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2,350년 전,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는 페르시아 제국이었어요. 이집트와 튀르키예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었지요. 왕 다리우스 3세는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 수많은 민족을 다스렸어요.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 제국으로 쳐들어왔어요. 그는 이미 큰 전투에서 두 번이나 이겼지요. 다리우스는 제국 구석구석에서 군사를 모았어요. 중앙아시아의 기병, 활 쏘는 병사, 바퀴에 날카로운 칼날을 단 전차, 그리고 인도에서 온 코끼리 열다섯 마리까지요.
다리우스는 ‘낙타의 집’이라는 뜻의 가우가멜라 마을 근처 넓고 평평한 들판을 골랐어요. 전차가 마음껏 달릴 수 있게 일꾼들을 시켜 땅을 고르게 다듬었지요. 전투를 며칠 앞둔 밤, 월식이 일어나 달이 검붉게 변했어요. 양쪽 군대 모두 이것이 무슨 징조일까 궁금해했답니다.
전투 날,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옆으로 비스듬히 움직여 평평하게 다진 땅에서 벗어났어요. 페르시아 군대 줄에 빈틈이 생기자 그는 기병을 이끌고 곧장 다리우스를 향해 돌격했어요. 다리우스는 몸을 돌려 달아났고, 많은 페르시아 병사도 흩어졌어요.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병사들과 그 가족에게는 끔찍한 날이었어요.
가우가멜라 전투 뒤 바빌론과 수사 같은 페르시아의 큰 도시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성문을 열었어요. 몇 달 뒤 다리우스는 자기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오래된 페르시아 제국은 끝났고, 그리스 문화와 중동 문화가 뒤섞이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 날짜
- 기원전 331년 10월 1일(9월 20~21일의 월식이 날짜를 정하는 근거)
- 장소
-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과 아르빌(에르빌) 사이 니네베 평원의 가우가멜라 부근. 정확한 위치는 논란(텔 고멜과 카람레시가 유력 후보)
- 교전 세력
-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끈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 동맹군 대 다리우스 3세가 이끈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 지휘관
- 알렉산드로스, 파르메니온(마케도니아 좌익) / 다리우스, 베소스(페르시아 좌익), 마자이오스(페르시아 우익)
- 병력
- 마케도니아군 약 4만 7천 명. 페르시아군 규모는 불명(고대의 ‘백만 대군’ 기록은 과장, 현대 추정은 편차가 큼)
- 결과
- 마케도니아의 결정적 승리. 다리우스는 달아났다가 기원전 330년 자기 신하들에게 살해됨
- 영향
- 바빌론·수사 항복, 페르세폴리스 방화, 아케메네스 제국의 종말, 근동의 헬레니즘 시대 개막
- 주요 사료
- 아리아노스, 디오도로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플루타르코스, 유스티누스(모두 수백 년 뒤 저술), 동시대 바빌로니아 천문 일지
쉬움
가우가멜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가우가멜라 전투는 기원전 331년 10월 1일,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불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의 군대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3세의 군대가 맞붙은 싸움이다. 전장은 메소포타미아 북부, 오늘날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의 가우가멜라라는 마을 근처 넓은 평원이었다.
두 왕이 벌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전투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강에서 페르시아군을, 기원전 333년 이소스에서 다리우스 본인을 이미 물리쳤다.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가장 큰 군대를 자기가 고른 땅에 세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알렉산드로스가 이겼고 다리우스는 달아났다.
이 전투는 다리우스가 도망친 도시 아르벨라(오늘날 아르빌)의 이름을 따 ‘아르벨라 전투’로도 불린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와 아리아노스 같은 고대 저자들도 실제 전장은 그곳에서 꽤 떨어진 가우가멜라였다고 지적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이름이 ‘낙타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전한다.
쉬움
배경: 두 왕과 하나의 제국
기원전 6세기 키루스 대왕이 세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그때까지 세계에 나타난 가장 큰 국가였다. 왕은 사트라프라 불린 총독들을 통해 이집트와 아나톨리아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더스강 유역까지 여러 민족을 다스렸고, ‘왕의 길’이 수사·바빌론·엑바타나·페르세폴리스 같은 수도를 이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는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벌였고, 그 뒤로도 돈과 외교로 그리스 정세에 자주 개입했다.
