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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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과테말라의 깊은 열대우림에서는 거대한 돌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나무 위로 불쑥 솟아 있어요. 고함원숭이가 울고 앵무새가 날아다니지요. 이곳이 바로 티칼이에요. 오늘날에도 중앙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마야 사람들이 세운 도시랍니다.
가장 번성했을 때 티칼과 그 주변에는 수만 명이 살았어요. 왕의 궁전, 의식을 치르는 넓은 광장, 신성한 공놀이를 하던 경기장, 시장, 집과 밭이 있었지요. 가장 높은 신전은 약 70미터로, 20층 건물만큼 높아요.
마야 사람들에게는 그림처럼 생긴 기호로 된 자기만의 글자가 있었어요. 이 글자를 ‘석비’라는 키 큰 돌에 새겨 누가 왕이었는지, 언제 태어났는지, 어떤 전쟁에서 이겼는지, 어떤 신을 섬겼는지 남겼지요. 지금은 전문가들이 이 기호를 대부분 읽을 수 있어서 티칼 왕들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어요.
티칼에게는 칼라크물이라는 큰 맞수 도시가 있었어요. 두 도시는 수백 년 동안 싸우고, 다른 도시들과 편을 맺으며 서로 가장 강해지려 했어요. 한번은 티칼이 크게 져서 백 년 넘게 날짜를 새긴 기념물을 세우지 못하고 큰 건물도 훨씬 덜 지었지만, 새 왕이 큰 승리를 거두자 도시는 전보다 더 커졌어요.
약 1,100년 전 사람들은 서서히 도시를 떠났고, 숲이 도시를 덮었어요. 하지만 마야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에요. 그 후손들은 지금도 마야어를 쓰며 그 지역에 살고 있고, 티칼은 유적과 숲속 야생동물을 함께 지키는 국립공원이 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 무엇
- 신전·궁전·광장·저수지와 수천 개의 건조물을 갖춘 고전기 마야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
- 장소
- 과테말라 북부 페텐주의 저지대 열대림
- 옛 이름
- 약스 무탈(‘첫 번째 무탈’). 도시의 문장 문자(엠블럼 글리프)로 확인된다
- 거주 시기
-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농경 마을, 기원전 400–300년 무렵부터 대형 건축, 전성기는 약 200–900년
- 주요 사건
- 테오티우아칸과 연결된 시야흐 카크의 도착(378), 패배와 ‘공백기’(562), 칼라크물에 대한 승리(695), 마지막 연대 기념물(869)
- 가장 높은 건물
- 4호 신전, 약 70m. 고대 아메리카에서 손꼽히게 높은 건축물
- 인구
- 추정치 차이가 크다. 후기 고전기 전성기에 약 1만 명에서 많게는 9만 명
- 지위
- 국립공원(1955), 유네스코 세계유산(1979)
쉬움
티칼은 어떤 곳인가
티칼은 과테말라 북부 페텐 지역에 있는 마야 대도시의 유적이다. 페텐은 열대림으로 덮인 낮고 평평한 땅이다. 티칼은 고전기(대략 250–900년) 마야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 시기에는 오늘날의 멕시코 남부,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에 걸쳐 수십 개의 마야 왕국이 경쟁했다.
‘티칼’은 근대에 붙은 이름으로, 흔히 유카텍 마야어로 ‘물웅덩이에서’라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이 도시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비문에서 왕국을 무탈 또는 약스 무탈이라고 불렀다. 이는 왕의 칭호에 들어가 왕국을 구별해 주던 특별한 기호, 곧 ‘문장 문자’로 알 수 있는데, 일종의 가문 문장과 비슷하다.
오늘날 방문객이 보는 곳은 도시의 의례 중심부다. 가파른 신전 피라미드, 방이 많은 궁전, 넓은 광장, 공놀이 경기장, 줄지어 선 조각 석비가 있다. 그러나 티칼은 단순한 종교 중심지가 아니었다. 고고학자들은 숲속으로 멀리 퍼져 나간 수천 채의 집과 저수지, 둑길, 밭을 지도에 담아, 이곳이 진정한 도시였음을 보여 주었다.
