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치첸이트사

Chichʼen Itzaʼ (Chichén Itzá, 치첸이차)

약 600–1200년 · 유카탄반도 치첸이차

한 문장으로

치첸이트사는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있던 고대 마야의 가장 크고 강력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깃털 달린 뱀 신의 계단식 피라미드, 거대한 구기장, 신성한 우물로 유명하다.

치첸이트사
이미지: Daniel Schwen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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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오래전,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오기 전에 마야 사람들은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숲속에 커다란 도시들을 세웠어요.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가 치첸이트사예요. 이름은 ‘이트사족의 우물 입구에서’라는 뜻인데, 땅속 자연 우물 둘레에서 도시가 자라났기 때문이에요.

유카탄에는 땅 위를 흐르는 강이 거의 없어요. 빗물은 바위 사이로 스며들어 땅속으로 흘러요. 어떤 곳은 땅이 푹 꺼져서 물이 가득 찬 깊고 둥근 구멍이 생겼는데, 이것을 세노테라고 해요. 사람들은 마실 물을 얻으려고 세노테가 필요했고, 세노테가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믿었어요.

도시 한가운데에는 네 면 모두에 계단이 있고 꼭대기에 작은 신전이 있는 피라미드가 서 있어요. ‘엘 카스티요’, 또는 깃털 달린 뱀 신 쿠쿨칸의 신전이라고 불러요. 계단을 모두 세고 꼭대기 단을 더하면 365, 곧 1년의 날수가 돼요. 봄과 가을 오후에는 햇빛이 계단 옆에 그림자를 만드는데, 마치 커다란 뱀이 꿈틀거리며 아래의 돌 뱀 머리까지 내려오는 것처럼 보여요.

이 도시에는 고대 멕시코에서 가장 큰 구기장도 있어요. 축구장보다 길어요. 선수들은 무거운 고무공을 엉덩이로 쳐서 벽 높은 곳에 달린 돌 고리에 넣으려고 했어요. 이 경기는 운동이면서 신성한 의식이기도 했어요.

치첸이트사는 약 1,000년 전에 가장 강했어요. 나중에는 힘이 약해졌지만 마야 사람들은 이곳을 잊지 않았고, 지금도 그 주변에는 마야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고대 유적 가운데 하나예요.

한눈에 보기

시기
고전기 후기(약 600년)에 이미 취락 형성. 전성기 약 800–1100년(종말 고전기–후고전기 전기). 지역 패권은 대략 1100–1200년 무렵 끝남
장소
멕시코 유카탄주 티눔 지역, 마야 북부 저지대
건설자
이트사 집단을 포함한 유카텍 마야. 멕시코 중부와 긴밀히 연결
규모
건물이 밀집한 중심부만 최소 5km². 구기장 13곳 확인
주요 유적
쿠쿨칸 신전(엘 카스티요, 높이 약 30m), 대구기장(168 × 70m), 전사의 신전, 엘 카라콜, 라스 몬하스, 성스러운 세노테
비문 연대
상형문자 연대 832–998년
지위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대 도시 치첸이트사’(1988). 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INAH) 관리
의의
고전기 붕괴 뒤 마야 북부 저지대 최대의 수도. 마야와 멕시코 중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유적

쉬움

치첸이트사는 무엇인가

치첸이트사는 유카탄반도 북부, 오늘날 메리다시에서 동쪽으로 약 115km 떨어진 곳에 있는 거대한 마야 도시의 유적이다. 유카텍 마야어 이름 ‘치첸 이차(Chichʼen Itzaʼ)’는 보통 ‘이트사족의 우물 입구에서’로 옮긴다. 이트사는 북부 저지대의 유력한 혈통 집단이었다. 마야 문헌에는 ‘우크 야브날’이라는 더 오래된 이름도 남아 있는데, 뜻은 논란이 있다. (한국어 표기는 ‘치첸이차’로도 쓴다.)

도시는 땅 위에 강이 없는 평평한 석회암 평원에 세워졌다. 물은 지하 강이나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 생긴 자연 함몰 구멍, 세노테에서 얻었다. 유적 안에는 세노테가 여럿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중앙 피라미드 북쪽의 ‘성스러운 세노테’다.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치첸이트사는 유카탄 북부의 패권 세력으로서 바닷길과 육로의 교역로를 장악했다. 건물에는 지역 마야 양식과 함께 멕시코 중부, 특히 툴라를 떠올리게 하는 형식이 섞여 있다. 이 혼합 때문에 치첸이트사는 메소아메리카 고고학에서 가장 논쟁이 많은 유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멕시코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기념물 가운데 하나다.