기원전 4세기 필리포스 2세 치하의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최강국이 되었다. 필리포스는 한 세기도 더 전에 있었던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복수와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들의 해방을 내세워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했다. 그가 기원전 336년 암살당하자 스무 살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계획을 이어받았다. 같은 해 페르시아에서는 궁정 암살이 잇따른 끝에 다리우스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아시아로 건너갔다. 그라니코스와 이소스에서 이기고 다리우스의 어머니·아내·자녀를 사로잡은 뒤에도 그는 곧장 페르시아 심장부로 가지 않았다. 먼저 긴 포위 끝에 티로스를 함락하는 등 지중해 동부 해안을 차지하고, 이어 이집트로 가서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그리스 사료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영토와 딸을 내주겠다며 강화를 제안했으나 알렉산드로스가 거절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동쪽으로 진군했다.
중급
두 군대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중심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곧 길이 5~6미터의 장창 사리사를 든 밀집 보병이었다. 그 옆에는 정예 보병 히파스피스테스가, 양 날개에는 기병이 섰다. 기병 가운데 으뜸은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이끈 헤타이로이(동료 기병)와 테살리아 기병이었다. 아그리아니아의 투창병과 크레타 궁수 같은 경보병, 그리스 동맹군 보병과 용병이 전력을 채웠다. 아리아노스는 보병 약 4만, 기병 7천을 기록했는데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를 대략 맞는 수치로 받아들인다.
다리우스의 군대는 제국 전역에서 모였다. 아리아노스는 왕의 친족 기병과 근위대 ‘사과 운반병(멜로포로이)’을 포함한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인과 소그드인, 사카(스키타이) 기병, 적은 수의 코끼리를 거느린 인도인, 아라코시아인·아르메니아인·카파도키아인·시리아인·바빌로니아인 등과 그리스 용병 보병을 꼽는다. 다리우스는 또 적진을 깨뜨리려고 바퀴와 채에 칼날을 단 낫 전차 약 200대를 준비했다.
페르시아군은 얼마나 컸을까? 고대 저자들은 불가능한 숫자를 내놓는다. 아리아노스는 보병 100만과 기병 4만, 디오도로스는 보병 80만과 기병 20만, 쿠르티우스는 모두 약 24만 5천이라 적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를 부풀리려는 과장으로 보고, 추정치는 대략 5만에서 12만 사이에 흩어져 있을 만큼 편차가 크다. 다만 페르시아군이 기병이 훨씬 많고 전열이 더 길어 알렉산드로스를 측면에서 에워쌀 위험이 있었다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모인다.
중급
전투 이전: 행군, 월식, 기다림
기원전 331년 여름 알렉산드로스는 탑사코스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넜다. 그는 강을 따라 바빌론으로 내려가는 대신 보급이 낫고 덜 더운 북쪽 길을 택했고, 티그리스강도 저항 없이 건넜다. 9월 20~21일 밤 월식이 일어났다.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은 이를 일지에 기록했고, 그리스 사료는 알렉산드로스의 예언자 아리스탄드로스가 이를 마케도니아의 승리를 알리는 징조로 풀었다고 전한다.
다리우스는 가우가멜라 근처의 넓게 트인 평원을 골라 일부를 평평하게 다지게 했다. 전차와 기병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리아노스는 전투 뒤 페르시아군의 전투 서열을 적은 문서가 노획되었다고 전하며, 페르시아군의 자세한 배치는 알렉산드로스의 장교들을 거쳐 이 문서에서 나왔다고 한다.
다리우스의 전략을 두고도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그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도하 지점을 지키지 않고 알렉산드로스가 자기에게 오도록 두었다. 어떤 이는 이를 의도된 선택으로 본다. 산과 바다 사이의 좁은 땅 때문에 수적 우세를 살리지 못한 이소스의 경험 뒤에, 다리우스는 보급 기지와 가깝고 기병과 전차에 알맞은 탁 트인 땅에서 싸우고 싶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예상 밖으로 북쪽 길을 택하는 바람에 페르시아군이 위치를 옮겨 원래 계획하지 않은 곳에서 싸우게 되었다고 본다. 어느 쪽이든 두 왕 모두 전쟁이 한 번의 대전투로 결판나리라는 것을 받아들인 듯하다.