티칼은 195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9년 고고학 유적과 주변 열대우림을 함께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쉬움
도시를 ‘읽는’ 법
한가운데에는 대광장이 있다. 광장 동쪽에는 ‘큰 재규어의 신전’이라고도 하는 높이 약 47m의 1호 신전이 서 있고, 서쪽에서는 2호 신전이 그것을 마주 본다. 1호 신전은 티칼의 가장 위대한 왕 가운데 하나인 자사우 찬 카윌 1세의 장례 기념물로, 그의 무덤이 그 깊은 곳에 있다. 두 신전이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서, 광장의 의식은 왕과, 흔히 왕비로 여겨지는 인물의 기념물 사이에서 치러졌다.
광장 북쪽에는 북쪽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쌓아 올린 기단으로, 대대로 왕들이 묻혔고 새 건물이 케이크 층처럼 옛 건물을 덮었다. 광장 남쪽의 중앙 아크로폴리스는 왕실과 귀족이 살고 일하던 궁전 방과 안뜰이 미로처럼 얽힌 곳이다.
더 서쪽에는 티칼에서 가장 높은 약 70m의 4호 신전이 솟아 있다. 꼭대기에 오르면 다른 신전들의 지붕 장식(루프콤)이 떠오른 숲의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남서쪽의 ‘문도 페르디도(잃어버린 세계)’ 단지는 티칼의 선고전기 의례 건축군 가운데 가장 크다. 유명한 고전기 신전들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이 도시가 중요했음을 보여 준다.
높이 쌓은 넓은 둑길(사크베)이 주요 건축군을 이었다. 티칼은 ‘쌍둥이 피라미드 단지’로도 유명하다. 마야 달력에서 약 20년에 해당하는 카툰 주기가 끝난 것을 기념해 윗면이 평평한 피라미드 두 개를 짝지어 세운 것이다. 단지마다 세운 석비와 제단에는 의식을 치른 왕이 기록되었다.
쉬움
열대우림 도시의 삶
페텐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티칼 근처에는 큰 강이 없고, 한 해의 일부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티칼 사람들은 저수지를 만들어 이 문제를 풀었다. 포장한 광장과 경사면이 빗물을 돌로 쌓은 커다란 저수조로 모았다. 고고학자들은 건기에 도시의 생존에 꼭 필요했던 주요 저수지를 약 열 곳 확인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옥수수, 콩, 호박을 기르는 농민이었고, 숲에서 과일과 사냥감, 목재도 얻었다. 최근 이 지역의 레이저 측량은 계단식 밭, 수로, 돋운 밭을 보여 준다. 마야 사람들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경관을 대규모로 바꾸었다는 증거다.
마야에는 수백 개의 기호로 이루어진 문자가 있었다. 어떤 기호는 낱말 전체를, 어떤 기호는 음절을 나타냈다. 서기들은 나무껍질 종이에 책을 그려 썼고, 조각가들은 석비·제단·상인방에 비문을 새겼다. 이들은 ‘장기력(롱 카운트)’이라는 정밀한 달력으로 사건의 날짜를 하루 단위까지 기록했다. 수십 년에 걸친 해독 덕분에 역사가들은 이제 도시의 기념물에서 티칼 왕조의 역사를 직접 읽을 수 있다.
중급
마을에서 왕국으로
기원전 1000년 무렵 티칼 주변에 첫 농민들이 자리 잡았다. 대규모 건축은 기원전 400–300년 무렵 시작되었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발굴단은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티칼이 이미 ‘제대로 돌아가는’ 공동체였다고 결론지었다. 선고전기 후기에는 문도 페르디도 단지와 초기 북쪽 아크로폴리스가 이미 기념비적 규모였다.
후대 통치자들은 왕조의 시조를 약스 에브 쇼크라는 인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아마 1세기나 2세기에 살았을 것이다. 왕조는 왕의 대수를 꼼꼼히 셌고, 뒤의 왕들은 이 계보에서 자신이 몇 번째인지 자랑스럽게 밝혔다. 고전기 전기(약 250–550년)에 티칼은 저지대의 선도 도시로 성장해, 북쪽으로 20km쯤 떨어진 와샥툰 같은 이웃과 경쟁했다.