[3][1][2][6]

쉬움

도시를 ‘읽는’ 법: 기단, 둑길, 양식

치첸이트사는 한꺼번에 지어진 도시가 아니다. 중심부만 최소 5km²에 이르며, 평평하게 고른 기단 위의 건물군들이 ‘삭베’(복수형 삭베오브, ‘흰 길’)라 부르는 회칠한 둑길로 이어져 있다. 한때 낮은 담이 건물군을 나누었다.

남쪽에는 오래된 구역이 있다. ‘라스 몬하스(수녀원)’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궁전 단지였을 가능성이 큰 건물군, 아캅 드집, ‘카사 콜로라다(붉은 집)’, 고고학자들이 ‘옛 치첸’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이곳 건물은 대부분 유카탄 북부의 푸크 양식으로, 아랫벽은 민무늬이고 윗벽은 기하학 무늬와, 흔히 비의 신 차크로 보는 코가 긴 신의 가면을 돌 모자이크로 덮었다. 이 구역에 모여 있는 상형문자 비문에는 9세기의 통치자 ‘칵우파칼’과 여러 귀족의 이름이 나온다.

북쪽의 거대한 인공 기단 위에는 방문객에게 익숙한 기념물들이 서 있다. 쿠쿨칸 신전(엘 카스티요), 대구기장, ‘천 개의 기둥’ 군과 이어진 전사의 신전, 해골 기단(촘판틀리), 심장을 먹는 독수리와 재규어로 장식된 기단 등이다. 이 건물들의 열주, 깃털 달린 뱀 기둥, 비스듬히 누운 차크몰 석상, 전사의 도상은 멕시코 중부 툴라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 이 광장에서 북쪽으로 약 270m의 둑길이 성스러운 세노테까지 이어진다.

두 구역 사이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둥근 탑을 얹은 ‘엘 카라콜(달팽이)’이 있다. 안쪽 나선 계단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창문들이 금성과 다른 천체의 위치에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여 흔히 천문대로 해석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는 여전히 논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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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쿠쿨칸 신전과 빛의 뱀

스페인 사람들이 ‘엘 카스티요(성)’라 부른 쿠쿨칸 신전은 꼭대기 신전까지 높이 약 30m인 계단식 피라미드다. 9단의 기단이 있고 네 면에 계단이 하나씩 있다. 깃털 달린 뱀 쿠쿨칸은 멕시코 중부의 케찰코아틀과 가까운 마야의 신이다. 북쪽 계단 아래에는 커다란 뱀 머리 조각이 놓여 있다.

피라미드에는 마야 달력이 담겨 있다. 계단마다 약 91단이 있어, 91 × 4에 꼭대기 단 하나를 더하면 태양년의 날수 365(마야력 ‘하아브’)가 된다. 각 면의 9단 기단은 계단으로 나뉘어 18개 부분이 되는데, 이는 하아브력의 18개 ‘달’과 맞아떨어진다. 이 숫자들을 얼마나 의도했는지는 고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지만, 건축과 시간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춘분과 추분 무렵 늦은 오후, 계단식 모서리가 북쪽 계단 옆면에 삼각형 그림자를 줄지어 드리우면서 뱀의 몸통이 아래쪽 돌 머리와 이어지는 모습이 나타난다. 수천 명이 이를 보러 모인다. 다만 이 현상은 분점 전후 몇 주 동안 볼 수 있어서 날짜를 정확히 표시하는 방법이 되지 못했으리라는 지적도 있어, 일부러 설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엘 카스티요 안에는 더 오래된 피라미드가 숨어 있다. 1930년대 멕시코 고고학자들이 터널을 뚫고 들어가, 차크몰 한 점과 붉게 칠하고 비취를 박은 재규어 모양 옥좌가 있는 이전 신전을 찾아냈다. 최근의 물리 탐사로 더 이른 건축 단계와 피라미드 밑의 세노테도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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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대구기장과 성스러운 세노테