그리스 전승에 따르면 노장 파르메니온이 야습을 권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승리를 ‘훔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이 대화가 실제로 있었든 없었든, 야습을 두려워한 페르시아군은 밤새 무장한 채 서 있었고, 그래서 지친 상태로 전투에 나섰다고 전한다.
중급
전투의 경과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지휘하는 동료 기병을 오른쪽에, 팔랑크스를 가운데에, 테살리아 기병을 거느린 파르메니온을 왼쪽에 두었다. 페르시아의 전열이 더 길었기 때문에 첫 줄 뒤에 둘째 보병 줄을 세우고 양 끝 부대를 비스듬히 배치해, 포위되면 바깥쪽을 향해 싸울 수 있게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알렉산드로스는 오른쪽 날개를 이끌고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평평하게 다진 땅 밖으로 움직였다. 이를 막으려고 다리우스는 베소스가 이끄는 기병을 보내 그를 돌아 에워싸게 했고, 그쪽 측면에서 치열한 기병전이 벌어졌다. 낫 전차들이 마케도니아 중앙으로 돌진했지만 경보병이 마부와 말을 쏘아 쓰러뜨렸고, 보병은 대열을 열어 남은 전차를 통과시킨 뒤 뒤쪽에서 처리했다.
페르시아 기병이 측면으로 움직이자 페르시아군 좌중앙에 빈틈이 생겼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료 기병과 가까운 보병을 쐐기 대형으로 모아 그 틈을 뚫고 다리우스 본인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스 기록에서 다리우스는 몸을 돌려 달아난다. 반면 바빌로니아 일지는 왕의 군대가 왕을 버렸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든 왕이 전장을 떠나자 페르시아군 중앙은 무너졌다.
그사이 마케도니아 왼쪽은 큰 위기에 빠졌다. 페르시아와 인도 기병이 팔랑크스의 빈틈을 뚫고 마케도니아 군영의 짐수레까지 들이쳤고, 마자이오스는 파르메니온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파르메니온이 도움을 청하자 알렉산드로스는 추격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테살리아 기병이 이미 상황을 대체로 수습한 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추격에 나서 아르벨라까지 다리우스를 쫓았고, 왕의 짐과 전차와 활은 손에 넣었지만 다리우스는 놓쳤다.
중급
전투 이후: 제국의 몰락
고대 사료의 사상자 수는 믿기 어렵다. 아리아노스는 마케도니아 전사자를 100명 안팎, 페르시아 전사자를 엄청난 수로 적고, 다른 사료는 마케도니아 손실을 수백에서 천몇백 명, 페르시아 손실을 수만 명으로 적는다. 분명한 것은 페르시아군이 싸울 수 있는 군대로서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죽은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이 전쟁과 별 이해관계도 없는 먼 지방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다.
바빌론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 우익을 지휘했던 바로 그 마자이오스가 도시를 넘겨주고 사트라프로 다시 임명되었는데, 알렉산드로스에게서 이런 자리를 받은 첫 페르시아 귀족이었다. 거대한 보물고가 있던 수사도 뒤따랐다. 자그로스산맥의 ‘페르시아 관문’을 뚫은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0년 초 제국의 의례 중심지 페르세폴리스를 차지했다. 도시는 약탈당했고, 몇 달 뒤 대궁전들이 불탔다. 이것이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불태운 데 대한 계획된 복수였는지, 일부 고대 사료가 말하듯 술자리의 충동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다리우스는 엑바타나로,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며 새 군대를 모으려 했다. 기원전 330년 7월, 그는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베소스가 이끄는 자기 귀족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고, 베소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자칭하며 왕위에 올랐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왕의 예로 장사 지내고 자신을 그의 복수자이자 후계자로 내세웠다. 베소스는 기원전 329년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렇게 가우가멜라는 아케메네스 왕조 지배의 끝을 알렸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죽을 때까지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원정을 이어 갔다. 그의 제국은 곧 장군들이 다스리는 왕국들로 쪼개졌다.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의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이다. 이로써 그리스어와 그리스식 제도가 오래된 현지 전통과 나란히 근동 전역에 퍼진 헬레니즘 시대가 열렸다.