초기 왕들은 북쪽 아크로폴리스에 무덤을 만들고, 신성한 권력의 상징을 든 화려한 차림의 자기 모습을 새긴 석비를 세웠다. 마야의 왕은 신과 조상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도시의 의례 생활은 왕실 의식, 피를 바치는 공양, 달력 주기의 기념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중급
378년: 서쪽에서 온 이방인
378년 1월, 티칼과 주변 도시들의 비문은 서쪽에서 온 시야흐 카크(‘불이 태어나다’)라는 인물의 ‘도착’을 기록한다. 같은 날 티칼의 왕 차크 토크 이차크 1세가 죽었다. 1년이 안 되어 약스 누운 아인 1세가 티칼의 새 왕으로 즉위했는데, 비문은 그를 ‘창던지개 올빼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인물의 아들로 묘사한다. 이 인물의 이름은 1,000km 넘게 떨어진 멕시코 중부의 대도시 테오티우아칸과 연결된 상징으로 쓰였다.
이 사건 이후 티칼과 다른 마야 도시들에 테오티우아칸 양식이 나타난다. 멕시코 중부식 무기와 머리 장식을 한 전사, 토기 모양, 탈루드-타블레로 건축 양식이다. 시야흐 카크는 와샥툰을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상위 군주로 등장해, 저지대 권력이 넓게 재편되었음을 시사한다.
약 70년 뒤 약스 누운 아인의 아들 시야흐 찬 카윌 2세는 31호 석비를 세웠다. 석비에는 마야 왕의 차림을 한 그와, 테오티우아칸 전사 차림으로 양옆에 선 아버지가 새겨져 있다. 뒷면의 긴 글은 이 시기를 알려 주는 핵심 사료다. 이 기념물은 티칼 통치자들이 뒷날 바깥 세력과의 연결을 권위와 정통성의 원천으로 내세웠음을 보여 준다.
중급
두 강대국의 전쟁: 티칼과 칼라크물
고전기 역사는 티칼과 칸울(‘뱀’) 왕조의 경쟁이 지배한다. 칸울 왕조는 7세기부터 오늘날 멕시코 남부의 칼라크물을 도읍으로 삼았다. 어느 도시도 마야 세계 전체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대신 저마다 동맹국과 종속국의 연결망을 만들었고, 그 다툼은 두 초강대국의 경쟁에 비유되곤 한다.
562년 티칼은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왕 와크 찬 카윌은 붙잡혀 죽임을 당했을 수 있지만, 정확한 최후는 확실하지 않다. 카라콜의 비문이 이 전쟁을 기록하는데, 지금 많은 학자는 승자가 ‘하늘의 증인’이라 불리는 칸울 왕이었고 카라콜은 그 동맹이었다고 본다. 이어 티칼에서는 연대를 새긴 기념물이 하나도 세워지지 않고 큰 규모의 건축도 크게 줄어든 백 년 넘는 시기, 이른바 ‘티칼 공백기’가 이어졌다.
7세기에 칼라크물의 왕 유크눔 체엔 2세(재위 636–686)는 강력한 동맹을 쌓았다. 티칼 왕가의 왕자가 세운 도스 필라스가 칼라크물 편으로 돌아서 티칼과 싸웠고, 같은 왕실의 두 갈래가 적이 되었다.
695년 티칼의 왕 자사우 찬 카윌 1세(재위 682–734)가 칼라크물의 통치자 유크눔 이차크 카크를 물리치면서 형세가 바뀌었다. 티칼은 힘을 되찾았고, 자사우와 그의 아들 이킨 찬 카윌은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다. 자사우의 장례 신전인 1호 신전과, 흔히 이킨 찬 카윌과 연결되고 8세기 중엽으로 연대가 잡히는 4호 신전이 이 부흥기의 산물이다.
