대와 수만 명의 병사가 나섰을 것으로 보여, 아마 역사상 가장 큰 전차 전투였을 거예요. 수치는 주로 이집트 기록에서 나와 정확하지는 않아요.
람세스는 정말 혼자 싸웠나요?
비문은 그렇게 말하지만 이는 왕실 선전이에요. 실제로는 호위대와 살아남은 전차들을 이끌고 증원군이 올 때까지 돌격했을 거예요.
평화 조약은 왜 유명한가요?
양쪽 당사자의 판본이 모두 전하는 가장 오래된 평화 조약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는 이집트 상형문자, 하나는 아카드어 쐐기문자로 쓰였어요.
이집트 기록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자세하고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두었겠지만, 왕을 찬양하려고 쓴 글이에요. 역사가들은 히타이트 편지와 이후 사건들과 비교해 그 주장을 검증해요.
날짜는 왜 불확실한가요?
이집트 기록은 왕의 재위 연도로 날짜를 적어요. 이를 바꾸려면 이집트 왕들의 연대 체계가 필요한데, 체계마다 20년쯤 차이가 날 수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Battle of Kadesh. Wikipedia
- 카데시 전투. 위키백과
- Egyptian–Hittite peace treaty. Wikipedia
- Muwatalli II. Wikipedia
- Hattusili III. Wikipedia
- Ramesses II. Wikipedia
- Miriam Lichtheim, Ancient Egyptian Literature, Vol. 2: The New Kingdo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6
- Alan Gardiner, The Kadesh Inscriptions of Ramesses II. Griffith Institute, 1960
- Trevor Bryce, The Kingdom of the Hittites (new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 Mark Healy, Qadesh 1300 BC: Clash of the Warrior Kings. Osprey, 1993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