중급
기억: 그리스, 페르시아, 바빌로니아의 시각
가우가멜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승자 쪽에서 나왔다. 알렉산드로스의 궁정 역사가 칼리스테네스는 그를 찬양하는 기록을 썼고, 후대 저자들은 알렉산드로스 장교들의 회고록에 기댔다. 이소스와 가우가멜라에서 두 번이나 달아난 겁쟁이 다리우스라는 모습은 마케도니아의 선전에 쓸모가 있었다. 많은 현대 역사가는 다리우스가 비범한 적수를 만난 유능한 통치자였으며 그리스 사료가 그를 부당하게 그렸다고 본다.
이란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전혀 다르게 기억되었다. 훨씬 뒤에 중세 페르시아어로 쓰인 조로아스터교 문헌은 그를 ‘저주받은 알렉산드로스’라 부르며 사제를 죽이고 성스러운 글을 없앤 자로 비난한다. 1010년 무렵 피르다우시가 완성한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는 또 다른 길을 택한다. 이스칸다르(알렉산드로스)를 다라(다리우스)의 이복형제로 만들어, 정복자를 정통 이란 왕으로 편입한 것이다. 이런 전승은 정복의 기억이 후대의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에 맞게 어떻게 다시 빚어졌는지를 보여 준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이 전투는 세상의 끝이 아니라 지배자의 교체를 뜻했다. 바빌로니아 천문 일지는 패배, 왕의 군대의 도주, ‘세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바빌론 입성을 행성의 움직임을 적을 때와 똑같이 담담한 문체로 기록한다. 신전과 서기와 현지 엘리트는 새 주인 아래에서도 계속 제 역할을 했다.
유럽에서 가우가멜라는 군사사의 고전이 되었다. 더 작지만 잘 훈련된 군대가 기동, 타이밍, 결정적 지점에 대한 전력 집중으로 더 큰 군대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수백 년 동안 사관학교에서 연구되었다. 알렉산드로스를 찬양하는 그림과 영화에도 여러 번 등장했지만, 페르시아 쪽 시각은 좀처럼 담기지 않았다.
심화
사료와 그 문제점
목격자의 서술은 남아 있지 않다. 가장 자세한 기록은 전투 후 거의 500년이 지난 2세기에 아리아노스가 쓴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아나바시스)』 3권이다. 아리아노스는 주로 알렉산드로스의 장군이었다가 뒤에 이집트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와 원정에 동행한 아리스토불로스의 기록에 기댔다고 밝힌다. 두 사람 모두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썼고, 이야기를 다듬을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다른 주요 서술은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의 17권(기원전 1세기),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4권(아마 1세기),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드로스 전기』, 유스티누스의 발췌본이다. 디오도로스·쿠르티우스·유스티누스는 극적인 서술로 이름난 역사가 클레이타르코스 같은 공통 원천을 쓴 것으로 흔히 여겨진다. 이 기록들은 병력 수, 파르메니온이 도움을 청한 시점, 다리우스의 행동 같은 세부에서 서로 다르다.
유일한 동시대 사료는 바빌로니아 쪽에 있다. 바빌론 학자들이 기록한 천문 일지(현재 대영박물관 소장)는 월식, 전투, 왕의 군대의 이탈, 알렉산드로스의 바빌론 접근을 적고 있다. 사건과 가까운 시점에 쓰였고 알렉산드로스를 미화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전투 날짜를 정하고 다리우스의 행동에 관한 그리스 쪽 그림을 바로잡는 데 매우 귀중하다.
고대 기록의 몇몇 세부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전투 전 연설, 야습을 두고 파르메니온과 나눈 대화, 강화를 제안한 다리우스의 편지 등은 실제 기억을 담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로마 역사 서술의 관습에 따라 빚어진 문학적 장면이다.