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티칼은 유라시아와 접촉이 없었으므로, 그 역사는 비문과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그 자체로 읽어야 한다. 멀리 테오티우아칸과 이어진 시야흐 카크가 도착한 378년의 격변, 그리고 칸울 왕조와의 오랜 경쟁이 그 뼈대다. 그래도 이 연대를 세계의 다른 곳과 나란히 놓는 데는 다른 의미가 있다. 마야가 로마·페르시아·중국의 제국들과 같은 시기에, 그들과 전혀 무관하게 문자와 천문학과 기념비적 도시를 스스로 발전시켰음을 떠올리게 해 주기 때문이다.
티칼이 패배한 562년,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마지막 가야 왕국을 병합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다시 지은 하기아 소피아의 돔이 봉헌되었다. 비슷한 무렵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페르시아 왕 호스로 1세는 긴 평화 조약을 맺었다. 티칼이 칼라크물의 그늘에 들어간 것처럼, 지중해와 서아시아도 비잔티움과 페르시아라는 두 강대국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티칼의 긴 공백기는 잉글랜드 서튼후에서 한 왕이 묻힌 일(625년 무렵), 무함마드의 메디나 이주(622) 뒤 이슬람의 등장, 중국 당나라의 건국(618)과 겹친다. 695년 자사우 찬 카윌이 칼라크물을 꺾었을 때, 신라는 당과의 전쟁 끝에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거대한 대명궁을 품은 당의 수도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티칼의 마지막 연대 기념물은 869년에 새겨졌다. 같은 세기에 당나라는 기울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이 이미 후손들 사이에 나뉘어 있었다. 마야 저지대 왕들의 위대한 시대가 저무는 동안, 유카탄 북부에서는 치첸이트사 같은 도시가 성장하고 있었다.
중급
왕도의 끝
8세기에 티칼은 가장 컸지만, 남부 마야 저지대 곳곳에서는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연대를 새긴 기념물의 수는 750년 무렵 해마다 수십 개에서 900년 무렵에는 하나도 없을 만큼 급격히 줄었다. 티칼의 마지막 연대 기념물은 869년에 새겨졌고, 950년 무렵 도시 중심부는 대부분 버려졌다. 그 뒤에도 한동안 작은 무리가 폐허 사이에서 살았다.
역사가들은 한때 갑작스럽고 신비로운 ‘붕괴’를 말했다. 오늘날에는 마야 문명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변동’이나 ‘단절’ 같은 말을 선호하는 이가 많다. 치첸이트사와 뒤의 마야판 같은 북부 도시들이 번성했고, 지금도 수백만 명의 마야인이 멕시코·과테말라·벨리즈에 살며 서른 가지쯤 되는 마야어를 쓴다.
남부 도시들이 쇠퇴한 원인으로는 오래 이어진 가뭄, 왕국들 사이의 끝없는 전쟁, 인구 과밀과 삼림 파괴, 교역로의 변화, 비와 풍요를 더는 보장하지 못하는 왕에 대한 신뢰 상실 등이 거론된다. 티칼에서는 저수지 연구에서 붉은 안료로 쓰인 진사(辰砂)에서 나온 수은과 조류 번성 같은 오염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건기에 일부 물은 마시기 위험했을 수 있다.
중급
재발견, 발굴, 그리고 새 기술
지역 주민과 치클(껌 원료) 채취꾼들은 숲속 폐허를 알고 있었지만, 티칼이 공식 기록에 오른 것은 1848년 과테말라 관리 모데스토 멘데스와 암브로시오 투트가 이끈 탐사대가 이곳에 도착하면서였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탐험가들이 신전을 촬영했고, 조각한 나무 상인방 일부를 떼어 유럽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1956년부터 1969년까지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은 티칼에서 아메리카 대륙 최대 규모의 고고학 사업 가운데 하나를 벌였다. 현장 책임자는 윌리엄 코였다. 사업단은 도시 중심부를 측량하고 북쪽 아크로폴리스를 발굴했으며 주요 신전을 복원한 뒤, 책임을 과테말라에 넘겼다. 이어 과테말라 고고학자들이 문도 페르디도 조사를 비롯한 자체 사업을 이어 갔다.