치첸이트사에서는 구기장이 13곳 발견되었다. 길이 168m, 너비 70m인 대구기장은 고대 메소아메리카에서 알려진 가장 큰 구기장이다. 약 8m 높이의 벽 한가운데 높은 곳에 돌 고리가 하나씩 박혀 있다. 선수들은 단단한 고무공을 엉덩이로 쳤고, 공을 고리에 통과시키는 일은 아주 드물었을 것이다. 벽 아래 부조에는 두 팀의 선수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는 목이 잘린 선수에게서 뿜어 나온 피가 뱀과 꽃피는 식물로 변하는 장면이 있다. 구기는 운동이면서 우주적 투쟁, 풍요, 희생과 이어진 종교적·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성스러운 세노테는 지름 약 60m의 거의 둥근 함몰 구멍으로, 깎아지른 벽이 수면까지 약 27m 떨어진다. 도시가 쇠퇴한 뒤에도 여러 세기 동안 순례지였다. 1560년대에 글을 쓴 프란치스코회 수사 디에고 데 란다는 가뭄 때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 사람을 산 채로 보물과 함께 던져 넣었다고 전했다.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땅 주인이던 미국인 에드워드 H. 톰프슨이 세노테 바닥을 준설해 금·구리·비취 장신구, 토기, 코팔 향, 나무 유물, 직물, 사람 뼈를 건져 올렸다. 상당수는 하버드 대학 피보디 박물관으로 보내졌고, 일부는 뒤에 멕시코로 돌아왔다. 1960년대 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INAH)의 감독 아래 이루어진 수중 조사에서도 더 많은 유물이 나왔다. 유물은 치첸이트사가 중앙아메리카의 금처럼 먼 곳에서 온 봉헌물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세노테에서 나온 인골에는 남녀 어린이와 어른이 모두 있다. 폭력의 흔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뒤 안치되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식민지 시대 기록은 도시의 전성기보다 한참 뒤에 스페인 사람의 시각으로 쓰였으므로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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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도시를 세운 사회: 교역, 전쟁, 합의 통치

치첸이트사는 ‘고전기 마야 붕괴’(대략 800–950년)로 티칼, 칼라크물 같은 남부 저지대의 대도시들이 쇠퇴하던 때에 떠올랐다. 반대로 북부에서는 욱스말, 에크발람, 코바, 치첸이트사 같은 도시가 한동안 번성했다. 10세기에 치첸이트사는 코바와 야수나 같은 경쟁 도시를 누르거나 압도하고 유카탄 북부와 중부 대부분을 지배했다.

부는 교역과 공납에서 나왔다. 북쪽 해안의 항구 이슬라 세리토스를 통해 반도를 도는 카누 교역에 참여하며, 멕시코 중부의 흑요석, 더 북쪽의 터키석, 중앙아메리카 남부의 금, 해안의 소금과 면화 등을 얻었다. 정복하거나 동맹한 공동체의 공납이 통치자와 건설을 뒷받침했다.

통치 방식은 논쟁 중이다. 비문에는 9세기의 유력한 군주 칵우파칼이 나온다. 일부 학자는 도시 후기에 신성한 왕 한 명이 아니라 유력 혈통들의 합의체, 뒤에 ‘물테팔’이라 불린 체제가 다스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좀 더 전형적인 왕권을 본다. 개별 왕의 초상 대신 전사 도상이 넘쳐 나는 모습은 무사 집단과 엘리트 집단이 권력을 나눈 사회와 잘 어울린다.

주민은 마야 세계 여러 지역, 어쩌면 멕시코 중부에서 온 사람까지 섞인 다양한 구성이었을 것이다. 2024년에 발표된 유전체 연구는 성스러운 세노테 근처 지하 저장고(출툰)에 묻힌 아이들을 분석해, 모두 남자아이였고, 일란성 쌍둥이 두 쌍을 포함해 가까운 친척이 섞여 있었으며, 지역 마야 집단 출신으로 오늘날 이 지역 마야인과 유전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밝혔다.

[3][8][9]

중급

쇠퇴, 정복, 그리고 기억

고고학 증거로 보면 치첸이트사의 지역 수도 역할은 1100년 무렵, 어쩌면 조금 뒤에 끝났다. 건설이 멈추고 권력이 옮겨 갔다. 후대 마야 연대기인 『칠람 발람』의 책들은 마야판의 통치자 후낙 셀이 치첸이트사를 무너뜨렸다고 전하지만,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마야판이 13세기에 패권 도시가 되기 전에 치첸은 이미 쇠퇴했다고 본다. 연대기는 역사, 예언, 정치를 뒤섞고 있어 연대를 고고학과 맞추기 어렵다.