심화
학계의 논쟁
정확히 어디인가? 전장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고, 고대 사료도 지형을 정확히 알려 주지 않는다. 제안된 후보지는 모두 모술과 아르빌 사이 니네베 평원의 제벨 마클루브 산등성이 주변에 있다. 이름이 ‘가우가멜라’와 연결된 텔 고멜, 그리고 1938년 현지를 조사한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이 지지한 카람레시 등이다. 최근 연구는 지형과 가시성 모델링으로 후보지들을 검토하지만, 전투의 흔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은 얼마나 컸고, 왜 졌는가? 고대의 숫자를 버린 뒤 역사가들은 페르시아군의 실제 규모와 질을 두고 논쟁한다. 어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비스듬한 전진과 쐐기 돌격이라는 전술적 탁월함을 강조한다. 다른 이는 페르시아 쪽 문제를 강조한다. 함께 훈련한 경험이 적은 여러 민족의 군대였고, 밤새 무장한 채 서 있어 지쳤으며, 왕의 존재에 크게 의존했다는 것이다. 군대가 왕을 버렸다는 바빌로니아 일지의 기록을 근거로 일부 학자는 왕의 개인적 도주보다 사기의 붕괴가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다리우스의 평판. 피에르 브리앙은 『알렉산드로스의 그늘 속 다리우스(Darius in the Shadow of Alexander)』(하버드대학교 출판부, 2015)에서 약하고 비겁한 다리우스라는 이미지가 고대와 근현대 역사 서술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추적했다. 그의 연구와 다른 아케메네스 전문가들의 작업은 이 제국을 알렉산드로스의 희생물로만 보지 말고 페르시아어·바빌로니아어·아람어 자료로 그 자체로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해방인가, 정복인가? 예전 유럽 학계는 흔히 알렉산드로스를 동방에 그리스 문명을 전한 인물로 그렸다. 최근의 많은 역사가, 예컨대 A. B. 보즈워스는 『정복과 제국(Conquest and Empire)』(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 1988)에서 정복의 폭력과 현지 주민이 치른 대가, 그리고 마케도니아 지배 아래에서도 이어진 아케메네스 행정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핵심 개념
- 결정적 전투
- 한 번의 전투 결과가 정치 지도를 바꾼 경우. 가우가멜라는 아케메네스 제국을 강대국으로서 끝냈다.
- 제병 협동
- 알렉산드로스는 중보병·기병·경보병에게 저마다 역할을 맡겨 한데 움직였다.
- 비스듬한 전진과 빈틈
- 오른쪽으로 움직여 페르시아 기병을 끌어낸 뒤, 생겨난 빈틈으로 결정적 돌격을 했다.
- 전장의 선택
- 다리우스는 좁은 땅에서 진 이소스의 교훈을 살려, 수적 우세와 기병·전차를 쓸 수 있는 평평하고 트인 땅을 골랐다.
- 왕의 존재
- 아케메네스 군대에서 왕은 군대의 구심점이었다. 다리우스가 전장을 떠나자 군대의 결속이 무너졌다.
- 승자의 역사
- 서술 사료는 거의 모두 그리스·로마 쪽이며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하다. 바빌로니아 일지가 드문 독립적 시각을 준다.
- 정복 뒤의 연속성
- 알렉산드로스는 마자이오스 같은 페르시아 총독과 아케메네스 제도를 유지하며 정복과 연속성을 섞었다.
기록
- 기원전 336년 —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이 되다. 다리우스 3세가 페르시아 왕이 되다.
- 기원전 334년 —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로 건너가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이기다.
- 기원전 333년 — 알렉산드로스가 이소스에서 다리우스를 물리치고 다리우스의 가족을 사로잡다.
- 기원전 332년 — 티로스 포위전.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에 들어가다.
- 기원전 331년 —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우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너다.
- 기원전 331년 — 9월 20~21일: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이 월식을 기록하다.
- 기원전 331년 — 10월 1일: 가우가멜라 전투, 다리우스가 달아나다. 곧이어 바빌론과 수사가 항복하다.
- 기원전 330년 —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세폴리스를 차지하고 궁전들이 불타다. 7월 다리우스가 베소스 등 귀족들에게 살해되다.