2018년에는 항공 레이저 측량(라이다)을 쓴 연구팀이 페텐 지역 2,100㎢ 이상을 조사한 결과를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레이저가 숲 지붕을 ‘꿰뚫어’ 보자, 지도에 없던 수만 개의 건조물과 함께 티칼 주변의 둑길, 밭, 방어 시설이 드러났다. 이 결과는 저지대가 이전 연구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인구가 많고 농사도 집약적이었음을 시사한다.
티칼은 대중문화에도 등장한다. 신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1977년 영화 「스타워즈」에서 반란군 기지로 나왔다. 관광은 과테말라에 수입을 가져다주지만, 보존 문제와 마야 공동체가 자기 유산에서 어떤 혜택을 얻는지에 대한 질문도 불러온다.
심화
여러 관점
378년은 정복인가 동맹인가? 비문을 읽은 금석학자 데이비드 스튜어트 등은 시야흐 카크의 ‘도착’이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테오티우아칸과 연결된 통치자를 세운 군사 개입이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은 테오티우아칸의 영향이 378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점, 마야 지배층이 자신의 위세를 위해 외래 상징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증거가 정치 동맹이나 혼인 관계, 교역 관계와도 들어맞을 수 있다고 본다. 티칼 지배층 유골에 대한 과학 분석도 양쪽에서 근거로 쓰였다. 이 문제는 지금도 활발히 논쟁 중이다.
562년 티칼을 꺾은 것은 누구인가? 카라콜의 21호 제단에 대한 이전 판독은 카라콜에서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이 내세운 것으로, 이 전쟁을 주로 카라콜의 승리로 보았다. 사이먼 마틴 같은 금석학자들의 뒤의 판독은 칸울 왕 ‘하늘의 증인’을 주된 승자로, 카라콜을 그 동맹으로 본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지역 전쟁이냐, 두 지역 강대국의 대결이냐로 그림이 바뀌기 때문이다.
남부 도시들은 왜 쇠퇴했는가? 기후학자들은 9세기의 심한 가뭄을 기록한 호수 퇴적물과 동굴 생성물을 근거로 들고, 2018년의 한 연구는 강수량이 40–50%가량 줄었다고 추정했다. 많은 고고학자는 가뭄을 주요 요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이미 전쟁·사회적 불평등·환경 압박으로 약해진 사회를 덮쳤다는 점, 도시마다 쇠퇴 시기가 달랐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80가지가 넘는 설명이 나왔고, 대부분의 학자는 여러 원인이 겹쳤다고 본다.
누구의 역사인가? 1848년 외부인이 찾아낸 ‘잃어버린 도시’나 ‘사라진’ 문명을 말하는 서술은 그 지역에 남아 있던 마야 사람들과 폐허에 대한 현지의 지식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과테말라의 마야 단체들은 티칼 같은 유적을 어떻게 해석하고 쓸지, 의식을 치르는 일을 포함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티칼을 고고학 유적으로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마야 유산의 일부로 보여 주는 것이 이제 많은 연구자의 중요한 목표다.
심화
증거와 방법: 숲속 도시를 읽는 법
티칼의 역사는 신중하게 결합해야 하는 두 종류의 증거에 기대고 있다. 비문은 이름·날짜·사건을 알려 주지만, 왕이 주문해 만든 것이어서 왕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승리와 포로는 기록하지만 패배는 드물게만 적는다. 반면 고고학은 집, 음식, 무덤, 건축 단계, 곧 통치자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보여 준다. 예컨대 562년 이후의 ‘공백기’는 연대 기념물이 없다는 점과 대형 건축이 멈췄다는 점 모두에서 드러난다.
1970–80년대 이후 문자 해독은 이 분야를 바꾸어 놓았다. 그전에는 마야 비문이 주로 달력과 천문을 다룬다고 믿는 학자가 많았다. 문자가 마야 입말과 왕실 역사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티칼 같은 도시는 이름 있는 왕과 동맹과 전쟁으로 이루어진 정치사를 갖게 되었다. 사이먼 마틴과 니콜라이 그루베의 마야 왕조 개설서 같은 연대기가 이런 판독을 모아 정리하지만, 개별 구절의 해석은 계속 바뀌고 있다.