치첸이트사는 잊힌 적이 없다. 성스러운 세노테는 계속 순례지였고, 사람들도 이 지역에 계속 살았다. 1530년대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아들)가 치첸이트사에 스페인 도시를 세우려 했으나, 마야인의 저항으로 1534년 물러나야 했다. 유카탄은 1540년대에야 정복되었다. 1562년 마니에서 마야 책들을 불태우라고 명한 디에고 데 란다가, 역설적으로 치첸이트사에 관한 핵심 기록 가운데 하나를 남겼다. 땅은 스페인인의 목장에 편입되었다.

19세기에 이 유적은 존 로이드 스티븐스의 『유카탄 여행기』(1843)와 프레더릭 캐서우드의 삽화를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데지레 샤르네, 오거스터스와 앨리스 르 플론전 부부, 테오베르트 말러, 앨프리드 모즐리 같은 사진가와 탐험가가 뒤를 이었다. 1875년 오거스터스 르 플론전이 비스듬히 누운 석상을 발굴해 ‘차크몰’이라 불렀고, 이 이름은 지금 메소아메리카 전역의 같은 유형 석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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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발굴, 복원, 그리고 소유권

1894년 유카탄 주재 미국 영사 에드워드 톰프슨이 유적을 포함한 ‘아시엔다 치첸’을 사들였다. 성스러운 세노테 준설과 유물 반출 때문에 멕시코 정부는 1926년 그를 절도 혐의로 고발하고 땅을 압류했지만, 1944년 멕시코 대법원은 그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판결했고, 상속인들은 땅을 관광 개척자 페르난도 바르바차노 페온에게 팔았다.

1924년부터 워싱턴 카네기 연구소가 멕시코 정부의 허가를 받아 실바너스 몰리를 중심으로 전사의 신전, 엘 카라콜 등을 발굴·복원했고, 같은 시기 멕시코 정부 고고학자들은 엘 카스티요와 대구기장을 맡았다. 오늘날 방문객이 보는 복원된 도시는 이 사업들의 결과다. 일부 복원은 증거가 허락하는 것보다 더 완전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고, 2007년 상업적 온라인 투표로 엘 카스티요가 ‘신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뽑혔다. 주요 기념물 아래의 땅은 2010년 유카탄주가 사들이기 전까지 개인 소유였고, 고고학 구역은 INAH가 관리하는 연방 재산이다. 대규모 관광은 지역에 수입을 주지만 기념물에 부담도 준다. 2006년부터 엘 카스티요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적에서 일하는 많은 공예가와 상인을 포함한 지역 마야 공동체는 조상의 유산에 관한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하기를 요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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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종교적 의미와 유산

건설자들에게 치첸이트사는 신성한 풍경이었다. 쿠쿨칸 신전은 네 세노테가 이루는 십자의 대략 한가운데에 서 있어, 하늘과 땅과 물의 지하 세계를 잇는 축으로 여겨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후대 메소아메리카 전통은 문명과 정통 왕권이 시작된 위대한 도시 ‘톨란(갈대의 땅)’을 이야기하는데, 많은 학자는 치첸이트사가 동쪽 세계의 톨란으로 여겨졌다고 본다.

오늘날 치첸이트사는 멕시코의 국가적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마야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교과서, 영화, 관광 홍보에 등장하고, 엘 카스티요의 분점 모임은 현대의 의식이 되었는데, 때로는 마야 종교와 거의 관계없는 뉴에이지적 해석이 덧씌워지기도 한다. 오늘날 이 일대에 사는 유카텍 마야인과 마야 민족 전체에게 이곳은 사라진 민족의 유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산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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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톨텍, 연대, 희생

톨텍의 정복인가, 공유된 문화인가. 20세기 초 학자들은 치첸이트사 북부 건물과 멕시코 중부의 톨텍 수도 툴라의 건물이 놀랍도록 닮았다는 데 주목했다. 케찰코아틀(쿠쿨칸)이 툴라를 떠나 유카탄에 왔다는 후대 전설과 결합해, 1000년 무렵 톨텍 침입자들이 치첸이트사를 정복하고 옛 마야 도시 위에 ‘톨텍-마야’ 도시를 세웠다는 이론이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후반부터 많은 고고학자는 그 대신 엘리트 사이의 원거리 교류, 깃털 달린 뱀 숭배를 중심으로 한 공유된 ‘국제’ 양식, 나아가 영향이 툴라에서 치첸으로가 아니라 치첸에서 툴라로 흘렀을 가능성까지 제시했다.