- 기원전 329년 — 베소스가 붙잡혀 뒤에 처형되다.
- 기원전 323년 —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죽다.
- 약 130년 — 아리아노스가 전투에 관해 현존하는 가장 자세한 기록인 『알렉산드로스 원정기』를 쓰다.
- 1938년 — 오렐 스타인이 이라크 북부를 조사한 뒤 전장 위치를 제안하다.
용어 풀이
- 아케메네스 제국
- 키루스 대왕이 세우고(기원전 550년경)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으로 끝난(기원전 330년) 페르시아 제국.
- 사트라프
- 페르시아 제국의 지방 총독.
- 팔랑크스
- 중보병의 밀집 대형.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아주 긴 창을 썼다.
- 사리사
-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병사가 든 길이 5~6미터의 장창.
- 헤타이로이(동료 기병)
-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이끈 마케도니아의 정예 중기병.
- 낫 전차
- 바퀴에 칼날을 단 전차. 페르시아군이 적의 대열을 깨뜨리려고 썼다.
- 천문 일지
- 바빌로니아 학자들이 밤하늘 관측을 적은 기록. 물가·날씨·정치적 사건도 함께 적었다.
- 헬레니즘 시대
- 알렉산드로스 이후(기원전 323~31년) 그리스계 왕국들이 지중해 동부와 근동에 퍼진 시기.
- 아나바시스
- ‘내륙으로의 진군’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리아노스가 쓴 알렉산드로스 원정사의 제목.
묻고 답하기
페르시아군이 더 많았는데 왜 알렉산드로스가 이겼나요?
군대가 잘 훈련되고 손발이 잘 맞았으며, 공격할 때와 곳을 스스로 골랐어요. 다리우스가 전장을 떠나자 페르시아군은 중심을 잃었지요. 밤새 무장한 채 서 있던 페르시아 병사들이 지쳐 있었던 것도 이유였어요.
다리우스는 정말 도망쳤나요?
그리스 저자들은 그가 달아났다며 겁쟁이로 그립니다. 반면 당시 쓰인 바빌로니아 기록은 군대가 왕을 버렸다고 말해요. 많은 역사가는 그리스 쪽 묘사가 공정하지 않다고 봅니다.
낫 전차가 뭔가요?
바퀴에 날카로운 칼날을 단 전차예요. 적의 대열을 베어 가르려고 만들었지만, 가우가멜라에서는 마케도니아 경보병이 마부를 많이 쏘아 쓰러뜨렸고 보병이 길을 열어 그냥 지나가게 했어요.
정확한 날짜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고대 사료는 전투가 월식 11일 뒤에 벌어졌다고 합니다.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이 그 월식을 기록했고, 현대 천문학으로 그 월식이 기원전 331년 9월 20~21일 밤이었음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전장은 발견되었나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모술과 아르빌 사이 니네베 평원으로 보며 텔 고멜과 카람레시가 유력 후보이지만, 전투의 고고학적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란에서는 알렉산드로스를 어떻게 기억하나요?
여러 방식입니다. 일부 조로아스터교 문헌은 성스러운 학문을 없앴다며 그를 ‘저주받은 자’라 부르고, 『샤나메』는 그를 다라의 이복형제 이스칸다르로 그려 이란 왕의 계보에 넣습니다.
왜 ‘아르벨라 전투’라고도 부르나요?
다리우스가 전투 뒤 아르벨라(아르빌)로 달아났기 때문에, 실제 전장은 가우가멜라였는데도 일부 고대·근대 기록에 그 이름이 붙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가우가멜라 전투. 위키백과
- Battle of Gaugamela. Wikipedia
- Gaugamela (331 BCE). Livius.org
- Battle of Gaugamela. World History Encyclopedia
- Darius III. Wikipedia
- Arrian. Wikipedia
- Arrian, Anabasis (그리스어 원문, A. G. Roos 편). Perseus Digital Library, Tufts University
- Pierre Briant, Darius in the Shadow of Alexander.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 A. B. Bosworth, Conquest and Empire: The Reign of Alexander the Grea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