인구 추정은 특히 어렵다. 티칼의 인구는 도시의 경계를 어디로 긋는지, 같은 시기에 사람이 산 집이 몇 채였는지, 한 집에 몇 명이 살았는지에 따라 약 1만 명에서 9만 명까지 달라진다. 라이다는 알려진 건조물의 수를 크게 늘렸지만, 연대를 알려면 여전히 발굴이 필요하다. 라이다 연구팀은 후기 고전기 저지대에 대략 700만–1,100만 명이 살았을 수 있다고 추정했는데, 다른 연구자들이 이 수치를 계속 검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건물의 연대는 흔히 함께 나온 비문, 토기 양식,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기댄다. 그래서 자료마다 1호 신전 등의 연대와 높이가 조금씩 다르다. 증거가 불확실할 때는 정확한 숫자보다 범위를 제시하는 것이 신중한 서술이다.
핵심 개념
- 신성 왕권
- 마야 왕은 신과 조상과 특별히 이어져 있다고 주장했고, 신전·석비·의식이 이 신성한 권위를 표현했다.
- 문장 문자(엠블럼 글리프)
- 왕국 이름을 담은 왕의 칭호. 티칼 왕들은 ‘무탈의 신성한 군주’였다.
- 도시국가들의 경쟁
- 고전기 마야 정치는 여러 왕국의 연결망이었고, 일부는 티칼과 칼라크물이라는 두 맞수를 중심으로 묶였다.
- 바깥 세계와의 연결
- 정확한 성격이 무엇이든 테오티우아칸과의 연결은 티칼 통치자에게 위세를 주었고, 378년 이후 미술과 정치를 바꾸었다.
- 물 관리
- 강이 없는 티칼은 포장된 면에서 빗물을 모으는 저수지에 기대어 살았다.
- 소멸이 아닌 변동
- 남부의 왕도들은 9–10세기에 쇠퇴했지만, 마야 사람들과 문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 숲을 꿰뚫어 보기
- 라이다 측량은 숲 지붕 아래 숨은 티칼의 주거지·도로·밭의 실제 규모를 드러냈다.
기록
- 약 기원전 1000년 — 티칼 일대에 첫 농경 마을이 생긴다(선고전기 중기).
- 약 기원전 400년 — 대규모 건축이 시작된다. 이후 몇 세기 동안 문도 페르디도와 북쪽 아크로폴리스가 커진다.
- 378년 — 1월 14일 시야흐 카크가 ‘도착’하고, 같은 날 차크 토크 이차크 1세 왕이 죽는다. 곧 약스 누운 아인 1세가 왕이 된다.
- 445년 — 시야흐 찬 카윌 2세가 왕조의 역사와 테오티우아칸과의 연결을 새긴 31호 석비를 세운다.
- 562년 — 티칼이 큰 패배를 당하고, 와크 찬 카윌 왕은 붙잡혀 죽임을 당했을 수 있다. 백 년 넘는 ‘공백기’가 시작된다.
- 약 648년 — 티칼 왕가의 한 갈래가 다스리던 도스 필라스가 칼라크물의 영향 아래 들어가 티칼과 싸운다.
- 695년 — 자사우 찬 카윌 1세가 칼라크물의 왕 유크눔 이차크 카크를 물리치고, 티칼의 부흥이 시작된다.
- 734년 — 자사우 찬 카윌 1세가 세상을 떠나고, 몇 해 뒤 그의 무덤 위에 1호 신전이 세워진다.
- 869년 — 티칼의 마지막 연대 기념물이 세워진다.
- 약 950년 — 도시 중심부가 대부분 버려진다.
- 1848년 — 모데스토 멘데스와 암브로시오 투트가 이끈 탐사대가 유적을 기록한다.
- 1956년 —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티칼 사업이 시작된다(1969년까지).
- 1979년 — 티칼 국립공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 2018년 — 『사이언스』에 실린 페텐 지역 라이다 측량이 티칼 주변 주거지의 규모를 드러낸다.
용어 풀이
- 석비(스텔라)
- 흔히 왕의 모습과 날짜·사건을 적은 비문을 새긴 키 큰 돌판.