연대. 전통적 모델은 유적을 이른 ‘마야’(푸크) 단계와 늦은 ‘톨텍’ 단계로 나누었다. 토기 연구, 방사성탄소 연대, 비문 재분석을 거치며 많은 전문가는 두 양식이 시기적으로 상당히 겹치며 주요 건설 대부분이 약 800–1000년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도시 쇠퇴의 연대와 마야판과의 관계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INAH의 안내문은 지금도 마야와 톨텍 문화의 융합이라는 틀로 도시를 설명한다.

희생과 해석. 치첸이트사의 인신 희생은 도상, 해골 기단, 일부 인골로 입증되지만, 세노테에 처녀를 던졌다는 대중적 이미지는 증거보다 식민지 시대와 19세기 낭만주의 서술에 더 기대고 있다. 지하 출툰에 묻힌 소년들에 관한 2024년 연구 같은 최근의 생물고고학·유전학 연구는 죽은 이들이 누구였고 어떻게 선택되었는지 물을 수 있게 했지만, 의례의 맥락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갈린다.

천문학. 엘 카스티요와 엘 카라콜이 태양과 금성에 맞춰진 방향은 세심한 관측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지만, 어떤 방향이 의도된 것인지, 분점의 뱀이 달력 표지로 설계되었다는 것 같은 대중적 주장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는 학자마다 다르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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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와 연구 방법

비문. 치첸이트사의 상형문자 기록은 남부 고전기 도시보다 적고, 대부분 약 832–998년의 것이다. 금석학자들은 이를 통해 귀족들, 불의 의식 같은 의례, 건물의 옛 이름을 밝혀냈다. 후기 북부 기념물에 비문이 드물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 양식이 바뀌었다는 증거다.

식민지 시대 문헌. 란다의 기록, 『칠람 발람』, 그 밖의 식민지 문서는 마야인의 기억과 스페인인의 관찰을 간직하지만, 정복 뒤 새로운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예언과 역사를 섞는 경우가 많다. 고고학과 함께 비판적으로 써야 한다.

고고학과 과학. 발굴, 토기 편년, 방사성탄소 연대, 인골 분석(동위원소와 고대 DNA), 전기 비저항 탐사와 라이다(항공 레이저 측량) 같은 물리 탐사가 유적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물리 탐사는 발굴 없이 세노테와 숨은 건축 단계를 찾아냈고, 라이다는 관광 구역 너머까지 뻗은 취락을 드러냈다.

복원의 문제. 방문객이 보는 것의 상당 부분은 1920–1940년대에 다시 쌓은 것이다. 연구자는 발굴 보고서와 초기 사진으로 원래 부분과 복원 부분을 가려야 한다. 치첸이트사는 고고학적 해석, 국가 정체성, 관광이 함께 고대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 온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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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세노테
지하수가 드러난 자연 함몰 구멍. 유카탄 생활의 바탕이자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신성한 입구.
깃털 달린 뱀
쿠쿨칸(멕시코 중부의 케찰코아틀). 치첸이트사의 종교·정치 상징의 중심에 있는 신.
달력으로서의 건축
엘 카스티요의 계단과 기단은 365일 태양년과 18개 달을 반영한다.
구기
우주적 투쟁, 풍요, 희생의 신성한 의미를 지닌 메소아메리카의 경기.
마야와 멕시코 중부의 교류
양식의 혼합이 정복, 이주, 공유된 엘리트 문화 가운데 무엇을 반영하는지가 핵심 질문이다.
종말 고전기의 변화
남부 마야 도시가 쇠퇴할 때 치첸이트사가 떠오른 것은 마야 ‘붕괴’가 문명의 끝이 아니라 지역적 재편이었음을 보여 준다.
살아 있는 유산
마야는 사라진 민족이 아니며, 유적은 지금 살아 있는 마야 공동체의 유산이다.