- 글리프
- 마야 문자의 기호. 낱말을 나타내는 것도, 음절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 장기력(롱 카운트)
- 정해진 기준일부터 날수를 세어 정확한 날짜를 적을 수 있게 한 마야 달력.
- 카툰
- 7,200일, 약 20년에 해당하는 마야 달력의 주기.
- 아크로폴리스
- 여기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신전이나 궁전을 지어 올린 거대한 기단.
- 루프콤(지붕 장식)
- 마야 신전 꼭대기에 올린 높은 돌 장식벽.
- 탈루드-타블레로
- 비스듬한 벽 위에 수직 판을 얹는 멕시코 중부의 건축 양식으로, 테오티우아칸과 연결된다.
- 사크베(둑길)
- 마야 도시의 여러 부분을 잇는, 높이 쌓고 회반죽을 바른 길.
- 라이다(LiDAR)
- 항공기에서 레이저를 쏘아 식생 아래 지표면을 측정하는 기술.
- 고전기
- 왕들이 기념물에 업적을 기록한 약 250–900년의 마야 역사 시기.
묻고 답하기
마야 사람들은 사라졌나요?
아니요. 남부의 큰 왕도들은 버려졌지만, 지금도 수백만 명의 마야인이 중앙아메리카에 살며 마야어를 씁니다.
티칼의 신전은 얼마나 높나요?
4호 신전은 약 70m, 1호 신전은 약 47m입니다. 높은 기단 위에 지어 숲 위로 솟아 있습니다.
티칼 왕들의 이름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왕들이 이름·칭호·날짜를 돌 기념물에 새겼고, 지금은 학자들이 마야 문자를 대부분 읽을 수 있습니다.
378년에 테오티우아칸이 티칼을 정복했나요?
비문은 시야흐 카크의 도착과 왕의 교체를 기록하고, 많은 학자가 테오티우아칸과 연결된 개입으로 봅니다. 하지만 정복인지, 동맹인지, 그 중간인지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사람들은 왜 티칼을 떠났나요?
가뭄, 전쟁, 땅과 물에 대한 압박, 통치자에 대한 신뢰 상실 같은 여러 문제가 함께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 요인들이 어떻게 겹쳤는지 지금도 연구 중입니다.
티칼에는 몇 명이 살았나요?
도시를 어떻게 정의하고 집을 어떻게 세느냐에 따라 약 1만 명에서 9만 명까지 추정이 다릅니다.
라이다는 티칼에 대해 무엇을 바꾸었나요?
걸어서 조사해 그린 지도보다 훨씬 많은 집·도로·밭·방어 시설이 도시와 그 주변에 있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Tikal. Wikipedia
- Tikal (Expedition Magazine). Penn Museum, University of Pennsylvania
- Tikal. World History Encyclopedia
- Siyaj K'ak'. Wikipedia
- Calakmul. Wikipedia
- Classic Maya collapse. Wikipedia
- Lasers reveal a vast, sophisticated Maya civilization under the Guatemalan jungle. Brown University, 2018
- Simon Martin and Nikolai Grube, Chronicle of the Maya Kings and Queens. Thames & Hudson, 2000 (2nd ed. 2008)
함께 보기
- 테오티우아칸멕시코 중부의 고대 대도시로, 거대한 도로와 피라미드, 넓은 주거 단지가 남아 있다.
- 마야 문자낱말 기호와 음절 기호를 결합한 마야의 표어음절 문자.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스페인 정복 때까지 쓰였고, 20세기 후반에 대부분 해독되었다.
- 치첸이차유카탄반도의 주요 마야 도시로, 여러 세기에 걸쳐 건물들이 세워지고 사용되었다.
- 포폴 부세계의 기원과 신성한 인물, 조상의 역사를 전하는 키체 마야의 이야기다.
- 서튼후잉글랜드 동부의 7세기 초 왕실 묘역으로, 1호분에서 금·석류석 장신구와 비잔티움 은기로 가득한 27미터 배 무덤이 나왔다.
- 하기아 소피아532년부터 537년까지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지은 대성당이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