기록

  1. 약 600년 — 고전기 후기에 치첸이트사에 취락이 자리 잡는다.
  2. 832년 — 유적에 기록된 가장 이른 상형문자 연대.
  3. 869년 — 카사 콜로라다 비문이 도시 귀족들의 불의 의식을 기록한다.
  4. 약 900년 — 치첸이트사가 유카탄 북부의 패권 세력이 되고, 북쪽 대기단에 주요 건설이 이루어진다.
  5. 998년 — 오사리오 신전에 남은, 알려진 가장 늦은 상형문자 연대.
  6. 약 1100년 — 지역 수도 역할이 끝나지만 성스러운 세노테는 순례지로 남는다.
  7. 1534년 —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아들)의 스페인군이 치첸이트사 정착 시도를 포기한다.
  8. 1843년 — 존 로이드 스티븐스와 프레더릭 캐서우드가 『유카탄 여행기』를 펴낸다.
  9. 1904년 — 에드워드 톰프슨이 성스러운 세노테 준설을 시작한다(1910년까지).
  10. 1924년 — 카네기 연구소가 대규모 발굴과 복원을 시작한다.
  11. 1988년 —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12. 2010년 — 유카탄주가 주요 기념물 아래의 땅을 개인 소유주에게서 사들인다.

용어 풀이

마야
멕시코 남부와 중앙아메리카의 원주민으로, 마야어족 언어를 쓰며 3,000년 넘게 문명을 이어 왔다.
세노테
석회암 지대에서 지하수가 드러난 자연 함몰 구멍.
삭베
회칠해 돋운 마야의 둑길. 글자 그대로 ‘흰 길’.
푸크 양식
아랫벽은 민무늬, 윗벽은 모자이크로 꾸민 유카탄 북부의 건축 양식.
차크몰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배 위에 접시를 든 석상. 마야와 멕시코 중부 유적에서 발견된다.
촘판틀리
죽은 이, 흔히 희생자의 해골을 늘어놓은 틀이나 기단.
하아브력
20일짜리 달 18개와 5일을 더한 마야의 365일 태양력.
종말 고전기
남부 마야 도시가 쇠퇴하고 북부 도시가 떠오른 약 800–1000년의 시기.
메소아메리카
유럽인이 오기 전 멕시코 중·남부와 중앙아메리카 북부의 문화권.
INAH
고고 유적을 관리하는 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

묻고 답하기

치첸이트사는 누가 세웠나요?

이트사족을 포함한 유카탄 북부의 마야 사람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세웠어요. 미술에는 멕시코 중부와의 강한 연결도 보여요.

엘 카스티요의 계단은 정말 365개인가요?

네 계단마다 약 91단이 있어요. 91 × 4에 꼭대기 단을 더하면 마야 태양년의 날수인 365가 돼요.

지금도 피라미드에 올라갈 수 있나요?

아니요. 기념물과 방문객을 보호하려고 2006년부터 엘 카스티요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어요.

정말 사람을 성스러운 세노테에 던졌나요?

인골과 봉헌물이 발견되었고 스페인 기록도 희생을 전해요. 하지만 모든 인골에 폭력의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는 아직 논쟁 중이에요.

톨텍이 치첸이트사를 정복했나요?

한때는 그것이 정설이었어요. 지금은 많은 고고학자가 툴라와의 유사성을 단순한 정복보다 교역, 공유된 종교, 엘리트 사이의 접촉, 어쩌면 양방향 영향의 결과로 봐요.

치첸이트사는 왜 쇠퇴했나요?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어요. 정치적 갈등, 교역로의 변화, 가뭄 등이 거론돼요. 지역 패권은 1100년 무렵 끝났지만 유적이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았어요.

구기는 어떤 경기였나요?

무거운 고무공을 주로 엉덩이로 치는 팀 경기예요. 운동이면서 태양의 움직임, 풍요, 희생과 연결된 의식이었어요.

지금도 마야 사람들이 있나요?

네. 멕시코, 과테말라와 이웃 나라에 수백만 명의 마야 사람이 살고, 치첸이트사 주변 마을에서는 유카텍 마야어를 써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Pre-Hispanic City of Chichen-Itza.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2. Zona Arqueológica de Chichén Itzá. Instituto Nacional de Antropología e Historia (INAH)
  3. Chichen Itza. Wikipedia
  4. El Castillo, Chichen Itza. Wikipedia
  5. Sacred Cenote. Wikipedia
  6. 치첸이차. 위키백과
  7. Mark Cartwright, Chichen Itza.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14
  8. Rodrigo Barquera et al., Ancient genomes reveal insights into ritual life at Chichén Itzá. Nature 630, 2024
  9. Michael D. Coe and Stephen Houston, The Maya (9th edition). Thames & Hudson, 201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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